狐の嫁入り

 

 

처음에는 미처 마르지 않은 이슬이 나뭇잎 위를 굴러 떨어진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정말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츠루마루 쿠니나가와 오오쿠리카라는 커다란 나무 아래로 황급히 몸을 피했다.

 

판단이 늦었던 터라 결국 몸의 이곳저곳이 좀 젖었다. 일찌감치 겉옷에 달린 모자를 눌러썼던 츠루마루가 오오쿠리카라보다는 조금 더 상황이 낫긴 했다. 츠루마루는 긴 소맷자락을 가볍게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여기에 비가 온다는 정보가 있었던가?”

“글쎄…….”

 

오오쿠리카라는 젖어서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다행히 올려다 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빗줄기가 더 굵어질 것 같지도 않았고 천둥이나 번개가 칠 것 같지도 않았다.

 

“기다리고 있으면 그칠 것 같군.”

“여우비구만. 그렇다면야 뭐.”

 

잠깐 쉬어가는 거라고 생각하자고. 츠루마루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들을 둘러싼 주변은 인적이 드문 숲이었다. 번듯한 길이 깔리지 않은 곳에서 괜히 서둘러 움직이다 젖은 바위라도 잘못 밟아 발목을 삔다면 이쪽만 손해였다. 오오쿠리카라 역시 무언으로 동의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뭇잎 끄트머리에서 떨어지는 은빛 빗줄기 사이, 원래의 색보다 더 진해진 초목은 순식간에 몇 배로 우거진 인상을 주었다.

 

오오쿠리카라가 그 모습에 깜빡 정신이 팔려있던 때였다. 옆에서 이상하게 조용했던 츠루마루가 은근슬쩍 바짝 몸을 붙여왔다. 품이 넉넉한 겉옷에 가려져 미처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실제로는 아주 깡마른 팔이 멋대로 오오쿠리카라의 팔꿈치 안 쪽을 파고들며 덩굴처럼 얽혀왔다.

 

"…이봐."

"추워서 그래, 추워서.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잖아?"

 

그렇게 말하자 매정하게 뿌리칠 수도 없었다. 힘이 실리다 우뚝 굳어버린 어깨에 천연덕스럽게 얼굴을 기대는 츠루마루를 오오쿠리카라는 잠깐만 참아주기로 했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도 빗소리에 묻혀 알아채지 못한 척 굴었다.

 

결국 한쪽 팔에 츠루마루를 매달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던 오오쿠리카라는 문득 눈을 깜빡였다. 저 편의 수풀이 문득 부스럭거렸다. 빗방울 때문에 나뭇잎이 흔들린 모양새와는 달랐다. 츠루마루도 고개를 들었다.

 

"뭐야? 적인가?"

"…살펴보지."

 

혹시라도 기습을 허용할 순 없었다. 둘은 언제라도 칼을 빼들 수 있게 자세를 낮추고, 발소리를 죽인 채 나무 아래를 벗어나 흔들리는 수풀 쪽으로 향했다. 촘촘한 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자 츠루마루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거기에 있었던 것은, 길을 따라 어디론가 걸어가는 행렬이었다.

 

"무슨 속셈이지."

 

오오쿠리카라는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아무래도 행렬을 이루는 인파가 적일 가능성은 낮았다. 그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색색의 여우 가면을 쓴 채였다. 그들처럼 허리춤에 칼을 매단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적이 아니라면 다행이라고 중얼거린 츠루마루는 이미 자신들을 지나쳐버린 선두 쪽을 바라보았다. 붉은 일산 아래, 아마도 신랑과 신부처럼 보이는 검고 하얀 한 쌍의 뒷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행사라도 열리는 건가, 싶은데."

 

가서 밥이라도 한 그릇 얻어먹을까. 경계가 한결 사라진 자리를 대신 메운 실없는 농담에 오오쿠리카라가 핀잔을 주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저쪽 역시 그들을 알아차렸는지, 사람들을 안내하던 시동 하나가 대열을 벗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하얀 여우가면을 쓴 시동은 밝은 대낮이었는데도 손에 등불을 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두 분은 비를 피하고 계신 중이십니까?"

 

초면의 상대를 향한 말이 정중했다. 딱히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었기에 츠루마루는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시동은 제 품에서 붉은 우산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이걸 사용하시지요. 하나 밖에 없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우린 괜찮아. 금방 그칠 것 같고."

"아닙니다. 제 주인께서,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니 지나가다 만나는 모든 인연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지시하셨습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주인이라는 자는 아무래도 선두 쪽에서 걷고 있던 한 쌍을 가리키는 모양이었다. 자신이라면 모르겠지만 오오쿠리카라에게는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에 츠루마루는 시동이 내민 우산을 받았다.

 

"쓸데없는 짓을…."

"거 참, 아까도 말했잖아. 감기 걸리면 안 된다니까."

 

혀를 차면서도 오오쿠리카라는 츠루마루 대신 우산을 들었다. 활짝 펼치자 두 사람 정도는 충분히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는 되었다. 비를 맞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아까보다 상황이 안락해졌다. 자연히 표정도 슬그머니 풀어진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시동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럼, 두 분 모두 조심해서 돌아가시길."

 

오오쿠리카라는 끝까지 공손함을 잃지 않은 시동이 다시 행렬 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혹시 여태까지의 공손함은 모두 연기였고, 우산 대신 무언가를 내놓으라며 억지를 부리지 않을까 싶었던 생각은 괜한 염려였다. 츠루마루 역시 비슷한 곳에 눈길을 두며 중얼거렸다.

 

“저기 말이야, 카라 도령.”

 

사람의 멀쩡한 이름을 멋대로 줄여 부르는 것도 모자라, 그 목소리가 특히 은근해질때면 어김없이 황당한 제안이 뒤따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한 번… 따라 가보지 않을래?"

 

그런 내용을 말할 때의 츠루마루는 언제나 들뜬 표정이 되었다. 오오쿠리카라는 마르다 만 하얀 뺨에 매달린 느슨한 웃음을 지그시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

 

“뭐 어때. 어차피 우리도 길을 따라 마을로 가야하긴 했잖아.“

 

행렬의 후미에 따라붙으며 츠루마루는 그렇게 소곤거렸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 같으면, 행렬을 빠져나와 다시 우리가 알고 있는 길을 찾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잘도 그렇게 되겠다며 오오쿠리카라가 핀잔을 주었지만, 츠루마루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자꾸만 두리번거리며 주위의 인파를 살피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여우가면까지 받아버렸다.

 

축하를 하러 오신 손님이시냐는 질문에 한 번 끄덕이기만 했던 것을, 또 다른 시동은 의심도 하지 않았다. 오오쿠리카라는 제 손에 들린 하얀 여우 가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미간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 되어도, 나는 모른다.”

“하하하, 무슨 일이야 있겠어?”

 

받자마자 가면을 착용한 츠루마루는 그렇게 웃었다. 하얀 손바닥에 들렸을 때는 그 얼굴보다 조금 커 보이던 모양이 실제로 착용하니 딱 맞았다. 오오쿠리카라는 하얀 얼굴을 가려버린 검은 여우 가면을 흘겨보고는, 자신 역시 가면을 썼다. 예상과 달리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츠루마루는 가면을 쓰고 나니 더욱 대담해졌다. 무작정 그림자만 따라 걷기는 심심했던 모양인지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의문을 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의문이란 하객들의 손에 들린 선물이었다. 주변의 하객들은 저마다 손에 근사한 꾸러미를, 혹은 얼핏 살피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물건을 들고 있었다. 오오쿠리카라의 만류를 듣지 못한 척, 츠루마루는 근처의 하객에게 우연을 가장하며 다가갔다.

 

빗줄기 사이로도 들고 계신 비녀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 것 같다. 그런 칭찬을 대충 넉살 좋게 건네자 금방 반응이 돌아왔다.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이것은 백날을 꼬박 걸어야 겨우 닿을 수 있는 동래의 옥가지를 다듬고, 태양이 가라앉는 바다의 산호로 장식한 것이지요.”

 

비범한 모양답게 얽힌 설명도 휘황찬란한 물건이었는데 하객이 그것을 들고 온 까닭은 오늘 혼례를 올리는 아기씨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누구도 밟지 않은 눈을 꼬아 만든 모양처럼 탐스러운 백발에 틀림없이 어울리고도 남을 것이라고 벌써부터 기뻐하는 모습에는 잃게 될 물건에 대한 아쉬움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급히 오느라 어울리는 포장을 하지 못한 게 결례로 비춰질까 걱정스럽다는 말은 과한 겸손처럼 느껴질 정도였는데 그 말이 정말로 단순한 겉치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느 숲 한복판에서 행렬이 멈춘 다음의 일이었다.


문득 평탄한 길이 끝났다. 이 부분만 벌목을 한 것처럼 드러난 들판 위에 주연을 위한 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홍옥을 빻아 만든 염료를 사용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선명한 색의 붉은 비단, 그리고 그 한복판을 금실로 수놓아 바람에 나부끼는 벚꽃을 표현한 찬란한 모양새엔 오랜 세월 동안 산전수전을 겪어온 츠루마루 쿠니나가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비를 막거나 그늘막을 만들기 위해 귀퉁이에 세워둔 일산 또한 그 크기와 모양이 범상치 않았다. 귀한 누각의 지붕을 그대로 뜯어온 것만 같았다. 선두를 이루던 시동은 펼쳐놓은 비단의 경계를 따라 좌우로 흩어지고, 후열은 멈춰선 사이, 한 쌍의 주연은 시동의 안내에 따라 비단 위를 가로질렀다.

 

하객을 위한 안내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싶었던 사뿐한 걸음이 상석에 닿고 난 다음에야 이어졌다.

 

“행렬에 함께 해주신 여러분, 모두 앉아주시지요.”

 

츠루마루와 오오쿠리카라에게는 제법 멀리 떨어진 거리였는데도, 신부의 간드러지는 목소리는 바로 지척에서 나온 것처럼 들렸다. 앉으라는 말에 바닥을 내려다보니 그곳에는 언제 깔아두었는지 모를 방석도 있었다.

 

허. 츠루마루 입에서 웃음 반, 감탄 반이 섞인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주변은 전혀 놀라지 않고 으레 있었던 일처럼,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들 역시 거기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체중을 받친 방석 안에는 어떤 솜을 넣었는지 그 푹신함이 두고두고 사용하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났다.

 

“하나 가져갈까.”

“쉿, 조용히 해라.”

 

다시 한 번 신부의 인사가 이어졌다.

 

“바쁘신 와중에도 저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해주신 여러분의 호의를, 저는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하객 또한 박수로 화답했다. 츠루마루도 손뼉을 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입맛을 다시며 불평했다. 호의를 기억하는 것도 좋긴 좋은데, 저런 건 역시 술이라도 한 잔 돌리며 말해줘야 더 인상 깊지 않겠느냐는 말을 기어코 중얼거리던 때였다.

 

신부가 박수를 치자, 그것을 신호로 시동들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등이나 꽃이 아니라, 병이나 잔을 들고 하객에게 다가와 감사의 말을 꺼내며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오오쿠리카라와 츠루마루 역시 잔을 받았다.

 

손바닥만한 잔 하나를 가득 채운 투명한 빛깔의 술은 향기부터 독특했다. 그냥 내버리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결국 고민하다 맛이나 보자는 심정으로 한 모금을 삼킨 오오쿠리카라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음.”

“허어, 이거 걸작인걸.”

 

오오쿠리카라의 목울대가 저절로 꿈틀거렸다. 츠루마루 역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저마다 한 잔씩 술을 맛본 하객들의 감탄에 분위기가 슬그머니 달아오르는 사이, 또 언제 준비했던 것인지 악기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그치지 않은 빗소리 사이로, 선명한 비파의 음색이 파고들었다. 오오쿠리카라와 츠루마루는 시동의 작은 손이 경쾌히 현을 뜯는 모습을 눈만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한 쌍과, 맛있는 술에, 듣기 좋은 음악까지. 경사에 어울리는 축연이 아닐 수 없었다. 가락에 박자를 맞추듯 주변에서 은근히 새어나오던 웃음소리가 점차 커지며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인파 속 하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런 경사를 직접 축하 할 수 있어 기쁘다는 이야기와, 한 쌍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에 대한 감탄을 늘어놓다가 은근슬쩍 준비한 선물을 꺼내들었다.

 

“저의 마음입니다. 부디 받아주시지요.”

“감사합니다. 그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선물 행렬이 이어졌다. 선물을 건네기 위해 마치 줄을 서려는 것처럼 앞다투어 눈치를 보거나 움직이기까지 하는 인파 속에서 오오쿠리카라와 츠루마루는 술잔을 쥐고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빈손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그들뿐인 듯 했다.

 

오오쿠리카라는 문득 자신의 뒷목을 부여잡는 불안감을 무시하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 와중에도 인사와 선물은 계속 이어지고, 한 쌍의 앞에는 그렇게 모인 금은보화가 작은 산더미를 이루었다.

 

아까 츠루마루가 보고 감탄했던 비녀 또한 어느새 신부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화려한 산호장식이 훨씬 더 돋보였다. 그것을 바라본 하객들이 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저러다 혀가 닳아 없어지겠거니, 싶을 염려가 들 정도로 반복되던 칭찬을 심드렁하게 흘러 넘기던 츠루마루는 한 박자 늦게 주위가 조용해졌음을 깨달았다. 살며시 들려오는 건 비파소리 뿐이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고 싶던 마음이 들기도 할 때였다. 이제야 일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한시름 놓았던 안도 사이로, 신부의 재촉이 묘한 정적을 깨뜨렸다.

 

“자아, 거기의 두 분.”

 

가면 너머의 눈이 마주쳤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우연만으로는 그럴 수 없었다. 웃는 것처럼 기울어진 여우가면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게슴츠레해 보였다.

 

“두 분도, 저희를 축하해주시지요.”

 

축하, 라는 단어에 힘이 실렸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오오쿠리카라와 츠루마루는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맨 입으로만 축하합니다, 하고 물러날 만한 자리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충동적으로 행렬에 합류하게 되었으니 준비한 선물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난처함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머뭇거리고 있는 둘을 향해 게슴츠레한 짐승의 눈동자가 모였다. 신부는 가면 너머로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 자아, 어서요.

 

“오늘은 여기 계신 모두가 즐거이 웃어야 하는 날, 저희의 행복을 기원한 분이라면 그래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도리는 잊지 않겠다. 복은 복으로 갚겠다며 살랑거리는 목소리가 아직까지는 쾌활했다. 그것이 언제라도 돌변할 수 있음을 둘은 잘 알고 있었다. 츠루마루가 팔꿈치로 오오쿠리카라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이거, 뭐라도 내놓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인걸. 도령, 혹시 챙겨놓은 것 좀 없나?”

 

있을 리가 없었다. 오오쿠리카라는 겉옷에 달린 주머니를 황급히 뒤져보았지만 거기에서 나온 것은 자그마한 도토리 서너 개 뿐이었다.

 

“대체 이런 건 왜 가지고 다니는 거야?”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 상황에서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서로 어이없는 시선만 주고받는 사이, 신부의 재촉이 다시 한 번 이어졌다.

 

“혹시 두 분은, 저희를 축하해주시지, 않겠다는 건가요.”

 

새빨간 연지를 빈틈없이 바른 입술은 짧은 문장을 굳이 끊어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음산하게 들렸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연주가 멈추고, 침묵이 감돌았다. 감히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숨을 죽이는 사이, 서로가 서로에게 긴장을 옮기는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오오쿠리카라 역시 무심코 마른 침을 삼켰을 때였다.

 

츠루마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중은 물론, 바로 옆에 있었던 오오쿠리카라에게도 어떤 신호 없이 움직인 것이었다. 한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킨 츠루마루는 활짝 양 팔을 펼쳤다가, 오른쪽만 팔꿈치를 접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 동작이 미래의 인사법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건 오오쿠리카라 하나뿐이었지만, 상세한 내막을 모르는 주연의 눈에도 일단 거기에 깃든 정중함은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금방이라도 잔치를 뒤집어 놓을 것 같던 기세가 살짝 누그러든 느낌을 피부로 알 수 있었다.

 

“먼저, 경사를 축하드립니다. 두 분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천생연분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구나, 하고 알게 되었지 뭡니까. 장수하며 짝에 대한 사랑과 정절을 지키는 학처럼, 두 분의 사랑 역시 오래도록 변함없길 빕니다.”

 

언제 봐도 혀가 잘 돌아간다 싶었다. 아마 잠깐 사이에 생각한 말이 분명할 텐데 그것을 어떻게 저렇게 길게 뽑아낼 수 있는지. 오오쿠리카라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경색되었던 분위기에 약간의 숨통이 트이고 주변에도 조금씩 웃음 비슷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신부 역시 가면 위로 손을 뻗어 입가를 가리는 시늉을 했다. 축사를 기쁘게 들었다는 의미였다. 흡족한 듯 보이는 기색에 안심하려는 찰나, 하얀 모자 안의 얼굴이 살짝 기울어졌다.

 

“그럼 축하의 증거로는,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요?”

 

끙. 오오쿠리카라는 무심코 신음을 뱉을 뻔했다. 역시 맨 입으로는 넘어가주지 않겠다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내어줄 게 없다. 차라리 솔직하게 상황을 털어놓고 주연의 아량을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괜히 분위기를 띄워서 무엇을 해보려는 작정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아까부터 줄곧 허리에 차고 계셨던 그 칼을 주시려는 걸까요?”

 

노골적이었다. 스스로 움직일 리 없는 가면의 눈이 게슴츠레 찢어진 것처럼 보였다. 오오쿠리카라는 무심코 주먹을 쥐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칼집으로 손을 뻗을 것 같아서였다. 허리춤의 칼은 그들의 본체로, 애초에 남에게 넘기고 말고 할 물건이 아니었지만, 그런 것을 이해해 줄 것 같진 않았다.

 

“하하하, 경사스러운 날에 피를 연상시키는 물건을 바쳐서야 되겠습니까.”

 

하지만 츠루마루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거기서는 어떤 초조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오오쿠리카라도 슬슬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이 되어갈 즈음이었다.

 

“대신, 길이길이 기억에 남을만한 장관을 보여드리지요.”

“자신만만하시군요. 저희가 지금까지 세상의 끝을 넘나들며 보아온 풍경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있고말고요. 제가 보여 드릴 것은….”

 

용의 춤입니다.

 

쭉 신부를 향하며 능청스러운 말을 쏟아내던 츠루마루가 오오쿠리카라를 돌아보았다. 검은 여우가면 안쪽에 두둥실 떠올라 있을 한 쌍의 눈동자가 어떤 이채를 품고 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오오쿠리카라는 츠루마루에게만 들릴 정도로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두고 보지.”

“하핫, 나중은 나중이고, 지금은 지금이니까. 일단은 부탁한다고, 도령.”

 

아마도 츠루마루는 응원과 동시에 자신의 한 쪽 눈을 접었을 것이다. 가면 때문에 보이지도 않는데. 오오쿠리카라는 츠루마루를 빤히 바라보다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를 막아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 깔린 붉은 비단에도 구둣발로 성큼 올라설 수 있었다.

 

숱한 재물을 앞에 두고 집요하게 선물을 요구했던 신부는 일단은 무엇을 어쩌려나, 하고 지켜보려는 모양이었다. 기울인 턱을 한 쪽 손으로 괴고 있다.

 

그 앞에서 오오쿠리카라는 천천히 칼을 빼들었다. 철컥, 하고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유달리 크게 들렸다. 빗줄기 사이로 드러난 금속의 형태를 바라보던 신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고치고, 그것도 모자라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작은 탄성을 뱉어냈다.

 

“그것은… 정말로 용이군요.”

“…….”

 

오오쿠리카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칼날을 움직였다. 빛을 받는 각도가 바뀌며 칼날에 숨어있던 하몬 또한 바깥으로 드러났다. 악기를 쥐고 있던 시동들 또한 한 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하기 바빴다.

 

“하하하, 어찌 거짓을 말씀드리겠습니까. 그럼, 춤사위를 보여드리도록 할까요?”

 

대신 웃은 쪽은 츠루마루였다. 가볍게 손뼉을 치는 것을 신호로, 오오쿠리카라는 오른팔을 움직였다. 칼날이 천천히 허공으로 뻗었다. 마치 태양을 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하늘로 향하는 칼끝을 따라 모두 고개를 들었다.

 

“하압!”

 

그것이 정점을 찍었을 때, 오오쿠리카라는 우렁찬 기합을 내뱉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칼날을 따라 빛이 번뜩거렸다. 그 모양은 번개 한 자락을 문 짐승의 송곳니 같이 보이기도 했다. 바람소리가 한 박자 늦게, 신출귀몰한 동작을 뒤따라갔다.

 

순식간에 가로로 베고, 앞을 찌르고, 혹은 빙그르르 돌았다가 다시 칼날을 위로 올려치는 모습은 마치 보이지 않는 적을 난도질하는 듯 했다. 힘이 실린 동작 하나하나가 빨랐고, 격렬했고, 무자비했다. 찬란하나 다음 각도를 예측할 수 없는 빛의 궤적 속에서 모두가 숨을 죽일 때, 츠루마루 쿠니나가만이 한가로운 기분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춤사위의 마지막은 한 쪽 무릎을 꿇는 것과 동시에, 칼끝을 지면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기합과 함께, 위에서 내리꽂힌 칼날은 아슬아슬한 높이에서 멈춰 섰다. 비단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힘을 잘못 주었더라면 틀림없이 찢어졌을 것이었다.

 

걷어 올린 소맷자락 바깥으로 드러난 오오쿠리카라의 팔뚝엔 잔뜩 힘줄이 불거져 있었다. 칼을 빠르게 휘두르면서도, 마지막까지 절도 있는 동작을 위해 힘을 주었다는 것을 그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는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흘렀다. 거기에서 가장 먼저 갈채를 보낸 건 츠루마루였다. 짝, 짝, 짝. 그다지 크지도 않았던 손뼉 소리였지만 옆에서 친 천둥을 들은 듯 모두가 화들짝 놀라더니 한 박자 늦게 손을 움직였다. 그런 박수가 하나, 둘씩 모이자 갑자기 강한 소나기가 내리는 것 같은 소리가 되었다.

 

신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얀 소매가 꿇어앉은 무릎 위에서 어지럽게 흔들렸다. 손목이 드러날 정도로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훌륭합니다. 정말 장관이군요.”

 

아름다운 칼과 늠름한 춤. 그야말로 용의 춤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그런 칭찬을 잇다 못해 가면이 벗겨질 기세였다. 오오쿠리카라는 그 말을 듣다가 가만히 꿇었던 무릎을 폈다. 신부도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

“아직까지도 칼날의 단면이 잔상처럼 남는군요. 당신이 가진 것은 필히 세상에 단 한 자루밖에 없는 보검이겠지요. 그렇다면, 그 쪽의 귀인께서도 틀림없이 그에 못지않은 검을 가지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모호하게 흐린 말끝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 말에 대한 대꾸는, 지목된 츠루마루가 아니라 오오쿠리카라가 했다. 칼집에 칼을 집어넣다 말고 잠깐 멈춰 선 채로 중얼거렸다.

 

“…이 한 자루로도, 부족한가.”

 

거꾸로 선 용이, 반짝 빛을 냈다. 무게가 실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조금 새침하게 느껴지는 말에 실린 의중은 분명했다. 어련히 만족해라. 저것은 보여줄 수 없다. 신부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잔치를 빛내준 손님을 더 난처하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충분했습니다. 그것은 다음의 즐거움으로 미루기로 하지요.”

 

과연 다음이라는 게 있을까. 둘은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부는 손뼉을 쳤다. 시동이 천천히 둘을 향해 다가왔다. 약소하나마 답례를 드리고 싶다며 내민 것은 문합이었다. 크기가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 작았지만 몸체는 물론이고 둥글게 깎아낸 모서리에까지 화려한 구름이 빠짐없이 새겨져 있었다.

 

“청동을 깎아낸 곳에 은을 입혀 색을 표현했답니다.”

 

한 쪽은 학의 습성을 들려주고, 한 쪽은 용의 춤을 보여주었으니 숱한 무늬 중 일부러 구름을 골라보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감사할 데가. 츠루마루는 탄복하며 선물을 받아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구름의 정교함이 빛났다.

 

“저희의 인연을 상징하는 물건이니, 부디 소중히 여겨주십시오.”

“암, 물론이고말고.”

 

자연스러운 대화를 듣던 오오쿠리카라는 문득 깨달았다. 비가 그치고 있었다. 이제 움직이기에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츠루마루 또한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이제 가봐야겠네. 일이 있어서….”

“아쉽군요.”

 

그렇게 말했지만 더 붙잡지는 않았다. 이쪽이 사용한 가면과 우산도 기념으로 가져가라는 권유까지 했다.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고맙네.”

“조심히 가십시오.”

 

오오쿠리카라는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리고는 츠루마루의 손목을 붙잡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무리를 뒤로하며 나아간 길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번듯한 길이 아니라 거치적거리는 돌부리와 나무뿌리가 가득한 어지러운 길이었다. 그것을 잘도 헤치고 나아가며 오오쿠리카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따라오는 기척이 있나?”

“아니.”

 

츠루마루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들었던 자리는 수풀 사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당분간은 쉽게 그 가락을 잊지 못할 것 같다며 오오쿠리카라는 작게 투덜거렸다.

 

“쓸데없는 고생을 했군.”

“하핫, 색다른 느낌의 소풍이었지?”

“…소풍은 무슨, 그것보다 그거.”

 

오오쿠리카라는 츠루마루의 손에 들린 문합을 가리켰다. 어디 적당한 곳에 치워놓고 오라는 말에 츠루마루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가져갈 생각이었는데.”

“뭐?”

“하하, 이런 걸 좋아할 만한 사람이 있잖아. 우리에게 기념이 될 것 같기도 하고.”

“…고생은 내가 했다만.”

“그런 걸 추억이라고 부르는 거야, 도령.”

“아는 척은.”

 

오오쿠리카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츠루마루를 진지하게 뜯어 말리기에는 상황과 장소가 좋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자신은 모른다며, 혹시 모를 후환이 생긴다면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에도 하얀 얼굴이 활짝 피어낸 웃음은 믿는 구석이 있는지 태평하기만 했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오오쿠리카라는 오랜만에 근시를 맡았다. 여차할 때 주인을 가장 먼저 보좌해야하는 최측근의 자리였지만, 일을 실제로 돕기보다는 하루 종일 그와 함께 있으며 이리저리 쌓인 사담을 주고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오오쿠리카라도 마찬가지였다. 주인이 일을 하다 말고 먼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아, 요즘에 꿈자리가 좀 사나워.”

 

오오쿠리카라는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눈에 비친 주인의 얼굴은 확실히 평소에 비해 초췌해보였다. 아까부터 손이 자주 향하던 눈가가 거뭇했다.

 

“꿈?”

“응. 자꾸 여우가 짖는 꿈을 꿔. 꼬리가 아주 많은 하얀 여우가 나타나서 짖는데. 뭔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지만,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하암.”

 

여우, 라는 단어에서 무언가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오오쿠리카라는 슬쩍 시선을 옮겼다. 츠루마루가 받아온 문합은 주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갑작스러운 선물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든 물건은 지금도 주인의 공간 속, 가까운 책상 위에서 제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청동의 표면에 새겨진 은빛 구름은 창가의 빛을 받아 막 비가 갰을 때의 하늘처럼 보였다.

 

그것을 바라보며 오오쿠리카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중얼거렸다.

 

“별난 일도 다 있군.”

“그렇지?”

 

오늘 밤에는 정말 오오덴타 미츠요라도 불러야겠다는 주인의 푸념에 오오쿠리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는 대꾸까지 해가며, 그로서는 드물게도 오랜 시간 동안, 아주 성실하게 어울려주었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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