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고전 소설 『오페라의 유령』 을 각색한 글입니다. 이런 요소가 싫으시다면 뒤로가기를 눌러주시고 아니시라면 즐겨 주세요!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한 백발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우산을 쥔 그의 오른손에는 세월의 흔적이 잘게 녹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퐁셰 경."


"아, 샤니 자작님도 오실 줄은 몰랐군요. 하긴, 데뷔작의 첫 상연을 후원하셨던 분이니 옛정이 있으셨나. 자, 한 시대를 빛낸 프리마돈나를 위해 기도합시다."


 잠깐의 묵념의 시간이 지나고, 샤니 자작이라 불린 노신사는 꽃을 바친 후로도, 한참이나 가만히 비석을 바라보았다.


"음악의 천사, 라…."


"왜 그러시나요? …그 왜, 많이들 말하잖습니까. 그녀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건, 음악의 천사가 날개로 품어줘서라고."


"하하, 그렇죠. 저도 그녀의 데뷔 때부터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전 알고 있어요…. 그녀가 만난 건 음악의 천사가 아닙니다. 설령 그런 초월적인 존재가 맞더라도…천사라기보다는, 차라리 악마에 가까울 겁니다…."




"네? 오디션이요? 하지만 전…."


"에스텔, 자네가 감독 일과 극본 작업을 배우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는 어릴 적에 무대에 서 본 경험도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 정해지지 않으면, 제대로 된 연습도 진행되지 못해. 참가만이라도…부탁하네."


 저렇게 간곡하게 부탁하시니…어쩔 수 없나. 그래, 설마 붙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오디션장으로 향한 에스텔은, 며칠 후 여주인공 대본을 받고서 기함했다. 하지만 이렇게 됐다는 건 더 무를 구석도 없다는 뜻이 아닐까. 그래, 사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정말로 바라던 길이었잖아. 에스텔은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연습에 임했다. 어두운 분장실 속 시간은 흘러가고…에스텔이 잠시 숨을 돌릴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부끄럽네. 다 들었겠다. 이 시간에 누구지? 귀신은 아니겠지? 그리 생각하며 에스텔은 화장대를 짚으며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신가요?"


"연습, 도와드려도 될까요."


"아, 네. 들어오세요."


 진짜 귀신이어도, 날 해할 생각은 없는 것 같고. 뭐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에스텔은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서 비치는 수은등 빛에 화려한 남주인공의 의상이 어슴푸레 윤곽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왠지 다른 사람인 것 같은데…. 에스텔은 조금 눈을 가늘게 뜨며 방문객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누구죠? 남주인공의 더블 캐스팅에 대한 건 들은 바가 없는데요."


"당신의 목소리를 좋아하는 사람."


 뭐 이딴 대답이 다 있담. 괜히 열어줬나. 에스텔은 문고리를 꾹 쥐며 문 뒤로 몸을 숨겼다.


"뭐, 나쁜 목소리는 아니니 그럴 수야 있겠지만…전 당신의 신상을 알고 싶은 거예요."


"후후, 당신은 벌써부터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시는군요. 당신을 해치려 온 게 아니니 지금은 그냥 즐겨 줘요."


 에스텔이 무어라 반박도 하기 전에, 수수께끼의 방문객은 중반의 듀엣곡의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스텔은 이내 말을 잃었다. 이런…미성이 있을 수가 있나? 에스텔은 홀린 듯 가만히 입만 벌리다 본능적으로 제 파트에 맞춰 목소리를 얹었다. 연습한 대로 부르긴 했지만 그 또한 본능적으로 겨우 해낸 것. 에스텔은 듀엣을 부르는 그 시간동안 제대로 무언가를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홀린 듯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시간이었다. 그 여운은 듀엣이 끝나고도 이어져 에스텔은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숨을 골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그래.


"음…흠흠, 알고 오셨겠지만, 저는 이번 《악마의 신부》의 여주인공 역을 맡은 에스텔입니다만,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시겠어요? 당신, 정말…엄청난 인재네요. 이런 목소리는 정말이지 처음 듣는데…."


"이름, 은…이라, 입니다. 후후, 저는 당신의 목소리가 그런데 말이죠…. 즐거우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오늘은 이쯤할까요. 짧지만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어요. 그럼, 다음에 또 뵙죠."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은 듯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수수께끼의 방문객은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에스텔은 생각했다. 그의 배역을 알아내고 친해져서, 훗날 그를 직접 캐스팅하여…엄청난 극을 만들겠다고. 음색도 실력도 엄청나고, 심지어 노래에 카리스마마저 있다. 이런 인재를 놓칠 순 없지.


 날이 밝자 에스텔은 베테랑 수색단원처럼 조용히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헤멨지만, 그와 같은 음색을 가진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내 에스텔은 그 목소리의 주인은 주연은커녕 조연에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럼 대체 그 사람은 왜 내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했을까? 그것도 그런 실력자가…. 이제는 일과가 되어버린 어둠 속 연습 시간, 노크 소리에 에스텔은 목소리를 죽였다.


"문, 열어 줘요."


 오늘 아침부터 애타게 찾던 익숙한 음색에 에스텔은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어, 어제 불렀던 그 곡 A부분을 부르시면 열어 드릴게요."


"나를 목소리로 확인하려 한다…후후, 좋은 생각이군요. 역시 당신은 조심성이 많네요."


 그 후로 말 대신 노랫소리가 이어졌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이 음색…그가 맞구나. 에스텔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정말로 또 오셨네요? 오늘도 같이 연습…하러?"


"그럼요. 어제는 매우 즐거웠답니다."


"저, 저도 그렇지만…연습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조금 긴장한 듯한, 그러면서도 무언가 의지를 품은 에스텔의 목소리에 이라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묻고 싶은 것이라면?"


"오늘 배우님들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당신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어요. 그게 조금 신경이 쓰여서…."


"그야, 전 배우가 아니니까요."


 오늘 날씨를 논하는 것마냥 평온한 어조에 실린 내용에 에스텔은 놀라서 숨을 삼켰다. 당연히 배우일 거라 생각했는데. 은퇴…했다기엔 젊은 사람 같고, 숫기가 없는 건가? 하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에스텔이 이런저런 가능성을 떠올리던 와중 이라는 노래하듯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의 목소리를 정말 좋아하지만…사실 스스로가 아쉬워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요?"


 감정. 겹쳐진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퍼졌다. 왠지 부끄러운 부분을 들춰진 듯해 에스텔은 멋쩍게 웃었다.


"하긴, 당신 정도의 실력자면…금방 들통나버리는 걸까요. 테크닉은 어릴 때 노력해서 들어줄 만은 하게 됐지만…단순한 연기가 아닌 노래에 감정을 싣는 일은 정말 어렵더라고요. 저번에 놀란 건, 그 이유도 있었어요. 정말, 들으면서 남주인공과 동화돼 가슴이 벅찰 정도로…. 하하, 당신이 주연이었다면 더 즐겁게 할 수 있었을까요."


 예전에도…항상 그 부분을 지적받았었지. 하지만 감도 잡히지 않아 도망치듯 연출 공부를 하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재능이 없는 건가 생각을 했었는데. 역시 티가 나는구나.


"그렇다면, 조금 알려드려도 괜찮을까요?"


"정말요? 저야 영광이죠! 이라 씨 같은 실력자에게…. 아, 근데 저 아직 돈이 충분하지 않은데…닷새 후에 들어오니까…얼마면 괜찮을까요! 염치없지만…할부는 되나요? 아무래도 제 생활비도 있다 보니…."


"음? 돈은 필요 없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더군다나 당신 같은 사람이…."


"돈 같은 건 크게 필요 없기도 하고, 그저…이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열심히 연습하는 에스텔 씨라면 더 빛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부담은 가지지 말아요. 전 처음부터 당신과…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찾아왔는걸요."


 그 말에 에스텔은 어둠 속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당신은 정말…마음이 넓으시네요. 거기다 실력까지 갖췄으니 마음만 먹으면 배우가 될 수 있을 텐데…."


"자, 이제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할까요."


 에스텔은 순간 눈썹을 들어올렸다. 왠지…의도적으로 흐름을 돌리는 것 같은데. 순간 그녀는 어젯밤 이라가 자신에게 말했던 벌써부터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는 말을 떠올렸다. 왜…. 어제 불렀던 그 곡을 또다시 부르자 권하는 이라의 말에 에스텔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지금은 연습에 집중해야지.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에스텔은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대체 누굴까? 연습은 평범하게 끝났지만, 여전히 그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상연 준비는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1막 연습이 끝나고 쉬고 있는 에스텔에게 한 조명 담당이 다가왔다.


"아까 무대 잘 봤어요. 쉬는 김에 이 극장에 관한 괴담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괴담이요? 좋아요!"


"그렇게 해맑게…. 단순한 괴담이 아니에요."


 조금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이 극장에는 '오페라의 유령'이라 불리는 미지의 존재가 있다는 소문이 돈다고. 밤마다 극장과 분장실, 소품실을 배회하거나, 종종 7번 박스석에서 극을 관람한다는 그 유령은 캐스팅이나 아리아 작곡에도 관여한 전적이 있으며, 그 입김을 무시하고 진행하자 샹들리에를 떨어트리며 위협을 가했고…이번 극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거기에 종종 밤에 실력이 엄청난 남자 노랫소리가 들려오는데 그게 그 유령의 것이라는 말도 있고, 소문이 다양하단다. 실력이 엄청난 남자…그렇다면 매일 밤 분장실로 찾아오던 그 사람이 그 '유령'일까? 하지만 공연은 코앞이다. 거기에 대해 묻는대도 어떤 답변을 듣든 맘이 어수선해져 공연을 망칠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친 에스텔은 우선은 연습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덕분이었을까,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에스텔은 이 극의 후원자가 본인 저택에서 피로연으로 작게나마 가면무도회를 개최하니 참여해달라는 초대장을 받고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딱히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에스텔은 구석에서 와인만 홀짝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어디선가 제 이름이 들려와 에스텔은 귀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번 주연, 이번에도 그 유령이 뽑으라고 지시 내린 거 아닐까? 생각해 봐, 아역 경력이 있다 해도 아주 작은 무대인 것 같고, 완전 신인이 단순히 실력만으로 꽤나 오랫동안 공석이던 여주인공 자리를 꿰찼다니, 좀 켕기는 데가 있잖아. 아니면…."


"쉿, 애 듣겠다."


 뒷말은 뻔하겠지. 웃기는 인간들이라니까. 에스텔은 픽 웃으며 괜시리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그 때 누군가 에스텔에게 다가왔다.


"아름다운 아가씨, 거기서 홀로 무얼 하고 있나요?"


"얼굴도 가려졌는데 아름다움을 판별할 수 있나요?"


"…하하, 당신 말이 맞네요. 하지만…홀로 적적하시다면 말상대라도 되어주시겠어요? 저도 좀 적적하네요."


"뭐, 원하신다면야…."


 에스텔의 대답에 남성은 미소를 지으며 에스텔의 옆에 앉았다.


"《악마의 신부》, 잘 봤습니다. 당신의 아리아, 인상적이었어요."


"…! 절 어떻게 알아보셨나요?"


"그야, 이렇게 희게 빛나는 머리칼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별로 없으니까요. 당신 특유의 분위기도 있고."


"그럼, 제 이름도 알고 계시겠네요. 당신의 이름도 알려 주세요. 당신만 제 이름을 알고 있는 건 좀 불공평하잖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다른 때 같으면 흔쾌히 알려드리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서로를 숨기는 가면 무도회니까요.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 테니 그 때 알려드리도록 하죠. 죄송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 후로는 평범한 대화가 이어졌다. 회장의 분위기나 메뉴들, 오가는 사람들, 음악, 저번 공연에 대한 짤막한 감상들. 그렇게 시간은 훌쩍 흘러 연회도 끝나버렸다. 왠지 음색도 비슷하고…혹시 '그'일까? 내일도 오겠지. 그리고 다음 공연은…사흘 남았구나. 에스텔은 분장실을 느긋한 손길로 정리하고 제일 작은 불꽃만 남겨둔 채 나머지 촛불을 껐다. 좋아, 카덴차라도 연습해 볼까. 제 몫의 아리아를 완곡한 에스텔이 약간의 고양감에 젖어 숨을 내쉴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예요. 문, 열어 줄래요?"


 익숙한 목소리에 에스텔은 엷게 미소지으며 한달음에 문으로 달려갔다.


"아, 이라 씨죠? …들어와요."


"어제 공연 지켜봤어요. …정말 훌륭했어요, 에스텔 씨. 아, 그리고 방금 카덴차도."


"진짜요? 잘됐다…! 이라 씨에게 인정받았으니, 그래도 못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괜찮으시다면, 어느 부분이 어떻게 마음에 드셨는지도 여쭤봐도 될까요? 연습에 참고하게요."


"모두 흠 잡을 곳 없이 훌륭했지만…. 굳이 고르자면 결국에는 지하 세계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체감한 펠리샤가 헛웃음지으며 체념하는 마지막 곡이 제일 인상 깊었네요."


"체념…하하, 그렇네요."


 에스텔은 무언가 생각하듯 눈을 살짝 감다 정적을 밀어내듯 입을 열었다.


"이라 씨한테는 왠지 얘기하고 싶었는데…전 사실 감독 일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이번 펠리샤 역도 감독님이 제 아역 경력을 아시고 오디션을 제안하셨다 얻어걸린 거고요. 감독 일을 왜 준비했냐면…물론 거기 매력을 느낀 것도 있지만, 소질이 없다 생각했거든요. 노래에.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은 세상에 너무나 많다고. 그래서, 그 체념 또한 자연스러웠던 거겠죠. …그러니 이라 씨, 말해 줄래요?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라고."


 에스텔의 목소리에 눈물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이라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에스텔의 눈물을 살짝 닦아냈다. 이내 그는 비통한 목소리로 에스텔에게 말을 걸었다.


"에스텔. 당신은…꿈을 꾸는 게 아니에요."


"그리 말하시면…진짜 잘난 것 같잖아요."


"같은 게 아니라 맞는 겁니다. …정말이지 당신은…. 날 화나게 하지 말아요. 제가 대단하다 말한 건 당신이잖아요. 그런 제가 인정한 당신을…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이라는 에스텔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위로를 받다니 정말 웃긴 일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품은 왠지 편안해…에스텔은 꽤 오랫동안 그 품에서 눈물을 흘렸다.


"진짜로…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번에 무도회에서 모르는 사람인 척 말 걸어 주신 것도 감사해요. 적적하긴 했거든요."


"…무도회…?"


"그 왜, 후원자님 주최로요. 아니에요? 목소리가 지금이랑 살짝 다르긴 했지만, 기본 음색은 같고 높낮이만 좀 다른 것 같아서…. 높낮이 정도야 맘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에스텔은 장난기섞인 목소리로 괜히 톤을 낮춰 보았지만, 이라는 대답이 없었다.


"아닌가요? 그럼 누구지? 이라 씨 말고는 딱히 말 걸 사람도 없을 텐데."


"…시간이 늦었으니 슬슬 들어가 봐요. 아직 완벽히 막을 내린 것도 아니고, 당분간은 공연 일정이 있잖아요? 컨디션 관리도 중요하니까요. 연습은,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


"그렇죠. …아무튼, 오늘은 정말 감사했어요. 말씀대로 오늘은 먼저 가 볼게요. 그럼, 또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에스텔은 분장실을 나섰다. 하지만 어째 석연찮은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둘이 동일인물이 아니면 무도회에서의 그 남자는 누구지? 모르겠다. 우선 내일 공연부터 제대로 끝내야지. 그렇게 의문을 뒤로한 채 며칠간 연이은 공연을 끝내고 분장실로 향하는 에스텔의 이름을 누군가 불렀다.


"아, 에스텔 씨군요."


"누구…아, 설마 가면무도회에서…!"


"후후,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이네요. 얼굴은 오늘이 처음이실 텐데, 어떻게 알아채신 거죠?"


 에스텔은 픽 웃다 대답 대신 제 귓가에서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목소리로 절 기억하고 계신 건가요?"


"네. 체격도 비슷하고. …이제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시겠어요? 다시 만날 때에는 알려주신다면서요."


 에스텔의 그 말에 남성은 기쁨을 가감없이 얼굴에 드러냈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저는 라울 드 샤니입니다. 다시 한 번, 반가워요."


 이내 그는 에스텔에게 악수를 청했고, 에스텔은 한동안 놀란 얼굴로 멍하니 라울을 바라보다 겨우 악수를 나누고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결례를 범했네요. 샤니 자작님을 직접 뵈어 영광입니다. 자작님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아예 상연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에스텔은 엷은 웃음을 띄며 말을 건넸지만 후원자에게 잘 보여야 이 극이 앞으로도 막을 올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은 이미 가시방석이었다. 분명 대화는 이어졌으나, 에스텔은 제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무언지도 모른 채 라울과 보폭을 맞춰 걷다 분장실 앞에 도착했다.


"안에서 얘기할까요?"


"여기는 극에 관련된 공간이니…사적인 공간과의 경계를 흐리고 싶지 않네요. 혹시 더 하실 말씀 있으시면 근처에서 얘기해요."


"아, 아닙니다."


"그럼 내일도 공연이 있으니, 저는 이만 연습하러 가 보겠습니다. 즐거웠어요."


 에스텔은 라울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분장실로 들어갔다. 저번 공연 때 미처 정리하지 못한 악보와 대본을 정리하자 긴장된 마음도 차분히 갈무리되었다. 에스텔은 문득 '그'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첫 번째 가능성, 둘은 동일인물이다. 배우로 설 수 없는 이유가 귀족이어서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일단 말 할 때의 목소리가 다르니 둘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라는 두 번째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자작님 노래도 들어 보면 확신이 설…아니, 잡생각은 그만 하자. 이제 물 한잔 마시고 다시 연습을 해 볼까. 촛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한창 연습을 하다 들려오는 익숙한 노크소리에 에스텔은 분장실 문을 열었다.


"아, 오셨구나. 들어오세요."


"이제 확인 안 하네요."


"어차피 이 시간에 오는 사람은 이라 씨밖에 없는걸요. 남주인공 배우분과는 낮에 많이 맞춰 보니까요."


"그런가요…. 그래도 앞으로는 저임을 확인하고 열도록 하세요. 우선 이름을 말할 테니."


"앗, 네…. 하긴, 이렇게 깜깜한데 들이는 게 누군지 눈으로 분간하고 피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요. 알겠어요."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흘렀고, 이라는 어둠 속에서 미간을 구겼다.


"…남자 향수…?"


 그 말에 에스텔이 무심코 반문하자 이라는 멋쩍은 웃음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얼버무리며 연습을 시작하자 말했다. 그렇게 평소처럼 연습을 했지만, 에스텔은 이라가 했던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였다. …그러면 둘이 진짜 다른 사람이려나. 향도 묘하게 다른 것 같고, 무엇보다 자기 향수 냄새에 저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다음날, 이제 둘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확신을 가지고 싶었던 에스텔은 작은 랜턴을 손에 쥔 채 '그'를 기다렸다. 얼마 후, 노크 소리가 분장실 안에 울려퍼졌다.


"저입니다. 이라."


"금방 열어드릴게요…!"


 그렇게 문을 열자 랜턴 빛에 드러난 짙은 감색의 긴 망토와 정장, 얼굴 윗부분을 가린 흰 가면과 그 가운데 번뜩이는 금빛에 에스텔은 순간 숨을 멈췄다. 그리고….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아…! 죄송해요, 저는, 더 당신을 알고 싶어서…."


"첫만남부터 느꼈지만 에스텔, 당신은 호기심이 넘치는군요. …그런 점도 가끔은 독이 될 수 있답니다."


 정말, 다른 사람이구나. 하지만 그것보다도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에스텔은 긴장한 얼굴로 주먹을 꾹 쥐었다. 아직은 때가 아닌데. 그리 중얼거리던 이라는 지금껏 들을 수 없었던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 모습이 궁금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거겠죠. …왜 궁금했습니까?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그리도 궁금했나요?"


"일단 이라 씨는 제 모습을 아는데 저는 모른다고 생각하니 좀 불공평하지 않나…싶기도 했고, 저에 대해 너무 잘 아시니 아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에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 혹시 다른 곳에서 만나면 아는 채도 좀 하고 싶어서…그…랬어요."


 누가 들어도 변명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최대한 의연하게 에스텔이 말을 이어나가자 이라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는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에스텔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다 생각했기에 차마 이라를 붙잡을 수 없었다. 어떡하지.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은 데는…사정이 있겠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도 했었고. 엄청 큰 잘못을 했구나. 하지만 이렇게 고민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해결할 수는 없었고, 더군다나 내일 당장 다음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우선은, 연습하자. 그리고 다시 보게 되면 꼭 사과해야지. 에스텔은 초조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그 후로도 에스텔은 이어지는 공연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다만 작은 문제가 있다면 후원자님께서는 자신에게 계속 아는채를 하고, 선생님께서는 그 날 이후로 기척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에스텔은 그런 신경쓰이는 일들을 뒤로하고 축하파티로 향했다. 라울에게 춤 신청을 받고 우아한 선율에 몸을 맡기던 에스텔은 어느 순간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다들 가면을 쓰고 춤에 열중해 있을 뿐 무언가 수상한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 느낀 걸까. 그 후로도 예리한 시선은 줄곧 느껴졌지만, 시선의 주인을 찾으려 해도 보이는 것은 그대로였다.


"혹시 누군가 찾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자꾸 시선이 느껴져서요. …요즘 공연도 많이 섰으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좀 예민해져 있었나 봐요."


"그러고 보니 사람이 많으면 좀 피곤하다 했었죠. 그럼 잠깐 빠져나올까요?"


 그렇게 두 사람은 정원 벤치에 앉아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별을 구경했다. 그러다 라울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에스텔과 눈을 마주했다.


"에스텔, 당신은…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작님께서는…은인이시죠! 자작님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극이 올라갈 수 없었을 테니까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님들, 감독님과 작가님, 연출가님들, 많은 분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지 않게 해 주셨으니…정말 감사하죠."


"후후, 당신은 일을 정말 사랑하시는군요."


"그렇…죠 뭐. 부모님이 다 이쪽 일을 하셔서…어릴 때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어떤 형태로든 아주 조금이라도 그 무대에, 그 극에 제 영혼이 녹아있었으면 했고…. 그 꿈을, 이뤘네요. 다양한 기회 덕택도 있지만…자작님 덕분에요?"


"그런가요…. 제 덕이라는 건, 아마 제가 후원자기 때문에 그리 말씀하신 것이겠지요. 그래도 당신이 그리 생각해주시다니 기쁩니다. 자, 공기가 찬데 슬슬 돌아갈까요. 곧 파티가 끝날 테니 숙소 입구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앗,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괜찮아요. 오늘 전 한가한 사람이니까요."


"그…러시다면야…그럼 부탁드릴게요."


 그 순간 또다시 시선이 느껴져 에스텔은 슬쩍 뒤를 돌아봤지만 여전히 시선의 주인은 알 수 없었다. 에스텔은 문득 '유령'을 떠올렸다. …그럴 리가. 아마 나라면 꼴도 보기 싫을 텐데. 그는 지난 며칠 동안 찾아오지 않았고, 그 후로도 일 주일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서서히 그 존재의 분류가 추억으로 바뀔 무렵이었을까.


"…저입니다."


 자작님…이라기엔 목소리가 달라. 그렇다면 혹시….


"이라, 씨…?"


"…전보다 대답이 많이 늦네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올 거라 생각 못했는데. 에스텔은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저번의 실책이 떠올라 에스텔은 한동안 말없이 손만 꼼지락거리다 천천히 사과의 말을 건넸고, 이라 또한 에스텔에게 사과했다. 잘못은 자신이 했다며 에스텔이 만류해도 이라는 자신 또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며 비통함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거듭 사과할 뿐이었다.


 둘은 다시 연습을 재개했다. 간만의 재회에 조금 어색했던 공기도 부드러운 가락을 따라 풀어졌고…그 노랫소리는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라울의 귀에도 닿았다. 이 시간에도 연습이라니, 마음가짐조차 빛나는 프리마돈나로군. 그리 생각하며 익숙한 음색에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멈춘 그였지만, 이윽고 그 선율에 겹쳐지는 낯선, 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예리하면서도 매혹적인, 아니, 심연과도…악마와도 같은 목소리에 라울은 몸이 굳어버렸다.


 그렇게 무언가에 홀린 듯 시간이 흐르고, 겨우 정신을 차린 라울은 수많은 의문들을 뒤로한 채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음날 그는 곧장 에스텔을 찾아가 거기에 대해 물었지만, 상대역 배우와 맞춰보느라 같이 있었다는 깔끔한 대답이 돌아왔다. 남주인공 배우 또한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지만, 어제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에스텔이 굳이 거짓말을 한 이유는 또 무어란 말인가. 아직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저 쪽도 나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 같은데, 그건 다 착각이었던 건가. 라울은 낙담하여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확신을 주듯 행동해야 할까.


 그리고, 마지막 공연이 오를 때 라울은 떨리는 마음을 안고 에스텔을 찾아갔다.


"아, 샤니 자작님이시군요. 마지막 날까지 응원하러 와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후후, 당신을 만나러 가는 건 제겐 당연한 일인걸요. 그리고…에스텔. 오늘 연회 전에, 잠시 당신께 할 말이 있는데 잠시만 시간을 내 주지 않으시겠어요? 막이 내리면 분장실 앞으로 찾아가겠습니다."


"…그래요."


 조금 홍조를 띄운 듯도 한 라울을 뒤로하고, 에스텔은 공연을 위해 무대 뒷편으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거…그거 같은데. 일단 어느 정도 솔직하게 말하고 생각 좀 해보겠다며 거절해야 할까. 우선, 연인의 끌림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요, 사람이 나쁜 것 같지는 않지만 도련님은 아무래도 타이틀부터 부담스럽고, 귀족이면 결혼도 일찍 시킬 테니 결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든, 샤니 가에서 평민 출신과의 결혼은 절대 안 된다며 반대하든 양 쪽 다 곤란하긴 마찬가지다. 그 때였을까, 막 너머에서 프렐류드 선율이 에스텔의 귓가를 스쳤다. 그래. 이건…다 끝나고 생각하자.


 공연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주곡이 끝나며 무대에 등장한 펠리샤는, 그리고 다른 인물들은 여느 때처럼 훌륭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음향이나 조명 또한 완벽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고, 악마 카타스트로프가 펠리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신이 다가왔다. 발신인 없는 편지를 들고 늦은 밤 숲 속을 헤매던 펠리샤는 왜 더 떨어질 곳도 없는 자신에게 재앙을 품은 편지까지 오냐며 한탄하며 지문에 나와 있는 대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첼로 선율과 함께, 푸른 조명을 받은 남주인공이, 아니…'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당황한 에스텔은 살짝 미간을 구겼다. 침착해, 여긴 무대야. 이번 분기 마지막 무대를 이 정도 변수로 망칠 순 없어. 그리고, 그는 이 극을 남주인공 배우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잘 이해하고 있어. 실력은 말할 것도 없지. …의도치 않게 마무리가 아주 화려하군. 에스텔은 전주를 기회삼아 마음을 가다듬고, 이내 다시 제 몫의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그 맨얼굴…형형한 빛을 띈 금빛 눈은 인간을 초월한 분위기를 풍겼다. 날카로운 인상의 남주인공 배우조차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악마의 분위기를 그는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본능적인 불길함이 에스텔의 등을 훑었다.


 그리고 이내 여태껏 만족스럽게 다 담아내지 못한 펠리샤의 감정이 지금 이 순간, 온전히, 그리고 절절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타고 극장 안을 꽉 매우고 있었다. 관객들의 시선이, 몰입감이 느껴졌다. …그래, 어쩌면 이건 기회야. 그리 생각하며 에스텔은 남주인공 배우 대신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이라의 손을 맞잡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째서 당신은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요, 악마여.


 그건 내가 그대를 아주 오래 전부터 보고 있었기 때문이오, 펠리샤. 나는 그대의 요람부터 함께해 왔고, 무덤까지 함께할 것이니.


 요람은 해냈지만 과연 무덤까지 함께 할 수 있나요. 쉽게 그리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카타스트로프.


 오, 펠리샤. 그대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소. 가여운 한 마리 나비여.


 얼마 후 긴장감 속에 신이 끝나고, 에스텔이 다음 등장을 위해 검푸른 드레스로 환복하는 동안 악마의 심정을 드러내는 아리아 또한 마무리되었다. 막 사이를 채우는 간주가 흐르는 동안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었던 에스텔은 신이 끝난 이후 무대 뒷편을 쏘다녔지만 아무 곳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물어봐야 하는 건가. 다음 등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숨을 고르며 에스텔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짧은 펠리샤의 독백이 끝나고, 이 극의 하이라이트 신에서 둘은 다시 맞닥뜨리게 되었다. 곧 치뤄질 예식을 위해 흰 제복을 차려입은 이라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어려 있었지만, 그 미소조차 불길하게 느껴져 에스텔은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이번 신은…결국 펠리샤가 체념하고 악마를 받아들이는 신이었지. 제2장에서 이라를 무대 위에서 마주한 후, 에스텔은 이 극이…이번 신이 무언가를 은유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악마란 말인가. 아니야, 집중하자. 마음 속으로 그리 되뇌이며 에스텔은 무대 위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리로 오오, 펠리샤. 나의 신부여. 그대의 신랑이 기다리고 있소.


 에스텔은 문득 놀라 뒷걸음질쳤다. 이라의 표정에는, 그 금빛 눈에는 지금껏 보아 온 남주인공 배우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짙은 정념이 어려 있었다. 이내 극의 마지막을 장식할 듀엣의 전주가 울려퍼지고 에스텔은 본능적인 불길함을 억누르며 천천히 이라에게로 다가갔다.


 자, 이리 와 내 품에 안기시오. 두려워 마오, 펠리샤. 그대는 인간들 틈새에서 괴로워하지 않았는가.


 지문대로 이라의 앞에 온 에스텔의 손을 살짝 잡아올리며 이라는 노래를 이어갔다.


 가문의 명예는 시든 나팔꽃처럼 땅에 떨어지고, 전날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약혼자는 등 돌려 떠나갔지. 양친과 친우마저 잃고 그대는 홀몸이 되었네.


 그마저 전부 당신이 꾸민 일 아닌가요? 그 악마적인 힘으로. 그마저 전부 당신의 이름인 재앙이 아닌가요? 카타스트로프.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그 재앙은 악마의 손에서 태어난 것인가, 신의 손에서 태어난 것인가, 혹은…인간의 손에서 태어난 것인가.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그렇게 노래하며 이라는 반대손으로 에스텔의 허리를 살짝 감싸고는, 4분의 3박으로 변하는 박자에 맞춰 춤을 추듯 발걸음을 옮겼다.


 왜 나인가요, 하필 나인가요, 그 많고 많은 사람중 나일 이유가 있나요?


 그것은, 그대가 기억조차 하지 못할 아주 먼 옛날, 당신을 만났고 또한 떠나보냈기 때문이라오. 나는 그대를 다시 만나러 왔을 뿐이고, 이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함임을. 


 프레이즈를 끝맺은 이라는 에스텔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고…에스텔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그 반지는, 지금껏 소품으로 사용된 그 반지가 아니었기에.


 사랑스러운 펠리샤, 그대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소.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것이니.


 하늘이 부서지고, 땅이 갈라지고, 모든 것이 암흑에 뒤덮인대도, 영원히 함께. 그렇게 노래하며, 이라는 에스텔을 등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고 뺨을 쓰다듬었다. 극의 절정을 향해 도약하는 화려한 대선율 위에서 에스텔은 절규하듯 제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그 모습은 자신을 휘감은 악마적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절망하다 체념하는 펠리샤 그 자체였기에 사람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무대를 바라봤다. 이내 에스텔의 마지막 음이 공기중에 흩어지고 잠시 후 살짝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며 첼로의 떨림마저 멎었을 때, 극장 전체는 한순간에 암흑에 휩싸였다. 무슨 일이야? 연출이겠지. 딱 저기서 끊을 타이밍이잖아. 그런데 저번 공연에서는 빛이 서서히 약해졌는데 오늘은 갑자기 꺼지지 않았어? 술렁임은 극장이 밝아짐에 따라 멎어갔지만 관객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아함이 가득했다.


"자, 여러분, 오늘 공연 어떠셨나요? 즐겁게 보셨다면 좋겠습니다!"


 명랑한 어린 사용인 역 배우의 목소리가 극장에 울려퍼졌다.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커튼콜이 이어지고 배우들은 다함께 춤을 추고 관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단 두 명만 빼고.


"음? 여, 여긴 어디지? 커튼콜, 커튼콜 나가야 하는데…!"


"…실책이었어."


"악!"


"놀랐습니까?"


"아, 아니 잠깐…이라 씨네요. 아까 무대에는 왜 나온 거죠? 지금은 왜 여기 있나요? 방금 순간적인 암전도 당신이 벌인 건가요? 하지만 그럴 이유가…."


"이유, 를 찾으시는 겁니까? 하긴, 당신은 전부터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지요. …이유야 많습니다만."


"뭐, 알겠어요. 이유는 나중에 듣고, 전 커튼콜을 위해 무대로 가야 하거든요?"


 하지만 이라는 묵묵히 노를 저으며 대답 대신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에스텔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긴, 이 사태의 장본인인데 순순히 말을 들을 것 같진 않다고 생각했지만…그래도 커튼콜까지 무사히 마무리하고 싶은데. 에스텔이 대답을 재촉하듯 이라를 바라보자 그는 에스텔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커튼콜이 끝나면, 극이 끝나겠지요. 그럼 성실한 당신은…약속대로 그 남자를 만나러 가겠군요. 그 또한 당신을 찾으러 올 테고."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죠?"


"들었으니까요. 그 향수 냄새의 주인공이죠? 그 남자. 어느 날부터 당신에게서 떨어질 생각조차 않는, 지독한 머스크 향의 주인공…라울 드 샤니 자작."


 그 말에 의아하다는 듯 눈만 깜빡이던 에스텔은, 이내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이라를 바라봤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요, 혹시 이라 씨와 샤니 자작님의 관계가 향수 냄새만 맡아도 온 분노가 끓어오르는 불구대천지원수인가요? 저는 인질이고요?"


"음…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인질이 아니에요. 다만 저는 그에게 화가 나 있답니다. …제까짓 게 뭐라고, 감히 누굴 넘본단 말입니까."


 그리 말하는 이라의 옆얼굴은 자신이 그에게 실수했던 그 때보다 훨씬 차가워 에스텔은 말없이 숨만 삼켰다. 그 후로 둘 사이에는 침묵만이 감돌다, 저 멀리 보이는 뭍에 배가 멈춰설 때에야 그 정적이 깨졌다.


"자, 손을."


 에스텔은 잠시 망설이다 내던지듯 제 손을 이라에게 내 줬고, 그렇게 손을 맞잡은 채 배에서 내리고도 에스텔은 제 머릿속을 휘젓는 수많은 의문들 때문에 여전히 뱃멀미라도 하듯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이곳이 그의 거처인가? 왜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거지. 작게 심호흡하고,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자 천장에서 흔들리는 옛날 양식의 샹들리에, 조금 낡은 듯한 업라이트 피아노와 제멋대로 배치된 몇 개의 전신거울, 그와 대조되듯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어 도리어 주변과 어우러지지 않는 옷장과 궤짝 더미, 하얀 캐노피와 가짜 꽃이 달린 리본으로 예쁘게 장식된 커다란 침대가 차례로 에스텔의 눈에 들어왔다.


"환영해요, 에스텔. 몇 주간 연달아 무대에 서느라 힘드셨지요? 휴가 오셨다 생각하시고 잠시 눈이라도 붙이시지요."


"저, 저는 남의 집에서 맘 편히 못 자는 사람이라서요…!"


 하지만 그 말에도 이라는 엷게 웃으며 에스텔을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에스텔의 눈을 제 손으로 폭 덮고는 다른 손으로는 어깨를 살살 다독이며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태평한 인간이 잠이 들겠냐 생각하던 에스텔이었지만…한결 맑아진 눈을 뜨니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옆에서 즐거운 듯 웃고 있는 이라였다.


"일어났나요? 자면서 불편한 곳은 없었나요?"


"어…제 마음이요…?"


 그 말에도 이라는 즐거운 듯 웃으며 그래도 어제보다 덜 피곤해 보여서 다행이라고, 불편한 건 자신이 더 노력하겠다 말할 뿐이었다. 아침은 무얼 먹고 싶냐는 질문을 반대쪽 귀로 흘리며 한숨을 쉬던 에스텔은, 조금 멀리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선을 옮겼다. 그 곳에는 십자가형 구조물에 묶여 있는 누군가가 있었고….


"저 유령, 아니 악마가 절 이곳에 묶어뒀습니다!"


"…시끄럽군요."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를 '누군가' 쪽으로 던진 이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복하게 웃으며 에스텔의 머리칼을 나무빗으로 조심스럽게 빗어내렸다.


"…저기, 이라 씨."


"왜 그러나요?"


"제가 여기 있는 이유는, 대충 짐작했고, 대충 납득도 했거든요…. 하지만 샤니 자작님은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대체 왜 …."


"끌고 오진 않았습니다. …그가 제 발로 이곳에 들어올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이 곳을 어떻게 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을 구하러 왔다고 하더군요. …웃기지도 않지."


"하지만 자작님이 절 왜 구하러 오신 거죠? 저 하나 없어진다고 아쉬우실 분은 아니실 텐데."


"에스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극이 끝나고 당신에게"


"두 번 씩이나 소란 피우지 마십시오."


 또다시 나무판에 무언가 꽂히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아, 아무튼 샤니 자작님은 풀어 줘요. 관계없는 사람을 이렇게 하다니…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은 있는 거예요? 이러고도 저한테 예쁨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관계가 없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럼 이렇게 할까요. …당신이 앞으로 저와 함께하겠다 말하신다면 그는 풀어주겠습니다. 그도, 당신도 이곳에서의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당신이 결국엔 이곳으로 돌아오리라는 판단이 선다면 당신은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어요. 그저 이곳이 에스텔, 당신의 돌아올 장소가 되는 거예요. 앞으로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차를 마시고, 어제처럼 같이 잠들 것이라 저와 약속하는 겁니다."


 에스텔은 그 제안이 의아한 듯 눈썹을 살짝 움직이다, 라울을 흘깃 바라보고는 다시 이라에게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 그러겠다는 건 아니고요, 마, 만약에 제가 저 분과 함께하고 싶다고 한다면요?"


"그러면요? 그럼…그가 어떻게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당신의 눈이 닿지 않도록 신경쓸테니까요."


 에스텔은 살며시 눈을 감고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제일 나은 선택은 무엇일까. …이왕이면 사람 살리는 쪽이 나을 것이고, 꽤 전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왠지 그는 자신에게 정말로 해를 입힐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그렇게 자신의 노래를 좋아하던 '그'를 생각하면 그의 제안이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찌됐든 훌륭한 음악 선생이니 그의 가르침을 앞으로도 받을 수 있다면, 그런 가르침을 받아 무대에 설 수 있다면…. 에스텔은 살짝 숨을 들이쉬고는, 제 옆에 있는 이의 손을 살짝 잡았다.


"알겠어요. 앞으로 당신과 함께 지내면 된…다는 거죠? 그럼 말씀하신 대로 샤니 자작님은 풀어주세요. 저도…저도, 노력해 볼 테니, 당신이 저에 대한 신뢰가 생기면 제가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반드시 지키고요. 아니, 이 참에 서류라도 쓸까요. 저는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사람이랑은 사, 살기 싫거든요…!"


"저도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답니다."


 그리 말하며 여유로운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이라는 별 말 없이 라울에게 다가가 그를 풀어주었다. 


"왜, 왜 그를…."


"어제 극이 끝나면 할 말이 있다 하셨었죠. 샤니 자작님께서 정말 좋은 분이신 건 알지만…그 때 그 말을 들었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도…제 대답은 똑같았을 거예요. 그러니 행여나 죄책감은 갖지 마세요. 전 제가 생각했을 때 모두가 가장 만족할 수 있는 길을 골랐을 뿐이니까요."


 그 말을 듣고 멍하니 서 있는 라울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라는 레버를 당겼다.


"출구는 저 쪽입니다. 허튼 생각은 하지 말고요."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두 사람이 있는 자리를 바라보던 라울은, 에스텔이 차분한 목소리로 이제 가 보라며 말한 후에야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며 라울이 떠난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스텔은 이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노래나 한 곡 할래요? 당신 자체는…아직 잘 모르겠지만, 당신 노래는 저도 꽤 좋아하거든요."


 일부러 딱딱하게 얘기했는데도, 그 말에 이라는 환하게 웃으며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진짜 부르네. 에스텔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다 제 목소리를 얹었다. …그래, 뭐…확실히 같이 노래할 맛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듀엣이 끝나고, 만족스러운 듯 숨을 내쉰 이라는 제 양 손으로 에스텔의 얼굴을 폭 감싸더니 가만히 그 보라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키스…하고 싶어요. 에스텔."


"왜, 왜요…?"


"당신이 제 곁에 있다는 게 너무 기뻐서요…."


"벌써부터, 그건, 좀…."


 그럼 안는 것도 안 되나요? 자신 없는 듯한 그 물음에 왠지 안쓰러움마저 느껴져 에스텔은 조심스럽게 이라의 품으로 몸을 기울였다. 언젠가도 느꼈지만, 악마…비슷한 거면서 따뜻하네. 그렇게 긴 정적 속에서 둘은 가만히 체온을 나눴다.




 어느 비 내리는 오후, 사람들 몇몇이 한 묘비 앞에 모여 있었다.


"아아, 이렇게 또 하나의 별이 지는구먼.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아주 정정했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름 뜻도 별이 아닌가. 아하하…누가 지어준 이름인지는 몰라도 선견지명이 뛰어났나 보군."


"특이한 양반이지…연기에 극본에, 그토록 이름을 떨친 배우가 일흔이 넘도록 스캔들 하나 안 나다니. 그 정도 유명세라면 본인이 관심이 없어도 주변이 난리니 당연히 스캔들도 따라오기 마련이잖나."


"아니, 실은 딱 하나…있었네. 그녀의 데뷔작 기억하는가?"


"《악마의 신부》 말인가?"


"그래. 막을 내리기 전 마지막 공연, 마지막 신에서…그녀는 진심을 토해내듯 그 극의 마지막 아리아를 열창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네. 악마 역의 남주인공 배우와 함께."


"자네는 기억력도 좋군. 나도 생각났네. 그러고 보니 그 날 남주인공 배우도 지금껏 무대에 오른 사람과는 별개의 인물이라는 설이 있던데. 아무튼 그 때 아주 난리가 났었지. 화려하게 데뷔한 프리마돈나가 데뷔작을 공연하다 실종되다니, 원."


"열흘 후 그녀는 아주 멀쩡하게 돌아왔지만…그 때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네. 하지만 그 이후 그녀의 행보를 생각하면…꽤 그럴싸한 시나리오지 않은가?"


"하하…재미있군. 음악의 천사의 은총을 받았다 불리는 배우가…. 그래, 자네 말대로라면 그녀는 정말로 악마에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 예에…."


 온화한 듯 하지만 어딘가 날 선 듯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길을 내 주었다. 젊은 사람이 이런 델 다 오다니 어지간히 오페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며 수근거리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푸른 머리칼의 청년은 정중하게 꿇어앉아 조심스럽게 국화 한 송이를 묘비에 얹었다. 에스텔 슈펠른, 이곳에 잠들다. 음악의 천사 곁에서 영원한 안식이 함께하기를. 묘비명을 몇 번이고 되새기듯 손끝으로 쓰다듬던 그는, 조금 눈물을 머금은 채 한참이나 묘를 애틋하게 바라보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안녕. 나중에…꼭 다시 만나자, 에스텔."


 그 말을 끝으로 청년은 홀연히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드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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