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나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었다. 누군가 깨우지 않으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자곤 했다. 어릴 때는 그게 그렇게 큰 문제로 여겨지진 않았다. 그러다 내가 집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중학교에 배정되어 통학 시간이 늘어나게 되자, 그것은 아주 큰 문제로 이어지게 되었다.


중학생이 된 이후로 나의 아침은 무척 소란스러워졌다. 5분 단위로 울려대는 휴대폰의 시끄러운 알람 소리와 엄마의 끈질긴 잔소리. 각자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둘이었지만 나의 아침잠도 그에 못지않았기에, 결국 그 둘은 어느샌가 합심해 콤비를 이루게 되었고 그 파괴력은 가히 엄청났다. 매일 아침이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그랬는데⋯.


고등학교 배정까지 모두 끝나고 졸업식이라는 지극히 형식적인 행사를 3일 앞둔, 2월 7일 화요일.


오늘은 평소와 같지 않았다.


문득 잠에서 깨어 부스스 눈을 떴을 때 방 안의 공기가 이상하게 낯설었다. 잠에서 깬 자세 그대로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무언가 분명 이상한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몸을 뒤척이며 반대 방향으로 돌아눕자, 베개 옆에 다소곳하게 놓여있는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이상함의 이유를 깨달았다.


어떤 일의 결과엔 항상 어떤 원인이 존재한다. 만고불변의 진리다. 난 분명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그 원인이 되어야 할 소리들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어색한 고요함만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왠지 모를 불안함에 방안을 둘러보다 벽에 걸린 시계에 눈이 갔다. 시계의 바늘은 정확히 7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지각이다. 그것도 엄청난 지각이었다. 매일 아침 치열한 전쟁을 치르느라 항상 등교 시간의 끄트머리를 겨우 움켜쥔 채 교문을 통과하곤 했지만, 지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 단 한 번이 벌어지게 생겼다. 기다란 나무 지시봉을 한 손에 든 채 교문 앞에 위압적으로 버티고 서있던 반 대머리 학주의 험악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격언을 입에 달고 사는 학주는 다른 무엇보다도 지각을 싫어했다. 졸업을 코앞에 둔 3학년이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엄격했다.


혹시나 기적을 바라며 다시 한번 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은 여전히 7시 55분이었다. 등교 시간인 8시 30분까지 나에게 남은 시간은 35분. 어쩔까 고민할 새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운 후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씻는 둥 마는 둥 대충 물로 얼굴을 씻어낸 후 몇 번의 빗질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황급히 방으로 돌아와 로션만 대충 문질러 바른 후 잠옷을 벗어 던지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옷매무새를 매만질 틈도 없이 교복 위에 두툼한 검정색 롱패딩을 걸치고는 휴대폰과 가방을 낚아채듯 손에 쥔 채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으아아, 어떡해!


마음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허겁지겁 현관으로 뛰어가 운동화에 발을 되는대로 밀어 넣고 있자니, 안방 문이 열리고 엄마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걸어 나왔다. 사방으로 뻗쳐있는 머리를 보니 아무래도 지금 막 일어난 모양이었다. 딸은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인데 엄마란 사람이 어찌나 느긋하신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느릿느릿 걸어 나오던 엄마가 뒤늦게 현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며 멈춰 섰다. 그런 엄마를 짜증스레 한번 노려본 후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닫히는 현관문 사이로 “뭔 일이래?” 하고 의아해하는 엄마의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서서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신발에 발을 반쯤 걸친 채 슬리퍼 마냥 질질 끌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한 손으론 신발을 고쳐 신고 나머지 한 손으로 다급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댔다. 엘리베이터는 5층인 우리 집을 막 지나쳐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차례차례 커져가는 숫자를 바라보며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이내 마음을 바꿔 먹고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려 세웠다.


“아, 추워~!”


아파트 현관을 뛰쳐나오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몰아닥치는 차가운 바람에 부르르 몸이 떨려왔다. 휙 고개를 치켜들어 원망스레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날씨가 흐린 듯 평소보다 하늘이 어두침침해 보였다. 눈이라도 내리려는 건지.


“헉!”


이럴 때가 아니었다. 하늘이야 어쨌든 간에 달려야 한다. 멈추면 죽는다. 그런 마음으로 버스 정류장까지 한걸음에 내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누군가가 막대기로 쿡쿡 찔러대기라도 하는 것처럼 옆구리가 아파왔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백기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마치 희망 고문처럼 저 멀리 버스 정류장이 눈에 들어왔다.


“우씨⋯.”


이러면 포기하려야 포기할 수가 없잖아. 눈앞에 또렷이 보이는 목표만큼 사람의 투쟁심을 자극하는 것도 없다. 먼 옛날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부들거리는 두 다리에 불어넣으며 이를 악물고 달렸다. 이젠 버스가 언제 오느냐 그것이 관건이었다. 살짝 고개만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맙소사.


저 멀리서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1214번 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타야 하는 버스였다. 하늘이 나를 돕고 있는 것일지 나를 저주하고 있는 것일지는 내가 저 버스보다 먼저 정류장에 도착하는 것에 달려있었다. 타야 한다. 못 타면 이번엔 진짜 죽는다. 버스와 나 둘만 아는, 아니 사실은 나만 아는 고독한 레이스가 펼쳐졌다. 누구든 한 명이라도 더 이 고독한 레이스에 뛰어들어준다면 좋을 텐데, 오늘의 지각생은 나뿐인 듯했다.


버스 정류장과의 거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무렵, 1214번 버스가 내 옆을 스윽 스쳐 지나갔다. 버스가 나를 추월하는 순간이 마치 영화 속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버스의 뒷덜미라도 움켜쥐려는 듯 손을 뻗어 봤지만 슝~ 하고 나를 스쳐 지나간 버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버스가 다가오자 도로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 희망은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주는 것, 그것뿐이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서고 앞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하나둘 버스 안으로 사라져갔다.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너무나 신속 정확한 탑승이었다. 남은 사람은 이제 단 두 명.


아, 조금만 더⋯ 제발요.


이제 막 버스에 한 발을 올린 중년의 아주머니에게 나의 간절함을 가득 담은 무언의 외침을 날려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전혀 닿지 않았다. 그렇게 아주머니 또한 버스 안으로 금세 사라져버렸다. 마지막까지 정류장에 남아있던 대학생쯤 돼 보이는 남자가 곧바로 아주머니의 뒤를 따랐다. 남자의 뒷발이 지면에서 떨어지려는 순간,


“저기, 잠깐만요!!”


냅다 고함을 내질렀다. 무언의 외침이 닿지 않는다면 유언의 외침을 날릴 수밖에. 솔직히 완전 쪽팔렸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의 나는 절박했다. 지금 이 버스를 놓친다면 지각은 확정이었다. 다행히도 나의 절박한 외침이 닿았는지 지면에서 살짝 떨어졌던 남자의 뒷발이 다시 아래로 내려앉았다.


남자가 한 발을 버스에 걸친 채 몸을 살짝 뒤로 빼고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쳐다봤다. 아침부터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는지 남자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를 향해 붕붕 양손을 흔들어 보였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내 쪽을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이내 알겠다는 듯이 싱긋 미소 지었다.



* * *



“삑- 학생입니다.”


버스와의 고독한 레이스에서 결국 승리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을 누릴 체력은 나에게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대로 단말기 옆에 설치된 봉에 쓰러지듯 기댄 채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격렬한 운동에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기세로 쿵쿵 날뛰었다. 이러다 정말 죽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날 지경이다. 후하, 후하. 요란하게 숨을 뱉어내며 잠시간 호흡을 가다듬고는 일단 자리에 앉아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버스 안을 둘러봤다.


차고지에서 출발한 후 한 정거장밖에 거치지 않았기에 버스에는 빈자리가 꽤 남아있었다. 힘이 빠져 흐느적거리는 두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적당히 눈에 들어오는 빈자리 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고요한 아침의 정적에 휩싸여 있던 버스 안에 난데없이 리드미컬한 드럼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사님이 라디오라도 틀어놓은 건가. 벽면에 설치된 스피커에 힐끔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거뒀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리듬감에 나도 모르게 까딱까딱 손가락 끝으로 박자를 맞추며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깨달았다.


⋯어라, 이건 내 알람 소리인데?


아침잠이 많은 나를 위해 엄마가 특별히 손수 설정해 준 알람 소리, 미성년자인 나를 위해 그중 가장 순한 맛으로 골랐다던 바로 그 알람 소리였다.


장르는⋯


헤비메탈.


깨달음과 동시에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던 드럼 소리를 거칠게 뚫고 나왔다. 으앗! 그에 기겁하며 허겁지겁 패딩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자 남자의 파워풀한 샤우팅 소리가 버스 안을 가득 채웠다. 순한 맛 헤비메탈이 앳된 중학생 소녀의 휴대폰 안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으아아, 이게 뭐야!


창피함에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서둘러 알람을 끄려 허둥거리다 그만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이 크아앙 울부짖으며 떼굴떼굴 굴러갔다. 이런 미친! 새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달려가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줍기 위해 손을 뻗는데, 누군가의 손이 먼저 휴대폰에 닿았다.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자 어떤 여자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근처 다른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그런데⋯


얼굴이 진짜 너무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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