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공비 안카는 휘하 기사와 간통했다. 안카의 딸 유라테는 대공의 친자가 아니라 그 기사의 자식이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발이 없으니 속도는 더더욱 빠르고, 형체가 없으니 잡아챌 수조차 없다.

이틀. 유라테가 사생아일 수도 있다는 수군거림이 그 거대한 성 안에 퍼지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이틀이었다. 일주일 후에는 나라의 절반이 대공가에서 터진 치정 사건과 그 여파를 알게 되었다.

그때쯤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유라테의 친부는 로마스 경이리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후였다. 아직 공식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인데, 유라테에게는 이미 더러운 불륜의 결과물 혹은 부정한 여자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붙고 말았다.

낙인은 모두에게 드러나기에 낙인이다. 한때는 그녀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제는 유라테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쓰라린 말을 퍼부었다.


“진짜 몰랐을까?”


“2살 때 생모를 여의었잖아. 친어머니에 대한 기억조차 없을 테니 억울하긴 할 걸.”


“그래도 결백하지는 않지. 여태까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쳐. 그래도 이젠 자기가 대공의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알 거 아냐? 그러면서도 저렇게 뻔뻔하게 고개 쳐들고 다니고 싶을까?”


“하긴 그래. 나라면 부끄럽고 미안해서 진작에 떠났다.”


“역시 출생이 저러니 나쁜 피를 타고났겠지.”


유라테의 등 뒤로 비수 같은 대화가 오갔다. 누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떠벌리는 무리는 한때 유라테를 공실(公室)의 일원으로 모시며 떠받들던 이들이었다.

유라테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뒤돌아보지 마. 울지도 마. 저들이 원하는 건 네 반응이야.’


세간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유라테도 알고 있었다. 아직 안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확정된 것도 아니었고, 설령 유라테가 로마스 경의 딸이 맞다 한들 최종적인 책임은 불륜의 당사자들이 져야 했다.

하지만 안카와 로마스는 이미 죽어 땅 속에 묻힌 지 오래였다. 비난의 눈초리는 자연히, 유일하게 생존해 있으며 동시에 가장 만만한 존재인 유라테에게 쏟아졌다.


“더러운 사생아.”


“키워준 아비를 속인 간악한 것.”


“알비나 님이야말로 불쌍하지. 그래도 의붓딸이라고 뼈빠지게 키웠더니, 사실은 파렴치한 탕녀가 낳은 뻐꾸기였지 않나.”


“대공가의 핏줄을 오염시킨 역겨운 오물!”


독기 어린 말은 실체 없는 화살이 되어 유라테를 해쳤다. 18살짜리 소녀는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아무도 그녀의 곁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 브로니우스도, 계모 알비나도, 두 동생도 그녀를 더이상 만나러 오지 않았다.

가족이 그럴 정도이니 남들은 더했다. 언제나 친절하던 시종과 하인들은 누구보다도 빨리 등을 돌렸다.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꿰찬 비열한 사생아를 ‘응징’하는 것. 대다수의 성 사람들은 그것이야말로 정당한 행동이라고 믿었다.

시녀들은 대공녀의 말투나 행동거지를 흉내내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그도 아니면 안카가 딸에게 물려준 보석에 함부로 손을 대었다. 죽은 대공비가 아끼던 진주 목걸이가 사라졌고, 정교하게 조각한 호박 머리장식은 정중앙에 큰 금이 갔다.

또다른 누군가는 대공녀의 침대에 벌레와 거미를 풀어놓았으며, 주방에서는 식사랍시고 썩어가는 빵과 수프를 올려 보냈다. 옷장을 열어보면 갈기갈기 찢어지고 오물에 젖은 비단옷이 한가득이었다. 좋아하던 책을 펼쳐보니, 거기에는 유라테와 안카의 이름이 온갖 저주 그리고 욕설과 함께 낙서가 돼 있었다. 늦가을에 접어들었지만 대공녀가 쓰는 방의 벽난로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싸늘하게 식은 채로 재만 가득했다.

물론 유라테를 동정하는 이가 없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소수였고, 혹여나 유라테를 편들었다가 받을 불이익이 두려워 드러내놓고 두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유라테는 자기가 올바르다고 믿는 사람들이 어디까지 추악해 질 수 있는지 체득했다. 다리 많은 곤충은 징그러웠다. 추위와 상한 음식 또한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벌레와 먼지로 가득 찬 추운 방은 유라테의 하나뿐인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바깥은 그녀의 처소만큼 안전하지 못했다. 적어도 먼지와 거미는 그녀 쪽으로 침을 뱉거나, 입을 가리고 소곤거리며 비웃거나, 안카와 유라테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상스러운 욕을 하지는 않았다. 사람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가끔 견디기 힘든 찰나가 올 때마다, 유라테는 이 정도면 버틸 만 하지 않느냐고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적어도 나는 내 처소에 틀어박혀 있을 수라도 있다, 한 점의 햇볕조차 들지 않는 감옥에서 고문당하는 처지는 아니다’ 하면서.

조사 과정의 마지막 한 달은 끔찍한 시간이었다. 요가일라와 발슈스 자작은 기어이 안카를 모셨던 시녀 셋과 기사 둘, 그리고 안카의 주치의를 찾아내 성으로 데리고 왔다. 증인들은 도착하는 즉시 지하로 끌려갔고, 그들을 삼킨 지하 감옥에서는 이따금 울부짖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한번은 비명 때문에 한밤중에 깬 적도 있었다. 방에 틀어박혀 돌로 지은 벽과 바닥이 뿜어내는 한기에 오들오들 떨다, 어느 순간 설핏 잠이 들었다. 그런데 비몽사몽 중 찢어지는 절규가 들렸다.

유라테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녀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는지, 곧 문 밖에서도 하인들이 웅성대는 기척이 느껴졌다.

대공은 안카를 모셨던 사람이라면 남녀노소와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잡아들이라 명령했다. 심문장에 붙들려 간 이 중에는 작위를 가진 여자도, 나이 지긋한 노인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고신을 피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어제는 기어이 시체 한 구가 실려 나갔다는 말도.

이불을 붙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군주의 딸로 살아왔던 유라테는 죄인이 받는 처벌이 얼마나 참혹한지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생아라면, 다음에 형틀에 묶이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내가 2살 때였어. 나를 심문한다 해도 알아낼 수 있는 사항은 없으니, 고문당할 확률은 낮아.’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긍정적인 사고였다. 사생아임이 입증된다면 적어도 이 성에서 나갈 수는 있을 테고, 만에 하나 대공의 친자가 맞다면 일상을 되찾게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유라테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덕분에 며칠이 지나 마침내 대공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도, 그녀는 예상보다 무덤덤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공께서 찾으십니다.”


그렇게 말한 테레사는 평가하는 시선으로 방 안을, 그리고 유라테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방 안은 엉망이었다. 곳곳에 먼지가 뿌옇게 쌓인데다 벽난로를 때지 않아 냉골이 따로 없었다. 유라테는 군데군데 해지고 얼룩이 진 옷에 숄을 두르고는 침대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갈지 않아 구겨지고 변색된데다 벌레까지 기어다니는 이부자리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의 냉기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직접 난로에 불을 지피려 해도, 화부(火夫)가 장작을 내주지 않았던 탓이다.

유라테의 형편없는 꼬락서니를 본 시녀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테레사는 만족감을 굳이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지칠 대로 지친 유라테 또한 상대의 조소를 보고도 못본 척 넘겨버렸다. 이 지긋지긋한 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며, 그녀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서 일어나 문가로 걸어갔다.

테레사가 빈정거렸다.


“전하 앞에 그런 꼴로 나가시게요?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칼리차의 군주께 예의도 갖추지 않으시는군요.”


“…자네들이 새 옷은 커녕 있는 옷도 세탁하지 않았잖아.”


유라테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말에 테레사는 짐짓 놀란 척을 했다.


“세탁부들이 모두 바빴나 보지요. 원, 한 마디 언질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어쨌든 이 모양으로 전하를 뵐 순 없지요. 목욕물과 옷을 가져왔으니 먼저 씻고 입으시죠.”


테레사가 손뼉을 치자 처음 보는 얼굴의 하녀들이 서넛 들어왔다. 그네들의 억센 손아귀에는 물이 가득 찬 나무 욕조가 들려 있었는데, 김이 하나도 오르지 않는 모습을 봐서는 찬물임이 분명했다.


유라테는 한숨을 쉬었다.


‘진짜 알뜰하게도 괴롭히네.’




지난 몇 달간 모든 감정이 다 닳아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막상 운명을 마주할 순간이 되자, ‘아버지’의 알현실로 가는 길이 멀고도 두렵게만 보였다. 그동안 성 밖으로 나가게 되기를 학수고대한 시간이 무색해졌다. 다리에 휘감기는 따뜻한 옷감마저 싸늘한 뱀이 기어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유라테의 몸을 감싼 것은 테레사가 내준 단순한 회색빛 드레스였다. 두껍고 부드러운 모직 천으로 지은 소매와 치맛자락이 바닥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졌다. 최고급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질이 좋은 상등품임은 분명했다. 최근 유라테가 입은 옷 중 가장 단정하고 따뜻한 의복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라테는 테레사가 결코 좋은 의도에서 이 드레스를 제공한 게 아니라는 데에 손가락이라도 걸 수 있었다. 그녀는 테레사의 오빠, 발슈스 자작이 기밀 회의에서 한 말을 기억했다.


‘유라테 님의 눈은 회색입니다. 돌아가신 비 전하의 갈색 눈, 그리고 여기 계신 대공님의 검은 눈과 다르게요. 문제의 로마스 경을 마주할 때마다 저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더군요. 왜 유라테 님의 눈이 저 남자와 정확히 같은 색을 띠고 있나 하는 궁금증 말입니다.’


테레사가 입혀준 옷은 그녀가 사생아가 맞는지 아닌지 공표하는 자리에 두르고 나가기엔 상당히 부적절한 색깔이었다. 굳이 회색으로 내준 이유가 너무도 분명해 헛웃음이 터졌다.

만약 그녀가 옷을 골랐다면 차라리 누더기를 입고 나갔을 터이다. 그러나 유라테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원래 입었던 옷을 하녀들이 모조리 치워버린 후에야 테레사는 그녀에게 새 드레스를 주었다.


‘옷 색깔 따위로 걱정해 봤자 소용 없어. 아버지는 조사 결과에 따라 결정을 내리실 테니까.’


그리고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른 의문이 유라테의 머리에 떠올랐다.


‘…아무리 아내의 부정에 분노했다 해도, 자기가 오쟁이 졌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떠벌리고 싶을 사내가 있을까?’


유라테가 보기엔 아니었다. 특히 브로니우스 대공처럼 태어날 때부터 남들의 머리 위에 군림했던 남자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수치스러워서 아예 덮어버리면 또 모를까, 이렇게 동네방네 퍼지도록 공식적으로 발표할 사항이 아니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발슈스 자작이 유라테가 불륜의 결과물이라는 증거를 찾아낸 것은 거의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유라테가 봐온 대공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녀를 자기 딸이라고 인정할 사람이었다. 헌데 이 발표는 대체 무엇인가.

머리를 더 굴려 보아도 나오는 답은 없었다. 수 개월 만에 처음으로, 유라테는 내내 방에만 처박혀 있던 자신을 원망했다. 악착같이 나가서 소문이라도 수집했어야 했다. 판단은 충분한 정보가 있어야 가능했다.


‘아니다. 지난 일을 더 생각하지 말자. 가서 부딪혀 보기라도 하는 거다.’


일이 어떻게 끝나던 괴롭힘도 같이 끝나리라. 유라테는 오로지 그것에 의지해 알현실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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