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청담동 



“으아악! 미치겠네!”


휴대폰 화면을 보던 김재우가 별안간 벌떡 일어섰다. 아 깜짝이야! 근처에 앉은 애들끼리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테이블들이 삽시간에 김재우로 시선이 쏠렸다.


“아… 망했어. 박성욱 선배 온대 지금.”

“뭐? 왜?”

“아, 그 선배 극혐인데. 김재우 너가 불렀어?”


남슬기의 다그침에 김재우가 세상 억울하게 눈썹을 늘어뜨리며 주절거렸다.


“그게 아니고, 그… 좀 전에 페북에 우리 사진 올렸거든. 이 형이 장소 태그한 거 보고 댓글을 단 거야. 마침 이 근처라고. 지금 잠깐 들린다는데 어떡하냐.”

“아오, 야! 너 때문이네.”


박성욱 이름 석 자만 들었을 뿐인데 어째 귓가에 그 특유의 쇳소리가 맴도는 것 같아서 유정은 짜증스럽게 귓가를 털어냈다. 그런다고 불쾌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 선배 요새 다단계 하는 것 같던데.”

“아. 나도 인스타 보고 그 생각 했어. 맨날 차 안에서 뭘 그렇게 커피 마시고, 돈다발 세고, 시계도 보고 하는지. 근데 핸들이 꼭 같이 찍혀? 외제차.”

“푸하. 빼박이네. 리스겠지.”

“부업 어쩌고 모집한다고. 인생을 돌아보는 ‘갬성’ 글귀도 한 번씩 올려놓고.”


그 몇 마디 잠깐 주고받는 사이에 박성욱이 기어이 나타나 버렸다. 어어, 온다 야! 쉿.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어이! 02학번들!” 저 멀리서 외치는 깩깩거리는 쇳소리가 너무 그대로여서 다들 제대로 경악했다가, 뭘 어떻게 했길래 살이 쪽 빠지고 슬림해진 모습에 한 번 더 경악했다. 


“에이씨. 김재우 옆에 앉혀. 책임지고 마크해라 새꺄.”

“그래. 양심껏 책임지자?”

“뭐? 아 싫어! 그럼 내 앞이잖아!”


뜬금없이 최대 피해자가 된 유정이 단호하게 어필했지만 한발 늦었다. 벌써 맞은편에 앉은 동기놈이 “선배님! 여기, 김재우 옆으로 앉으시죠!” 소리 지르면서 잽싸게 멀리 떨어진 빈자리로 가버렸다.

하필 왜 우리 테이블이야? 구승효랑 박성욱을 같이 두면 어떡해. 둘이 쎄한 사이라는 거 너네들은 까먹었니. 나 혼자만 그 험악했던 공기를 기억하냐고오오. 유정은 전화를 받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구승효의 흔적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입술만 잘근거렸다. 저 둘이 다시 붙여놓고 사이에 낄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숨 막혀.


“반갑다 야. 작년에 혜진이 결혼식장에서 다들 보고. 이게 얼마 만이냐.”


좋다고 껄껄 웃으면서 들어온 박성욱이 요란하게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매의 눈으로 와인병과 안주부터 오늘 모임에 참석한 멤버들의 면면까지 쭉 스캔했다. 무슨 소리를 어떻게 떠들어대서 본인을 돋보이게 할지, 드륵드륵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뭐 이렇게 소박한걸 먹고들 있어. 어이! 여기, 여기! 5만 이상 짜리로 안주 좀 쫙 깔아봐.” 딱딱 핑거스냅 섞어가며 세상 저렴한 주문을 마치더니 묻지도 않은 정보까지 대방출. 이건 내가 살게. 선배잖냐. 요새 일이 잘 풀려서 현금 좀 들어왔거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좁아 터진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 초록색 고야드 클러치가 일수가방처럼 번들거렸다.


“김재우 너 결국 장가 가긴 가냐? 축하한다 짜샤. 뭐, 식장 들어가기 전까지는 모르는거긴 한데. 청첩장 줘봐.”

“어, 예, 감사합니다. 청첩장은 아직 안 나왔어요.”

“그래? 예식장 어딘데. 나한테 물어보지. 뷔페 쩌는 곳 많이 알거든.” 


초토화된 분위기 따위 모르는 듯 김재우와 둘이서 와인을 소주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짠하고 원샷까지. 이어서 박성욱의 강제 아이컨택이 맞은편 유정에게로 튀었다. 어… 왜 긴장이 되냐. 마른침을 삼키는 유정을 향해 박성욱의 몸이 말 폭탄 시동을 걸려고 앞으로 슥 기울어지는데, 때마침 자리를 비웠던 구승효가 돌아왔다.


“구…승효? 아니냐?! 와! 대박! 너도 있었어?”

“......”


대꾸도 없이 고개만 까딱거리는 구승효를 본 박성욱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물론 순식간에 여유만만한 낯짝으로 회복되었지만. 당연히 구승효의 존재는 계산 밖이었겠지. 아마 제가 예전에 했던 유치한 짓들 때문에 뜻대로 나대지 못할 생각에 잠깐 찔렸다가, 더더욱 기죽기 싫은 특유의 양아치 근성이 다시 힘을 얻었을지도. 

그러거나 말거나. 박성욱이 저에게 아는 척을 하는 자체가 하찮다는 듯 픽 웃으며 물이나 따라 마시는 구승효. 정작 당사자는 무심한데 나만 쟤 기분이 상할까 걱정해주면서 스스로 가시방석 위로 올라 앉았네. 태연하게 옆에 있는 유정의 물컵에도 물을 채워 넣는 구승효가 새삼 대단해서 쳐다보고 있는데, 관심 받기 위한 박성욱의 고집은 다시 상대적으로 만만한 유정에게 들러붙었다. 


“예쁜 한유정이. 여전히 예쁘다 너는? 나이를 안 먹네.”

“아. 하하. 오랜만이네요 선배님.”

“야. 너도 결혼 축하해. 김재우랑 잘 어울려.”

“예?”

“어후, 농담이야 노옹담. 사실 나 대학때 니들 둘이 사귀라고 응원했잖냐. 02학번 중에서 제일 괜찮은 남자, 김재우! 저 상남자 같은 놈 정도면 나는 우리 한유정이 쿨하게 포기하고 보내줄 수 있다! 싶었지.”


수습 안 되는 분위기에 김재우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구승효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남슬기는 분명 입 모양이 욕이었는데, 미친새끼 였나 씨발새끼 였나 둘 다였거나. 저 선배 분위기 파악 못하는 것도 여전하네. 유정은 짜증 나서 승효가 따라둔 물이나 벌컥벌컥 마셨다.


“재우야. 나는 너가 남슬기랑 결혼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이것들 언제 그렇게 뒤에서 몰래 할 건 다 하고. 엉?”

“뒤에서는 아니고. 대놓고 했는데.”

“그래? 나 왜 몰랐지? 근데 남슬기 너 이제 사투리 아예 고쳤어? 허. 귀여운 매력이 사라졌네.”

“뭐래. 내 매력을 왜 걱정해요.”


삐딱하게 나간 남슬기의 반응에도 박성욱은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망의 시간. 주변에 앉은 사람을 한 명 한 명 다 짚어가면서 주접 떨때도 일부러 피해갔던 딱 한 명. 맞은편 대각선의 구승효만 남았다. 과연 사회에 나가서는 마주 쳐다보기도 힘든 높으신 분이 되어버린 구승효에게 어떻게 대할까? 예전처럼 지금도 대놓고 무안을 줄 수 있을까? 다들 나름의 관전 포인트를 가지고 은근히 기대하는 흐름이 미묘했다. 흥미롭잖아 강 건너 불구경. 


“이야… 화정로지스 사장님. 뉴스 봤어!” 

“예. 뭐.”

“네가 사장이라니, 거참. 오너 아들도 아닌데 그게 가능하나? 뭐 꼼수라도 썼어? 하긴 그것도 능력이겠지! 아무튼 잘 됐다.”


첫 포문은 뻔뻔함을 장착한 박성욱의 도발. 근데 본인도 찔렸을 거다. 이제 구승효의 사회적 위치와 파워가 본인과는 비교도 안 되니까. 그래서인지 갑자기 주제를 돌리면서 꼬리를 내렸다.


“그… 화정로지스에 임선호도 다니잖아! 기억하지? 01학번 임선호!”

“예. 경영지원본부 임선호 과장. 회사 잘 다니고 있습니다.”


흐익! 이번에는 유정이 뜨끔할 차례였다. 진짜 임선호 선배도 화정로지스다녀? 세상 참 좁네… 그 선배 때문에 울고불고 하던 흑역사가 며칠쯤 되더라, 세어보느라 머릿속이 바빠졌다.


“야, 아이씨. 그냥, 그래. 어? 과거는 털고 앞으로는 잘 지내보자, 승효야!”

“...뭐가 있습니까? 털고 말고 할게.”

“그렇지? 그렇다니까! 역시 쿨해. 악수 한 번 해보자. 아 씨바 나도 대기업 사장 손 한번 잡아 보자!”


급발진하던 박성욱은 나름의 정면승부를 던진 것 같았다. 그런다고 그때의 양아치 짓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닐 텐데. 어쨌든 구승효의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잘 못 해석하고 벌떡 일어나서 대차게 뻗은 박성욱의 손. 그리고 그걸 그대로 지나쳐 와인잔을 넣고 천천히 굴리던 구승효의 손. 

아마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우리 대신 사이다를 먹여줘서 내적 환호 장난 아니었을걸?

하지만 박성욱은 역시 강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게모르게 킥킥거리는데도 굴하지 않고, 일어선 김에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면서 테이블 아래 두었던 종이가방을 끌어올렸다.


“아 맞다! 너희들 이거 요새 난리 났는데, 알아? 내가 몇 개 빼 왔어.”


자, 하나씩 받아. 옆자리 김재우를 시작으로 모인 멤버 전체를 크게 빙 두르며 네모난 상자를 하나씩 들이민다. 영양제? 약인가?


“나 살 좀 많이 빠지지 않았냐? 이거 먹고 다 뺀 거야. 우리 협력회사 신제품인데, 회원제로만 판매하는 거거든? 내 이름으로 챙겨온 거니까 다들 14일분 먹어보고 또 살 거면 얘기해. 내가 저렴하게 잘 해줄게.”

“아… 선배님 제약회사 다녀요?”

“아니아니, 우리 회사는 유통만 전담해. 이거 아직 일반 경로로는 판매 안 하는거라서 인스타나 페북에 사진은 올리지마. 남슬기 너는 많이 필요할 거 같으니까, 자, 두 개!”

“뭐라고요? 나 살 빼란 뜻이에요?”

“관리 해야지 그럼. 결혼식 앞두고. 재우야, 먹여보고 효과 있거든 연락해라.”


정말 먹어도 되는 물질인지 상당히 의심스러운 조악한 글씨체의 알록달록 상자를 들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무 생각 없이 흔들어보기만 하는데 박성욱이 그런 유정의 빈틈을 치고 들어왔다.


“유정아. 너 M백화점 다닌다고 했나?”

“저요? 어, 네.”

“잘 됐다. 우리 회사에서 백화점 공급 한 번 뚫어보려고 하거든! 무슨 팀이야? 나 식품 코너 MD 연락처좀 알려주라.”

“아… 글쎄…요. 하하. 하. 하.”

“너는 번호가 뭐지? 너도 명함 좀.”


아. 내가 바로 그 식품팀 MD인데요. 그런데 그 말을 뱉으면 박성욱이랑 귀찮게 엮일 것 같아서 죽어도 말 하기 싫었다. 대충 웃음으로 때우는데 명함까지 구체적으로 물고 늘어지네? 안 챙겨왔다고 해봤자 휴대폰 번호는 남겨줘야 할 판. …차라리 번호를 줘버리고 차단을 박을까,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이거 얼마에요?”

“어?”

“약. 가격이 얼맙니까.”


구승효가 끼어들었다. 

톡톡 손가락으로 약상자를 가볍게 치면서. 임원 보고 때 가만히 계시던 최종 보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하는 태도로. 그럼 발표자는 순간 쫄게 되어 있다. “어, 승효야. 7, 7만원… 인데. 너는 내가 특별히 더 할-” 당당하던 박성욱도 목소리가 점점 쭈그러들었다. 근데 이건 남의 일이 아니라 미래 예언일지도. 아마 몇 주 후면 유정도 곧 화정로지스 구승효 사장과 다른 임원들 앞에서 입찰 참여 프레젠테이션을 하다가 저렇게 쭈그러들 예정이니까.

박성욱을 정면으로 응시하던 구승효가 천천히 수트 재킷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지갑을 꺼낼 때만 해도 설마 했는데. 지폐 몇 장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두고 박성욱을 빤히 쳐다본다. 그대로 굳은 박성욱에게 무표정한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리고 다시 눈짓했다. 돈. 받아. 


“여기, 우리 거 전부 살게요. 9개 였나요? 70만원. 나머지는 그냥 가지시고.”

“......”


기세좋던 박성욱이 말을 잃었다.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약하게 손까지 떠는걸 보니 화가 났나 본데, 화를 낼 명분도 없고. 돈 주고 산다는데 뭐 때문에 묘하게 기분이 나쁜지는 본인도 모르는 눈치였다. 


“야. 구승효.” 


기껏 목소리를 잔뜩 깔아 무게를 실어도 위력이 없었다. 일어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건 박성욱인데 오히려 구승효의 쏘아보는 눈빛에 압도 당하는 것 같아 박성욱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니, 취소. 저 선배는 당해도 싸. 


“너 명함 좀 주면 안 되냐.”


테이블 위 수표를 챙기며 뱉는 박성욱의 톤은 금세 아까처럼 올라가 있었다. 구승효는 어이없는 웃음을 픽 흘리며 다시 한번 지갑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생생히 기억하는, 박성욱을 비롯한 01학번 선배들과 구승효의 살벌한 관계성이 시작됐던 건 그 날이었다. 

인적자원관리 수업이 3시였는데 평소라면 2시 50분에는 왔어야 할 그 애가 수업 시작 2분 전에도 강의실에 오지 않아서 신경 쓰였던 날. 나보고는 지각하지 말라고 전화로 잔소리까지 해주고 정작 본인은 왜 늦냐. 물론 내 레포트까지 인쇄 해주기로 했는데 애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것도 걱정 되고. 그래서 겸사겸사 강의실 밖까지 나가 어슬렁거렸었다.

얘는 휴대폰을 왜 안 사는 거야. 다른 사람이 불편하잖아. 궁시렁거리는데 정확히 수업 시작 1분 전에 저쪽 복도 모퉁이에서 모자 쓴 그 애가 오는 게 보였다.


“야. 너 지각할 뻔했어. 내 레포트는 무사하니?”

“......”


평소라면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손이라도 휘휘 저으면서 상대해줬을 텐데, 그 날의 구승효는 미미하게 입꼬리만 슬쩍 올려 보이고 나를 슥 지나쳐 강의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 있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번에는 01학번 선배들 무리가 강의실을 향해 몰려왔다. 박성욱 선배가 다치기라도 했는지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무리보다 좀 처져서 오고 있었고. 바지에 주렁주렁 매단 체인이 엇박으로 덜그럭 거리면서도 부지런히 절뚝이며 따라오는데 아무도 부축도 안 해주고. 좀 너무한다 싶었던 기억. 물론 내가 부축해줄 생각도 절대 없었지만.

그날은 수업시간 내내 강의실 공기가 묘하게 흘렀다. 01학번 선배들이 계속 우리 쪽을 흘끔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뭔가 쑥덕거리더라고. 그러다가 교수님이 잠깐 쉬는 시간을 주셨고 구승효가 자리를 비운 틈에 01학번 선배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유정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02학번 중에서 이번 수업 듣는 애들 또 누구있어? 남슬기랑 다른 애들.”

“안혜진, 이지은, 어, 그리고 김재우랑-”


임선호가 싱긋 웃으며 말을 붙이면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남자애들은 다음에 하고. 이따가 수업 끝나면 너 친한 여자애들 데리고 후문에 개미집으로 와. 01학번 중에 오리엔테이션 못 따라간 애들이 대면식 하자고 해서.”


대면식? 그건 또 뭔데. 듣도보도 못한 행사에 눈알만 굴리고 있었더니 임선호가 더욱 가까이 붙어왔다. 남자 스킨향 같기도 하고, 은은하면서도 쿨한 선배의 진한 향수가 코 끝에 맴돌 정도로.


“그 핑계로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너랑.”

“아…”

“그리고 유정아, 너 휴대폰 번호좀.”


임선호가 내미는 휴대폰에 번호를 찍으면서 혹시 손이라도 떨까 봐 숨까지 참았다. 휴대폰을 가져가면서 내 손을 감싸듯 스친 임선호의 손이 부드럽고 따뜻해서 숨 참길 잘 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거든.


“...유정이는 향이 좋네. 샴푸 뭐 써?”

“잘, 잘 모르겠어요. 그냥 집에 있는 거…”

“그래?”


임선호가 무언가 더 이야기 하려는데, 내 옆자리 주인 구승효가 돌아오는 바람에 흐름이 끊겼다. 휴. 덕분에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는 있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임선호 옆에 서서 눈으로 비키라고 말하는 구승효는 늘 그렇듯 무표정했고, 임선호는 서글한 큰 눈을 휘어지게 웃으며 어깨만 으쓱 하더니 내 팔을 부드럽게 도닥이면서 일어났다.

“문자 해도 되지? 이따 끝나고 보자.” 마무리까지 그렇게 완벽한데 어떻게 여운이 안 남겠냐고. 01학번 중에서 제일 잘생긴 임선호 선배가 친해지고 싶다고 그랬어, 나한테!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면 복도라도 한 번 뛰고 와야 할텐데 벌써 교수님이 들어오셔서 수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01선배랑 무슨 얘기 했어. 술 마시자고 그래?”

“어? 어, 어. 오늘은 여자애들 먼저 대면식 하고 남자애들은 다음에 한데.”

“......갈 거야?”

“글쎄… 다른 애들 갈 건지 물어보고.”


근데 선배가 술 이야기 꺼낸걸 구승효는 어떻게 알았을까. 여자애들만 먼저 챙긴다고 해서 서운하려나? 슬쩍 바라봐도 모자 아래 그늘진 눈은 무슨 생각인지 읽히지 않았다. 나직이 물어본 그 뒤로는 별다른 반응도 없고, 그저 내가 사 오라고 부탁한 캔커피를 건네주고 자기 몫의 주스를 마시면서 필기에 열심이었다. 

좀 전까지 느낀 싸늘했던 01학번과의 분위기 어쩌고는 벌써 저만치 잊어버린 지 오래였지. 그러고도 한참을 자꾸만 기어 올라가는 입꼬리 내리기에 집중해야 했다. 향이 좋다고 했어…! 선배님도 향이 좋던데. 그 짧은 문장을 곱씹을수록 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려고, 수업시간 내내 구승효가 사다 준 캔커피는 마시지 못하고 뺨에 붙이고 있어야 했다.





“예쁜이 한유정이. 옆에 앉아도 되지?”

“예? 아… 네.”


그 다음번 전공 필수 수업. 

여느 때처럼 남슬기와 김재우가 내 앞에 같이 앉아 과자를 먹고 있었고, 나는 휴대폰 게임을 하면서 도서관 근로장학생을 마치고 올 구승효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자리에 가방이 올라오길래 구승효인줄 알았는데. 빨간색 이스트팩이 아니라 꼬질꼬질한 나이키 더플백이 놓여서 쳐다보니 박성욱이 징그럽게 웃고 있었다. 

원래 강의실은 암묵적으로 앉는 자리가 대충 정해져 있는 거 있는거 아니었어? 여기는 따로 주인이 있다고 정색했어야 하는데, 그 말이 차마 튀어나오지 않는 거다. 통로 건너 내 옆자리에 앉는 임선호 선배 때문에. 그 애랑 둘이 무슨 사이라도 되는 듯 괜한 오해 받을까 봐 걱정이 앞서서. “이쪽 자리가 더 밝고 괜찮네. 다음부터 이쪽에 앉자.” 그렇게 다른 01선배에게 말하면서 날 쳐다보는 임선호. 얼굴이 서서히 익어가는 게 느껴져서 그저 책에 고개를 박고 있어야 했다.

덕분에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불청객이 차지해버린 자리를 스쳐 지나가, 구석 맨 앞으로 가던 구승효의 표정은… 어땠더라. 잘 모르겠어. 보지도 못했거든.


“니들 그거 아냐? 저 새끼 별명.”


쉬는 시간. 구승효가 앉아있던 자리를 턱으로 찍으며 박성욱이 쇳소리를 냈다.


“농부래 농부. 씨를 하도 처뿌리고 다녔댄다! 으하하!”


응? 그게 왜? 무슨 뜻인데? 나랑 남슬기는 영문을 몰라 서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주변에 앉은 다른 01학번 남자 선배들은 지들끼리 좋다고 낄낄 웃다가, 아예 배를 잡고 책상에 엎드려 끅끅거렸다. 도대체 그게 뭔데 이 난리야.


“구승효 나온  OO고에 내 동생 친구 동생이 다니거든? 졸업 전에도 유명했데.”

“뭐가요?”

“아. 뭐. 그렇고 그런 거로. 여자애들한테 이런 말 해도 되나… 애도 지운 모양이던데.”

“네…?”

“그거 때문에 수능 치고 한창 담임한테 불려 다녔데. 얼마나 심각한 사연이면 그랬겠냐. 수능 끝나면 원서 쓸 때 말고는 놀기 바쁜데 왜 상담을 하겠어.”


그럴 리가. 믿을 수 없어서 입만 어벙하게 벌리고 있었다. 

워낙 큰 소리로 말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들었겠지. 적막이 깔린 꽉 찬 강의실에서 사람들은 대화를 멈추고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오랜만에 반응이 세게 와서 신이 난 박성욱은 더욱 힘차게 떠벌거렸다.


“우리 학교에 OO고 출신들 동문회 하는 거 알지. 엊그제 모였는데 구승효는 거기 안 갔더라고. 못 가는 거지. 소문 퍼질까 봐. 이미 경영학과 다른 반 애들도 다 알걸? 그래서 저 새끼 맨날 혼자 다니잖아.”

“아니 그래도… 못 믿겠어요.”

“맞다. 이런 거는 본인한테 직접 들어봐야 아는 기다.”


남슬기가 당장이라도 구승효를 찾으려는듯 벌떡 일어나려 했다. “야, 야 그러지마.” 그러다 박성욱의 저지에 멈칫했다.


“절-대 저 놈이랑 엮이지 마. 사소한 거라도. 저런 애들이 작정하고 밑밥부터 깔고 접근하면 너네도 피해 본다.”

“승효가 절대 그럴 애가 아닌데…”

“와. 이거봐. 이렇게 된다니까? 유정이 얘가 또 넘어갈 뻔했네. 내 얘기 안 들었으면 어쩔 뻔 했냐? 너처럼 순진한 애들은 특히 조심해야돼.”


마침 강의실 앞문으로 들어온 구승효가 보였다. 여전히 믿기 힘들었다. 물론 저 애는 잘생겼고, 쓸데없는 말 안 하고, 다정하니까 인기가 많았을 수는 있지. 그런데… 

진짜일까? 

알게 된 지 두 달 밖에 안 된 친구인데 내가 너무 바보처럼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쉽게 사람을 믿는 건가. 다들 대학에서 사귀는 사람들은 가식적인 관계이고 이상한 사람 많으니까 조심하랬는데.


“아. 존나 역겹네! 쯧. 종강 한참 남았는데 그때까지 어떻게 같은 강의실에 앉아있냐.”

“......”


갑작스러운 박성욱의 발광. 뒤를 돌아보는 구승효와 눈이 마주쳤다. 가늘어지는 눈매로 날 보는 표정이 미묘했다. “뭘 봐.” 다들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지 꼴사납게 건들거리는 박성욱과 상황 파악이 덜 된 구승효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여전히 갈피를 못 잡은 채.


“더럽다 더러워. 그렇게 발랑 까져가지고 공부는 또 어떻게 해서 대학까지 왔어.”

“나한테 하는 말입니까?”

“왜요. 찔리세요 후배님?”


야.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만해라 성욱아. 교수님도 오신다. 임선호가 점잖게 말리는 바람에 구승효에게는 불리하게 대화가 끝나버렸다. 

수업 마치고 나서는 과방에서 피자 시켜 먹자는 01학번 등쌀에 붙잡히고, 어이없게도 그다음부터 내내 중간고사 기간이라 처음 맞닥뜨린 대학 시험 범위의 매운맛에 허덕이면서 공부에, 시험에 쫓기느라 또 그 애랑은 제대로 얘기할 기회조차 없었고. 

폭풍 같은 2주일을 보내고 다시 돌아온 강의실에서, 구승효는 천하의 문란한 놈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왜 안 와? 어딘데]

[곧 갈게]


남슬기 문자에 답장을 보내고 시간을 확인했다. 올 때가 됐는데. 

오늘 화요일이니까 구승효는 아마 과외를 하고 지하철을 내려서 경영대 정문으로 들어오겠지. 거봐, 이렇게 서로 일정을 꿰고 있을 정도로 친하게 지낸 정이 있는데, 한순간에 매몰차게는 못 끊겠어. 다 큰 성인들이 한심스럽게도 왕따를 주도하는 이런 분위기도 마음에 안 들고. 

그래서 구승효와 이야기해 보려고 경영대학 정문에서 그 애를 기다렸다. 어차피 지금 들어가 봐야 박성욱이 옆에 앉을거고. 그것도 싫어.


“저기, 승효야.”

“왜.”


그렇게 일단 건물로 들어서는 구승효를 불러 세웠는데, 막상 맞닥뜨리니까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 너 여자애들이랑 엄청 막… 그런 거 진짜야? 라고 물어보는 것도 웃기잖아.


“어… 중간고사 잘 쳤나 해서.”

“어.”

“응. 그래.”

“......”

“......”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 하고 싶은 말들도, 궁금한 것들도 전부 입안에 고여 달싹이기만 했다. 그 소문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이 애는 타격이 전혀 없나? 내가 괜한 걱정을 해주는 걸까. 별 생각을 다 하는데 손목을 틀어 시계를 확인하던 구승효가 먼저 침묵을 깼다.


“...들어가자.”


뭐랄까. 그 애의 가라앉은 음성과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는 약간의 틈 사이로, 당혹과 서운함을 선명하게 엿본 느낌이었다. 단단하고 고요한 겉모습 이면에 자리 잡은 외로움. 쓸쓸함. 어른스럽고 강하게 포장하려 애쓴 수고가 무색하게도 불쑥 비집고 튀어나오는 스무살 또래다운 감정들. 

그제서야 구승효답지 않게 기운 없는 몸짓과 어딘지 처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상처 받았구나. 너. 


그리고 그날 확실히 깨달았다. 역겨운 건 오히려 박성욱 쪽이었다. 

강의 후 4명씩 묶어서 팀 프로젝트 과제를 수행하라는 공지가 떨어졌다. 조를 짜고 전략을 세우느라 웅성거리는 소리로 어수선한 강의실. 내 옆에 앉은 박성욱이 지저분하게 기른 머리를 쓸면서 툭툭 어깨를 쳤다.


“4명 딱 결정됐네. 유정이, 나, 남슬기, 김재우. 야 니들 PPT좀 하냐?”

“선배는 다른 01 선배들이랑 안 하세요?”

“어 난 니들이랑 할래.”


팀장은 내가 하고, 자료 조사랑 발표랑 PPT 만드는 건 어떻게 나눌지 생각 좀 해볼게. 혼자 좋다고 킬킬거리던 박성욱을 뺀 나머지 셋은 눈짓을 주고받기 바빴다. 야, 진짜 같이 할 거야? 그럼 어떡해. 꺼지라고 너가 말해볼래? 확 군대를 보내던가.


“아아. 근데 내가 1년 더 학교를 다녀보니까 말야.”


또 무슨 헛소리를 시전하려고. 박성욱은 유독 주목을 끌고 싶어질 때 나오는 특유의 건들거림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저런 멀쩡한 척 가면쓴 싸이코들이랑은 절대 팀플 하면 안 돼. 특히 여자애들은.”

“......”

“자료조사 핑계 대면서 밤에 연락하고, 둘만 따로 만나서 발표 자료 만들자 그러고. 그렇게 하다가 하나 얻어 걸리면 그땐 본색 드러내는 거지. 니들은 절대 저런 놈이랑 팀플 하지 마.”


바르게 앉은 구승효의 뒷모습을 손가락질까지 섞어 빈정거리는 박성욱의 입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저런 역겨운 인간이랑 엮일 내 인생이 불쌍하니까, 그 용기를 다른 쪽으로 쓰기로 했다.


“나는 선배님이랑 팀플 안 할래요.”

“뭐?”

“승효야! 구승효! 같이 하자, 팀플. 너랑 할래.”


아예 가방을 통째로 들고 앞쪽에 앉은 구승효에게로 갔다. 비어있는 옆자리에 앉으면서 계속 조잘거렸다. 만회하고 싶어서. 실체 없는 소문에 잠깐이나마 흔들렸던 바보 같은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나 중간고사 망했거든? 그러니까 너가 팀장해서 책임지고 A 만들어줘야해.”

“...나랑 같이 하면 과 생활 꼬일 텐데.”

“뭐래.”

“너도 알잖아. 소문들. 그리고 그 소문이 도는 이유는 ‘구승효 옆에 아무도 가지 못하게 막아라’인 것 같아서. 내 옆에 네가 있으면 너도 선배들한테 찍힐 거고.”


다 알고 있었네. 심지어 분석까지 했냐. 

그게 뭐가 중요한데, 라고 말하려다가, 구승효에게는 그것보다 더 확실한 위로가 필요해 보였다.


“나는 그거 안 믿어. 널 믿어. 그러니까 상관 없어.”


하. 짧은 탄식과 함께 구승효의 눈매에서 힘이 툭 풀렸다. 

늘 당당히 고개 들고 앞만 빤히 쳐다보던 그 애가 이렇게 시선을 오래 떨어트린 적이 있었나. 빠르게 깜빡거리던 눈은 어느새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선명하게 미소띈 얼굴을 끄덕이며 그래. 같이 하자. 느릿하게 중얼이는 톤이 듣기 좋았다.


“느그 둘이만 팀 짤 생각은 아니겠지? 나도 끼워도.”

“야. 나도, 나도 같이하자. 승효야. 난 A는 안 바래, B만이라도! 살려줘.”


남슬기와 김재우도 잽싸게 달려오고. 이제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네. 뒤에서 박성욱이 뭐라 지껄이든 말든, 4명을 완성한 우리는 조교에게 팀원 명단을 제출하고 오랜만에 다같이 쟁반짜장을 박살 내러 갔던 것 같아. 

그 뒤로도 박성욱이 여러 번 구승효를 대놓고 비난하긴 했는데, 그저 무시로 일관했고 다른 사람들도 점점 박성욱 자체의 병맛 발언들과 삽질 때문에 믿지 않는 눈치였다. 사실 그 이후로는 구체적인 사건들은 기억 안 나. 지나치게 신경을 안 써서 그런가?

그리고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애 비슷한걸 하느라 정신이 반쯤 팔려 있기도 했고.




잡식에 죠필을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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