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ring: 알렉스 서머스(하복)/션 (밴시)

Rating: R



션은 체리맛 사탕을 입에 문 채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변비엔 푸룬 주스가 나을까 사과주스가 나을까?'

행크의 은밀한 귀뜸에 의하면 오랜 좌식 생활이 문제가 된 모양인지 교수님은 요즘 변비에 시달리고 계시다고 했다. 그는 장보기에 당첨된 그들에게 직접 브랜드 명까지 적어주며 어떤 특별한 주스를 사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듣기론 그게 교수님의 변비해소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모양인데, 오는 길에 병신 같은 알렉스 새끼가 메모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메모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는다. 그 간단한 일이 안되나? 밴시는 입 안의 사탕을 불만스럽게 실룩이며 두 개의 주스를 비교했다. 그가 좋아하는 건 사과주스였지만 어쩐지 효과가 있을 것 처럼 보이는 건 푸룬 주스 쪽이다. 이런게 약효마저 없다면 인간이 이따위 색깔의 음료를 음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밴시는 마음을 결정하고 두 병 다 집어들었다. 모르겠으니까 알렉스에게 물어보자. 깐깐하기 그지없는 행크는 자기가 써준 물품이 그대로 장봐온 물건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미친 듯이 히스테리를 부리곤 했다. 알렉스와 그가 '블루헤어 증후군'이라고 부르게 된 그 증세는 꽤나 끔찍해서 한 번 당하고 나면 두 번 다시 같은 종류의 실수는 되풀이 하고 싶지 않게 된다.

"헤이, 알렉스. 이것봐-?"

음료 코너에서 삐쭉 고개를 내민 션은 알렉스를 소리쳐 부르려다 말고 목소리를 줄였다. 그들이 이제껏 장을 본 커다란 카트를 밀고 있는 알렉스의 옆에 웬 훤칠한 남자 하나가 붙어 서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션은 그 남자가 알렉스만큼이나 뺀질뺀질한 얼굴에 그만큼이나 키가 크고 머리카락도 근사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바닷가에서 실컷 해수욕이라도 한 것처럼 색이 바랜 머리색은 샌디골드에 가까웠고, 멋부리듯 차려 입은 실크 팬츠 위에 화려한 베스트를 입고 있는데다 목에는 스카프 같은 것까지 매고 있는 걸로 볼때 어지간히 차려입기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남에게 보이는 걸 무척 신경쓰는 부류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점 외에 도통 파악되는 게 없었다.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새하얀 이빨로 볼때 훌륭한 치과보험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글쎄. 알렉스에게 저렇게 부유한 친구도 있었나?

션은 유심히 그들을 구경하다가, 그 남자가 알렉스의 말에 과도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팔을 쓰다듬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우웩 소리를 냈다. 여기선 뒤통수만 보여서 알렉스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안보였지만 션은 그가 왜 저 병신같은 인간의 콧잔등에 주먹을 꽂아주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잠시 동안 더 이야기를 나눴고, 남자는 매우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알렉스는 한번 부르르 떠는 시늉을 하더니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때마침 그를 보고 있던 션의 시선도 그 즈음에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시선은 허공에서 딱 마주치고 말았다.

"뭘 봐?"

알렉스는 어이없다는 듯 타박하며 카트를 끌고 왔다. 션은 사탕으로 한쪽 볼을 불룩하게 만들며 아무렇지도 않게-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에게 물었다.

"누군데?"

"아는 인간."

"아는 인간?"

"몇년 전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서 통성명만 한 사이야. 시팔, 니가 행크야? 뭐가 그렇게 궁금해?"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까 궁금하지. 여기서 보니까 되게 친해보이던데?"

션은 알렉스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은근히 긁었다. 팍하니 인상을 쓴 그는 션의 질문에 대꾸하지 않고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주스병으로 관심을 돌렸다.

"둘 중 어느게 소중하신 변비해결 주스냐?"

"모르겠거든. 네가 맞춰보시지?"

"이게 무슨 블랙잭이냐. 맞춰보고 말고 하게. 머리 좀 굴려봐. 나보단 네가 낫잖아."

"그러게 누가 메모지를 잊어버리래. 난 모르겠으니까 니가 찍어. 찍고 나서 감당도 네가 하는 거야."

"아 시팔, 왜?"

"왜냐하면 메모지를 잃어버린 사람이 바로 너니까?"

"젠장!"

알렉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부모님의 원수라도 만난 듯 두개의 병을 노려보았다. 션이 보기에 음료수 병을 노려보는 그의 태도는 자신들에게 쏘아지는 미사일을 응시할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고민스러워 보였다. 한참동안 고민하던 그는 눈을 질끈감고 푸룬 주스 병을 집어들었다. 션은 사과주스 병을 선반에 돌려 놓으며 결정의 이유를 물었다.

"그걸로 결정한 이유가 뭐야?"

알렉스는 미간을 심각하게 찌푸린 채 푸룬주스의 라벨을 노려보며 대꾸했다.

"인간이 이런 걸 먹어야 한다면 존나 확고한 이유가 있어야 될 거 같거든."

션은 그 말에 동의했다. 주스 결정을 끝낸 후 그들은 홀가분하게 나머지 장을 보기 시작했다. 미지의 **주스를 제외한 다른 물품들은 평소에도 사용하던 생필품들이라 기억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행크에 의해, 행크를 위해, 행크만의 선택에 따른 브랜드를 골라 산처럼 카트에 쌓아 올리고 계산 대쪽으로 나갔다. 션은 언제나 이 시간이 좋았다. 평소라면 엄두도 못낼 금액의 가계수표에 자기 이름을 서명하고, 멋지게 수표를 끊어 점원에게 전달하면 백만장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걸 좋아하는 건 알렉스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언제나 가위바위보로 서명할 사람을 결정하곤 했다. 오늘의 권리를 쟁취한 사람은 알렉스였다. 션은 약간 아쉬웠지만 복불복의 결과를 낳을 푸룬주스를 떠올리곤 찰나의 행복을 알렉스에게 양보했다.

"그래서? 어떤 파티였는데?"

짐을 모두 짐칸에 싣고 운전석에 올라탄 알렉스와 션은 마트의 주차장을 빠져나와 웨스터 체스터의 저택으로 향했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션은 너무나도 불쑥 질문을 던졌고, 채널을 조절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찾고 있던 알렉스는 잠시동안 그가 뭘 물어보는지 알지 못했다.

"무슨 소리야?"

"아까봤던 그 남자, 어떤 파티에서 만났었냐고. 아무리 봐도 그런 사람이랑 네가 면식이 있다는 게 수상해. 무슨 이상한 파티라도 갔었던 거야?"

알렉스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그는 곰곰히 생각에 잠긴 것처럼 도로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가 션에게 결정적인 베팅을 걸어왔다.

"좋아. 이야기 해줄께. 대신 이 이야기를 하면 주스에 대한 책임은 네가 지는 걸로 하자. 어때? 콜?"

션은 그 말을 듣고 심각하게 갈등했다. 별 거 아닌 이야기라면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줬을 텐데, 알렉스는 이상하게 이 일을 숨기려 들었다. 그런 행동 자체가 때아닌 호기심에 불을 지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어쩌지? 콜 할까? 션은 눈을 굴리며 거의 다 녹아가는 사탕을 쪽쪽 빨았다. 어쩌면 이 모든게 주스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고 싶은 알렉스의 음모일 수도 있었다. 모든 건 블러핑에 불과하고, 실상은 고등학교 때 프럼에 같이 갔던 전 여자친구의 사촌오빠의 이종사촌 동생이 그 남자였다 따위의 얼척없는 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션은 호기심에 죽고 호기심에 사는 생물이었다. 그는 초조하게 무릎을 덜덜 떨다가 목덜미를 긁고, 괜시리 쓸데없이 입안의 사탕까지 한번 깨물어 본 다음 알렉스의 거래에 비장하게 응했다.

"좋아."

"...진짜?"

"상관없어.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어."

션이 호기롭게 거래에 응했음에도 알렉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끄응-하고 변비환자 같은 소리를 내기만 하던 그는 운전대를 단단히 잡고 도로에서 엘크가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앞만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좀 놀던 시절에, 아는 형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 형이 나를 부르더니 근사한 선상 파티 같은데 초대가 됐다고 하는 거야. 존나 예쁜 모델들도 잔뜩 오고, 패션 디자이너도 오고, 술도 공짜고 요트도 초호화판이라면서 꼬셔서 넘어갔거든? 근데 거기서 아까 그 인간을 만났어."

"와, 좋았겠다? 그런데도 다 가보고?"

뜻하지 않은 고백에 션은 조금 질투심까지 느끼며 빈정거렸다. 하지만 알렉스는 끔찍한 기억이라도 되살린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았겠냐? 모델이 있긴 있는데 죄다 남자고, 패션 디자이너도 남자고, 바다 한 가운데에 떠있어서 요트에서 뛰어내리지도 못하는데 배 튀어나온 중년 아저씨가 들러붙어서 계속 술을 권하면서 내가 취하면 뭔가를 해보려고 껄떡대던 그런 파티였다고! 씨발 존나 끔찍했어. 온사방에서 내 엉덩이를 한번씩 다 만지고 지나가면서 자기 방이 몇호라고 알려주고, 파티의 주인이라는 인간은 내 곁에 딱 달라붙어서 요즘 쓸쓸하니까 애인이 필요한데 잠깐 애인이 되어주면 섭섭지 않은 사례를 해주겠다며 내 허벅지 안 쪽으로 손을 집어 넣- 아오! 그 형이란 새끼를 다시 만나면 내가 가만 두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인간도 지가 뭘 잘못했는지는 아는지 전화로만 싹싹 빌고 두 번 다시 안 나타나더라. 자기도 잘못 전해 들어서 그런 파티인 줄은 정말 몰랐대나?"

"풋. 그게 뭐냐 씨팔-. 존나 웃기네. 너 그럼 잡아 먹힐 뻔 한 거야, 늙다리들한테?"

"헛소문 낼까봐 미리 말해두는데 정조 확실히 지키고 내렸다. 그리고나선 두 번 다시 선상파티 같은 덴 발도 안들였어 내가."

"그럼 그 남자는 뭐야? 그 남자도 그때봤던 모델이야?"

"그래. 그때 거기 있던 모델 새끼야."

"모델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버나봐. 옷차림이 장난 아니던데. 잘나가는 모델인가?"

"잘나가긴 개뿔. 자랑하는 거 들으니까 그때 그 파티에서 낚은 부호 하나가 몇 년동안 끼고 살다가 죽을 때 유산 물려줬다더라. 요트도 하나주고 집도 주고 차도 주고 그랬대. 그래서 요즘은 파티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자기가 파티를 연다나. 나보고도 언제 한번 놀러 오라는 거 됐다고 했어. 뭔 꼴을 당하려고 내가 거길 가."

알렉스는 분통이 터진다는 듯 이를 득득 갈며 뒤늦게 자기에게 추파를 던진 모델을 성토했다. 하지만 그런 반면 션은 드물게 조용했다. 그는 뭔가를 계산하듯 손가락을 짚어보더니, 매우 아쉬운 얼굴을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깝다."

"뭐가?"

"너도 그때 생각만 잘했으면 팔자 고치는 건데. 나도 요트 한번 타보고 싶었단 말이야."

"야!!!"

션의 어투는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끼게 할만큼 진실되게 들렸다. 그의 말을 듣고 열이 빡 받은 알렉스는 그 자리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소리를 꽥 질렀다. 깜짝 놀란 션은 다급히 손잡이를 붙잡으며 황망한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왜 화를 내고 그래?"

"너 임마 그게 애인이라는 새끼가 할 소리야? 내 엉덩이 팔아서 요트가 갖고 싶냐? 와. 이 새끼 진짜 나쁜 새끼네? 너 나중에 돈 없으면 나 매춘도 시키겠다?"

"말 한번 살벌하게 한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진짜 그러래?"

"웃기지 마. 니 얼굴에 진심이라고 딱 써있거든? 나 진짜 화났으니까 빨랑 화 풀게 만들어. 화 안풀게 만들면 나 진짜 가만 안 있는다?"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그를 돌아본 알렉스는 진지하게 션에게 을러댔다. 션은 미간을 잔뜩찌푸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에휴,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 사탕 먹었어. 너 싫어하는 체리맛이야."

"어쭈? 빼지?"

"빼는 게 아니라 경고하는 거야. 또 첫키스가 체리 맛이니 끈적끈적하게 달아서 내 입에 토할것 같으니 그딴 소리하면 죽는다고."

션은 입을 삐쭉이며 목을 길게 빼 알렉스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나 화났으니까 진지하게 해라. 더 깊게 해라. 알렉스의 무언의 요구를 들은 션은 그의 요구대로 혀를 내밀어 입천장을 쓸고 그의 혀를 부드럽게 핥았다. 한참동안 뻣뻣하게 버티고 있던 알렉스가 뒤통수를 움켜쥐며 션의 입 속으로 파고들어온다. 션은 그에게 키스를 하며 내 애인이 잘생기긴 참 잘생겼지. 이렇게 잘 생긴애도 보기 드물어? 하는 남모를 우월감을 은밀히 만끽했다. 잘생긴 놈이 키스도 잘했다. 션은 쪽쪽 소리가 날때까지 물고 빨고 핥으며 서로의 혀를 희롱하는 알렉스의 키스에 흠뻑 빠져 한동안 그들이 길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사실도, 시동도 안 끈 차를 세워놓고 있단 사실도 모두 잊고 있었다. 여기가 한적한 시골길이라 천만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사고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체리맛 더럽게 맛 없네."

키스를 끝낸 알렉스는 투덜거리며 운전석에 앉았다. 션은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면서 해줘도 지랄이야 등신아 하는 뜻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빛났다. 그는 느닷없이 고개를 숙이며 알렉스의 허벅지 쪽에 머리를 파묻었다. 알렉스는 순간 기겁을 하며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야 이 새끼야. 미쳤냐? 길 한가운데서 뭔 짓을-."

"꿈도 야무지네 변태새끼. 이거, 메모장. 운전석 바닥에 흘려놓고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눈이 삐었어?"

션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메모장을 끼워서 줏어 올리며 신랄하게 빈정거렸다. 조금 얼굴이 빨개졌던 알렉스는 그의 손에서 메모를 낚아채 문제의 주스 항목을 살펴보았다.

"뭐라고 적혀있어?"

"아싸! 푸룬 주스!"

"종목만 중요한 게 아니야. 라벨도 중요해. 라벨은 뭐라고 적혀 있어?"

"'테일러'라고 돼있네. 색깔 다른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데다 별표도 두 개나 쳤어."

"우린 뭐 샀는데?"

"글쎄.... 델몬트?"

두 사람은 잠시동안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한참 후, 한숨을 푹 쉰 알렉스가 운전대를 틀어 차를 돌렸다. 션은 짜증을 부리며 등받이에 뒤통수를 쾅쾅 찧었다. 블루 헤어 존나 미워. 진짜 짜증나. 그들은 행크에 대한 욕과 원망과 서러움을 한 마음 한 뜻으로 토로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오로지 한병의 테일러 푸룬주스를 사기 위해 말이다.  


- fin -

 * 참고로 선상파티 부분에서 선상파티를 연 사람은 베르사체, 초대받아 가서 대쉬를 받은 사람은 존 버로우만, 몇년 후 우연히 만난 모델한테서 요트 상속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해줬더니 아깝다고 말했던 사람은 존 버로우만의 현 남편 미스터 스캇 입니다. 워낙 인상적인 일화라 기억을 하고 있었는데 얘네 보니 써먹어보고 싶어졌어요. 대화는 많이 각색했습니다. 소재거리 안겨준 정말 짱멋진 캡틴 잭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쿨럭;;


가늘고 길게 덕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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