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로 들어와 넓은 소파로 안내해 저를 앉혀주고는 들어오는 햇빛을 의식한 듯 민현이 바로 커튼을 쳤다. 별다른 말없이 잔잔한 음악을 틀어주고 입고 있던 가운도 벗어 걸었다. 멀뚱히 앉아 그가 하는대로 지켜보고만 있었더니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흐음, 하며 이내 가까이 다가와 제 어깨를 살짝 밀어 등받이에 기대게끔 해주었다. 



- 좀 기대서 쉬고 있어요. 나는 차 좀 내려올게요.



잔잔한 음악만큼이나 조근조근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달칵, 하고 조용히 닫힌 진료실 문을 바라보다가 축 처진 몸을 조금 더 편히 기댔다. 아까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는데 지금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이 정도로 그친 것을 다행이다, 절로 내쉬는 한숨에 맞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조금 후, 차 두 잔을 들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오는 그에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그럴 거 없다며 한 손을 휘휘 젓고는 제 맞은 편에 앉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주는 배려에 고마웠다. 직업상 그렇게 하는 것인지 예전부터 그는 단 한 번도 제게 먼저 대뜸 물어오는 일이 없었다. 그저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위한 일상적인 대화만 나누었다. 


   

- 잘 지냈어요? 성운씨?

- 그럭저럭요. 선생님은 잘 지내셨어요? 

- 네. 보시다시피 잘 지냈어요. 병원도 차리고 이만하면 성공했죠? 

- 오랜만에 뵙는데도 여전하시네요. 하나도 안 늙으셨어요. 

- 하하.. 칭찬인가요? 근데 아마 성운씨 생각만큼 제가 그렇게 나이가 많진 않을거예요.

- 아, 죄송해요. 그런 뜻은 아니였는데..

- 알아요, 칭찬인거. 하하..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도 애기 같았는데 그새 성운씨는 어른이 다 됐네요? 키도 좀 큰 거 같고 얼굴도 그때보다 훨씬 좋아보여요.

- 가, 감사합니다.. 더 좋은 일로 뵀으면 좋았을텐데.. 

- 무슨 그런 소릴 해요. 충분히 지금도 좋아요. 성운씨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요. 제가 했던 말 기억하죠? 언제든지 무슨 얘기든지 하고 싶은게 있으면 찾아오라고. 그게 오늘인거뿐이에요. 그쵸?



그게 아닌 걸 알면서도 미소지으며 동의를 구하는 그에 작게 고갤 끄덕였더니 만족한 듯 민현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공백에 어색해져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딱 적당한 온도의 차를 한모금 들이키니 입안 가득 좋은 향이 퍼졌다. 그에 절로 제 얘기를 시작했다.



- .. 오랜만에.. 그랬어요. 갑자기 햇빛이 너무 쨍하게 느껴져서. 전처럼 속이 막 울렁대진 않았는데 어지럽구 그래서 .. 그냥..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 날이 너무 더우면 저도 가끔 그럴 때 있어요. 전 같은 증상이 아니라 다행이네요. 내 생각해줘서 고맙고.

- 웃으면서 봤으면 좋았을걸.. 죄송해요.

- 어허~ 그런 생각 하지 말래도 그러네. 이렇게 또 얼굴보고 그러는거죠. 



미안한 맘이 가시질 않아 한번 더 사과를 건네니 인상을 찌푸리곤 혼내듯이 절 슬쩍 째려본다. 그마저도 이어지는 말은 다정하기 그지 없었지만. 어렸던 그 때는 몰랐는데 이제보니 아무래도 직업때문이 아니라 천성이 본래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그에 술술 제 얘길 늘어놓았다.



-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였나봐요. 아무렴 그렇겠죠. 없던 일이 될 수는 없으니까..

- 성운씨. 잊고, 못 잊고 그런 건 중요한게 아니에요. 성운씨 마음이 가장 중요한거죠. 아까 그렇게 힘들었는데도 정신 차려서 절 생각해내고, 전화를 하고, 이렇게 찾아왔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이겨낸거에요. 그렇게 또 한 걸음 가는거에요.

- .. 자꾸만... 뒤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 성운씨는 아주 잘 걸어오고 있어요. 그리고 설사 뒤로 간다해도 상관없죠. 뒤에도 길이 있으니까요. 잘못 든 길이란 건 없어요. 그 길 끝에 뭐가 있느냐가 중요해요.

- .. 길이 끝나지 않으면요? 가도가도 끝이 없으면요? 저만... 잘못 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 그게 옳지 않은거라고 말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끝도 없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건 누구도 걸어 본 적 없는 성운씨만의 길이니까.



참 신기한 일이었다. 모두가 내게 괜찮냐 묻고, 괜찮을거라 말해도 다 입에 발린 소리같이 느껴질 뿐인데 어째서 민현이 하는 말들은 그렇게 들리지 않는걸까.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참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이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걸까. 어떻게 하면 이렇게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태연하고, 여유로울 수 있을까. 저보다 어른이라서일까. 그럼 나도 저만큼의 시간이 흐르면 그 땐 저렇게 될 수 있을까. 



- 선생님은 어디쯤 가고 계세요? 잘 걸어가고 계신가요? .. 모두들 그렇게 잘 가고 있는걸까요?

- 음.. 글쎄요.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잠깐 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전처럼 바빴다면 몰랐을 것들을 느끼고 돌이켜보고, 또 깨달으면서. 이렇게 저처럼 천천히 쉬어가는 방법도 있죠.

- 아.. 쉬어가는 방법...

- 네.. 쉬어가는 방법. 어떤 느낌인지 알겠나요?

- 아주, 아주.. 조금요..



희미하게 지은 제 미소에 더 환한 미소로 답해주는 그 얼굴을 보자 조금은 정리 되는 기분이었다. 그 중 제일  확실한 건 아까 내린 제 감정에 대한 결론은 번복되지 않을 거란 것. 생각해보면 다니엘에게서 느끼는 제 감정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이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가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건 어려워서 좀 더 고민을 해봐야 될 것 같았다. 그 고민을 하기 전 일단, 그동안 저답지 않게 살아왔던 지난 날부터 정리를 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어차피 나 하성운은 그저 하성운인데. 껍데기만 하성운인채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선생님을 만났을 때 제 상처를 마주했다면, 다니엘을 만나고 난 뒤로는 제대로 절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 성운씨.



한참 생각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절 부르는 목소리에 흠짓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런 제 반응에 작게 웃다 아주 조심스레 제게 물었다.



- 변하고 싶어졌나요?

- 네?

- 그래 보여서요. 지금까지 성운씨 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거든요, 지금. 

- .. 아.... 제가 그랬나요?

- 네. 처음에 성운씨랑 상담 시작할 때는 워낙 힘들어하기도 했고, 증상 자체도 쉽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라 조심스러워서 제가 말을 많이 아꼈었어요. 그런데.. 어쩐지 이제는 질문을 많이 해도 될 것 같은데요? 

- .. 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어요.

- 계기가 있었나보군요. 

- 그냥.. 어떤 사람을 하나 알게 됐는데.. 그 사람이 꼭 옛날에 저 같아서요.. 자꾸만 돌아가고 싶어져요. 껍데기만 있는 하성운 말고, 옛날 그 하성운으로요. 그러면 그 사람과 같이 무언갈 해볼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꼭 옛날의 성운씨로 돌아가야만 그 사람과 마주할 수 있을까요?

- 그치만.. 지금 상태로는... 선생님은 모르시겠지만 그때 이후로 많은게 변했어요. 저 .. 되게 나쁜 사람이에요. 저 밖에 모르구.. 되게 못되구.. 뭐 하나 곱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삐뚤어져 있는.. 그런 사람이거든요. 지금, 제가.

- 사람에게는 여러가지 면이 있어요. 장담컨데 한가지 면만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어요. 저 역시 마찬가지구요. 

- .. 선생님이요? 에이.. 선생님은 그러실 거 같지 않은데.. 저는.. 정말...

- 뭐든! .. 성운씨, 뭐든 해봐요. 정말 뭐든지요. 제가 지금까지 성운씨한테 가장 많이 했던 말일거에요. 일단 다 해보라고. 안하고 후회하는 것은 두고두고 미련이 남지만, 하고 후회하는 것은 적어도 그런 미련을 남기지 않아요. 

- 그럴.. 까요?

- 만약에 아니라고 해도 제 말을 들어서 잘 못 된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해봐요. 다시 이렇게 찾아와서 절 원망해도 좋으니까. 해볼거죠? 내가 응원할게요.

- 고.. 고맙습니다. 선생님..

- 뭘요. 그리고 언제든지 부담갖지말고 연락해요, 오늘처럼. 알았죠?

- .. 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고, 얘기를 나눈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민현과의 대화는 언제나 그랬듯 어떤 얘기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아도, 두루뭉실한 대화 속에 늘 답이 있었다. 그래서 아까 오랜만에 휘청이는 절 마주한 순간 민현이 떠오른 걸지도.


응원할게요.

그 마지막 말 만이 제 가슴을 울려댔다.




집으로 돌아와 불도 켜지 않은 채 멍하니 침대에 누웠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제 생명을 다했는지 깜빡깜빡 제 방을 비췄다 꺼졌다 하고 있었다. 

그래, 이미 알고 있었잖아. 이렇게 깜빡깜빡 경고음이 있었는데. 뭐 이제와 새삼스레. 그걸 무시하며 만남을 이어온 것은 나였는데. 이미 답은 나와 있었던 건데 괜히 다니엘만 괴롭혔어..

제 머리를 쓰다듬던 마지막 손길이 떠올랐다. 괜히 손을 들어 그처럼 제 머리를 만져보지만 당연히 그와 같을리없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어느새 꺼낸 애꿎은 폰 화면만 켰다 껐다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오늘 이 밤이 다 지나고나면 그나마도 인정했던 제 맘이, 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맘 마저도 다 사라질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딱 한번만. 딱 한번만이야. 

그 흔한 스팸번호도 하나 없는 통화목록에서 부모님을 제외하고 보이는 그 이름을 누르면서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귀 가까이 가져간 폰 반대편에선 꽤 오래도록 연결음만 들려왔다.












**

오늘따라 왜 이렇게 텐션이 오른거야.

조용히 투덜대며 눈빛을 주고 받던 재환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 못차리는 놈들부터 하나 둘 집에 보내고 고집부리며 굳이 남아있는 한 놈을 보다 서로 한숨을 푸욱 쉬었다. 이미 제가 술인지, 술이 저인지 모르는 놈이 테이블 위로 고개를 쳐박고 나서야(혹시 몰라 손을 휘휘 저어대며 한번 더 의식을 확인하곤) 겨우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 야, 이 새끼 이제 간 거 같다.

- 하아.... 재환아..

- 얌마. 땅 꺼지겠다. 한숨 좀 그만 쉬지?

- 응. 하아.....



쯧쯧, 혀를 차곤 제 등을 토닥거린 재환이 뭐든 맘 놓고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디서부터 얘기 해야할까. 조금 긴 얘기가 되진 않을까 생각하며 다시 한번 숨을 몰아쉬니 결국 제 등짝을 후려치는 매서운 손길에 아아- 볼맨 소리를 내야 했다.



- 야야, 아파!!

- 대체 뭐가 문제냐고! 뭔 말을 해줘야 나도 얘기를 해주지!

- 그러니까.. 그게...



운을 만났던 날은 이미 재환도 알고 있으니 더 붙일 것도, 또 숨길 것도 없었다. 제가 여즉 연애 한번 못해본 모태 솔로였다는 것부터 운을 만나는 그 날까지의 얘기부터 시작해서 만나게 된 이후와 마지막 날까지의 뒷 얘기를 이어갈 때까지도 재환은 별다른 반응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 놀라기도, 똥씹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제 얘기가 비로소 다 끝나고 난 뒤에야 저처럼 한숨을 내쉬더니 평소같지 않은 진지한 얼굴로 제 이름을 불렀다.



- 야, 강다니엘.

 - .. 응.


무슨 말이 나올까 괜히 두려워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에 재환이 비어있는 잔에 남은 술을 따라 한번에 훅 들이켰다. 크으- 하고 내는 소리에 저까지도 괜히 입이 써져서 괜히 쩝, 입맛을 다셨다.



- 흔들고 싶어서 한 말이라고 했지?

- 응.

- 흔든거 같았고?

- 응응.

- 기다리는 건 룰을 지키기 위해서고?

- 응응응.



그에 물음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제 감정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반면에 재환의 표정은 더없이 계속 진지하기만 했다.



- 강다. 만약에 말야. 이대로 연락이 없으면 넌 이대로 끝- 하고 수긍할 수 있어?

- .. 어?

-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 나 똥 밟았구나 그렇게 넘길 수 있냐고.

-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하고 싶지도 않고.

- 아니, 이용 당하는거까지 생각했으면서 그건 생각 못해봤다는게 말이 되냐? 그 정도 흔든거로 순순히 해피엔딩을 장식할거라 생각하는거야? 걔 맘도 제대로 모르면서?

- 어? 아, 아니.. 뭐 그런건 아니지만..

- 흔들리는 걸 봤다며. 거기에 걸고 기를 쓰고 뒤돌았다며. 어느정도 확률은 있어서 건 거 아냐? 적어도 어느정도 퍼센테이지는 따져봤을거 아냐. 네가 생각있는 놈이라면.

- .. 아...

- 아? 아라고? 야, 너가 생각없는 놈인줄 이제 알았다. 대책도 없이 무작정 지른거네.

- 좋아하면 그게 끝이지. 아무리 내가 거기에 걸었다고 무슨 퍼센테이지까지 계산해가며 행동해.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거잖아. 그래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건데..

- 그렇다고 얌전히 헤어질 생각도 없으면서 대체 왜 기다리고 앉아있어? 됐고, 그 그지같은 룰부터 다 깨버리자. 치고 나가야지, 너가.

- 어? .. 그러다 진짜 안보겠다고.. 헤어지자고 하면.. 

- 이미 룰은 그 전에 몇번이고 깨졌잖아. 니가 연락할때마다 뭐라 하면서도 다 받아줬다며. 화내도 니가 매달리면 어찌됐건 풀렸던 거 아냐. 그래서 지금까지 잘 만났고. 뭣땜에 숨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감정을 너한테 들키는게 싫어서 더 바락거리는 타입인거 같은데.. 했던 말들만 봐도 충분히 알수있지않냐.

- 뭐가? 대체 어느 부분에서 알수 있는건데.

- 에휴. 이 허우대만 멀쩡한 새끼야. 어쨌든 끝내자고 안했잖아, 자기 입으로는! 계속 너한테만 미루고 있잖아. 그게 싫으면 못만나겠단거네? 그게 싫으면 그만 둬. 그런거 다. 솔직히 너 이용해먹고 진짜 못된 놈이였음 내가 보기에 그 자리에서 너보다 먼저 나갔을걸? 엔조이랑 무슨 그런 시덥잖은 애정싸움을 하면서 시간 낭비하겠냐. 

- .... 어..? 그, 그런거야?



순간 뎅- 하고 머리가 울렸다. 이걸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거였나. 멍해진 제 얼굴을 보던 재환의 표정에 저를 매우 한심해하는 것이 보였다.

뭐지, 이거? 등신이야? 너 진짜 등쳐먹기 딱 좋은 타입이다, 야. 다신 그 클럽 가지마라. 그 클럽 물 안좋은 애들 있으니까. 

혀를 끌끌차며 저를 무시하는 발언에 발끈했지만 딱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진짜로 그런 식의 생각을 해본적조차 없는 건 경험이란 생각에 괜히 억울했다.



- 야! 연애자체도 운이가 처음인데다 보통 일반적인 연애도 아니잖아! 내가 어떻게 알아? 누가 그런 걸 가르쳐주는 것도 아닌데!

- 그래그래. 니가 무슨 죄가 있겠니. 이 형님을 일찍이 만나지 못한게 죄라면 죄겠지.

- 야! 너는 뭐!! 연애를 얼마나 해봤다고!! 어?!!

- 이런데서 발끈하지말고, 형님이 잘 가르쳐줄테니까 앞으로 내 말만 들어라. 어?

- 그!!! 그.. 그래서 뭐 어떻게.. 하면 되는건데?

- 공손하지 못한 자네,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틀려먹었구만.

- 아!! 쫌!!! 



방금 전까지 진지하던 놈이 금세 낄낄대며 저를 놀려댔다. 그에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박박 긁었더니 어허! 하며 다시 저를 꾸짖듯이 군다. 그동안 저한테 쌓인 거라도 있던건지 반드시 받아내고야 말 얼굴이다. 그에 결국 포기하고 그 장단에 맞춰주어야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사람은 저니까.



- 혀, 형님.. 한 수 가르쳐 주시죠.

- 크핫! 아하하하항!! 그래.. 아우야. 일단 핸드폰부터 꺼내보거라.

- 아오! 진짜!!



하루종일 고이 잠들어있던 제 폰을 그제야 가방에서 꺼내들었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을거라 생각하고 잠금을 풀며 재환에게 폰을 건네려다 부재중 전화 알람과 그 밑에 떠있는 이름에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쿠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가 뒤로 넘어가고 재환이 왜 그래 인마, 하며 의자를 다시 세웠다.


아... 아니.. 이게..

믿기지 않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통화목록에 들어가 또 확인해봐도 그 이름이 맞았다.


[운] 


이모티콘 하나 붙이지 않은 군더더기없는 딱, 그 한 글자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아득해져 바닥까지 떨어졌던 정신머리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고서야 벌벌 떠는 손으로 재환에게 제 폰을 내밀었다. 



- 야.. 재, 재환아... 전.. 전화가 왔었어.. 운이한테...

- 뭐라고? 줘봐!



제 폰을 가져간 재환이 통화목록 외에 다른 연락은 없었는지 여기저기 뒤적거리는 동안에도 멍하니 서있었다. 한번도 먼저 이렇게 연락 온 적 없던 그였다. 더구나 처음으로 온 전화를, 지금 이 상황에서 받지 못했다는 절망감이 순식간에 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멍청한 놈!! 미친 놈!!!! 강다니엘 이 등신!!!!! 지금 내가 이렇게 한가로이 술이나 쳐먹을 때가 아니였는데!   

자책도 모자랐다. 스스로에게 욕을 해대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 역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 상황이 아주 흥미롭게 흘러가네.



그런 중에 들리는 재환의 말에 홱 고개를 돌려 노려봤다. 



- 뭔 개소리야... 난 이제 망했어! 망했다고!!! 너랑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였는데!!!



버럭대는 절보다 재환이 피식, 하고 저를 비웃었다. 아까 그 한심하단 표정까지 뒤에 붙이며. 순간 욱하고 열이 올라 한마디 하려다 이어진 재환의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 망하긴 뭘 망해. 흥할 거 같은데.

- .... 뭐?

- 먼저 연락 온 거 처음이지?

- 어, 어?.. 어어.. 처음이지.

-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거 아니냐. 어쨌든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는 얘기잖아.

- .. 어?



방방 날뛰던 정신이 번뜩 띄였다. 듣고보니 재환의 말이 맞았다. 진짜 끝낼 생각이라면 굳이 이렇게 전화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연락을 끊어버리면 그만인데. 지금까지의 운을 미뤄봤을 때 이건 분명 전과 다른 행동이었다. 퍼센테이지.. 제가 걸었던 그 작은 희망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 폰 줘봐. 당장 다시 전화하게.

- 연락하지마.

- 뭐? 왜!! 

- 지금 연락하면 다시 되돌이표야, 너. 

- 아까는 룰 다 깨버리고 연락하라며!

- 그건 이렇게 먼저 연락 올 줄 모르고 한 말이고.

- 어쩌라고! 그럼!!

- 좀 기다려봐. 너도 애 한번 태워보자.

- 야! 그딴 거 나랑 안 맞아! 당장 내놔, 내 폰!

- 내 말 믿고 딱 하루만 있어봐. 어? 분명 다시 연락 온다니까!

- 지랄하지말고 내놓으라니까? 난 당장 해야겠어. 부재 중 전화 딱 한 통 뿐이잖아. 네 말대로 애가 탔다면 전화가 여러번 왔거나 하다못해 메세지라도 있어야지. 근데 아니잖아! 

- 전화가 왔었다는 게 중요한거지, 횟수고 메세지고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라고. 

- 네 말 들었다가 내일 연락 안오면! 안오면 네가 책임질거야? 

- 어! 내가 책임질게. 내가 무조건 어떻게든 할게. 근데 그럴 일 없을거야. 백퍼 다시 와.




쓸데없는 말싸움이다. 이럴 시간에 벌써 전화를 하고 달려가도 모자른데.. 갑자기 고집을 부려대는 재환을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런 도박을 해야되냐? 그렇게까지 해야 돼?

- 어. 해야 돼. 그래야 제대로 시작할 수 있어. 계속 이렇게 끌려다닐거야? 밤에만 겨우 만나고 왜 그래야 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 .. 하아. 재환아.. 이건 아닌거 같아. 진짜로.. 

- 정 그게 불안하고 싫으면 이따가 새벽에 해. 전화말고 문자로. 어?

- 야아.. 김재환...

- 너 괜히 더 복잡해질까봐 내가 이 얘긴 안하려고 했는데.. 숨기는 게 많다는 건 딱 두가지 이유뿐이야. 뒤가 구리거나 상처가 있거나. 근데 얜 분명 후자일거야. 그래서 너한테 머뭇대는거라고. 제대로 나쁜 놈도 못하고 나쁜놈인 척 하는거야. 그래야 잘못되더라도 절 지킬 수 있으니까. 그 전화 한통이 보여주고 있잖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거야. 

- .. 넌 왜 그렇게 잘 알아? 왜 그렇게 확신하는건데...

- 내가.. 그런 놈이였으니까.

- .........!! 

- 너무 TMI다, 이건. 사람마다 각자 말못할 사정이란게 있지. 걔도 그런거야.. 



씁쓸한 얼굴로 농담하듯 말하는 그 모습은 처음보는 재환의 모습이었다. 그에 저도 모르게 단번에 설득당해버렸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진심으로 절 위해 하는 말이구나 느껴졌다. 

뻗었던 팔을 스르르 거두자 절 보던 재환의 얼굴이 다시 전으로 돌아왔다. 장난끼 가득한 그 얼굴로.



- 알았어. 네 말대로 해볼게.

- 오! 잘 생각했어. 이제 밤 생활은 청산하는 걸로. 이제 일어날까?

- 응..




다시 시작하자. 운아. 처음부터.. 다시. 

부디 재환의 말대로 이게 정답이길 바래. 너가 내게 올수 없는 피치못할 이유가 있다면, 그래서 망설이는 거라면.. 내가 너에게 갈게.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줘.











강군의 TMI... 글을 한번 훅 날려먹어서 멘붕이었지만 그래도 다 날려먹은건 아니라서 다행이었습니다..ㅠㅠ

윙의 명언 저장저장! 잊지말자!!!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강군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