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해야 할 놈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아. 우리와 놓고 본다면, 1대 1로 맞붙기 딱 좋은 정도야."

홍연의 일침에 청단이 택한 방법은 '무시'였다. 어색하게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자 홍연도 볼을 잔뜩 부풀릴 뿐 더 이상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숫자가 몇인데."

백호가 덤덤하게 묻자 청단이 말했다.

"일곱."

"방금은 맞붙기 좋은 정도라고 했잖아..?"

소요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사방신의 수는 겨우 넷이다. 7과 4를 두고 본다면 한 사람이 거의 둘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내가 넷을 상대하고 너희가 각자 나머지 셋을 상대하면 딱 좋은 정도가 되겠지."

실로 기적적인 계산법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사방신이 강하다 해도 능력도 얼굴도 잘 모르는 이를 셋이나 상대하려면 꽤나 벅찬 싸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청단의 자신감과 패기는 벅찬 것을 무시하고 천계를 너머 그 무한한 공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청단은 사방신 네 명과 연옥의 귀신 일곱이 한자리에 모이는 광경을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회의를 한 번 하는 것도 어려울 만큼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꽤 드물다. 연옥의 이들 또한 몇 백 년에 한번 소식이 들릴까 말까 하니 모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싸움을 벌일 가능성은 몹시 낮다. 청단의 허황된 망상을 가장 먼저 알아챈 소요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 다 좋아. 너 혼자 일곱을 상대하든, 하나씩 상대를 하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먼저 설명을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청단의 생각 같은 것은 관심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연홍서에 대한 이야기를 빨리 듣고 싶었다. 청단이 모은 정보들 중, 연홍서가 남긴 술법에 대한 단서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현무, 묘하게 열정적이군. 좋아. 너희도 대강 알고는 있겠지만 이놈들을 특별히 주시해야 하는 이유는... 오로지 이 일곱 귀신들만이 연옥의 입구를 여닫을 수 있다 알려졌기 때문이다."

연옥의 입구로 통하는 것은 천계에서도 수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었다. 허나 많은 세월 동안 신들은 이에 대해 아무런 성과를 얻을 수 없었고 죽어야만 갈 수 있는 미지에 공간에 그렇게 까지 열의를 불태우는 이는 없었다. 영원에 가까운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죽어 연옥에 가는 것은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시도하지 않을 일이었으니 말이다. 

묘하게 머리를 쓸 줄 아는 이들이 연옥에서 탈출한 귀신들을 잡아다 구슬려 입구를 여는데에 힘을 보태도록 회유시키자 했으나, 그간 천계에서 제압한 귀신들은 전부 연옥 밑바닥의 쭉정이일 뿐 연옥과 관련된 직접적인 힘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연옥에서 탈출한 귀신들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고 백 년에 한번 그 수가 보일까 말까였으니 이 중에서도 거물을 잡아들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애써 잡은 귀신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약간의 정보 뿐이었는데, 이는 대부분 연옥의 일곱 귀신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특이한 걸 발견했는데... 우리는 연옥의 입구를 뭐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르긴..."

백호가 툴툴거렸다. 천계에서 이를 칭하는 특별한 칭호 같은 것은 없었다. 연옥의 입구는 그냥 입구일 뿐 따로 붙여진 수식어 같은 것은 없었기에 소요를 포함한 세 사람들은 고개를 기울이며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천계에서 연옥의 입구에 붙인 특별한 명칭 같은 것은 없지만, 그간 마주했던 요물들의 말을 전부 기록해둔 서적을 보니 천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연옥의 입구를 고하(苦河)라고 부르더군."

"잠깐, 그간 가장 많은 귀신들을 붙잡은 건 청단 너인데 어째서 그런 사실을 처음 안다는 듯 말하는 거냐?"

홍연이 반박했다.

"어차피 패배자의 말들이니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 제압된 귀신들을 심문해서 정보를 기록해두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청단이 당당하게 말했다. 소요는 요괴를 상대할 때 일말의 동정 없이 단칼에 소멸시켜 버렸으니 정보 같은 것을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백호는 원최 남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논외였다. 홍연은 이상하게도 연옥에서 탈출한 귀신과 맞붙어본 적이 없었기에 직접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리가 없다. 최강의 무력을 가진 사방신들만 아니었다면, 이들은 완전한 막장 집단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하(苦河)라는 건... 끝이 없는 고통, 인간의 세상을 비유하는 말이잖아? 그게 왜 입구의 이름이 될 수 있었던거지?"

소요가 물었다.

"나야 모르지, 귀신들의 속을 알리가 있나. 그 놈들만의 규칙일 수도 있고. 그래서 말인데 우리도 이 호칭을 그대로 따르는 게 어때? 연옥의 입구 라고 거창하게 말하기 보다는 줄여서 말하는 편이 훨 낫잖아?"

"찬성."

"마음대로 해."

홍연과 백호가 차례대로 대답하곤 소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글자를 두 글자로 줄여 간단하게 만드니 이야기가 훨씬 편해진 듯싶었다. 도입을 전부 이야기 했으니 남은 것은 본론이었다. 청단은 두루마리를 다시금 곧게 펼쳐 보이며 말을 이었다.

"가장 먼저 뇌절신(雷切神)... 진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장 신출귀몰한 녀석이지. 인간계를 많이 다녀봤다면 마주쳐 봤을 법도 한데..."

청단이 말하며 백호와 은류에게 시선을 보냈다. 반려가 없는 소요나 홍연과는 달리 백호궁의 두 사람은 인간계를 쏘다니는데에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몰라."

백호가 싸늘하게 답하자 소요가 청단에게 물었다.

"그런데... 귀신에게 신(神)이라는 이명이 붙다니 조금 특이한걸."

"아, 여기 적힌 대로라면 그건 본인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저렇게 부르지 않으면 같은 귀신이라도 어김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하던데."

"뭐?"

소요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함과 동시에 홍연이 말했다.

"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놈도 있긴 마련이니까. 어쩌면 선경에 오르려다가 실패한 것이 한으로 쌓여서 귀신이 된 걸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 귀신의 특기는 뭔데?"

"모른다." 

"장난하냐."

청단이 딱잘라 대답하자 백호가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이 외에는 정보가 없어. 인간계에서 딱히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고, 이전에 몇 번 부딪힌 시화야행과는 다르게 아무런 충돌도 없으니 이건 어쩔 수 없어. 애초에 고하를 열 수 있는 힘만 가지고 있을 뿐 인간계에 나와 산책을 하는 정도라면 달리 알아차릴 방도도 없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난 이런 놈이 있는 줄도 몰랐어."

소요는 이것이 당연한 결과라 생각했다. 청단은 제게 무섭게 덤벼오는 귀신이나 강한 놈들에겐 큰 흥미를 보였지만, 반대로 약하거나 얌전한 것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요가 재촉을 하기 이전, 청단이 다시금 입을 열어 보였다.

"그리고 다음은 팔열흑성(八裂黑星) 이름은 소섬이라 하는데, 알려진 것은 생각보다 많지만... 이상하게도 여느 귀신들과는 달라."

"어떤 점이?"

홍연이 물었다.

"그는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세 사람의 표정이 일제히 의문으로 물들었다. 소섬이라는 이름은 두어번 들어본 적 있지만 사람을 돕는 귀신이라니. 보통의 귀신, 요괴들은 본인의 한을 푸는데에만 집중하며 이기심과 악독한 마음으로 가득한 존재들이 틀림없었다. 인간을 돕는 것은 둘째치고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 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다. 헌데 그런 귀신이 인간에게 이로운 일을 한다 하니 소요는 청단이 가지고 온 두루마리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소요의 표정을 알아챈 청단이 급하게 말했다.

"아니, 아니. 왜 그런 표정이야. 맹세하는데 이건 거짓말이 아냐. 그 동안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것만 봐도 짐작이 가지 않나? 능력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략 200년 전에 인간계에 잘못 퍼진 고독을 잡은 녀석도 이 녀석이야. 아마 의술에 일가견이 있는 거겠지."

고독이라 함은, 무공을 수련하는 이들이 상대에게 먹여 복종하게 만드는 독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이 독의 중심이 되는 벌레가 번식하여 많은 인간들이 혼란에 빠진 때가 있었는데, 딱히 귀신이나 요괴의 소행은 아닌지라 천계에서도 큰 간섭을 하지 않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신들 조차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을 해결한 것은 그들이 불결하게 여겼던 하나의 귀신이었다. 사방신들이 이 사실을 몰랐던 것 또한 당연했다. 홍연은 인간계에 내려갈 수 없으니 자연히 이들에 대한 관심을 끊었고, 소요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면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백호는 이 사실을 들었어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인간들을 돕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얼굴을 늘 가면으로 가리고 다닌다 하니 알아보기도 쉽겠군. 숙지 해두도록 하고... 다음은 어떤 의미로는 가장 위험한 놈이야. 너희도 알고 있겠지, 요 100년 사이에 신의 자리를 버리고 스스로 인간계에 내려간 이들이 몇 있었잖아?"

드문 일이었지만, 이어지는 생에 지쳐 스스로의 자리를 포기하고 인간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몇 존재하기도 했다. 허나 그런 이들은 10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드문 상태에 가까웠는데 최근 100년 동안엔 제 스스로 천계에서 추방을 자처한 이들은 다섯 명을 넘어가고 있었다. 흑선에게 소식을 들어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소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중 넷은 이 놈과 관련되어 있는 거다. 충살성오(蟲覺成晤). 진명은 충사. 유곽에서 자주 눈에 띄는 놈인데, 아주 놈팽이가 따로 없어..."

청단이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이 녀석, 인간계로 내려가 자리를 잡은 신들만 골라서 꼬시는데엔 선수야.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유혹해서 제 휘하로 들어오게 만들지. 천계에서 발을 뺀 신들이 모두 이놈의 아내가 되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뭐? 아내를 넷이나 뒀다고?"

홍연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말이 아내일 뿐이지... 실제로는 그 녀석의 잔꾀에 넘어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끝없이 여자를 갈아치운다는 말까지 있어. 싸움에는 재주가 없지만 술법 하나는 기가 막히게 쓰는 것 같더군, 살아있는 이들을 모두 벌레로 만들어 제 옆에 두는 거야. 아무리 유혹에 넘어가 내린 결정이라지만 역겨운 것은 어쩔 수가 없어."

"미친놈이군."

소요가 짧게 중얼거리자 청단이 덧붙였다.

"그래! 게다가 이 녀석, 시화야행과 아주 절친한 사이인 모양이야. 실제로 술법진을 부수는데에 이 큰 도움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 인간계에 존재하는 모든 벌레들과 소통을 할 수 있으니 정보를 모으는데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고... 흥, 꼭 같은 놈들만 골라서 사귄다고 이쯤이면 시화야행이 그렇게 변태같았던 이유도 이해가 가지. 그렇지 않나?"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흡족한 답변을 받은 청단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음은 인아객(忍餓客) 비혈. 천 년 전에는 인간들을 잡아먹고 다녔던 모양인데 최근엔 조용하더군, 일이 커지기 전에 숨어버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악명이 높아지면 처리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소식이 끊기더니 연옥에 몸을 담았다는 소문이 퍼졌어. 다만... 원래 성격이 더러웠던 모양인지 잡혀 오는 귀신들마다 이 녀석에 대한 욕을 한 바가지씩 늘어놓았다는 말이 적혀있다. 어떻게 힘을 얻어 연옥으로 통한 건지는 몰라도 한 번쯤 붙어보고 싶군."

청단이 속내를 내비치며 말했다. 앞선 네 귀신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간단하고도 명료한 것들이었다. 워낙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소요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연홍서에 대한 정보가 이토록 적다면? 스스로 인간계에 내려가 발로 뛰며 정보를 모아야 할 텐데, 반려가 없는 소요에겐 이는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지간한 상대는 금령밖에 없을 텐데, 소요는 금령과 다시 함께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명할 것으로만 따지면 마지막이라 할 수 있겠군. 시화야행(尸火夜行) 연홍서. 천계의 술법진을 깨부순 유일무이한 귀신이다. 일전에 인간계에서 몇 번 하급 무신들과 맞붙은 적이 있었는데...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빼앗지 않고 지나갔지. 그 후로 잠잠하기에 별 낌새가 없다 싶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청단의 설명에 홍연이 딱 잘라 말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그는 우리 편이 아니었으니 뒤통수라 할 것도 없다."

"...그래, 뭐. 아무튼!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다. 기껏 술법진을 깨부숴 놓고는 살기 좋은 곳인지 확인하러 왔다고 하질 않나, 현무의 신기가 통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여유를 보이며 공격을 피하기만 하는 것도 별로야. 대장부라면 정정당당히 맞서 싸우는 것이 기본아닌가?"

청단의 말에 소요는 수궁에서 보았던 연홍서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렸다. 확실히 귀신치곤 그간 상대했던 위협적인 존재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싸움은 커녕, 제 마음을 놓게 해주고 싶다며 스스로 목줄까지 차지 않았던가. 청단은 계속해서 툴툴거리고 있었다. 이미 연홍서에게 미운 털을 잔뜩 박아놓은 듯싶었다. 그가 애초에 싸움을 벌일 생각이 없다는 부류인 것을 알면 당장이라도 길길이 날뛸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에 대해 더 알려진 것은 없나?"

소요가 조급하게 되물었다.

"적지만 있다. 우선 연옥에 몸을 담은 귀신들의 숭배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것. 그의 이름이 흘린 이유도 붙잡힌 귀신들이 흥분하며 염왕에 대한 것을 언급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실제로 그가 귀신으로서 이름을 날린 세월은 얼마 되지 못해. 고작 1300년을 조금 넘을 정도야. 처음엔 인간계의 문파들을 들쑤시고 다니며 살인을 자행했는데... 이건 이유 없는 살육이라기 보다는 복수에 가까워서 우리가 손을 대지 않았었지. 그리고... 그 복수가 끝나면 성불할 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실제로 수련을 하며 복수혈전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말이다, 그 규모가 크지 않으면 신들은 한 귀신과 문파간의 싸움에는 간섭을 놓지 않지. 뭐, 무공을 수련하는 이들은 신을 믿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는 성향이 있으니 기도도 잘 올리지 않을 뿐더러.."

청단과 홍연이 나란히 말을 이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에 더해, 하나의 귀신과 무공을 익힌 문파간의 일 또한 신들이 참견할 것이 되지 못하였다. 예로부터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고 배신이 난무하는 무림엔 일일이 신경 쓰기도 힘들 만큼 많은 수의 귀신이 태어났으며, 이렇게 태어난 귀신들은 자신을 죽인 상대에게 복수를 함과 동시에 성불하여 사라졌기 때문에 하나씩 나서는 것 보단 그냥 두는 것이 천계의 일거리를 줄이는데에 도움이 되었다. 

"결국 그냥 놔뒀다가 이 지경이 됐다는 거잖아. 적어도 그 녀석의 한은 시시한 복수 같은 것이 아니었나보지."

흰 쥐의 모습으로 변한 채 제 손안에서 잠든 은류를 쓰다듬으며 백호가 말했다. 

"그래, 시화야행이 가지고 있는 한이 뭔지는 몰라도 1300년이라는 세월 동안 굉장한 힘을 갖게 된 것은 확실해. 그만큼 마음이 어둡고 무언가에 큰 집착을 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이 녀석이 일으키는 화염은 상당히 특별하다. 본래 귀신들은 이미 죽은 존재라 불에 타지도, 뜨거움을 느끼지도 못하는데 시화야행의 불길은 망령조차 태우며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모양이야. 암화곡(暗火谷) 또한 이 녀석이 만든 곳일 확률이 높아."

암화곡이란 늘 검은 불길에 휩싸여있는 문제적인 장소 중 하나였다. 그 어떤 비를 내려도 도저히 꺼지지 않는 검은 불길에 저런 이름이 붙은 것인데, 천년이 넘도록 불타고 있는 탓에 암화곡 주변은 아무런 생명체도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변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시화야행은 필시 굉장한 적수가 될 수 있을 거다. 천계에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면 축지술이 아닌 더 신묘한 술법을 사용하는 것 또한 분명해. 본 적이 없는 것들이라 이 부분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다음.."

"...잠깐, 그게 끝이야?"

"그래, 뭐 더 궁금한 게 있나? 이 녀석은 다른 놈들보다 배는 수상한 탓에 금서관을 쥐 잡듯이 뒤졌지만 다른 쓸만한 것은 찾지 못했어."

소요가 권축을 넘기는 청단의 손길을 저지하자 청단이 태연하게 말했다. 맙소사, 애초에 기대를 한 것이 잘못이었다. 연홍서의 과거 따위는 정말 요만큼도 알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목 뒤에 새겨진 술법에 대한 단서는 요만큼도 얻을 수 없었다. 소요는 저도 모르게 제 미간을 짚어 보였다. 

"아니야... 계속해줘."

"그래, 나머지 둘. 백의환향(白衣還鄕)과 불청천(不請天) 이 둘은 이명 말고는 밝혀진 게 없어. 연옥의 밖에 눈에 띈 적도 없고, 진짜 이름도 알 수 없었다. 완전히 베일에 감싸인 상태나 마찬가지야. 다만 한가지 적혀있는 것은... 선(善)과 악(惡)은 이 둘을 나타내기에 가장 좋은 단어라는 말이다."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말이네."

"그렇지, 하지만 모르는 것 보다는 나아."

일이 상당히 어렵게 되었다. 청단이 모아 온 정보의 수가 이토록 적을 줄이야. 아무리 몇 만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적대시 할 필요가 없던 곳이라 해도 이것은 몹시 심각한 문제였다. 결국 소요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못한 채 본론이 끝나버렸다. 더는 읽을 것도 없는지 청단은 제 손에 쥐어져 있던 두루마리를 감아 다시금 탁자 한쪽에 쌓아놓고 있었다.

"한이 무엇인지... 하다못해 시화야행이 천계에 침입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면 성불 시키는데에 도움이 될 텐데."

홍연이 턱을 괴고 아쉽다는 듯 말꼬리를 이었다. 하지만 소요와 청단, 백호는 이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번거로워."

"그래, 성불보다는 역시 싸워서 소멸시키는 쪽이 낫지 않나."

"그런 게 우리한테 어울리는 단어이긴 한가. 귀신놈 한 풀어주다가 허송세월 보낼 일이라도 있냐."

한 없는 세월 동안 귀신을 적대시 해온 결과물 이었다. 평소 사방신들이 상대하는 귀신의 수는 하루에도 수백, 수천이 넘으니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와도 같았다.

"뭐... 정보가 부족하다면 나름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한데..."

청단이 중얼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마치 바다와 햇빛이 섞인듯한 오묘한 눈길이 백호의 손으로 향해들었다. 백호가 한없이 쓰다듬고 있는 손길 안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백서(白鼠)(=흰 쥐) 모습의 은류가 있었다. 

"꺼져."

청단의 시선을 눈치채자, 백호가 이빨을 드러내며 살기를 내뿜었다. 청단은 백호의 적대감이 기쁜 것인지 당장이라도 덤빌듯한 기세를 보였으나 이는 풍강이 더하는 조용한 말 한마디에 이내 사그라들었다.

"저... 다른 귀신들은 몰라도, 염왕이라면 꽤 유명한 전설이 있지 않나요...? 인간계에서..."

"전설?"

소요가 되물었다. 인간계에서 유행하는 전설이 천계까지 미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설령 다른 신들이 이 전설을 알고 있다 해도 남에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 소요는 소문 같은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붉은 염왕이 자신의 신부를 찾는다는 노래인데요..."

"그래 풍강아, 나도 그 노래는 어렴풋이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인간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우스갯소리나 다름이 없지 않나."

"하지만... 후렴 구절에 조금 수상한 점이 있어서요."

"그게 뭐지?"

망설이는 풍강의 말에 소요가 재촉하듯 물었다.

"붉은 머리의 염왕이 찾는 신부는, 그..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하늘(天)의 사람이라는 구절....입니다."

홍소백류만 씁니다. 가뭄에 콩나는 연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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