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가 이런 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로한은 앞에 앉아있는 죠스케를 노려봤다. 물론 눈을 마주하곤 싶지 않아 죠스게가 고개를 들 때마다 시선을 피한 채 눈 앞의 서류로 고개를 돌렸지만. 회의에서 돌아온 죠스케가 다짜고짜 호출을 한 게 10분 전이었다. 별다른 일정이 없어서 퇴근이라도 시키려나 싶었는데, 무슨 서류를 검토하라면서 한아름 안겨줬다. 그래, 뭐. 하긴 해주마. 내가 이 정도도 못할 줄 알고. 그렇게 서류를 들고 일어서는데 다짜고짜 물음이 날아왔다.

 "어디 가요?"

 어디 가냐니. 니가 시킨 거 하러 간다. 

 "여기서 하지."

 내가 내 사무실 놔두고 왜? 로한이 최대한 잘리지 않을 정도의 말투로 대답했다.

 "저기서 하는 게 편해서요. 책상도 있고."

 책상. 그 말이 문제였다. 죠스케는 이해심 많은 상사의 표정 같은 걸 지어보이더니 전화기를 들었다. 대략 10분만에 제 사무실 책상이 그대로 회장실에 들어왔다. 이제 여기서 하면 되죠? 그렇게 말하고는 죠스케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로한은 서류뭉치로 죠스케를 후려갈기고 싶은 걸 참으며 책상에 앉아 서류에 집중하기로 했다.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죠스케를 꼬실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로한, 퇴근 후에 시간 있어요?"

 그 계획을 눈치라도 챈 듯이 죠스케가 물어왔다. 일 얘기는 아닐테고, 개인적으로 만나자는 건 적어도 저번에 뒹굴었던 걸 기억은 하고 있단 거겠지. 로한이 보이지 않게 샐쭉 눈을 휘고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바빠서요. 바쁜 일이 있을리가 없었지만 일단 한 번 물러서면 대략 속내가 드러날 것 같아 로한이 말을 골랐다. 

"내일은 될 것 같네요."

 여지를 좀 줘놔야 생각을 좀 하겠지? 죠스케가 무슨 일로 자신을 퇴근 후에 부르는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나쁠 일은 없다. 잘하면 꼬셔서 판을 좀 유리하게 키워볼 수도 있고. 딱히 이 회사에 관심은 없었지만 원래 가진 게 많으면 많을수록 게임하기가 편하지 않나. 죠스케는 말이 없다가 그러죠. 하고 대답했다. 로한이 비죽 웃음을 흘리곤 처리한 서류를 들고 죠스케의 옆으로 다가갔다. 상당히 가까이 붙긴 했지만 뭐 어때. 로한이 서류를 내려놓으면서 미소지었다.

"회장님 말대로 앞으로 많이 볼테니 좀 솔직해져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죠스케라고 불러도 되나. 사적인 자리에선?"

 죠스케의 표정을 지켜보며 로한이 미소를 띤 채 눈을 휘었다. 죠스케의 손에 들린 펜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걸 보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동요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지만 쉽게 넘어오지는 않는 게 더 흥미를 돋웠다. 죠스케가 입을 뗀 순간 로한은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로한. 자신을 부르는 죠스케의 시선이 자연스레 넘어왔다.

 "대답은 내일 들어도 되지? 퇴근이라서. 내일 봐. 죠스케."

 돌아서서 방문을 닫고 나오는 내내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기분이 꽤나 좋다. 약 좀 올려놓고, 내일 좀 더 자극하면 되지 않을까. 분명 동요하는 걸 봤다. 아예 없던 일로 하지는 못할 거라 이거지. 자기도. 슬슬 기분이 좋아진 로한이 미소를 띠었다. 엘리베이터에 발을 디디고 막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키라 요시카게가 보이자 로한이 아무렇지 않게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짜증날 정도로 느리게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탓에 결국 키라가 비집고 들어왔지만. 

"퇴근하나보지?"

아 네. 로한은 목례로 대꾸했다. 이어지는 말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로한군. 입사 기념으로 술 한 잔 하는 건 어떤가."

 대표이사란 인간이 넉살도 좋다. 아님 시간이 썩어 넘치거나. 싫은데요, 하고 답하려는 순간 키라가 말을 이었다. 좋은 와인이 들어와서. 저거 지금 자기 집에 가자는 건가? 로한이 곰곰 생각했다. 대표이사가 비서급한테 잘 보일 일은 없을 거고. 플러팅이다 이거지. 거절할 생각이긴 했는데, 얼굴도 저정도면 잘생겼고, 돈도 많은 것 같고. 나쁠 건 없겠지. 

"좋죠."

표정을 알 수 없는 건 키라나 죠스케나 마찬가지긴 했지만, 이쪽이 훨씬 더 읽기 어렵다. 미소에 가려진 진심을 파악해내기에는 아직 대화해본 경험도 많지 않고. 직급은 이쪽이 더 낮은데, 저 인간 나이가 더 들어서 그런가. 이것저것 재보고 있는 로한의 머릿속은 아랑곳하지 않고 키라는 자꾸 말을 붙였다. 차 옆자리에 탈 때부터 계속. 로한은 건성으로 대답했기에 차가 키라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을 즈음엔 하나도 기억 안 났지만.

 키라의 집은 정갈했다. 화려하다기보단 정갈하긴 했지만 드문드문 놓여있는 가구들이나 실내 장식을 보니 대강 취향을 알 것 같아 로한이 흐응, 하고 집 안을 둘러봤다. 제 집처럼 돌아다니던 로한을 보던 키라가 미소를 띠었다. 회사에서 처음 마주친 이후로 뻗은 목이며 손이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지금 뻗은 팔을 보니 모양 좋은 손이 상당히 제 취향이다. 자그마한 건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가늘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 손이. 불붙기 시작하는 욕정을 숨기려 키라가 다시 눈을 휘었다.

 취향이 나쁘진 않네요. 로한이 중얼댔다. 돈만 많고 머리가 빈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로한의 시선이 곧 한 곳에 멈췄다. 서점마냥 죽 진열되어있는 DVD 중 유독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어 집어서 살펴봤더니,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영화 DVD의 희귀판이었다. 그것도 로한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 감독의. 이거 내가 온라인 경매에서 결국 놓친 그거잖아. 로한의 손에 들린 DVD를 보던 키라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로한은 DVD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드나보군."

마음에 들고 말고. 로한은 제 오피스텔의 컬렉션을 떠올렸다. 그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키라가 가까이 몸을 붙였다. 귓가에 닿는 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그래, 당신은 마음에 안 들지만. 로한이 숨기지 않고 내뱉었다. 허리에 단단한 손이 감겨왔다. 상당히 손버릇이 못되먹었네요. 키라 요시카게 이사님.

"업무 중도 아닌데 편하게 부르지."

"그럼 만난지 하루만에 밥 먹자고 불러서 치근대는 변태씨?"

로한이 눈만 휘어 웃었다. 얼굴 보고 밥 먹을 기회 날리기 싫으면 놓죠. 키라가 미소를 띠었다. 그럼 밥부터 먹지. 

"밥만 먹을 거라서." 

당신한텐 엿도 먹여줄 거지만. 로한이 따라 미소지었다.




 

 

 

J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