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귀가 후 거실에 늘어져 있는 매실이 희수는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집에서 입는 편한 추리닝을 입은 영인은 손에 매실을 들고선 버선발로 뛰어나와 희수를 맞이했다. 


"오~ 왔다. 왔다."

"매실?"

"어. 올해도 날짜가 딱- 됐으니까. 담아야지."

"엄청 많아……."

"5kg이니까. 매실주도 담그고 매실액도 만들어야 해서."

"이걸 다?"

"얼마 안 나온다구. 1년을 먹어야 하니까. 최유민이 매실액은 못 먹어도 매실주는 달라 그러더라고. 장아찌랑."

"와. 장아찌도 되는구나."


희수는 소파 아래에 앉아서 이쑤시개로 매실을 다듬고 있는 영인의 옆에 쪼그려앉아 매실들을 구경하며 감탄했다. 영인은 할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로 그런 희수를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 손 씻고 올까?"

"…눈치가 빠르네. 옷도 갈아입고 와."

"아하하. 도와 준다고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혼자 날밤까는 거지. 뭐."

"열정이 장난 아니네…. 내일 주말도 아니잖아!"

"그래도 오늘이 매실주 담는 날이니까."

"법으로 정해져라도 있는 거야…?"

"뭐, 반쯤?"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낄낄 웃고선 영인은 정말 밤새기는 싫으니까 도와 달라면서 이쑤시개를 흔들었다. 희수는 알았다며 후다닥 욕실로 뛰어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이쑤시개로 매실을 다듬고 있자니, 얼마 전에 상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게 전생 같았다. 아직 영인의 8년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고, 그때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이야기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본인이 비밀로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도 도리에 어긋난 일이었다. 

사실은 그보다도 중요한 건 도대체 그게 왜 궁금하냐는 것이었다. 해당 질문에 대한 답을 희수는 아직 찾지 못했다. 9년을 친구로 지냈고, 요 반년간 많이 가까워지긴 했어도 여전히 친구인 두 사람이었다. 초등학생이나 할 법한 유치한 독점욕이라기엔 제 나이가 서른이 넘었다. 

'사귄다'?

상아가 말한 관계가 되기에는 지금 이 시간을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됐다. 보통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설레고 두근거리지 않을까. 


"음악 틀까? 좀 지루하넹."

"아, 응. 좋지. 요새 뭐 들어?"

"난 그냥 다 듣는데. 요새 이 노래 좋더라."

"아 빌딩숲 OST구나. 이 드라마 완전 재밌었는데!"

"그래? 드라만 안 봤네."

"언제 같이 보자."

"그래~"


이렇게 마냥 편할 수가 있을까. 물론 오래된 연인이, 재석이 그러했듯, 가족처럼 편해지긴 했지만. 시작부터 그렇지 않을 터였다. 편한 것과 사랑은 별개인 게 아닐까. 


"블루투스 스피커 살까."

"아. 좋다. 거실에 놓을까?"

"음. 고민이네."

"나도 보탤게! 나도 들을 거니까."

"캡슐머신도 네 돈 주고 샀잖아. 이건 내가 살래."

"그건 내가 더 많이 마시고 싸잖아~"

"주고받는 걸로 해. 소유관계는 분명히 해야지."


뭔가 영원히 같이 살진 않을 거니까. 떠날 땐 가져갈 수 있어야지. 그런 말이 내재된 것 같은 말이 약간은 서운한 것도 같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금의 틀림도 없이 맞는 말이었다. 

자신이 다른 집을 구하게 되거나, 지금으로선 요원해 보이지만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거나 하면 끝날 동거 관계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영인이가 누군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 사람과 살고 싶어지면….'

이 동거는 끝이 날 터였다. 훅 하고 치고 올라온 불쾌감에 희수는 이쑤시개로 매실을 찍었다. 영인은 뭔지 몰라도 매실한테 스트레스 풀진 말라며 잔소리를 했다.

물론 그 전에 싸우거나 해서 자신이 나가게 될 수도 있었지만…. 잔소리 할 땐 언제고 다시 이쑤시개로 열심히 매실 꼭지를 따고 있는 영인을 보면 왠지 그럴 일은 영영 없을 것만 같았다.


"매실주 1년 걸린다고 했지?"

"응. 뭐…. 작년 거는 연말에 다 마셔 버렸지만."

"유민이랑?"

"응. 원래 오늘 다 담그고 딱 작년 거 오픈해야 하는데…. 이번엔 꼭 1년 채워야지."

 "그렇구나."


1년 뒤에도 같이 있을까. 함께 또 매실 꼭지를 다듬고 이 술을 열어서 잔을 기울일 수 있을까. 희수는 한번 정리했던 감정이 다시 엉크러지는 걸 느꼈다. 



21.2. 


그래도 단순작업이란 아무 생각없이 할 수 있어 참 좋았다. 복잡한 마음을 접어두고 멍하니 손을 움직이고 있으니 이유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많이 해 봤다는 말이 허풍은 아닌지, 거의 1초에 하나씩 매실을 손질하고 있는 영인을 보면 잘 돌아가는 기계 영상 같아 만족감이 있었다. 그래서 너무 구경을 한 걸까. 영인이 희수 쪽을 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뭘 봐. 반했어?"

"아, 뭐래! 그냥…. 엄청 빠르네!"

"내가 좀 팔방미인이긴 하지."

"자뻑…."

"그래도 다행이다."

"응? 뭐가 다행이야?"

"너 오늘 일찍 와서."


툭툭 떼어내고 있는 모습이 아무렇지 않게 편해 보였다. 내가 와서 왜 다행이지? 나라서 다행인가? 왠지 눈을 떼기 어려웠다. 희수는 손을 움직이며 말을 이어가는 영인을 바라보았다. 


"혼자 하려면 엄청 많거든. 지겹기도 하고."

"연락하지. 더 빨리 들어올걸."

"좀 미안하잖아. 뭐 재밌는 일이라고. 매실주 담글 때 이게 제일 귀찮아."

"난 좋은데. 약간 힐링되는 느낌이야!"

"별……. 많이 해."

"저녁은 먹었어? 혼자 고생했겠다."

"응."

"요거트? 그건 밥 아니야."

"뭐…. 맛있으면 됐지. 뭐."

"제대로 먹으라니까. 불고기도 재워 놨는데."

"그건 주말에 같이 먹고 싶어서."

"으휴. 진짜."

"왜 걱정하다가 화를 내는 거야? 아하하."


한국인 아니랄까 봐 끼니충이네. 영인은 웃었다. 언제부터인가 웃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 것 같았다. 자신은 그다지 재밌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영인과 있으면 웃을 일도 많고 웃길 일도 많았다.




"주말에 호박잎 쪄 줄까?"

"오? 서울 촌 사람. 제법?"

"뭐야. 욕이야. 칭찬이야?"

"칭찬이지. 강된장도?"

"응. 오늘 지나가다가 쌈밥집에 있길래 맛있어 보여서."

"나야 좋지."

"영인이 할매 입맛이라 좋아할 것 같았어."

"사람을 무슨 옥춘당 같은 거 좋아하는 사람 취급하네."

"옥춘당이 왜? 깨옥춘은 꽤 맛있어!"

"네. 레알 할매 나왔고요."


희수는 미운 말에 영인을 살짝 째려보았다. 그래서 그럴까 이쑤시개로 매실꼭지가 아니라 손가락 끝을 꾹 쑤셔 버렸다. 


"아야! 으아."

"에. 괜찮아?"

"응. 근데 좀 아파."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손을 가로채는 영인에 희수는 눈이 동그래졌다. 아. 진짜 왜 이러지. 영인이 원래 이런데. 영인은 꼼꼼하게 손을 살피고 다행히 가시가 들아거거나 피가 나는 것 같진 않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치지 않게 해. 다치지 않게."

"미안. 잠깐 다른 생각 했어."

"이제 그만해도 돼."

"아냐. 나 더할 수 있어!!"

"나 악덕 사장 아냐. 거의 다 해서 그래. 네 덕분에 빨리 했어. 손이 야무지네."


처음한 거치곤 자신도 제법 잘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영인이 알아 주고 칭찬해 주니 기분이 좋았다. "손재주는 역시 좀 타고 나는 건가~" 구시렁거리며 매실을 모으는 영인에게 희수는 무심코 물었다.


"손 야무진 사람이 좋지?"

"그야…. 막 뭐 할 때마다 엎지르는 그런 사람보다야? 막 뭐 먹을 때마다 흘리고 컵 깨고."

"유민이?"

"네가 꺼낸 거다. 이름은."


낄낄 웃으면서 영인은 열탕 소독해 놓은 유리병과 얼음설탕, 소주를 꺼내왔다. 



21.3.


작지 않은 병의 크기에 희수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보고 있었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옆에 쪼그려앉았다. 마치 이제 뭐 할 거야? 나 뭐 하면 돼?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영인은 귀여워 죽을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와. 이게 뭐야?"

"빙사탕. 얼음설탕. 요번에는 약간 일본식?으로 해 보려고."

"오……!"

"아."

"아~ 와. 달다."

"설탕이니까."


영인이 입안에 넣어준 사탕을 도로록 굴리면서 희수는 영인이 주정으로 병 안과 매실들을 깨끗하게 닦는 걸 구경했다. 막걸리 때도 그렇고 여간 품이 많이 드는 일이 아니었는데 정성껏 하나씩 해 나가는 영인이 대단했다. 매실주든 매실액이든 밖에서 사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긴 했다. 그러나 그런 걸로 이러한 노동과 정성을 평가절하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런 과정이 좋아. 재밌고."

"응?"

"매실주 밖에서 사면 별로 안 비싸잖아."

"아…. 응."

"그래도 집에서 담그면 또 맛이 있어."

"맞아. 막걸리도 맛있었어. 매실액도."

"이것도 맛있을 거야."

"……나도 먹어도 돼?"


1년 뒤에도 여기 있어도 되냐는 물음을 희수는 넌지시 영인에게 던졌다. 영인은 말 없이 매실을 텅텅 넣다가 희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 얼굴이 자못 진지해서 희수는 제 시끄러운 속내가 들키기라도 한 건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아까부터."

"어? 어?"

"자꾸 그렇게 말이야."

"왜? 왜애? 내가 모…."


가늘게 뜨고선 저를 보는 영인의 시선을 피하며 희수는 필사적으로 둘러댈 핑계를 찾았다.


"사람을 그렇게 악덕 사장으로 만들고 말이야."

"어?"

"너랑 안 먹을 매실주를 왜 너를 기다려서 일을 시켜서 만들었겠어?"

"나랑 마실 거야?"

"그럼. 너 그때 해외에 나가 살더라도 마시러 와야 돼."

"으응. 나 여기 살면서 너랑 매실주 익는 거 구경할래…!"

"…진짜 귀엽게도 말한다."


영인은 웃으면서 입에 얼음사탕 하나를 더 물려 주고는 다시 사탕과 매실을 켜켜이 쌓았다. 희수는 방금 자신이 한 말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약간 망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내 매실준데 왜 설거지를 네가 해."

"우리 매실주라며. 왜 서운하게 말해? 매실주 귀막아."

"어이없네…. 조희수."


막걸리 만들 때 자신이 한 말을 따라하며 해맑게 웃으며 정리를 하는 희수에 영인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영인은 미안한 듯 쳐다보다가도 실제로 체력이 방전된 것도 맞아서 얌전히 식탁으로 돌아가 철푸덕 엎드렸다. 그리곤 턱을 괴고 설거지하는 희수를 구경했다. 


"배고프다."

"그니까 밥 제대로 먹으라니까."

"귀찮아…. 오늘은 매실로 요리 끝이야."

"뭐 먹을 게, 얼음설탕이라도…. 아!! 깜박했다아!"

"응?"


영인은 고개만 빼꼼 들었고 희수는 고무장갑을 벗더니 후다닥 방으로 달려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조그마한 비닐 봉지에 든 갈색 물체에 영인은 집중한 듯 눈을 구겼다.


"약과?"

"응. 내 옆자리 선생님이 사와서 나눠먹었거든."

"오…. 오랜만이네."

"요새 엄청 인기인가 봐. 여기도 유명한 곳이라 티켓팅 하는 것처럼 산 거래!"

"약과를? 유행 모를 일이네."

"그지. 근데 다들 되게 맛있다고 먹어보니까 왜 가는지 알겠대."

"너는 안 먹어 봤어?"

"너 좋아할 것 같아서 나눠 먹으려고."


반을 잘라서 내밀며 "모양은 좀 별로고 양도 적지만…." 하는 희수에 영인은 멍하니 있다가 피식 하고 웃었다. 모양이 좀 별로인가? 당황하는 희수의 손에서 약과를 받아들고선 입안에 털어넣었다. 

축축하거나 기름냄새가 심하지 않고 바삭한 게 제법 맛있었다. 희수 역시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손으로 받치고선 나머지 반쪽을 먹었다. 환해지는 얼굴에 영인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느슨하게 풀렸다. 


"와. 진짜 맛있다!"

"그러게 맛있네. 가게 이름이 뭐라고?"

"아, 들었는데…. 여기도 유명하고 경기도 어디도 되게 유명하대. 거긴 못 샀다더라."

"흐응. 이거보다 더 맛있나. 궁금하네."

"……언제 사러 갈래?"


핸드폰을 보다가 눈을 빛내며 자신에게 묻는 희수에 영인은 1초 정도 있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희수는 환하게 웃으며 이번 주말도 좋다며 내비게이션을 찍어 보았다. 영인은 턱을 괴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희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망했군'

어느새 소금맛이 나는 치약에서 바뀐, 자신이 좋아하는 민트향 치약을 칫솔에 주욱 짜며 영인은 생각했다. 이 닦을 때마다 짜다고 개지랄한 걸 다 들었구나. 망할. 착해 빠져가지곤. 다정해 빠져 가지곤.

신경을 안 쓰자고 마음을 먹었는데, 두 달 가까이 됐는데 영 나아지질 않았다. 채지수의 경우에는 멀리 떨어져 있기라도 했지. 하우스메이트는 얼굴을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었다. 매일 매 순간 조희수의 뜨뜻한 다정함에 파묻혀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한 번, 단 한 번이었지만 그런 쪽으로 신경쓰게 되니까 계속 좋아질 수밖에 없단 거였다. 귀여워 죽겠는 상대를 안 좋아한다는 건 거짓말일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눈치 빠르게도 자각했다는 게 영인으로선 불행이었다. 상대가 상대였으니까. 공영인은 이미 마음을 확정한 상태였다. 굳은 절개가 가득한 우정을 유지키로. 22살도 29살도 더는 아니니까. 


"너는 진짜 나한테 반하면 안 돼. 조희수…."


물론 우린 잔 사이긴 하지만. 심지어 매우 좋았지만. 친구랑 연애는 이제 딱 질색이었다. 그냥 이 상태로도 만족하니까 제발 너 더 안 좋아하게 나 좀 도와 달라고. 들리지도 않는 부탁을 건네며 영인은 세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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