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상태는 좀 어때? 어디 아프지는 않고?”


울렁거리는 기계음. 귀를 찌르는 액체의 낙하 소리. 구역질이 나올 듯 방 안을 지배한 소독약의 향연. 그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환자 한 명이 손을 흔들며 의사를 맞이했다.


“덕에 멀쩡해.”

“서류상으로는 탈락이야, 형. 어디서 또 숨기려 해.”

“…네가 의산데 숨기려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지. 숨긴 적 없어.”


검은 머리칼과 백안을 소유한 환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 고리를 올렸다. 명백하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긍정적인 발언인지 알 수 없었다마는, 그는 그저 웃었을 뿐이었다. 본인과 의사 한 명뿐이 자리 잡고 있는 방 안, 푹신한 병상 끝에 허리를 기대어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의사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바늘이 꽂히지 않은 왼 손으로 본인의 턱을 괸 채로. 입 틈새에서 힘없이 나오는 웃음소리에 두 손 가득 환자 상태 기록용 서류를 들고 한 자리에 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의사 또한 꿈틀거리며 입 고리를 올리기 바빴다. 방 안의 시간은 낮이었다. 좁은 창문 틈으로 새는 햇빛들이 유유히 방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 검은 머리카락 위에도 살포시 안착하며 푸른빛의 고요한 밤바다를 연상시켰다. 정작 장본인은 눈을 찡그리며 햇빛에게 퉁명스럽게 짜증을 토해냈지만, 그를 바라보고만 있는 주황머리의 의사는 손으로 입도 가리지 않은 채 육성으로 웃음을 토해냈을 뿐이었다. 푸르른 녹안이 잠시 번뜩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좋아서. 상황을 즐기고자 했다. 아무리 환자와 의사의 자격으로 성사되는 자리일 지라도 그들의 본 관계를 바뀐 적 무방했다.


의사는 환자에게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액체가 모두 빠져버린 링거를 교체하기 위해 그의 병상 위로 서류들을 올려두었다. 형, 잠시만 이러고 있어봐. 별로 안 무거울 걸? 뭔… 무겁다고. 응, 그래. 야, 너 내 말 안 듣지? 새로운 링거를 어디에다 뒀더라? 본능적으로 그의 말을 무시하려는 의사의 표정에는 숱한 기쁨이 묻어들어만 갔다. 그를 놀리는 재미는 지금까지도 존재했다. 하기야 몇 년 동안 붙어 다니며 일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했으니, 당연하게도 그럴 수밖에. 똑, 똑. 한 순간에 좁은 관을 타고 액체가 내려가 새하얀 그의 손등 안으로 들어간다.


“다음부터는 일찍 말해. 아무리 형 생각에 필요 없다고 해도 안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잭 어린이?”

“빨리 할 일이나 하러 가세요.”

“나 시간 많아.”

“왜?”

“왜라니! 조금 섭섭한 걸.”


섭섭하긴 무슨. 오뉴 형이랑 류가 맨날 찾아온다며? 아, 들켰네. 나는 왜 만나면 안 되는 건데. 전에도 말했잖아. 형은 아직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제미니 네 덕에 불안정해졌다, 고맙다, 아주. 고마워할 필요는 없는데. 입만 연 상태로 멍하니 액체를 떨구는 링거를 바라보고 있던 의사, 제미니는 피식 웃음을 보인 채, 그의 병상 위에 그의 몸을 뉘어버리는 갑작스러운 행동을 취했다. 정확하게 환자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은 끝 부분에 자연스럽게 누워 실실 웃음을 흘렸다. 이곳에 환자인 잭은 그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유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의 웃음은 더욱이 커져만 갔다. 형의 불행은 나의 행복. 그가 언제나 말하고 다니던 문장이었다. 물론 절대로 그가 병원 안에서 살림을 꾸릴 만큼의 영원한 환자가 되어야만 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었음을 토로하고 싶은 바였다. 그저 간단하게 그를 놀릴 때, 그뿐이었다.


순간적으로 씁쓸한 향을 맛 본 제미니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지만, 잭은 그의 변화를 몰라보며 그저 자신의 병상 위에 놓아진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제미니가 항상 손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서류. 몇 장 되지도 않은 얇은 서류에 불과했지만, 검은 글씨 사이로 굵게 칠해진 붉은 글씨가 상대적으로 많은 종이었다. 매번 물어보았지만 되돌아오는 답은 없었던 그 서류. 졸지에 서류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어버린 잭은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뻗어 서류를 그의 몸 가까이 끌어당겼다. 의사의 소유임에도 물어볼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본인 침대인 것처럼 편하게 뻗은 채로 멍을 때리고 있는 그의 행동이 잘못이리라. 과거 전혀 그러지 아니했던 행동이 툭 튀어나온다. 어린아이같이 호기심에 가득 차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표정. 투명한 백안이 반짝이며 말 대신 행동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그가 표지에 적힌 제목을 보자마자 서류를 뒤집은 채 제자리에 놓았던 것은 생각 외로 단순했다. 잭 형 상태 기록.


“…그럴 필요는 없다니까.”

“…에? 뭐가? 무슨 일 있어? 뭔데, 어디 아파?”


잭의 거친 한숨 하나에 몸을 벌떡 일으키며 상태를 불라 명령을 하는 것 같은 제미니의 흔들리는 동공이 그의 백안과 마주쳤다. 사실대로 토로할 수는 없으니까, 그는 다시금 한숨을 흘려보내며 고개를 숙이고 이불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두 손만을 바라보았다. 쉽사리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라고 믿었다. 계속해서 그를 압박하는 제미니의 물음을 이기지 못하기 전까지는.


“아니.”

“…형, 진짜로 아프면 말을 해. 참지만 말고 말을 하라고.”

“아니, 진짜 그게 아니라.”

“솔직히 형이 이렇게 된 것도 다…, 그러니까 제발….”


녹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손으로도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흘려보낼 뿐이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순간적으로 잭의 푹신하기 그지없는 흰색 이불 위로 떨어질 때까지. 사실 그가 울 만한 이유는 방대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혁명군이었으니까. 그래서 그가 울었다.


그들은 혁명군이다. 과거에 혁명군이었다, 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 같았다. 그들은 혁명군이었다. 정부에 대항하며 끝까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이들의 발자국을 담당하는 역할을 두 명이 맡았다. 은밀기동대 부대장이자 혁명군의 리더였던 잭과, 중화포격대 부대장이자 혁명군의 광대를 자처하여 맡았던 제미니. 정부군 고위 간부의 아들과 실험체에 불과했던 이의 만남은 한순간에 동료로서 성장하게 된 바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그들이 가진 생각과 비슷한 뜻을 가진 이들을 구원하기 시작했다. 실험체에서 선봉타격대 부대장으로 구원받은 류, 고약하기 그지없는 죄책감으로부터 끌어당긴 정보지원대 부대장 오뉴. 그들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정부군의 땅이었던 공간을 흡수해 나가며 혁명군의 입지를 증가시켰다. 썩다 못해 구역질이 나려는 정부군은 무너져 내리기에 앞섰고, 이는 혁명군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혁명군은 마지막 전투를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입단을 자처한 이들마저 전투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기뻐했으며, 작전은 수월하게 이어져 정부군의 심장 부근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혁명군 리더의 단검 하나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기대감 하나로 모든 이들이 지켜보았다. 허나, 정부군들은 마지막까지 발악을 뽐냈다. 한 손에는 폭탄을, 다른 한 손에는 권총을 쥐어 걸어 다니는 혁명군의 심장에게로 달려들었다. 살아 있는, 생기가 넘치던 혁명군 리더에게 죽음을 선사하기 위한 마지막 발악. 그의 옆에서 정부군의 마지막을 구경하려던 제미니가 고개를 돌려 상태를 파악하기 앞섰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리더는 연기 속으로 스러졌다. 팔을 뻗었지만, 잭이 전혀 보호되지는 못했다. 본인만이 보호대상이 되어 있었다. 본인만. 제미니만. 오뉴와 류는 뒤늦게 달려왔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제미니는 살았고, 잭은 살았지만 살지 못한 이가 되었다.


끔찍하게 긴 수소문 끝에 다다른 병원이 지금의 병원이었다. 겉은 낡아 담쟁이가 무성하게 자라있었지만, 생각 외로 안은 거대했다. 그곳에서 제미니는 의사가 되었고, 오뉴와 류는 평범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잭은, 의외로 평범한 환자의 생활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너 때문 아니니까 울지 마라. 한 번만 더 울면 손가락 하나 꺾어 버린다.”

“하하…. 역시 잭 형다워.”


칭찬인지, 욕인지…. 제미니가 들을 수 있을 만큼의 중얼거림. 슬금슬금 버겁게 몸을 틀며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위태롭게 그들을 받치고 있던 철사들이 거세게 휘청거렸다. 삐거덕거리는 소음이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그뿐이었다. 귀는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벽에 베개 두 개를 놓고 편안하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보이는 잭이 있었다.


“지금 멀쩡하면 됐지. 뭐 하러 쓸데없는 걱정을 해. 이정도면 병이야, 병.”

“현재 상태. 다리부상부터 정신적 스트레스까지. 말한 부분은 많아.”


퉁명하게 본인의 생각을 토해내는 잭은 이내 툴툴거리며 팔짱을 끼었다. 비록 링거 줄이 덜렁거리기 시작해 몇 초조차 유지하지 못했지만,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본인이 행한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꼈겠지. 뭐든지 남의 눈에는 완벽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혁명군 리더의 성격이 아직까지도 남아있었으니까. 씁쓸한 웃음을 고통스럽게도 삼키며 병상 위에 놓을 서류를 집었다. 팔락거리는 종잇장이 위태롭기만 할 뿐이었다. 얇은 면이 거침없이 구부려진다. 하얗기만 했던 종이 위로 검은 그림자가 자연스레 안착한다. 겨우 특정한 부분만이 물들여졌을 뿐이다. 서류를 만들고 작성한 본인 손으로 서류를 구겼다. 멍하니 검은 글자들을 응시한 채, 오직 한손에 의지에 힘을 가한다. 종이는 약한 물체에 불과했다. 미세한 압박 하나로 온전한 상태를 잃어버리니, 그럴 수밖에. 누구에게 목숨과도 같은 정보라 하더라도 종이는 기꺼이 구겨짐을 택했다. 찢기고, 밟히고, 태워져서까지 이름 모를 이의 분을 풀게 해주었다. 제미니는 종이를 구겼다. 종이에게 폭력을 휘둘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붉은 글씨가 적힌 부분만은 엄지손가락으로 가리며 잭이 보지 않게끔 최선을 다했다. 절대로 보지 못하도록. 바로 옆에 멍하니 앉아 있는 그의 환자가 이것을 본다면 아마,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미니의 표정이 구겨짐과 동시에 잭이 평소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드러내어 차분해지기를 반복했다. 멈출 줄 몰랐던 잭의 꼼지락거리는 손가락들이 정지했다. 성의 없는 백안은 오직 의사 손에 들린 서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연히 차분해질 수밖에. 생각해보면 그가 구겨버린 서류, 다만 두 어장을 넘겨버린 서류라는 것에 본인의 상태를 기록했으니까. 만약 그 종이에, 한낱 종이에 본인이 끝 날이 적혀져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보게 되었다면.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정신이 흐릿하다. 제미니는 서둘러 서류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상상도 싫은 미래의 맛이 텁텁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반해 잭은 세상 편하다는 듯 걷지도 못하는 두 다리를 뻗으며 마음을 대변하는 한숨을 흘려보냈다. 그에게 나올 수 없는 인자한 표정을 더불어 본인의 상태가 아닌 제미니를 걱정하는 태도까지. 뼈가 돌출된 하얀 손이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거칠했다. 허나 부정적인 기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살날이 얼마 안 남았대?”

“….”

“그럴 만도 하지. 충분히 버텼네.”

“어떻게, 안 거야? 혹시 읽었어? 분명히 가렸었는데, 분명….”


그는 인지한 표정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갈망했다, 라는 표현이 옳았을 정도로 웃음을 추구했다. 고양이는 죽을 때가 되면 애교를 부리고, 주인에게 잘 보이는 성격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듯이. 잭은 덤덤해보였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현재를 거부하는 의사 앞에서 태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었으니. 단지 그가 전 혁명군 리더라서, 전 은밀기동대 부대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음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품지 않는 것은 아니라 말할 수 있었다. 그 또한 평범한 사람으로서 죽음을 잃어하는 이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코드네임이 Demon이라는 이유로 그의 성격마저 악마라는 가설은 켤고 인정할 수 없는 바였다.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한심하겠지만, 그는 과거의 광대가 아니었다. 그저 실실 웃으며 현재를 인정하고 재미를 추구하는 광대는 더 이상 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악마가 죽었을 때부터 죽은 악마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까지 광대는 웃음을 벗어던져 새로운 이가 되었다. 처음에야 본인의 흘러내리는 녹안조차 보기 역겨워 거울까지 박살을 내버린 전적을 있지만, 지금에서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과도한 쓰라림이 목을 스쳐 달아난다. 손으로 목을 매만져도 될 리가 없었다. 제미니, 라는 사람에게 오직 약이 되는 것은 등을 쓸어내리는 딱딱한 형의 손 뿐. 굉장히 멍청하지. 명색이 의사인데 환자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부터가 문제야. 지켜주어야 하는 이에게 지킴을 받고 있다. 달콤함 보다는 씁쓸함을 선사한다. 무언가로 속이 꽉 채워진 백안이 공허하기 짝이 없는 녹안을 어루만질 때, 차분했기에 극도의 공포감을 조성하는 리더가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너 요즘에 표정 못 숨기더라.”

“…내가?”

“지금도 티나. 내 행동 부정하는 거. 코드네임 Clown은 사라졌네.”

“…그러게. 아프더라고.”


실없는 웃음을 토해냈다. 결국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의미. 어차피 그는 본래부터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으나, 제미니의 한 손길로 간신히 운명을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아등바등 살아보려 해봤자 수명은 짧게도 정해져 있었음을 그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저 제미니가 그 사실을 어떻게 본인에게 알려줄 지가 궁금했을 뿐. 제미니의 굳은 표정은 펴질 생각 하지 않았다. 인정사정없이 그를 구타하고자 주먹을 움켜쥔 죄책감 덕분에. 덕분이었다. 죄책감 덕분에.


“지금 살아 있는 것도 기적 아닌가? 원래라면 죽었을-”

“됐어. 그만 말해도 돼. 한두 번 들어본 소리도 아니고….”

“…응.”

“이제 가야봐야겠다. 진료 밀리겠어.”


감정 하나 들지 않은 말투로 툭툭 내뱉기를 반복하며 곧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깐의 시간이었음에도 허리가 뻐근한 것이 저절로 등에게 주먹질을 가하게 만들었다. 잭 형은 어떻게 침대에만 있을 수 있어? 그가 쾌활한-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사실 도달하지 아니한- 목소리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만 그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그의 행동에 밖으로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춘 채로 조용해진 그를 바라보았다.


잭은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싸늘함이 질려 동경의 눈빛으로 햇살을 바라보았다. 노란 햇살. 색깔만으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강요한다. 병상 옆에 놓아진 낡은 꽃잎 위에도 햇살이 가볍게 올라간다. 낡아버린 세월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떼어버린다. 마지막 정이 아닐 수 없었다. 혁명이 성공하기를 바랐지만, 사실은 혁명이 끝나지 않고 지속되기만을 바랐었다. 혁명군 안에서의 색은 명백한 파란색이었다. 정체감도 뚜렷하였기에 혁명군 리더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 바 있었다. 다만 현재는 빛바랜 무채색. 눈도, 피부도, 심지어 그가 생활하고 있는 공간도 하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색이 빠지지 않은 건 그의 흑발 뿐. 창백하기 그지없는 본인을 보면 소름 돋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복잡한 기계음, 텁텁함을 자아내는 병실 안 공기,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를 제어하는 링거는 혁명군 시절 새벽에 기지를 기어 나와 올려다보았던 밤하늘을 동경하게 만들었다. 식상한 표현으로 밤하늘을 수놓았던 별들과 한 입 먹힌 달 조각, 그리고 쉼 없이 우는 귀뚜라미들.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과거가 그리워져 오니까. 이제는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어서. 누군가를 동경할 처지도 되지 못했다.


“…제미나.”

“응? 왱?”


그가 목을 돌려 결국 병실 문을 열려는 이의 행동을 멈추었다. 한순간에 걸걸해진 목소리는 차마 듣지 못할 정도로 처참히 망가져 있었다. 그럼에도 제미니는 목에 힘을 주며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애썼다. 지금 이 순간만큼이라도. 오직 잭을 위해서. 목을 긁어서라도 끌고 온 쾌활함은 역겨웠다. 다만 그가 희미한 웃음을 보였을 때, 이는 참을 만한 수준이 되었다.


“나중에, 같이 산책 좀 하자. 네가 나 좀 끌어주라.”

“나야 좋지. 언제가 좋아?”

“너한테 맞춰야 하는 것 아닌가? 난 아무 때나 가능해.”

“음, 이번 주 토요일에 일정 비어. 오후 4시 정도부터 7시까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일정이 수두룩한 달력을 살펴보던 도중, 공백으로 채워진 파란색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진료고 뭐고 아무 것도 없는 휴식의 날. 그 날에 잭 형과 산책을 하는 것 쯤이야 상관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들떴을 뿐, 적은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럼 그때 가자.”

“좋아. 맛있는 거 사 먹고 그러자구!”

“…오뉴 형이랑 류가 없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좋겠다, 그치?”

“뭐?”


잠깐의 침묵.


“잠시만, 형. 형, 뭐라고 했어. 어?”


공백이 되었다. 말을 끝마쳤을 무렵, 그의 존재는 의미가 없어져버린 지 오래였다. 푸른색이 녹아 흰색으로 칠해졌다. 그가 잭을 향해 몇 번이고 되물었지만, 다시 그가 창밖에서 고개를 돌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자코 같은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그가 문을 열어 신선하기 짝이 없는 병실 밖 공기를 들이마실 때까지, 발걸음 소리가 미세하다 못해 그에게서부터 사라져버릴 때까지 그의 공허한 백안은 노란빛 창밖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떨어지는 눈물 하나 닦지 못한 채로. 창밖의 풍경 아래에 보이는 웃음기 가득한 붉은색과 초록색의 존재를 바라보며, 눈물 머금은 웃음만 흘려보낼 뿐이었다.

404 ERROR 《에러 뜬 종이의 혁명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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