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들은 신학교양수업에 대해 큰 기대가 없었다. 수도원은 삶과 항상 가까이 있었고, 모태신앙으로 교리의 기본 정도는 대충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또 색다른 이야기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래도 학생들은 새카만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땋아 내린 검은 눈의 사제님이 회색빛 짙은 노란색 사제복을 입고 등장했을 때는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상한 오렌지색에 가까운 주황색 사제복을 입은 사제님이야 이런 저런 곳에서 많이 뵐 수 있지만 상한 레몬 같은 색을 입은 사제님은 좀처럼 뵙기 어렵기 때문이다. 역시 강의를 하시는 분의 급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늘 한결같은 설법과 같은 강의가 펼쳐질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다시 지루한 얼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그랑데차우렐 마법학교 신입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학생들은 그래도 우렁차게 대답해 주었다. 강당 앞에 선 사제가 학생들의 분위기를 파악한 듯 아주 온화하게 웃으면서 전체를 바라보았다. 사제의 웃음은 편안한 느낌을 전달하기 때문인지 학생들은 조금 풀어진 분위기가 되었다.


“이 사제가 또 무슨 지루한 이야기를 하나, 지금 그런 생각들 하고 있었죠?”


신입생들의 마음을 꿰뚫은 질문을 했다. 학생들이 정곡을 찔려 몇몇 웃음을 터뜨리자, 사제님은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수습사제들이 작은 상자 몇 개를 차례로 강의실로 날랐다. 새로운 것이 등장하자 학생들은 기대감에 웅성거렸고,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회색레몬빛의 사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도엔디라 교수라고 합니다. 앞으로 한 학기 동안 여러분과 신학수업을 함께할 텐데요. 이 앞에 있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랍니다. 여러분께 드리는 입학 선물이기도 하고요.”


도엔디라가 ‘선물’이라고 말하자 다시 주변은 웅성거렸다. 선물이라는 말을 듣고 설레지 않을 사람은 없기 때문일까? 이그드라실은 ‘역시 등록금을 그렇게나 받아 처먹으니 저런 거라도 해주겠지만 쓸모없는 거라면 항의 할 테다.’라는 심정으로 무심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검고 짧은 강렬한 머리색의 남자를 흘깃 쳐다보면서 작게 물었다.


“뭔지 알거 같아?”

“네.”

“존댓말!”

“아, 응. 큰일이네 근데.”

“저게 뭔데.”

“저건.”


작게 율리우스가 말하려 할 때 도엔디라 교수가 상자 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귀걸이였다. 작고 반짝이는 까만색의 귀걸이.


“이것이 뭔지 알겠나요?”

“네!”


갑자기 강의실은 놀라운 선물에 대해 기쁨이 터지는 것 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런.”


그리고 율리우스는 예상이 적중했다는 듯 곤란스런 목소리를 냈다. 이그드라실은 한 쪽 눈을 찡그리며 도엔디라가 들고 있는 것을 노려보았다. 저것은.


“모두 아시다 시피 제 귀에 이렇게 노란색으로 빛나고 있는 이것입니다. 흑요의 귀걸이라 불리는 것이죠.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신성력’이라는 것이 조금씩 있답니다. 이런 것을 많이 타고나는 사람들은 신에게 더 다가가기 위해 사제의 걷는 일이 많죠. 저도 이 귀걸이 덕택에 지금 여러분 앞에 있답니다.”


이그드라실은 사제의 말을 듣고 잠깐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면 사제들은 모두 귀에 귀걸이를 걸고 있었다. 그 색이 다양했던 것 같다. 늘 수련에 매진해야했던 이그드라실은 사제를 많이 만나지 못했지만, 사제 그림을 봐도 저런 게 달려있었던 것 같다.


“넌 없었잖아.”

“빼고 다녔으니.”


라고 다시 작은 목소리로 묻자 율리우스가 짧게 대답했다.


“왜?”

“하아.”


율리우스는 대답대신 드물게 한숨을 쉬었다.

도엔디라 교수는 귀걸이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다.


“마법학교를 선택한 여러분께 어떤 색깔이나 징조를 기대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이건 마법이라는 신비한 학문을 배우면서 배우게 될 제 신학수업에서 얼마나 신앙심을 정제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테스트할 수 있도록 하나의 장치를 선물하는 겁니다. 물론 색은 쉽게 나타나지 않아요. 너무 실망해선 안 됩니다.”


교수는 그렇게 말한 후 손짓으로 제자인 견습사제들에게 그 귀걸이를 나눠주라고 명령했다. 견습사제들이 손바닥보다 작은 보석상자를 하나씩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늘 사제들이 하는 것만 보고 직접 만져보지 못했던 학생들은 예상치 못한 기쁨에 웅성웅성 들떴다. 자신에게 어떤 색이 나타날까? 하는 기대가 주변에 맴돌았다.


견습사제들이 학생 얼굴도 일일이 보지 않고 하나씩 마구 나눠주었다. 그러다가 한 견습사제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보고 싶은 손바닥이 나타나 고개를 쳐들었다. 손바닥의 주인은 당연한 듯이 율리우스였다. 율리우스가 고맙다는 인사를 눈짓으로 가볍게 해주었는데, 견습사제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지금 나눠준 흑요의 보석처럼 새카만 눈 색깔을 넋 나간 듯 쳐다보았다.


“저도 주셔야죠.”


라고 이그드라실이 말하자 번뜩 놀란 듯이 이그드라실에게도 하나 전달하였고, 그 줄에 마저 주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계속 율리우스를 힐끔거렸다.


“무슨 마수라도 뻗은 거 같아.”


이그드라실이 피식 웃으면서 약혼자를 쳐다봤다. 그의 약혼자는 눈동자가 안 보이도록 눈꺼풀을 닫으며 실눈을 떴다. 그러면서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런다고 티가 안 나려고.”


라고 또 한 번 이그드라실이 혼잣말을 하자 율리우스는 더욱 후드를 잡아 당겨썼다.

그러는 와중에 모두에게 흑요의 귀걸이가 분배되자 도렌디라 교수가 다시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당연하다는 듯 한 번씩 귀걸이를 걸쳐보는 것이었다.


이그드라실도 재빨리 귀에 걸어보았다. 하지만 신은 이그드라실에겐 전혀 관심이 없는 지 새카만 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본인이 바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율리우스를 쳐다보았다. 율리우스는 그냥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연한 이야기지. 난 무신에게 선택받았었다니까.”


라며 이그드라실이 피식 웃었다. 그랬더니 율리우스는,


“무신에게 선택 받았어요?”

“존댓말.”

“아. 선택받다니 대단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증명은 못 해. 이런 식으로.”


율리우스는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인 채 귀걸이를 쥐고 있었다.


“안 해 봐?”

“안 해.”

“결과를 알아서?”

“그보단 다른 게 더 무서워서.”


아리송한 말을 하며, 율리우스는 그냥 흑요의 귀걸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도렌디라 교수는 학생들 중 특별한 색깔이 나는 학생이 있는 지 죽 둘러보았다. 역시, 성기사 학교 학생들이 아니다 보니 거의 색의 변화들이 없었다. 그 와중에 검은 색 위에 불그스름한 빛이 덧씌워진 색이 더러 있었고 그런 학생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저기 사제님.”


그리고 견습사제 한 명이 말을 작게 걸었다.


“지금은 수업 중이니 나중에 말해 보세요.”

“그게요. 사제가 아닌데 눈이 새카말 수 있나요?”

“그렇지 않죠. 머리 색깔보다 눈 색깔이 변하기 어려우니까요.”

“저기……. 학생 중에 눈이 새카만 학생이 있어요.”

“네? 어디요.”

“저, 저, 저기요. 굉장히 놀라운.”


견습사제가 빨간 흑요의 귀걸이를 가볍게 흔들며 손가락질을 했다.


“저기 후드를 눌러쓴 분요.”


한 열 살은 어릴 신입생에게 자신도 모르게 ‘분’이라는 명칭을 쓰며 견습사제는 가리켰다. 도렌디라는 무슨 착오거나 외부에게 알릴 순 없지만 신앙심을 다소 부풀릴 수 있는 컬러 접안렌즈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서 귀걸이 색깔을 확인해보려고 유심히 바라보니, 후드에 가려 귀가 보이지 않았다.


“여러분 모두 착용 했나요? 제 수업시간에는 이걸 쓰는 게 의무랍니다. 모두들 아셨지요?”

“네!”


모두 신기해하며 귀를 매만지는데 후드 쓴 학생은 대답도 않고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니 도렌디라는 그 학생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 후드 쓴 학생.”


이그드라실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정면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가 자신 주변을 지적한 것을 알았지만 율리우스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불길한 기운은 느꼈다.


“부르는데.”

“하아.”

“어차피 드러날 거 이렇게 드러나는 게 낫지. 아까 들통 났으면 더 불편한 일이 일어났을 거야.”


라며 이그드라실이 이죽, 웃었다. 하지만 율리우스는 그런 이죽거림을 좋은 조언으로 알아듣고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회색후드 학생. 잠깐 일어나서 후드를 내리세요. 그리고 귀걸이를 보여주세요.”


율리우스는 망설이다가 비척이듯 일어나서 후드를 슬쩍 내렸다. 그리고 방긋 웃으면서 눈을 떠 교수와 눈을 마주쳤다. 짧기는 하지만 새카만 머리카락과 멀리서 봐도 맑아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너무나 눈에 띄었다. 늘 있던 일이기 때문에 율리우스는 당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도렌디라 교수였다. 정말 저만한 인재가 왜 마법학교에 들어왔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오히려 좋은 인재를 여기서 픽업할 수 있겠다며 잘됐단 생각도 들었다.


“아직 귀걸이를 하지 않았네요! 얼른 해 보세요. 학생의 흑요컬러가 굉장히 궁금하네요!”


율리우스는 굉장히 밝고 진하게 웃다가 이그드라실을 쳐다봤다. 이그드라실은 대충 무슨 색깔이 나올지 예상 되었다. 율리우스 드 비올레테면 진보라색이 나오겠지. 그건 뻔한 이야기였다.


“이 귀걸이는 제가 낄 수 없습니다. 도렌디아 형제.”


라며, 교수님의 이름을 막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좋았던 탓에 큰 불손함을 느낄 수 없었다. 도렌디라는 ‘형제’라는 명칭보다 ‘낄 수 없습니다.’에 초점을 맞춰서 약간 의아한 표정을 했다. 새파랗게 어린 신입생이 명령에 불응하는 것에 대해 다른 교수였다면 화를 냈겠지만 도렌디라도 사제다. 당연히 분노보다 설득을 한다.


“그러지 말고 껴 보면 좋겠어요. 학생에게서 좋은 색깔이 나올 거예요.”

“제가 끼면 큰일이 납니다. 책임질 수가 없어요.”

“괜찮습니다. 제가 책임질게요. 괜히 이러니 굉장히 궁금하군요.”

“모처럼 선물이 망가지니.”

“아닙니다. 학생이 걱정할만한 일은 없어요. 걱정 말래두요?”


율리우스가 너무나 빼자, 그제야 도렌디라는 약간 역정을 냈다. 과연 잘 수련된 레몬빛 사제였다.


“그냥 껴.”


라고 이그드라실이 재촉하자, 율리우스가 아주 곤란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럼 다른 학생들이 귀걸이를 모두 뺐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그 귀걸이를 함에 넣으면 끼겠습니다. 그리고 앞에 계신 형제분들과 교수께서도 빼시면 하겠습니다.”


교수는 계속 빼며 이상한 소리까지 하는 거의 사제급 외모의 신입생에게 헛웃음이 났다. 이쯤 되면 어떻게 해서든 낀 것을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네요. 모두 귀걸이를 빼서 함에 넣어보세요. 얼른요.”


학생들도 무척 궁금했던 탓에 율리우스가 원하는 대로 재빨리 귀걸이를 빼서 함에 담았다. 당연히 수습사제들은 더 빨리 주머니에 넣었다. 이그드라실이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안 빼고 쳐다보니 율리우스가 어깨를 쳤다. 그제야 귀걸이를 뺐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오기가 생긴 교수는 귀걸이를 빼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정식 사제인데다가 사제가 된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런 상징과 같은 것을 빼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불가능할 것이다.


율리우스는 교수를 설득할 순 없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정말 푹 쉬고 귀걸이를 귀에 달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펑,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펑’ 하는 소리는 곳곳으로 번졌고 모두 갑자기 자기 손 안의 작은 함에서 일어난 일에 깜짝 놀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소리가 교탁 앞으로 향했고 도렌디라 교수의 양 귀가 ‘펑’하며 터졌다. 노란 가루가 도렌디라의 양 뺨에 머물러 있다가 사라졌고, 그 여파인지 도렌디라 교수의 귀가 살짝 찢어져 피가 났다.


오늘 나눠 준 100여개의 흑요의 귀걸이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물론 도렌디라 교수의 귀에 걸려있던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율리우스가 아주 계면쩍게 웃고 있었고, 이그드라실도 깜짝 놀라서 서 있는 율리우스를 쳐다보았다. 흑요의 귀걸이가 들어있던 곽을 열어보니 검은 가루와 쇠붙이로 된 걸이만 남아 있었다. 멀쩡한 귀걸이 한 쌍이 가루가 되어서 사라졌다.


“혹시, 이, 이,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도렌디라 교수가 목소리까지 떨면서 이 망연한 상황의 근원지에게 물었다.


“율리우스.”


라고 율리우스가 처음 운을 떼자 다들 ‘혹시’라는 의문과 ‘설마’라는 예상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스피엘입니다.”


라고 성을 말하자, 거의 교실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 약 2초간 지배하더니 비명이 곳곳에서 떠졌다.


“율리우스 드 비올레테? 진짜?”


그게 진짜인지 제일 궁금한 도렌디라 교수는 큰 소리로 물었지만 율리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이름은 이제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답할 필요가 있을까? 흑요의 귀걸이는 순도에 따라 견고함이 다른데, 노란 색의 바로 위 레벨인 초록색 까지는 지금 나눠 준 일반품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하지만 파란색 이상이 되면 더 짙은 농도의 흑요 귀걸이가 아니면 신성력에 의해 부서지고 만다. 그렇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자체 제작이 필요한 귀걸이를 할 만한 사람은 사제 중에서도 최고위직이라 도렌디라라고 해도 만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나라에는 정말 유명한 사제가 한 명이 있다. 인간으로는 유례가 없는 색을 낼 수 있다는 아주 유명한 사제. 오죽 놀라웠으면 그 사람의 이름을 색깔로 표현했을까. 출연했을 때부터 대단히 화제였고 하이리히츠 교구가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사제.


그가 보이는 신성력이라는 것은 주변 몇 미터 순도 낮은 흑요석은 다 부셔 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근데 왜 여기 오셨어요?”


라는 정말 근본적인 의문을 도렌디라 교수가 던졌을 때 파란 만장한 첫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 종소리를 듣고 버뜩 정신을 차린 도렌디라는 수습사제들에게 몇 마디 지시하며 수업 종료를 알리고는 강의실을 떠났다.

수업종료를 알리자마자 모두 율리우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정말 절묘한 타이밍으로 줄리앙이 강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사람들에게 휩싸여서 ‘진짜 율리우스 드 비올레테이냐?’라는 질문이 쏟아지는 사이를 헤집고 잘생긴 선배가 끼어들었다.


“율리. 얼른 나와.”


아주 친근하게 애칭까지 만들어 붙이며 곤란에 휩싸인 룸메이트를 동기생들의 질문 폭풍에서 건져냈다. 이그드라실은 새삼스럽지만 정말 엄청난 거물과 약혼했다는 것을 상기하고 있었다.


‘남자랑 혼인이라도 안 시키면 누가 그만두길 바라겠어. 저 선천적으로 신에게 사랑받은 남자를.’


얼마나 독한 결심인지 모두 알까? 그보다 독한 것은 저 스피엘가의 가주겠지만. 이그드라실은 감히 만지면 안 될 것 같은 비올레테의 검고 동그란 뒷통수를 가볍게 두들겼다.


“율리. 줄리앙이 불러.”

“어, 어.”


학우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한 전설의 前 사제님은 자신의 환속의 길로 인도해 준 두 사람과 함께 강의실에서 탈출했다.


“고마워요.”

“말 안 해도 다 알아. 다들 알아.”


줄리앙이야 말로 별 설명을 듣지 않았지만 다 안다는 듯이 율리우스 등을 토닥였다.


“앞으로 정말 골치 아프겠지만 어쩌겠어.”

“흑요석 파괴자. 전용 귀걸이 따로 있어?”


이그드라실은 율리우스에게 이상한 별명을 하나 더 붙여주며 물었다. 율리우스는 끄덕였다.


“엄청 특별한 특수제작 아이템이겠지?”

“응. 엄청 특수해.”

“선 볼 때도 빼고 다닌 거 같은데.”

“진보라 사제복 입고 다니는데 귀걸이까진 필요도 없어서.”

“그래도 한 번만 보여주면 안 돼?”


라며, 이그드라실이 물어봤다. 줄리앙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이그드라실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직 강의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알 리가 없는 줄리앙은 고개만 갸우뚱거리며 이번에는 율리우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제 환속해서. 의미가 없는데 굉장히 비싼 거라 아직 가지고 있어. 나도 이제 속세에 적응하기 위해 속물적으로 생각해야 하거든.”

“그럼 그걸 팔 거야?”

“만일 궁해지면 그럴지도 몰라.”

“그럼 팔기 전에 한 번만 보여줘. 진짜 보라색이야? 아까처럼 까만게 보라색이 돼?”

“저기, 그런 부탁은 실례가 아닐까?”


라며 줄리앙이 살짝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이그드라실은 생각해보라며 말했다.


“얘는 이제 환속했잖아요. 점점 속세에 물들면 탁해질 거 아니에요. 그럼 다시는 진짜 보라색을 못 볼 수도 있는데, 아직 비올레테일 때 보지 않으면 아깝잖아요? 게다가 우린 친구사이잖아? 그 정도는 보여줘도.”


이그드라실이 너무나도 잘 구슬린 데다, ‘친구’라는 마법의 말을 붙이자 속세친구가 이제 처음 생긴 물론 친구인 동시에 처음 생긴 속세의 약혼자의 구슬림에 홀라당 넘어간 얼굴을 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굉장한 크기의 흑요 귀걸이를 한 쌍 꺼냈다.


“친구의 부탁은 들어주는 것이 속세의 법칙이지요!”


라며 또 무척 환하게 방긋 웃더니 잘 보라며 한 쪽씩 귀걸이를 꼈다. 그랬더니 새카만 색의 귀걸이가 알 수 없는 기운으로 소용돌이치더니 진하고 빛나는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약간 반짝임을 간직한 보라색이 귀걸이 안에서 계속 소용돌이치며 영롱하게 빛났다.


“아직도 신이 예전만큼 사랑하나요? 보라색이죠?”


율리우스가 자신의 귀걸이 색을 확인하기 어려워 줄리앙에게 물었다. 줄리앙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그드라실은 신기한지 율리우스의 귀걸이를 자기도 모르게 만졌다.


“아직 너무 사랑하는 거 같은데.”


칼레의 前 가주지명 제 1 순위자는 흑요의 귀걸이와 율리우스의 귓불을 함께 만지면서 그런 말을 뱉었다.


“이거 탁해지는 해? 환속하면?”

“몰라요. 보통은 그렇대요.”

“존댓말. 환속해도 계속 신이 사랑하면 계속 이 색일까?”

“몰라. 그런 건 별로 관심이 없어.”


율리우스는 확인이 끝난 흑요의 귀걸이를 한 짝씩 떼어냈다. 이그드라실도 율리우스의 귀에서 손을 뗐다. 정말 신기한 것을 보았지만 왠지 태어날 때부터 낙인찍힌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줄리앙은 직접 눈으로 ‘비올레테’를 확인하고 나니 정말 어깨가 무거웠다. 이 사제를, 이 유명한 사제를 결정적으로 환속시킨 당사자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정말 힘든 일 많겠지만 나한테 꼭 도움을 청해.”

“줄리앙은 굉장히 적극적이네요.”


이그드라실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내가 내 의무에 짓눌려 배고팠을 때 한 끼 대접해준 사례야.”


줄리앙은 이전 이그드라실이 했던 말을 많은 자 인용하며 대답했다.


“이 학교에 들어오는 건 모두에게 쉽지 않고 특히 학비 벌면서 다니려면 정말 힘들지만, 자기가 쌓아왔던 것까지 모두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해 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둘 다 적응하기 쉽지 않을 거고 후천적 전형들은 더 적응하기 어려워하거든.”


줄리앙이 숨을 한 번 들이 쉬고 또 말을 이었다.


“가문 차이, 경제력 차이, 환경 차이 주눅 들기 마련이지만, 너네 경우엔 몇 가지 전혀 문제없을 테니 그런 건 조언해줄 필요 없겠지. 대신 수입 괜찮은 알바는 소개시켜 줄 수 있다. 그리고 족보도 준다. 너네는 이 학교 신입생 모두가 부러워할 혜택을 받는 거야.”


라며, 지난학기 전학과목 톱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그드라실은 피식 웃더니 질문을 했다.


“학칙에 보니 1년 동안 최종 전 학과목 톱 1인에 한 해서 전액 장학금 지급되던데, 이상하네. 지난번에도 일하던 거 맞지요?”

“아, 그건.”


그 말을 들은 줄리앙이 미간을 확 찡그렸다. 뭐라 말할까 고민하다가 아주 진지한 얼굴을 하면서 목소리를 줄였다.


“너네도 아주 특별한 비밀이 있으니까 내가 너네에게만 알려주는데 말이지.”


줄리앙은 다시 한 번 확인하듯이 좌와 우를 살폈다. 그러자 율리우스도 이그드라실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모으게 되었다.


“황족은 톱을 해도 장학금이 지급되지 않는대. 그래서 물어보니까 내가 황족이래.”


그는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율리우스와 이그드라실은 코평수를 넓히며 놀라운 사실에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황족요?”


라고 율리우스가 묻고,


“황족이 왜 일을 해요?”


라고 이그드라실이 묻고,


“돈이 없으니까. 황위 계승 순위가 192위라고. 내가 황족이라서 내 장학금은 촛불처럼 사라졌어.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니까 너네만 알아. 어딘가 새면 나도 너네 비밀을.”

“그럼 우리가 황족한테 서빙 받아서 밥을 먹었다고요?”

“진짜로?”


라며 율리우스가 뜨악한 얼굴로 입을 손으로 막았다.


“대박이다, 진짜.”


이그드라실은 풋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황족이 가난한 고학생이라서 온갖 알바 틈틈이 공부를 한다는 것이 너무 우습다. 생각해보면 칼레의 후계자가 앞으로 괜찮은 알바를 찾아 다녀야한다는 것도, 이 나라 최고의 사제가 직급 낮았던 사제에게 교수님 소리 하며 학교 다녀야하는 현실도.

셋은 자기도 모르게 큭큭, 숨죽여 웃다가 큰 웃음 참기 위해 부들부들 떨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괜찮다. 젊으니까.

셋은 약 한 달여 만에 한 레스토랑에서 그랬던 것처럼 키들거렸다. 그때처럼 알코올이 정신을 집어 삼킨 것이 아닌 매우 멀쩡한 정신으로 말이다.



1차BL 쓰는 계정: @bbokkwon 랑야방/엔네아드 덕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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