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가까이, 로빈은 변한 게 없었다. 평소처럼 행동하다가도 곧 불안한 표정으로 온실 안을 걸어 다녔다. 아르젠이 외출한다고 들을 때마다 유크테아가 또 오진 않을까 불안했지만, 그 이후로 오지 않았다. 로한에게 기대하지 않은 답을 들은 뒤에, 사란은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더욱더 착실하게 로빈의 식사를 챙기고,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생활이었다.


해가 뜨고,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로빈 몫을 온실로 들고 갔다. 겨울이 된 뒤로 온실 밖으로 나가지 않아 할 것 같아서 미리 욕실까지 온실에 만들어놨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사란이 조금 더 고생하면 되는 것뿐이었다. 온실에서 원래 소파가 놓여있던 입구 근처 공간에서 3명이 죽은 뒤로는, 가구를 옮겨 온실의 중앙에서 생활했다. 외문과 내문을 거쳐서, 조금 걸어가야 로빈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란.}


자신을 보고 웃는 로빈은 나쁘지 않았고, 표정이 다양해진 것은 좋았다. 그 계기는 상당히 불쾌하며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유크테아 옆에 항상 붙어 다니는 기사들만 아니었어도 사란은 벌써 유크테아에게 주먹을 휘둘렀을 거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에, 때려주고 싶다는 일 이후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크테아만 생각하면 다쳤던 왼쪽 허벅지가 아파온다. 칼이 조금만 더 깊게 들어왔으면 평생 다리를 절수도 있었다는 의사의 말을 생각하면 화가 올라온다.


{어제 아르젠이 왔었어.}

{.... 온실로요?}

{응. 대화 내용이 좋진 않았지만, 얼굴 봐서 좋았어.}


탁자에 쟁반을 내려놨다. 아르젠 역시 로빈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을 거다. 유크테아에 대한 일은 전혀 모르고 있는 아르젠은, 갑작스럽게 변한 로빈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 명쾌하네요.}


사란이 찾던 정답을, 아르젠이 알려주었다. 너무 간단하게 나온 답이다. 자신은 너무 가까이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해 왔기에 보이지 않았던 점이다. 거리가 멀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빈말로 저택의 사용인들이 아르젠이 대단하다고 칭찬한 게 아니었다.


{주인님은 지금 혼란스러우신 겁니다.}

{너까지 왜 그래, 진짜!}

{친구가 없어서 그러신 거라구요!}


로빈은 사란에게, 예전에 아르젠이 체르디엔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해줬다.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렇게 말하게 한 건 주인님입니다!}

{사란!}


이참에 사란은 할 말 못 할 말 가릴 거 없이 말해버리기로 결심했다. 재계약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겠다, 뭐가 어려울까.


{지금부터 수행원 사란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으로써 말하겠습니다.}

{하?}

{너 그만 정신 차려! 그 유크테아 자식이 미친 짓 한 건 맞아. 나도 내 목숨 소중해서 몸에 칼 박힌 이후로 어떻게 못 말린 것도 미안하게 생각해! 계약서에 어떤 미친놈이 그딴 식으로 난리쳤을 때의 경우는 써놓지 않았으니까!}


한 번 선 넘는 게 어렵지, 두 번은 쉽다.


{나도 네 사생활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나는 너를 지키고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지 보모가 아닌 걸 너도 잘 알잖아. 근데 이건 아니야. 이혼을 하든, 8국으로 떠나든지 결정해. 여기서 이렇게 평생 살 거야? 넌 아직 서른도 안 된 젊은 나이고, 뭐하나 잘하는 거 없는 무능력자인 거 아는데, 그건 어떻게든 되겠지! 너 이렇게 유크테아가 또 언제 올지 전전긍긍하면서 불안에 떠는 거 그냥 보고 있는 것도 화나. 후작이란 이름뿐인 남편하고 뭐 잘 될 거라고 기대하며 남아 있는 것도 아니잖아.}

{......}


말 할 때마다 뭔가 따지고 싶다는 듯이 입 끝을 짓이기던 로빈이, 마지막에는 눈을 감아버렸다. 설마 진짜 잘 되고 싶다는 것일까.


{... 잘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네가 후작을 좋아하는 건 맞아? 친구가 없어서 그 거리감을 착각하고 있는 건 아냐? 네 옆에서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말 하건데.... 아니다.}


사란이 10년 넘게 봐온 로빈은 ‘무성애자’에 가까웠다. 다른 사람에게 흥미 자체도 없고, 여러 가지 상황들에서, 여러 가지 행동들을 미뤄 짐작했을 때, 그렇게 결론이 나왔다. 작년에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애가 드디어 생각을 포기 했구나 싶었다. 취직하거나 호적에서 파일 바에야 생판 모르는 외국인과 결혼해서 완벽한 백수 생활을 추구하는 걸로밖엔 안보였으니.


{난 네가 이혼도 안하고, 8국으로 안돌아간다면 계약 연장 안 해.}

{사란! 너 진심이야?!}

{어, 진심이야.}


로빈에게 사란은 거의 엄마나, 친언니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사란 역시도 로빈 자신을 거의 친딸 또는 동생으로 생각할 정도로 아꼈다고, 고용관계 이상의 유대를 쌓아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그녀가 이별을 고했다. 고용관계에 있어 계약이 끝나는 건, 더 이상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거다. 이제는 식사를 하는 것보다 옆에 자신의 옆에 있는 게 당연한 사란이었는데.


{날 두고 떠날 거야?}

{나라고 떠나고 싶겠냐? 그러니까 이혼 아니면 8국으로 같이 가자고!}

{....}

{여기 있어서 뭐가 더 좋아질 것 같아? 후작이 갑자기 너를 좋아할 것 같아? 유크테아가 또 난리를 안칠 것 같아? 유크테아가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사란도 어렴풋이 생각은 해봤다. 유크테아가 어려워하는 로 가문도 아닌 자신을 윌슨처럼 로빈 앞에서 죽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날카롭던 칼을 자신에게 박아 넣던 그 녀석의 표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 네가 호적에서 파여도, 네 수행원이 아니더라도 너 하나쯤 먹여 살릴 능력은 있어. 지금까지 내가 돈을 얼마큼 벌었다고 생각해?}


로빈의 은빛 눈동자는 온실 어딘가를 배회했다.


*


아르젠은 오늘, 이번 주에 끝내야 할 일은 모두 끝냈다. 남은 여유 시간에 뭘 해야 할 지 느긋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올 줄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각도 못했다. 로 가문과 계약이 없었다면 이런 시간은 좀 더 후에 찾아왔겠다고, 역시 자본의 힘이 좋긴 하다고 생각된다.


겨울이라 낮아진 해 덕에, 집무실 깊은 곳까지 밝게 보인다. 제임스가 다기를 치우고 밖에 나가자 방에는 고요함 이 가득했다. 눈 내린 풍경, 적절하게 따뜻한 온도에 기분이 좋았다. 아르젠의 좋은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겨울이 되고 온실 밖에서 볼 수 없었던 로빈이 집무실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사란과 함께.


“할 얘기가 있습니다.”


이전에 유크테아가 사란이 아무리 로빈이 수행원이라도 어느 정도 선을 그으라고 여러 번 경고한 적이 있다. 유크테아는 신분에 맞지 않은 그런 언행을 상당히 싫어한다. 그래서 클로디어즈 저택의 사용인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네가 할 얘기가 있는데 로빈은 왜 온 거지?”

“제가 아니라 주인님이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럼 넌 나가있어. 방해다.”


사란은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별다른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실내임에도 두꺼운 코트와 망토를 두른 로빈은 꽤나 심각한 표정이었다. 근심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라는 게 조금 더 맞는 표현 같다.


“거기 서서 얘기할 거 아니면 앉아.”

“....”


로빈은 천천히 아르젠의 앞자리에 앉았다. 계절이 추워져서 인지, 로빈의 은발과, 하얀 피부가 더 차가워 보인다. 로빈은 자리에 앉고도 한참을 조용히 있었다.


“입 닫고 그렇게 계속 있을 거면 내가 먼저 말할까.”

“8국으로 돌아 갈 거야.”

“돌아오는 건?”

“.....”

“그 침묵은 아예 돌아오지 않는 다는 걸로 받아드리지.”


대화는 상당한 침묵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다. 서로 마주 앉은 상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8국으로 아예 돌아간다는 말을 꺼낸 후에, 한참을 조용히 앉아 있다가 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아르젠이 입을 열었다. 


“8국에 가는 건 괜찮지만, 이혼은 절대 못해줘.”


아르젠은 저번 주에 온실에 왔을 때와 말투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말투여서, 로빈은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진짜 아르젠이 말 한 건지 의심했다.


“뭐?”

“내가 죽기 전엔 이혼서류에 도장 찍어줄 생각 없어. 그 전까지 당신은 빈 클로디어즈야. 클로디어즈 후작 부인이라고.”


결혼 이후로 로빈의 이름은 ‘빈 클로디어즈’로 바뀌었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아르젠도 항상 ‘당신’, ‘부인’, ‘로빈’이라고 불렀고, 그 외에는 그 이름으로 부를 만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처음 듣는 정식 이름에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르젠은 착각이라고 말했지만, 혹시나.


“이혼과 계약은 별개라지만, 1국민인 나는 아직도 혈연이 계약에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서. 게다가 로 가문의 일원이 되는 거 흔치 않은 기회잖아?”

“.....하.”

“뭐야? 설마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하길 기대했어?”

“....그래.”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약간 호감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어.”


아르젠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에 있는 로빈에게 걸어갔다. 로빈은 생각보다 더 가까워지는 거리에 뒤로 물러섰다. 키는 똑같은데도, 위압감이라는 게 느껴졌다. 아르젠은 로빈과 한뼘 정도 간격을 둔 채 고개를 가까이 했다.


“당신이 아름다운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젊고, 몸도 좋고.”


아르젠이 노골적으로 시선을 옮기자, 로빈은 잠깐 얼굴을 붉혔다가 아르젠을 밀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쪽 어깨가 돌아간 상태에서 아르젠은 마른세수를 해댔다.


“이 정도로 말했으면 돌아올 생각은 없겠지.”


이전에 온실에 갔을 때, 로빈의 상태가 상당히 많이 나쁜 상태인 건 알고 있었다. 편지 내용도 그런 거였고.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겨울이 끝나거나 그 전에 8국으로 보내야겠네, 싶은 정도. 걱정하거나 의사를 따로 불러주거나 그런 건 옆에 있는 사란이 해야 할 일이고. 자신을 좋아한다는 식으로 고백하려하기에 완전히 막았다. 8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참에 얇은 정도 없애버리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저렇게 말했으면 알아서 마음도 접지 않을까 싶다.


“로빈 제대로 온실까지 가는 거 확인하고 다시 와. 그때 말 해.”

“...네.”


어째선지 다시 돌아온 사란은, 아까보다 얼굴이 더 험악해져서 왔다. 체급과 근육량 자체가 다르다 보니, 아마 한 대만 맞아도 이자벨라에게 가까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아르젠이다.


“뭐, 왜. 할 말 있으면 얼른 해. 나 저녁에 약속 있어.”

“정말 주인님을 그런 눈으로 본 겁니까?”

“....대답할 가치가 없네.”

“후작님.”

“왜, 맞는 말이잖아. 곧 떠난다니까 말해 봤어 왜.”


사란의 목과, 팔에 돋고 있는 힘줄은, 가히 황실 주체 기사 대련에서 본 적밖에 없다. 워낙 큰 신장에 맞춤옷이 아니면 전부 소매나 바짓단이 조금씩 짧은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그게 무섭게 느껴질 때가 없었다. 살면서 계급장 떼고 여자에게서 이런 위험을 느낀 적은 절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손을 대기를 했어 뭘 했어? 오히려 손 댄 건 그쪽이지.”


하지만 위축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또 할 말 없으면 8국으로 얼른 날 잡아서 돌아가.”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거군요.”

“... 티 많이 나?”

“네.”

“로빈에겐 말하지 마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사란과 다른 관계로 만났다면 꽤나 좋은 고용관계가 됐을 지도 모른다. 적당히 눈치도 빠르고, 연륜도 있으니까. 적당히 종이에 로체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는데 꽤나 시간이 걸리지만, 아르젠이 별도로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란은 조용히 기다렸다.


“로체에게 전해줘. 잘 가고. 내 장례식에는 오고.”

“이제 떠나면 죽기 전까지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까?”

“사람일은 모르니까. 웬만해서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가끔 8국에는 가겠지만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 로빈에게는 좋은 사람 만나라 그래.”

“....... 죽을 때까지 빈 클로디어즈라면서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가 필요했던 건 로 가문과의 계약뿐이야.”


얼마나 더러운 소문들이 지난 몇 년 간 자신의 귀에 들어왔는지, 조프리의 사건 이전까지도 추잡한 소문들이 엄청났다. 로체가 일을 크게 만들지 않았다면 더 심해졌을 거다.


“네가 보기엔 어때? 나 아까 좀 쓰레기 같이 보였나?”

“무척이나요.”


사란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가려 했다.


“전서구도 잘 데려가. 내 저택에서의 일인데 내가 봤다는 거에 기분나빠하지 말고. 여기서는 당연한 거니까.”

“.... 읽으셨습니까?”


아르젠은 대답 없이 웃을 뿐이었다. 


{잘 가렴. 사란. 단한과 태안은 못 보내준다.}


어떻게 아르젠이 8국어를 할 수 있게 됐는지, 묻지를 못했다. 그것보다는 이미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좀 전에 로빈에게 치근거린 건 네가 이해해 주길 바라고. 로한에게 말하지 마.}


공용어와 비슷한 문법과 어휘지만, 어떤 언어든 이렇게 단시간에 이정도로 유창하게 구사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란의 앞에서 웃고 있는 아르젠은 그걸 해냈다.


{대체 언제부터....?}


대답은 듣지 못했다. 




추운 겨울의 클로디어즈 항구에 유크테아는, 부두가 보이는 가게에 앉아 느긋하게 밖을 쳐다봤다. 아직 바다가 얼지는 않았기 때문에 출항에는 무리가 없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저 화려한 배만 봐도 클로디어즈의 누군가가 밖으로 나간다는 건 알 수 있을 거다. 추운 날씨라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언제 돌아온데?”

“글쎄.”


배웅을 마치고 돌아온 아르젠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가게에 들어와서는 유크테아가 마시던 따뜻한 와인을 뺏어 마실 뿐이다.


“네 뒤에 녀석들은 같이 안가고?”

“이제 내거야. 로빈이 나한테 줘서.”

“저걸 어떤 용도로 써? 글은 읽을 줄은 알아?”

“침실노예는 침실노예로 쓰지.”

“하아?!”


아르젠은 곧 유크테아를 뒤로하고 어디론가 떠났다. 업무 때문에 어딘가로 간다고는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그것까지 기억하진 못했다. 워낙 충격적인 대답인지라 그 뒤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지워졌다는 게 맞는 말이다.


“쟤 뭐야? 라비, 쟤가 왜 저러는 지 어떻게...!”

“침작하세요. 지금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아니,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쟤가 어? 저 노예들이랑, 것보다 남자랑, 어?”

“그런 귀족들은 많지 않습니까.”

“알아, 아는데 쟤가... 쟤가 저러니까 이러지!”


라비는 자신이 마치 아르젠을 키운 것 같은 태도와 반응을 보이는 유크테아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자벨라의 타계 이후 1국에서 금욕적인 귀족 대표로 꼽히는 아르젠 후작의 갑작스러운 대답에 놀란 건 자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저택 밖에서 활동할 때는 제임스와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침실노예들을 데리고 밖에 다니는 것부터가 충격적이었으니까. 조프리 사건 덕에 워낙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


“오신다면 미리 알려주시지 좋았을 텐데요! 주인님...!”

“내가 내 집에 오는데 가끔은 연락이 필요한가 싶어서.”


아르젠은 로빈을 배웅하고 바로 황도의 저택으로 갔다. 40세를 넘기기 전에 글란딘과 체르디엔 중에 누가 황도의 저택에 남을지, 영지를 이어받을지 정하기 위해서였다. 영지의 일도 이제는 안정기이기도 하고, 영지 순례까지 마쳤으니 이번 겨울에는 딱히 영지에 계속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마님께서는 같이 안 오셨습니까?”

“아, 그녀라면 8국에 갔다.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 갑자기 말입니까?”


정오가 가까운 시간에, 아르젠이 혼자 탔고 왔을 거라 예상한 마차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뒤이어 내렸다.


“그렇게 됐다. 태안과 단한의 방은 따로 마련하지 않아도 괜찮아.”

“네?”

“나와 같은 방을 쓸 거다.”


델슨에게 입고 온 코트를 넘긴 아르젠은 글란딘과 체르디엔을 찾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둘 다 오늘은 저택에 오지 않는 날이었다. 글란딘은 티어니와 어디 온천으로 여행을 갔다고 하고, 체르디엔은 친구의 별장에 저번 달부터 있다고 한다.


“이래서 네가 미리 연락하고 오라 그랬던 거군.”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오라고 연락을 넣겠습니다.”

“그래.”


델슨은 예의상 글란딘과 체르디엔을 다시 불러 오냐고 물었을 뿐이었는데, 그 질문에 대한 긍정의 대답을 들었을 때는 당황했다. 기별도 없이 온 것도 그렇고, 나가 있는 사람들을 다시 불러 온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걸리는 지는 상관없어. 그 둘이 올 때까지 여기 있을 테니.”

“.... 영지를 오래 비워도 괜찮은 겁니까?”

“괜찮으니 걱정 마라.”


방으로 돌아가던 아르젠은 델슨에게 말을 덧붙였다.


“애들이 다 모이면 불러. 꽤나 무거운 이야기일 테니. 마음의 준비는 하고 오라 그래.”

“네.”


정확히 무슨 일 때문에 황도의 저택에 갑작스럽게 온 건지 모르겠지만, 심각하다는 것은 아르젠의 얼굴만 봐도 다들 짐작할 수 있었다. 글란딘과 체르디엔이 저택에 돌아오기 전까지 아르젠이 후작이 된 후로, 이례적인 행보를 보였다. 사교 파티에 참가하거나, 친분이 없던 다른 귀족들과 티타임을 갖거나,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하는 등의 일이었는데, 그가 클로디어즈 가주가 된 이후로 없던 일이었다.


클로디어즈 가문과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은 귀족가에서도 아르젠의 티타임 요청은 거절되지 못했다. 이미 조프리와, 로체에 대한 이야기는 전부 퍼져 있는 상황에서 거절할 정도로 대담한 자는 없다. 그 아무리 폐쇄적인 곳이라도, 자본의 힘 앞에서는, 연합기구에서도 꺼리는 그 사람을 한 나라의 귀족 정도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교 활동에는 태안이나 단안이 함께 다녔다. 그 조프리가 보냈다는 은빛민족의 노예임을 알아보라는 듯이 모자나 베일은 일절 없이, 그 머리칼과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는 식이었다. 그 말은, 아르젠이나 그 노예들을 건들이면 조프리 백작처럼 사라진다는 경고와 같은 것이었다.


그야말로 종횡무진이었다. 글란딘과 체르디엔이 전부 저택에 도착할 15일 동안, 참석한 사교 파티는 5개, 참석한 티타임은 12개, 주최한 티타임이 2개다. 갑작스러운 사교활동에 놀란 건 클로디어즈 저택뿐만이 아니라, 모든 귀족들이 놀랐다. 황후마저도 아르젠이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물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갑자기 사교활동에 참석하셨다는 게... 대체..!”

“안 그래도 지금도 파사이져 자작가에서 티타임 중이십니다.”

“뭐야 대체...?”


처음에 저택으로 돌아오라고 적힌 편지를 받고, 그 뒤에 들려온 아르젠의 행보에 대해 듣고 체르디엔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친분이 있는 귀족들과 간단한 티타임이면 어느 정도 이해하겠지만 ‘사교파티’까지, 그 주에 열리는 모든 파티를, 친하지도 않은 귀족들과 티타임을! 갑작스러운 행동의 변화에 1국 전체가 당황해했다.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작은 도련님까지 전부 오셨으니, 오늘 저녁에....”

“... 편지로 말했던 그 무거운 이야기 말이지?”

“예.”

“형님은?”

“방에 계십니다.”


글란딘과 체르디엔은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앉았다. 앞에 놓여 있는 차가 식는 건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들이 반드시 모여야 하며, 언질 하나 없이 급하게 왔고, ‘무거운’ 이야기를 하러 왔다니. 그 얘기가 어떤 건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디엔.”

“몰라... 새어머니에 대한 거 아닐까 생각하는데, 형은?”

“아버지가 심각한 병에 걸린 건 아니겠지?”


이전 클로디어즈 후작도, 이자벨라도 병에 걸려 죽었다. 지금까지 클로디어즈 가문의 전적을 보자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규모는 작지만 여러 무역을 하며 여러 나라를 거치기 때문에 늘 새로운 질병에 걸릴 가능성은 무한했다. 심지어 아르젠은 8국에 갔다 환자라고 불릴 정도로 몸 상태가 나빴다고 했으니, 충분히 나올 만한 말이었다.


“....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형.”

“내가 지금 좀 지쳐서 그래. 미안하다.”


딱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서 온 아르젠은, 평소 취향과 다르게 화려한 차림이었다. 옷 자체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지만, 소재부터 장식까지 하나하나 상당한 고가의 것들이었다. 화려한 걸 좋아하는 황후의 취향이라기에는 색은 차분했다. 황가의 색을 쓴 건 왼쪽 가슴에 달린 클로디어즈 가문의 문장뿐. 잘 쓰지 않던 지팡이까지 들고 있는 모습에, 글란딘과 체르디엔은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오랜만이라는 인사는 이 상황에 맞지 않겠구나.”

“... 잘 지내셨나요?”

“그럭저럭? 너희는?”

“잘 지냈습니다.”

“저 역시도요.”


나쁘지 않은 안부 인사를 마치고, 정적이 식당 내를 차지했다. 식기소리가 가득했던 그 시간을 멈춘 건 아르젠이다.


“작위를 줄 거다. 너희 둘에게.”

“형은 그렇다 쳐도, 저는 아무런 일도 하고 있지 않는 걸요.”

“나 역시 가주가 됐을 때에는 아무 것도 할 줄 몰랐어.”

“아직 저는 후작이라는 이름을 달기에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

“너희 의견은 중요하지 않단다. 내가 그렇게 정했다.”


이 정도로 강압적인 모습은, 이전에 이자벨라가 죽고 황도로 보냈을 때 외에는 없었다. 아이들에게 아르젠은 최대한 맞춰주는 쪽이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자면 단호하긴 했지만, 아이들이 싫다고 한 것에 대해 뭐라고 하지는 않는 사람인데.


“둘 중의 한 명은 가주가 되어 클로디어즈 영토에, 남은 한 명은 황도에서 정치와 사교활동을 계속하게 될 거다.아, 이건 지금 당장은 아니고, 적어도 5년이나 10년은 지나야 이뤄질 거다. 그 전까지는 차근차근 일을 알려줄 테니.”

“.... 몇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딱히? 언젠가 일어날 일인데, 미리 알려주는 것뿐이란다.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너희끼리 얘기하고 정하라는 배려인데.”


보통 가주 자리를 넘기는 건, 죽기 전이나 60세를 넘긴 나이가 꽤나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매우 젊은 축에 속하는 아르젠이 말하기에는 10년은 이른 주제였다. 작위를 받는 것 역시 적어도 20세를 넘긴 이후에, 결혼을 했을 때의 이야기.


“어디 아프십니까?”

“디엔! 너 지금....!”

“건강해.”

“그런데 왜 벌써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지금까지 내가 영지 일로 바빠서 신경을 못써준 것뿐이야. 후작가의 빚까지 전부 변제하고 영지가 풍요로우니, 이후의 미래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 최근에 칼리엔 가주가 바뀌어서 좀 서둘러 말한 감이 있긴 하구나.”


반박할 수 없는 이유였다. 가주로써 당연히 말 할 수 있는 것이었고, 후계자를 일찍 정해 집중적으로 교육시키는 게 더 효율적이긴 하니까.


“너희들은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길 바란다. 미리 준비를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미리 말하는 거야. 아직 20세가 되지 않았음에도.”


아르젠은, 자신이 없는 미래에서 아이들이 헤매지 않도록 미리 준비를 해 두고 싶은 거였다. 그런데 아이들의 저항은 생각보다 심했다.


“그래서 갑자기 사교계에 얼굴을 내민 겁니까? 황후와 혈연이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볼 게 없는 이름뿐인 후작가문이, 로체라는 사람을 등에 지고 부흥하고 있다고, 클로디어즈는 이제 무시할 가문이 아니라고 알리려고?!”

“형!”

“우리가 가주가 되면 로체라는 사람의 후광을 이용하지 못하니까! 사교계를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이! 그렇게 시달렸던 사람이 왜 갑자기 그런 데를 가나 했어!!”


글란딘의 말은 정답, 갑자기 아르젠이 사교에게 나간 건 말한 대로다. 특히나 조프리 백작이 죽은 직접적 원인인 단한과 태안을 데리고 다닌 것도 그 중 하나이다. 모두가 그들이 성노예임을 안다. 그 노예를 당당히 높은 사교파티에 데리고 다니는 주최자에게 모욕적인 행동에도 아무도 뭐라고 말 하지 못하는 건, 전부 로체의 힘이었다. 이런 식으로 과시하는 것은 아르젠의 취향이 아니나, 단기간에 다른 귀족들을 찍어 누르기 위해서는 이것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었다. 로체와 파티를 다니지 않는 이상.

“내가 지금까지 너희에게 너무 깨끗한 모습만 보였나보다.”

“..... 무슨 뜻이에요?”

“진흙탕 싸움에서는 누가 이기느냐가 중요하지. 과정은 중요하지 않아. 내가 또 뒤에서 예전 같은 험담을 듣든, 욕을 먹든 나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클로디어즈를 만들 거다. 너희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뭐든지 할 거고. 지금은 그 과정이다. 만약 너희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가 있다면 직접 죽일 거다. 그게 네 약혼녀든.”


아르젠의 표정은 상당히 차가웠다.


“있잖니, 내 누이가 황후라 얻은 건 같잖은 가십과 쓸모없는 사치품. 그리고 천문학적인 빚뿐이거든. 덕분에 너무 순조롭게 망해버려서 나는 정말 힘들었고, 돈만 조금 있었으면 나았을 병을 방치해서 이자벨라도 죽였지. 영지에만 매달리는 나에 대한 추문은 끝이 없지. 영지를 위해 계약이나 부탁을 하러 다른 귀족들을 만나면 경멸의 시선과 거절의 대답을 내놓았다. 후작이라는 높은 작위 때문에 함부로 부탁도, 고개도 못 숙여서 배로 더 고생했고.”

“... 아버지.”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판단하고 해외로 시선을 돌렸다. 작년까지도 계약서와 함께 나도 판다는 조건을 걸었어. 나에게 남은 건 그럭저럭 봐줄만한 외모밖에 없었으니까. 이미 망한 명성에 외국인과 결혼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거든. 물론 나와의 결혼 조건은 전부 거절이었다. 그 부분만 제외되고 성사된 거래도 많지.”


하지만 유일하게 그 조건까지도 성사된 게 로체와의 거래였다.


“로 가문과의 거래 이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 영지는 살아났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폭발적으로 성장했지. 이번에 로체가 조프리 백작을 죽여 나와의 관계를 조명한 것도 도움이 됐다. 이제는 그 누구도 내 부탁을 거절하거나, 내게 나쁜 소리 하나 하지 않더라.”

“... 그래서 기쁘십니까?”

“기쁘진 않지만 좋아. 동시에 가증스럽고.”

“.......”

“로체의 후광은 내가 살아있을 때만 적용된다. 내가 죽기 전에 다른 귀족들과의 관계를 정리해야하는 이유지.”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한 때 클로디어즈 후작가가 심각하게 어려워서 황도의 저택에는 황후가 사비로 품위유지비를 줬을 정도였고, 당시의 아르젠은 이틀에 한 끼만 먹었다고 들었으니까. 자신들을 위해 돈은 생기는 족족 바로 황도로 왔고, 혼자서 얼마큼 고생해 가문을 이 정도 수준으로, 아니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시켰는지. 너무 잘 알았다.


“작위를 주는 것은 빠른 시일 내에, 체르디엔이 20세가 되는 해에는 가주를 정할 거다.”

“....네”

“사교회장에 저 노예들을 데리고 다니는 건 조프리 백작의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걸 목적으로 하는 건가요?”

“그것도 있지만, 내가 남색 취향이라거나 성기능에 이상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둘 다 사실이라고 광고하려고.”

“네?!”

“하하하.”


돈 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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