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은비 시집, <사랑하고도 불행한>


1.

그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봄은 사뿐히 걸어온다. 가끔 비틀거리는 모양으로 걷긴 하지만. 

봄은 잠이 덜 깬 상태로 다시 베개에 뺨을 댔다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자신의 의무임을 자각한 것처럼 눈을 반짝 뜬다.

미애야아.

우응, 잘 잤어?

부름과 질문이 얽히는 순간으로 시작하는 하루가 너무나도 일상적이라, 우리는 우리가 당연하다.


2.

김의신은 괜찮은 사람이다. 모두 그를 괴짜라고 부르긴 하나 동시에 유쾌하고, 싫은 티를 내지 않으며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무장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는 의뭉스러운 무언가를 기필코 파고들어 기어이 알아내려 하고, 인류의 구원을 꿈꾸는 괜찮은 연구자이다.

이 시간엔 여기에 아무도 안 와요. 그 말 뒤에 자연히 따라붙던 예외의 얼굴. 그는 열성적으로 진행하던 연구를 잠시 접어두고 그를 기다리다 먼저 잠들었을 그녀에 대해 생각하기로 한다. 요 며칠동안 예외에 예외를 두었던 것이 미안해서이기도 하고. 이번 연구가 마무리되면 우리의 미래는 크게 요동칠 테니.


3. 

자아. 모든 탐구의 시작은 점검이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지?

김의신. 나. 괴짜... 아니지, 모든 현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 외골수, 이단아, 천재, 또라ㅇ...  흠. 아주 중요한 연구를 하는 중. 인류를 살리기 위한 연구. 아주 중요하지, 암. 케이에 대한 연구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어. 어디 보자. 우리 미애. 서미애. 내 가장 좋은 친구. 미애는 ... 환자를 잘 다룸. 흰 색이 아주 잘 어울림. 아카다마 포도주를 좋아함. 졸리면 몸이 아주 따뜻함.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는 것을 좋아함...

그는 혼잣말을 하며 그녀에 대해 적어나가는 와중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손을 멈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에 기꺼이 함께 나갔던 새벽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번 겨울은 이제야 막 떠나는 중이니 기억이 선명한 것은 당연하지만 ... 그는 순간 자신의 안에 그녀의 발자국이 남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가장 좋은 친구'에 크게 동그라미를 그린다. 몇 번이고 원을 그리던 그는 조용히 각자의 이름 아래에 글자를 더 적어넣는다. 

서미애. 아무도 밟지 않으려 했던 눈을 밟는 것을 좋아함. 

김의신. 침묵도 거짓이라면. 거짓말에 능함.


4.

김의신은 괜찮은 사람이다. 자기는 늘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을 관통하던 비극도 괜찮고, 우리의 미래는 괜찮다 못해 아름다울거라고 믿는 사람이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주 목이 마르지만 괜찮을 거다.


5.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녀는 창가로 걸어온다. 여전히 비틀거리기도 하지만, 정확히 그를 향해 걸어온다.

왜 서미애의 이름 아래에 '아주 달콤한 향기가 난다'는 문장을 적지 않았을까. 보고싶어, 라는 말을 자주 한다는 것과 아주 봄볕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도.

달빛에도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의 피묻은 손 끝을 바라본다.

김의신.

응, 미애야.


이래서 이제 우리가 우리일 수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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