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태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처음이 있었다. 누구나 하나쯤 비밀스러운 사건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라지만, 그에겐 유난한 비밀이었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나뭇결의 옹이 같은 부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덧니처럼 툭 튀어나와 외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말하는 것이 어울릴까. 어쨌건 그저 그런 사이의 대학 동기들이 모여 가지는 시시껄렁한 술자리에 끌어올 수 없는 처음이었다. 이제는 근 10년 전 이야기가 되어가는 절절한 첫사랑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는 것은 믿기 힘든 거짓이 될 테다. 그리고 지태는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잊히는 것은, 본인이 잊어가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인정하는 것이 더는 힘든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잊기 어려운 기억이라도 어려울 뿐이지 잊히긴 한다. 그 사실 하나가 문득 왜 그렇게 잔인하게 느껴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얼마나 깊이 사랑했던, 얼마나 속을 끓여대었던, 얼마나 상처받았던 모든 일은 잊힘 앞에서 공평했다. 감정이 아무리 짙어도 결국 끝끝내 퇴색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선우를 잊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 애 역시 나를 잊은 지 오래일 거라고, 선우의 성씨와 그 외의 모든 것을 잊은 죄책감을 덮어두려 애를 썼다.


그러나 선우는 지태의 '처음'이었다. 최초의 의미를 가지는 것. 지태의 세계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 하나. 밀려오던 파문. 발등을 간질이던 잔물결과 반짝이던 햇살…. 그에게 선우는 찬란한 것과 같았으니 그를 잊어가는 것은 몇 없던 좋은 기억을 잃는 것과 같았고, 그것이 계속되면 언젠가는 무겁고 나쁜 기억만 제게 고이게 될 것만 같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잃은 성씨는 졸업앨범을 펼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다시 알게 된다 한들 지나간 감정과 시간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관계 역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름 석 자를 모두 알면서도 선우야, 부를 수 있던 시간은 이제 지난 지 오래라는 것을 모르지도 않았을뿐더러 부정할 마음조차 없었다.


선우야, 부르면 뒤돌아 웃던 얼굴은 지태가 지금까지 기억하는 유일한 모습이었다. 어렴풋이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던 기억 한두 개가 스치기도 했으나 그건 마치 기시감과 같은 것으로, 기억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느낌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그 웃는 얼굴을 어디든 그릴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기억하느냐 하면 긍정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본다면 그는 지태의 마음 한편에 화상같은 것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강한 빛 아래에선 화상을 입는 게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지태는, 어렸던 그 시절의 그는 그것을 몰랐던 알았던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본인이 될 수 없는 모습을 사랑했던 동경했던….


이카루스가 되어 태양을 향해 날아가고자 마음먹었던 적은 없다. 지태는 제게 허락된 거리에 만족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졸업하던 날 언제나처럼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선우를 두고 도망치듯 집으로 향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만약 그가 이카루스였다면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를 향해 사랑을 고해했을 테지. 그러니 지태는 범인凡人에 불과했고, 본인과 선우가 다른 곳에 존재함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진실로 사는 곳이 달랐던 걸까. 예컨대, 선우는 하늘에. 지태는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 그저 서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위안 삼으며 사는 것이 전부였을까? 그러다가 생각은 어느새 인간의 체온에도 화상을 입는 연약한 동물에 이른다. 지태는 어렴풋하게 남은 화상 흉터를 더듬듯 선우를 그리는 것이 제게 허락된 유일한 미련이라 여겼다. 그렇지만 이 선에서 만족하며 잊는 것을 방기하는 것은 그때의 그 감정이 사랑이 아닌 그저 될 수 없는 이상理想을 동경하던 것에 가까운 것일까.


그저 동경이었다면….


그랬더라면….


'진짜 너는 내 생각만큼 착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라.'


바람보다 차갑고 예리하게 스치는 생각에 지태는 손끝을 조금 베였다. 기억 밖의 너는 태양이 아니었을지 모른다고. 그렇다면 나는 물 밑에 사는 물고기라서, 평범한 네 체온에도 화상을 입고, 따뜻하다 동경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너는 아주 평범했는데, 나는 그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체온을 가져서 네 빛이 그렇게 뜨겁게 느껴졌던 것이라고…. 


아, 뭍으로 올라갈 수 없다면 아가미라도 있었으면 좋았을걸. 그래서 영영 뭍을 동경하지 못했더라면 지금보다 나았을까. 어떤 실체 없는 거대한 손이 내 귀를 막고 숨통을 틀어쥐어 애초에 희망이라는 것을, 밝은 이면을 보지 못했더라면 그 사랑이 이만큼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순수한 사랑이 아닌 무언가임에 이리도 숨 막히지는 않았을 텐데.


지태는 불을 끄고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마치 이곳이 물 속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일렁였다. 정말 물도 아닌 게 물 행세를 하는 것이 꼴도 보기 싫어, 커튼을 닫고 물속에 몸을 던지듯 침대로 엎어졌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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