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치 군. 오늘도 도망치면 진짜 재미없을 줄 아세요!”

선생이 소프라노에 가까운 목소리로 도둑고양이처럼 문밖을 나서려던 신이치를 멈춰 세웠다. 

“……교수님. 딱 오늘까지만 봐주세요. 저 지금 사건 현장에 가 봐야 해요.”

“세상에 왜 경찰이 있고 감식반이 있을까요? 명탐정 군.”

“아니, 지금 사람이 죽었다니까요!”

“신이치 군은 본인이 없어도 세상의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좀 배워야 해요.”

지금 가면 아버지한테 그대로 일러바칠 겁니다. 이어지는 선생의 으름장에 신이치는 군말 없이 바이올린을 어깨에 얹었다.


***


[잘 해결돼서 지금 사정 청취 중이야]

2시간에 걸친 레슨이 끝난 후. 신이치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어깨에 걸친 채 터덜터덜 음대 건물을 나서면서 다카기 형사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새 해결됐구나, 젠장. 이놈의 레슨만 아니었어도. 신이치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코난이 신이치의 몸으로 돌아온 뒤 그의 아버지인 쿠도 유사쿠는 신이치에게 바이올린 레슨 선생님을 붙여 주었다. 꽤 알아주는 작곡가 겸 음대 교수였는데, 추리 소설을 좋아했으며 특히 쿠도 유사쿠의 작품을 좋아해 일부러 사인회까지 찾아가 안면을 틀 정도였다. 이제 예순이 훌쩍 넘은 그녀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성량을 지녔다. 왕년에는 소프라노 음역의 성악가로도 잠깐 활동했다고 하니 전성기에는 지금보다 엄청났겠다고 생각하며 신이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달려와서 아직 교복 차림인 자기를 흘끗흘끗 쳐다보는 시선이 신경 쓰여 신이치는 빠른 걸음으로 정문을 나섰다. 큰길로 접어들어 막 출발하려는 버스에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면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남은 자리가 맨 뒷자리뿐이었으므로 신이치는 안 그래도 좁아터진 뒷좌석에 바이올린 케이스와 함께 끼어 앉았다. 출발과 동시에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리는 불편한 승차감을 견디며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다시, 다시. 감정이 하나도 없잖아.

신이치는 선생의 싸늘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오늘은 도입부 연주를 시작하는 족족 퇴짜를 맞아서 진도도 제대로 못 나갔다. 사실 조금 더 감정을 담아 연주하라는 선생의 지적은 벌써 한 달 내내 계속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뿐인 레슨이었지만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듣다 보니 신이치는 그놈의 감정 타령에 질릴 대로 질려버렸다. 그놈의 감정이 대체 뭐길래.

평소였으면 집에 도착하자마자 케이스부터 내팽개치고 추리 소설이나 읽었을 테지만 오늘따라 신이치는 괜히 오기가 생겼다. 그가 서재로 들어가 기세 좋게 악보 뭉치를 늘어놓았다. 바이올린을 어깨에 걸친 뒤 왼쪽 턱으로 받침을 묵직하게 눌러 지탱한다.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한 그가 이내 도입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이올린 특유의 우아하면서도 구슬픈 음색이 나긴 했지만 어쩐지 제가 듣기에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신이치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심호흡했다. 다시 처음부터 연주.

대체 뭐가 문제일까. 음정? 절대 음감을 가진 자로서 감히 말하건대 음정은 완벽했다. 자세도 호흡도 흐트러짐 없었고 악보를 벗어나 연주한 부분도 없었다. 흥. 한참 동안 악보를 노려보던 신이치가 아니꼬운 듯 콧소리를 냈다.

웃기지 말라 이거야. 셜록홈즈는 감정 따위 논리적 사고에 방해가 될 뿐이라고 했다고. 바이올린 연주도 악보를 보기는커녕 그때그때 자기가 내키는 대로 즉흥 연주를 했을 뿐이란 말이다. 그렇게 속으로 구시렁대던 신이치가 이번에는 눈을 감은 채 악보도 보지 않고 다시 도입부를 연주했다. 그러자 어쩐지 아까보다는 더 들어 줄 만했다. 도중에 퇴짜 놓을 사람도 없겠다, 신이 난 신이치가 머리 아닌 몸이 가는 대로 자유롭게 연주를 이어 나갔다.

이미 연주는 악보를 벗어난 지 오래였지만 어쨌든 도입부의 선율이 변화를 가지며 반복되었으므로 듣기에는 꽤 그럴싸한 곡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되도 않는 기교를 이어가던 신이치가 마침내 현을 강하게 밀어 올리는 것으로 연주를 끝마쳤다. 몰입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그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그 순간을 음미하고 있을 때, 짝짝짝, 불쑥 박수 소리가 끼어들었다. 눈을 번쩍 뜬 신이치가 뒤돌아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잘 들었어.”

언제 들어왔는지 시호가 짝다리를 짚고 신이치를 주시했다. 박수는 세 번이 전부였는지 양손은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뭐야. 언제 들어왔어?”

“방금.”

“…….”

“작곡 실력도 있는지 몰랐네.”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과 함께 그녀가 미묘하게 웃었다.

아니, 하필이면 이럴 때 들어올 건 또 뭐람. 괜히 민망해진 신이치가 활을 든 손을 떨구었다.

“웬일이야?”

“빌려 갔던 책 돌려 주러.”

시호가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책을 내밀면서 신이치가 있는 책상 쪽까지 걸었다. 세상의 모든 추리 소설이 보관되었을 것 같은 광활한 서재는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데만도 한참이나 걸렸다.

“벌써 다 읽었어?”

“응.”

“한꺼번에 빌려 가도 괜찮은데.”

“한 권씩 끊어서 보는 것도 재미있어.”

책상에는 바이올린 케이스와 악보가 늘어져 있었다. 시호는 그 옆에 추리 소설을 던져 놓고는 폴짝 뛰어올랐다. 책상에 걸터앉은 그녀가 악보를 집어 훑어보았다.

“레슨 선생이 어쩌고 하더니 엄청 열심이네?”

“말도 마. 그 레슨 선생한테 엄청 깨지고 오는 길이야.”

“어머. 그래?”

시호는 신이치가 바이올린 레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목요일 방과 후만 되면 죽상이 되어서는 레슨 가기 싫다고 노래를 불러 댔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레슨 선생의 목소리가 거슬리네 어쩌네 별 시답잖은 불만을 털어놓는 걸 보며, 정말 레슨이 싫기는 싫은 모양이라고 시호는 생각했다.

바이올린 레슨은 쿠도 부부의 아이디어였다. 제아무리 자유방임적인 양육 방식을 고수한대도 부모 입장에서 아들이 거대 범죄 조직에 휘말려 유아화된 일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나 보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성인의 몸으로 돌아온 지금, 사건 해결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저 성질머리를 어떻게든 죽여 놓기 위해 부부가 고안한 방안 중 하나가 바로 바이올린이었다. 사건 현장을 빨빨대며 돌아다니는 것 외에는 서재에 처박혀 추리 소설이나 읽고 앉아 있는 추리오타쿠의 취미 생활이라 할 만한 것이 바이올린 아니면 축구였는데, 아무래도 축구는 사람 모으기도 쉽지 않아 바이올린으로 결정이 났던 것이다.

“몰라. 다시, 다시! 감정이 없잖아욧! 그러더라니까.”

신이치의 선생 흉내에 시호가 풉 웃었다. 하여튼 엄마를 닮아 연기 실력 하나는 수준급이다. 시호는 그가 코난일 때 하던 어린애 흉내를 꽤 좋아했다.

그놈의 감정이 뭐냐고. 꿍얼거리며 신이치가 활로 현을 스타카토로 뜯어 댔다.

“연주할 때 무슨 생각하는데?”

“생각?”

“어. 뭔가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걸 생각해야 할 거 아냐.”

곰곰이 생각하던 신이치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글쎄. 일단 팔의 위치라든가. 호흡도 중요하고. 악보대로 잘하고 있나, 뭐 그런 생각.”

“바보네. 선생이 감정을 말할 단계면 더 이상 스킬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잖아.”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린 신이치가 벌써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를 도입부를 다시 연주했다. 확실의 스킬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스킬 이상의 뭔가가 감정이라는 얘기인데. 대체 그 감정이 뭐냐고?

“선생이 더 말한 건 없고?”

“몰라. 앵무새 같애. 감정 실으라는 말 외에는…… 아, 맞다. 멜로. 멜로하게 연주하라고 했어.”

멜로mellow. 번역하자면 ‘감미롭고 그윽한’ 정도 되는, 현악기의 아름다운 소리를 묘사하는 수식어. 그 단어가 눈앞의 남자와는 영 조화를 이루지 않아서 시호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무리야, 당신한테는.”

“야. 그렇게 단언할 건 없잖아?”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너는 뭐 얼마나 잘한다고?”

어머. 화내는 건가. 귀엽긴. 시호는 입가에 걸린 미묘한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신이치를 바라보았다. 신이치는 신이치대로 살짝 심통이 나 있었다. 안 그래도 2시간 내내 면박을 준 선생의 태도가 떠올라 기분이 언짢은데 너한테는 무리니까 단념하라는 식의 말까지 들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당신보다는 잘할 거야, 아마.”

“뭐어?”

“어머. 시범 한번 보여 줘?”

자신만만한 시호의 태도에 신이치가 잠시 멈칫했다. 이 녀석, 바이올린 켤 줄 알던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책상에서 뛰어내린 시호가 그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발뒤꿈치를 들어 올려 그대로 돌진. 입술에 닿는 감촉에 신이치는 순간 왼손에 쥔 바이올린을 떨어뜨릴 뻔했다. 가볍게 입을 맞춘 시호가 입술을 살짝 떼고 말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을까?”

“야, 너…….”

“목을 낚아채는 손의 악력, 입술의 움직임, 발뒤꿈치를 드는 높이. 뭐 이런 걸까?”

“지, 지금 뭐 하는…….”

그러고는 시호가 다시 입을 맞추었다. 무언가를 말하려 무방비하게 벌려진 입술 속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신이치는 왼손에 든 바이올린과 오른손에 든 활 때문에 꼼짝도 못 한 채 시호가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시호는 달콤한 사탕을 굴리듯이 그의 입안을 헤집었다. 머릿속은 지금 당장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조금 전 서재에 들어섰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들려 온 바이올린 선율을 알아챘을 때부터.

옆집 이웃이라는 핑계로 늘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불쑥 찾아오는 시호가 현관에서 들리던 바이올린 선율에 이끌리듯 서재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이 서재가 서재 이외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높은 천장을 아치형 돔으로 감싸듯 덮은 널따란 원형의 서재는 사방에서 소리를 조화롭게 반사하여 썩 괜찮은 연주홀 구실을 하고 있었다. 활을 긋는 우아한 몸짓과 박자에 맞춰 흔들리는 고개, 그와 함께 흔들리는 머릿결, 제멋대로지만 연주에 잔뜩 심취해 있던 뒷모습. 시호는 그의 뒷모습에 완전히 시선을 사로잡혀 단지 그와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숨도 못 쉬게 몰아붙이던 시호가 입술을 뗐다. 두 입술이 떨어지면서 가벼운 물소리가 났다.

“미야노…….”

“맞춰 봐. 무슨 생각 했게?”

신이치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아무래도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모양이었다.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

“달콤(メロー)하게 연주한다는 건 이런 거지.”

“뭘…… 연주…….”

“스킬은 나쁘지 않았지?”

그럼 이만 가볼게. 시호가 씩 웃어 보이고는 빠르게 읊조렸다. 그대로 뒤돌아 서재 밖을 향한다. 더는 무리였다. 포커페이스도 한계가 있다. 양 볼도 이미 달아오른 데다 애초에 아무렇지도 않게 키스할 만큼 시호는 낯짝이 두껍지도 않았다. 아까 서재에 들어서면서부터 뭐에 홀린 듯싶더니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구나 싶다.

“미야노.”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뒤돌아보지도,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도 않고 그냥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당돌하게 키스해 놓고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들킨다면 그것만큼 분한 일도 없었다.

“소설. 다음 편 안 빌려 가도 돼?”

“…….”

“이거 4권까지 있어.”

그 말에는 시호가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그걸 읽었을 거로 생각해?”

“……어?”

내일 다시 올게. 뒤돌아선 그대로 시호는 손만 흔들어 인사했다. 신이치는 영문도 모른 채 나긋나긋 흔들리는 그녀의 손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쿠도 군. 아마 당신은 모르겠지, 내가 매일매일 이곳에 오기 위해 추리 소설 핑계를 댄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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