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귀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친해졌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있었다. 친구라는 베이스를 깔아두고 보통 친구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들을 종종 하곤 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시작된 관계였지만, 그렇게 정의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있었다.


헤어졌다.


어떻게 끝났는지도 잘 모른다. 그저 어쩌다 보니 다투게 되고, 어쩌다 보니 멀어지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있었다. 다만 친구라는 베이스를 깔아둔 덕인지 우정전선에는 이상이 없었다. 보통 친구끼리는 하지 않을 일들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 한마디 말도 없이 시작된 관계는, 끝마저도 그와 같았다.


당사자인 둘을 빼고는 어느 누구도 황현진과 김승민이 짧은 연애를 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토록 조용히 시작했다 끝낸 관계.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귀어보니 친구관계가 더 나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 뿐이다.


"…뭐?"


너랑은 다른 느낌으로 좋은 사람이 생겼다고. 승민은 얼척이 없었다. 좋으면 좋은 거지, 저와 다른 느낌은 또 뭐란 말인가. 말을 저따위로 하는 황현진도 이상했지만 거기에 동요한 자신은 더 이상했다. 미련 없이 잘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건 현진도 마찬가지일 터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저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지. 승민은 고민했다.


"너랑은 많이 달라."


아, 그러세요. 정말 어쩌라고다. 너의 새로운 사랑에 대한 너무 과한 정보를 내가 굳이 알아야 할까? 와중에 저랑은 많이 다르다는 말이 거슬렸다. 뭐, 나랑 다른 게 뭐 그게 뭐. 그거 내 욕이냐? 승민은 제 앞에 놓인 라떼를 벌컥 들이키고픈 충돌을 억눌렀다. 동요하고 있다는 티를 내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없다.


"지금, 여기 올 거야."


저눔아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만 아니라면 성공했을텐데. 황현진 너 이 자식, 칵 접시물에 코 박고 죽어버려라.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 얼굴이 뾰로통하게도 생겼다. 저랑 다르다더니, 일단 생긴 건 엄청 다르다. 키도 작고, 목소리도 낮고, 테이블 위에 얹어놓은 손도 작고. 그래, 다르네. 나랑. 하지만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갑작스런 삼자대면 퀘스트를 매정하게 거절했다면 알지 않아도 될 정보였고 내 인생에 없을 사람이었다. 되도 않는 황현진 놈의 애교 섞인 땡깡에 지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텐데. 승민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저를 필릭스라고 소개한 사람은 어눌한 발음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문장까지 성공적으로 건넸다. 그리곤 어딘지 뿌듯한 얼굴로 저를 본다. 웃기는 애야. 까슬하게 생긴 주제에 안어울리게 꺼벙해 뵌다. 황현진은 그걸 또 좋다고 웃었다. 그런 말도 한다. 귀엽다고. 쟤 말버릇이 귀여워, 라는 건 제가 제일 잘 알지만 이 상황에서 듣자니 참 배알이 꼴렸다. 망할 놈. 좋냐? 이 커피 네 머리에 확 쏟아버린다?


"김승민입니다."


승민은 댄디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상상과는 너무나 다른 태도였다. 하지만 어떡해. 오리너구리 닮은 애가 진지하고 뿌듯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데 그 앞에서 깽을 놓을 자신이 승민에게는 없었다. 그저 제 손을 내밀어 고 조그만 손을 감싸쥐는 게 최선이었다.




2.


네 번째 만남이었다.


내 전 남자친구와 내 전 남자친구의 현 애인과 나. 괴상한 조합은 어느새 삼세번을 넘어 기어이 네 번째 만남을 성사시켰다. 승민은 제 앞에 나란히 앉아 꼴값을 떠는 커플을 보며 입맛이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 전 남자친구의 현 애인은 생각보다 칠칠찮다. 젓가락질 서툰 건 기본이고, 겨우 뭘 집어 들어 먹을라치면 흘리기 일쑤였다. 황현진은 또 옆에서 그걸 하나하나 다 챙겼다. 멀쩡한 입 달린 이필릭스 대신 포크 달라는 요청도 해주고, 멀쩡한 손 달린 이필릭스 대신 밥도 떠먹여 주고. 하. 승민은 콧방귀를 분다. 아예 화장실도 데리고 가지 왜. 빈정거림을 음식 대신 씹었다. 제가 아는 황현진은 참 손 많이 가는 놈인데, 저 옆에 앉은 이필릭스는 한술 더 뜬다. 늘 제가 챙겨줘야 했던 놈이 쟤 옆에 앉아 제법 인간 노릇 하는 꼴을 보니 웃겨 죽겠네. 그것만큼은 숨기지 않고 있는 힘껏 썩소 지었다. 그 순간 내 전 남자친구의 현 애인과 얽혀버린 시선. 내 전 남자친구의 현 애인은 제 얼굴을 보고 방긋 웃는다. 세 번의 만남 동안 파악한 이필릭스는 참 방긋방긋 잘도 웃는 애긴 했다. 근데, 지금 제 얼굴을 보면서도 저런 표정이 나올까? 누가 봐도 찌그러진 깡통처럼 웃고 있을 텐데. 눈치도 좀 없는 것 같긴 했지만, 그렇다고 표정도 못 읽는 건 아닐 거 아냐. 뭐 저런 게 다 있어?


"거 자꾸 나 보면서 웃지 마요. 정들어."


홧김에 튀어 나간 말이 저 정도에서 끝났음을 다행으로 여기자. 승민은 몰래 숨을 멈췄다. 눈을 동그랗게 뜬 현진이 저를 바라본다. 그걸 굳이 피하지 않았다. 내가 이따위 되도 않는 상황을 맞이한 건 순전히 네 놈 탓이니까. 여전히 한 쪽 입꼬리만 당겨 웃은 승민이 이번에는 필릭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꾸 나 보면서 웃으면 나도 웃음 나잖아."


제 스스로 밀고 있는 댄디보이 캐릭터와 퍽 잘 어울리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깨달은 게 하나. 아, 이거구나. 이거다. 복수할 방법. 빌어먹을 황현진한테 복수할 거야. 한 번 깨달은 사실은 승민을 빠르게 각성시켰다. 그래. 쿨한 척 사귀고 쿨한 척 헤어지고 쿨한 척 이 자리에 있지만 나는 사실 복수를 하고 싶었어. 개 같은 쿨함은 다 가져다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려. 나를 열 받게 하다니, 황현진. 네 새로운 남자친구 내가 확 뺏어버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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