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공포를 위해 재생해주세요































“흐흥- 흐흐흥-”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희미한 콧노래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 쪼그려 앉아있던 여주는 자각 없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눅눅한 이끼와 기분 나쁜 핏빛 점액으로 뒤덮인 괴상한 모양의 나무들이 우거진 숲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그 고요함을 뚫고 들려오는 묵직한 발소리. 무성한 나무 사이로 락스 물에 며칠간 담갔다가 빼낸 것처럼 푸르뎅뎅한 두피와 잔디처럼 듬성듬성 자라난 체모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저게 이쪽으로 내려왔다는 건··· 딴 애들은 무사하다는 걸까?’



빠직,



적갈색 이끼와 진흙으로 인해 질척거리는 바닥과 상반되게, 발 아래서 두 동강 난 나뭇가지는 바싹 말라 있었다. 익숙한 괴리감에 여주는 호흡을 멈췄다. 각종 공포 영화에서 으레 발견되는 클리셰 중의 클리셰. 주인공이 도망치거나 숨으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지거나, 잊고 있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댄다거나, 전혀 의도치 않은 소음을 만들어내게 된다거나 하는 것들. 어째서 간과하고 있던 것일까. 미리 조심했어야 했는데. 여주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역시 여기서 잡힐 운명이었던 건가. 



흐흥, 큭, 끄극. 게걸스럽게 히죽이는 섬뜩한 웃음소리가 다시금 적막을 깨뜨렸다. 청각이 비상한 미치광이는 어느새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육중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손에 든 커다란 도끼는 거무죽죽한 피와 살점으로 뒤덮여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나,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날만큼은 멀리서도 흉흉히 빛나고 있었다. 



지금이야 나무 밑동 뒤편에 간신히 몸을 숨기고 있지만 거리가 더 좁혀진다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 이제 그녀 앞에 놓인 선택지는 많아봤자 두 개 정도였다. 숨죽이고 가만히 앉아 발견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거나, 들킬 것을 각오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 전자던 후자던, 미친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손에 처참히 도륙될 것이라는 결말 자체는 결코 바뀌지 않을 테지만. 



‘내가 무리하게 나서서···,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한번 회한에 잠기니 기분은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감정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 여주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침착하자. 지금은 일단 저 도끼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없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어. 감고 있던 눈을 뜬 여주의 차분한 시선이 이제 열 걸음 정도 거리에 서 있는 살인마에게 고정되었다. 



‘더 가까이 오면 도망치는 건 정말 힘들어지겠지···.’



어느 정도 안전거리가 확보되어 있는 지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면 완전히 도망치는 것까진 무리더라도 더 안전하게 숨을 장소 정도는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죽을 거,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발버둥이라도 쳐 보는 거야.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단단히 매어진 신발 끈을 확인하고서 오른발에 힘을 실었다. 형편없이 더러워진 진흙 투성이 운동화 아래로 물컹거리던 땅이 움푹 꺼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



여주는 팔목을 잡아 죄는 악력에 다시 제자리에 앉혀졌다. 누구야, 하고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숨을 죽이고 살인마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나무 밑동 옆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소란함을 느낀 살인마가 금방이라도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 것만 같아 긴박감이 더해졌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워지는 살인마. 잠시 후면 조심성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난폭한 도끼질에 흔적도 없이 썰리고 말 것이다. 단념한 여주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수그리기 무섭게, 미치광이가 나왔던 통나무집의 뒤편에서 땅에 미세한 진동을 줄 정도의 요란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콰쾅-! 흥분감과 분노로 꾸륵거리던 미치광이는 괴이한 웃음소리와 함께 도끼를 휘두르며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멀어졌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여주의 귓가에 나직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나 없었으면 이거 확실히 게임오버였다. 맞지.”
















Liar (반복 O)
































동영상의 재생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만 해도 만면에 호기로운 웃음을 가득 품고 있던 윤기의 미간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2초가량 선명하게 나오던 화면이 치지직, 소리와 함께 꺼져버린 탓이었다. 우황청심환까지 먹어가며 억지로 버텼던 시간들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낙담한 빛을 감추기 힘들었던 석진은 작게 한숨을 뱉으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



허탈함에 실소를 흘리던 남준이 입술을 뗐다.



“윤기 형이랑 석진이 형이 찍어온 폐병원 투어 영상도 결국 못 쓰게 됐네. 와, 이제 뭐 남은 거냐 그럼?”

“일단 나랑 너랑 찍은 위자 보드는 다들 시시하다고 했으니까 빼고, 형들 영상은 먹통이고, 정국이랑 지민이가 엘리베이터에서 찍은 것도 날아갔으니까….”



뒷말을 흐리던 호석의 시선이 2인용 소파에 나란히 앉은 태형과 여주에게서 멈췄다. 



“너희 둘은 혼숨이었지? 따로 했다고 했나?”

“당연히 따로 했겠죠. 혼자 하는 숨바꼭질이니까.”



지민이 단호한 얼굴로 호석에게 일침을 날렸다.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여주의 핸드폰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던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내 거엔 아무것도 안 찍혔어.”

“제대로 한 거 맞아?”



“여주가 알려준 대로 했는데.”

“어, 잡혔다.”



콧잔등을 찡그리며 화면에 집중하던 여주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오- 역시 한여주.”



일곱 남자들이 여주를 둘러싸고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었다.



“근데 문제는, 잘 안 보이고 시시해.”



“아니, 근데 애초에 뭐가 찍혀야 하는 건데?”

“방금 전에 그거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윤기에게 정국이 대신 대답했다.



“뭐, 화면 깜빡거린 거?”



끄덕.



윤기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세게 눌렀다. 프레임 수 잘 맞춰 찍었으면 대충 늘여서 흔해 빠진 심령 비디오처럼 만들 수는 있겠네. 근데 그런 걸 누가 뽑겠냐고. 참가 상도 못 받겠는데. 








*








올해로 10회를 맞이한 《 할로윈 호러 영상 콘테스트 》는 국내 굴지의 한 게임회사 Oscuro에서 주최하는 이벤트로, 할로윈 시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주요 행사 중 하나였다.



접수 영상 하나당 지불해야 하는 참가비는 꽤 센 편이지만 해마다 치솟는 참여율로 우승상금 또한 매해 최대치를 경신했으니 참여 열기가 식지 않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10회 특집 콘테스트의 순 우승상금은 자그마치 10억원. 4회차까지는 내국인들에게만 참가 자격이 주어졌으나 5회부터는 국제적인 이벤트로 탈바꿈하면서 규모와 상금의 스케일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의 전문성 또한 매우 광범위해졌다. 


직접 촬영한 짧은 호러 영화를 접수하는 아마추어 영화감독부터, 공포 영화의 시그니처 캐릭터로 감쪽같이 분장해 영화 속 모습을 재연하는 이른바 코스프레 족들이 있는가 하면, 각기 각지에 위치한 호러 테마파크와 심령 스팟 순방을 하는 사람들, 직접 좀비랜드와 같은 소규모 호러 파크를 만들어 놀라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감시카메라 영상을 편집하는 참가자들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물밀듯 몰려드는 영상의 바닷속에서 돋보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독창성과 창의성. 어떻게 하면 남들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독특한 영상을 만들어 공포라는 주제를 맛깔나게 구현해 낼 수 있을까. 호러물 날것의 서늘함은 고스란히 전해주면서도 철 지난 프랜차이즈 호러물들 중 하나로 전락하지 않는 방법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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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얼마 전 종강의 기쁨과 씁쓸함을 동시에 만끽한 여덟 명의 주인공들 역시 ‘공포’라는 장르에 상당히 진심이라 할 수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오랜 세뇌 끝에 후천적 호러물 바라기가 되었다는 점은 마음에 걸리지만 일단 넘어가고, 이 호러 마니아 모임의 원년 멤버 셋의 이야기부터 찬찬히 알아보자.



어릴 적부터 함께 골목골목을 누비던 동갑내기 삼총사 여주, 정국, 지민은 진정으로 호러물을 좋아하고 즐길 줄 아는 자칭 타칭 공포 마니아들이었으니. 학창 시절, 본인들의 학급에 무서운 이야기 붐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에게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으며 시험이 끝나는 날마다 한 집에 모여 밤새도록 공포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삼총사에게 가장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유독 감명 깊게 읽었던 무서운 이야기들을 필사한 공책의 수가 열 권을 가볍게 넘어가는 여주로 말할 것 같으면, 중고등학교 재학 당시 쉬는 시간마다 무서운 이야기보따리를 야무지게 풀어놓는 것이 삶의 커다란 낙이었다. 


삼총사 중 가장 강령술*에 진심인 정국은, 유래와 종류 구분 없이 시도해 보지 않은 강령술이 없었다. 장소 불문, 준비물 불문. 안전한 강령술 라이프를 즐기는 것을 제 인생의 원동력으로 여기고 있었다. 

* 강령술: 망자의 영혼을 소환하는 위험한 놀이라 일컬어짐.


실내에만 틀어박히려는 절친 둘을 집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본인의 평생 숙명이라 여기는 지민의 경우, 세 사람 중 가장 강심장을 가졌다. 호러 메이즈에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환장하지만 웬만큼 무섭지 않다면 눈길도 주지 않는다. 오금이 저릴 정도의 공포를 준다는 리뷰 여러 개를 꼼꼼히 확인 한 후에야 직접 행차해 홀로 메이즈 하나하나를 돌며 퀄리티와 강도를 확인하고, 좀 재밌거나 참신하다 싶으면 여주와 정국을 데리고 돌아온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번 제대로 구석 놀이*를 시도해보겠다며 큰소리치던 정국은 곧 커다란 난관에 봉착했다. 놀이를 진행하려면 네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진정한 호러 마니아가 아닌 이를 자신들의 그룹에 끼워줄 수가 없다는 나름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정국에게 그것은 상당한 난제였다. 

* 구석 놀이: 빈방의 네 모퉁이를 이용하는 강령술의 일종. 


당시 같은 반이던 지민과 여주가 데리고 온 뉴페이스 태형은 매 쉬는 시간마다 여주가 들려주는 무서운 이야기의 청자가 되어 준 학우들 중 하나였다. 구석 놀이를 위해선 가구가 없는 빈방이 필요하다는 정국의 말에 흔쾌히 제가 사는 저택의 방 하나를 비워준 태형은 호러에 대한 열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이며 자연스럽게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 



대학생이 되어 서로 다른 학교로 뿔뿔이 흩어졌음에도, 네 사람은 주기적으로 연락하며 취미생활을 함께했다. 그러나 변화라는 것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 



“같은 과 김석진 선배님. 공포영화 엄청 좋아해서 그런지 말 진짜 잘 통한다? 오빠, 이쪽은 내가 얘기했던 친구들.”

“아, 반가워요. 여주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뭐야아- 그냥 말 편하게 해. 그게 덜 어색해."

“하하, 그런가?”



당시 방 안에 감돌던 싸늘한 냉기를 느끼지 못한 것은 여주 하나뿐이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남은 멤버들도 경쟁에 질세라 새 멤버들을 데려왔다. 정국은 윤기를, 태형은 남준을, 지민은 호석을. 새로 영입한 세 사람을 끝으로 모임원의 수는 동결되었고 그들의 모임에는 공식적으로 '그림자들'이라는 어둡고 다소 중2스러운 이름까지 붙여졌다. 


호러물의 광팬은 아니지만 호러 장르의 게임은 즐겨 하는 윤기, 얼결에 따라왔으나 공포라는 장르는 일단 기피하고 보는 편이었던 호석, 마지막으로 태형과 함께 본 공포 영화가 인생 영화가 되어버린 탓에 자연스럽게 그들의 모임에 합류하게 된 남준까지. 호러물계의 생 머글인 그들을 공포물의 소름 끼치는 매력에 풍덩 빠뜨려 보이겠다는 일념으로 원년 멤버 셋이 2년 반 이상의 노력을 쏟아부은 결과, 삼총사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 또한 “ 나는 호러물을 사랑합니다 ”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








그들이 호러 영상 콘테스트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게 된 데에는 국제적으로 손꼽히는 게임 회사 ‘ V ’의 도련님인 태형의 공이 컸다. 신개념 실체 VR 게임의 개발로 다 죽어가던 가상현실 게임 시장을 살렸다고 알려진 ‘ V ’의 독특한 가상현실 게임 Ⓥ는 유명 판타지 영화들을 현실과 접목하는 형태의 실체 VR 게임들을 속속 발매하며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일반적인 VR 게임들이 가진 공간적 제약을 허물기 위해 수년간의 연구 끝에 개발해 낸 ‘뉴로 트랜스퍼 모듈’은, 간단히 말하면 탈부착이 가능한 뇌파 감지 센서를 기반으로 하는 전자 칩으로, 플레이어의 의식을 게임 속으로 보냄으로써 별도의 콘솔 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자사의 특허제품이다. Ⓥ를 통해서 플레이어들은 마법사가 되어 직접 용을 타고 어둠의 마법사들을 무찌르거나, 중세 시대 은퇴 귀족의 딸이 되어 공주가 될 수 있도록 인생 설계를 시작하거나, 혹은 소인국에 떨어져 때수건과 귀여운 격투를 벌이는 등, 생동감 이백 퍼센트의 게임 플레이를 즐길 수 있었다. 



2D로 즐기던 게임과 좋아하던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내 몸으로 스테이지 하나하나를 클리어할 수 있다는 것은 유저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짜릿함을 선사했기에 Ⓥ의 인기는 나날이 더해갔으나, 그런 Ⓥ 역시 신랄한 비평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유저들의 공통된 불만은 Ⓥ가 취급하지 않는 게임 장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는데, ‘ V ’의 회장은 세 번째 모델을 출시하는 공식 석상에서 이러한 불만들을 일축했다. 



“많은 유저분들이 원하셨던 전쟁 영화나 공포 영화의 실사판 게임은 앞으로도 출시 계획이 없습니다. 저희 실체 VR 게임의 특성상, 지나치게 참혹하거나 잔인한 게임들은 플레이어들에게 직접적인 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길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유저분들도 양해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 잔혹함만을 위한 여타 게임들과 다른 행보, Ⓥ ]라는 주제로 쏟아지는 기사들을 보며 가장 실망한 것은 지민이었다. 할로윈이나 워킹데드, IT, 나이트메어 같은 대작 공포물 안에 들어가 생존 게임을 펼칠 수 있다면 정말 열 호러 메이즈 부럽지 않을 텐데, 하며 울상을 지었다. Ⓥ에서 호러물을 만나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소식은 지민을 제외한 나머지 모임원들에게도 꽤나 김새는 기억으로 남아있었기에, 그들은 태형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로 호러 게임 플레이하는 영상 찍어서 보내볼래?”

“뭐래.”



정국이 코를 찡그리며 프스스 웃었다. 



“근데 Ⓥ에 호러 게임이 있어? 하긴, 태형이 네가 제일 잘 알겠지만서도.”



호석이 너스레를 떨며 말을 마치자 태형이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출시된 건 아닌데, 있긴 해.”

“와. 미친. 다 이뤘다.”



지민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두 눈동자는 벌써부터 기대감에 반짝이고 있었다.






























나흘 전 여주의 집에서 만나 실망스러운 결과물들을 확인했던 여덟 명의 호러 마니아들은 태형의 집에 다시 한번 집합했다. 너무 넓어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커다란 저택. 일행은 어느샌가 슬그머니 나타난 태형의 안내에 맞춰 나선형 계단을 오르고, 기다란 복도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마침내 다다른 특별한 형태의 방은 오로지 게임을 위해, 엄밀히 말하면, Ⓥ를 위해 꾸며진 방. 영화관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스크린과 완경사를 따라 배치된 수십 개의 객석. 스크린 바로 아래에는 Ⓥ의 본체가, 스크린에서 가장 먼 객석과 같은 줄에는 열 개의 플레이어석이 비치되어 있었다. 보통 사설 게임장 등에서 들여놓는 저가형 모델이 아닌 출시된 것들 중 최고 사양을 자랑하는 본체와 플레이어석을 본 윤기가 작게 감탄했다. Ⓥ가 취향이라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윤기였으나, 가까운 곳에서 보는 고급형 모델은 게이머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플레이 욕구를 자극했다. 고급스러운 검은색 벨벳 소재의 쿠션이 좌석 전체를 감싸고 있는, 흡사 안마의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안락해 보이는 플레이어석의 등받이를 살피던 남준이 호들갑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 나 이거 진짜 처음 봐. 신기하다. 게임 시작하면 이게 내려오는 건가?”

“응. 게임 설정 끝내고서 헬멧 쓰자마자 트랜스퍼 시작하거든. 트랜스퍼 중이나 후에는 앉은 사람한테 충격이 가해지면 안 되니까, 플레이어 보호 차원에서 자동으로 씌워지는 보호막 같은 거야.”



태형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무리에서 멀어져 홀로 본체 앞까지 내려간 윤기가 디스크 삽입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태형아, 디스크는?"

"아, 여기 있어요. 근데 잠시만요,"



일곱 쌍의 집중한 눈동자가 태형의 손에 들인 포스트잇 크기의 사각 디스크에 고정되었다. 크기만 봤을 땐 Ⓥ에 들어가는 디스크가 확실했다. 팔짱을 끼고서 태형의 입에서 나올 말을 잠자코 기다리던 지민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디스크를 낚아챘다. “호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디스크를 요리조리 돌려보던 지민은 가장자리 한 귀퉁이에 작게 새겨진 🅥 심볼을 확인하고는 낮은 탄성을 뱉었다.



“이거 찐이다, 찐. 대박이네. 진짜 구해올 줄은 몰랐다, 야.”

“아버지 방 금고에서 슬쩍한 거야. 들키면 끝장이니까 할 거면 이번 주 안에 무조건 해야 돼.”



지민에게서 디스크를 받아든 여주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제목이 없네? 슬래셔 영화 배경으로 만든 거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 원제목은 The Slashers인데 이게 시판용도 아니고···, 회사에서도 약간 쉬쉬하면서 만든 거라 따로 기입을 안 했다나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덤덤한 표정의 석진, 대화에는 큰 관심이 없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정국과 윤기, 묘한 흥분감에 사로잡힌 지민과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이는 여주와 남준. 일행 중 가장 극적인 표정 변화를 보이는 것은 단연 호석이었다. 양 입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초점 없이 떨고 있는 호석을 발견한 여주가 싱긋 웃었다.



"오빠, 슬래셔 영화들 예습 좀 하고 왔어?"

"벼락치기로 여러 개 보긴 했는데··· 거의 다 똑같은 내용이던데?”



“아- 그래? 어떤 내용?”

“십 대 애들이 어디 외진 곳에 있는 산장 같은 데 우르르 놀러 가서 웬 미치광이 살인마한테 끔살 당하는 거. 얘들아. 진지하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아무리 상금이 탐나도 그렇지···. Ⓥ로 이런 게임 했다간 진짜 쇼크 올지도 몰라."



“오빤 걱정 마. 무서우면 안 해도 돼. 난 사실 혼자도 괜찮으니까···. 아, 맞다. 지민이까지 둘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흘리는 여주는 이미 Ⓥ의 플레이어석에 편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또또 개소리한다. 혼자 하긴 뭘 혼자 해. 다 같이 하는 거 아니면 할 생각 마.”



여주의 바로 옆 객석에 걸터앉은 정국이 으르렁거리듯 말을 뱉었다.



“혼자 한다는 거 그냥 해본 말 아니거든? 너도 많이 해봤잖아, 국아. Ⓥ 게임들 하나같이 기존 영화들 설정 그대로 따온 거 알지. 호러 게임이라고 뭐 다르겠어? 멍청한 주인공들이 따라가는 클리셰만 잘 피해 가면 될 거라고. 그리고, 슬래셔 영화에서 불변의 법칙이 뭐야.”

“….”



“한 명의 여자만 간신히 살아남는다. 물론 다 같이 하는 편이 훨씬 더 재밌겠지만, 겁나는 사람까지 억지로 플레이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친구들 주렁주렁 달고 들어가서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AI들 방패 삼아서 혼자 클리어하는 게 어쩌면 더 깨기 쉬울지도 모르고.”



필요한 플레이어 수가 다 채워지지 않아도 인공지능 플레이어가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 또한 Ⓥ의 최대 강점 중 하나였다. 제 이론에 심취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여주의 손에서 디스크를 빼앗은 정국이 그녀가 닿지 못하도록 천장을 향해 손을 쭉 뻗으며 이죽거렸다.



"혼자하는 건 꿈도 꾸지 마. 자, 김태형 이거 받아."

“야 전정국, 좋은 말로 할 때 내놔라, 어?”

“내가 돌았냐? 순순히 내놓게.”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며 그르렁거리는 정국과 여주를 떨어뜨려 놓은 것은 줄곧 침묵을 지키며 가만히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석진이었다.



“여주야. ‘ V ’에서 이런 걸 만들었다는 건, 그래도 언젠가는 시판이 될 거라는 말이니까 완제품이 나온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거야.”

“후···. 나 참, 정말 답답하네 이 사람들.”



여주가 등받이에 파묻었던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애초에 태형이가 이걸 빼돌려 온 이유가 뭐야. 시판된 후에 하면 희소성이 바닥을 칠 텐데, 우리 목적은 희소성 있는 호러 영상 찍으려는 거 아냐?”

“그래서 이딴 거에 목숨을 걸겠다고?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말랬지. 형들도 좀 말려봐. 자꾸 오냐오냐하니까 얘가 이러는 거 아냐.”



“전정국 겁쟁이 다 됐네. 목숨을 걸긴 뭘 걸어? 아무리 리얼해도 게임은 게임이야. 백 번 천 번 죽어봤자 다시 살아날 텐데 쫄보처럼 굴지 말자, 응? 내가 이제까지 본 100편 이상의 공포 영화 중에 서른 편 이상이 슬래셔 영화인데, 한두 편만 봐도 패턴 분석 끝나는 게 호러라는 장르잖아. 엉터리 같은 클리셰만 잘 피하면 손쉽게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호러 마니아로서 피가 끓어오르지 않아? 난 무조건 할 거야.”

“우리 둘 다 이날만을 기다렸으니까 말리지 마라. 쫄리는 사람들은 밖에서 관전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씹, 저 고집들 진짜."



하이텐션의 끝을 달리는 지민까지 가세하자 잠시 동안 말을 잃은 정국이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높아지는 언성에 상황을 중재할 필요성을 느낀 남준이 쓰고 있던 안경을 치켜올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얘들아, 싸우지는 말고. 다들 일리가 있어. 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겁내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각자 선택에 맡기자. 피는 끓어오르지만… 난 왠지 짐이 될 것 같으니까 빠질게. 도망가는 거나 몸 쓰는 건 아무래도 젬병이니까."

“남준 오빠는 인정. 그럼 다른 사람들은?”



“나도···. 나도 그냥 밖에 있을게. 최단 시간 킬 당할 것 같아.”



플레이어석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호석이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지민과 여주의 시선이 각각 윤기와 석진에게 닿았을 때,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난 빠진다.” / “할게.”



한 명이 더 늘었다며 폴짝폴짝 뛰는 여주와 지민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석진이 그들을 따라 플레이어석에 자리를 잡았다. 불만이 가득한 어조로 구시렁거리던 정국 또한 플레이어석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정국과 여주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본체가 있는 곳으로 내려간 태형이 손바닥 크기의 리모컨 하나를 빙빙 돌리며 물었다. 



“그럼··· 지금 시작할 거야? 아님 나중에?”

“오늘 하려고 모인 거잖아. 당근 지금이지. 잠깐, 근데 넌 우리랑 안 해?”



“여기에 기기 조작할 수 있는 사람 나밖에 없는데 내가 없으면 안 되잖아.”

“아아-”



살풋 웃는 태형의 얼굴을 본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랑 정국이랑 지민이는 많이 해봤으니까 따로 설명 들을 필요 없겠고, 석진이 형. 형은 Ⓥ 해본 적 있어?”

“응. 이 모델은 아니었지만 몇 번.”



지민이 밝은 웃음을 터뜨리며 제 옆 옆자리에 앉은 석진을 향해 외쳤다.



“형-! 걱정 마-! 시작하면 조작법 다 알려줘. 이건 호러 게임이라서 약간 스텔스*같은 거에 치중돼 있을 수는 있겠다.”

* 스텔스 (Stealth): 몰래몰래 움직임; 잠행.



“그럼 디스크 넣는다?”

“응!” / “가즈아아악-!”



위이잉- 소리와 함께 스크린에 뜬 검은 화면과 붉은 폰트로 쓰인 제목 《 The Slashers 》. 태형이 작은 리모컨을 들고 설정을 맞춰 나가기 시작했다. 플레이어석에 앉지 않은 남준과 호석이 함께 객석으로 이동하는 동안, 윤기는 반대편 객석의 끄트머리에 앉아 어디선가 주워온 책자를 뒤적이며 혼자만의 세상에 푹 빠져 있었다.



“배경은 아직 딱 하나뿐이야.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그냥 넘어가고.”



“다음은, 살인마 설정. 살인마 무기 옵션이 현재로서는 세 개 거든. 전기톱, 도끼, 철퇴. 어떤 걸로 할래?”



태형이 주는 선택지들을 듣자마자 망연자실한 얼굴로 플레이어석을 돌아보던 호석이 남준에게 속삭였다. “야···. 이거 가능하냐···?” 남준 또한 얼빠진 눈을 하고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전ㄱ···”

“박지민 닥쳐라. 김태형. 도끼 선택해 줘.”



호기롭게 전기톱을 외치려던 지민의 외침을 단칼에 묵살한 정국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의 타협은 기대하지도 말라는 듯, 짙은 단호함이 묻어있었다. 



“그럼 도끼 선택. 다음은··· 청각에 특화된 살인마, 아님 시각에 특화된 살인마?”

“태형아, 잠깐. 한 감각에 특화된 살인마는 다른 감각을 완전히 잃었다고 보면 되는 거야?”



신중한 얼굴로 석진이 물었다. 태형이 반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지.”



“살인마가 눈이 안 보이는 쪽이 도망치기는 더 쉬울 테니까 청각에 특화된 걸로 하자. 불만들 없지.”

“시각에 특화된 게 더 나을 것 같긴 한데··· 여기서 불만 가졌다가는 전정국 손에 먼저 죽겠지?”



꽁한 목소리로 구시렁대는 여주를 있는 힘껏 노려본 정국이 태형을 향해 고갯짓하자 스크린 위를 떠돌던 커서가 [ 청각 ]을 선택했다. 태형이 다시 한번 버튼을 누르자,



 [ 참여하는 플레이어의 수를 입력하세요. ] 



라는 문구가 화면에 나타났다. 숫자 4가 입력되기 무섭게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질문. 



[ AI로 대체 가능한 플레이어 수는 최대 6명입니다. 전부 대체하시겠습니까? ] 



AI가 많은 게 아무래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의식의 흐름대로 고개를 끄덕이려는 정국을 막은 것은 지민이었다. 



“이거 이거 신중하게 결정해야 된다. AI라고 해서 전부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어.”

“지민이 말이 맞지. 슬래셔 영화 보면 열댓 명 정도 되는 인간들 중에 도움 되는 건 두세 명뿐이라고. 많으면 오히려 방해될지도 몰라.”



여주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자 석진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그럼 두 명 정도?”



끄덕.



정국이 손가락 두 개로 그려 보인 브이 자를 확인한 태형이 공란에 숫자 2를 입력하자 스크린에 새 알림 창이 떴다. 



[ 모든 플레이어들은 헬멧을 착용해 주세요. ] 



“오오- 시작한다, 시작!”

“하여간 박지민, 여전히 어린애라니까. 시작하기 전에 텐션 좀 죽여봐.”



플레이어석에 앉은 네 사람이 헬멧 착용을 마치자 위이잉, 하는 전자음과 함께 등받이 꼭대기에서 내려온 투명한 막이 의자 위를 둥글게 덮었다. 스크린에는 어느새 [ 전송 중 ] 세 글자가 떠 있었다. 



“그럼······,”



엷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태형의 얼굴에 의뭉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우린 AI 설정이나 같이 마무리해볼까?”
































스크린에 [ 전송 중 ]이라는 문구가 떠 있는 짧은 시간 동안 모든 플레이어들의 의식은 각각 파란 방으로 이동해 간단한 컨트롤을 숙지하는 시간을 가진다. 제 몸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니 복잡하게 익혀야 할 사항은 없으나, 메뉴창을 여는 법이나, HP를 확인하는 법, 단서나 노트를 열람하는 법 등의 간단한 인터페이스 조작법은 튜토리얼에서 필수적으로 숙지해야 할 항목들이다. 



2000피트 상공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여주는 생각했다. 몇 번을 플레이해도 파란 방에서 게임 속으로 이동할 때마다 온몸을 압도하는 오묘한 감각은 정말이지 적응하기 힘들다고. 돌처럼 굳어있던 몸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무렵, 여주는 습관처럼 양손을 접었다 폈다 하며 간단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후각이 돌아오자마자 형용할 수 없는 악취가 코를 찔러왔다. 비위가 조금만 더 약했더라면 이미 구역질을 하고도 남았으리라 장담할 수 있었다. 


슬래셔 영화를 바탕으로 만든 게임답게 그녀가 정신을 차린 곳은 기분 나쁠 정도로 눅눅하고 숨 막히는 공기가 만연한 좁디좁은 실내였다. 어둠에 적응된 시야로 주변 사물들을 점차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자 여주는 여전히 살짝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탐색에 나섰다. 거무스름한 통나무로 만들어진 벽은 군데군데 검붉은 액체로 흥건히 젖어 있었으며, 얇은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듯 엉성한 바닥은 걸을 때마다 끼릭, 끼릭, 소름 끼치는 소음을 유발했다. 벽면마다 띄엄띄엄 박혀있는 녹슨 못들. 그 위에 걸린 제각기 다른 길이의 끈들이 절단된 손가락과 발가락을 연상시키는 핏덩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충분히 인지 가능한 사실이었다. 



‘디테일 하나하나 아주 기가 막히네. 지민이가 보면 환장하겠는걸.’



일반적인 슬래셔 영화들을 기준으로 봤을 때, 살인마는 영화가 시작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등장한다. 하지만,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감이라도 잡아야 안심을 하던지 경계를 하던지 할 텐데···. 일단 정리해보자.’



파란 방에서 미리 설정해둔 노트 소환 모션을 취하자 그녀의 손에 노트와 펜이 쥐어졌다. 



‘먼저 기억나는 것부터···.’




여기까지 적고서 또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여주는 갑작스레 제 등을 떠미는 손길에 놀라 튀어나오려던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어? 안 놀라네?”

“너···. 박지민 너···.”



“역시 한여주. 든든하다.”

“너 그렇게 클리셰적으로 촐싹대다가 가장 먼저 죽는다 그랬지. 이거나 빨리 카피해 가, 바보야. 그리고 여기 쓰여 있는 짓거리는 절대 하지 마라? 웬만하면 한 번도 안 죽고 클리어하는 게 낫잖아.”



개구진 웃음을 터뜨린 지민이 여주의 메모장에 적힌 글귀를 터치 한 번으로 카피해 제 노트에 붙여넣었다. 



“예예- 명 받들겠습니다-”

“국이랑 석진 오빠는?”



“아래층에. 난 먼저 2층 둘러본다고 올라왔지. 나 잘했어?”

“시작하자마자 개인행동? 아주 자알- 했다. 끔살 당하기에 누구보다 알맞은 조건을 가지고 있네.”



“거 말이 너무 심하네. 그래도 내가 개인행동 했기 때문에 너랑 만날 수 있었던 건데.”

“무튼, 최대한 붙어있는 게 이득이니까 앞으로는 혼자 다니지 말자고. 어서 내려가자.”



서둘러 지민의 손을 낚아챈 여주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갈팡질팡하자 지민이 픽 웃으며 그녀를 당겼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오래된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계단에서는 끼익- 끼이익- 거리는 을씨년스러운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 나름대로 조심조심 걸음을 내딛는 중임에도 소음은 적막을 뚫고 나와 고요했던 실내를 가득 채웠다. 청각에 특화된 살인마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두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으나 서로에게 그에 대한 걱정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두려움이라는 고약한 감정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눈덩이처럼 몸집을 부풀리기 마련이니까. 



아래층도 2층의 구조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굳이 꼽자면 뿌옇게 더러워진 창문이 하나 있다는 것, 그리고 안쪽에 부엌처럼 보이는 공간이 하나 딸려있다는 것 정도였다. 


1층으로 내려오자 불쾌한 악취는 한층 더 강해졌으나 이미 둔해진 후각 덕에 크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형용하기 힘든 혹취는 부엌 싱크대 선반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정체불명의 것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개수대에 쌓인 오물더미에서 스며 나온 누런 액체가 선반 아래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들끓는 파리 떼와 오물 더미 위에서 꿈틀거리는 허여멀건한 구더기 뭉치는 아주 또렷이 보였기에, 여주는 계단 아래에 서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소리 없는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창문 바로 옆 벽에는 투박하게 잘린 이상한 빛깔의 동물 가죽들이 엉성하게 박음질되어 걸려있었다. 묵직한 가죽을 들추며 그 아래 벽을 살피던 석진이 인기척을 느끼고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저분한 탁자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고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정국도 석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여주야.”

“한여주, 괜찮아? 다친 덴 없는 것 같고.”



“괜찮으니까 목소리 좀 낮춰. 청각에 특화되어 있다고 했잖아. 아무래도 잘못 고른 것 같아.”

“그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까다로울지도 모르겠어.”



석진이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앞으로 내밀었다. 



“무전기야. 튜토리얼에 무전기 소환법이랑 사용법이 있길래 정신 들자마자 이것부터 찾아다녔어. 근데 봐.”



무전기의 옆면에 있는 PTT(Push To Talk) 버튼을 누르자마자 삐-용 하고 터지는 경쾌한 멜로디. 석진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너무 요란해. 이걸 사용하는 건 무리야.”

“괜찮을 거야. 무전기 사용하는 대신 넷이서 계속 같이 다니면 되잖아. 그리고 여기. 절대 하면 안 되는 행동들 정리한 거야. 두 사람도 이거 카피해서 잘 숙지하고 있어.”



“그런데 말이야,”



잔뜩 가라앉은 지민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 게임··· 클리어 조건이 뭐였지?”

“···.”

“···.”

“···.”



오랜 침묵 끝에 여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살아서 나가는 거?”

“그러니까, 그 살아서 나간다의 기준이 뭐냐고. 살인마를 죽여야 하는 거야, 아님 특정 장소에서 빠져나가면 자동으로 클리어 되는 거야?”



“내 생각엔 네가 잘하는 그거 같은데.”



정국이 지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방 탈출.”

“···.”



“석진이 형이랑 나랑 똑같은 차가 그려진 그림을 벌써 두 장이나 발견했어.”



정국의 손에 들린 두 장의 카드 속에는 각기 다른 색의 봉고차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여주가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 차를 타고 탈출해야 한다고?”

“일단은 가장 그럴싸하잖아? 살인마를 피해서 차 키를 찾고, 연료를 구하는 거지.”



“하지만 이런 곳에 차가 있을 리가···.”



당연한 수순처럼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시선을 보내던 여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들이 있는 통나무집의 앞마당에는 수십, 어쩌면 수백 종의 차들이 소규모 폐차장을 연상시키며 바닥부터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높이까지 얼기설기 쌓여있었다.






























게임룸의 구석자리에 위치한 객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윤기는 Ⓥ의 본체 아래에서 꺼내온 책자들을 뒤적거리며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한동안 다른 이들의 대화에서 자신을 단절시키던 그가 무언가 어긋났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을 때, 네 개의 플레이어석은 이미 보호막으로 완전히 덮여있었다. 



“그럼··· 우린 AI 설정이나 같이 마무리해 볼까?”

“태형아, 잠깐. 잠깐만 멈춰봐.”



“무슨 일 있어요, 형?”

“이게 뭐냐?”



이윽고 태형의 시선이 내려앉은 종이에는 마치 실험의 결과를 정리해 놓은 듯한 도표가 여러 개 삽입되어 있었다. 암호처럼 알쏭달쏭한 축약자가 난무한 문서에서 윤기의 시선을 끈 것은 단 하나였다. 날짜로 추정되는 숫자들 옆에 나란히 기재된 숫자들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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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게임을 하는 건 네 사람. 그리고 AI로 대체 가능한 플레이어의 수는 분명 여섯이라고 했었지. 고로 이 게임에 참여 가능한 인원은 최대 열 명이다. 나열된 숫자들은 이미 윤기에게 생존율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건 게임이잖아. 죽어도 다시 스폰 될 수 있는 거 아닌가? 마음속에 퍼진 불안감을 떨쳐내려 머리로는 합리화를 해봤지만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라는 생각이 치고 올라와 걱정은 다시 제자리걸음이었다. 윤기가 답지 않은 악착스러움을 보이며 스크린 앞까지 내려가 태형에게 손에 든 용지를 내민 이유 역시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 뭔데요, 이게?”

“네가 전에 그랬지. 이 게임, 시판되지 않았을 뿐이지 다른 Ⓥ게임이랑 비교했을 때 완성도면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라고.”



“음, 그렇죠.”

“똑바로 얘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시판되는 다른 게임들이랑 이거, 정말 아무 차이 없어?”



“아아-”

"···.”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부러 감추지 않은 태형이 제 앞에 선 윤기를 차분히 응시했다. 민윤기. 3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쉽게 곁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유독 어려워했기에 제가 유일하게 말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평정을 잃은 듯한 윤기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질 것 같아 태형은 빨간 녹화 불이 들어온 Ⓥ의 본체로 시선을 돌리며 화제를 전환했다. 



“어, 시작했다. 녹화는 잘 되고 있네요.”

“야.”



"···.”

"너 대답 안,”



“체크포인트가 없어요.”

"···.”



"플레이 중에 저장하고서 끝내는 기능이 없었네, 그러고 보니까. 지금 생각났다.”

“뭐-?!”



태형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객석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호석의 얼굴은 충격과 공포로 물들어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준의 눈동자에도 당혹감이 비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장이 안 된다는 말은, 애들이 죽을 때마다 다시 맨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거야?”



윤기가 싸늘한 낯빛을 하고 물었다. 그의 음성에는 더 이상 조금의 친근감도 묻어있지 않았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에 쥔 리모컨을 빙빙 돌리던 태형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답했다.



“그러려나? 사실 저도 잘 모르겠긴 해요. 이 게임 안에서 죽으면 어떻게 될지. AI가 아닌 진짜 사람들로 플레이하는 건 처음이라.”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윤기의 커다란 손이 태형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경사가 있는 객석을 순식간에 뛰어 내려온 호석이 윤기를 팔을 붙잡았다.



“윤기 형-!”

“이거 놔, 지금 이 새끼가,”



“그게 아니라, 봐요!”



호석이 다급하게 스크린을 가리켰다. 화면 너머에 둥글게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네 사람은 언젠가부터 경직된 표정으로 오두막의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쿵. 쿵. 쿵.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세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쿵. 쿵. 쿵. 나무 문을 부술 듯 강하게 두드리는 규칙적인 타격음에 화면 너머를 가득 채운 긴장감이 스크린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그 긴장감을 깨뜨린 것은 진심으로 애달다는 듯 뱉어낸 태형의 한숨 소리였다. 



“어쩔 거예요, 형. 시간 초과돼서 이제 AI 설정 못 정하잖아. 설정값 전부 랜덤인 애들이 들어갔다고요.”

“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플레이어는 중도 추가되는데 누구 한 명 들어가서 알려줄 사람? 이거 진짜 죽을 각오로 해야 하는 게임이라고.”

“너. 네가 들어가.”



“에이, 그건 진짜 위험한 발상인데. 이 방 자체가 내가 있어서 작동되는 방이에요. 15분에 한 번씩 음성인식, 홍채인식 해야 되는데 저기 가서 앉았다간 아예 이 방 시스템 전체가 다운되는 수가 있어요.”

"···.”



“목숨 걸고 해야 한다니까 하기 싫죠. 그러니까 형들한테 마지막으로 도망칠 기회 정도는 줄게요. 지금 당장 이 방에서 나가거나, 저 의자에 앉거나. 둘 중 하나 선택해요. 세 사람 중 한 명만 랜덤으로 셀렉 되도록 설정해 둘 테니까.”

“개자식.”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성큼성큼 완경사를 오른 윤기가 플레이어석에 털썩 앉았다. 쭈뼛거리던 남준 역시 불안한 얼굴로 플레이어석에 몸을 맡겼다. 윤기와 태형의 사이에 서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호석의 시선이 다시 한번 스크린으로 향했다. 화면 너머에서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호석의 동공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호석이 형.”

“어, 어?”



“정말 애들을 생각한다면 빨리 결정해야 될걸. 나가던지 자리에 가서 앉던지.”

“내가 갈 테니까 다른 애들은 그냥 둬. 겁 많은 애 억지로 등 떠밀지 말고.”



“착각하나 본데, 그건 제가 결정하는 거예요, 형.”

“야, 너 이 XXX XXX.”

“윤기 형, 됐어요. 난···, 난 진짜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하는 호석의 목소리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기에 그가 한 말이 진심이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의 심장이 이 정도로 빠르게 뛸 수 있구나를 실감하며 무거운 걸음을 옮기던 호석이 눈물을 머금고 중앙의 플레이어석 앞에 섰다. 



“자자- 그럼 이제 헬멧을 쓰세요, 여러분. 다시 한번 말하지만 3분의 1 확률로 선택되는 거니까 누가 걸리던 너무 서운해하지는 말고.”



욕지기를 뱉는 윤기와 결연한 표정의 남준, 덜덜 떨던 호석까지 헬멧을 장착하자 화면에는 좀 전과 같이 [ 전송 중 ] 세 글자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뜬 윤기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얄궂은 미소를 보이는 태형의 얼굴이었다. 다급히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남준 또한 헬멧을 벗고서 낙담한 표정으로 호석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젠장.”



헬멧을 쓴 호석의 좌석 위로 빈틈없이 덮어 씌워진 보호막. 거창한 설명 따위는 필요 없었다. 녀석은, 김태형은 처음부터 이렇게 되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강하게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저를 응시하는 윤기의 날카로운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치던 태형은 이내 진심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안타까움을 흘렸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



“호석이 형한테 말해주는 거 깜박했네. 추가된 플레이어라 시작점이 딴 애들이랑은 다를 텐데.”



윤기와 남준이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스크린을 올려보았다. 화면은 어느새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정호석.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중 오른쪽 화면에는 자신을 다독이며 숲속 한가운데에 망연자실 서 있는 호석의 모습이 보였다.


















납량특집으로 올렸던 단편글 할로윈 시즌에 재탕하기😆😆 할로윈 데이엔 업로드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미리 올립니당


2020. 06. 22 블로그 업로드

2020. 10. 17 재업

별 헤는 밤 복사나무 꽃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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