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터 앨리슨은 그 사건 이후 입도 뻥끗 하지 않았다. 헥서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신부 수업을 받기 시작 했을 때, 저택 바깥은 더 구경 조차 할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때 빌터는 잠시 슬퍼했지만 곧 털어내버렸다. (어쩌면 그것은 온전히 털어낸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크 헬링턴과의 일탈에서 느꼈던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황홀했으니까)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늘 얼굴 웃는 낯으로 저택 안 사람들과 대화했다.

 하지만 지금은 얼굴에서 미소라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가 툭 하고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그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것 같았다. 헥서 앨리슨은 빌터가 자신이 한 말과 행동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마크를 잃게 되어 괴로워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같아서는 금방이라도 달려가 제 품에 안고서 모든 것을 용서하고 달래고 싶었다. 마치 뜨거운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가슴은 타들어 가고 괴로웠다. 헥서는 늦은 밤 죄책감과 모성애로 괴로워 할 때마다 자신의 가슴을 멍이 들 때까지 내려치며 이성을 유지하려 했다. 그나마 이 괴로운 마음을 덜어내고자 빌터와 마주하는 시간을 없애버렸다. 심지어 저택의 사용인들도 부리지 않았다. 혹시나 이 정 많고 말 많은 사용인들이 빌터에 관한 이야기를 자신에게 전할까 봐, 그래서 그 아이의 얼굴이 보고 싶어질까 봐 헥서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하기 시작했다. 빌터 앨리슨과  헥서 앨리슨의 침묵은 저택의 공기를 무겁게 물들여 버리고, 화공제가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그 긴장감을 더해가고 있었다. 


 앨리슨 저택의 시간은 그렇게 화공제를 향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한 하늘에는 깨끗한 아침의 바람과 유리조각 같은 아침햇살이 드리워졌다.


모두가 준비했던  “화공제”의 아침이다. 


 빌터 앨리슨은 천천히 눈을 뜬다. 한 달 동안 준비해왔던 “화공제” 자신의 운명이 뒤바뀌는 날의 아침이 밝아버렸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한 치 앞도 예상 할 수 없어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고 자신의 방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본다. 신의 신부가 되면 거의 신전에 머물게 된다고 하는데, 어쩌면 바깥에서 보는 마지막 햇살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물이 울컥 솟으려 한다. 울음을 겨우 참고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연다. 문이 열리자 자신을 바라보고는 묵례하는 사용인들. 잠깐 마주친 시선들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안타까움과 슬픔이 서려 있었다. 고맙기도 하지. 


 빌터 앨리슨은 사용인들의 안내로 목욕을 하러 갔다. 욕실에 냉기가 돌고 있었다. 밤사이 사용인들이 떠온 차가운 계곡물이 욕조에 찰랑거리고 있었다. 빌터는 옷을 벗고 발끝부터  욕조에 집어넣는다. 차가운 물 온도에 잠시 몸을 떨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의 신부가 될 몸을 깨끗이 하는 가장 첫 번째 일이기에 군소리 하지 않고 몸을 완전히 욕조에 담근다. 쏴- 하고 욕조의 물이 넘치고, 온몸 구석구석에 차가운 계곡물이 닿는다. 그 온도에 익숙해지기 위해 가만히 앉아있다가 천천히 자신의 몸의 물을 끼얹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몸을 구석구석 씻어낸다. 그 흔한 향유하나 쓰지 않고 몸을 씻은 뒤 욕조에서 일어난다. 차가운 계곡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은 천근만근 무거운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힘없는 걸음을 수건선반 앞으로 옮긴다. 


 늘 하얗고 푹신한 수건만 올려져 있던 선반에는 수건 뿐만 아니라 하얀 옷이 가지런하게 개어져 있었다. “화공제”의식 때 입을 신부의 옷이다. 착잡한 마음으로 그 옷을 손으로 한 번 쓸어 만진다. 새하얗고 부드러운 옷감 위로 빌터의 손 그림자가 드리운다. 내가 마크의 신부가 되었다면 그땐 기쁜 마음으로 이 옷을 만질 수 있었을까. 따뜻한 물에 향유를 바르며 저를 사랑스레 바라봐줄 마크 헬링턴을 생각하고, 미소 지었을 텐데. 왜 나는 평범하게 살 수 없는 걸까. 옷감을 손으로 세게 꽉 쥐었다 놓는다. 옷감에 생긴 주름을 손을 으로 꾹꾹 눌러 퍼다 수건을 집어 들었다. 얼굴부터 가장 먼저 닦아낸다.


 새하얀 셔츠와 바지를 입는다. 셔츠와 바지의 밑단에는 마을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전통 문양으로 된 금실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가정교사의 말로는 아주 고대에, 글이 없던 시절 글자를 대신 했던 문양이라고 한다. 그 내용은 옛날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시라고 한다. 

 옷을 입고 욕실의 문을 열면 사용인 한 명이 정갈하게 개어진 빨간 망토를 들고 있다. 빨간 망토를 받아들고 펼쳐본다. 빌터는 작은 덩치가 아니었다. 180cm가 조금 넘는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그의 몸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망토는 커다랬다. 빌터는 마지막 인사라도 하는 듯 사용인에게 상냥하게 미소 지어 보이며 망토를 두르고, 망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사용인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뒷걸음질을 하며 사라졌다. 이제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마치 이 저택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증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저택 안은 조용했다. 이제부터 혼자 진행을 해야 한다. 


 신의 신부는 이제 곧 신에게 바쳐질 몸이기에 자신이 사는 세상의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면 안된다. 화공제에 다가서 신에게 바쳐지기 전 까지 모든 행동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한다. 빌터는 혼자서 텅 빈 복도를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복도에 울리는 구둣발 소리를 따돌리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발을 디딜 때 마다 자신의 발에서 나오는 소리인데, 애써 따돌려봤자 그 구둣발 소리는 저를 쫓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저 그 소리를 이젠 받아들이는 수 밖에. 한 참 복도를 거닐어 이제 로비로 내려간다. 양옆으로 사용인들이 길게 줄을 서 있고,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빌터를 일제히 바라본다. 다들 무표정을 유지한 채, 빌터가 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중 몇몇은 빌터와 그나마 친분이 있었던 사람으로 곧 울 것 같은 눈물을 애써 참고 있었다. 빌터가 문을 나서 마차에 올라타자 모두 집 밖으로 나와 고개를 숙여 그를 배웅했다.

  

 빌터는 짧은 신음을 내며 마차의 문을 열고 올라탄다. 마차 안은 어두운 벨벳으로 장식되어있었다.  마차의 창가엔 헥서가 베일을 둘러쓰고 먼저 앉아있었다. 빌터는 헥서의 대각선 쪽에 앉았다.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하고, 덜컹 거리는 마차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저 창을 통해 말발굽 소리만 들렸다. 빌터는 베일로 가려져 알 수 없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헥서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까? 한참을 망설이던 빌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

“.......”

“제가 떠날 때까지 한 마디도 안 하실 겁니까?”

“.......”


 베일에서는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커다란 쇠문이라도 저 베일보다는 굳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헥서가 끝까지 대답하지 않자 빌터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떨어진다. 망토를 꽉 쥐며 마차의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제 마주 보게 된 헥서를 똑바로 바라본다. 베일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는지 헥서는 빌터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창 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곧 신의 신부가 될 사람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

“그래도…….저와 보내신 시간이 아쉽지 않으십니까.”

“아쉽지 않다.”

“.......”

“이미 이리 될 것을 다 아는데 뭐가 아쉬워 우느냔 말이다.”

“어머니…….”

“추한 꼴 보여 나를 망신시키지 마라. 눈물 닦아.”

“.......예.”


 빌터는 눈물을 닦아낸다. 자신을 남처럼 차갑게 내치는 헥서에 대해 원망스러웠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있으니 헥서의 태도를 이해하기로 했다.


 마차는 어느새 광장 입구로 들어선다. 흥겨운 음악들이 들려오고 묘한 향기가 은은하게 느껴진다. 창을 살짝 들여다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있었다. 그중에는 왕족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화공제’는 타국에 소문이 날 정도로 아주 유명한 축제다. 축제의 그 규모도 꽤 화려하지만, 축제 기간에 마을 특산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 한 해 풍요롭게 보낼 수 있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왕족도 심심찮게 화공제를 방문하는 것이다. 

 이번 화공제는 이전의 화공제보다 훨씬 더 크고 아름답게 진행되었다. 집집 마다 둘러 처져 있는 울타리는 아름다운 꽃들과 보석으로 잔뜩 꾸며져 있다.  마을 길목길목에 있는 나무들은 하나같이 그 줄기에 화려한  비단들을 감고 있다. 길거리에서 공연을 펼치는 이들도 많았다.  옆 마을이나 마을에서 크고 작은 축제를 몇번이나 봐왔지만, 이렇게 화려한 축제는 처음이었다. 빌터는 저도 모르게 마을의 광경에 마음을 빼앗겨 넋을 놓고 감상한다. 창밖을 바라보는 빌터를 가만히 바라보던 헥서가 나지막이 입을 연다.


“아름답냐.”

“.....아, 네…….”

“아름다워 보여야 할 것이다. 신의 노여움을 가라앉히려면 저 정도는 해야지.”

“.......”

“저들 중에는 네가 저지른 과오로 올해는 남의 집 살이를 면치 못할 이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헥서의 말에 빌터는 차마 더 광장을 바라볼 수 없었다. 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웃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절규하는 이들이 있겠지…….빌터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마차는 광장의 한 쪽에 마련된 신부의 자리에서 멈췄다. 마차가 멈추자 그렇게나 요란했던 광장이 조용해졌다. 빌터는 마차의 문을 열고 신부의 자리를 바라본다. 신부의 자리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 작은 막사 같은 곳이었는데 빌터가 두른 망토처럼 새빨간 벨벳으로 만들어져있었고, 막사의 문에는 셔츠 밑단처럼 금으로 자수가 놓여있었다. 빌터는 천천히 마차에서 내리고 주변을 둘러본다. 모든 시선이 저를 향해있다. 

 그 시선들에 목이 갑갑해지는 것 같다. 한 걸음씩 내 디뎌 막사를 향해 간다. 천으로 된 문을 들어 올려 안으로 들어가면, 헥서도 그 뒤를 따라서 들어온다. 

근양 이것저것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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