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의 이름은 이사토 나가코. 한국에서는 어머니의 성을 따 김유라, 라고 불립니다. 오랜만에 한국에 가게 되었어요. 펜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금 주부 국제공항 근처의 숙소에 있어요. 비행기가 도착하고 떠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와요. 그 일이 있고 나서 처음으로 가는 한국입니다. 당신이 멍하니 바라보던 꺼진 티브이나, 하루에 열 번도 넘게 물을 준 식물들이 떠올라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같은 글씨도 머릿속에 희미하게 자리잡습니다. 김, 유, 라, 하고 당신이 이름을 쓸 때, 바들바들 어린 잎처럼 떨리던 손. 어둑어둑한 기미가 무리지어 있었고, 주름이 자글하게… 잡혀 있던 손. 이게 네 이름이다, 하던 말도 떠오릅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돌아가셨다. 돌아가셨다, 하는 말은 어디로 돌아갔다는 건지 곰곰이 떠올립니다. 집에 있으면서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중얼거리던 당신, 내가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줄 알고 이런저런 비밀을 털어놓은 당신. 그리워하시던 집에는 잘 도착하셨는지요. 그날에는 죄송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그때 말입니다. 팔 년 전인 듯해요. 아주 추운 겨울, 새벽. 죄송했습니다. 창문을 꼭 닫았는데도 귀신 같은 새벽 바람이 스멀스멀 기어옵니다. 창가에 손을 턱, 턱 올리는 새벽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아요. 혹여나 당신일까 싶어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창문을 세게 흔드는 걸 보니 당신은 아닌 듯합니다. 침착하고 차분했던 인상이 남아 있어요.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한국에서 일본까지 부리나케 달려왔다 해도, 문을 두 번 조심스럽게 두드리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육체가 없더라도, 투명한 손으로 창문을 톡, 톡. 창문 너머로 경계심 없이 넘어올 당신의 손을 떠올립니다. 까마귀가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길고 나지막한 저 울음은 나를 향하고 있는 걸까요. 그때를 잊으면 안 된다는 신의 외침일까요. 내 생에 가장 인간답지 못했던 날이라 생각합니다. 나도 길고 나지막하게 울고 싶어져요. 울며 코를 세게 풀어대는 대신, 편지지에 문장을 풉니다. 이를 통해 나의 죄책감도 어느정도 자유로워지기를 바라고 있어요. 나의 죄책감의 자유도는 당신의 결정에 달렸습니다. 이사토 나가코, 사과를 올립니다. 

 

 팔 년 전, 부산에 처음 갔을 때. 혼자 가는 여행은 처음이라 떨리고 무서웠어요. 원래는 어머니가 함께 갈 예정이었습니다만, 일본을 떠나기 한 일주일 전 쯤이었습니다. 바아상도 볼 겸, 진짱네 집에 혼자라도 다녀와야겠다, 나가코. 뭉글한 고기 반찬을 한 점 먹고, 낫또를 막 휘젓기 시작했을 때였어요. 급한 일이 생겼다나, 뭐라나. 한 달 정도 쉬기로 하였는데, 어머니의 자리를 채워 주기로 한 사람이 도망을 갔다나, 뭐라나.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될대로 되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아상은 당신을 칭하는 말이고, 진짱은 어머니의 동생, 그러니까 이모입니다. 한창 어른 놀이에 빠져 있을 때라, 덤덤하게 알겠다고 했습니다. 끈적하게 실이 늘어지는 낫또는 입에서 뭉근하게 굴러다녔어요. 밥과 함께 씹을 때마다 실이 끈적하게 늘어지고. 그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불안감과 설렘을 모른 척하고 말았죠. 최대한 빠르게 낫또를 씹었습니다. 불안감과 설렘 위에 고기를 얹고, 밥알을 쌓고, 탑을 쌓는 것처럼 차곡차곡, 어린 나를 숨겼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역시 어른스럽다며, 박수를 쳤어요. 나의 성숙은 그렇게 거짓으로 자라났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바아상, 당신의 이미지를 상상했어요. 하얀 머리이려나. 한국의 바아상들은 모두, 똑같이 브로콜리 같은 머리를 하고 있다던데, 그렇다면 나의 바아상도 곱슬거리고 동그란 파마 머리를 하고 있으려나. 말투는 어떻고 목소리는 어떻고, 어머니를 많이 닮았으려나. 기대감이 커다란 거품처럼 불어났습니다. 불어난 만큼, 거품이 훅 꺼지는 게 일 초 정도 무섭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진짱은 본 적 있으니까…. 진짱은 나를 아주 좋아해 주었기에 덤덤하게 굴었습니다. 내가 어머니의 앞에서 연기한 성숙의 끝은 설거지였어요. 어머니는 맥주를 마시며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큰일이네, 바아상, 그렇게 좋지 않다고 그러던데…. 귀를 쫑긋하게 세우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거품을 잔뜩 묻혀 그릇을 닦고, 헹구고, 입 안에 남아 있는 음식물을 모조리 삼켰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당신의 말을 많이 들었어요. 엄하고 무섭지만 귀여운 면이 있는 분이다. 이이 히토요, 나가코니모 킷또, 이이 히토요…. 어머니가 주부 공항으로 데려다 주는 자동차 안에서 해 주신 말이에요. 어린 나이에 자식들을 낳았다는 말, 아이를 업고 일을 했다는 말, 그러나 남자를 잘못 만나 고생을 많이 했다는 말, 지이상… 할아버지가 노름에 빠져 빚을 만들고 도망갔다는 말. 그런데 젊은 여자와 함께 도망갔다는 소문이 거미줄처럼 바아상의 주변에 쳐졌다고요. 하룻밤에 남편이 도망가고, 빚이 생기고, 소문이 생겨도 바아상은 묵묵히 빨랫감을 손으로 벅벅 문지르셨다고요. 그 얘기가 끝난 뒤,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우리 집안 여자들은 대대로 복이 없다는 말을 하셨어요. 실은 그때 어머니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나무들을 하나하나 잡아먹을 것처럼, 올가미 같은 시선을 내던졌어요. 그렇다고 해서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대신 뒤늦게 어머니의 말에 대한 답이 총총거리며 다가왔어요. 복 같은 건 아무것도 필요없고, 모든 게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라는 답입니다. 순간 나는 그 답을 후려치고 싶었어요. 이혼한 어머니와 바아상, 둘을 왠지 모르게 비난하는 듯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괴로울 때, 공항에 도착했어요. 어머니는 조심히 잘 다녀오라며 안아 주셨죠. 나는 다시 성숙을 연기합니다. 방학 동안이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도 아니고 친척이 있는 곳이니 괜찮다며 얼른 들어가라 손을 흔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눈시울을 잠시 붉힌 뒤에 차를 타고 떠났어요. 덜덜 흔들리는 자동차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공항으로 들어갑니다.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를 사 먹었어요. 고양이 캐릭터가 그려진 캐리어는, 공항의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을 받아 반짝였습니다. 비행기 몇 대가 도착하고 떠나고, 도착하고 떠나고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파도에 떠밀리는 돌멩이처럼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탄 것입니다. 잘그락, 잘그락. 어머니가 바아상에게 전해 달라 부탁한 편지 봉투 속에서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어요. 무엇이 들었는지 열어 보고 싶었으나, 단정하게 봉합되어 있어 손으로 만지작거릴 뿐이었습니다. 

 

 처음 가 본 부산은 늦은 밤에도 굉장히 반짝거렸어요. 공항에 내리자마자 든 생각은 조용하다, 입니다. 어머니에게서 부산 사람들은 다들 목소리가 크다는 말을 들었는데 말이에요. 의외였달까요. 산이 많은 탓인지 거대한 장군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울그락불그락하지만, 실은 속은 따뜻한 느낌. 그게 부산의 첫 이미지였어요. 당신에 대한 첫인상이기도 했습니다. 공항까지 진짱이 데리러 와 주었어요. 금색의 마티즈였던 것 같습니다. 나가코, 많이 컸네. 진짱은 처음 마주한 물건을 보듯이 나를 이리저리 둘러보았어요.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어깨를 톡톡 두드리기도 했습니다. 크면 클수록 형부 얼굴이 보인다면서, 어머니와 닮지 않아 다행이라는 농담도 하였습니다. 나는 답하는 대신 어리숙하게 웃어 보였어요. 나의 성숙은 떄때로 순진무구해지기도 합니다. 공항에서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갔어요. 히터를 틀어 둔 차 안은 건조하지만 따뜻했습니다. 바람을 타고 졸음이 스노우보드를 타듯이 내려왔습니다. 눈을 꿈뻑이며 진짱의 말을 들었어요. 바아상, 당신에 대한 이야기. 나가코, 치매라고 아니, 치매? 기억이 사라지는 거. 일본어로는 그걸 뭐라고 하니? 암튼,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셔서 지금 조금 힘드셔. 너무 놀라지 말고…. 진짱의 말에 나는 하이, 대신 최대한 한국인다운 발음을 내기 위해 조금은 힘을 주어 네, 하고 답했습니다. 괜찮아요. 부산의 겨울은 건조하고 조용했습니다. 반짝거리고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창백한 것에 더 가깝다고 느꼈어요. 나가코가 온다는 말을 듣고 한참을 되물었을 당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나가코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서웠을지요. 바아상의 자식에게 또 자식이 있다니…. 나는 이곳, 부산에서 나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정확하게 이방인이다. 어머니가 없는 바아상이 지내는 곳, 거기서 나는 완벽하게 이방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비참함, 바아상이 있는 진짱의 집에 가까워질수록 복잡미묘한 감정은 갓난아이처럼 자라났어요.

 

 모라역의 근처에 있는 현대 아파트 103동 1203호. 당신은 베이지색 소파에 앉아 에어캡을 터트리고 있었어요. 재방영하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짱은 차를 주차하느라, 나가코 혼자 바아상이 있는 집에 들어간 것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어락을 누를 때까지 첫인사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어요. 아무 말 않고 고개를 숙일까요, 곰방와, 하고 인사를 할까요, 예의바른 한국식 인사가 어떤 것인지 고민을 하다 문을 열었어요.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던 머플러를 살짝 내려 얼굴에 보이게 한 다음, 고개를 숙인 뒤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당신의 얼굴에서 두려움을 보았어요. 나는 신발을 벗은 뒤 현관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신발들을 정리하며 고개를 살짝 돌려 바아상의 행동을 살폈어요. 티브이에서는 긴장감 넘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한껏 달아오른 표정의 주인공들이 저의 시선을 잡았습니다. 나는 일부러 당신을 바라보지 않았어요. 티브이를 바라보며, 저는 나가코입니다, 유진의 딸이에요. 유진이라는 단어 하나에 당신의 표정이 사르르, 녹았어요. 핫초코에 넣은 마시멜로처럼, 말랑하고 부드럽게…. 처음으로 가져 보는 할머니였습니다. 당신을 만나 참 반가웠어요. 이제야 말하지만, 그때 환하게 웃으며 한 번 안아 보자고 말해 줘서 고마웠습니다. 처음 본 손녀에게 멈추지 않고 사랑한다 말해 줘서 감사합니다. 바아상의 따뜻한 마음. 이이 히토요. 체한 아이의 등을 쓸어내리는 듯한 손길이 다정했어요. 그때 나는 무엇에 체했던 걸까요, 가족의 부재? 어쩌면 주걱으로 퍼다 먹은 성숙이 목에 걸렸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나는 아주 약간, 앙탈을 부렸던 것 같기도 합니다. 어른스럽다라는 말은 부산에 온 뒤로 잠시 잊기로 했어요. 

 나는 조그마한 테이블에서 자리를 옮겨 이제는 침대에 엎드린 채 편지를 쓰고 있어요. 바아상의 품이 그리워 새하얀 이불을 돌돌 말아 안아 보았습니다. 어째서 당신과 함께했을 때보다, 당신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 나의 사랑은 커지는 것일까요. 나는 늘 가질 수 없는 것을 욕심내는 듯해요. 이런 고민을 당신에게 말한다면, 무어라 답했을까요? 창문을 탕탕, 두드렸던 당신은 지금쯤 이 방의 어딘가에 있을까요. 커다란 화면의 앞에 서서 방송을 보고 있을까요, 이불 속에 폭 들어와 나에게 안겨 있을까요. 바아상이 말해 주었던 세상살이라는 것, 그것을 떠올려요. 안녕…. 

 

 당신의 옆에 앉아 에어캡을 터트렸어요.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별을 고하고, 눈물을 흘리다가도 갑자기 화목해지는 장면을 목격했어요. 바아상은 이게 참 재밌다고 했습니다. 이런 게 바로 드라마다, 인생에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 드라마다. 그 드라마의 제목이 떠오르지는 않네요. 나는 당신의 옆에 앉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아직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가 많았기 때문이에요. 원한이나 상견례와 같은 단어는 종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행복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알려 주신 단어라 알고는 있었지만, 바아상의 행복이 어떤 것인지는 알기 어려웠습니다. 꽤 이상한 대목에서 행복을 말했기 때문이에요. 기억을 잃고 있는 것, 이게 행복이다. 인생 전체가 지워지고, 새로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라 하셨지요. 그리고 또, 산책을 할 때, 겨울 바람이 우리를 잡아먹을 듯이 턱을 벌리고 있을 때, 그때도 행복이라 했습니다. 그때의 나가코나, 지금의 나가코나,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무튼. 진짱이 집에 들어오고 당신은 다시금 두려움을 얼굴에 동동 띄웠어요. 나는 에어캡을 터트리다 당신의 건조한 손을 잡았습니다. 진짱이에요, 영진이에요. 나의 이모. 당신의 딸. 진짱은 낯설어하는 당신의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집에 오자마자 옷을 휙휙 내던지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집 곳곳을 바쁘게 돌아다녔어요. 나에게 따뜻한 꿀물을 타 주기도 하였고, 간식거리를 꺼내 주기도 하였습니다. 코코넛 과자가 참 맛있었던 기억이 나요. 당신이 좋아하셨던 그 과자 말입니다. 부산에서의 첫날밤은 굉장히 정신이 없었어요. 나는 창고처럼 쓰였던 작은 방에 지내게 되었어요. 파란색의 짐볼이 굴러다니고, 1kg짜리 덤벨이 책 몇 권 위에 우뚝 서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날이에요, 나의 죄책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날…. 그 기억을 뒤적이자니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무섭지만, 용서를 위해 애쓰겠습니다. 이사토 나가코의 말을 계속해서 들어 주세요. 미안합니다. 

 연한 주황빛의 수면잠옷을 선물받았어요. 진짱에게서 받았습니다. 디자인은 당신이 골랐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당근과 토끼가 패턴으로 찍혀 있는 귀여운 잠옷이었어요. 달큰하고 포근한 냄새가 나서 계속해서 옷에 코를 박고 있었습니다. 진짱이 말해 주었어요. 할머니가, 새 옷을 입을 때 늘 한 번 빨아 둬야 한다며 직접 손빨래를 하셨다고. 그래야 우리 손녀가 편히 잘 수 있다고. 나는 진짱을 향해 웃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어요. 당신의 그 사랑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요. 나의 어머니인 유진을 향한 사랑이 그대로 내려오는 걸까요, 보물처럼 말입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나에게 어떻게 그런 다정을 베풀 수가 있었던 건지, 나도 모르게 당신의 마음을 의심했습니다. 미안해요. 목적 없는 다정에 낯설어서 그랬습니다. 그때부터 바아상을 약간은 경계했습니다. 살짝 흘러내린 잔머리를 정리해 주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거나, 푹신한 크림빵을 반으로 쪼개어 줄 때 웃으며 받아놓고 먹지 않은 것. 다정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요. 당신이 나와의 짧은 기억을 잊을 때. 화문을 열었다 닫을 때 안개처럼 떠오르던 당혹감…. 나는 첫날, 제 이름은 나가코입니다, 하고 계속해서 말했어요. 처음 만나는 것처럼. 유진의 딸입니다. 소개를 할 때마다 당신은 활짝 웃어 주었어요. 먼 길 오느라 힘들진 않았나. 밥은 먹었나. 뭐라도 안 먹었으면, 가만 있어 봐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서둘러 가곤 했어요. 그런 당신을 보며 나는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졌어요. 의심해서 미안합니다. 저의 사과가 무게감 없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 주세요. 창문이 흔들립니다. 당신의 대답입니까? 그것이 용서는 아닌 것 같으니, 그때의 기억을 말해 보겠습니다. 당신에게 아주 힘들고 괴로운 기억일 듯 싶어요. 

 

 포근하고 적당히 무거운 이불을 덮고, 문은 살짝 열어 둔 상태였습니다. 방은 어두웠지만 휴대폰의 불빛이 반딧불이 같았을 거예요. 열린 문틈으로 거실의 불빛이 보아뱀처럼 기어들어왔고, 당신은 아직 잠들지 않은 듯했어요. 진짱은 잠든 지 오래였습니다. 아마 12시가 넘은 시간이었을 거예요. 당신은 드라마 소리를 한껏 줄이고 에어캡을 터트리고 있었어요. 뽁, 뽁, 뽁…. 그때 저는 어머니에게 문자를 남기고 있었습니다. 잘 도착했어. 바아상 말이야, 엄마가 말한 대로 이이 히토요. 당신과 제가 함께 찍은 사진도 첨부했어요. 사진 속 당신은 저의 볼을 잡고 뽀뽀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귀여웠어요. 어른에게 귀엽다는 말은 실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바아상. 나는 당신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잠든 이후에는 화제인 영상을 보고, 친구들이 sns에 올린 게시글을 읽기도 했어요. 부산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입꼬리에 고인 눈물 한 방울을 맛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아마 슬펐던 것 같습니다. 유진짱, 어머니를 생각하면 슬퍼졌어요. 당신의 상태가 안 좋다는 말이 계속 떠올라서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때는 부정하고 싶었으나, 불쌍함이었네요. 당신에게 불쌍함을 느끼는 나 자신이 미웠어요. 당신에게 큰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거실에 불이 꺼지고, 바닥에 발바닥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몇 번 났습니다. 땅을 사악, 쓸어내는 듯한 한숨 소리도 들렸습니다. 잠이 오지 않았는지, 에어캡 소리는 멈추지 않고 일정하게 났습니다. 나도 잠이 오지 않았던 터라 당신이 누워 있는 방에 가서 말을 걸까 생각도 했어요.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렵게 찾아온 당신의 졸음이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요. 조용히 누워 있었어요. 뒤척이다 문득 섬유유연제 냄새가 풍겨올 때면 미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잠들지 못한 당신이 무언갈 하고 있는 듯 싶었습니다. 나는 은근한 신경을 기울이면서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했어요.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고 싶은 충동이 몇 번이고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는 소리가 제야의 종소리처럼 울리고, 물을 마시는 소리가 들리고, 현관의 센서등이 반짝, 하더니 도어락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참새를 좇는 고양이처럼 기어가 문을 열어 보았어요. 사람은 없고 주황빛 불빛만 우뚝 서 있었습니다. 잘못 들은 거겠지, 하는 생각에 다시 엉금엉금 기어가 이불 위로 힘없이 쓰러졌어요. 나도 모르게 잠들었어요. 부산의 관광 명소를 소개하는 영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광안대교에서 시작해 남포동, 그 다음에는 서면, 마지막으로는 해운대까지 보여 주는 영상이었어요. 나는 아마 서면으로 들어가는 입구 쯤에서 잠들었습니다. 내가 묵는 방 창문을 열면 바로 산이 보였어요. 거대한 짐승 같은 산. 바람이 불 때마다 한 걸음씩 나아가는 듯 싶어 으스스했습니다. 아침이 오면 순진하게 바뀔 거예요. 새소리가 들려오고, 사르르 하고 나뭇잎이 저들끼리 부대끼는 소리가 들리고, 백 퍼센트 무해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아침이 무서웠어요. 진짱이 울면서 나를 흔들었거든요. 나가코, 일어나 봐. 나가코, 할머니 못 봤어? 나가코, 나가코. 철거 선고를 받은 건물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포근한 이불은 아침 햇살을 잔뜩 먹어 따스했고, 벽지에 하얗게 그어진 빛이 어찌나 예쁘던지…. 역시 모순적이네요, 나라는 인간은. 밝음이 있기에 어둠도 있다는 말을 아십니까. 나는 그 말이 어떤 것인지 그날 아침 알았어요. 

 

 아침 7시. 진짱과 나는 잠옷 차림으로 당신을 찾으러 나갔어요. 경비실 아저씨에게,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아상의 행방을 물었죠. 원래대로라면 진짱과 당신과 간단하게 아침을 차려먹고, 주변 산책을 하고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진짱은 나를 깨우기 전에 메추리알 장조림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까다 만 메추리알들이 부화할 것처럼 부엌에 놓여 있었고, 간장과 미림이 그 옆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지만, 당신의 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어요. 반듯하게 접혀져 있는 이불, 그 위를 지키고 있는 베개. 등산 가방과 옷가지 몇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나가코가 등장했기 때문인가. 자의식 과잉 같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나가코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유진짱의 인생을 빼앗았다는 생각에? 유진짱의, 어머니의 결혼 생활을 내가 망쳤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옵니다. 지진이 일어났어요. 마음의 곳곳이 무너지고, 슬픔을 잘 막고 있던 댐이 붕괴되었습니다. 비상 사태였어요. 위험 정도가 큰 만큼, 나는 온힘을 다해 당신을 찾았어요. 바아상, 바아상! 도코니 이루노. 고멘나사이. 

 

 당신을 발견한 건 근처의 아파트 단지 앞이었어요. 길을 걷던 아저씨가 말해 주더군요. 확실하진 않은데, 저 앞쪽에 공원 있지 않습니까. 거 앞에서 어떤 할머니가 반팔 입고 떨고 있던데요. 바아상이 맞았어요.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는 공원 앞의 바위에 앉아 당신은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통풍이 잘 되는 반팔을 입고, 신발도 신지 않고 조각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더군요. 집에 가야 한다, 집에. 진짱은 당신의 손목을 붙잡고 울었어요.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사과나무가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었죠. 나는 꽤 멀리서 진짱과 당신을 지켜보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려 하였지만, 당신이 괜찮은지 살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걸음을 옮길 수 없었어요. 미안해서 그랬습니다. 그때는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눈물만 흘렸어요. 최대한 숨죽여서. 눈물만 도르르…. 진짱이 말했습니다. 집에 가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당신을 꾸짖었던 것 같아요. 당신은 놀라 동그래진 눈을 하고서 거기는 집이 아니라고 외쳤죠. 비명에 가까웠습니다. 진짱이 고개를 돌려 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나가코, 뭐라고 좀 해 봐. 도와줘, 제발. 붉어져 있던 진짱의 눈가를 손으로 쓰다듬고 싶었어요. 안아 주고 싶었습니다. 진짱도, 당신도, 어머니도. 새벽 내내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망부석처럼 그곳에 앉아 계셨다고요. 감기에 심하게 걸리셨어요. 기억나세요? 뒤로 넘어갈 듯이 기침을 하며, 살려 달라고 울기도 하셨어요.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신의 손을 꼭 잡기만 했습니다. 어디를 가려고 하셨던 걸까요. 진짱이 아무리 물어도 모르겠다고만 한 당신, 내가 사과를 전하며 물으면 알려 주실까요. 미안합니다. 어디에 가려고 했던 건지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그걸 알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방학 내내 있기로 했었습니다. 부산에 말이에요. 그런데 새벽에 나가는 당신을 잡지 못해서, 당신의 몸이 안 좋아져서, 어머니와 진짱이 오래 얘기한 결과 나는 오사카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미안했습니다. 일주일이었어요. 내가 살면서 할머니를 가져 본 기간. 바아상을 가졌던 날이 일주일이 되었어요. 그 이후로 당신과의 기억은 드문드문 있습니다. 전화를 하면 당신은 누구냐 물었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안녕하세요, 나가코입니다. 이사토 나가코, 당신의 딸 유진의 딸이에요. 현대 아파트 103동 1203호를 나올 때, 캐리어가 무거웠어요. 당신이 한국의 김이나 라면, 과자 같은 것들을 챙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진짱이 무거울 거라며 당신을 말렸지만, 말리는 진짱의 손을 뿌려치고서 캐리어에 마구 넣었습니다. 광안대교가 그려진 에코백에 떡도 넣어 주었어요. 백설기였나, 네모낳고 새하얀 떡 있지 않습니까. 내가 자꾸 떡을 턱이라고 발음해서, 당신이 아이처럼 웃었던 기억도 나요. 내가 떠날 때, 용기를 내서 당신을 안았습니다. 바아상, 고맙습니다. 잘 지내세요. 사요나라. 당신은 나의 등을 쓰다듬으면서도 누구냐 물었습니다. 그때 나는 나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어요. 그저 사요나라, 사요나라…. 안녕히. 바아상은 나를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히 말했어요. 진짱도 듣지 못했을 거예요. 아주 작은 소리였습니다. 사요나라, 나가코. 당신에게만 털어놓은 이야기입니다. 진짱도 어머니도 몰라요.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의 기억이 악마처럼 다가왔어요. 기억이 아니라, 그날 새벽 당신을 말리지 않은 나가코입니다. 

 

 유진의 딸 이사토 나가코, 당신에게 사과를 올립니다. 용서를 부탁해요. 어스름한 아침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의 죄악을 깔끔하게 묻을 수 있을까요. 이곳, 주부 공항 근처에 타임캡슐을 묻는 것처럼 나의 잘못을 묻을 수 있을까요. 바아상. 오사카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억해요. 외투의 주머니에 손을 넣자 아무렇게나 접혀진 종이를 찾았어요.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김, 유, 라. 당신이 써 준 나의 한국 이름. 당신이 지어 줬던 나의 이름. 아름답게 자라라는 뜻이었을까요, 그 이름의 한자는 알지 못해요. 그것이 당신이 나에게 말해 줬던 비밀입니다. 다른 비밀들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만, 이거 하나는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어요. 내가 태어났을 때, 이 아이는 나의 손녀라며 이름을 직접 지어 주겠다고요. 당신이 나에게 준 첫 번째 선물. 그런데 유진짱이 반대했고, 나는 이사토 나가코가 되었고. 김유라, 라는 나의 이름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그 종이에 쓰여진 당신의 글씨를 얼마나 어루만졌던지요. 한참을 만지니 번져서…. 그 종이는 아무도 찾지 못하는 어린 날의 일기 속에 숨겨놓았습니다. 나가코, 아니 유라는 당신이 떠오를 때마다 그 종이를 펼쳐 봐요. 

 

 이제 슬슬 잠들어야겠습니다. 일정이 바빠요. 이렇게라도 당신에게 얘기를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창문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걸 보니, 당신도 아마 잠들었나 봐요. 이 방 어딘가에 있을 당신. 잘 지내나요. 유령이 된 당신과 함께 비행기에 나란히 앉아 부산을 여행하는 상상을 해요. 함께 백설기를 먹고, 바아상이 좋아한다던 약과도 나눠 먹고, 일부러 떡을 턱으로 잘못 발음하고 싶어요. 당신의 미소를 보고 싶습니다. 바아상, 그날을 용서해 주세요.

 ….. 아닙니다. 그건 나의 욕심인 듯해요. 나는 그저 당신을 그리워하고, 계속해서 당신을 불러야겠어요. 바아상, 바아상. 안녕히 주무세요. 일본어로는 오야스미, 라고 해요. 유라는 이쯤해서 가 보겠습니다. 한국에 도착하면 인사하러 갈게요. 진짱이 장난식으로 말했습니다. 에어캡으로 꽃을 포장해서 오면 할머니가 좋아할 거라고. 이제 정말 안녕이에요. 물보라 같던 죄책감이 졸음이 오자 잠잠해졌어요. 모순적이라 미안합니다. 모순, 그 말을 최근에 배웠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당신을 잡지 못했던 새벽이 떠올라요. 

 오야스미, 바아상. 사요나라. 

 

  

쓰고 지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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