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저 도윤이에요."

 내리는 함박눈을 보며 도윤은 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벗어나지 못한 문 앞에서 언제까지고 있을 수는 없어서, 저를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규혁의 품에서 떠나기로 한 이상 그에게 받은 모든 걸 이곳에 두고 갈 생각이었다. 정작 두고 갈 수 있을 크기로 받은 것은 핸드폰 하나뿐이지만. 금방 도윤의 전화를 받은 주영은 방 밖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택이 모여있는 골목을 지나 쭉 걸으면 버스정류장이 있다고 했다. 도윤은 그곳에서 기다리면 짐을 챙겨 나가겠다는 답을 받고 정원을 가로질러 완전히 집을 벗어났다. 이제 다시는 올 일이 없을 쓸쓸한 집의 모습을 눈에 담던 그는 대문 옆 우편함에 전원을 끈 핸드폰을 넣었다. 정말로 안녕.

 정류장으로 향하는 발자국은 눈에 의해 지워졌다. 머리에 소복이 쌓이고 옷에 붙어 녹지 않는 눈을 털어내는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체온이 있었다면 자연스레 녹아내려 물이 되고 화장이 씻겨 내려갈 정도의 양이었지만, 오히려 녹지 않는 눈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진짜 너무 춥다."

 "얼른 가자."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에 도윤은 비로소 제 옷이 날씨에 비해 얇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털어낼 뿐, 입김도 나오지 않고 혈색을 유지하는 모습은 무슨 짓을 해도 수상하게 보이고 있었다. 길을 지나는 사람의 수가 적어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괜히 얇은 자켓을 여미며 정류장으로 향한 도윤은 일부러 숨을 쉬는 척 허공을 후후 불어댔다.

 금방 나올 것 같던 주영은 몇 분째 나타나지 않았다. 도윤이 정류장에 도착해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자 사람들은 그를 힐끔거렸다. 미처 털어내지 못한 눈이 얼굴, 옷의 이곳저곳에 붙어 녹지 않았다. 평소에는 자연스럽게 보일 화장이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색을 만들어냈다. 가끔 후후대는 행동을 제외하곤 어색하기 짝이 없는 꼿꼿한 자세까지. 

 "좀비인가 봐."

 "쉿! 들리겠다!"

 "좀비 환자? 인가 뭔가는 어디가 고장 났다고 했어. 안 들릴걸."

 비웃음이 섞인 타인의 속삭임이 끊임없이 도윤의 귀에 아른거렸다. 들리지 않을 거라 멋대로 단정하고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금방이라도 그를 배신자라고 부를 것만 같은 상황이 불편했다. 

 정류장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도윤의 옆으로 많은 사람이 지나쳐갔다. 쉼 없이 내리는 눈과 띄엄띄엄 지나가는 버스들의 소리를 들으며 기다리는 시간. 미동도 없이 가만히 바닥을 보고 있을 때, 익숙한 차가 미끄러지듯 도윤의 앞에 멈춰 섰다. 

 "도윤아! 미안. 전부 챙겨 나오느라 늦었어. 얼른 타!"

 "아니에요. 오히려 갑자기 나와달라 한 건 저인데요."

 창문을 내리고 그를 부른 주영의 얼굴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이 겨울에 땀을 흘릴 정도로 급히 나와줬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가만히 있어 굳은 몸을 일으킨 도윤은 마지막으로 눈을 다시 턴 후 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에 타자마자 후끈하게 밀려오는 히터의 더운 공기 덕에 그의 표정이 풀어졌다. 추운 것보다는, 따스한 게 훨씬 나았으니까.

 "이제 돌아가지 않을 거지?"

 "네. 누나한테는 죄송해요. 처리할 일이 늘어버린 것 같아서."

 "난 네 보호자야. 못할 게 뭐 있겠어! 오히려 잘 됐어. 규혁이가 미안하다고 잘못했다면서 매달릴 때까지는 여행 다닌다고 생각하자."

 "하하……. 형이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요."

 멋쩍은 대화였지만, 평소와 같은 태도에 도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주영의 말처럼 미안하다고 잘못하는 규혁을 상상하는 건 썩 유쾌한 일이었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지만. 뭐, 상상하는 건 자유였으니 말이다. 조금 나아진 기분을 끌어안고 차 시트에 등을 기댄 도윤을 힐끔 본 주영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중요한 질문을 꺼냈다.

 "혹시 가고 싶은 곳이라거나 가야 할 곳이 있어?"

 "음. 있긴 한데, 혜성이 도움이 필요해요."

 "알겠어."

 그녀는 그 이상 묻지 않고 바로 혜성에게 전화를 걸며 엑셀을 밟았다. 부드럽게 출발한 차가 완전히 동네를 벗어날 쯤, 도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추운 밖과 다른 따뜻한 공간. 어쩌면 계속해서 있을 수 있던 따뜻한 공간과는 다른 곳. 함께 있다면 행복할 거라 믿었던 사람은 이제 곁에 없었다. 얕은 잠에 걸친 그의 흐릿한 의식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맴돌았다.

 번화가, 서울의 중심에서 벗어난 차가 소리 없이 작은 카페 앞에 멈춰 섰다. 손님이 그리 많지 않은 가게는 조용히 주영과 도윤을 맞이했다. 눈이 쌓인 테라스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도착해 있던 혜성이 퍼뜩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어 그들을 반겼다. 머리색과 같이 코끝이 벌게진 그는 검은 마스크를 내리며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금방 왔네?"

 "일 다 때려치우고 달려왔지. 어우, 추워."

 도윤의 등을 떠밀어 먼저 앉게 한 주영이 주문을 마치고 한 박자 늦게 자리에 합류했다. 먼저 시켜둔 혜성의 음료에선 달콤한 향과 함께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아직 입을 대지 않은 듯, 식어가는 잔을 물끄러미 보던 그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규혁이 형 대신 날 찾은 이유는?"

 "찾아줘야 할 사람이 있어서. 번호여도 좋아."

 내가 핸드폰을 놓고 와버려서. 도윤의 말에 혜성은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무언가 골똘히 고민에 빠진 듯 같은 행동을 이어간 그의 고뇌를 깬 것은 음료가 나왔다는 걸 알린 진동벨이었다. 크게 이어지는 알림에 혜성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서 펜과 종이를 꺼냈다. 이런 것도 들고 다녀? 순수한 궁금증의 질문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준비성이 철저한 거야. 완벽한 사회생활을 위한 거랄까!"

 "으음. 그래서 찾아줄 수 있다는 거지?"

 "내가 기억력 하나는 좋아서. 오인하인가 뭔가, 걔 번호라면 이거."

 "어, 어떻게 알았어."

 그는 상대의 이름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태연자약하게 이름과 번호를 써 내려갔다. 당황해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도윤의 얼굴에 놀람이 깃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커피 두 잔을 들고 자리에 돌아온 주영도 놀람을 숨기지 못했다. 

 "형 뒷조사 정도는 했으니까 기억하고 있었어."

 "그거 자랑 아니야."

 "아무튼 도움이 됐으면 된 거잖아!"

 금세 식은 음료를 입에 댄 혜성의 말엔 반박할 수 없었다. 정말로 번호를 그 자리에서 적어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당장 근처에 머무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시간이 남게 됐다. 얼떨떨하게 종이를 보는 도윤과 주영을 보며 펜을 가방에 넣은 혜성은 핸드폰을 그들의 앞으로 밀어 건넸다. 

 "내 폰으로 하면 형이 절대 모를 걸."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 않은 주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저 도윤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이렇게 달려와 선뜻 도움을 주다니. 핸드폰을 집을까 망설이는 도윤 대신 그녀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입을 열었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문제가 될 법한, 그런 의심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 말이다. 

 "규혁이가 시킨 일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 오히려 내 연락도 안 받는다고, 그쪽. 이런 건 그냥 추측으로도 쉽게 티가 나잖아. 규혁이 형은 연락 안 받고, 갑자기 도윤 형은 도움이 필요하니까 외곽 카페에 나와달라고 하는데. 아! 이거 둘이 싸웠구나 하는 결론이 나는 거지."

 혜성은 명탐정처럼 안경을 올린 시늉을 하며 후후 웃었다. 틀린 점을 지적해보라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에 주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의 말엔 틀린 부분이 없었다. 무엇보다 정확히 상황을 유추해내고 자칫 자신의 위치에 문제가 생길 쪽의 편을 들어주기까지 했다. 

 왜 그랬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건 아니었다. 도윤에게 넌지시 과거를 흘리고, 생각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던 장본인이 혜성이었으니까. 스스로 알아낼 수 없는 진실을 듣고 싶어 도윤에게 떠넘긴 짐이 이런 일을 불러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용기를 낸 결과가 말하는 진실은 혜성이 추측하는 것이 정답이란 걸 보여줬다. 그래서, 더욱 고마웠다. 

 "고마워 혜성아."

 "우와, 뭐야. 이런 분위기 좀 별론데……. 쳇.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한 거 아니야."

 언젠가는 해결해야 했던 문제였다. 혜성의 이야기는 그 계기가 되어줬을 뿐이다. 솔직한 도윤의 감사에 혜성은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괜히 바닥을 보이는 잔을 입에 댄 그의 귀가 조금 빨개진 것 같았다. 굳이 지적하면 머리카락 때문일 거란 변명을 할 터다. 훈훈한 분위기와 함께 카페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전화 빌릴게."

 "그보다 영이 누나. 왜 두잔 시켰어? 심지어 에스프레소네. 우웩, 쓴 내."

 "도윤이 몫도 시켜야 하잖아. 마시는 건 별개로 최대한 티 안 나게."

 "저 원래 에스프레소 마셔요."

 지금은 마시지 못하는 몸이 됐어도. 농담처럼 던졌을 뿐인 말에 굳는 건 주영과 혜성이었다. 단지 우연이 겹친 취향에 기뻐하는 건 도윤만의 일인 듯했다. 둘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를 건 그는 화려한 연결음에 귀를 기울였다. 오인하라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최신 댄스곡이 카페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였다. 

 [여보세요?]

 그러나 긴 연결음 후에 들려온 목소리는 인하의 것이 아니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소리와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발소리와 큰 고함이 들려왔다. 순간 말문이 막힌 도윤이 어버버 대자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여보세요? 뭐야, 스팸인가?]

 "저, 오인하 전화 아닌가요."

 [인하? 인하를 그쪽이 어떻게 아는데요?]

 인하라는 이름을 꺼내자마자 상대방의 반응이 날카로워졌다. 동시에 웅성대던 주변의 소음이 커졌다. 제대로 듣지 못할 소란스러움에 언뜻 인하의 이름이 몇 번이고 지나간 것 같았다. 

 그쪽이 어떻게 아냐 물었을 때 도윤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와 함께 병원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해도 되는 걸까. 솔직히 말한다면 그가 모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자신이 좀비라는 걸 알리는 꼴이었다. 어떤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애초에 인하가 있는지도 모를 곳에 말해도 되는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인하 친구입니다."

 [인하 친구? 갑자기?]

 "그, 그게……."

 [우왓, 야. 수상한데 왜 전화 내놓으라고. 악!]

 반쯤은 되는대로 지껄인 것에 불과한 말이었다. 친구라고 우기면 쓸만한 정보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 던진 말에 전화 너머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나고 소음이 덜해진 너머에선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도윤이야?!]

 "어어. 인하야."

 [이 자식! 연락처 준 지 몇 달이 지난 줄 알아? 난 어디 가서 픽 죽은 줄 알았다!]

 진짜 친구야? 전만큼 소란스럽지는 않지만, 너머로도 분명히 들릴 말에 도윤은 저를 힐끔거리는 혜성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전화한 게 맞았다. 어디 가서 죽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툭 던진 말은 그녀와 같은 처지라서 할 수 있는 말이겠지. 그는 안정감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미안. 그냥 좀 조용히 지내서."

 [이거 니 번호야?] 

 "아니. 나 핸드폰 없어."

 [우와. 구시대. 사실 나도 이거 내 폰은 아니지만.]

 실없는 대화가 오갔다. 그동안 잘 지냈냐는 평범한 안부와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갑자기 왜 연락을 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가지 않아 본론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당분간 부산에서 지내려고 하거든."

 [헤에. 이규혁이랑 싸웠구나!]

 단숨에 정곡을 찌른 인하 덕분에 도윤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어두워졌다. 싸운 수준이 아니었지만, 일부러 정정할 필요는 없어 그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곧 긍정일 테니 말이다. 참지 않은 큰 웃음이 들려오고 도윤이 미간을 꾹꾹 누를 즈음, 인하가 겨우 진정한 듯 활기차게 말을 이었다.

 [주소 찍어 보낼 테니까 그쪽으로 와. 밤에 재워주는 것 정도는 돼.] 

 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인하는 전화를 끊었다. 폭풍처럼 지나버린 전화에 진이 전부 빠져버렸다. 혜성에게 전화를 건네고 귀에 쏟아지던 소리가 멈추자 거짓말처럼 주위가 조용해졌다. 더욱 거칠어진 눈발과 소복하게 쌓인 바깥의 고요함, 잠시 멈춘 노래는 그들이 이곳에서 떠나야 한다며 재촉하고 있었다.

 혜성이 메모를 찢어 쟁반에 올린 후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자칫하다간 이곳에 고립될지도 몰랐다. 슬슬 복귀해야겠어. 간단한 작별 인사를 건넨 그가 먼저 카페를 나서자, 인하와 도윤도 마찬가지로 컵을 반납하고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패딩의 모자를 뒤집어써도 위태롭게 보이는 주영과 달리 도윤은 묵묵히 주차해둔 차까지 걸어갔다. 길에 쌓인 것과 같이 차에도 이미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이대로는 운전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는 차 앞쪽에 쌓인 눈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도윤아, 트렁크에 솔 있으니까 그걸로 해. 동상 걸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은데 빨리 털고 가요."

 "괜찮을 리가 없잖아!"

 태연하게 눈을 전부 털어낸 도윤의 손을 잡은 주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분명 차가움에 동상이 걸릴 정도일 텐데.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이 그대로 얼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도윤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였지만, 괜찮다는 말을 연신 내뱉은 채 손을 빼냈다. 

 "아마 밤까지 이럴 것 같으니까 근처 시내 들어가서 숙소 잡는 게 낫겠고. 주사 맞고 누나는 방에서 자요. 전 차에서 자면 되니까 돈 굳겠……."

 "조용히 하고 차 타."

 주영이 말을 끊고 차 문을 벌컥 열었다. 부드럽게 끌어올린 입꼬리와 달리 그녀의 눈은 전혀 웃고있지 않았다. 눈을 치운 손보다 차가운 느낌이 드는 눈길에 도윤은 얌전히 차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눈을 털고 뒷좌석에 올라타자 쾅소리가 날 정도로 뒷문이 세게 닫혔다.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로, 주영은 온몸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시동이 걸리고 미처 털어내지 못한 눈을 와이퍼가 밀어냈다. 금세 녹아떨어진 물들을 몇 번 더 닦고 출발한 주영은 묵묵히 핸들을 잡아 돌렸다. 리어뷰 미러로 보이는 그녀의 싸늘한 눈을 힐끔거린 도윤은 입을 꾹 다문 채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은 직감. 분명 좋은 말은 돌아오지 않을 거다.

 한산한 도로에 근근이 보이는 차만이 구경거리로 느릿하게 스쳐 지나간다. 어느새 켜진 라디오에서는 바쁜 교통정보가 흘러나왔다. 이리저리 도로를 치우는 제설차를 뒤로하고, 시내로 들어가는 길을 택한 그들은 완전히 서울을 벗어나 대전의 한 도시에 차를 멈췄다. 

 "방에 올라가자마자 약부터 맞자. 아직 시간은 좀 있는 편이지만."

 "그럴게요." 

 순순히 주영의 말을 들으며 둘은 근처에 보이는 호텔로 들어섰다. 그들처럼 발이 묶인 사람들이 있는 듯, 로비에는 꽤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방을 잡아 오겠다는 주영의 뒤에서 가만히 기다리겠단 표시를 한 도윤은 중심홀에 덩그러니 남아 그녀를 기다렸다.

 다행히 방이 남아 높은 층으로 올라오게 된 도윤은 방 문을 열자마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평범하게 작은 비즈니스룸이 아닌 화려한 내부가 그를 반겼다. 결국 시력까지 나빠진 건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달라지지 않고 반짝일 뿐이었다.

 "좋은 방이지?"

 도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그의 등을 떠민 주영은 그제야 기분이 풀린 것처럼 보였다. 주춤주춤 버티지 못하고 안에 들어서 신발을 벗을 때까지도 그는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어서 옷 걷고 누워."

 "침대가 엄청 넓네요. 아니 물론, 누나가 침대에서 자고 저는 소파에서 자면 되니까요."

 "무슨 소리야? 방 하나 더 잡았으니까 얼른 누워."

 손을 씻고 가방에서 주사와 약을 꺼낸 주영이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세 사람이 거뜬히 굴러다녀도 될 크기의 널찍한 침대. 무슨 소리냐는 말에 다시 제 입을 막고 급히 옷을 걷어 올리며 침대에 올라간 도윤은 절대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참고로 이건 지원금 아니야. 그냥 내 돈이니까, 맘 놓고 쉬어."

 "그러면 더 부담되는데……."

 부스럭대는 소리가 멈추고 평소와 같이 무감한 주삿바늘이 허리에 닿았다. 처음 규혁의 집에 도착했을 때도 지금과 같은 마음이었던가. 처음 보는 생소한 광경에 놀라고,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주영과 무난히 친해질 수 있었다. 도윤 자신을 감시하는 명목의 보호자였어도 실상은 든든한 편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계속되는 호의가 부담스러운 것은 순전히 피해가 갈까 봐, 그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안 물어봐요?"

 "네가 괜찮아지면 말해줘. 아직은 안 들을래."

 방에서도 들렸다는 규혁과의 다툼은 도윤이 인식하지 못할 만큼 큰 소리가 오갔다. 점차 작아진 틈을타 제 짐을 챙긴 주영이 전부를 듣지 못했지만 말이다.

 크게 의존하던 것을 직접 끊어낸 만큼 그의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자신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괜찮다는 말로 비어버린 틈을 막아내고 있다.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규혁과 같은 상태가 될 것 같아서, 도윤은 녹이지 못한 손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누나. 괜찮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영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보통 사람들이 마음을 풀기 위해 하는 것을 도윤은 할 수 없었기에. 

 "사실 괜찮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아야 해요. 주저앉아 있으려고 나온 게 아니니까."

 "응."

 "……, 규혁이 형은 혼자 있을 텐데."

 "괜찮아질 거야. 지금은 잊자."

 무의식적으로 뱉어버린 이름에 미련이 묻어나왔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터였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되지 않을 거라면, 유일한 방법인 시간이 그를 무뎌지게 만들어줄 수 있었다. 주사를 타고 약이 거의 모습을 감추자 주영은 손을 들어 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건물 내부의 온기에 미처 털어내지 못한 눈이 녹아 머리카락이 축축했다. 

 그녀의 손길은 몇 번이고 머리카락을 오갔다. 모든 부분이 차가워 사라졌던 추위라는 감각이 돌아오고 있을 때, 한참 동안 쓰다듬어진 머리만이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도윤은 그럴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을 떨쳐내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됐어. 푹 쉬고, 내일 로비에서 보자. 체크아웃 시간은 열두 시야."

 "네. 내일 봐요." 

 아쉬울 만큼 따뜻한 손이 떨어졌다. 약이 들어있던 팩과 주사를 챙긴 주영은 옷을 내려주고 소리 없이 방을 떠났다. 도윤은 여느 때보다 맑은 정신으로 몸을 바르게 돌린 채 가만히 얼굴을 가린 손을 뗐다. 커다란 신식 조명이 내 쬐는 빛을 마주 보고 있자니 사방 군데에서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정확히는 히터에서 나온 열기였지만, 도윤에게는 바람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한 느낌이었다. 

 화장을 지우고 렌즈를 빼야 한다. 당연한 생각이 들어 몸을 일으킨 도윤은 문득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렌즈를 끼고 자는 건 괜찮아도 화장은 그렇지 않았다. 눈 때문에 망가졌을 화장으로 내일 로비에 내려가면 어떤 시선이 쏟아질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는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 속 자신을 확인했다. 다행히 얼굴 쪽의 화장은 크게 녹지 않은 상태였다. 군데군데 어색한 부분이 있어도, 이 정도면 사람들의 눈을 피할 정도는 되는 수준이었다. 

 "다행이야."

 "뭐가?"

 "……!"

 혼잣말을 중얼거린 도윤의 귓가에 규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릴 리 없는 그의 목소리는 퍽 다정했다. 눈앞의 거울이 뿌옇게 흐려진다. 흐릿하게 일렁이는 눈에 편한 차림의 규혁이 보였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지만, 네가 그리 말하니 물어보겠다는 듯. 비쩍 마른 몸을 품어 안아주는 그의 환영이 딱딱하게 굳은 도윤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도윤아. 네가 보고 싶어."

 "무슨, 소리를."

 "예전처럼 지낼 수는 없을까? 나는 네가 필요해."

 달콤했다. 규혁이라면 하지 않을 말을 지껄이며 환영이 도윤을 끌어당겼다. 지금 너를 안고 있는 나를 봐. 허리를 감싼 든든한 팔이 슬금슬금 기어 올라 도윤의 턱을 잡고 정면을 응시하게 만들었다. 마주 하고 싶지 않던 얼굴이 거울에 비쳤을 때, 도윤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규혁의 얼굴이 비어있었다. 자신이 차마 상상하지 못하는 그의 얼굴에는 얼굴이랄 게 존재하지 않았다. 듣고 싶은 말은 정해져 있지만, 정작 직접 마주하게 된 표정은 정해지지 않은 채였다. 

 "돌아와."

 곁으로 오라는 규혁의 말이 현실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낮에 그를 끊어 내놓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마음이라 욕해도 기꺼이 갈 정도로 기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런데도 도윤이 승낙하지 않은 건 참으로 단순한 이유였다.

 "내가 미련 덩어리라서 이러는 거잖아. 내 마음속에서조차 형은 사과하지 않고." 

 규혁은 도윤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다. 듣고 싶은 말을 하게 하고, 일말의 죄책감에 정하지 못한 얼굴. 또한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규혁이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을 거란 걸 말이다. 

 "사라져."

 단호하지만 떨리는 목소리에 규혁의 환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말끔한 거울에는 패닉에 빠진 한도윤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순식간에 몸을 지탱하던 힘이 빠지자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따뜻한 공기와 달리 서늘한 화장실 바닥은 도윤을 현실로 잡아끌었다. 

 더는 뭔가를 할 힘이 나지 않았다. 주영이 보면 비명을 지르며 그를 잡아끌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대로 있어도 괜찮다. 도윤은 그대로 자리에 누워 양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다시 들려올 환청을 막고, 이곳은 화려한 방보다 자신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동시에 밝은 방 안에서 규혁이 눈을 떴다. 잠깐의 꿈을 꾸었을까, 아득히 먼 감각에 남은 것은 겁에 질린 도윤의 얼굴이었다.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을 꾹꾹 누르며 책상에 흩어져있는 서류를 붙잡은 그는 지금이 한밤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대로 도윤을 찾아 뛰쳐나갈 것만 같아서. 불을 끄면 도윤을 안고 잠들었던 날이 계속 떠올라서. 손에 쥔 서류가 구겨지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규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비겁하게나마 홀로 중얼거리는 그의 말은 도윤에게 닿지 않는 첫 후회의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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