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알브의 한 화랑에서 기괴한 그림들을 전시한 방락자, 튜헨은 일주일 넘도록 심문과 정화 의식을 거친 뒤 투옥이 결정되었다. 형법에 저촉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방락자는 드물긴 하나 전례가 아예 없는 경우도 아니다. 따라서 신전은 튜헨을 제국 치안대로 인도하지 않고, 그 같은 방락자를 수용하기 위한 원결교 관할의 감옥에 보냈다.

 

황제의 도시, 라쿠스의 단 하나뿐인 자치구. 시에랑 자치구는 그런 지역이었다. 절차적 개입의 여지가 없다면 당연하게 라카이튼 황실의 간섭을 거부할 권리가 있는 공간.

 

지금 하르카인은 거창하게는 그의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 시에랑에 있었다.

 

이곳에는 웅장한 중앙 신전이 있고 신관과 신성 기사단의 관저가 부속되어 있다. 또 그로부터 멀지 않은 자리에 그 관할의 보육원이 있으며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위치에는 방락자 수감소가 있다.

 

요컨대 시에랑은 톄무하브를 섬기기 위하여 존재하는 하나의 왕국이나 다름없다. 물론 다분히 세속에 물든 황실이 바로 그러한 이유로 라카이튼의 근본이 되는 국교를 감히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것이지만 그 우매함이 도를 지나친 적은 없다.

 

 

“약속된 신의 검, 하르카인이 대신관 예하를 뵙습니다.”

 

 

하르카인은 대신관을 알현했다. 익숙한 공기에도 마냥 편안함을 느낄 수 없는 까닭이다.

 

근래 하르카인과 데이안은 튜헨을 검거한 디알브 행정구의 담당 기사로서 시에랑의 중앙 신전을 수차례 들렀고 오늘은 튜헨이 투옥되는 것만 간단히 확인하러 하르카인 홀로 온 참이었다.

 

다만 튜헨의 심문 기록 및 자택 수색 결과 열람 요청이나 진행 상황 보고 등 대부분의 업무는 직속상관인 제1기사단장 선에서 처리되므로 오늘처럼 하르카인이 최종 결재자인 대신관을 독대할 일은 없었다.

 

 

“맹약으로 말미암은 안녕이 그대와 함께함이라……. 자, 여기 앉도록 하세요.”

 

 

구태여 데이안까지 함께 부르지 않아도 될 만큼 사사롭거나 혹은 미처 그러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고 긴요한 용건이겠거니 짐작하면서 하르카인은 대신관의 부드러운 손짓에 따라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물론 상대가 상대이고 형국이 형국이니만큼 후자일 공산이 컸다.

 

신성 기사가 신의 검이라면, 신관은 신의 수족. 그중에서도 가장 드높은 자가 하르카인의 눈앞에 있었다. 디알브로 파견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앙 신전에서 매일같이 예배를 집전하던 대신관을 보아왔으나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보기는 서약식 이후로 처음이었다.

 

선대가 남긴 모든 지혜를 물려받아 올바르게 신의 뜻을 지킬 자격이 있는 존재이며 영향력만큼은 라카이튼 황제에 비견하는 원결교의 대신관, 셰이스. 그는 깨끗한 은백색 눈동자로 젊은 신성 기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대신관의 반쯤 세어버린 눈썹이라든지 세월의 굴곡이 깊게 팬 낯을 보자면 하르카인은 그들 사이에 놓인 시간의 간격을 불현듯 체감하고 마는 것이었다.

 

 

“하르카인 은우, 그대가 잡았던 방락자의 투옥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라지요.”

 

 

익히 아는 근엄한 목소리는 변함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어떻던가요. 단장에게 듣기로는 이번 사건으로 처음 방락자를 보았다던데.”

 

 

대신관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하르카인은 되묻지 않은 채 착실하게 튜헨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아무것도 잃을 게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것을 얻을 수는 있겠느냐 하면 그 또한 아니었다. 튜헨은 앞으로 그 무엇 하나조차 잃지도 얻지도 못할 인간처럼 보였다.

 

튜헨을 화랑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부터 그러했고 정화 의식을 거쳐 악마의 기운을 떨쳐낸 현재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바로 방락자가 여타 중범죄자와 다를 바 없이 사회에 복귀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은 것이다.

 

 

“그렇군요.”

 

 

셰이스는 하르카인의 짧은 감상에 가타부타 토 달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 관한 법적 절차는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당분간 그대와 데이안 은우도 다시금 디알브에만 머무르겠지요.”

 

 

능히 상대를 꿰뚫어 볼 듯 연륜이 묻어나오는 시선이 하르카인에게 붙박인다.

 

비록 여태껏 튜헨을 방락자로 만든 악마의 흔적을 찾지 못하였을지언정 이를 미제로 남긴 채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그 악마를 잡을 때까지 추적과 수색은 진행형이다. 그러나 오직 그것만을 전담하는 제3기사단이 있으므로 당연히 하르카인과 데이안은 본래 명령대로 파견지에 돌아가 이전까지 하던 업무를 수행한다. 만일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실마리를 발견한다면 이번처럼 중앙 신전에 보고할 뿐이다.

 

 

“내가 그대를 따로 만나고자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신관이 맞은편에 앉은 하르카인 쪽으로 서류철을 슥 밀었다.

 

 

“그대에게 이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에요.”

 

 

확인해보라는 무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빠르게 윗부분을 훑은 하르카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받은 종이묶음은 바로 튜헨의 심문 기록이었다. 권한이 없다는 사유로 열람 요청을 거부당한.

 

하르카인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을 왜 그에게 보여준단 말인가. 막상 받고 보니 달갑기보다는 껄끄럽다.

 

젊은 기사의 혼란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듯 셰이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신관의 예관에 수놓인 금실이 빛을 받더니 움직임을 따라 반짝였다.

 

기나긴 정적이 먼지처럼 쌓인 뒤에야 대신관은 모종의 결심을 세운 눈빛으로 하르카인을 돌아보았다.

 

 

“제3기사단이 소수로 꾸려져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뜬금없는 소리에도 은발의 신성 기사는 일단 성실하게 답했다.

 

 

“그대가 어느 정도로 추측하였든 그보다 적은 숫자일 겁니다.”

 

 

수도 외 전 지역으로 퍼지는 제2기사단원의 총계는 제1기사단의 수십 배에 달한다지만 제1기사단은 중앙 신전이 자리 잡은 수도 라쿠스 하나만을 담당하므로 인원수가 이백여 명에서 그친다. 바로 그 제1기사단 소속인 하르카인은 제3기사단이 아무리 못해도 백 명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제3기사단은 방락자를 직접 심문할 때를 제외하면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라카이튼 제국 전체에서 악마만을 전문적으로 쫓는 데 특화된 집단이다. 그리하여 제1기사단만큼은 아니어도 그 절반은 족히 되어야 한다고 짐작하였건만 그보다 더 인원이 적을 것이라 하니 하르카인은 내심 놀랐다.

 

 

“자……, 그러면 그토록 적은 제3기사단원과 각 기사단장 셋, 그리고 인구수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정 단위 이상의 교구를 총괄하는 주신관들, 마지막으로 대신관까지 다 더하여 이 제국에서 마흔 명이 채 넘지 못하는 이들에게만 접근권이 주어지는 정보가 있어요.”

 

 

여기까지 들은 하르카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그것 중 몇몇을 그대에게 알려주고자 합니다. 하나는 지금 그대가 받은 심문 기록이지요.”

 

 

바로 이런 말이 뒤이어질 것이 뻔했으므로.

 

대신관의 말마따나 이 드넓은 라카이튼 제국에서 아는 자가 마흔 명이 넘지 않는 그 극비사항을 도대체 하르카인이 알아야 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비밀은 언제나 그 중요성에 비례하는 책임을 요구한다.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면 자멸하게 될 뿐. 하르카인은 올해 봄에 입단한 일개 기사에 불과했다. 그 마흔 명을 채우는 사람이 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위치다.

 

아니, 무작정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조금씩 흔들리던 기사의 검보랏빛 눈이 오래 지나지 않아 잔잔해진다. 으뜸된 맹약의 주인이 언제나 그와 함께하리니.

 

 

“예하, 말씀을 듣기에 앞서 묻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세요.”

 

 

대신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카인이 묻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실망했을 성싶은 태도였다.

 

 

“저는 약속된 신의 종이자 검으로서, 이 순간조차 태고의 맹약 아래 제게 안배되었음을 감히 압니다. 그러나 제가 아직 미욱한 줄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번에도 그 끝이 어떻든 이 미숙한 종의 성장이나마 원결주님께 바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하께서는 둔한 검 하나를 더 부림으로써 저희의 주인께 무엇을 바치리라 믿고 계십니까. 외람되게도 묻습니다.”

 

 

하르카인은 셰이스가 구태여 경험이 부족한 자신에게 극비를 알려주려는 이유를 묻고 있었다. 물론 신의 가르침을 거스르지 않는 한 대신관의 말을 따를 터였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비밀의 무게가 하르카인을 속박하든 혹은 결해케 하든 상관없이 그는 배움을 얻겠으나 고작 일개 기사 한 명이 극비사항을 알게 된다 한들 정녕 신의 뜻을 이루는 데 유의미한 도움이 될지는 확신하지 못하잖은가.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는 목소리를 귀담아 들은 대신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르카인 은우, 고백하건대 그대는 훌륭한 기사이나 그대 자체에게서 어떤 대단한 가능성을 보아서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대가 디알브의 담당이기 때문이며, 디알브의 담당 기사를 고른 까닭은 그 악마에게 있지요.”

 

 

하르카인은 절반만 납득했다. 아직 일 년 경력도 채 못 채운 기사로서 당연히 그 정도 주제 파악은 할 줄 알았다. 그가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절반은, 데이안이 이곳에 함께하지 못한 이유와, 그 악마 때문에 제3기사단도 아닌 디알브 담당의 일반 신성 기사가 난데없이 비밀을 듣게 된 이 상황 자체다.

 

물론 이 신성 기사는 궁금증을 냅다 묻기보다는 상대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듣기를 훨씬 더 잘하는 사람이었다.

 

 

“……사쟌이 방락자에게 작품 발표 장소나 일시를 바꾸자는 식으로 회유하는 것은 백 년에 한 번 발생할까 말까 하는 일이니 말입니다.”

 

 

사쟌? 하르카인의 결 고운 눈썹이 움찔거렸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셰이스는 아랑곳 않고 심문 기록을 향해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읽으면서 듣도록 하세요.”

 

 

그제야 하르카인이 실례를 무릅쓰고 심문 기록에 다시금 손을 뻗어 읽기 시작했다.

 

튜헨은 그에게 직접 악마가 찾아왔다며 일관되게 진술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려내는 화가답게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묘사했다.

 

사쟌. 드디어 그 이름을 발견했다. 튜헨을 미혹한 악마는 스스로를 사쟌이라 소개했다고 한다.

 

하르카인은 미약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몹시 불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략 오백 년 전 살았던 사쟌이라는 작곡가를 알았다. 사쟌의 최후는 역사와 예술에 대한 학식과는 무관하게 상식 수준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렇게 알 수 없는 까닭으로 자결한 예술가의 이름을 빌려 한 화가를 타락시키는 악마라니. 인간을 향한 그 악랄한 우롱은 마땅히 불쾌해야 할 만한 짓이었다. 그 악마가 얼마나 정중하고, 얼마나 예술을 향유할 줄 알며, 얼마나 튜헨이 원하던 표현의 방식을 존중해주었는지는 부차적이다. 거짓되고도 악한 존재가 인간을 꼬여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꾸며내지 못하겠는가.

 

 

“사쟌……. 꽤 특색 있는 악마랍니다.”

 

 

기사의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행여 한 글자라도 놓칠까 꼼꼼히 기록을 읽어 내리는 한편, 그의 귀는 대신관의 목소리를 새겨듣는다.

 

 

“예술가만 노리는 그 특징 때문에 그나마 수사와 추적 범위를 좁히기 편하지요. 그리고 사쟌은 창작 활동 전반에는 관여하지 않더군요. 이번에도 그러했으나 작품 전시와 관련하여 마지막에 딱 한 번 개입을 했어요. 아주 드물게 있는 경우예요.”

 

 

하르카인은 점점 요상하게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하여 부단히 애썼다.

 

이렇듯 악마의 행동 양식을 비교, 분석하고 예외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즉…….

 

 

“개체를 구별할 수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 지표는 외양입니까.”

 

 

지금 읽고 있는 튜헨의 심문 기록 초반부에도 사쟌의 생김새에 대한 묘사가 있다. 튜헨보다 예닐곱 살쯤 많아 보이는 남성의 모습. 여느 신사 못지않게 잘 차려입고 다녔다던 사실적인 회고에 하르카인은 괜스레 소름이 끼쳤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악마라는 존재에 대하여 이전까지는 막연하게 생각했던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사람을 홀릴 만큼 빼어나게 생겼으리라 짐작하는 한편, 정반대로 아주 흉측하고 무섭게 생긴 괴물의 외형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거나 어쩌면 뚜렷한 형체 없이 목소리나 기운 따위로만 존재할 수도 있다며 뭉뚱그리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인간의 탈을 쓰고 있었다니. 이토록 평범한 모습이라면 악마가 사람들 속에 숨어들어 옆을 스쳐지나가도 전혀 모르지 않겠는가. 올바른 신을 따르는 종은 그것이야말로 두렵고 불편했다.

 

 

“아니에요. 기록들에 따르면 겉모습 묘사가 방락자마다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름이에요. 그대가 읽은 대로.”

 

 

이름? 하르카인은 ‘사쟌’이 진정 유의미한 지표일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이 조롱의 수단에 불과해 보이는 이름이 정말 의미가 있다고?

 

명쾌하게 답한 대신관은 어린 신성 기사의 놀람을 능히 이해한다는 듯 느린 속도로 눈을 깜빡여 보이더니 이내 설명을 이었다.

 

사쟌처럼 특별한 경향성을 띠는 악마가 보편적인 것은 아닌 모양이나, 같은 악마 이름을 댄 방락자의 기록끼리 모아보면 방락자의 직업 외에도 다른 요소로 일정한 규칙성을 보이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특정 신분이나 성별을 선호하는 악마는 그나마 예사고, 유사한 가족관계를 가진 인간만 노린다거나 심지어 같은 음식 취향을 가진 자만 건드리는 악마도 있단다.

 

이로써 한 가지 결론이 도출된 것이다.

 

 

“스스로 지었든 누군가 지어주었든 악마에게는 이름이 있으며 그들은 방락자 앞에서 그 이름 하나만으로 자칭한다……. 몇 십 년이고 몇 백 년이고 한결같이.”

 

 

대신관은 여기에서 말을 멈추었다. 하르카인이 다음 장으로 넘길 때까지. 그리고 이번만큼은 도저히 충격을 금치 못할 때까지.

 

 

“예하……. 이것이 사실입니까?”

 

 

오래도록 무거운 검을 잡아온 손이 고작 얄팍한 종이 몇 장을 붙든 채 파르르 떨린다.

 

두 번째 장에는 튜헨이 악마와의 대화를 회고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비록 악마에 매혹되었어도 정신을 놓지는 않았음을 증명하듯 상세하게.

 

 

“튜헨이 방락자가 된 것이 악마의 일방적인 착취나 조종 때문이 아니라…… 정녕 상호 합의 하에 결정된 일이란 말입니까.”

 

 

기록에 따르면 튜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사쟌에게 홀린 것이 아니라 계약을 맺었을 뿐이라고. 사쟌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그 덕에 나는 그 무엇도 근심하지 않고서 진정 바라던 것을 그려 세상에 내보일 수 있었으니 후회하지 않는다고.

 

 

「사쟌은 계약이 완전히 성사되면 내가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 거라는 점을 분명하게 명시했어요. 그렇지만 신문에서 자극적으로 떠들어대는 방락자의 잔학성과 폭력성 따위가 별안간 생기지도 않을 거라고. 물론 사쟌은 대화 내내 아주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가 내게서 무엇을 가져갈지 얼추 짐작은 갔지요. 귀하신 분들을 상대하다 보면 눈치가 늘거든요.」

 

 

모두 알고도 악마의 손을 잡았단다. 꿈을 위하여.

 

하르카인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는 정화 의식을 마친 뒤에 이루어진 심문이므로 이 진술의 신뢰성을 차마 의심할 수도 없었다.

 

 

“사실이에요. 나는 그것을 진실이라고 부르지만.”

 

 

그야말로 평생 믿어온 진리를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두통이 밀려들었다.

 

 

“하르카인 은우, 그대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너무 번뇌할 필요도 없지요. 악마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길에서 벗어나게끔 타락시킨다는 점은 명료하니. 잊지 마세요.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악마가 없었더라면 역사적으로 수많은 방락자의 손에 다치고 죽은 사람들 또한 없었을 거예요.”

 

 

군중을 혼돈 속에 파묻지 않으려 일말의 진실을 솎아내고 겉으로 보이는 사실만 드러내온 중앙 신전의 오랜 선택을, 하르카인은 이해했다. 악마가 원결주님의 맹약으로 빚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존재임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해한다. 기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마저. 이해는, 했다.

 

믿음을 시험하는 또 하나의 시련일까. 달빛 머리의 신도가 조금은 멍하니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믿음은 굳건했다. 지금도 온몸에 유영하듯 흐르고 있는 신성력이 그 증거였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인간의 손이 탄 지식이지, 톄무하브 님의 약속 그 자체가 아니다.

 

하르카인이 마침내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신은 태초부터 영원불변하다.

 

기사의 또렷한 눈빛을 마주한 대신관은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정말로 본론을 꺼낼 수 있겠군요.”

 

 

우직한 신성 기사는 본디 꼿꼿했던 자세를 더욱 바로잡았다.

 

 

“뒷장으로 더 넘겨보면 알겠지만, 사쟌이 하필 디알브를 고른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리더군요. 그 방락자의 주요 활동지도 아닐뿐더러 예술 작품 전시회는 주로 힐그란드에서 열리니 말입니다. 더구나 앞서 말했다시피 사쟌이 최종 발표나 일시를 변경하자는 등의 제안을 하는 것 자체가 매우 흔치 않은 특별한 일이고요.”

 

 

디알브에서의 전시회 개최. 그것은 튜헨이 아직 방락자임이 밝혀지기 전, 전시회 일시와 장소가 정해졌을 때 데이안도 의혹을 제기했던 지점이었다. 디알브 행정구는 라쿠스의 변두리 지역인지라 튜헨에게 초상화 의뢰를 곧잘 맡기던 고객들이 자주 찾는 곳은 아니다.

 

그리고 그 의문점은 튜헨의 심문 기록에서 해소되었다. 튜헨이 말하길 그 악마가 디알브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지 않겠느냐며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진중한 셰이스의 목소리가 잠시 쉼을 가진 뒤 차분하게 이어졌다.

 

 

“그러니 하르카인 은우, 그대가 디알브 행정구를 신경 써서 살펴주길 바랍니다.”

 

 

이쯤에야 왜 데이안은 포함되지 않는지가 다시 궁금해졌으나 하르카인은 우선 대신관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사쟌이 디알브를 고른 명확한 사유가 틀림없이 그곳에 있을 것입니다. 황실의 행정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없으니 그대가 직접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지나며 미처 숨겨지지 못한 흔적을 읽어내야 해요. 그리하여 종국에 그대가 발견하는 것은…….”

 

 

모든 답은 사람에게 있을지니.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하르카인은 한숨처럼 터져 나오려는 질문을 겨우 참아냈다. 대신관이 무엇을 바라는지 또렷이 짚어낼 수 없었고 가장 중요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감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라니. 방락자를 말하는 거라면 애당초 이 대화는 불필요하며, 그렇다고 악마일 리는 더더욱 없다. 결국 악마와 관련 있되 매우 온전한 상태인 사람을 찾으라는 의미였다.

 

그것이 가당키는 한가? 그러나 하르카인이 여태껏 악마에 대하여 정말로는 아무것도 몰랐듯, 여전히 이 최고위 성직자만이 쥐고 있는 진실이 더 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저 눈빛이 하르카인으로 하여금 차마 거부 의사를 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신관은 그 ‘사람’이 누구든 포박하여 끌고 오라 명령하지 않았다. 저 지난한 세월을 품은 은백색 눈동자를 보며 감히 미루어 짐작건대, 이것은 그저 그 누군지 모를 사람을 찾아주길 바란다는 온건하고도 간절한 부탁에 가깝다.

 

제3기사단의 존재 의의와는 결을 달리하는 임무. 제1기사단의 신성 기사는 하마터면 침음을 흘릴 뻔했다. 제3기사단은 고사하고 다른 어느 고위 성직자조차도 이 사안에 대해 모르고 있으리라는 직감을 받았다.

 

또한 그 정체 모를 사람을 처분하지 않는 대신관의 선택이 신의 뜻에 반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대신관으로서 맺은 원결주님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짓은 곧 믿음의 부재를 의미하는 동시에 신성력의 상실로 이어지며 그를 숨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게 전부 무엇을 위해서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 물어본들 시원하게 답해줄 성싶지도 않다. 그러므로 하르카인이 몸소 부딪쳐 그 해답에 가 닿는 수밖에 없다.

 

 

“참, 이로써 내가 원결주님께 무엇을 바치게 되느냐 물었지요.”

 

 

머지않아 임무 수행을 위한 추가적인 조언과 그에 관련된 문답을 서로 주고받았으되 가장 본질적인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던 기나긴 대화가 마무리되고 하르카인이 떠나려던 찰나, 노회한 대신관이 나직이 말한다.

 

 

“진실된 믿음.”

 

 

참으로 여상스러운 목소리에서는 한 톨의 거짓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맹약의 주인께 바칠 것이 그밖에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르카인은 이제 자신이 믿고 있는 진실이 타인의 것과 전혀 다를 수도 있음을 안다. 그리하여 예하의 진실된 믿음이란 무엇이냐는 되바라진 질문도 어렵지 않게 삼켜냈다.

 

이윽고 한 신성 기사가 미련 없이 중앙 신전을 떠난다.

 

더 이상 시에랑이 그립지 않았다. 오래된 신을 위한 작은 왕국이 아주 낯선 곳처럼 느껴진다. 그저 솔직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있는 디알브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과연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