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나 자신보다도 더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다.







어- 서- 일어-나-♪


두툼한 이불 속에서 마른 손 하나가 비죽 튀어나왔다. 손은 침대 협탁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화면을 몇 번 두드리자, 시끄러운 소리가 잦아들었다. 현재 시각은 오전 6시 30분. 월요일이었다. 아, 월요일 너무 싫어 진짜. 그가 중얼거렸다. 그 사이에 손은 다시금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5분. 

더도 덜도 말고 5분만 더……. 


그는 서서히 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꿈은 휘황찬란한 세계를 조성하여 주인, 옹성우에게 선사했다. 다시 가고 싶은 뉴욕의 풍경과 서울의 풍경이 절묘하게 짜깁기 되어 기묘함을 일으켰다. 뭐 어때. 재미있으면 됐지. 안 그래, 황민현? 성우가 민현에게 눈짓했다. 꽉 잡힌 두 손이 경쾌하게 걸음에 맞춰 흔들렸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주변 풍경도, 손을 잡은 상대도, 이 조명, 온도, 습도….





“...... 성우야, 오늘 출근 안 하니?”

“허억!!!!!!!!!”


성우는 침대에 누운 자세 그대로 펄쩍 뛰어올랐다. 왕방울만 해진 눈으로 핸드폰을 확인하니, 아뿔싸, 오전 8시 30분이었다. 정확히 두 시간을 더 자 버렸다. 오 분이 두 시간이 되어버린 기적. 오늘 완전 X 됐다. 어쩐지 꿈에 황민현이 나오더라니. 하지만 다시 잠든 건 자기 자신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어쨌건 빨리 출근하는 게 중요했다. 성우는 세수와 양치를 하는 둥 마는 둥, 물만 묻히고 급하게 준비하여 집을 나섰다. 


출근은 9시까지였지만, ‘고전적 성실성’을 강조하는 연구실 분위기 때문에 사실상 암묵적으로 8시 45분까지는 도착해야 했다. 만약 학교 근처에 자취했더라면 이 정도쯤 늦잠 잔 건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천에 살며 서울로 출퇴근하는 서글픈 운명의 소유자, 옹성우는, 제한시간 내에 도착할 수 없을뿐더러 한 시간 이상 지각할 미래를 위하여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필 꼭 오늘 같은 날은 대중교통 운도 꽝이었다. 눈앞에서 놓쳐버린 광역버스를 속으로 저주하며, 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심호흡.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잘은 안 되지만 말이다.


여차저차 겨우 출근한 곳에는 싸늘하게 굳은 랩장(lab長)만이 그를 반겨주었다. “교수님 이미 가셨다.”라는 한 마디와 함께. 성우에게는 저 말이 마치 ‘이번 학기, 네 졸업은 글렀다.’로 들렸다. 뭐 사실이기도 하지. 그는 터덜터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한 주의 시작부터 엉망진창이었다. 아, 모르겠다.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오늘 스케줄이나 다시 체크해 봐야겠다.


성우는 다이어리를 꺼내 오늘 일정을 살펴보았다. 오, 다행히도 오후에 외근이 있었다. 새로 시작된 프로젝트의 킥오프 미팅. 잘 됐다. 이걸 핑계로 랩장의 시선 밖으로 도망칠 수 있겠다. 대신 오전 중에 모든 행정 업무를 끝내야겠지만. 책상 위에 줄줄이 쌓인 관련 서류들을 살펴보던 성우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휴. 하면 된다. 하면 된다!!!


다소 처절해 보이는 자기세뇌를 뒤로하고, 성우는 업무에 몰두했다. 그래야만 내일의 그가 덜 헐떡일 테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바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성우는 외근을 핑계 삼아 도망치듯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맑은 하늘과 타들어 갈 듯이 뜨거운 태양이 그를 반겼다. 그래도 감사했다. 이렇게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


성우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럼 이제부터 어딜 가면 되더라....? 그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지도를 켰다. 그리고 이메일로 전달받은 외근지의 상세 주소를 찾아보았다. 그의 목적지는 모 협력업체로 경기도 성남시 판교 소재였다. 


... 그는 속으로 욕을 곱씹었다. 판교에서 인천으로의 퇴근. 한 네 시간 정도 걸리려나? 상상만으로도 지옥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얼마 전 새로 만든 신용카드를 학교 근처 호텔 숙박비로 질러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할 걸 알았다. 왜냐하면, 얼마 전 이케아랑 코스트코 가서 팍팍 긁었기 때문이다. 그때 자제 좀 할 걸. 후회하면서도 그는 착실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얄밉게도 꼭 이럴 때 지하철은 금방 왔다.


다행히 학교와 판교는 멀지 않아 금방 도착했다. 너무 일찍 와버린 탓에 아직 준비가 덜 된 회의실에 혼자 뻘쭘하게 앉아 있어야 했지만. 그래도 마음씨 좋은 직원 덕분에 커피 한 잔 얻어먹었다. 타버려 재밖에 남지 않은 속에 시원한 커피가 들어가니 좀 살만해 졌다. 


성우는 나름대로 회의 준비를 한답시고 아이패드를 꺼내 프로젝트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한참 집중해서 읽고 있는데 회의실 유리문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이쪽이 회의실입니다. 이따 2시부터 있을 회의도 여기서 진행합니다.”


아주 조용히, 열리는지도 모르게 회의실 문이 열렸다. 비싼 문짝 갖다 썼나 보다.


“어? 손님이 계셨나 봐요. 아직 회의까지 한 시간 반이 남았는데....”


당황한 목소리 뒤에 누군가 급히 부연설명을 넣어주는 속삭임도 들려왔다. 본의 아니게 주목받게 된 성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짧은 변명도.


“어쩌다 보니 일찍 도착해서요….”

“그렇군요. XX대학교 연구원님 맞으시죠? 반갑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지휘를 맡은 전무 이규혁입니다.”

“아, 네. 저는 옹성우입니다.”


그 전무라는 사람은 꽤 젊었다. 보통 전무쯤 되면 한 50대이지 않나. 역시 여긴 스타트업이라 그런가. 성우는 내밀어 진 손을 맞잡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이쪽은”


성우는 전무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전무 뒤에 가려져 있던 사람이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규혁은 소개를 이어갔다. 


“이번에 새로 입사한 상무 황민현입니다. 아직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친구예요. 시차 적응부터 해야겠지만 아주 똑똑한 친구니까요, 저희 프로젝트에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 바, 반갑습니다….”

“...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영혼 없는 인사와 악수를 했다. 젠장, 혹시 손바닥에 땀 난 거 알아챘으려나. 알았겠지? 헤어지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했던 사이였으니까. 진짜 뻥 아니고, 쟤 얼굴만 일만 시간 이상은 봤다. 


어색한 인사와 회의실 구경이 끝나고, 다시 성우는 텅 빈 회의실에 혼자 남았다. 혼자가 된 건 좋았지만, 기분은 최악이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개빡친 랩장이랑 단둘이 연구실에 남아있는 게 나았다. 세상에, 하고많은 놈 중에 왜 하필 황민현이야??? 이미 몇 년 전에 끝나버린 구애인 따위, 꿈에서도 반갑지 않다고. 그런데 하필... 하필 프로젝트에서 만날 줄이야. 성우는 심란한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젠장.... 무슨 영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하지만 제일 기가 막힌 건 그의 마음이었다. 최저점을 찍은 기분과는 달리, 마음은.... 싫지 않았다. 아이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성우는 밤고구마 먹다가 속에 걸린 사람처럼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모다? 모다? 그건 바로 술!!!! 그는 오아시스를 갈망하는 사막의 여행자처럼 다급한 손길로 카톡 친구목록을 훑었다. 그리고 ‘술 약속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OK’가 인생의 모토인 친구를 찾아 갠톡을 날렸다. 


‘오늘 퇴근하고 한 잔 할래?’ 


답장은 칼같이 왔다. 


‘존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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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피폐물, 현실고발물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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