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아무 전력 60분 참여했습니다. 주제는 '수수께끼' 입니다.

- 아카이 슈이치 X 후루야 레이

- 조직의 중심부는 괴멸되었고 잔당 처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공안 + FBI + CIA)

- 동기조가 날조되어 있습니다.

- 퇴고를 거치지 않은 글입니다.





 

 

 

 

 

 

그것은 소나기처럼 갑자기 찾아와 또 갑자기 그친 감정이었다. 스스로도 그것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몰라 나중으로 미루고 미루었다. 인생에서 가장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시기에 만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카이는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 날도 그는 같은 자세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만난 것은 스카치였다. 소개는 베르무트로부터였고, 직접 얼굴을 대면하기 전 나이와 국적, 코드네임 같은 기본 프로필을 먼저 전달 받았다. 라이는 코드네임을 제외한 모든 정보가 거짓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조직이었다.

스카치는 기본적으로 조직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라이가 가진 스카치의 첫인상이란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이런 조직에 있지 않았다면 평화로운 세계에서, 평범한 생활을 했을 법한 남자. 분명 그랬을 남자. 라이는, 아카이 슈이치는 그가 아까웠다.

그리고 스카치의 소개로 버번을 만났다. 전날 영하의 날씨에서 장시간 대기를 한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감기인가 싶어 입술 안쪽을 꽉 깨물고 버틸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도 몸은 솔직해서 푹신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을 터다.

두꺼운 철문이 끼이익,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스카치의 경쾌한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라이가 고개만 살짝 돌려 스카치의 뒤에 선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금색 머릿결, 조금 처졌지만 결코 게을러 보이지는 않은 눈 안에는 푸른 바다가 박혀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바다가 아니라 좀 더… 좀 더 탁한 무언가. 적당히 흐린 날의 소나기였을지도 모르겠다. 라이는 그렇게 느낀 것이 우스워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고 숨을 뱉었다. 버번의 눈썹 끝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이 관계가 시작부터 글러먹었음을 직감했다.

제 탓이었다.

 

 


  미련謎戀

w. 비에

 

 

 

“듣고 있습니까? 아카이 수사관.”

“… 그래. 듣고 있어. 아까부터 계속.”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후루야가 아카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리고는 술잔에 남아있던 술을 냅다 입 안으로 털어버린다. 일종의 메시지라고, 아카이는 생각했다. ‘당신의 대답이 성의 없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번만 넘어갑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세요.’ 같은 메시지가 아닐까. 아니면……. 아카이는 후루야의 행동을 읽으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옆에 앉은 남자는 늘 어려웠으므로 함부로 읽어 내려하면 늘 화를 입는 쪽은 자신이었다.

 

“그래서 남은 놈들을 유인해서…, 차라리 한꺼번에 일망타진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입니다. 어차피 남은 놈들 대부분이 제약부에 있던 놈들이잖아요? 소속만 제약부지, 취급하고 있는 건 마약이었을 테니까…. 잠깐, 아카이.”

“듣고 있다니까.”

“그게 아니라,”

“화 내지 마. 후루야 군.”

 

정말 잘 듣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무슨 일이란 말인가. 후루야가 말을 멈추고 아카이를 부르자, 아카이가 재빨리 대답을 꺼냈다. 선생님에게 주의를 받은 어린아이가 ‘저 말 잘 듣고 있죠?’ 따위의 말로 칭찬을 바라는 듯한 느낌이 반, 다 큰 어른이 어린아이의 쨍알거림에 질려 ‘이제 그만.’ 하고 주의를 주는 듯한 느낌이 반이었다. 후루야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이번에도 입술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당신은 제가 화만 내는 줄 압니까?”

“… 나에게는 대체로 그런 편이잖아.”

“…… 아, 아닌데요.”

 

찔린 구석이 있는지 후루야가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아카이는 문득 그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본인도 놀라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고 있던 검지를 멈추었다. 귀여워? 누가…. 후루야 레이가? 이 남자가 귀여워?

아카이는 스스로 느낀 감정의 정체를 알 수가 없어 숨을 부자연스럽게 삼켰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조직에서 자신은 라이로, 그는 버번이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렸을 때의 일이었다. 소나기처럼 찾아와, 정말 소나기라도 되는 듯 갑자기 그쳐버린 감정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당신 오른팔이요.”

“… 어?”

 

헛기침을 하며 조금 전의 당혹스러움을 고친 후루야가 손가락으로 아카이의 오른쪽 팔을 가리켰다. 반쯤 걷어붙인 와이셔츠 소매 사이로 일직선으로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술집의 어두운 조명 때문에 희미하긴 했어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무언가에 쓸린 것으로 보이는 상처였다. 상처의 원인을 곰곰이 떠올려보던 아카이는 곧, 그것이 옆에 앉은 남자에게서 기인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모르겠다는 눈치다.

이거, 얼마 전 자네가 화가 났을 때 권총으로 내 팔을 쓸어버려서 생긴 상처야.

… 라고 말하면 안 되겠지. 아카이가 멋쩍게 웃으며 ‘뭡니까, 그건?’ 하고 묻는 후루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애초에 후루야가 세운 작전 포인트에서 이탈한 자신이 먼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왜 포인트를 이탈했더라. 왜….

 

“됐습니다.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됩니다. 왼팔이 아니라 다행이네요.”

“삐친 거야?”

“삐……! 삐…, 뭐요?!”

 

후루야가 벌떡 일어나 양 손을 말았다. 이곳이 술집이 아니고, 주변에 사람들이 없었으면 저 주먹 중 하나가 제 명치에 꽂혔으리라. 아카이는 이미 몇 번 상대해 본 그의 묵직한 주먹을 떠올렸다.

한참을 주먹만 부들부들 떨던 후루야가 제 안에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곧 주먹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아카이는 그의 토라진 듯한 옆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귀엽다는 감상을 내놓았다. 이미 한 번 꺼낸 감상이어서인지,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곧, 그것이 이미 한 번 겪어서가 아니라 줄곧 외면해왔던 감정의 정체를 깨달아서였음을 알았다. 자신은 후루야 레이를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다. 귀엽고, 또 사랑스럽다.

아카이는 후루야가 자리에 앉아 빈 술잔에 위스키를 채우는 짧은 시간 동안, 제 마음을 정리했다. 자신은 후루야 레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그리 깨끗한 마음은 아님을 깨달았다. 잊어야 했는데 잊지 못하고, 줄곧 질질 끌고 있는 마음이었다. 아카이는 오랜만에 느낀 사랑의 감정이 미련未練에 닿아버렸음을 직감했다.

 

“당신도 그런 농담을 할 줄 아는군요.”

“술을 마셔서 그런가봐.”

“술도 취합니까?”

“자네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도 사람인데….”

“몇 잔 마시지도 않아놓고 그러니까 하는 소리죠. 이거보다 더 마실 수 있잖아요.”

 

갑자기 찾아온 감정의 초기 형태는 분명, 사랑은 아니었을 터였다. 버번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는 사랑보다는 안타까움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스카치를 볼 때와 비슷했다. 이런 조직이 아니었으면 분명 누구에게나 사랑 받으며 생활했을 남자였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탁해 보이는 이미지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날, 라이가 첫 대면부터 자신을 비웃는다 생각했는지 버번은 먼저 시비를 걸었다. 라이도 가만히 있는 성격은 아닌 터라 그대로 몇 번 받아쳐주다 보니 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중간에서 스카치가 제발 둘 다 진정 좀 하라며 말리지 않았으면 주먹싸움으로 번지는 것도 시간 문제였을 터다.

그 뒤로도 라이와 버번은 자주 충돌했고, 그것은 스카치가 하루라도 조용히 지내보자며 하소연까지 할 정도였지만 막상 작업에 들어가면 둘은 누구보다도 호흡이 잘 맞았다. 하루는 스카치가 ‘너네 전생에 연인이거나 가족이거나, 뭐 그랬던 거 아니야?’ 라며 농담 섞인 진담을 툭 던지기도 했다.

스카치가 노크로 발각되고, 자결하면서 여러 사정事情이 겹치는 바람에 버번과의 관계도 크게 변했다. 물론 한없이 부정적인 방향으로였다. 그랬으므로 소나기처럼 찾아온 감정은, 찾아왔을 때처럼 만큼이나 갑자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감정이 그친 것은 훨씬 전부터였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요즘 여러 가지 일로 바빠서, 컨디션이 좀 안 좋거든.”

“… 제가 일을 너무 많이 줘서요?”

 

일본의 공안과 미국의 FBI와 CIA, 세 정보기관의 합동 수사라고는 해도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무대가 일본이니만큼 공안이 지휘의 대부분을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아카이가 수행하는 작전의 8할 이상도 당연히 후루야가 세운 작전이었다. 그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후루야가 아카이의 바쁘다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일이 바쁘다는 것은 적당히 둘러대기 위한 핑계였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여볼까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루야가 일을 줄여주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다소 편의는 봐주겠지만 어리광을 부리게 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 매서운 점이 아카이는, 사랑스러웠다. 한 번 사랑스럽다고 시원하게 인정해버리고 나니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아니. 개인적인 일로.”

“… 아.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안 묻겠습니다.”

 

후루야는 순간 입술을 달싹였다가 도로 닫았다. 방금 전, 아카이에게 상처의 이유에 대한 설명을 거절당했기 때문인지 궁금한데도 묻지 않는 것 같았다. 아카이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고개 돌린 후루야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이건 말해줄 수 있어.”

“… 뭐, 뭔데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

“…… 예?”

“나 혼자 하는 사랑이야.”

“짝사랑을 하고 있다고요?”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웃으면 또 후루야가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으면서도 아카이는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후루야의 반응이 사뭇 달랐다.

 

“제가 상담해드릴까요?”

 

어쩐지 들떠 보이는 눈동자였다.

 


 


 



드라마나 영화를 찾아보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경찰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유독 그런 것을 좋아하는 친구 놈들이 있어 유명한 로맨스 드라마는 몇 번 본 적이 있다.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들 옆에는 꼭 단짝친구, 소꿉친구 등 여러 가지 이름의 친구가 붙어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어수선해. 저 사람은 별로 친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왜 자꾸 나오는 거야. 배우가 유명해?’

‘후루야쨩. 너는 똑똑한 애가 왜 이런 데선 젬병일까. 배우가 힘이 센데 저런 조연을 하겠어?’

‘제로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하하.’

‘자, 내 말을 잘 들어봐. 후루야.’

 

그 날, 하기와라는 후루야의 양 어깨를 잡고 로맨스 드라마의 법칙을 장장 4시간 동안이나 설명했다. 마츠다가 옆에서 혀를 끌끌 차는데도 지루해하지 않고 4시간의 강의를 완강한 데는 후루야의 범생이 기질 덕택이 컸다.

하기와라 교수님을 통해 후루야가 알게 된 사실은 연애 상담을 주고받는 사이는 친하다 못해 전생을 함께한 사이라는 것이었다. 수강생이 두 명은 있어야 강의할 맛이 나지 않겠냐는 하기와라 때문에, 마지못해 옆에서 중간까지 듣고 있던 다테가 그건 너무 극단적인 것 아니냐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말은 후루야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특히! 짝사랑을 하고 있는데 상담을 한다? 그건 다음 생에서까지 친구라는 약속이다. 알겠냐, 후루야!’

‘알겠어. 너네 누구 연애 상담 할 사람 있어?’

 

후루야가 다테, 마츠다, 하기와라 순서로 시선을 옮겼다.

 

‘짝사랑이라니…. 난 여친 있잖아.’

‘나는 그런 데 관심 없어.’

‘아. 나도 특정한 상대는 없어.’

‘잠깐. 제로?! 왜 나는 안 물어봐?!’

 

방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짝사랑의 유무를 물어봤으면서 자신에게는 질문이 돌아오지 않았음에 서운함을 느낀 모로후시가 후루야의 손목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연애 상담을 실천할 기회가 없음을 깨달은 후루야가 얼굴에 실망감을 그대로 띄우고는, 모로후시의 외침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넌 있기만 해봐.’

 

모로후시의 ‘왜!?’ 하는 외침이 방 안을 크게 울렸다. 큰 소리에 놀라 본능적으로 귀를 막아버린 마츠다가 뒤이어 ‘너네는 둘 중 누가 아빠고 자식인지 헷갈린단 말이지.’ 하며 모로후시와 후루야의 관계에 물음표를 던졌다.

 

‘중요한 건 이런 걸 물어봤다는 시점에서 제로가 우리랑 친해지고 싶었다는 거지! 걱정 마, 후루야쨩. 그런 거 안 해도 평생 친구로 지내줄 테니까!’

‘선심 쓰듯 말하지 마!’

 

하기와라가 후루야의 어깨를 뒤로 감싸 안았다.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하게 된 후루야가 심기 불편한 고양이처럼 캬악, 소리를 냈다. 어쩐지 재밌어 보이는 두 명에, 나머지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든 것은 늘 있는 패턴이었다. 고양이인 줄 알았던 후루야가 호랑이가 되고나서야 해프닝은 마무리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서 그 날, 하기와라가 쓸데없는 미사여구까지 마구 붙여가며 강의한 내용의 절반 이상이 유난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후루야는 이상하게 연애 상담이라는 말에 마음이 들뜨곤 했다.

 

“상담이라니, 무슨….”

“연애 상담이요. 제가 들어도 괜찮은 거라면, 해드리겠다는 겁니다. 아마 영양가 있는 조언은 못해드리겠지만, 듣는 건 할 수 있으니까요.”

 

후루야의 사파이어색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발광發光했다. 아카이는 제 감정이 미련일 뿐임을 알면서도 후루야의 들뜬 얼굴에 차마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정말 미련일 뿐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때의 마음을 질질 끄는 미련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소나기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상하게 시험해보고 있는 욕구가 들끓었다.

 

“그럼 들어줄래?”

“그러죠. 요즘 당신, 일도 열심히 했으니까 원한다면 아침까지 들어드리겠습니다.”

“그거 고마운걸.”

 

 



 



아카이가 짝사랑하고 있는 상대의 특징을 이것저것 들은 후루야의 첫 감상은 ‘뭐 그런 여자를 좋아한대.’ 였다.

말이 많고,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이 복잡하고, 사정은 더 복잡하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어지간히 귀찮겠구만.’ 이라는 생각부터 드는데 뒤이어진 특징은 더 가관이었다.

종합하자면 고집도 세고 삐뚤어졌다는 것이었다. 그걸 두고 아카이는 제 짝사랑 상대가 신념 있고 정의롭다는 식으로 평가했다. 후루야가 멋쩍게 웃었다. 하마터면 이미 진즉에 버린 아무로 토오루의 얼굴이 나올 뻔했다. 긴장을 풀면 그의 얼굴이 나올 것 같았다.

그의 앞에서 긴장하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후루야는 문득 아카이와 처음 얼굴을 마주했던 날을 기억했다. 코드네임은 라이, 국적은 미국이었고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자신보다 세 살이 많았다. 베르무트에게서 받은 프로필을 성의 없이 넘겨보던 버번은 결국 몇 장 되지도 않는 종이를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프로필은 무슨. 코드네임을 제외한 정보는 거짓말일 게 뻔하지 않은가. 저들이 그런 것처럼. 혹시나 하는 약간의 믿음은 라이와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 통째로 버렸다. 그의 프로필이 적힌 종이 몇 장을 쓰레기통에 처박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라이는 제가 어린애처럼 보이나본데. 그러는 라이는 늙어 보입니다. 당신 정말 20대 맞아요?’

 

버번으로 있을 때는 그런 식으로 라이의 성질을 건드리곤 했다.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이었으므로 이유는 전혀 논리적이지 못했고 상당히 억지스러웠다. 라이는 몇 번을 받아쳐주더니 나중에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굴었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아서 버번도 계속 시비를 걸곤 했다.

스카치는 영양가 없는 대화 ─주로 비아냥과 이죽거림으로 이루어졌다─ 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보고는 ‘너희 어느새 사이가 좋아진 거야.’ 하며 웃었다. 버번이 경악하며 입을 쩍 벌렸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도 말라며 스카치의 입을 단단히 막았지만 그의 감상이 틀리지 않아서 화가 났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라이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라이를 보기도 전에 버려버렸던 것들이 쓰레기통 밖으로 삐져나왔다. 불가항력이었다. 후루야에게는 그것들을 다시 버릴 힘도, 외면할 명분도, 그렇다고 인정할 용기도 없었다.

라이에 대한 감정으로 혼란스러웠던 시절, 후루야는 ‘혹시’로 시작하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만약 당신이 나와 같은 역할을 갖고 이 조직에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믿음이 단 한 번의 총성과 구멍 뚫린 심장으로 산산조각나기 전까지 후루야는 라이를 믿었다. 믿고 싶었다. 믿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짧은 시간에 온갖 기억이 다 났다. 아카이와 관련해서 가장 아픈 기억까지 회상하기를 마치자, 그 뒤는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또 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강과 바다의 경계에서 멈추어 섰다. 한 발자국을 내딛어 바다의 입구로 들어섰다. 그러자 위에서부터 흐른 강줄기가 전부 미련으로 보였다. 그 때에는 미처 미련인 줄 몰랐던 기억이 이제는 전부 미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미련이었다. 그 날, 마저 정리하지 못한 마음을 질질 끌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눈앞에서 친구가 죽었고, 그를 죽게 한 남자가 쌀쌀맞게 돌아서는 것을 두 눈에 새겼음에도 아카이를 믿었던, 믿고 싶었던, 믿게 해주기를 바랐던 마음은 말끔하게 정리되지 못했다.

아마도 그것은 믿음 이외의 마음이 방해를 하고 있는 탓이리라. 후루야가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이었다. 미련 만큼이나 버려야만 하는 마음이 자신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린다.

 

“하하. 개성이 강한 분이시네요.”

“자네라면 이쯤에서 누군지 맞출 거라고 생각했는데.”

“… 제가 아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그리고 동시에 잘 모르는 사람이야.”

“무슨 소리야, 그게. 수수께끼?”

“맞춰볼래?”

 

아카이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후루야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좋습니다. 맞추면 뭐 해줄 건데요.”

“소원 하나 들어주지. 대신 못 맞추면 자네가 내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연애 상담이 수수께기와 내기로 장르가 바뀌었지만 후루야는 소원이라는 상품에 관심을 모은 모양이었다. 아카이는 그 뒤로도 후루야를 특정할 수 있는 점을 몇 개 더 알려주었다.

후루야는 아카이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권한이 상품으로 걸린 만큼 누구보다 이 내기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카이가 주는 힌트에 적합 하는 인물이 없었다. 아카이의 힌트가 추상적이지 않음에도 그랬다.

포기를 선언하는 것은 아카이에게 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번도 그에게 이겨본 적 없으므로 이번에는 지고 싶지 않았다.

 

“아─! 포기!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맞긴 합니까? 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맞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내 소원을 말하면 되는 건가?”

“잠깐만요. 그 전에 정답 먼저 알려줘야죠. 누굽니까, 대체. 그 이상…, 아니 개성 강한 분은.”

 

무심코 이상하다고 솔직한 감상이 나올 뻔한 후루야가 말을 멈추고 다시 말을 골랐다. 아카이는 정답을 알려주는 대신 테이블 위에 걸쳐있는 후루야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란 후루야가 아카이의 손 안에서 도망치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물론 아카이는 놓아주지도, 놓치지도 않았다.

아카이에게 잡힌 손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나서야 후루야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카이의 녹색 눈동자가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어쩐지 뜨거웠다.

낯 뜨거운 공기였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가 불편해서 자유로운 손으로 넥타이를 천천히 풀었다. 아카이는 후루야가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다가 곧,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내렸다. 후루야의 손등에 아카이의 입술이 닿았다.

 

“정답은 너야, 후루야 군.”

 

말이 많고,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이 복잡하고, 사정은 더 복잡한 사람. 고집이 세고 삐뚤어진 사람. 신념 있고, 정의로운, 사람.

이 마음이 미련이든, 다른 종류의 소나기이든 상관없다. 나는 너의 그,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얼굴이 좋다. 그 얼굴이 내게만 향한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럽다. 아카이는 언젠가 이 모든 말에 소리를 입혀 후루야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문득, 그런 낯간지러운 생각이 들었다.

 

“후루야 군. 내가 무슨 소원을 말할 것 같아?”

 

아카이는 이제 감출 생각도 없이 후루야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눈앞에 두고 웃었다.

 

“어때. 이것도 맞춰볼래? 물론 이기는 쪽이….”

 

늘 그랬듯 밤은 길다. 후루야는 아카이가 원한다면 아침까지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했다. 그는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성격이 아니니 분명, 약속을 지켜줄 터였다. 어떤 약속이든.









쓰고 싶은 걸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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