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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사이드 -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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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습장 찢어 만든 제비 수십 개가 레모나 통 속으로 쏟아진다. 반장의 창백하고 야윈 손이 레모나 통을 흔든다. 누군가 더 세게 흔들어달라고 주문했다. 귀찮은 기색이 완연한 반장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불편함을 내비친 것과 달리 손은 착실하게 레모나 통 속의 제비를 뒤섞는다.


 팔월 중순. 여름의 막바지. 2학년 8반 2학기의 서두를 장식한 것은 다름 아닌 자리 선정을 위한 제비뽑기다.


 바깥은 더위가 한창이었다. 이제 끝날 법도 한데 퍽 끈질겼다. 치솟은 기온이 떨어질 줄 몰랐다. 설상가상 긴 장마의 여파로 습도까지 높다. 덕분에 천은天恩고등학교의 에어컨들은 학기 개시일부터 절찬리 가동 중이다.


 부반장이 칠판에 자리 배치표를 그렸다. 짙은 초록색 칠판 위에 흰 선들이 삐뚤빼뚤 자리를 잡는다. 작은 네모 칸마다 랜덤으로 번호가 부여됐다. 뽑은 제비에 적힌 숫자가 곧 각자의 자리가 될 것이다. 배치표가 완성되는 것을 기다린 반장이 건성으로 걸어 창가 쪽 분단 첫 자리로 갔다. 그와 동시에 교실이 삽시간에 소란해진다.


 방학동안 잘 먹고 잘 쉬어 때깔 좋아진 애들은 적당히 들떠 있다. 저마다 절친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제 차례를 기다린다. 애들의 손이 레모나 통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종이가 하나씩 줄어갔다. 나는 멍하니 레모나 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넋을 뺐다. 의미 없이 눈을 깜박이며 얌전히 대기하기를 몇 초. 레모나 통에 쏙 들어가는 손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하얗고 가는 선. 보드랍게 보이는 손가락. 손등에 옅고 커다란 점.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가히 본능이었다. 시야에 걸리는 것이 손등에서 손목, 손목에서 하복 아래로 드러난 팔뚝, 팔뚝에서 어깨, 어깨에서 담백한 목, 목에서 동글한 뒤통수로 이어졌다. 햇살 아래에서 그 애의 머리칼은 밝은 갈색처럼 보였다.


 “…….”


 레모나 통이 움직였다. 그러나 붙박힌 눈동자는 움직일 줄 몰랐다. 나는 계속해서 그 애를 바라봤다. 어떤 관성이나 습관 같았다. 그 애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 애는 반듯한 손바닥을 움직여 조용히 제비에 적인 숫자를 확인했다. 뒤통수가 궤적을 그렸다. 칠판에서 제 번호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러고는 실제 책상의 위치가 어디쯤인지를 가늠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숨이 멈췄다.


 “헉.”


 바보처럼 한 박자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당황해 아예 책상 위에 엎어져 버렸다. 어쩐지 등과 목덜미에 열이 올랐다.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렸다. 어떡해. 이상하게 여겼겠지.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다시 얼굴을 들 용기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입술을 자근자근 짓씹는 사이, 누군가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도하야. 이거 뽑아야 하는데.”


 반장이었다. 비로소 움츠렸던 상체를 폈다. 긴장한 어깨가 뻐근했다.


 “……어, 아.”


 얼빠진 채 대충 제비를 뽑았다. 찢기고 접힌 종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흐물거렸다.


 13.


 확인한 번호를 배치표에서 체크했다. 창가 쪽 세 번째 자리였다. 짝이 될 애의 번호는 8번이었다. 기계처럼 일련의 동작을 마친 후에는, 또 다시 시선이 자석처럼 한 곳으로 이끌렸다. 허공에서 부딪혔던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췄다. 그 애는 벌써 자신의 짐을 챙겨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고 있었다.


 “…….”


 황인준은 몇 번을 뽑았을까. 당연하게 그 방향으로 날아가는 생각을 막기 어려웠다.



소년 낭만 1

참 어설펐던 그 시절



 내가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그 애의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아닌 손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하얗고 마른 손. 손톱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손. 움직임이 정갈하고 고요한, 바로 그 손.


 5월, 2학년 1학기 봄 소풍이 있던 날이었다. 고속버스는 우리를 1시간 거리에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실어갔다. 아침까지만 해도 화창했던 일기日氣가 그새 바뀌어 있었다. 중간쯤 갔을 때부터 먹구름이 스멀스멀 몰려오더니 도착할 때가 되자 기어코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까무룩 잠에 빠졌던 나는 버스 옆자리에 탄 균원이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뻑뻑한 눈을 비비고 있으려니까 균원이가 일회용 우비를 건넸다. 선생님이 일인 당 하나씩 배분한 것이었다. 비가 오면 소풍을 취소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투덜대면서, 우리는 우비에 팔을 끼워 넣었다. 하얀색 반투명한 비닐이 습한 공기와 함께 피부에 찰싹 달라붙는 느낌이 불쾌했다. 작은 움직임에도 바스락거리는 소음이 끼어드는 바람에 친구들과 대화하기가 어려워, 목청을 좀 높여야 했다.


 어쨌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약 두 시간의 등산 코스였다. 동네 주민들이 산책 겸 오르곤 하는 산이었다. 당연히 길이 험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미끌거리는 돌을 밟아 넘어지는 애가 있었다. 신경이 곤두섰다. 나는 발바닥에 온 감각을 집중하고 말없이 걸었다. 


 기분이 살짝 쳐졌다. 빗방울이 우비 위에 간헐적으로 미끄러지며 투둑대는 소리를 만들었다. 물에 젖은 풀냄새가 진동했다. 비를 맞으며 하는 일탈 같은 산행에 신이 난 남자애들 몇몇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개중엔 체력과 활력을 뽐내며 가방을 몇 개씩 들고 앞장서는 애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조심하라 주의 주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우비 안으로 자꾸만 습기와 땀이 차올라 숨 쉬기가 어려웠다. 스미고 고이는 땀 때문에 땀띠가 날 것 같았다. 신발은 흙이나 자갈 위를 지나며 자꾸만 미끄러졌다. 다리가 아팠다. 발꿈치가 욱신거렸고, 허리가 저렸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더뎌졌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행렬에서 한참 뒤쳐진 후였다. 각 반마다 한둘씩 나온 낙오자들이 죄다 모여 작은 무리가 됐다. 가장 뒤쪽에는 2반 담임선생님이 힘들어하는 학생 하나를 격려하며 느릿느릿 올라오고 있었다.


 황인준도 이 무리의 일원이었다. 그 애는 가벼운 걸음으로 산을 올랐다. 호흡이 다소 거칠었지만 그뿐, 힘든 기색은 별로 없었다. 하얀 우비 덕분에 흰 피부가 더 도드라지게 밝아보였다. 그 애는 이따금씩 눈을 깨끗하게 깜박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는 튄 빗방울 몇 개가 황인준의 이마에 부딪히는 게 이상할 만큼 명백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며 그 애를 자꾸만 훔쳐봤다.


 비는 그치는 듯 아닌 듯하며 아주 느리게 잦아들었다.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진 것 같다고 느꼈을 때, 뒤따라오던 2반 담임선생님이 우비를 벗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계속된 오르막길에 지친 애들은 조금 느리게 반응했다. 바닥을 보고 걷던 고개들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다. 짙은 회색 구름이 어느 샌가 찢어져 그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드러나 있었다. 햇살이 몇 줄기 빠져나와 등산로 사이사이를 밝혔다.


 나는 우비의 모자부터 벗었다. 습기 차 있던 목덜미가 순식간에 시원해졌다. 숨통이 좀 트였다. 마침 산길 옆쪽으로 등받이가 없는 나무 벤치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애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벤치 쪽으로 가 저마다 자리를 잡았다. 모두 행렬에서 벗어난 처지였으므로 하나같이 혼자였다. 나는 가장 끝쪽 벤치로 다가가 플라스틱 똑딱이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물기 때문에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곁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흘금 상대를 확인했다. 공교롭게도 또다시 황인준이었다. 우리는 통성명이나 인사치레 없이 나란히 서서 우비를 벗었다. 벗은 우비를 아무렇게나 손 안에 뭉쳤다. 다른 애들이 우비 벗는 것을 기다리며 벤치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드디어 휴식 시간을 얻은 다리가 안도의 비명을 내지르는 듯했다. 무의식적으로 허벅지를 통통 두드렸다.


 그러는 사이, 황인준은 벗은 우비를 내가 앉은 벤치 반대쪽 끝에 펼쳤다. 단추를 잠그고, 구겨진 부분을 반듯하게 폈다. 접힌 자국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우비를 개기 시작했다. 동작이 담백하고 깔끔했다. 한 번 접을 때마다 비닐 사이 공기를 빼는 손끝이 야무졌다. 황인준의 손길에 따라 우비가 자석처럼 착착 접혔다.


 홀린 듯 황인준이 하는 모양을 바라봤다. 어떤 알 수 없는 인력이 내 시선을 그 애의 손 언저리로 이끌고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퍽 얇았다. 손톱이 바짝 깎아진 채였고. 한쪽 손등엔 몽고반점을 연상케 하는 연한 점이 있었다. 꼭 그림을 그리다 생긴 얼룩 같은 그 점은 황인준이 우비를 접고 누를 때마다 움직임에 맞춰 조금씩 꿈틀거렸다. 말없이 건조하고 아담하게 비닐을 접는 황인준에게서 문득, 어떤 향이 나는 것 같다고 인지한 바로 그 때였다. 가느다랗고 심지 곧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너도 접어줘?”


 놀랐다. 황인준이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딱딱하게 굳은 나는 대답할 생각조차 못하고 숨을 헉 삼켰다. 놀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눈을 크게 키웠다.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댔다. 공중에서 시선이 추돌했다. 그럴 리 없는 물리적 충격이 느껴지는 듯했다. 전력질주하다 벽에 부딪친 것처럼 전신이 얼얼했다.


 마주한 두 눈이 부드러운 반달 모양을 그렸다. 야위고 마른 숨결이 내 입술과 볼 언저리에 살랑살랑 불어왔다. 입꼬리가 빙그레 움직이는 것이 슬로우모션으로 보였다. 연하게 찍히는 보조개가 선연했다. 황인준은 거기 앉아 웃고 있었다.


 “하도 빤히 쳐다보길래.”

 “…….”

 “접어달라는 건가 했지.”


 대수롭지 않은 어투였다. 황인준은 돌처럼 굳어있는 나에게 구태여 대답을 종용하지는 않았다. 그저 어느새 정갈하게 접힌 우비를 플라스틱 지퍼백에 가뿐하게 집어넣을 뿐.


 “네 우비 이리 줘, 모도하.”


 황인준이 나를 호명했다. 아주 신묘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몸의 근육이 모조리 정상궤도를 벗어나는 감각이었다. 내 이름이 원래 이런 소리를 가졌었나? 남들도 내 이름을 이렇게 발음했던가? 바보처럼 의문하며 멍하니 손 안에 공처럼 뭉쳐 두었던 우비를 내밀었다. 검지 언저리에 황인준의 손끝이 스쳤다.


 황인준의 손가락은 미지근했다. 말랑하고.


 “아주 공을 만들었구나.”


 어이없는 웃음을 함께 흘리는 목소리가 사근사근했다. 짧은 순간, 나는 그 애의 웃음소리가 꼭 어린 이파리가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손바닥에 힘이 들었다. 황인준의 손끝과 접촉했던 부분을 엄지로 문질렀다. 감촉이 오래 갔다. 분명 떨어진지 오래인데 계속 닿아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고 찌릿 전기가 통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남이 제 앞에서 이유 없이 긴장하거나 말거나, 황인준은 일련의 과정을 반복했다. 잔뜩 구겨진 내 우비를 털어서 벤치 위에 펼치고, 똑딱이 단추를 잠그고, 접혔던 자국에 맞춰 포개는 단계를 차근차근 밟았다. 비닐이 마법처럼 차곡차곡 접히는 게 신기했다.


 땀은 천천히 증발했다. 스쳐가는 바람이 피부를 식혔다. 올려 묶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삐져나온 잔머리가 피부를 간질였다. 이따금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세찼다. 다른 애들이 만드는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풀 향을 머금은 바람이 한 차례 황인준을 감싼 뒤 내 쪽으로 끼쳐왔다. 쌀쌀한 숲의 냄새에 황인준의 체향이 섞였다. 아주 깨끗하고 하얀 소금에 향이 있다면 꼭 그럴 것 같은 냄새였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꼭 멈춘 것도 같았다. 나는 딸꾹질하듯 질문했다.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


 순간 황인준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고개가 들렸다. 불순물 없는 말간 눈빛이 나를 향했다. 다감하고 부드러운 시선이 눈가와 볼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무언가를 말할 듯 말듯 나긋한 입술이 달싹거린 찰나, 2반 선생님이 목소리를 높였다.


 “얘들아. 이제 슬슬 다시 출발하자!”


 동시에 고개가 돌아갔다. 황인준은 입을 도로 다물고는 다 접은 우비를 지퍼백에 넣어 내밀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황인준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쪽을 돌아봤다.


 “가자.”

 “아……, 응.”


 바보 같은 대답이었다고 자책하면서 우비를 대충 가방에 욱여넣고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이미 2반 선생님을 중심으로 집합한 무리에 합류했다. 선생님이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인원수를 셌다. 흘깃 눈치를 보며 황인준 곁에 다가가 섰다. 심상한 낯을 한 걔는 선생님에게 시선을 던져두고 있었다. 빠진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선생님이 애들을 먼저 출발시키고, 자신은 맨 뒤로 향했다.


 우리는 작은 행렬을 따라 느릿느릿 발을 옮겼다. 잠깐 쉰 덕분에 발의 피로는 많이 나아졌지만 힘든 건 똑같았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다시 다리가 아프고 어깨가 무거웠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고개가 툭 떨어졌다. 시야에 힘없는 발끝이 걸렸다. 대체 이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산행을 왜 해야 하는 건지. 속으로 툴툴대며 입을 삐죽이고 있던 그때였다.


 “너는 내 이름 몰라?”


 반 발짝 앞서고 있던 황인준이 별안간 고개를 외틀었다. 반동으로 걔의 어깨에 살짝 부딪쳤다. 얼른 손 뻗은 황인준이 내 팔뚝을 잡아 넘어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다. 아까와 엇비슷한, 간질거리기도 하고 따끔한 것 같기도 한 감각 때문에 대답의 타이밍이 조금 어긋났다.


 “……어, 황인준.”


 내 음성으로 돋아난 제 이름을 확인한 황인준이 사분사분 웃었다. 달큰한 숨결이 또 한 번 볼과 입술, 턱 언저리를 간질였다. 헛숨을 삼켰다. 목 안과 가슴께까지 간지럼이 옮았다. 꼭 그 애의 웃음을 내가 삼킨 것 같았다. 팔뚝을 잡았던 손바닥이 떨어졌다.


 나는 아찔한 아쉬움을 느꼈다.


 “너도 알고 있네, 내 이름.”

 “……아.”

 “안 넘어지게 조심해.”

 “응……. 고마워.”

 “가자, 모도하.”


 어떤 것보다 익숙하고 낯선 이름이 덧붙었다. 기어코 얼굴로 뜨끈한 열이 잔뜩 몰렸다. 그 후로 나는 종종, 아니 몹시 자주 황인준을 훔쳐봤다. 자연히 그렇게 됐다. 그 애는 자석처럼 내 시선을 이끌었다. 수업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점심시간이나 조례 시간, 체육 시간이나 청소 시간에도.


 등하교를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걔가 있는지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 습관도 생겼다. 간혹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타게 되는 날을 아주 운이 좋은 하루로 여기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 황인준이 우산을 챙겼을지 걱정하게 됐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그 애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떠올려보게 됐다. 어떤 상황을 직면할 때, 황인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가정하는 게 버릇이 됐다.


 황인준에 대해 궁금한 게 아주 많아졌다.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플레이리스트엔 어떤 가수의 노래가 가장 많은지. 누구와 가장 친하고, 누구와 가장 친하지 않은지. 어떤 날씨와 어떤 책에 애정을 느끼는지. 버스와 지하철 중 어떤 교통수단을 선호하는지. 어떤 과목에 제일 흥미를 갖고 있는지.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지. 먹지 않는 반찬은 어떤 것인지. 훔쳐보고 의식했다. 관찰하고 망상했다. 온 감각을 동원했다. 걔가 흘리는 말들에 아닌 척 귀 기울였다.


 가끔은 스스로가 우스웠다. 말 한 마디 걸 용기는 없으면서 뒤에서 이러고 있는 게 음침하다 자각했다. 그러면서도 황인준에 대한 생각과 관심을 자제할 수 없다는 데에서 자괴감도 들었다.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겉잡기 힘들었다. 어쩌다 황인준이 웃는 모습이라도 보면 다시금 미묘하고 아찔해지는 감정을 막을 길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막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황인준은 아주 연한 노란색의 반팔티를 자주 입었다. 그 애의 천으로 된 필통도 꼭 같은 색이었다. 아마 선호하는 색인 듯했다. 황인준은 선이 얇고 부드러운 외모와는 반전되게, 성격이 대범하고 호방했다. 하지만 거칠지는 않았다. 목소리가 연하고 조곤조곤했다. 누가 어떤 장난을 걸어도 웃으며 받아칠 줄 알았고, 간혹 도가 지나칠 정도로 짓궂은 농담을 하는 녀석들에겐 철저하게 선을 긋기도 했다.


 액세서리는 즐기지 않는 것 같았다. 피어싱 뚫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반을 휩쓸었을 때도, 황인준은 그 흐름에 편승하지 않은 극소수의 남자애 중 한 명이었다. 그 애가 몸에 차고 다니는 건 손목시계가 유일했다. 까만 시계판에 금색 시곗바늘이 달린 아날로그 시계였다. 줄은 까만색 가죽이었다. 손목이 얇은 편이라 그 시계는 자주 휙휙 돌아갔다. 황인준은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손목시계를 반쯤 돌리는 습관이 있었다.


 또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등교했다. 그런 날에 황인준은 늘 메는 백팩 대신 크로스백을 메고 왔다. 운이 좋을 때는 타이밍이 맞아서, 자전거 거치대에 잠금쇠를 걸어두고 올라오는 황인준을 목격할 때도 있었다. 그런 아침에는 세네 발짝 쯤 뒤에서 황인준이 밟은 계단을 똑같이 밟으며 따라가곤 했다.


 먹물에 물드는 화선지였다. 빗물에 젖는 바짓단 같았다. 느리게 구르는 눈덩이었다. 천천히 스며들었고 잔뜩 배어들었으며 분명하게 존재감을 키웠다. 감정을 쉽게 명명하지 못했다. 처음이었고 어려웠다. 난해했다.


 그러니까 내가 황인준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건.


 어느 날 자정에는 알 수 없는 용기가 샘솟았다. 내일은 기어코 인사를 건네 보자고 생각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험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았을 때 드는 기묘한 자신감 같은 게 부풀었다.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황인준에게 말 거는 내 모습이 손쉽게 상상됐다. 입안으로 두 글자를 무던히 굴렸다.


 안녕. 안녕. 안녕. 황인준. 안녕.


 그러나 다음 날이 되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시야에 황인준이 잡히면 죄다 백지가 됐다. 혀는 돌처럼 굳고 눈꺼풀을 깜빡일 수 없었으며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석고상처럼 우뚝 멈췄다. 어버버하다 기회를 날려 보냈다. 눈이라도 마주치는 날엔 못 본 걸 본 사람처럼 부리나케 고개를 돌렸다. 황인준을 그렇게 훔쳐보면서도, 한 순간도 그 애를 제대로 볼 수 없는 날들이 많아졌다.


 바보, 백치, 얼뜨기, 멍청이…….


 봄은 짧았고 1학기는 더 그랬다. 소풍 이후 황인준에게 한 마디도 더 걸지 못한 채 학기가 끝났다. 방학은 길고 지루했다. 매일 같은 하루하루가 느릿느릿 지났다. 평일 오후에는 학원 단기반을 신청해 다녔다. 때로는 친구들과 시간 내 만나기도 했지만 신나거나 특별한 일이라곤 전혀 없었다.


 나는 이따금 황인준을 떠올렸다. 아니, 실은 자주 그랬다. 심심하면 황인준의 SNS 프로필사진을 확인했다. 얼굴도, 손도, 실루엣도 아닌 캐릭터 인형이 차지한 정사각형 네모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그걸 눌러 말을 건네 볼 용기는 아직까지도 가지지 못한 채로.


 그러다보니 장마가 시작됐다. 시기가 예년보다 일렀다. 폭우가 이어졌다. 양동이로 퍼붓는 것처럼 기세가 세찼다. 그치려다가도 다시 내리고, 잦아들었다가도 다시 거세지기를 반복했다. 습함과 고온의 환상적인 콜라보가 이어졌다. 땀이 한 번 나면 잘 식지 않았다.


엄마 >
집에 두부 없지?
엄마 퇴근하기 전에 한 모만 사다 놓을 수 있어?
된장찌개 하려고.


 엄마에게서 문자가 도착한 것은 오후 네 시 무렵이었다. 학원에서 돌아와 선풍기 바람을 쐬며 꾸벅꾸벅 졸던 나는 휴대폰 알람이 울리는 바람에 깼다. 멍한 정신으로 엄마의 지령을 확인하고 성긴 움직임으로 옷을 챙겨 입었다. 하품이 절로 나왔다. 눈꼬리에 맺히는 눈물을 손가락 등으로 훔치며 거실로 나가 창문을 열었다. 비는 어느 새 그쳐 있었다. 바닥이 여전히 푹 젖어 있는 걸로 봐서는 비가 멎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다. 하늘엔 먹구름이 여전했다. 곧 한바탕 퍼부을 것 같기도 하고, 한참동안 비가 안 올 것 같기도 했다. 우산을 챙길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빈손으로 집을 나섰다.


 바깥은 후더웠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턱 막혔다. 풀어서 내린 머리칼이 살에 찰싹 달라붙어 불쾌했다. 손목에 걸어뒀던 머리끈으로 대충 머리를 모아 묶었다. 머리 타래가 걸음마다 대롱거렸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마트는 동네 마트 치고는 좀 큰 규모였다. 두부 한 모를 챙기고, 심심한 마음에 매장 안을 둘러보며 충동적으로 과자 몇 개와 사탕,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골라 담았다. 선반에 진열된 온갖 차 종류와 이국적인 소스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얼마간 흘려보냈던 것 같다. 결국 애당초 계획과는 다르게 두부 한 모 대신 커다란 비닐봉투를 한 손에 쥐고 마트를 나섰을 때, 거리는 과격한 장대비로 가득 차 있었다.


 “아…….”


 낭패였다. 허탈감이 이어졌다.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머릿속이 하얬다. 어떡하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두커니 서 있자니 마음이 좀 외로워졌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의미 없이 응시했다. 집은 택시를 잡아타기엔 너무 가까웠고 그렇다고 그냥 비를 맞고 가기엔 멀었다. 우산 없이 뛰어갔다간 빗물로 샤워할 게 뻔했다.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는 두 시간이 남아 있었고, 아빠 또한 마찬가지였다. 방법이 없었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마트 입구를 벗어나 구석진 곳에 틀어박혔다. 주차하지 못하도록 세워둔 안전 바에 엉덩이를 걸쳤다. 비닐봉투는 대충 바닥에 내려놨다. 힘없는 비닐이 고정되지 못하고 흐늘거렸지만 그대로 방치했다. 그것까지 신경 쓸 만한 여력이 없었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그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끊임없는 빗소리는 계속해서 듣다 보니 아득한 백색소음처럼 들렸다. 이따금 차가 쌩쌩 달리는 소리가 귀를 찢었다.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는 듯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모도하?”


 바닥을 보고 있던 시선을 화들짝 들었다. 시야에 거짓말처럼 황인준이 들어왔다. 그 애는 아이보리색의 장우산을 쓰고 있었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였다.


 “여기서 뭐해?”


 거짓말 같은 타이밍이었다. 영화 속 한 장면이래도 믿을 것 같았다. 이게 기적처럼 일어난 행운인지, 아니면 나의 속된 망상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아서 대답의 타이밍을 살짝 놓치고 말았다.


 “아……. 나 우산이, 없어서.”


 더듬더듬 읊은 답변에 황인준은 말간 얼굴로 나를 한 번, 내 옆에 내려놓은 비닐봉지를 한 번, 그리고 내 뒤쪽 마트를 한 번 일갈했다. 그것으로 사태파악 끝낸 듯한 황인준이 곧 우산을 접으며 내 옆으로 불쑥 들어왔다. 황인준의 존재감과 함께 그 애의 빳빳하고 깨끗한 체향이 훅 밀려들었다. 우산을 잠깐 세워둔 그 애가 귀에서 이어폰을 뽑고 돌돌 말아 정리하는 동안 나는 발작하듯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부단히 노력했다. 나도 모르게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호흡이 떨렸다. 목 안쪽이 간질거렸다.


 “심부름?”


 음성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잔뜩 긴장하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 근육이 굳어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재채기를 참는 느낌으로 나는 간신히 물었다.


 “너는?”


 쇄쇄한 소리가 났다. 빗소리 사이로 음성이 흩어졌다. 황인준이 내 쪽으로 고개를 불쑥 숙였다. 걔 머리칼이 내 볼에 스쳤다. 놀라서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응, 뭐라고? 못 들었어.”

 “……아.”

 “미안. 다시 말해줘.”


 너는 어디 가는 길이었냐고. 방금…… 그렇게 물어봤어.


 백만 볼트에 감전되면 이런 기분일까. 내가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고 혓바닥을 움직였다. 내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침이 말랐다. 고개가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산책 나왔어.”

 “…….”

 “비오는 거 좋아해서.”

 “…….”

 “좀 이상한가.”


 오렌지처럼 웃은 황인준이 객쩍은 표정으로 뒷목을 매만졌다. 아니라고, 오히려 특별하다고 대답을 했어야 하는데. 키조개처럼 딱 다물린 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빗소리도 좋고, 발끝 젖는 거랑, 우산 쓰는 것도 좋고…….”

 “…….”

 “미안. 나만 너무 떠들었나 보다.”


 아니야…….


 대답하는 목소리가 개미만했다. 진심은 그게 아닌데. 평생 떠들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마음 같아선 내 고막 평생 사용권을 너한테 강매시키고 싶은 심정이라고.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날 흘깃 일별한 황인준의 웃음이 푸스스 퍼졌다.


 “너 어디 살아?”

 “……나? 어, 현대아파트.”

 “그냥 뛰어가긴 멀겠네, 그럼.”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며 또 나를 한 번, 밑에 내려 둔 비닐봉지를 한 번 보고.


 “데려다줄게.”

 “어? 아, 아니야…… 그냥 그칠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데.”

 “내 우산 커.”


 은근하게 웃으며 말하는 태가 부드러웠다. 강요도 부탁도 아닌 것이 담백했다. 나는 수락도 거절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근데 너 뭐 샀어? 잠깐 구경해도 돼?”

 “아…… 응.”


 흰 손등이 시야를 가로지른다. 그 애 손아귀에 잡힌 비닐봉투가 부스럭거리는 소음을 유발했다. 두 손에 봉투 손잡이를 하나씩 나눠 들고 안쪽을 들여다보는 눈빛이 반짝였다.


 “너 수박바 좋아해? 아이스크림이 죄다 수박바네.”

 “어…….”


 근데 황인준 너는 무슨 아이스크림을 좋아해? 물을까, 말까. 물어도 될 거 같은 타이밍인데. 물어도 괜찮을까. 이상하진 않을까. 짧은 질문에 담긴 내 긴 사심을 눈치채면 어떡하지. 고민이 길어진다. 끝내 묻지 못한다.


 바보. 천치. 멍청이…….


 신발 밑창으로 애꿎은 바닥만 벅벅 긁었다. 다감한 눈빛으로 봉투 안의 것을 훑어 본 황인준은 그대로 오른손에 손잡이를 모아 쥐었다. 그리고는 왼손으로 세워 둔 우산을 집는다. 딸깍, 하고 버튼을 누른다. 팡, 하고 우산이 펼쳐졌다.


 “이제 가자.”


 그제야 내용물을 구경하겠다는 그 애의 말이, 그저 짐을 들어주기 위한 핑계였음을 깨닫는다. 짓궂은 요정 한 마리를 집어삼킨 것 같다. 장난을 좋아하는 이물질이 가슴팍 안쪽을 잔뜩 어지럽히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소리 없이 걸었다. 방수 천에 빗방울이 투신하는 소리가 까마득했다. 텅 비어버린 손아귀가 어색해 앞으로 모아 맞잡았다. 바닥에다 시선을 처박고 걸었다. 나의 낡은 샌들과 황인준의 단정한 운동화가 나란히 지면을 딛는 모습을 집요하게 눈으로 쫓았다.


 고요한 우산 아래로 황인준이 작게 들이쉬고 뱉는 숨결이 생경하게 들렸다. 어깨와 어깨가 스칠 듯이 가까웠다. 쾅. 쾅. 쾅. 귓가가 시끄럽게 요동쳤다. 눈앞도. 하물며 발밑까지도. 내가 잘 걷고 있는 건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어지럽고 아찔했다. 다리가 저렸다. 발바닥이 둥글게 부푼 것 같았다. 정신이 요란했다. 지금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현실일 것이다. 꿈이라면 전해지는 황인준의 미지근한 체온이 이렇게 생생할 리가 없으니까. 소금 같은 신기한 향이 풍겨올 리 없으니까. 바람 같은 간지러운 숨소리가 이렇게까지 느껴질 리 없으니까. 오감이 곤두섰다. 귓등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뒷목이 뻣뻣해졌다.


 “무슨…… 무슨 노래 좋아해?”


 별안간 튀어나온 질문은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응?”


 빗소리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황인준이 고개를 내 쪽으로 꺾었다. 그 애 역시도 내가 갑자기 말을 걸 줄은 몰랐던 듯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질문해 놓고 도리어 더 당혹한 나는 더듬댔다.


 “아, 아. 그, 게 아니라. 아까 노래 듣고 있었던 거 같아서. 그러니까 나 만나기 전에. 무슨, 무슨 노래 듣고 있었냐고 물어보려고 했어. 좋아하는 노래를 물으려던 게 아니라…… 말이 헛 나왔어.”


 사고보다 혓바닥이 더 빠르게 질주했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이 쏟아졌다. 카메라 울렁증 있는 어설픈 방송MC처럼 멘트가 중구난방이었다.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절망스러웠다. 목 안이 뜨거워졌다.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그런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황인준이 작게 미소지었다.


 “뭘 그렇게 당황해.”

 “…….”

 “나 프롬 노래 듣고 있었거든. 알아?”


 살면서 프롬의 노래 한 곡 들어보지 않고 뭘 했을까, 나는. 스스로를 힐난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몰라. 미안.”

 “미안할 일이 전혀 아닌데.”

 “그게…….”

 “한번 들어볼래?”


 산뜻하게 권유하며 황인준이 발걸음을 멈췄다.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내 쪽으로 우산대를 살짝 들이밀었다. 잠시 잡아달라고 부탁한 후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과 이어폰을 꺼냈다. 돌돌 감았던 것을 능숙하게 풀고, 한쪽을 자신의 귀에 꽂는다. 일련의 동작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잠깐만.”


 그리고 난데없이 미온의 피부가 귓바퀴를 스쳤다. 차가운 이어폰이 귀에 꽂혔다. 생경한 감촉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덩달아 놀란 황인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안. 놀랐어?”


 이어폰을 나눠 낀 황인준이 살그머니 웃었다. 나직한 떨림이 이어폰 줄을 타고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음악이 재생됐다. 통통 튀는 짧은 전주 뒤에 곧바로 약간은 허스키한 보컬이 따라붙었다. 황인준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다시 욱여넣었다. 부드러운 연속 동작으로 내 손에 들린 우산을 가져갔다. 황인준의 손바닥이 내 손가락 위를 살짝 지나쳤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찰박대는 빗물이 흘러갔다.


언제부터였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 앨 생각하면 웃음이 나와
가끔 날 보며 씩 웃는
그 애를 마주보면
아찔한 기분에 어지러워져


 밝고 청아한 음악과 빗소리가 조화로웠다. 나는 걸음마다 나와 황인준을 잇는 이어폰이 달랑거리는 것을 깊게 체감하며 조심조심 움직였다. 저 멀리로 내가 사는 아파트가 보였다.


그 애가 웃는 게 좋아
햇살 같아서 난 좋아


 청명한 멜로디와 막막한 빗소리. 우산 안쪽으로 잦아드는 우리의 숨소리와 신발 밑창이 젖은 바닥을 치는 찰바닥 소리. 미지근한 온기와 습도. 이따금 인도 옆을 빠르게 지나치는 차들이 유발하는 소음. 우산 아래로 들이치는 야트막한 바람. 흔들리는 머리칼. 은은하게 섞이는 우리의 체향.


그 애의 향기가 좋아
깨끗한 비누향기가


 텅 빈 세상에 단 둘만 남은 것 같은 기막힌 착각이 일었다. 이상한 용기가 고개를 빼꼼 들었다. 잔뜩 긴장해 있던 근육이 얼핏 풀리는 것 같았다. 어째 기분이 고무됐다. 뭔가 알 수 없는 충동이 등을 떠밀었다.


 “……하나도 안 이상해.”


 아파트 입구가 가까웠다. 프롬의 노래가 끝나가고 있었다.


 “응?”

 “비올 때 산책하는 거…… 하나도 안 이상하다고. 오히려…….”

 “…….”

 “낭만적인 거 같아.”

 “…….”

 “아까부터 이 말이 하고 싶었어.”


 집 앞에 도착했다. 발걸음이 멈췄다. 노래의 재생 시간이 끝나, 다음 트랙으로 넘어갔다. 나는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뺐다. 마법 같은 노래가 끝났다. 충동적인 용기도 효력을 다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과 귓가로 열이 몰리는 거 같았다. 구태여 거울을 보지 않아도 새빨갛게 익었을 게 눈에 선했다. 황인준 손아귀에서 비닐봉투를 빼앗듯 낚아채서 우산 밑을 벗어났다. 아파트 정문으로 직진했다. 짧은 찰나, 정수리와 어깨 위로 빗방울 몇 개가 튀었다.


 “그, 그, 그럼 잘 가.”


 그 애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손을 흔들었다. 쏟아지는 비 저 너머에서, 황인준은 언뜻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모도하.”


 귓가가 화끈해졌다.


 “개학날 보자.”

 “…….”

 “안녕.”


 어깨에 우산대를 걸치고 내가 했던 것처럼 손바닥을 펼쳐 살랑살랑 흔든 황인준은 기울였던 우산을 바로하며 뒤를 돌았다. 나는 지박령처럼 자리에 못 박혀 멀어지는 황인준의 뒷모습을 보고 또 봤다.


모도하.
개학날 보자.
안녕.


 황인준이 던지고 간 세 마디를 주문처럼 읊조리면서. 어떻게 그렇게 평범한 낱말들을 저렇게 유일하고 특별하게 할 수 있는지 감탄하면서. 비닐봉투 속 수박바가 질퍽 녹을 때까지. 어렴풋한 시야에 잔뜩 젖은 황인준의 오른쪽 어깨가 선연했다. 이상했다. 노래는 그친 지 오래인데. 아까 들었던 노랫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그 애가 웃는 게 좋아
햇살 같아서 난 좋아


 심장에 블루투스 스피커가 연결된 것처럼, 가사가 명치깨부터 두근두근 울러퍼졌다.


그 애의 향기가 좋아
깨끗한 비누 향기가*


*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회상에서 퍼뜩 깨어났다. 비가 내리던 여름 방학의 복판에서 2학기 개학일로 회귀했다. 책걸상이 교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자리 제비뽑기가 끝나고 대대적인 책걸상 재배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었다. 진작 창가자리로 옮겨온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애들을 관망하며 의자에 늘어졌다. 친한 애들끼리 붙어 신 나게 떠드는 데가 있는가 하면 제각각 책상에 앉아 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곳도 있었다.


 창밖에서 내리쬐는 햇발이 강렬했다. 바늘처럼 찌르는 빛 때문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손으로 그늘을 만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엷은 연녹색의 커튼을 치기 위해서였다. 까칠한 감촉의 천을 움켜쥐고 창을 반쯤 가렸을까. 누군가 다가와 내 책상 옆에 자기 것을 붙였다. 그러고도 그 애는 자리에 착석하지 않고 잠깐 서서 내가 하는 냥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닿아오는 시선을 느끼며 커튼을 다 치고 뒤 돌았다.


 황인준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웃어보였다.


 “모도하.”


 분명히 햇빛은 커튼으로 다 가렸는데.


 “우리 짝이다.”


 태양이 저 애만 비췄다. 황인준은 마치 핀 조명 받은 주연처럼 반짝거렸다.


 “한 학기 동안 잘 부탁해.”


 바야흐로 내 인생 가장 떨리는 2학기의 시작이었다.

 

 





*프롬, 좋아해,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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