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디페스타에서 발간했던 토마나라《나의 행복을 소개합니다.》 웹공개합니다.

당시 구입하고 읽어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미카도시의 겨울은 한없이 차가웠다. 이제는 텅 빈 방위구역 건물 사이로 바람이 불면 언제나 괴기한 소리가 근방에 울려 퍼졌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리는 토마 이사미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남이 들으면 취향 한 번 이상하다는 말이 따라오기도 했지만 어찌 됐든 그에겐 상관없었다. 본부와 집을 오가는 그 길은 토마에게 묘한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진즉에 해가 저문 하늘 아래, 불빛이라곤 한 줌 없는 공간에는 달빛을 받은 두 사람의 그림자가 아스팔트 바닥 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는 제 옆의 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추위를 잘 타는지 나라사카의 콧잔등이며 귀는 벌써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인중까지 푹 덮은 감색 목도리는 지난겨울 자신이 선물한 것이었다. 그 해 나라사카가 질리도록 하고 다닌 목도리는 벌써 그 끝이 해지고 군데군데 보풀이 일어나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선물한 입장에서는 매일같이 꼭꼭 매고 다니는 모습이 뿌듯하기도 했지만, 역 근처 노점에서 헐값에 산 탓인지 형편없는 내구성은, 역시 선물한 토마의 입장에서는 다소 민망하게 느껴졌다. 조만간 나라사카에게 질 좋은 목도리를 다시 선물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 토마의 갑작스러운 한숨에 옆을 나란히 걷던 나라사카는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얼굴 위로 칭칭 두른 목도리를 턱밑까지 내리자 하얗게 언 입김이 허공에 스며들었다. 커다란 눈동자를 깜빡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의 모습에 토마는 헛웃음을 지었다. 별로, 아무것도. 그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나라사카의 손을 꼭 붙잡았다. 겨울마다 부르트는 제 손과는 달리 나라사카의 손은 아직 어린 소년처럼 부드러웠다. 평소 핸드크림을 챙겨 바르는 것도 아니면서. 아예 깍지까지 끼는 토마의 행동에 나라사카는 말없이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항상 그랬다. 거칠거칠하고 투박한 손이기에 뿌리칠 법도 한데 나라사카는 그런 일 없이 토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제일 처음 이 손을 잡았을 때와 어느 것 하나 달라진 게 없었다. 그렇기에 토마는 언제든지 나라사카의 손을 먼저 잡을 수 있었다. 계속 이렇게 잡고 있으면 좋을 텐데. 멀지 않은 도착지를 생각하며 토마는 벌써부터 아쉬움이 밀려왔다. 매일같이 데려다주는 길이지만 헤어지는 골목은 언제나 쓸쓸했다. 차라리 같이 살았으면 좋겠네. 그런 토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라사카의 보폭은 일부러 느릿하게 걷는 토마보다 컸다.


한참을 걸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넘쳐나는 생각으로 인해 오늘따라 유달리 조용해진 토마 탓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평소보다 더욱 멀게 느껴졌다. 이런 고요한 분위기는 두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토마의 조용한 모습이 나라사카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언제나의 그라면 오늘 있었던 일이며 시시콜콜한 농담을 질리지도 않고 던질 테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쯤 제 생각으로 가득할 토마의 머릿속을 모르는 나라사카는 잠잠한 그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 토마 씨도 이제 퇴근길이 지칠 나이가 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라사카는 구태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란히 걷던 토마가 발걸음을 멈춘 건 어느덧 나라사카네 집이 시야 한구석에 보일 때쯤이었다. 아무 말 없이 멈춰선 그의 행동에 같이 걸음을 맞추던 나라사카 역시 그대로 멈추었다. 토마 씨? 몇 걸음 앞선 나라사카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내 꾹 다물고 있던 토마의 입술이 트였다.


“나라사카.”


자신을 부르는 진지한 목소리에 나라사카는 멀뚱히 서서 토마를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는 듯싶던 그는 곧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이 살래?”



멋쩍게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내놓은 토마의 말은 나라사카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순간 일렁이는 나라사카의 녹색 눈동자에는 적지 않은 동요의 기색이 묻어져 나왔다. 갑자기 이런 말 하면 아무리 나라사카라도 당황하겠지…. 솔직히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긴 해도 실제로 입 밖으로 꺼내기엔 다소 힘든 제안이었다. 당장 같이 살자고 해도 온 가족이 한 집에 사는 나라사카의 입장에서는 부모님의 허락도 필요할 테고, 여러모로 어려운 부분이 많을 터였다. 역시 말할 타이밍을 잘못 잡았나 생각하던 토마는 금세 꼭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나라사카를 느꼈다. 조금 전과 달리 꽤 안정된 듯 평소처럼 차분해진 그의 눈동자는 토마만을 시야에 담았다.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나라사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보다 붉어진 귓바퀴의 이유가 추위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다른 까닭에서인지, 토마는 물어보지 않았다.




딩동- 간결한 초인종 소리는 스피커를 타고 집안에 울려 퍼졌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방문객에 토마는 덜 깬 잠을 억지로 몰아내며 현관문 앞으로 비척비척 걸어나갔다.


“택배입니다!”


문을 열자 들리는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그의 앞에 보인 건 커다란 상자들이었다. 최근엔 통신판매로 뭔가를 산 기억은 없는데…. 본가에서 뭐라도 보낸 건가? 크게 하품을 한 그는 택배원과 상자 더미를 여러 번 번갈아 보았다. 그의 의문에 대한 답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토마의 얼굴 앞으로 택배원은 운송장을 내밀었다. 받는 사람 토마 이사미, 보내는 사람 나라사카 토오루. 한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이름에 토마는 그제야 떠올린 듯 아직 졸음이 남아있는 눈가를 비비며 운송장 종이를 받아들었다. 보내는 사람, 나라사카인가.


‘옷이랑 무거운 물건은 택배로 보낼 테니까 부탁해.’


분명 엊그제 그렇게 말했었지. 지난날의 나라사카 목소리가 토마의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한 사람 몫이라고 해도 일단은 이삿짐이다 보니 그 양은 혼자 옮기기엔 꽤 힘겨워 보였다. 그나마 여기가 2층이라 다행이지, 겨울인데도 팔을 한껏 걷어붙인 택배원을 보며 토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 도장이나 싸인 부탁드려요.”

“네네.”


현관 신발장 위의 볼펜을 집어 든 토마는 가볍게 제 이름을 흘려 썼다. 운송장을 받아들인 택배원은 맨 밑에 붙어있던 종이를 떼어 토마에게 넘기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이걸 언제 다 정리하나. 마지막 상자까지 집안으로 옮긴 토마는 뻐근해진 어깨를 풀기 위해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 순간 뚜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토마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나왔다. 우와- 앞날 창창한 20대의 허리에서 날 소리냐, 이게? 아직 많이 써보지도 못했는데…. 진심으로 서글픈 표정으로 허리를 통통 두드리던 그는 대충 거실 한구석에 몰아넣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라사카가 오늘 학교 끝나고 오기로 했던가? 그가 몇 시쯤에 집에 도착할지 머릿속으로 가늠하던 토마는 금세 귀찮아졌는지 고개를 저었다. 올 때 되면 알아서 오겠지. 여기 한두 번 와본 것도 아니고. 다 드러난 배를 긁적이며 토마는 크게 하품을 했다. 그래도 일단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어느 정도 정리는 해두는 게 좋으려나? 그는 귀찮은 듯 털레털레 걸으며 집안을 빙 둘러보았다.


그의 생각보다 집안의 상태는 처참했다. 거실 테이블에는 전날 밤 마신 것 같은 맥주캔이 찌그러져 있었고 귀찮다고 벗어 던진 양말은 다른 한 짝의 행방이 묘연한 채 저 홀로 소파 위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매주 사보던 만화 잡지는 벌써 몇 권째 쌓여 방 한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게다가 토마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만화 잡지는 지난번 나라사카가 들렀을 때도 지적했던 부분이었다.―매일 분주하게 리젠트를 세팅하던 책상 위는 스프레이며 왁스며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대충 둘러봤다고는 해도 생각보다 심각한 청결 상태에 토마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나마 욕실과 주방이 깔끔하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였다. 그래도 평소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겨울이라 움직이기 귀찮다는 걸 핑계로 나태하게 보냈던 생활이 지금에서야 후회스러웠다.


“그 녀석, 오후쯤에 오겠지?”


토마는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오전 10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 지금부터 청소한다면 나라사카가 오기 전까지는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양팔을 걷어낸 그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그래도 집 청소하기 전에 내 얼굴부터 닦아야지.




나라사카가 작은 캐리어를 이끌고 토마네 집 초인종을 누른 건 아직 해가 저물기 훨씬 전이었다. 이제 막 분리수거할 쓰레기를 모아 베란다에 내놓던 토마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일찍 온 것 같지만 대충 정리는 됐으니까 괜찮겠지. 마지막으로 집안을 쭉 훑어본 그는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리기 전에 얼른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일찍 왔네? 그렇게 설렜어?”

“……그렇다고 해두지.”

“웬일로 부정을 안 하신데?”


토마의 농담에도 불구하고―반쯤은 진심이었지만―덤덤한 나라사카의 표정에 토마는 큭큭거리며 그의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그에 나라사카 역시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곤 그의 뒤를 따라 실내로 들어섰다. 목에 칭칭 두른 목도리를 푸르며 나라사카는 집안을 쭉 둘러보았다. 토마가 홀로서기를 시작한 이후로 나라사카가 이곳에 오는 일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본격적으로 함께 산다고 생각하니 토마의 말처럼 설렘이 앞선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면 평소 왔을 때보단 좀 더 집이 깔끔해진 것 같기도 하고. 티는 안 나지만 토마 나름대로 자신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들뜬 기분이 들었다. 잠시 멍하니 거실 앞에 서 있는 나라사카의 모습에 벽 한구석에 캐리어를 세워두던 토마가 그의 얼굴 앞에서 손바닥을 붕붕 휘저어 보였다.


“어~이, 나라사카~?”

“……어?”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처음 와본 것도 아니고.”


토마는 장난스레 웃으며 나라사카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몇 번 헤집자 손가락 사이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쯤 되면 그만하라면서 잔소리가 날아올 법도 한데. 유달리 조용한 나라사카를 토마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진짜 긴장이라도 한 거야?”

“그런 이야기는 됐고, 짐 정리할 거니까 도와줘.”


풉, 하고 터진 토마의 웃음에 나라사카는 그제야 인상을 구기며 그의 손을 멀리했다. 그래도 부정은 안 하는구나- 실제로 말한다면 팔이라도 꼬집힐 것 같지만. 계속해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토마는 택배 상자를 가리켰다.


“아까 택배 잔뜩 왔더라. 뭐가 그렇게 많아? 칫솔이랑 몸만 챙기면 될 걸.”

“입을 옷이 없잖아. 하룻밤 자고 가는 것도 아니고…….”

“내 거 입으면 되지. 팬티도 잔뜩 있다고?”

“토마 씨 속옷은 아저씨 감성에서 벗어나지 못 하잖아.”

“어이,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지?”


꽤 상처 받는다고? 토마는 헛웃음을 지으며 뒷목을 긁적였다. 항상 그렇지만 표정변화가 크지 않은 나라사카의 농담과 진담은 구별하기 힘든 편이었다. 그나마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토마 앞에서는 남들보단 표정이 풍부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오랜 경험에 따르자면 지금 건 농담이 조금 섞였지만 반 이상은 진심이었다. 그걸 알아챈 토마의 웃음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래도 나름 멋 부린다는 생각에 항상 고심해서 고르는 건데 그 결과가 아저씨 감성이라니. 아무리 나라사카라고 해도 이런 돌직구는 솔직히 너무했다. 가뜩이나 요즘 관절마다 쑤시고 안 아픈 곳이 없는데. 하지만 애써 따지지는 않았다. 계속 그쪽 이야기로 끌고 가다간 나라사카의 솔직한 악담을 곧이곧대로 들을 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해지기 전에는 정리 끝내야지. 옷장이랑 서랍장은 반씩 비워뒀으니까 옷이랑 물건은 대충 거기에 집어넣으면 되고. 많이 와봤으니까 따로 물어볼 건 없지?”

“잠은 어디에서-”

“당연히 한 침대지.”


나라사카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토마가 선수를 쳐 대답했다. 당연한 걸 뭘 묻고 그래? 라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나라사카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 몇 년 넘게 사귀었는데다 어차피 볼 거 못 볼 거 전부 본 사이니까 한 침대에서 자는 게 당연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자신이 물어보고도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표정을 보니 불만은 없는 것 같군.”


토마 역시 그런 나라사카의 생각을 읽었는지 으스대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민망해서 말 돌리기 급급했던 사람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꾹 삼키며 나라사카는 외투를 벗어 소파에 걸쳤다. 시시콜콜한 말장난은 나중으로 밀어도 상관없다. 우선은 이 짐들부터 어떻게 해야지.




“나라사카-”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토마가 그의 머리 위로 턱을 얹었다. 나라사카가 상자 더미 앞에 앉은 지 벌써 한 시간도 넘게 지났건만,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정리만 하는 그의 행동에 혼자 빈둥거리던 토마도 어지간히 심심했던 모양이다. 가까이 붙어 앉아선 자신의 양 어깨위로 팔을 쭉 걸친 토마 덕분에 나라사카는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 심심한데- 토마가 머리를 도리질 치자 나라사카의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에 따라 그의 턱을 간질였다.


“바쁘잖아.”

“내가 뭐 도와줄 건 없고?”

“가만히 앉아있는 거.”

“취급 한 번 너무 하네.”

“한두 번도 아니면서.”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무덤덤한 대답만 이어가는 나라사카에 토마는 살짝 토라진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한두 번이 아니니까 너무하다는 거지. 아니, 그런 점도 좋지만. 남들이 보기에 다소 쌀쌀 맞아 보이는 나라사카의 태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싹 달라붙는 자신을 뿌리치지 않는 그의 행동에 토마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그럼 내일은 어디 놀러 가자.”

“내일은 대청소 좀 해야겠어.”


뭐? 동문서답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난데없는 말에 토마는 저도 모르게 나라사카의 어깨를 꽉 쥐었다.


“내가 오늘 아침부터 싹 다 치웠는데?”

“그래도 한 번 더 말끔하게 해두는 게 좋아.”


나라사카의 단호한 어조에 토마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제 이마를 짚었다. 분명 내일은 두 사람 모두 휴일이었다. 모처럼 겹친 휴일이니 오랜만에 각 잡고 데이트나 할까 하던 생각은 대청소라는 단어 앞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하긴 몸에 열이 많은 자신과 다르게 추위에 약한 편이던 나라사카에게 한겨울의 외출은 좋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럼 하다못해 코타츠에 들어가 느긋하게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휴식을 취한다는 선택지도 있을 텐데. 가뜩이나 뻐근한 몸을 이끌고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청소한다니. 토마에게 있어서는 별로 좋지 못한 선택지였다.


“꼭 내일 해야 돼?”

“내일은 둘 다 쉬는 날이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둘 다 쉬는 날이니까 놀자는 의미였는데. 미처 말하지 못한 뒷말을 삼키며 토마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제 뒷목을 스쳐 지나가는 그의 숨소리에 나라사카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좀처럼 풀 죽지 않고 기운 넘치는 사람이 이런 묘한 데에선 기운 빠지는 점이 나라사카에겐 언제나 당황스러웠다. 물끄러미 토마를 바라보던 그는 이내 토마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그렇게 놀고 싶어요?”

“그렇다고 말해도 놀아줄 거 아니잖아.”

“토마 씨가 생각하는 나, 왜 이렇게 속 좁은지 모르겠네.”

“그럼 데이트 할 거야?”


주고받은 몇 마디에 금세 화색이 도는 토마의 모습에 나라사카는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밤 산책 정도는 어울려 줄게요.”


대신 내일은 대청소하기로 약속. 자신의 얼굴 바로 앞으로 다섯 번째 손가락을 내밀어 보이는 나라사카의 행동에 토마는 마주 웃으며 제 손가락을 걸었다. 그래 약속.


“저녁은 뭐 먹을래?”

“저번에 토마 씨가 해줬던 거 또 먹고 싶어. 스파게티. 느끼한 거 말고.”


또 시덥지 않은 초코과자 이야기를 안 꺼낸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가 제일 자신 있는 음식이 토마토 스파게티인 걸 알면서 주문하는 건지. 언젠가와 똑같은 주문에 토마는 부스스 웃으며 저한테 기댄 나라사카의 머리카락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대충 정리 다 하면 밥 먹자.




오랜 자취 생활 덕분인지 토마는 제 친구들 중에서도 요리 솜씨가 꽤 좋은 편이었다. 가끔씩 단체로 그의 집에 몰려와 먹자판을 벌이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에 비해 벌써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년이 다 되어가는 나라사카는 요리가 서툴렀다. 이는 평소 전자레인지에 돌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편의점 음식으로 주 끼니를 때우기 때문이었다. 물론 온 가족이 함께 지내는 집이었지만, 나라사카는 대학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도통 집에서 밥을 먹을 시간이 없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보더를 그만두지 않고 학업과 방위 임무를 병행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나라사카의 생활패턴이었다.

짐 정리를 어느 정도 마친 나라사카는 소파에 기대 토마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도마 위에 재료를 하나둘씩 준비하던 토마는 뒤통수에 꽂히는 따끔따끔한 시선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게 바로 카게가 느끼는 감정수신 체질 같은 건가. 물론 토마 본인에게 그런 사이드 이펙트 같은 건 없었지만 숨길 생각 없이 지긋이 따라오는 나라사카의 시선은 그로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심심해?”


고개를 돌리며 묻는 토마의 말에 나라사카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심심할 때는 하나도 신경 안 쓰더니만. 웃음기 섞인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그는 나라사카를 향해 고갯짓했다. 그럼 나 좀 도와줘.


“여기 양파 좀 까 줘. 할 수 있지?”

“가끔 보면 토마 씨는 날 유치원생 수준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

“그건 아니지.”


그도 그럴 듯이 유치원생이랑 불 끄고 밤놀이는 안 하니까. 의식의 흐름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토마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곧이곧대로 말한다면 분명 그는 동거 첫날밤부터 소파로 쫓겨날 게 분명하다. 소파면 다행이지, 아예 집을 박차고 나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재료는 다 있나 봐.”

“얼마 전에도 먹고 갔잖아?”

“한 달은 더 된 이야기네.”


긴 소매를 걷어 젖힌 나라사카가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느긋하게 양파를 집어든 그의 뒤로 토마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파게티 만들어줄 사람이 너 밖에 없으니까.”

“토마 씨, 친구 없구나.”


윽. 날카로운 말에 버섯을 썰던 토마의 손이 멈췄다. 너 참 사실과 무근한 것도 진실처럼 아프게 말하는 구나. 확실히 최근에는 다들 바쁘다는 이유로 모여서 놀 시간이 없긴 했지만…. 아니 이렇게 말하면 나 혼자만 한가한 것 같잖아. 애초부터 저 멘트는 분위기 잡기용 멘트인데 말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무덤덤하게 비수를 내리꽂는 나라사카의 언동에 토마는 헛웃음만 나왔다.


“이건 농담.”

“너 진짜 그런 점 있다고.”

“이런 점까지 포함해도 스파게티 만들어줄 사람이 나 밖에 없는 토마 씨잖아.”

“무드 없긴.”


정곡이 찔린 토마는 비식비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버섯이랑 마늘은 됐고, 양파…. 그는 제 뒤에 앉아 열심히 양파를 까고 있을 나라사카를 떠올리곤 고개를 돌렸다.


“이거 언제까지 까야 돼?”

“……그쯤에서 멈추는 게 좋을 것 같다.”


토마는 얼빠진 얼굴로 나라사카의 손 안에 있는 양파를 보았다. 분명 크고 둥그런 모양의 양파는 어느새 그 크기가 반쪽으로 줄어있었고 쟁반 위에는 양파의 하얀 속이 한 겹 한 겹 정성스레 분리되어 있었다. 그동안 요리를 하는 나라사카를 본 적이 없었지만 설마 이 정도 수준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유치원생도 이것보다는 훨씬 나을 법했다. 그는 찢어진 종이 모으듯 양파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 모았다. 어차피 익히면서 분리되니까 상관없으려나. 재료 준비를 마친 그는 냄비에 면을 삶기 시작했다. 한동안 분주하게 요리하는 토마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나라사카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도 나중에 배울래. 요리하는 법.”

“소화기는 베란다에 있으니까 참고해라~”

“아무리 그래도 나 그 정도는 아니니까….”


진짜 사람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나라사카는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담 다행이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토마는 나라사카 앞으로 접시 하나를 내놓았다. 토마가 제 몫을 가지고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나라사카는 먼저 포크를 집었다. 한 손에는 포크, 다른 손에는 스푼을 쥔 채 그는 접시 앞으로 두 손을 모았다. 잘 먹겠습니다. 포크에 돌돌 만 스파게티 면을 한 입 먹자 나라사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래도 먹을 것 앞에선 솔직해지는 구나.


“내가 생각하기에 토마 씨는 늙어서 가게를 차리면 좋을 것 같아. 스파게티 전문점으로.”


나라사카의 순수한 조언에 토마는 콧방귀를 꼈다. 어이, 네가 지금 먹고 있는 스파게티 소스는 마트에서도 파는 거거든? 아직까지 스파게티의 자세한 레시피를 알지 못하는 나라사카이니 순전히 토마의 요리 실력이라고 믿고 있는 그 모습이 어쩐지 우스웠다. 나름대로 반응이 재미있으니까 이게 마트 소스라는 이야기는 다물고 있자.


“그냥 보통 요리 수준이거든.”

“그러면 나는 매일 가서 스파게티를 먹을 수 있고 좋네.”

“언제부터 그렇게 스파게티 마니아가 되셨나?”


토마가 고개를 들자 벌써 반은 해치웠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신의 접시와 사뭇 차이나는 그의 접시가 보였다.


“나 토마 씨가 만든 스파게티만 먹잖아.”

“그건 좀 기쁘네.”


어느새 토마는 먹던 손을 멈추고 턱을 괸 채 나라사카의 포크질을 구경했다. 입술 옆으로 살짝 묻은 스파게티 소스를 발견한 그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칠칠하지 못하게 다 묻히고 먹네. 제 손을 뻗어 살짝 닦아내자 열심히 면을 말던 나라사카의 손이 멈칫했다. 잠시 동안 토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나직이 토마의 이름을 불렀다.


“토마 씨.”

“응?”

“지금 우리 조금… 신혼 부부 같아.”

“신혼 부부 맞잖아?”


당연하다는 듯이 되묻는 어조에 나라사카는 그만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놓칠 뻔했다. 뭘 새삼스럽게 놀라는지. 본인이 먼저 꺼낸 말이었으면서. 접시의 토마토 스파게티만큼 붉어진 나라사카의 얼굴에 토마는 실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았다. 빙빙 돌아가는 포크를 따라 주먹만 하게 커진 면 덩이를 나라사카 본인이 눈치 채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가지에서 가장 본부와 가까운 인가, 방위 지역에 근접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이 살고 있는 건물은 다른 주거 지역보다 훨씬 월세가 저렴했다. 더불어 고등학교 졸업 이후 정식으로 보더 임원으로 들어간 토마의 입장에서는 매일 출퇴근하기도 편했다. 무엇보다 그는 밤 산책을 좋아했다. 평범한 공원이나 거리와는 달리 저 혼자밖에 없는 텅 빈 공간도, 건물 사이를 통하는 바람 소리도, 모두 좋아했다.


추위에 약한데도 불구하고 토마를 따라 산책을 나선 나라사카는 그의 예상과 마찬가지로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이러다가 감기 걸리는 거 아닌가 몰라. 나오기 전부터 꼭꼭 챙겨 입는다고는 했지만 두툼한 외투와 목도리 한 장으로 한겨울의 추위를 막기에는 어려웠다.


“슬슬 들어갈까?”

“왜? 금방 나왔잖아.”


네가 추워 보여서. 말을 잇는 대신 토마는 몇 번 스치던 손을 제 주머니 속으로 잡아 끌었다. 줄곧 붙잡아주길 기다렸던 걸까, 벌써 얼음장만큼 꽁꽁 언 나라사카의 손이 느껴지자 토마는 그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물속에 담그면 사라지는 솜사탕처럼 겨울의 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이렇게 어둡지는 않았는데. 벌써 건물 사이로 사라져버린 해 덕분에 주위는 온통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게 된 이후로 한 번도 켜지지 않는 거리의 가로등은 산책자들을 위해 켜질 리 만무했다. 애초에 전기 하나 통하지 않는 곳이니까.


평소와 같은 길을 걷고 있었지만 나라사카는 왠지 오늘따라 다른 기분이 들었다. 매일 지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주 걷는 길, 항상 곁에 있는 사람인데 왜 다른 느낌일까. 어둡고 인기척이라곤 하나도 없는, 평소보다 훨씬 조용한 거리. 마치 이 세상에 토마와 자신, 단 두 사람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많아지는 생각에, 아직 새로운 환경에서 지낸다는 현실이 낯 설은 걸까 싶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멈추지 않는 두근거림은 나라사카의 모든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였을까. 짐을 싸고 집을 나온 순간부터, 그게 아니면 토마 씨에게 같이 살자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새로운 주거지에 대한 공포심은 이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 부서져 버리지 않을까. 소중한 사람이 다치고 아파하진 않을까. 허망하게 제 터전을 잃던 그 날의 기억이 치명적인 독처럼 나라사카의 몸 전체에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나는 지금 불안해하고 있는 걸까. 계속해서 미약하게 떨리는 나라사카의 손을, 토마는 꼭 붙잡아주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나라사카를 향해 살풋 웃어보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내가 곁에 있으니까.

들릴 리 없는 뒷말이 나라사카의 머릿속을 울렸다.




토마가 잠에서 깨어난 건 그가 지난 밤 미리 맞춰둔 알람이 울리기 전이었다. 정확히는 그가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의 휴대폰에서 요란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탁상으로 손을 뻗은 토마는 다른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얼른 알람을 꺼버렸다. 그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쓱 넘기며 제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나라사카를 바라보았다. 나라사카는 많이 피곤했는지 그 소란스러운 벨소리에 작은 뒤척임도 없었다. 토마가 상체를 일으킨 탓에 하나로 덮던 이불이 끌려와 나라사카의 맨 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하얀 피부 위 여기저기 자리 잡은 붉은 자국에 토마는 저도 모르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바로 어제 이삿짐 정리로 분주했던 걸 떠올리면 역시 새벽까지 그를 재우지 않은 건 좀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일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부러 알람을 맞추고 잔 건 그리 큰 이유가 아니었다. 나라사카는 워낙 예민한 탓에 함께 잠이 들면 꼭 토마가 일어나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 있었다. 동거를 시작한 후 처음 맞이하는 아침은 아무래도 나라사카보다 먼저 일어나, 그에게 ‘좋은 아침.’이라는 말을 건네고 싶은 게 토마의 작은 바람이었다. 그리고 드물게 깊은 잠에 빠진 나라사카는 평소와 달리 토마보다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왠지 모를 성취감에 시물새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나라사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가락은 평소보다 몇 배는 조심스러웠다. 혹시 나라사카가 잠에서 깰까 싶어 성미에 맞지 않는 손짓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퍽이나 우스운 모습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빠져 나간 게 몇 번일까, 습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무중 상태인 토마를 향해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토마 씨가 모닝 키스라도 해줄 줄 알았어.”

“엑.”


갑작스러운 나라사카의 목소리에 토마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린 나라사카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토마 씨보다 늦게 일어날 리 없잖아.”

“…자는 척 한 거야?”

“지금 그 표정 바보 같아.”


상당히 얼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토마의 모습에 나라사카는 쿡쿡거리며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을 비볐다. 그래도 생각보다 건전한 사람이었구나, 토마 씨. 자고 있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나라사카는 커다란 손이 몇 번이고 지나갔던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불건전한 건 밤으로도 족하잖아?”


금세 키득거리며 덧붙이는 토마의 목소리에 나라사카는 곧장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 이상 다가오지 마.”


나라사카의 방어는 철벽과도 같았다. 곧이어 이불 속을 파고 들어오는 손길에 무장해제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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