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원물 AU


꽤 위태로워 보였다. 지금 제 눈에 보이는 광경에 대한 반리의 생각이었다. 시야가 가려질 만큼 높이 쌓인 책들을 두 손으로 힘겹게 받친채 한 발 두 발 걸어 나가는 모습은 누가 봐도 불안했다. 그런 모습을 본다면 내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반리의 손길이 멈추는 것도 당연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교실에서 잠이나 잘 걸, 괜히 답답하다고 복도에 나와 있는 게 아니었다. 옮길 물건이 많으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든지, 그럴 상대가 없다면 나눠서 옮기든지. 누군지는 몰라도 요령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그의 행동에 반리는 한숨만 나왔다. 그는 창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섰다. 일단은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의도와는 다르게 반리가 무언으로 다가서자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랐는지 상대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와 동시에 휘청이는 책 더미에 반리는 급하게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겹쳐 잡으며 책들을 바로 세웠다. 반리 덕분에 겨우 무게 중심을 잡고 나서야 상대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으아,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조심 좀- …어라.”


내내 시선을 사로잡던 책 더미 탓에 반리는 그제야 상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정장 바지에 깔끔하게 차려 입은 와이셔츠와 그 위에 걸쳐 입은 가디건. 언뜻 보면 교복과 헷갈릴 수 있는 차림새였지만 확연하게 교복이 아니었다. 반리는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평소 수업을 제대로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얼굴을 모르는 정도는 아니었다. 옷차림을 보니 학생은 아닐 테고, 그렇다고 선생님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동안이었다.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는 정답에 고민하던 반리는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학교에 왔는데 선생한테 부려 먹힌 졸업생.”

“에…… 일단은 국어 담당인데….”


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그 모습에 반리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저 얼굴로 선생이라고? 다시 한 번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꽤나 굳어 있는 그의 표정에 상대는 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츠키오카 츠무기. 얼마 전에 새로 부임해왔고 아직 1학년만 담당하고 있어서 모를 수도 있겠네.”

“허어….”

“너는? 3학년?”


애초에 그들이 서있는 복도는 3학년 교실 쪽이니까 당연한 대답이 나올 터였다. 하지만 츠무기의 눈빛은 그의 이름을 듣고 싶은 눈치였다. 그걸 읽어낸 반리는 여전히 못 믿기는지 실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뭐, 예…. 셋츠 반리.”

“잘 부탁해, 반리군.”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접힌 눈꼬리가 반리를 향해 웃었다. 그 웃음을 마주 보고 있자니 반리의 입에서는 어쩐지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참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그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이거 어디로 옮기면 돼요?”

“앗, 괜찮아. 혼자 들 수 있는걸.”

“전-혀 설득력 없는 데요.”


그것보다 방금 전에도 엎을 뻔했고. 입술을 비죽 내밀며 말하는 반리의 모습에 츠무기는 또 한 번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제법 마른 체구면서 꽤나 고집 센 츠무기의 말투에 반리는 제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나오면 도와주려는 입장에서 좀 민망한데.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생각한 데로 말해버리면 어쩐지 사과부터 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이제 막 통성명한 사이로서 츠무기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요 몇 분간의 인상은 그랬다. 츠무기의 동의를 구할 생각도 없이 반리는 무작정 그의 품 안에 있는 책을 반절보다 조금 더 나눠 들었다. 앗, 말릴 새도 없이 책들을 가로채진 츠무기는 멍한 얼굴로 반리를 바라보았다.


“음, 그럼 그 말에 기대서…. 3층 교무실까지 부탁해도 될까?”

“이걸 혼자 3층까지 가져가려고 했다고? 신입 괴롭힘 아니야?”

“하하, 그런 거 아니야. 전부 나한테 필요한 자료인걸.”


그렇게 비틀비틀 걸어가던 주제에 말은 잘한다. 앞으로 두 번이나 더 층을 올라가야 할 텐데 무슨 자신감으로 혼자 간다고 했던 걸까. 손을 벌벌 떨며 계단을 오를 그의 모습이 떠올라 반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하마터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에 반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이, 아무리 그래도 방금 건 좀 건방지다고. 스스로 딴지를 걸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게 다 이 사람이 너무 불안해 보여서 그런 거다. 어느 모로 봐도 아직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자기와 동급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인데, 선생님이라니.


“점심시간인데 괜히 시간 뺏는 것 같아서 미안. 밥은 먹었어?”

“뭐, 대충 매점으로 때웠어요.”

“매점이라 그립네. 여기 와서는 한 번도 안 가봤는데, 맛있어?”

“그럭저럭?”


모범생처럼 생겨서 학창 시절에도 도시락만 싸서 다닐 것 같은 그의 입에서, 매점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어색한 울림이었다. 그런 반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그 커다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는 모습은 여전히 동심에 머물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문득 자신보다 조금 낮은 그의 머리를 어쩐지 한 손으로 가볍게 헤집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이는 충동은 다행스럽게도 두 손 가득한 책더미 덕분에 막을 수 있었다. 도대체 선생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후배도 아니고.


“야끼소바빵이라든지 계란샌드위치는 꽤 맛있으니까 추천.”

“계란샌드위치도 있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떠오르는 데로 내뱉은 메뉴들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당첨이었나 보다. 그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마냥 기뻐보여서 반리는 저도 함께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응, 그거 맛있어요. 한 마디 덧붙이자 츠무기의 목소리는 더욱 밝아졌다. 정말? 먹어보고 싶네- 부스스 웃음을 흘리는 것도 잠시, 츠무기는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으음 고민되네…. 점심은 벌써 먹었거든. 방과 후에도 남아 있으려나….”

“부활동 때문에 꽤 늦게까지 열려있으니까 아마 괜찮지 않아?”

“그러려나? 알려줘서 고마워, 반리군.”

“……별로.”


또 그런다. 투명한 그의 웃음 때문인지 반리는 자기가 하는 생각들을 모조리 들켜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들켜버린다는 말도 어딘가 이상하다. 츠무기에게 들키면 안 될 생각을 한 것도 아닌데. 그가 자신을 향해 웃어주면 그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초면에도 불구하고 말을 걸기 쉽다는 인상의 그였지만 말을 주고받을수록 다른 마음도 들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조금은 귀 끝이 뜨거워지는 감각이었다.


가벼운 대화를 몇 번이고 나누어 다다른 도착점은 교무실, 그의 자리였다. 정말로 선생님이었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목소리로 낸다면 문득 느껴지는 거리감에 더는 그와 자연스레 대화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높이 쌓인 책들을 책상에 내려놓고 나서야 츠무기는 제 팔을 통통 두드렸다. 나눠 들었는데도 이 반응이면, 혼자 들고 갔으면 아직 2층에서 끙끙거렸겠네.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그에게 들킬까, 반리는 손을 들어 제 입술에 걸린 웃음기를 감춰버렸다. 그의 걱정과는 다르게 반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열심히 제 주머니를 뒤적이던 츠무기는 원하는 걸 발견했는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반리군.”


갑작스럽게 제 앞으로 쑥 내밀어진 막대사탕을 보고 반리는 헛웃음만 나왔다. 답례로 주는 게 레몬맛 막대사탕이라니. 마치 자신이 유치원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것보다 다 큰 어른이 왜 주머니에 막대사탕을 가지고 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본인이랑 꽤 어울리긴 하지만…. 받아 들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만 바라보는 반리의 행동에 츠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혹시 사탕 싫어해?”

“싫다곤 안 했어요. 감사함다-”


혹여 내민 손을 다시 걷어갈까, 반리는 잽싸게 츠무기가 들고 있던 사탕을 채갔다. 그래? 다행이다. 뺏어가듯 건네받은 사탕을 마이 주머니에 대충 넣는 그의 모습에 츠무기의 얼굴에도 옅은 웃음이 걸렸다. 그런 츠무기와 눈이 마주치자 반리는 괜히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역시 이 사람의 눈은 똑바로 마주보기가 어렵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신기한 기분도 들었다. 나한테 어려운 일도 있었나? 지금까지 무슨 일이든 요령 있게 해내던 그였다. 인간관계도 대충 상대의 말에 맞장구나 치면 그럭저럭 대화가 성립되었다. 살면서 누군가의 눈치를 본 적은 없었는데, 제 앞에서 담백하게 웃고 있는 츠무기를 똑바로 직시하기 힘들었다. 이런 타입은 처음이라 그런가. 한 겹 두 겹 쌓여가는 의문에 반리는 곧 생각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자신이 왜 이 사람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 갑니다-”

“응, 고마웠어.”


그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교무실을 나섰다. 반리의 성의 없어 보이는 인사에도 츠무기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그런 행동이 마냥 어색하게만 느껴져 반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어 나갔다.


교무실 문을 닫자마자 밀려오는 감정은 소심한 후회에 가까웠다. 너무 싸가지 없게 굴었나. 인사 정도는 제대로 할 걸 그랬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주머니 속 사탕을 만지작거리며 떠오르는 얼굴에 어쩐지 입꼬리가 비식 올라갔다. 집에 가기 전엔 매점이나 한 번 들려볼까. 머릿속을 스치는 변덕은 그의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나긋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몇 번이고 귓가에서 맴돌았다.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2018.08.06 에이쓰리


amu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