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수업을 끝마친 리들은 간단히 짐을 챙겨 기숙사로 향했다. 오늘은 비가 내려 승마부 활동이 없었기 때문에 이 이상 학교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면 오늘 들었던 수업 복습과 내일 들을 수업의 예습, 며칠 뒤 정기 사감 회의에서 사용할 자료 정리도 할 생각이었다. 할 일이 태산이군. 그렇지만 머릿속으로 일의 순서를 매기면서 싫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워커홀릭이 다 된 것 같았다.


“――그치만 얼른 안 가면 보충 수업에 늦는다고!”

“그렇다고 이대로 버리고 가는 건 아니지 않냐?”

“애초에 그렇게 된 건 에이스, 네 잘못이잖아!”


소란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리들 역시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본인과 같은 하츠라뷸 기숙사의 표식을 달고 있는 그들을 향해, 리들은 크흠, 하며 헛기침으로 시선을 끌었다.


“복도를 가로 막고 말싸움이라니 제법 두둑한 배짱이군.”

“로즈하트 사감!”

“에, 사감 왔어?”


리들을 발견하자마자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듀스와 다르게, 에이스는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리들은 굳이 파고들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그쯤에서 조용히 화해하도록. 그게 싫다면 목에 자물쇠라도 걸어놔야 조용해지려나?”

“잠깐, 사감! 우리 싸운 거 아니에요!”

“그게, 지금 에이스의 상태가 안 좋아서…….”


듀스의 발언에 리들은 에이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눈의 초점이 제대로 안 맞는다고 해야 할까,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이지? 눈빛으로 그렇게 묻는 리들의 행동에 듀스는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오전에 있었던 연금술 수업에서 재료 배합을 잘못한 바람에 만들고 있던 마법약이 폭발해버렸다는 것이었다. 위험한 약은 아니었기에 폭발에 휘말려도 별다른 상처는 없었지만, 하필 고글을 쓰고 있지 않았던 에이스의 눈에 실패한 약의 일부가 들어가서 그 부작용으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됐다고 한다. 크루웰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몇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가벼운 증상이라고는 하지만 갑자기 시력을 잃으면 불편한 건 당연했다. 하루 종일 듀스와 유우, 그림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수업을 듣긴 했지만 방과 후엔 사정이 달랐다. 유우와 그림은 오늘도 학원장이 떠안긴 잡일을 처리하기 위해 어딘가로 사라졌고, 듀스 역시 보충 수업을 받으러 가야 했다. 다른 클래스메이트들도 방과 후 동아리로 모두 바빠 에이스는 혼자 기숙사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잠깐 듀스. 지금 보충 수업이라고 했나?”

“아…… 그, 그게 정말 아쉽게 점수가 모자라서……! 다음엔 반드시 좋은 성적을 받겠습니다……!”


리들의 예리한 질문에 듀스는 잔뜩 당황해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 듀스의 옆에서 제 무덤을 팠다며 킥킥 웃는 에이스를 시작으로 두 사람은 또 조금씩 목소리를 높이며 언쟁을 되풀이했다.


“분명 조금 전에 경고했을 텐데.”


하여간 잠시도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는 녀석들이군. 굳이 한 소리를 더 해야 조용해지는 둘의 모습에 리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그래서 곤란한 상황입니다…….”

“뭐, 이제 해결되지 않았어?”


에이스의 말에 듀스와 리들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리들 사감이 와줬으니까~ 어차피 같은 하츠라뷸이고. 사감 오늘은 비도 내리고 승마부는 안 가죠?”


그는 자신의 추리에 자아도취 된 명탐정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도 리들을 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에이스가 지금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에이스는 허공을 향해 불쌍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에이, 설마 귀여운 후배가 곤란에 처했는데 못 본 척 지나치는 건 아니죠? 그것도 같은 기숙사 후배인데? 사감이라는 사람이?”


확실히 동아리 활동이 없어서 바로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지금 에이스의 태도는 괜히 얄미웠다. 부탁하고 싶으면 좀 더 예의를 갖춰서 하면 안 되는 것인가? 뭐, 그게 어쩔 수 없는 에이스의 천성이기는 했지만.


“게다가 사랑스러운 애…….”

“에이스!”


그의 입에서 ‘애인’이라는 단어가 나오려던 순간, 리들은 다급하게 에이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갑작스러운 리들의 행동에 지켜보던 듀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

“에이스, 라고 말하려던 거겠지. 그것보다 듀스, 아까 보충 수업에 늦는다고 하지 않았나?”

“아! 하마터면 깜빡할 뻔 했네요! 그럼 로즈하트 사감,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만 보면 듀스도 덜렁거리는 성격이긴 했다. 리들의 충고에 그제야 보충 수업을 떠올렸는지 그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러면서도 리들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건 잊지 않았다.


“에이스. 기숙사까지 데려다 줄 테니 따라오도록.”

“사감~ 나 앞이 전혀 안 보이니까 따라오라고 해도 혼자서는 못 가는 데요~ 기왕이면 손이라도 잡아줘요.”

“내가 전에 때와 장소를 가리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에? 그냥 부축해주는 것뿐인데. 아~ 사감 지금 설마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킥킥거리는 에이스의 웃음소리에 리들은 목소리에 힘을 줬다.


“그 이상 입을 놀린다면 다음엔 경고 없이 목을 칠거야.”

“무서~워. 네, 네~”

“대답은 간결하게 「네, 사감」이다.”

“네, 사감~”


하여튼, 오늘따라 한 마디씩 더 많단 말이지. 리들은 어쩔 수 없이 에이스의 손을 붙잡았다. 제 손에 리들의 온기가 느껴지자, 에이스는 곧바로 빙긋 웃으면서 깍지를 끼며 손을 고쳐 잡았다.


“에이스.”

“기왕 당당하게 손 잡을 수 있는 명목이 생겼잖아? 너그럽게 넘어가주시죠~”


어이없다는 리들의 표정은 당연하게도 지금의 에이스에겐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에이스는 괜히 한 마디를 덧붙이며 말했다.


“나 기회주의자인거, 사감은 이제 알았으려나?”

“아쉽게도 전부터 잘 알고 있지.”


리들의 툴툴거리는 말투에 에이스는 그의 손을 꼭 맞잡으며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복도를 쭉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거울 앞에 서게 되었다.


“곧 거울을 통과할 거야. 발밑을 조심해.”


그렇게 말하면서 리들은 에이스 쪽으로 반쯤 몸을 돌려, 혹시라도 그가 발을 헛디딜까 주의하며 걸음을 나아갔다. 매일같이 통과하는 길이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사정은 달랐다. 천천히 기숙사 앞으로 그를 인도하며 에이스가 안전하게 빠져나온 걸 확인한 리들은 그제야 옅은 웃음을 지었다.


“분명 1학년 방은 이쪽 복도였지?”

“계단 안 올라가도 되는 게 그나마 다행이네요. 올라가다 잘못하면 꼴사납게 굴러 떨어지는 거 아니야?”

“혼자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네.”


에이스가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웃음기 섞인 그의 대답에 맞잡은 에이스의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지금 넘어지는 거 상상하고 웃은 거죠? 거참 너무하네.”

“애초에 제대로 고글을 안 쓴 네 잘못이니 넘어져도 어쩔 수 없잖아?”

“조금은 걱정해주길 기대한 내가 바보구만~”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 내미는 에이스의 모습에 리들은 익숙하게 그의 말을 무시했다. 저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정말로 기분이 상한 게 아니라는 걸, 리들은 이제 알 수 있었다. 복도를 따라 1학년 방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올 일이 없는 곳. 사감이 되기 전의 리들 역시 머물렀던 곳이지만, 오랜만에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천천히 발길을 나아가며 에이스의 이름을 찾던 리들은 곧 발견한 이름에 발길을 멈췄다.


“에이스, 다 왔다.”

“감사함다~”

“그럼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그 말을 끝으로 발길을 돌리려던 리들이었지만, 제 손을 놓아주지 않는 에이스의 행동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있지, 사감. 나 침대까지 데려다줘요. 1인실도 아니고 혼자선 어디가 내 자리인지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 요구사항 한 번 많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리들은 군말 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실제로 에이스의 눈이 안 보여서 곤란한 상황이긴 했으니까. 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보이는 농구 골대에, 그곳이 에이스의 자리라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저 농구 골대가 있는 자리지?”

“응응. 맞아요, 거기.”


리들은 가만히 에이스의 손을 이끌고 그의 자리로 향했다. 남학생 여럿이 쓰는 방이라 그런지 바닥에는 꽤나 사물들이 어지럽혀 있어서, 리들이 안내해주지 않았다면 분명 에이스는 어딘가에 발이 걸려 넘어졌을 것만 같았다.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이라고 이렇게 정리를 소홀히 하다니. 언제 한 번 날을 잡아 방 점검을 해야겠다고 리들은 속으로 다짐했다. 침대 바로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리들은 그를 향해 돌아봤다.


“자리에 도착했어. 그럼 나는 이만…….”

“사감.”


순간적으로 잡아당겨진 손의 종착점은 에이스의 품 안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리들은 당황했지만 구태여 그를 밀쳐내진 않았다.


“에이스. 동실자가 오기라도 하면…….”

“어차피 다들 이 시간엔 동아리 활동인걸? 이렇게 사감이랑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좀처럼 없고.”


에이스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곤 리들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끔씩은 연인다운 일도 해보는 건 어때요?”


귀 바로 안쪽에 와 닿는 간지러운 숨결에 리들의 얼굴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에이스의 눈에 이런 제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에이스의 품에서 빠져나온 리들은 곧바로 그의 넥타이를 확 잡아당겼다. 한 순간 에이스의 눈높이가 리들만큼 낮아졌다. 잠시 숨을 고른 리들은 조심스럽게 에이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짧게 닿았다 떨어진 온기에 에이스는 멍한 얼굴로 리들을 바라보았다.


“크흠, 건방진 애인에게 내릴 상은 이게 다야.”

“벌 받을 거라고 각오했는데 이 정도 상이면 횡재지….”


리들의 입술이 닿았던 에이스의 뺨은 어느새 좀 전의 리들만큼이나 붉게 물들어있었다.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신을 보는 에이스와 순간 마주친 시선에 리들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는 에이스를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에이스, 언제부터 보인거지?”

“어라, 들켰네.”

“대답.”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


그럼 제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일 때도, 그를 보며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던 것도 전부 똑똑히 지켜봤다는 것 아닌가?


“오…….”

“아 잠깐! 목에 자물쇠는……!”

“……오늘은 봐주겠지만, 다음부터는 없어.”

“엑, 진짜?”


믿기지 않는다는 에이스의 표정을 뒤로 하고 리들은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쉬도록.”


그의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머리카락만큼이나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가 보였다. 아는 척하면 이번에야말로 목을 치겠지……. 하여간 먼저 볼에 키스할 땐 언제고, 자기가 다 부끄러워하네. 에이스는 아쉬운 듯 제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네, 사감. 건방진 애인은 얌전히 쉬겠습니다~”


하지만 건드리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심리였다. 등 뒤로 들려온 말에 방을 나서려던 리들은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그는 전보다 더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하지만 에이스는 알 수 있었다. 저건 부끄러움의 빨강이 아닌 분노의 빨강이란걸. 곧 자신을 향해 날아 들어올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에이스는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네. 그럼 오늘도 힘차게,


“Off with your head!”


저 자의 목을 쳐라!



2020.09.07 트위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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