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많은 경우 믿을 수 없을 만큼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진다. 일상적인, 따라서 정상적으로 간주되는 행동에서 벗어남이 없이 준비되는 자살은 일상생활과 똑같이 질서를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즉 자살을 야기시킨 삶과 똑같이 깨끗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침묵 가운데 암담하게 이루어진다"ㅡ 크뢰츠


페잉으로 익숙한 질문을 받았다.


저 질문에 답했던 글을 다시 적자면, 우선 나는 자살하지 않으려고 한다. 가장 뿌리적인 원인을 차지하는 것은 나의 신앙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의견이 있을 테지 그냥 나에게는 신앙이 있다고만 한다. 그다음으로 당연하게도 불행은 절대성을 지니지 않는다. "내가 너라면 차라리 죽을 거야"라는 말에 담긴 공포와 경멸, 불행에 어떤 식으로든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는, 주문적 성격을 지닌 말-차라리 죽을래-는 그 공포는 사는 현실에 기초한다. 따라서 누가 자살을 한다고 하면 그가 처한 상황을 살펴야 한다. 나는 자살이 권유되는 상황에 부닥쳐있는가? 이것을 살펴보려고 한다.


사실 그런 말은 많이 듣는다. 내가 당신과 같은 상황에 부닥쳤다면 자살했을 거라는 말. 트위터에서 나를 팔로잉하는 사람 중 적지 않은 분들도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때는 나 자신이 "불행포르노"의 콘텐츠로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컨텐츠화된 스스로가 매우 한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서, 나는 왜 죽지 않는가. 저번 글에도 쓴 그런 끔찍한 비인격적 대우를 받고서도 어떻게 멀쩡하게 문장을 써내려갈 수 있을까? 스스로가 대견스럽긴 하지만 대단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람은 각자 스스로 고통의 맥락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니 나는 나에게 닥친 고통을 헤쳐나가는 거에 급급한 평범한 사람이니까.

위 문단에는 맞는 단어들을 열거했지만, 실상 겉치레에 해당하는 답변이다. 고통은 전혀 같지 않다. 드러내놓고 당사자와 온 사회가 같이 애도하는 고통이 있지만, 어떤 고통들은 이름을 지어지지 않고, 말하기를 부정당한다. 수전 손택이 썼듯이, "병"의 종류에 따라붙는 지긋지긋한 이미지들이 있다. 어느 시대에나 말할 수 있는 `병`이 있고 말해선 안 되는 `병`이 있으며 그것은 불변하지 않는다. "심장병"의 경우는 어떨까? 흔히 쓰는 "심장이 약하신 분들은 조심하시고"같은 문구는 분명 경멸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만, 시혜의 시선을 지니기 때문에 더럽고 터부시되어야 할 병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물론 너무 강력한 "연약하고 아무것도 스스로 못하는"이미지 때문에 장애등급을 받기도 어려우며, 실제 환자의 삶이 심히 왜곡되기는 하지만. ("심장병"이라는 노래가 나왔을 때 정말 내 눈과 귀를 의심했었다.)

병명으로는 충분히 나를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아픈 사람"이기 이전에 "아픈 여자"이기 때문이다. 2020년 한국에서 30대 중반의 근로능력이 현저히 없는 비혼여성이 선천적 희귀난치성 심장병으로 계속해서 살아간다면? 그리고 별로 사유할 시간도 없이 나는 바로 깨닫는다. 이미 나는 내가 살아도 되는 걸로 허락된 시간을 넘어섰다는 것을. "심장병 여성 환자"에는 병약하고 순수한 이미지가 깃든다. 그리고 그런 여성이 고통받고 애쓰는 것을 보아주며 그 여성에게 쏟아졌던 안쓰러운 마음은 결혼하지 않은 30대 초반을 지날 때 순식간에 손가락질하는 손가락으로 변한다.

정체성은 하나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모든 차별의 가장 깊숙하고도 두꺼운 부분을 차지한다. 실로 생식을 거부하는 여성은 그 존재를 부정당하고, 숨겨야 할 어떤 더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거기에 계속 아프기까지 한 여성이라면 그 압박이 더욱 심하다. 실제 내 병명의 20대 후반의 여성환자가 단약을 하여 병이 심화하여 죽은 사례가 있다. 가난한 집의 장녀였다. 집안의 눈치가 보였다고 했다.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모 남성 시인은 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분은 아픈데 여성이기까지 하니 얼마나 힘들까요"라고 했다. 내가 만약 남성환자였다면 중환자실에서 겪은 끔찍한 일 중 어떤 것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우선 분명한 건 성희롱은 분명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핀잔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기저귀 교체 주기가 길어 생식기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사실 이 부분은 잘 모른다. 남성 환자의 기저귀라고 여성 환자보다 더 자주 갈아줬을까? 하지만 기저귀를 갈아달라는 요청을 무시하거나 실제 기저귀를 늦게 갈았을 때 남녀의 생식기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여성의 생식기가 훨씬 유약하다.)그리고 또 무엇이 바뀌었을까?

2014년에 쓴 글에 산소통을 갖추면 그땐 내가 장애인으로 인정받겠느냐고 썼다. 이제 우리 집엔 산소통이 있다. 산소포화도가 내려가면 산소를 낀다. 마치 아침에 몽롱한 상태에서 깨우기 위해 커피를 마시듯이. 산소 코 줄을 커피라고 생각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명명했다. 산소통을 매일 가지고 직업훈련을 다닐 때 그렇게 설명했다. 내가 산소 줄을 한 모습에 경악하던(그런데 그곳은 장애인 직업훈련장이었다) 이들에게 산소통이 커피와 같으니 신경을 쓰지 말라 했다. 그 말은 전부 진실이고 또 전부 거짓이다. 하지만 내 존재가 전부 거짓이라는 시적인 농담 소리는 하고 싶지 않다. 내 존재는 전부 사실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고통스러워도 살아낼 수밖에 없다. 나의 실존이 사회의 관념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살하지 않는다.

꽤 강력한 어조로 썼지만 나는 삶을 전쟁터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살면 마음에 남는 것이 정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전략은 필패의 전략이다. 힘이 들면 힘이 드는 대로 그 힘듦에 쓸 기운조차 없어도 없는 대로 눈 앞에 펼쳐진 삶을 응시한다. 회피하지 않고 응시하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이 내가 받은 축복 중에 하나 아닐까. 그래서 내 실존을 살며 기록한다.

내가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본다. 2017~2018년 즈음해서 트위터에 속속 생겨나던 "아픈 여성"들의 계정들을 생각한다. 대부분 20대였던, 아프고 젊은 여성들. 분명한 건 "아픈 여성"은 말해져야 할 만큼 말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 그리고 그 마음을 글로 정돈하기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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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여자. 선천성 심장장애인으로의 삶을 기록합니다. 트위터: @kim_mem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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