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셔도 졸릴 만큼 피곤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지루하다. 나는 계속 입구를 주시했다. 마침내 기다리던 사촌이 왔다.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녀가 인사하며 계단을 올랐다. 


  “너 안 추워?”

  “추워.”


  생각보다 얇은 옷차림에 안 춥냐고 묻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패션 하는 애는 뭐가 좀 다른가 봐. 옆에 나를 따라 일어선 쿠로오씨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오미예요.”

  “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쿠로오 테츠로입니다.”

  “빨리 가자. 으 피곤해.”


  동갑내기인 사촌에게 말하며 캐리어를 잡아끌었다. 계단 앞에서 내 캐리어까지 번쩍 든 쿠로오씨를 바라보던 나오미가 그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케이, 네 건 네가 들어야 하지 않겠니? 여전히 비실비실하는구나.”


  웃으며 밖으로 나서는 그녀의 얄미운 목소리 뒤로 쿠로오씨가 웃었다. 나는 짜증 나서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별 대가 없이 숙소를 제공해주는 사람에게 밉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억울했다. 웃으며 캐리어를 끌고 가는 그를 노려봤다. 줘요. 츳키 비실비실해서 큰일 났네. 놀리는 투에 캐리어를 빼앗았다. 






그 겨울, 그건 아마도

쿠로오 테츠로 X 츠키시마 케이

w. 썸머(@TJaaj_)






  “저녁 뭐 먹을래? 귀찮은데 시켜 먹을까? 쿠로오씨는 뭘 좋아하세요?”

  “둘이 알아서 정해. 난 샤워 먼저 할 거야. 난 아무거나 상관없어.”


  펼친 캐리어 안 갈아입을 옷을 꺼내며 화장실로 향했다. 진짜 장시간 비행 최악이야. 배달이 돼요? 신기한 듯 묻는 쿠로오씨의 목소리 뒤로 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에요. 나오미가 웃었다. 


  “츳키 머리 또 제대로 안 말리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핀잔하는 그에 수건을 머리에 덮었다. 소파에 앉아있는 나오미 옆으로 가 앉았다. 개운하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오늘 나 클럽 가기로 했는데”

  “같이들 갈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말하던 그녀의 시선이 내 뒤에 꽂혔다. 귀찮아서 대충 덮어놓은 수건으로 내 머리를 헤집고 있는 쿠로오씨를 보던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클럽? 나는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털고 있는 쿠로오씨의 손길에 감았던 눈을 떴다. 


  “응 피곤하면 말고. 오늘 불금이잖아. 술 진탕 먹고 놀 거야.”

  “너 이러고 사는 거 ...이모도 아셔?”


  내 말에 나오미가 웃었다. 간만에 스트레스 좀 풀어야지.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 지금 10시간 비행하고 왔어. 쉴래. 두 손을 깍지껴 앞으로 뻗으며 더 물기가 떨어지지 않는 머리를 소파에 기댔다. 


  “그러던가. 쿠로오씨는요?”

  “아 저는 술을 안마셔…”

  “이 사람은 술 안 먹어.”


  나오미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갔다. 그녀가 또다시 가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쿠로오씨를 한 번 더. 너네... 이어지지 않는 말에 뭐냐는 듯 보자 아니야. 하며 웃었다. 나는 싱거운 그녀의 반응을 무시하며 침대로 걸어가 누웠다. 


  “어머, 케이 여자 침대에 그렇게 막 누워도 돼?”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미안, 근데 소파 너무 짧아서 불편해.”


  쿠로오씨가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니가 쓸데없이 키만 크니까 그렇지. 그나저나 두 사람 다 키가 커서 어떡한담? 


  “주인이 소파베드 신세를 지게 하다니. 예의 없네 정말”

  “무슨 소리야?”

  “쿠로오씨랑 케이 니가 침대에서 자고 내가 소파베드에서 자야지 별수 있어?”

  “쿠로오씨랑 한 침대에서 자라고?!”


  나는 몰려오는 졸음을 놀래 달아나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쳤어? 내 물음에 나오미는 뭐가 문제냐는 투로 말했다. 내가 쿠로오씨랑 한 침대에서 잘 순 없잖아? 아니, 그건 그런데. 방금까지 소파였던 것을 펼치자 근사한 침대가 되었다. 문제는 길이가 나와 쿠로오씨의 키를 감당하기에 조금 짧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성인 남자 두 명(그것도 한 명은 현직 배구선수다.)이 눕기엔 너비도 턱없이 부족했다. 


  “아니면 바닥에서 자던가. 오히려 내 침대를 내준 거에 감사해야 할 일 아냐?”


  맞는 말이었다. 나는 옳은 소리만 해대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 아니면 못 자는데. 아 몰라. 남자끼리 한 침대 좀 쓴다고 죽나. 나는 작게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건 그녀의 호의가 분명했다. 


  “어 왔나 보다. 케이 내려가서 배달음식 좀 받아와.”


  핸드폰 알림을 확인한 그녀가 내게 키를 내밀었다. 네네. 가라면 가야죠.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쟤는 진짜 변한 게 없어. 검게 칠해진 손톱이 건네주는 키를 받아들었다. 

  저녁을 먹은 후 나오미는 옷을 갈아입더니 나갈 준비를 했다. 나는 소파에 늘어져 있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일회용 그릇을 정리하던 쿠로오씨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조심해.”

  “푸흡. 뭘?”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옷차림이 화려했다. 패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내가 봐도 그녀는 멋졌다. 뭘 조심하냐는 물음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뭘 조심하냐니 당연히...


  “너 같은 남자들?”

  “…그래, 뭐 그런 거 말야.”


  나는 웃는 그녀에게 툴툴거리며 답했다. 


  “참 이상해. 조심해야 할 건 남자들인데 말야?”


  그것도 그렇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키를 건네줬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에게 쿠로오씨와 손을 흔들어주며 잘 다녀오라는 말로 고쳐 말했다. 


  “빨리 자. 쿠로오씨한테 어리광 그만 부리고.”


  닫히는 문 뒤로 나오미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순간 멍해졌다가 얼굴이 빨개져서 그녀의 말이 뜻하는 바가 뭔지 알아차린 머리를 원망했다. 아니 그러니까, 얼굴을 감싸며 애꿎은 쿠로오씨만 노려봤다. 진짜 쓸데없이 다정해서. 어느새 다 마른 머리를 쓸어 넘기며 침대로 향했다.



***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꼼꼼치 않게 쳐진 커튼 사이로 푸른 빛이 새어 들어왔다. 베게 맡을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켰다. 오전 9시 15분. 나는 하품을 하며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침대 맞은편 곱게 펴진 소파베드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나오미가 보였다. 옷차림이 어제 나간 그대로였다. 쟤 설마 씻지도 않고 그냥 자는 거야? 미세한 술 냄새가 났다. 옆으로 돌아누워도 있어야 할 사람은 없었다.

 

  “깼어?”


  샤워하고 나왔는지 상쾌한 바디워시 향을 풍기는 쿠로오씨가 눈만 깜빡이고 있는 내게 걸어왔다. 


  “…설마”

  “조깅 하고 왔어요?”


  이불을 좀 더 끌어모으며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열리는 입을 다시 다물었다. 대단하다 진짜. 혼자 무슨 전지훈련 왔나. 아침 사 왔는데. 아무래도 못 먹을 거 같지? 나오미를 힐끔 보며 그가 속삭였다. 부엌 겸 거실에 안방 역할까지 하는 스튜디오에 나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서 불이라도 켰다간 무슨 소리를 들을지 안 봐도 훤했다. 나는 느릿느릿 일어서 화장실로 향했다. 


  “일단… 아침부터?”


  어제 잠들기 전 미리 찾아놓은 식당과 캡쳐해놓은 지도를 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는 쿠로오씨와 나, 둘밖에 안 탔는데도 벌써 비좁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 맛집과 명소를 소개하는 앱에서 높은 별점을 얻은 식당이 있었다. 핸드폰을 유심히 들여다보는데 그가 내 목도리를 여며왔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나서며 나는 제대로 맨 목도리를 한번 만졌다가 어제 나오미의 말이 떠올라 쿠로오씨를 불렀다. 


  “그… 나오미 앞에서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이런 거?”

  “그니까, 이거... 목도리 매주는 거나, 어제처럼 머리 말려 주는거나. 아무튼! 하지 마세요.”

  “왜?”


  문을 열다 말고 그가 나를 돌아봤다. 


  “그냥, 아 몰라요. 하지 마세요. 아무튼”


  나는 그가 열다 만 옆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밖은 오전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어둑했다. 비가 올 것처럼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있었다.


  “왜? 싫어서?”


  나를 따라 밖으로 완전히 나온 그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아 그냥 좀 하지 말라면 하지 마요. 나는 철문을 밀며 거리로 완전히 걸어 나왔다. 싫은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나오미가 지적하지 않았다면 그의 행동이 잘못된 줄도 몰랐을 것이다. 잘못된 행동...은 아니지 않나. 응 내가 싫어? 나는 나를 멀거니 바라보는 그의 곧은 시선을 피하며 우물거렸다. 


  “…아니, 내가 쿠로오씨를 왜 싫어해요.”


  그의 행동이 싫은 게 아니라. 뭔가 이상하잖아. 그런데 무엇이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당신이 너무 다정해서 싫다고? 당신의 배려가 너무 간지럽다고? 그렇지만 이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그와 알게 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곧 있으면 대학교 2학년이 되는 지금까지 그는 변함이 없었다. 


  “그럼 됐어. 좋아하는 사람한테 잘 해주는 게 뭐가 문제야?”


  또다. 그는 종종 나를 그의 좋아하는 범주 안에 망설임 없이 밀어 넣었다. 저게 얼마나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지도 모르고. 나는 짜증스레 그를 보다가 결국 졌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문제라고요. 당신은 별 생각 없이 내뱉는 말에 사람들이 오해한다니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그가 나를 이성으로써 좋아하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그런데도 그의 다정함은 종종 나조차도 헷갈리게 했다. 그가 가끔 나를 정말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봐서 


  “알겠으니까 나오미 앞에서 그 소리 절대! 하지 마세요.”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의 그가 대답하지 않았다.


  “너 진짜…”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쿠로오씨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번에 한숨을 내쉰 건 그였다. 


  “후... 알았어.”


  나는 그가 나를 정말로 좋아하는 건 아닌지 이따금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파리에서의 첫 식사가 미국식이라니 좀 웃기다. 그렇죠?”


  식당으로 걸어오는 내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주문하고서도 조용한 그가 이상해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식당 내부를 둘러봤다. 미국 영화에서 흔히 볼법한 분위기였다. 대꾸 없는 그가 진짜 기분이라도 상했나 싶어서 말없이 그를 보는데 눈이 마주친 쿠로오씨는 평소 같은 웃음을 짓더니 그러게. 그래도 여기 맛집인가 봐. 하며 대꾸를 해왔다. 상냥한 종업원이 셰이크를 가져다줬다. 나는 그게 또 웃겨서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맛이 다른 셰이크를 보며 웃었다. 


  “왜?”

  “아니 웃기잖아. 누가 아침부터 초코셰이크를 먹어요.”


  야무지게 올라가 있는 휘핑크림을 퍼먹던 그가 내 말에 웃으며 그러는 너도 시켰으면서. 하더니 맛있어 맛있어하며 빨대에서 입을 뗐다. 난 쿠로오씨가 시켜서 시킨 거 거든요. 지금 커피 마시면 이따 못 먹으니까.


  “Thank you. Merci.”


  주문한 오믈렛까지 모두 나오고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츳키 이제 먹어도 돼?”

  “네네 드세요.”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그가 웃겼다. 나는 사진을 다 찍고 치즈와 버섯이 가득 들어있는 오믈렛을 갈랐다. 와, 진짜 맛있어. 어때요? 완전 맛있어. 내 거 먹어봐. 그가 포크 가득 음식을 떠 내게 내밀었다. 맛있어? 응 맛있어요. 

  양이 하도 푸짐해서 반 밖에 못 먹었다. 밀크셰이크를 마저 먹으며 쿠로오씨 쪽으로 접시를 밀었더니 그가 익숙하단 듯 내가 남긴 것을 먹기 시작했다. 진짜 잘 먹네. 니가 못 먹는 거야. 네네. 나는 핸드폰으로 어제저녁 열심히 캡쳐해둔 화면을 훑었다. 


  “일단 유심칩을 먼저 사고”

  “뭐하지…흠, 쿠로오씨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쇼핑”


  나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 입안 가득 오믈렛을 집어넣는 그를 바라봤다. 쇼핑이요? 그가 쇼핑이라고 할 줄은 몰랐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웬 쇼핑? 뭐 사게요? 


  “너 겨울옷 제대로 안 챙겨왔잖아. 여기 생각보다 춥네.”


  푸흐흐 나는 결국 웃음이 터졌다. 그럼 그렇지. 딱히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생각외로 날씨가 추웠다. 날은 흐렸고 바람이 강했다. 계속 돌아다닐 텐데 가지고 온 옷은 얇은 옷뿐이었다. 그래요 그럼. 안 그래도 사고 싶었던 브랜드가 있었던 참에 잘됐다 싶었다. 이참에 오늘 기념품이나 가족들에게 줄 선물까지 한꺼번에 사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츳키 그거 알아?”


  어디로 가야 할지 머리를 요리조리 굴리고 있는데 그가 한톤 더 낮춘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뭘요? 


  “여기 동양인 우리밖에 없어.”

  “어, 그러네요. 근데 그게 왜?”


  나는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종종 보여도 동양인은 우리뿐이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 아무도 못 알아들어.”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안 어울리게 진지했다. 


  “You know what I mean?”


  웃음이 능글맞았다. 


  “뭐래 진짜.”


  나는 웃으며 빨리 먹으라고 그를 재촉했다. 그의 말대로 아무도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기분이 이상했다. 묘한 해방감이 들었다. 낯선 도시 속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눈앞의 쿠로오 테츠로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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