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재주의: 약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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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적응의 생물이라더니 이제는 일하는 손도 제법 야무지게 변했다. 에이린은 종잇장처럼 빼빼 마르고 험한 일이라곤 안 해본 티가 줄줄 흘러 영 못 쓸 것 같던 인상의 신입이 어느 정도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안도했다. 고용주가 직접 꽂아 넣은 인물이었다. 가능하면 얼굴 붉히지 않고 지내었으면 싶은 마음이었는데 에이린에게도 그에게도 다행스럽게도 완전히 엉망이지는 않았다. 

물론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며 에이린이 카페에 투신한 세월이 있는데 진짜로 못 써먹을 인물이면 고용주의 친척이 아니라 고용주의 할애비가 와도 유니폼을 빼앗고 쫓아냈겠으나, 제헌의 경우엔 좀 뺀질대긴 해도 적당히 눈치가 있어 최악은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엉덩이를 걷어차 문밖으로 쫓아내진 않아도 될 수준까진 봐줄 수 있었다. 

물론 트레이 드는 폼이 영 나아지지 않기도 하고 접시 몇 개 올렸다고 손목이 바들대는 꼴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데다 쓸만한 서버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할 꼴이었다. 그러니 제헌이 에이린의 마음에 차는 직원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단연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었다. 사적인 사이라면 몰라도, 부리는 직원으로는 도저히 높게 쳐줄 수가 없으니. 

에이린은 홀에서 잘 보이지 않는 한 구석을 보았다. 거기에 제헌이 있었다. 이것 보라. 지금도 복도 구석에 용케 숨어서 땡땡이를 치고 있지 않나. 

낙제는 아닌데 모범생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기본도 갖추기 전에 요령 부릴 생각만 하는 게 요즘 애들답게 약았다고 해야 할지. 첫인상은 좀 소극적으로 봤는데 의외로 사근사근하게 굴며 사람들하고 빨리 친해진다 싶더니만 온갖 나쁜 짓들만 골라서 다 어울리는 게 참 신경통처럼 거슬리게 만들었다. 중증 질환은 아닌데 딱 그 정도로 신경 쓰이게 구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어디서 그런 학교라도 나왔나?

쨍그랑!

에이린이 제헌의 뺀질거림을 어디까지 봐줘야 할지 고민하는 중에 엉뚱한 곳에서 일이 터졌다. 서버 한 명이 실수로 치우던 접시 하나를 떨어트려 박살 낸 것이다. 인터뷰할 때 인상은 꽤 좋았는데 한 달쯤 일을 시켜 보니 가끔 초보도 안 할 실수를 하는 게 일하는 중에 다른 곳에 정신 파는 습관이 있는 게 단점이었다. 그러면 꼭 이렇게 사고를 쳤다. 

어째 새로 들어오는 애들마다 이런지. 레이처럼 고집을 부려서라도 마음에 차는 애들만 뽑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게 중년의 위기 어쩌고 하는 그런 건가? 에이린이 한 달 겨우 채운 덜렁이를 어째야 하나 고민하다 문득 제헌을 보았다. 딱히 무슨 의도가 있어서 본 것은 아니고 어쩌다 고개를 들었는데 거기에 제헌이 있었다고 하는 쪽에 가까웠다. 

제헌은 일어나는 중으로도 볼 수 없고 주저앉던 자세라기에도 모호한 몸짓으로 어정쩡하게 굳어있었다. 상태가 좀 이상한데? 얼핏 보기에도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방금까지 교묘한 위치에 숨어서 휴대폰을 만지작대며 땡땡이의 꿀맛을 보던 사람의 낯빛이 아니었다.

「제헌 씨 어디 아파요?」

에이린의 목소리에 제헌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이상할 정도로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불안하게 움직이는 눈동자까지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괜찮아요.」

「괜찮기는. 놀라서 그래요? 깨 먹은 게 하루 이틀인가 새삼스럽게……. 혹시 몸이 안 좋은 거면 휴게실에서 좀 쉬어요. 안색이 너무 창백하네.」

「전 정말 괜찮아요.」

목소리도 힘이 하나도 없이 떨리는 게 정말로 하나도 안 괜찮아 보였다. 

「내가 안 괜찮고 손님이 안 괜찮아요. 지금 본인 얼굴이 어떤지 몰라서 그래요. 식은땀 좀 봐. 진짜 어디 아픈가본데?」

「그럼… 제가 머리가 좀 아파서…….」

재차 권하자 제헌이 못 이기겠는지 중얼대듯 말하곤 휴게실로 향했다. 비틀거리지는 않았는데 걸음걸이도 절인 채소처럼 영 안 좋아 보였다. 부축이라도 해줘야 하나 싶어 뒷모습을 지켜보았지만 에이린으로서는 아무래도 홀의 상황이 더 신경 쓰였다. 

그사이에 덜렁이 신입이 손까지 베였다. 에이린은 그를 휴게실에 약 있다고 보내버리고 다른 직원 하나랑 깨진 그릇을 치웠다. 제헌에 대해서는 나중에 단주에게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혹시 지병이 있거나 한데 제대로 전달을 안 한 거라면 꼭 때려줘야지.

「대걸레 있지? 그걸로 이 주위를 훑어. 파편이 멀리까지 튀었을 수 있으니까.」


휴게실은 조용했다. 제헌은 불 꺼진 휴게실 안에 혼자 멍하니 있었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상념이 들어차서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생각을 맺지 못했다. 손이 차가웠다. 제헌은 떨리는 손을 억지로 감싸 쥐고 떨림이 멎기를 기다렸다. 초조했다. 제헌의 얼굴에 어딘가 텅 빈 것 같기도 하고 간절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이 떠올랐다. 제헌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다리를 떨다 못 참고 일어나 서성거렸다. 머리가 아팠다. 어디서 가전제품이 돌아가는지 무슨 소리가 나는 것도 같고 그냥 착각인 것도 같았다. 편두통이 제헌을 괴롭혔다. 호흡을 골라야 했다. 그런데 숨은 어떻게 쉬는 거더라? 제헌이 이마를 벽에 박고 나지막이 욕설을 씹어댔다. 

그때 휴게실 문이 열렸다. 제헌도 깜짝 놀라 열린 문을 보았다. 문을 연 이는 바로 들어오려다 안에 다른 사람이 있자 흠칫 멈춰 섰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사람이 있어서 그도 놀랐거나 아니면 낯빛이 창백한 사람이 불도 안 켜고 방 안에서 인상을 박박 긁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제헌이 간단히 그를 살폈다. 입고 있는 옷차림을 보니 카페 직원이었다. 제헌은 잠시 뒤에 그의 얼굴을 기억 속에서 떠올릴 수 있었다. 시간이 안 겹쳐서 특별히 대화는 한 적 없지만 카페 안에서 얼굴을 본 사람이었다. 상태가 불안정해서 그런지 기억도 잘 안 떠올랐다. 

그럼 이제 어쩔까? 제헌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냥 편하게 들어오세요. 머리가 아파서 쉬고 있었어요.」

「아, 네.」

제헌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소파 한쪽에 가 앉았다. 그는 손을 다쳤는지 한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쭈뼛대며 들어오더니 구급약이 든 서랍을 제대로 못 열어서 쩔쩔맸다. 아무래도 빨리 해결하고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아 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통은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고 제헌을 꾸준히 괴롭혔다. 제헌이 다가가는 걸 몰랐는지 직원이 흠칫 놀랐다. 참 잘 놀라는 사람이었다. 제헌은 그 대신 약을 꺼냈다. 

바르는 연고와 밴드를 꺼내주는데 안에 든 진통제가 눈에 들어왔다. 약국에서 살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진통제였다. 직원들 쓰라고 있는 구급약이니 제헌 자신이 써도 문제는 없을 듯했다. 제헌은 혼자서 악전고투를 벌이던 직원의 손에 밴드를 제대로 붙여주고 생수를 꺼내 약을 먹었다. 그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걸 보고서야 자신이 진통제 다섯 알을 한 번에 먹는 건 좀 오버였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 아닌가. 제헌은 입꼬리를 어떻게든 당겨 올리며 말했다.

「제가 두통이 좀 있어서요. 약 먹고 쉬면 낫겠죠.」

「많이 아프신가 봐요.」

그런 모양이었다. 제헌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는 제 것 같은 간이침대에 담요를 덮어쓰고 누워버렸다. 명백히 지금 상황을 회피하는 행동이었으나 제헌은 지금 환자였으니 어쨌든 쉬는 행동이 부자연스러운 건 아니었다. 

손을 다친 사람은 구급약을 다시 넣어두고 불을 끄고 나갔다. 다시 어둑해진 휴게실에 문 닫는 소리가 났다. 제헌은 더 늦기 전에 조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어둑하게 물든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사람이 생활을 하면 쓰레기가 생긴다. 동물은 쓰레기를 안 만들어낸다고 인류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은 자기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좀 많이 과장을 한 걸 본인도 알 터였다. 동물도 사람만큼 한 장소에 모여서 산다면 금방 주위를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게 확실했다. 다만 황폐화 시키는 구성이 다르겠지. 

그 정도가 제헌의 평소 생각이었으나, 제헌은 여기서 나오는 쓰레기를 보면서 그 주장에 약간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카페에는 직원도 여럿이고 손님도 많이 오가니 쓰레기가 어마무시하게 나왔다.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 다른 걸 제외해도 하루에 나오는 빈 우유통 숫자만 해도 엄청났다. 그리고 그걸 버리는 것도 사람의 노고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노고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 제헌은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면 골목에서 담배 한 대씩 피우고 들어가는 여유를 부렸다. 정확히는 농땡이지만 제헌의 입장에선 그게 그거니까. 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헌의 마음이 달콤한 여유를 만끽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헌이 담배를 꺼내 필터를 입술로 문 뒤 담배갑을 거꾸로 들고 탈탈 털었다. 그런다고 빈 내용물이 뿅 생겨나지는 않았다. 제헌은 신경질적으로 담배갑을 손안에서 구겨 바닥에 던졌다가 곧 주워서 제대로 버렸다. 바깥에 나가지 않는 제헌 대신 필요한 걸 단주가 사주고 있으니 제헌이 피우는 종류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연달아 피웠더니 약간 어지러웠다. 이게 다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탓이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이는 너무 늦어지면 누군가 이상하게 여길지도 몰라 제헌이 초조함을 숨기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제헌은 자기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지막히 말했다.

「늦었잖아요.」

제헌이 기다린 사람은 부러 몸집이 커 보일법한 옷을 껴입고도 도무지 성인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덩치가 작았다. 본명은 몰랐고 남희에게 소개받은대로 클록이라고만 불렀다. 

이름이 무색하게도 클록은 도무지 시간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늦는 걸 곱게 봐주는 성질도 아니라 이래저래 좋지 못한 상대였다. 클록으로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동네까지 가서 심부름이나 하는 게 썩 흡족하지는 않을 테니 제헌에게 퉁명스러운 것도 이해는 가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닌가. 다른 방도가 있다면 제헌도 그걸 택했을 것이다. 어차피 마주할 사이라면 서로 얼굴 붉힐 일 없도록 하는 게 낫지 않나?

물론 클록은 제헌의 불만 표시에도 어깨를 으쓱하고 가볍게 넘겼다.

「남의 영역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끔찍한데. 아줌마가 시킨 거 아니면 나도 이런 짓 안 해.」 

말이나 못 하면. 제헌은 혀를 찼다. 클록은 제헌과 마찬가지로 주위를 슥 둘러보며 제헌의 손에 작은 물건을 쥐어주었다. 그의 별명을 떠올리게 만드는 손목에 있는 유난히 크고 요란스런 시계가 번쩍였다. 제헌은 클록이 준 것을 확인차 눈으로 스치듯 일별하고 손 안에 감추듯이 감싸쥐었다. 언제나와 같은 물건이었다.

「아무튼 난 내 할 일 끝냈으니 다시 보지 말자고.」

클록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씩 웃고는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레게머리 아래 두피에 있는 문신이 드문드문 드러나 있는 클록의 뒤통수가 멀어지는 걸 보며 제헌은 거의 다 피운 담배의 필터를 이로 약하게 물었다. 그래도 이걸로 살았다. 제헌은 클록에게서 건네받은 작은 통을 손 안에서 굴리며 안도했다.

그러나 안도의 순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제헌은 제자리에서 펄쩍 튀어 오를 뻔 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동생이 여기서 아는 사람이 있던가?"

돌아보니 튀는 염색머리의 남자가 반듯한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껄렁한 자세로 문간에 서서 제헌을 내려보고 있었다. 100m 밖에서 봐도 단주였고 가까이서 봐도 단주였다. 

의문문 형식이지만 평소보다 날카로운 단주의 어조로 보아 절대로 그대로의 질문이 아니었다. 언제 저기 서 있었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봤을까? 귀신도 아니고 왜 소리 없이 나타나고 난리야?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제헌은 일단 아무렇지 않은 척 잡아뗐다.

"아뇨. 길 물어보던데요. 관광객인가 보죠."

제헌이 검은 돌로 된 벽에 콕콕 찍어 불씨를 꺼트린 뒤 꽁초를 버렸다. 볼일이 끝났으니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단주가 제헌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악! 뭐예요!"

난폭한 행동에 항의했으나 단주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단주는 말 없이 힘으로 제헌의 손목을 비틀어 손아귀에 있는 플라스틱 통을 억지로 빼내었다. 제헌이 뺏기지 않으려 미약한 반항을 했지만 물론 눈곱만큼도 소용없었다. 어른이 어린애 손목을 비틀어 쥔 것을 빼앗듯 간단하게 빼앗긴 것까진 이미 일어난 일이라 받아들인다고 해도, 제헌이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도록 내버려 둘 이유는 없었다. 제헌이 얼른 손을 뻗었다.

물론 턱없이 부족했다. 단주는 제헌이 다시 약통을 채가려 드는 걸 산들바람에 펄럭이는 옷자락을 정리하듯 무척 손쉽게 넘기며 라벨에 적힌 글자까지 읽었다. 어디까지 가나 보자고 용을 써도 제헌의 패배는 명약관화였다. 필요한 부분을 다 읽은 단주의 시선이 제헌에게 가 닿자 제헌도 약통을 빼앗으려 버둥거리는 걸 포기했다. 이미 감출 수 있는 수준을 지났다. 단주가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이상한 걸 모으는 취미가 있나 봐. 이거 내가 알던 동생 이름하고 다르다? 내가 동생 이름을 헷갈리는 건가 아니면 동생이 불쌍한 유실물을 주운 건가."

다 알면서 물어보는 건 약올리려는 건가? 제헌은 힘에서도 순발력에서도 처참하게 밀린 다는 걸 아는 터라 몸으로 어떻게 하는 건 포기했다. 대신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적의의 표현이자 비협조 의사를 나타내는 선택을 했다. 제헌이 말없이 단주를 쏘아보았다. 물론 단주는 제헌이 쏘아보는 것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차라리 물방울을 떨어뜨려 바위를 깎는 게 쉬울 것이다. 

하지만 단주가 제헌이 노려보는 걸 무시한다고 해서 제헌의 입이 열리는 건 또 아니라 상황은 쉽게 교착에 빠졌다. 제헌이 그렇게 입을 꾹 다물겠다는 의사를 확고히 보이자 단주도 웃음기를 날리고 그로서는 드물게도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보다 낮고 단호한 음성이었다.

"이건 압수야. 내 카페에 약쟁이가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지."

물론 제헌이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주눅 드는 성미는 아니었다.

"누가 여기 있고 싶댔어요?"

"하루에 몇 알 먹냐?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그냥 말해."

손뼉이 마주쳐야 박수 소리가 나는데 이건 손톱도 안 박혔다. 제헌이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다든가 단주가 안 된다고 하긴 했어도 제헌이 나가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든가 하는 소리로 빠졌다면 화제를 돌릴 수 있었을 텐데 진짜 씨알도 안 먹히니 좀 허탈할 정도였다. 

혹시 몰라 제헌이 한 번 더 약통으로 손을 내뻗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당연하게 실패했다. 단주는 제헌의 손을 전부 흘려냈을 뿐 아니라 몸을 날리다 의도치않게 몸통박치기를 할뻔한 제헌의 어깨를 다른 손으로 텁 잡아 똑바로 세워주기까지 했다. 일단 몸으로는 절대 못 이긴다. 지금 자신이 뭘 시도하든 정말로 그냥 쓸데없이 힘 빼는 것밖에 안 된다는 걸 제헌은 참혹할 만큼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렇게 쓸 수 있는 방책이 무의미하게 모두 막히고 난 뒤에야 제헌이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개요. 그때그때 달라요. 아프면 더 먹을 때도 있고요."

"갑자기 끊으려면 힘들겠지. 하루에 두 알 줄 테니 참아보고 안 되면 나한테 얘기해."

단주가 제헌의 손에 딱 두 알의 알약을 놓아주었다. 복용량이 오락가락하기는 해도 두 알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갔다. 물론 약을 먹고 간에 기별이 가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터무니 없었다. 사실 네 개라는 것도 거짓말이었으므로 더욱 턱도 없는 개수였다. 

제헌은 입술이 댓 발은 나왔지만 이제 와 거짓말이었노라 얘기하는 건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만 할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성이 남아있긴 했다. 약쟁이로 찍혔는데 거짓말쟁이까지 되면 취급이 얼마나 나빠질지 상상력이 빈곤한 자라도 쉬이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지금보다는 조금 분위기가 좋아지면 그때 얘기를 꺼내는 게 나으리라. 포기가 아니라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였다.

여기서 자신이 딱히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걸 아는 터라 제헌은 그냥 알약을 손에 꼭 쥐고 단주를 휙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단주는 제헌을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다. 잔뜩 심통 난 얼굴인 제헌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단주가 제헌의 머리를 손으로 거의 움켜쥐듯이 하고 마구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는 건 당연했고 제헌은 두피가 아플 지경이었다.

"악! 하지 마요, 진짜!"

"어휴, 내 인생이 적적할까봐 말년에 너같은 걸 주웠나 보다."

"말년은 무슨 살 날이 구만 리인 사람이!"

"동생이 할 소리는 아니네."

단주는 낄낄 웃으며 제헌의 등을 팡 때렸고 제헌이 따가운 등짝을 어쩌지 못해 불 위에 올라간 마른오징어처럼 꿈틀대는 걸 놔두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가 손버릇도 안 좋고 성격도 진짜 더러웠다. 독한 염색약으로 두피를 그렇게 고문하면서도 아직 머리숱도 풍성하고 힘은 장사에다 허우대도 멀쩡하고 주님보다 높다는 건물주에다 자차 소유주였고 얼굴도 썩 괜찮고 나잇살도 없이 잘 관리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것까지 다 재수 없었다. 

제헌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단주가 간 곳을 보다 손을 펼쳐 손바닥에 놓은 두 정의 약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동안 늘어난 복용량과 쌓인 내성 때문에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제헌은 한숨을 삼키듯 그걸 주머니에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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