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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열여덟 !

W. 몸





아침에 눈을 뜨고 개운하다는 느낌과 함께 창문에서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면, 그것은 필히 네가 지각이라는 증거다. 고로, 나는 좆됐다.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다. 분명히 알람을 맞추고 잔 것 같은데 전혀 못 듣고 늦잠을 잤다. 대문 밖에선 망할 멀대놈이 지각했다는 걸 동네방네 알리고 싶은지 목청이 떠나가라 내 이름을 부른다.




“ 야 이지훈! 빨리 나와! 10분 남았다고! ”




화장실 문 앞에선 엄마가 나를 팰 듯이 국자를 쥐곤, 학교 안 가냐며 채근하고 있다. 당장 출발해도 아슬아슬한 타이밍이라 양치만 간신히 하고 밖으로 나오니 아까 그 멀대놈이 입을 댓발 내민채로 짝다리를 짚고 있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헛기침을 두어번 하니, 그러거나 말거나 다리를 들어 옆에 세워둔 스쿠터 (aka. 김민규 애마) 안장에 앉고 뒤쪽 안장을 툭툭 두드린다.




“ 뭐하냐. 빨리 안 타고. ”




전봇대 같은게 쬐까난 스쿠터 가지고 의기양양한게 웃겼지만 여기서 광대라도 씰룩거렸다간 이 새끼가 나를 놓고 갈 것만 같아서 아랫입술을 꾹 물고 뒷자리에 앉았다. 잘 탔냐. 하는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응, 탔어 빨리 가. 그러자 김민규 등 뒤로 분홍색 헬멧이 넘어온다. 새끼, 답지 않게 취향하곤. 헬멧을 쓰고 나니 휑한 김민규 뒤통수가 눈에 밟힌다.




“ 야, 니꺼는 ”


“ 됐다. 니나 쓰셔 ”


“ 그래ㄷ, ”




김민규가 뒤로 손을 뻗어 내 팔을 낚아 채, 제 허리에 두르게 한다. 갑작스런 행동에 본의 아니게 김민규 등판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꽉 껴안은 셈이 되었다. 어째 김민규 귓바퀴가 빨간 건 기분 탓인가.




“ 꽉 잡아라. 머리통 깨지기 싫으면. ”



스쿠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출발한다. 김민규의 등을 한번 거쳐 불어오는 싱그러운 향기가 좋았다. 하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맡는 차가운 공기에 으슬으슬해져 다시 김민규의 등판에 얼굴을 묻었다.




“ 근데 너 이는 닦았냐? ”

“ 당근이지. ”

“ 세수는. ”




아 진짜 쪽팔리게 .. 양치만 급하게 하고 나왔지 세수 하는걸 생각을 못했다.




“ 아이고 더러워라. ”

“ 아니다.. 학교가서 할 거다.. ”

“ 어쨌든 지금 안 한거 아니냐. ”




김민규가 뱉은 웃음이 허공으로 남실거리며 흩어졌다.



-



김민규 덕에 지각은 간신히 면했지만 수학 프린트를 놓고 오고 말았다. 짝궁이 이지훈 이제 뒤졌다.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도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와 잠깐만. 방금 오지는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파렴치 하지만... 김민규를 팔아야겠다.



수학 선생은 들어오자마자 여지없이 숙제 검사부터 하기 시작했다. 내 분단에 있는 애 두어명도 숙제를 안 한 모양인지 교탁으로 불려 나갔다. 드디어 내 앞에 선 선생이 주먹을 쥔 손가락에 껴있는 커다란 독수리 알반지를 책상에 탕탕 두드렸다. 니 숙제는 어딨냐. 나는 부러 아무렇지 않게 눈을 접어보였다.



“ 선생님. 제가요 숙제를 하려고 했는데요. 친구가 책을 빌려 가서 못했지 뭡니까. ”

“ 숙제는 책이 아니라 프린트 아니였나. ”

“ 아... 책에 프린트가 끼워져 있어서요 ”



옆에서 순영이 박 터지는 소리를 내며 내 연기력에 감탄했다.



“ 누가 빌려갔는데. ”

“ 2반 김민규요. 그 멀대 같은 놈 있잖습니까. ”



그럴 듯 했던 나의 기지는 선생의 집요함 앞에서 무릎 꿇을 수 밖에 없었다. 기어코 2반까지 찾아가 김민규를 불러내 사실 여부를 확인한 선생은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순간 두꺼운 입술 밑으로 드러난 금니가 존나게 소름끼쳤다.



“ ...미안해... ”



어색하게 들려오는 사과의 말에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시발 그 알반지가 얼마나 아픈지 아냐구 개새끼갸... 융통성이라곤 없는 김민규를 탓하며 젓가락이 부서져라 라면을 저어댔다. 픽 하고 웃는 김민규를 고개를 팍 처들곤 째렸다.



“ 진짜 싫어. ”

“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잖아 ”

“ 그게 미안한 사람 표정이냐? ”



아침에 데려다 준 고마움은 잊은지 오래였다. 나는 졸지에 이마에 동그란 붉은 자국을 새겨넣곤 방과 후 청소라는 벌을 얻었다.



“ 그래서 세수는 했어? ”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하는 게 다 느껴졌다. 이 새끼가... 사실 안 해서 뭐라 반박은 못했지만 너무 푹 익혀서 물컹해진 라면을 힘껏 씹었다. 존나 짜증나게 하네 진짜로. 알았어 안 할게. 그렇게 말하며 고개 숙인 김민규의 얼굴에 아직도 웃음기가 서려 있는 걸 눈치챘으나 괜히 힘 빼고 싶지 않아 모른 척 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을 흡입하려 시도했지만 채 식지 않은 면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아, 뜨뜨! 왜, 왜. 내 호들갑에 김민규가 퍼뜩 고개를 들어 살폈다.



“ 혀 데었다. ”



하고 혀를 내밀어 손 부채질을 하는 나를 못마땅하게 보던 김민규가 조심 좀 하지, 하고 물을 내민다. 

반쯤 남은 생수통을 받아 입구에 입술을 대고 마시려는데 갑자기 옆 반 여자애가 테이블 옆에 섰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처럼 숙제를 안 낸 얘를 재촉하러 왔을 반장 이겠거니 했다. 김민규. 하고 부르는 동시에 차가운 물이 내 입술을 타고 넘어왔다.



“ 나 너 좋아해. ”



뜬금없는 고백에 먹던 물을 뿜었다. 내가 결국 켁켁 대며 정신을 못차리자 김민규는 잠시만. 하고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괜찮어? 물어오는 말에 나는 됐다. 하고 쳐냈다.



“ 내 고백 받아 줄 생각 있으면 방과 후에 스탠드로 나와줘. ”



그리고 돌아선 여자애의 뒷모습에 벙찐 시선을 보냈다. 갑작스런 사례 때문인지 아직도 심장이 크게 뛰고 있었다. 그래서 쇄골 부근을 힘주어 문지르며 예쁘네. 했다. 사실, 괜히 뱉어 본 말인데.


“ 예쁘다고? ”



그렇게 되묻는 김민규의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정말 못 들어서 되묻는 것처럼 보였다. 그 빤한 얼굴을 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침이 삼켜졌다.



“ 뭐... 그래. ”

“ 그래서 사귈꺼냐. ”



내 말에 김민규가 천천히 시선을 맞춰왔다. 뭐야 얘. 다갈색 눈동자가 영롱하질 못했다. 사귈까? 혼잣말이 아니라 의문문임이 틀림 없었으나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눈만 꿈뻑였다.



“ 사겨? ”



다시금 물어오는 말에 방금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그 올곧은 시선을 애써 피하며 그걸 왜 나한테 묻는데. 하고 웅얼거리니 김민규의 입매가 싸늘하게 내려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속마음은 내보일 수가 없었다.



점심 시간 이후로 찜찜한 기분이 계속 됐다. 생각을 안하려고 해도 자꾸 비집고 나오는 아까의 풍경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음에도 잔뜩 굳어버린 김민규의 얼굴이 신경 쓰였고, 김민규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도 신경이 쓰였다. 그런 꺼림직한 기분을 안고 대걸레를 빨러 수돗가로 나왔다. 팔에서 대롱거리는 대걸레를 수돗가에 얹고 물을 트는데 문득 스탠드 위의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김민규와 아까 고백한 그 여자애였다. 스탠드 위에 선 채로 몇 마디 나누는 듯 하더니 김민규가 먼저 돌아섰다. 돌아선 김민규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김민규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빠르게 계단을 내려와 내 앞에 섰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다가 뭐하냐. 정신 차려. 하고 수도를 잠그는 김민규의 행동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여유로운 김민규의 뒤로 하교하는 아이들의 수다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 ...어떻게 했어? ”

“ 뭐가. ”

“ 아까 그 여자애. ”



그러자 아- 하고 김민규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이어질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왠지 모르게 울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안 만난다. ”

“ 왜, 예쁘던데. ”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곤 젖은 대걸레를 끌어내렸다. 걸레를 꾹꾹 밟는 내 귓가에 작은 한숨소리가 꽂혔다. 그래서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너를 무슨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몰라서.



“ ... 그냥 만나지 말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잖아. ”



내가 잘못 들었나 싶은 말에 행동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은 햇살이 김민규의 등 뒤로 쏟아지고 있었다.



“ 내가 뭔데. ”

“ 뭐? ”

“ 내가 뭐라고 그런 말을 하는데. ”



원망 섞인 목소리에 북받친 감정이 목 끝까지 차 올랐다. 너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 진짜 몰라서 물어? ”

“ 왜. ”



되묻는 말이 자잘하게 흔들렸다. 아이씨. 코 끝이 시큰거림을 느끼자마자 눈 앞이 일렁이며 앞에 선 김민규의 형태가 일그러졌다.



“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잖아. ”

“ 나한테 왜 이러는데 ”

“ 좋아한다고. ”



이윽고 눈에 매달렸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눈물이 채 턱에 닿기 전에 벅벅 닦아내고 코를 훌쩍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김민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건 반칙이다. 존나게.



“ 나는 여자도 아니고, 어디 도망 갈 용기도 없다. 도대체 왜 이러는데. ”



네가 또 한 걸음 다가왔다. 내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너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순서를 모르고 얽혔다. 그딴 건 상관없다. 하고 말하는 김민규의 목소리가 떨림을 담고 있었다.



“ 나는 니가 여자여도 좋고 남자여도 좋고, 저어기 외계인이어도 좋았을거다. 그냥 니가 좋아. ”


너는 늘 그랬다. 솔직함이 매력일 정도로 행동에 거짓이 없고 가감이 없었다. 그래서 융통성이 없다는 핀잔을 나에게 자주 들었다. 그리고 지금 쏟아지는 네 오롯한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사실,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좋아서 손을 잡고, 안고, 마주보며 웃었다. 그게 보통 친구 사이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일이라는 것을 한참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 무렵엔 모든걸 되돌리기에 너무 늦었었다.



“ 너 어쩌려고 이러는데. ”

“ 난 다 상관없다. 니 마음이 중요하지. ”



내가 그 말에 대꾸를 않자 김민규가 너는 어떤데. 하고 물어온다.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열다가도 꾹 닫기를 반복했다. 너는 확인해봐도 되냐. 그렇게 말했다. 곧 내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네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샅샅이 훑어내는 눈길도 느껴졌다.



“ 확인한다. ”


뜨거운 숨이 맞닿았다. 나를 둘러 싼 모든 풍경의 시간이 느려졌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면 파르르 떨리는 네 속눈썹이 보였다. 잠시 후 뜨거운 기운이 멀어지며 붙어있던 네 얼굴도 떨어졌다.



“ 너도 나 좋아하잖아. ”

“ 아닌데. ”

“ 거짓말. ”



응. 사실 새빨간 거짓말이다.





*

진짜 오랫동안 묵혀두던 규훈 청게입니다.

굉장히 재밌게 썼던 기억이 있네요.. 개그요소도 많이 넣었지만 풋풋하고 위태위태한 청게가 너무 보고싶었습니다.

이후에는 민규 시점으로 조금 각색해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다음 편에서 봐요~

당신을 조금만 벗어나면 고장 난 나침반 처럼 흔들렸다. | 정수경, 슬픔의 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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