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아프리카라는 시집을 알게 된 것은 [밤의 공벌레]라는 시 때문이다. 이 시가 돌아다니는 것을 인터넷에서 보고 나서 너무 인상이 깊었어서 시집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이 시는 왠지 나를 마냥 슬프게 만든다.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건드려 나를 울렁거리게 만든다. 이게 공감인지, 동정인지, 연민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어떤 의도로 이 시를 쓴 것인지 나는 아마 평생 알 수 없을테지. 이 시가 나에게 주는 것이 위로인지, 슬픔인지조차도 나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시의 어딘가는 나와 비슷한 부분이 있을거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마음에 자리할 리 없지. 몇 번을 읽어도 나는 여전히 나의 감정을, 나의 감상을 정의할 수 없다. 그래서 무작정 써내려가기로 결정했다. 형체라도 부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라는 첫 구절이 꽤나 와닿았던 것 같다. 그때 아마도 나는 좀 지쳐있었을 것이다. 무엇때문에 지쳐있었는지는 이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 문장을 본 순간 맥이 탁 풀렸다. 그래, 온 힘을 다해 살아낼 필요는 없지. 고민해왔던 것들이 단 한줄의 문장으로 명쾌해지는 느낌이었다.

화자는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했다. 사람은 어리석은 구석이 있어서 어떤 일이 자신에게 닥치지 않으면 남의 일로 여기곤 한다. 나의 일은 아니지, 하고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다가 직접 맞닥뜨리게 되면 완전히 상황은 달라진다. 일의 여파를 하나하나 구석구석 깨닫게 된다. 이게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운 일이었나? 이렇게까지 많은 감정을 수반하는 일이었나?

모든 일을 미리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럴 수도 없고. 그리고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틀린 맞춤법으로 사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게 틀렸다는건 나도 알고 너도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커다란 세상 앞에서 우리는 하나의 보잘것없는 사람에 불과하니까. 그러니까 함부로 비난하고 매도할 수 없다. 그것을 알고도 방관하는 것은 분명 부끄러운 일이지만. 끝없는 자기합리화의 굴레 속에서 좀 더 나은 나를 위해 분투할 수 있기를.

이 세상의 맞춤법이라는 것은 나를 조급하게 만든다. 나는 그래서 화자를 따라서 시계를 부수기로 했다. 흘러가는 시간들을 가만히 두지 않기로 했다.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묵묵히 얼음을 씹고, 밥을 먹을 것이다. 이정도면 됐다, 충분하다라고 느낄 때까지 멈추지 않고. 어느게 적당한건지 여전히 나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른의 사정, 어른의 걱정들은 잠시 묻어두고, 아니 할 수 있다면 영원히 묻어두고. 사실 어른의 것이라고 구분지을수도 없을 것이다. 어른이건 아이건 그건 숫자에 따른 구분에 불과하고 나는 여전히 나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들의 실체는 나의 사정이고 나의 걱정일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을 외면하기로 결정했다. 비겁할지 몰라도, 살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밤을 버텨내고 견뎌내는 것이다. 물론 언젠가 해는 또 뜰테고 햇빛 아래서 나는 적나라한 사정들을 마주해야겠지만.

화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이상하지, 얼굴을 가린다고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텐데도 얼굴을 가리고 나면 나는 조금 더 솔직하게 된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눈만 가리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안 보일거라고 생각하는 것 마냥, 두 손 뒤에서 긴장의 끈을 놓게 된다.

때로는 두 눈을 가리고 얼굴을 가리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완전히 가리기에는 빈 틈이 있어서 차마 입까지 가리지는 못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묻어두는 것들은 예상보다도 많다. 나의 말이 불러올 파장을, 변할 그들의 표정을 알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 익숙한 방식대로 깜깜한 밤에 기대어 혼자 조용히 되뇌이는 수밖에.

온 힘을 다해 세상을 살아내는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매우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온 힘을 다해 세상을 살아내진 않을테다.

적당히 힘을 빼고, 그냥 살아갈 테다. 부끄러움을 기록할 여백을 남겨두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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