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박효신 - 이상하다 / Acoustic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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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시간은 짓궂어서 원래 아쉬워할수록 더 빨리 달리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시간들을 붙잡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것도 인간의 숙명이라서.

아침부터 상다리가 부러질만한 식사를 선물 받은 나는, 그것도 모자라 터미널까지 태워다주시겠다는 어머님의 친절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중이었다. 버스를 타고 달렸던 비포장도로 위를 강다니엘 어머님의 자가용을 타고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차체가 이따금씩 들썩거렸다. 다른 점이라면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세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어머님은 직접 운전하시면서도 차가 튀어오를 때면 재미있다는 듯 웃으셨다. 동시에 하하- 소리를 내는 두 사람을 보며 역시 모자구나, 하는 생각으로 나 역시 미소 지었다.



“어머님, 감사했어요. 진짜 잘 있다 가요, 정말로.”

“나도 반가웠어요. 다음에 꼭- 또 와요.”

“그래도 되나요?”

“설마 빈말일라고.”


출발 시간은 왜 이렇게 또 빨리 찾아오는 건지. 아쉽게 손을 흔들며 버스 위로 올랐다. 간밤에 따뜻하게 깊은 잠을 잤지만, 그래도 나름 여행은 여행이라고 피곤했는지 서로 안전벨트를 하자마자 곧바로 하품이 쏟아져 나왔다.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스스로도 당황스러운데, 그런 나를 보더니 손을 들어 제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대게 하는 강다니엘. 그게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라 뭉개져가는 발음으로 그에게 말했다. 형, 무겁잖아요….


“개안타. 니가 나한테 기대면, 내가 그 위에 기대면 되잖아.”

“그래도 저릴 텐데.”

“괜찮다니까, 얼른.”


강다니엘이 여상한 표정으로 재촉하며 자신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늘 아쉽다. 내가 더 큰 사람이어서 강다니엘이 나한테 기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몸이든, 마음이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곁에 서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왜소한 사람이라, 먼저 강다니엘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얹는 것이다. 그런 내 정수리에 옆통수를 기대는 그. 그 무게감을 느끼며 내가 있음으로 그가 조금이나마 편안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음이 뜨끈해질 정도로, 간절하게.



***


버스터미널 역 근처에서 영화도 보고 오락실까지 갔다오니 하루가 다 저물었다. 역에서 내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 그 중간에 강다니엘의 집이 있었다. 우리는 그 앞에서 한참을 헤어지지 못하고 머무는 중이었다. 오늘도 내게 게임을 다 져 버리고는 다음에는 꼭 이기겠다고 엄두를 놓는 강다니엘. 귀엽다. 귀여워서 가기가 싫다. 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찼을 때, 꼭 그걸 읽기라도 한 듯이 강다니엘이 내게 물었다.


"자고 갈래?"

“네…?”

"아니, 다른 뜻은 아이고. 하루 종일 같이 있어서 그런가…“


그냥 물은 건데, 혼자 찔린 건지 강다니엘은 귓가를 긁적이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내 눈길을 단단히 붙잡는 그의 눈빛. 그리고 목소리.


”보내기 싫다, 지훈아.”


다른 뜻이어도 되는데. 방금까지 야한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의 말에 곧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겠지. 둘 다 피곤하고, 내일은 또 원망스럽게도 월요일이니까. 하지만 응큼한 생각 없이도 함께 있고 싶은 순수한 마음은 내 안에도 역시 존재했기 때문에, 나는 대답대신 강다니엘의 집이 있는 원룸텔의 입구로 발을 들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잔잔한 웃음소리에, 내 가슴에서 작게 팝콘이 터져 오르는 기분이다.



원룸 안. 온몸이 노곤노곤, 피곤해도 씻긴 씻어야했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며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반쯤 덮인 반달눈을 하고서도 좋다고, 피터와 뒹굴고 있는 강다니엘이 있었다. 내가 다 나른하다. 평화로워지는 기분. 그 시간을 깨버리는 불청객이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저러다 곧 잠에 들어버릴 것 같은 모습이다.


“형, 씻고 와야죠.”

“…5분만.”

“5분이 5시간이 될 수도 있어요.”

“우웅…….”


잠기운에 취했는지 옹알이를 한다. 귀여워 죽겠지만 그래도 안돼요. 그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고 끌어올리려는데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평소 멀쩡한 상태였어도 버거울 텐데, 이렇게 흐느적거려서야. 그래도 이렇게 재울 수는 없어서 끙끙대면서 열심히 힘을 써보는데, 갑자기 그런 나를 잡아 당기는 강다니엘. 화들짝 놀란 피터가 저 멀리 캣타워 위로 올라가고, 그 자리를 훨씬 큰 내가 가로챘다. 그럼에도 꼭 작고 귀여운 것을 보는 듯 몽글몽글한 미소를 짓는 강다니엘.


“그럼 뽀뽀.”

“해주면 일어날 거예요?”

“하는 거 봐서.”


귀엽네, 정말. 부리로 쪼듯 몇 번 입을 맞추니 울상이다. 왜 그러는 거지.


“클났다.”

“왜요?”

“계속 이러고 있고 싶어져서.”


그러더니 바라는 게 뭔지 명백하게, 입술을 쭉 내민다. 괜한 심술로 뽀뽀 대신 콧방울을 잡아버리자 알았어, 알았어. 하면서 그가 일어났다. 옷을 챙겨 화장실에 들어가려다가 뒤를 돌더니, 나를 향해 허공에 대고 쪽쪽, 뽀뽀를 하고 사라지는 그. 못 말리겠다, 정말. 졸리면 저렇게 애교가 많아지는 걸까. 그런 거라면, 앞으로 자주 졸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촉촉하면서 보송보송해진 강다니엘이 나오자마자 우리는 같은 침대에 누웠다. 부산에서 있었던 일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이제는 자자며 눈을 감은 상태다. 물론, 나는 눈을 뜨고 있었다. 강다니엘의 평온한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함이다. 흔히 잠든 아이들을 보며 천사 같다고들 하던데, 성인이 된지 곧 4년차를 맞이하는 강다니엘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내리깐 눈매가 티 없이 맑아보여서 정말 나보다 3살 형이 맞을까, 의심하기도 하는 것이다.

조용히 잠자고 있는 강다니엘. 그나저나 신기하다. 오늘은 왜 코를 골지 않을까. 어제 아침에 버스를 탔을 때에도 그러던데.


"신기하네..."

"뭐가."

"깜짝이야…!"


혼자 중얼거리는데, 강다니엘이 번뜩 눈을 떴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 했다. 이미 누워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자고 있었어요? 놀라서 묻는 말에 강다니엘은 잠에 취해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근데 뭐가 신기한데."

"그냥, 형 자는 줄 알고... 코 안 골길래 신기해서요."

"아… 맞나."

"형, 근데 왜 안자고 있었어요? 잠이 안 와요?"

"어, 잠이 안 오네."

"왜 그러지. 아까 너무 많이 잤나…."

"아니, 잠들기 아까워가. 너랑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응석받이 아이처럼 내 어깨에 다 말라가는 머리칼을 비빈다. 그런 여린 부분까지도 단단한 버팀목이 되는 건 이 사람밖에 없지 않을까. 입가까지 와 닿는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향기를 맡는데, 그가 나를 부른다. 지훈아.


“네.”

"…니는 와 가면 갈수록 좋아지노, 응?"


내가 할 말을 한다. 형이야 말로 자꾸 좋아져서 큰일인데. 어느 정도냐 하면-


“저도요. 전… 형이 너무 좋아서 무서울 정도예요.”

“…무서워?”

“음, 그냥요. 사실 되게 습관처럼 그러거든요. 소중한 사람이 제 곁에서 떠나는 상상을 해요. 형이랑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자, 하면서. 그래서 혼자 몰래 슬퍼하고… 그랬는데…….”


그 땐, 망가질 내 모습이 눈에 그려질 정도로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요즘엔… 형이 없는 게 아예 상상이 안 가요. 제 모습이 어떨지. 정말 하나도.”

“…….”

“그래서 더 무서워요. 그냥 백지라서.”


그래, 그건 공포다. 곧 내가 사라질 것만 같은 두려움. 지금에 와서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서 미리 준비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아니, 예전에는 정말로 대비하려는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습관에 가까울 뿐이다. 그가 내게서 마음이 떠서 멀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거,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 그래.”


그래,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인데. 하지만 형은, 내가 정말 별의 별 걱정을 다 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 혹시라도 우리 둘을 갈라놓는 슬픈 일이 일어날까봐 나는 종종 노심초사한다는 걸.


“길 걸을 때 조심해야 해요. 발밑 잘보고.”


어찌 보면 뜬금없을 말. 그러나 강다니엘은 잠시 눈을 크게 떴을 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한 마디에 잔소리를 줄줄이 풀어놓을 용기를 얻고.


“그리고 길 안쪽으로 걷고요.”

“알았어.”

“공사장 근처는 가지 말고.”

“너도.”


강다니엘이 내 말을 채갔다. 그 역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지. 가만 듣자하니, 나와 비슷한 말들이다.


“핸드폰 보면서 걷지 말고.”

“…네.”

“내가 없… 아니, 떨어져있을 때도 안전벨트 꼭 하고.”


아, 그의 걱정 어린 말에 가슴께가 뭉클해진다. 형 역시 내 말을 들었을 때 이랬을까. 그걸 확인하기 위해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너와 같다, 고 말해주는 듯이 쿵쿵 뛰는 심장소리….


그렇게 스러져가는 밤들 사이에서도 더 선명해져가는 것들이 있었다. 체온, 약속, 그리고 마음. 서로를 향한 모든 것들.



***


여행은 짧고 그 여운은 길었다.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강다니엘을 바라보며 종종 그의 가족을 생각했다. 특히 이렇게 함께 마주보고 밥을 먹을 때면 더욱이나. 평소 한식을 즐겨먹던 우리. 갑자기 입맛이 변덕을 부리더니 파스타가 먹고 싶어졌다. 그런 내 말에 오랜만에 그것도 좋겠다며, 어느 날 함께 지나쳤던 파스타 집으로 나를 이끌던 강다니엘.

내 앞에 휴지와 수저를 놓는 그를 바라보자니, 그날의 식탁과 따뜻했던 공기를 잊을 수가 없다. 나를 보며 웃던 눈길들, 그리고 내 밥그릇 위에 반찬을 올려주시던 손길. 그런 것들을 곱씹다보면 어렸을 적의 기억이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고등어의 통통한 살은 다 발라내서 우리한테 주시고는, 본인은 가시 근처 살만 쪽쪽 빨아 드시던 엄마. 같이 마주보고 밥 먹은 지도 참 오랜데, 지금 점심은 드셨을까.


“무슨 생각해?”

“…고민이에요.”

“뭐가.”

“엄마한테 문자를 지금 할까 말까요.”


내 말에 테이블에 놓여있던 숟가락의 손잡이 부분을 매만지며 강다니엘은 대답했다. 


“할까 말까 고민될 땐, 그냥 하라는 말이 있어.”

“그래서 하라구요?”

“뭐, 내가 하는 말은 아니고.”


그렇게 발을 쏙 빼버린다. 사실 알고 있다. 하라고 말하고 싶겠지. 그러나 내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일 것이다.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한다. 아들이, 어머니한테 연락하는데 잘못될 리가 없다. 조금, 쑥스러울 뿐이지. 마음이 저물어버리기 전에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문자를 보냈다.


-엄마, 점심 먹었어요?


답장이 언젠간 오겠지? 생각하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웅- 하고 진동이 울렸다.


[응, 엄마는 먹었지. 너는 점심 먹었어?]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돌아오는 답장에 나는 마음에도 눈시울이 있는 것처럼 약간 뜨겁고 시큰거렸다. 엄마가 나를 기다렸을지 아닐지는 모른다. 다만, 내게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가 더 중요하다.


-네, 지금 먹고 있어요.

[뭐 먹어?]


 답장을 보내자, 바로 돌아오는 대답.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사람 사이는 열쇠 하나로 쉽게 풀리고 마는 자물쇠가 아니다. 수학자가 평생을 들여도 풀 수 없는 난제 같은 것이다. 아무도 닿아보지 않은 미지의 공간을 탐험하는 것. 순탄한 길을 걷고 있다고 안심하고 있을 때 누군가 파놓은 구덩이에 발을 헛디딜 수도 있고,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곳에 의외로 숨 막히게 찬란한 꽃밭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파스타요.

[맛있겠네~ 친구들이랑?]


뭐라고 대답할까. 간단한 답장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뭔가, 어색한 느낌.

엄마와 나 사이에 꽃그늘이 드리우기까지는 다소 멀 구나, 실감했다. 아직은 너무 아득하고 흐려서 같은 풍경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무리다. 그냥, 전보다 아주 조금, 조금 더 자주 안부를 물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정도다. 그리고-


-아뇨, 애인이랑.


서로의 애인에 대해 약간은 열어두고 대화 나눌 수 있을 정도는,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답장을 한 후 유리로 덮인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내려놨다. 지금까지 사귀었던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주제로 엄마랑 얘기 하는 거 처음인데, 어떤 반응이려나. 의외라고 생각하시려나. 그나저나 답장이 없는 걸 보니 지금 많이 놀라셨을까?


웅, 웅-

갑자기 전화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화면을 보니 역시나 엄마의 전화다. 평소 차분하시던 분이 이렇게까지 급하게 전화하는 걸 보니까, 거의 기절초풍이신 것 같은데. 전화를 받으면 아마도, 그게 무슨 소리냐며 언제부터 사귄 건지, 어떻게 만났는지 우다다 질문 폭격을 날리시겠지. 그런 모습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그려지는 건, 어떻게든 내가 그녀의 아들이고, 그런 걸 상상하자니 웃음이 난다. 조금도 아프지 않고 엄마를 상상하기는 또 오랜만이었다.

 

“받아도 되는데.”

“아뇨, 길어질 것 같아서.”


진동이 멈추고, 혹시라도 마음이 상하셨을까 싶어 나는 바로 문자를 보냈다. 그 와중에 시켰던 음식이 서빙되고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 하고 멀어지는 직원.


-엄마, 저 지금 밥 먹는 중이라. 다음 주에 한 번 갈게요.


그러자 내려놓기가 무섭게 또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파스타 하나 먹기 참 힘든데도, 전혀 짜증이 나지 않는다.


[올 때 같이 와도 돼!]


…귀엽다. 엄마를 보면서 이런 말랑거리는 생각을 한 게 얼마만인지. 강다니엘과 내 사이를 엄마에게 보이는 날을 상상하자면 막막하고 두렵기도 하지만, 아직 오지도 않은 일로 지금의 식사를 망칠 수는 없다. 전화까지 이어지지 않는 게 내심 아쉬운 건지, 계속해서 받아도 된다고 중얼거리는 강다니엘. 아, 정말이지 사랑스러워서 어떡할까, 저 사람을.


“형, 오늘은 저 한 입 안 줘요?”

“어? 아, 잠만….”


아, 해. 강다니엘의 말에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자 그가 돌돌 만 파스타를 쏙 넣어줬다. 맛있나. 씹기도 전에 묻는 말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형이 주면 다 맛있으니까. 나도 내 앞에 놓인 접시에서 토마토 파스타를 크게 말아 강다니엘에게 내밀었다. 와앙, 하고 받아먹는 그. 우물거리는 모습을 바라보자니 내가 다 맛있고 흐뭇해서 저절로 미소가 배어나온다.


아, 입 안에 흘러들어오는 크림소스처럼 부드럽게 녹아드는 오후의 햇살. 그리고 행복감.



***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수선화에게 / 정호승



화요일의 저녁, 중간고사 때문에 잠시 쉬긴 했지만 여전히 동아리 활동은 계속 되는 중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조금 특별하게, 민현 형이 활동을 하는 마지막 날. 지금은 돌아가면서 이번 시집에서 감명 깊었던 시와, 그 이유를 말하는 시간이었다. <수선화에게>라는 제목의 시를 낭송한 유진이 그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요즘 계절을 타는 건지 뭔지, 되게 외롭고 좀 쓸쓸했는데… 이 시가 위안이 되더라구요.”


맞아, 나도. 그 말에 작게 손을 들며 동의하는 재환 형을 한 번 바라보던 유진. 그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말을 잇는 그녀.


“요즘 사람들 보면 다들 외롭잖아요, 그래서 위안 삼을 만 한 거 하나씩들 있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난 그런 거 있어.”

“뭔데요?”

“지영이.”


재환 형이 지영이, 하고 대답했다. 누구지? 애인인가? 다들 그런 생각인지 눈을 막 굴리는데 성우 형이 앞장서서 물었다. 그게 누군데?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


“우리 집 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우 형이 되물었다.


“이름이 진짜 지영이라고?”

“어, 왜, 뭐.”

“아니, 사람 이름인 줄 알고, 니 애인 생긴 줄 알았잖아-”


당연히 웃을 줄 알았는데 그는 근엄했다. 강아지 이름이 지영이라니, 진지한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러면 안 되지만 곱씹을수록 개그 같은데. 그래서 다들 웃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재환 형이 말했다.


“사실 뻥이야.”

“네에?!”

“우리 집 강아지 이름 뽀삐.”


뭐야! 아, 뭐예요- 능청스러운 한 마디에 다들 뒤집어졌다. 재환 형은 모두를 웃겼다는 사실에 뿌듯해보였다.


“아무튼, 사람보다 개들이 짱임.”


그 말마저도 왠지 웃겨서 다들 쉬이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런 분위기를 익숙하게도 정리하는 것은 민현 형이다.


“재환이는 강아지고, 너네는?”


그 물음에 옆에 있던 별이가 냉큼 대답했다.


“전 치킨이요. 최고야.”

“맞아, 그리고 치킨은 살 안 쪄.”

“그래그래, 살은 우리가 찌지.”


성우 형의 말에 모두가 피식 웃음이 터졌다. 실소도 웃음이라고, 공기가 옹성옹성 밝아졌다. 어쩌다보니 앉은 순서대로 말하는 상황. 다음 차례는 유진이었다. 아까의 시 말고 또 달리 위안 삼는 게 있다며 이야기를 하다가 멈칫한다.


“아니, 그런데 이런 플로우예요? 전 좀 진지한 거 말하려했더니.”

“우리 사이에 뭐 가려가면서 말하고 듣냐- 말해, 말해. 다 얘기해.”


화통한 재환 형의 말에 유진은 우울할 때 본다는 영화 몇 편을 소개해줬다. 그 이야기를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메모를 했다. 시집 뒤편에 연필로 적어내리는 민현 형.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핸드폰 메모장을 두드렸다. 그리고 강다니엘은-


“지금 적는 중이가.”

“네.”

“그럼 그거 나중에 같이 보자.”


작게 속삭이는 것만으로도 대신 기록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들 바쁜 와중에 혼자 여유로운 중이었다. 내 옆에 있던 성우 형의 차례를 지나 이젠 내 차례였다. 


“지훈이는?”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아, 내 위안이라면…


“…….”


내 옆에 있다. 살아 숨 쉬는 위로. 나는 조금 부끄럽지만 당당하게 형에게 대답했다. 강다니엘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저는 요즘, 외롭지가 않아서.”


이파리 다 떨어졌는데, 혼자 봄날이냐는 야유도 이미 예상한 바였다. 나는 그 소리들을 배경 삼아서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다니엘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움찔 떨리는 그의 다섯 손가락 끝.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민현 형이 묻는다.


“다니엘은?”

“아, 나는….”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끝내 대답하지 못하는 강다니엘.


“다른 사람 먼저 하믄 안되나. 내 좀 더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

“알았어.”


그렇게 대답하고 민현 형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자마자 내 귓가에 소근소근 속삭이는 목소리.


“갑자기 그러면 우야노. 내 진짜….”

“왜요, 싫어요?”

“…아니.”


억울하다는 듯, 그러나 행복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상태. 나는 이제 목소리만으로도 어느정도 그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너무 좋아서, 순간 말하려던 거 다 까먹었다이가.”


그렇게 투덜대듯 말해놓고는 반대로 더 긴밀하게 깍지를 껴오는 따스한 손. 그 온기를 느끼면서 나는 손바닥을 한 치의 틈도 없이 그에게 맞댔다. 그러자 곧바로 풋사과 같던 강다니엘의 귓바퀴가 먹음직스럽게 익어버리고. 대체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맑고 투명한 거야. 오직 나에게만, 나에게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욕심쟁이가 되어 있었다.


아아, 정말이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위로.

사랑스러운 나만의 위안, 내 강다니엘.



***


금요일 밤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과제 때문에 스트레스도 쌓였는데 우리끼리 뭉쳐서 술이나 마시자는 성우 형의 말에, 다들 모여들었다. 오랜만에 더 이상 동아리활동을 하지 않는 민현 형까지 함께였다. 별다를 것 없는 술자리라도 그 뒤에 과제를 미뤄놓은 상태라면 배로 재밌어진다. 우리는 소소한 이야기로도 크게 웃고 크게 즐거워했다.

잠시 술자리 가운데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는 사람들로 테이블이 휑해졌다. 나, 그리고 내 앞에 마주보고 앉은 강다니엘과 그 옆에 앉은 별이만 남은 상황. 사람들이 사라지자, 별이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강다니엘에게 물었다.


“다니엘 오빠, 좋아한다는 사람하고는 잘 돼가요?”

“내가 말해줄 것 같나.”

“아직 아닌가보네.”

“…….”


저 어찌 보면 별거 아닐 대화에 나는 마음이 조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잘 됐는데. 그것도 아주 많이. 형은 어디서든 이렇게 숨기고 다녀야 하는 걸까. 다소 오른 술기운에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툭 말을 던졌다.


“형, 잘 됐잖아요.”


조금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 저질러 놓고서도 괜히 의기소침해져서 뒷말을 이었다.


“그 때 잘됐다고… 저한테 그랬잖아요…….”


내 말에 별이와 강다니엘의 고개가 동시에 숙여졌다. 먼저 들어올려진 건 별이의 것이었다. 그녀가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지훈 오빠….


“저 다니엘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 누군지 아는데.”


방금 뭐라고….


“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를 보며 별이는 조금 난감해했지만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봄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남들 몰래 벚꽃사진에서 나를 확대해서 보고 있는 강다니엘을 보고 눈치 채고 말았다고. 그래서, 엠티 때도 서로 고민 상담도 하고 그랬는데….


“근데 잘 됐는지는 몰랐어요. 다니엘 오빠가 말 안 해줘서.”

“아….”

“다른 사람들은 모르죠?”

“응, 민현 형 빼고….”

“그러면 얘기 안 할게요.”


단단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별이는 뒤이어 그 음성보다도 더 단단한 말을 했다.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그런데, 둘 다 오빠들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둘이 밝히고 싶을 때 밝히는 게 당연하니까.”


고맙다고 해야 할까. 그보다는 더한데. 이 마음을 대체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밖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다가오면서 우리에게 묻는 재환 형.


“뭔 얘기하고 있었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강다니엘과 나를 대신하여 별이가 대답했다.


“그냥, 사랑 얘기요.”


그냥, 사랑. 그냥 사랑이라고.


재환 형과 성우 형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가득 띄우더니 우릴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맞다, 얘네 둘 다 뭐 있는 애들 아니야?”

“별이 너만 듣냐. 우리도 듣자.”

“근데 강다니엘 아직도 그 때 그 사람이야?”


재환 형의 물음에 강다니엘은 조금 굳은 표정이다. 왜지, 궁금해 하는데 그가 재환 형에게 대답했다.


“어, 당연하지. 근데 아직도라니.”

“아니, 얘기를 한 번도 안 하니까…. 미안, 그런 의미 아니다. 알았지?”

“…알았다. 아무튼 계속 좋아할 거니까, 그냥 그렇구나 생각해.”


재환 형은 그러고 나서도 강다니엘의 기분을 살피는 듯 했다. 강다니엘이 괜찮다는 의미로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 나서야 표정이 풀어진 형. 순수한 감탄으로 강다니엘에게 묻는다.


“와, 아직도 그렇게 좋아?”

“누군데 그래.”

“이제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냐.”

“다니엘 오빠가 오빠들한테 말해줄 것 같아요? 저번에 기억 안나요?”

“맞아, 맞아. 그 날 명언 남겼잖아요. 안 보는 데서도 좋아하는 말만 해주고 싶다고.”

“아, 그건 이제 개안타.”

“응? 왜?”

“…그 사람이 이젠 내가 뭔 말을 해도 좋다는데.”


아,


‘아무 말이나 해도 좋아요. 형이 저한테 했던 말 중에 싫었던 말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했던 말이다. 형이 좋다고 고백하고, 흠뻑 젖은 몸으로 그의 집에 가서 건넨 말. 그걸 강다니엘의 입으로 직접 전해 들으니… 왠지 부끄러운 기분.

뭐야, 언제 잘 됐어! 테이블이 실로 소란스러워졌다. 제 연애도 아닌데 난리가 났다. 아, 원래 남의 사랑 이야기가 더 재밌는 법이긴 하지만. 그 심정은 이해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인 걸 숨겨야만 하는 입장에서는 참 난감한 상황이다.


“그럼 마음을 담아서 지금 그 사람한테 하고 싶은 말 한마디.”


사정을 다 알고 있는 민현 형까지 저런 식으로 합세하니, 정말 내가 곤란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남들 몰래 형을 째려보는데, 그런 내 눈빛을 알면서도 내내 피하기만 하는 그.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에 헛웃음을 내뱉자 형은 그제야 나를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그리고 그 때, 진지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강다니엘의 목소리.


“근데, 그건 안 되겠는데.”

“뭐, 왜, 또.”


듣기도 전에 질색을 하는 재환 형 때문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그런 사람들을 보는 강다니엘 역시 새어나오는 숨으로 웃었다. 그렇게 온 테이블이 들썩이면서도 사람들은 오직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중이었다. 신호등의 초록 불처럼 드디어 그 사람의 입술이 열리고.


“말로는 다 안 담겨서, 내 마음.”


순간의 정적. 마치 사거리의 횡단보도처럼 이윽고 넘실대는 테이블.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반응했다. 어떻게 갈수록 더하냐며 강다니엘을 퍽퍽 때리는 재환 형. 그걸 맞으면서도 “자꾸 더 좋아지니까.” 같은 더한 대답을 돌려주는 강다니엘. 그런 둘을 바라보며 웃겨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민현 형. 그리고 어깨동무를 하고 숙연히 고개를 숙인 별이와 유진이. 나는, 그 모든 장면을 차례로 눈에 담은 나는. 담기지 않는다는 말 속에 찰랑찰랑, 금방이라도 넘칠 듯 가득 담긴 그의 마음. 그게 너무 벅차서 그저 테이블 밑으로 두 손을 꼼지락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성우 형의 말. 마치 징글징글하다는 듯한 목소리다.


“미친… 야, 말도 아끼다보면 똥 된다.”


그 익살스러운 말에 강다니엘은 아무 타격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러더니 남몰래 나와 눈을 맞추는 그. 아직도 강다니엘이 자신을 바라보는 줄 아는 성우 형이 내 옆에서 소름 돋는다고 오래 가기나 하라며 들썩거렸다. 그게 너무 웃겨서 나도 속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형,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하하-”


밤의 대학가. 술집. 스물 언저리의 사람들. 그리고 술과 따끈따끈한 안주. 

그런 것들을 생각했을 때 쉬이 떠올릴 수 있는 분위기가 있다. 생기 넘치며, 기분 좋게 소란스럽고, 움트듯 꿈틀대는 공기. 지금 내가 그 안에 있었다. 겉돈다는 감각 하나 없이 지금 내가 이 안에 있다. 그리고 그건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 곁에 살아줘서임을 잘 알고 있다. 내 맞은편에 앉아 옆에 있는 재환 형 쪽으로 턱을 괴고는, 테이블 아래로는 내게 발장난을 치는 강다니엘. 나는 그를 발짓으로 툭, 그를 불렀다. 그러자 나를 바라보는 그. 나는 입모양으로만 속에 가득 차오른 말을 전해보였다.


‘좋아해요.’


강다니엘 역시 입모양으로 대답했다.


‘내가 할 말인데.’


아니, 지금까지 형이 내게 먼저, 또 자주 해준 말이니 오늘만큼은 내가 해주고 싶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통화기록 가장 위에 있는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제가 할 말인데요. 제가 더 좋아하니까.


그리고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은 울리는 재환 형의 눈치를 살피며 제 핸드폰을 내려다본다. 그의 광대가 봉긋 부풀어 오르는 게 보이고. 내 마음 역시도 따라 부푼다. 여기저기 풍선 같은 마음들에 숨을 불어넣느라 바빠서, 헉헉대며 흘러가는 이 밤.


.

.

.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웬일로 조금 알딸딸해 보이는 강다니엘과 말똥말똥한 나. 그 반대의 경우는 잦았으나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강다니엘의 취하게 되기까지의 상황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술자리가 이어지고 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몇몇 사람들. 통금 때문에 먼저 귀가한 별이와, 내일 주말 반납 팀플이 있다며 우는 얼굴로 집에 돌아간 성우 형, 그리고 취준생이 밤까지 부어라마셔라 하는 건 곤란하다며 자리를 뜬 민현 형 때문에 테이블이 하나로 줄어들었다. 졸지에 머물던 테이블에 홀로 남게 된 유진이가 우리 쪽으로 건너왔다. 재환 형, 강다니엘, 그리고 나로 구성된 테이블 위에 즐비한 소맥의 흔적들. 그 안에서 눈치를 보며 자신은 과일소주 밖에 못 마신다며 곤란해 하는 유진. 그럼 다 같이 종목을 바꿔서 과일소주나 마셔보자고 재환 형이 제안을 했고 그에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을 때, 조그맣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있었다.


‘내는 그것만 마시면 취하던데… 개안나.’


단 한 번도 강다니엘의 주사를 보지 못했던 우리는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가볍게 넘겼는데, 정말로 취해버린 강다니엘. 나는 처음으로 그의 주사를 알게 되었다. 자꾸만 옆 사람을 껴안는 것. 그 대상이 나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도 이럴지는 모르겠다. 혹시라도 아무한테나 이런 거면 정말, 혼쭐을 내줘야겠지만. 아무튼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 취해서 망정이지, 진땀이 나서 죽을 뻔 했다. 마주 안고 싶은 걸 참아내느라. 나까지 취하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나는 그 후로 내내 사이다만 마신 상태였다.


취한 강다니엘은 귀엽다. 골목길을 걷는 내내 내 손가락 하나를 붙잡고 붕붕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말을 조잘조잘. 했던 말을 또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혀 성가시지 않았다. 그래요? 하고 대답해주면 응, 하며 볼에 입 맞추는 모습이 좋아서.

한참을 그렇게 걷는데, 앞에 어느 사람이 길을 걸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옆에 취한 사람이 있어서 걸음을 빨리 옮기지도 못하는데, 곤란하게 됐다. 매캐한 향기에 인상이 절로 구겨진다.


“으….”


그렇게 조용히 앓는 소리를 내자마자 얼굴에 덮여오는 커다란 손바닥. 꼭 마스크처럼 강다니엘의 큰 손이 코와 입술을 가리었다. 그러자 퀴퀴한 담배연기도 더 이상 숨을 방해하지 못했다. 그 상태로 몇 걸음을 더 옮기자 앞에서 흡연하던 사람이 옆 골목으로 길을 틀어 이내 사라졌다. 그제야 내 입가에서 손을 떼는 강다니엘.


“개안나.”

“네에… 고마워요.”


고맙다 말하자 강다니엘의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 그러자 스치는 생각.


“형은 담배 안 펴요? 요즘엔 못 본 것 같은데.”

“어, 끊은 지 좀 됐다. 그러고 보니까 꽤 됐네.”

“언제부터요?”

“…사실 이것도 너 때문인데.”


강다니엘은 스스로도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왜 나 때문이라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바라보니 그가 말을 이었다. 그 때 있잖아.


“호수에서 처음 만났을 때, 너 인상 찌푸리길래 담배 싫어하는구나 하고.”

“…….”

“그래서 니 만나는 날만큼은 피지 말자 했는데, 우리 생각해보면 거의 매일 만났다이가.”


그냥 그럴 때마다 사탕 먹고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레 끊게 되더라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별 거 아니라는 식이다. 왜 매번 강다니엘은 내게 있어서 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걸까.


“저 때문이라구요?”

“어… 와 그렇게 보노.”

“그게 말이 돼요?”


이게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나 먼저 생각하는 거야. 나는 그 정도로 해주지 못하는 것 같은데. 미안하고 고맙고 , 그 중에 어떤 마음부터 전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단지 온몸으로 강다니엘을 한 아름 껴안았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 안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 저 때문에 하고 싶은 거 안 참아도 돼요. 물론 담배는 몸에 안 좋으니까, 앞으로도 안 했으면 좋겠지만.”


갑작스레 안기는 것에 놀랐는지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한 번의 날숨과 함께 되돌아왔다. 말랑말랑해진 강다니엘은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훈아, 내가 안을 때 막 냄새난다고 니 인상 쓰면, 그거야말로 못 견딜 일이지.”

“저,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담배 피셔서 냄새 익숙하단 말이에요.”

“그러면 더 안 되겠는데. 아빠냄새 난다 하면 곤란하다이가.”

“아 진짜 형….”


이런 말을 들으면 숨 쉬기가 힘들어진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예쁜 문장들. 심호흡의 심 자는 깊을 심 자인 줄 알았는데, 마음 심 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든다. 말을 잃은 나를 대신해 밤을 채워주는 건 항상 강다니엘의 몫이다.


“내 아빠냄새 안 나지.”

“…네, 형아 냄새 나요.”

“…….”

“좋은 냄새.”


그에게 코를 박고 킁킁거리자, 강다니엘이 내게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마다 그의 가슴이 웅웅거리며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도 그렇지만 오늘따라 더 그러네.”

“뭐가요?”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

“역도 선수도 아이고, 참말로….”


귀여운 비유. 강다니엘의 볼을 마구 꼬집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참지 못하고 볼을 손가락으로 앙 잡았다. 그러자 뭐고, 하며 당황스러워하더니 이내 허허 웃어버리고 마는 강다니엘. 나는 집까지 남은 거리를 헤아려본다. 사실 10분이든 15분이든 그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이 사람의 곁이라면 어쩔 도리 없이 전부 짜리몽땅하게만 느껴지는 걸.


“형, 오늘 같이 있을래요?”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그러나 진심어린 말. 발언자조차도 놀랄 정도로 툭 튀어나온 말에, 더 놀라고 만 건 당연히도 강다니엘이었다. 안고 있던 나를 떼어내더니 진지하게 눈을 맞춰오는 그. 지훈아. 꽤나 무겁게 부르는 내 이름.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그런 말 하는 거 아이다. 특히 많이 마셨을 땐.”

“저 오늘 거의 사이다만 마셨는데.”

“아니, 내가. 내가 많이 마셨다고.”


내 뻔뻔한 말에 무너져 내리고 마는 강다니엘. 철옹성같이 보이는 그가 사실 이렇게 도미노 같다는 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내 어깨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더니 그가 내게 말했다.


“진짜로… 그러면 안 돼.”


이 정도로 애원하면 한 발 물러서 줘야지. 뭐, 어쩔 수가 없다.


“알았어요, 그럼 내일.”

“…….”

“아니면 모레?”


나로서는 진심이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살살 놀리는 것 같을 내 말. 강다니엘은 아, 진짜…! 하며 폭발하듯 몸을 들썩이더니 금방 가라앉았다. 나를 더 센 힘으로 꽉, 껴안더니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주말.”

“…….”

“주말로 하자. 내도 맘의 준비 좀….”


강다니엘이 간과한 점이 있었다.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그래서 내일은 토요일이고, 그 모레는 일요일이라는 점. 즉 내가 말한 내일과 모레가, 그가 말하는 주말과 같은 날들이라는 점이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그걸 까먹고. 강다니엘은 뭐가 잘못된 줄도 모르고 나를 껴안은 채로 내 옆 목에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비비고 있다.

…으…….

나는 속으로 탄식을 했다. 매달리듯 나를 껴안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 강다니엘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그럼 우리 주말로 해요. 토요일 밤.”

“…그래.”


아아….

알록달록한 사람, 예쁜 빛의 감정, 가감 없는 표현, 확고한 애정, 그리고 그걸 받고 있는 나.

요즘의 밤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


약속의 토요일 밤이 찾아왔다. 아침에 팀플을 하고, 점심에 카페 알바를 갔다 와서, 늦은 오후에 집에 들렀다가, 저녁에 강다니엘의 집에 와서 함께 떡볶이를 해 먹고 텔레비전을 봤다. 카페를 나서는 나를 보며 관린이 ‘횽, 오늘 왜 이렇게 굳었어요?’ 라고 물었고, 강다니엘의 집 안에 들어설 때 신발을 벗지 않고 들어갈 뻔도 했지만,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떡볶이를 먹고 저녁이 밤으로 변모하기까지도 우리 사이에 그렇게까지 대단히 묘한 기류는 없었다. 시작은, 재방송 예능 프로그램이 끝나고 강다니엘이 내게 ‘그 말’을 꺼냈을 때부터였다.


“…먼저 씻을래?”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한다. 사실 오기 전에 미리 거품을 잔뜩 내서 샤워도 두 번씩이나 하고 만발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기엔 지금 나는 머릿속이 너무 어지러웠다. 강다니엘 곁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 몸은 이미 벌떡 일어나 샤워실로 향하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 옷가지들을 벗어서 정리하는데 그제야 드는 생각. 아, 나 갈아입을 옷…. 그 때, 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밖에서 낮게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아입을 옷, 문 앞에 놔둘게.”


네…, 하고 어색하게 대답하니 저벅저벅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 방금까지도 강다니엘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으아, 나 지금 벗고 있는데…. 그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져서 나는 얼른 샤워기부터 틀었다. 아주, 아주 차가운 물로. 이 와중에 바디워시는 왜 이렇게 향기로운 건지. 그 날만 세 번째인 샤워였는데도 씻겨 내려가지 않는 부끄러움 때문에 내내 죽을 맛이었다.


먼저 씻은 내가 어색한 자세로 침대 위에 누워있을 때, 강다니엘도 금세 씻고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봐도 촉촉하게 젖어있는 그의 머리카락. 그가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며 수건으로 몇 번 더 머리를 털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많이 서먹할 줄 알았는데, 곧장 내 위로 올라와서 하는 말.


“만세.”


익숙하고도 귀여운 말에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예고도 없이 완전히 시야가 가려졌다. 허리부터 내 윗옷을 잡고 위로 한 번에 벗겨내는 손길. 옷에 눈앞이 가리었다가 금방 다시 밝아졌다. 강다니엘의 손에서 툭, 하고 침대 아래로 내 옷이 떨어져 내렸다. 그걸 따라 내 심장도 쿵, 내려앉는 느낌. 마음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눈앞에서 크게 움직이는 몸이 있었다. 팔을 엑스 자로 포개어 아랫부분을 잡더니 역시 마찬가지로 옷을 벗는 강다니엘. 나 정말… 이제 형하고 하는 구나……. 아, 문장으로 정리하니 더 외설스러운 느낌이다. 나 어떡하지.

속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나와 달리 강다니엘은 아까부터 조용히 나를 바라만 보고 있다. 보송한 천으로 꼼꼼히 닦아내듯이, 놓치는 곳 없이 훑어 내리는 눈동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내게 저 눈빛은 날선 바늘 같기만 하다. 금방이라도 펑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바들바들 떨리는 몸.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새어나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형…….”

“…….”


대답이 없다. 여전한 눈빛에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젠 좀 어떻게 해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왜 그렇게 보기만 해요….”

“…어떡하지, 진짜.”


그 때, 가까이서 뚝뚝 떨어져 내리는 먹먹한 목소리.


“너무 예뻐서 손을 못 대겠는데.”


귀하고 또 귀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이 배회하던 손이 천천히 다가왔다. 내 옆머리를 조심스레 귓바퀴 너머로 넘기더니 뒤이어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 나를 소중하게 쓰다듬는 강다니엘을 올려다보자니 여러 감정이 피어오른다. 여전한 부끄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닿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이 마음을 그에게 표현하고자 하는 용기.


“저 추워요… 안아주세요.”


내 말에 그는 그늘처럼 넓게 내 위에 드리워 나를 감쌌다. 고요히, 길게 숨을 뱉었다. 온몸으로 닿아오는 강다니엘 때문에. 둘 사이에 얇은 천 쪼가리 한 장 없이 이렇게 가깝게 껴안기는 처음이다. 살갗끼리 부드럽게 스치는 느낌. 강다니엘은 내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워 넣고 느리게 내 어깨를 감싸며 더 깊이 나를 안았다. 열기로 맞닿은 가슴팍으로 그보다 더 뜨거운 울림이 전해져오고.

숨소리와 심장박동은 음악이 되어 고요한 방안을 채운다. 난생 처음 듣는 선율에 빠져들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다. 온 신경과 감각이 곤두선다. 단지 껴안고, 잠잠 가만히 있을 뿐인데. 한참 그렇게 마지막인 것처럼 가쁘게 나를 안고 있던 강다니엘이 몸을 일으켰다. 눈길끼리 서로 만났다. 이건, 첫 만남이다. 생경함에 나는 깨닫는다. 이 사람은, 이런 어둠 속에서는, 이런 눈빛이구나. 잡아먹힐 것 같은 무게감에 나는 괜히 없는 애교를 짜내본다. 포악한 맹수를 앞에 둔 초식동물의 생존본능처럼.


“형, 저 뽀뽀.”


그러자 곧장 내게 다가오는 그. 입술에 닿을 줄 알고 미리 쭉 내밀고 있었는데, 목덜미에 콧등이 닿는다. 쪽, 쪽, 쪽. 턱 선에 세 번 입을 맞추더니, 옆 목에 두 번, 쇄골에 두 번. 그 위에 잠시 머물며 망설이는 듯 하다가, 그가 더 깊게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

.

(중략)

.

.


고개를 드는데 많은 감정들이 맺혀있는 얼굴이 보인다. 아아…, 정말. 그 얼굴이 전보다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사람들이 이래서 몸을 섞고 밤에만 볼 수 있는 서로의 모습을 탐하는 걸까. 땀이 송글송글한 얼굴을 쓸어 만지다가, 내 손끝이 닿자 열리는 그의 입술.


“사랑해.”

“…….”

“너무 흔해서, 그냥 흔하게 느껴질까 봐 지금까지 고민했는데….”

“…….”

“그건 다른 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내가 너무, 너무 네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지훈아….”


마음이 아프다. 왜 아픈 걸까. 이렇게 황홀한 말을 들었는데. 잔인할 정도로 뜨겁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말이라서, 고이려는 눈물을 막으려고 애를 써야만 했다. 이 사람 앞에서는 울어도 상관없지만, 그렇다면 이 말을 맑은 목소리로 해줄 수가 없을 테니까.


“저도요.”

“…….”

“저도 형, 너무-”


사랑해요, 그렇게 말하려는데 하지 못했다. 나 때문이 아니라, 갑자기 내 입술 위로 포개어지는 강다니엘 때문에. 처음부터 농도 짙게 혀를 섞으며 그가 내게 들어온다. 그리고 동시에 뭉근하게 움직이는 하체. 아, 설마….


“형….”

“지훈아.”

“네?”

“한 번만 더.”


내 콧등에 쪽, 입을 맞추더니 다시 움직이는 강다니엘. 제발, 아아…. 내 애원에도 대답이 없다. 대신 얼굴이라든지 팔뚝이라든지 닿는 곳이면 닥치는 대로 입을 맞추는 입술만이 있었을 뿐. 저절로 몸이 뒤로 넘어가고. 그러나 아무리, 아무리 내가 고개를 천천히 뒤로 넘기더라도 이 어둠이 밝아오는 속도보다는 빠를 터였다.

멀리 가물어지는 흐린 시야 안으로 보이는 시각은 아직 열두 시. 아아, 밤이 긴 게 원망스럽기는 처음이었다. 



***


아침이었다. 어제 그런 큰 일을 치르고서도 아침은 여상하게 밝았다. 무겁게 잠에서 깨어나니 강다니엘이 바지만 꿰어 입고 이미 일어나 루니와 피터에게 밥을 주는 중이었다. 조금 부스럭댔을 뿐인데 바로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는 그. 일어났나. 순하게 웃는 모습에 어제의 그 사람이 맞나 싶다.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는데,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목에 저게 뭐지.


“형, 목이 빨개요. 어디 쓸렸나.”

“이거 어제 니가 한 거잖아.”

“…네?”

“…아주 먹으려고 하던데, 내 목덜미를.”


……내가 했다고.

그렇다면 저게, 저게…. 어디서 들어 봤던 그 키스마크……. 머릿속이 삐끗거렸다. 그런 단어 하나 모를 정도로 성에 무지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직접, 그것도 내가 만든 걸 보는 건 처음이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강다니엘은 예상했다는 듯 평안한 얼굴이다. 저거 너무 목 한 가운데인데. 다른 사람이 보게 되면 어쩌려고…!


“왜 안 알려줬어요, 어제…!”

“교수님이 백문이불여일견이라 하시던데.”

“네?”

“이제 알겠지. 다음부터는 위에다 하면 좀 곤란하다.”


뻔뻔한 말에 따지려던 생각이 파스스 식어 버렸다. 일단 화장실 먼저 다녀와. 얼얼하게 굳어버린 나를 화장실로 밀어넣으며 강다니엘이 말했다. 왜지? 나 뒷머리 까치집 심한가, 지금.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화장실에 들어온 나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형, 제 몸이 이게 뭐예요!”


붉은 자국들로 얼룩덜룩하게 수놓아진 내 몸. 그게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라서 나도 모르게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그에게 소리쳤다. 그런 나를 보며 뒷머리를 헤집는 반라의 강다니엘.


“…나도 모르게. 뽀뽀해 달라하는데 툭 끊어져서.”


뭐가 툭, 끊어졌는지는 살살 올라오는 허리 통증이 아주 똑똑히 말해주는 중이었다. 따져봤자 나만 부끄러워질 뿐이라서 걱정인 것부터 묻기로 했다.


“형 근데, 이거 언제 없어져요…?”

“내도 모르겠다. 근데 그거 알아봤자 소용없지 않을까.”

“왜요?”

“없어지기 전에 그 위에 새로 또 생길 것 같은데.”


이해하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바로 이해해버려서 온몸이 멈춰버렸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아아, 진짜…!

나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게 아닐까. 이러다가 얼굴이 펑 터져버릴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도로 쏙, 집어넣고 화장실 문을 쾅- 닫았다. 하하, 여기까지 울려 퍼지는 강다니엘의 웃음소리. 이 부끄러움이 가라앉고 나면 형한테 얘기해야겠다. 이 집 방음이 별로라고. 거울 안의 나는 다시 봐도 얼룩덜룩한 모습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내게 남은 일곱 글자.


‘백문이불여일견’


아, 내 애인은 떡잎부터 남다른 사범대생. 아무리 나를 부끄럽게 할지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모범생, 나의 강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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