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11월, 쉴드 내에서 페기 카터가 한가지 가설을 재기했다.

비밀에 쌓인 암살자 조직, '윈터솔저(winter soldier)'가 슈퍼솔져 혈청 복용자들일 것이라는 가설이었다.


..그리고 그 혈청은, 스티브 로저스가 맞은 것과 같은 계열의 혈청, 혹은 그의 혈액을 이용해 만든 새로운 혈청일 것이라는 가능성 역시 재기되었다.


"일전 사로잡은 세 명의 윈터솔저의 검사결과, 그들의 몸에서 미약하게나마 스티, ...캡틴 아메리카의 유전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연구결과 그들은 캡틴 아메리카의 혈액을 이용한 슈퍼솔저혈청을 맞았을 가능성이-"


아이든은 그 모든 것을 가만히 들었고, 페기 카터의 제안을 수락했다.


"프리랜서 형식으로 날 고용해. 내 정보는 어디에도 남기지 말고. 쉴드 내부에 변절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어째서."

"...페기 카터, 쉴드의 국장을 생포하거나 사살하려면, 슈퍼솔저 하나로 충분했어. 내가 오기 전에 넌 이미 죽었어야 했어."


왜 아니겠어, 혈청 복용자가 적어도 셋 이상인데. 침체된 얼굴로 아이든 헌터가 확신했다.


"쉴드 내부에서 누군가가 정보를 흘렸다. 내가 돌아왔다고. 그리고 날 사로잡기 위해 혈청 복용자들을 보냈겠지. 내 전투력이나, 얼굴 따위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팔렸겠지. 그랬을 가능성이 높아. 넌 과거에도 충분히 죽을 수 있었어. 왜 하필 지금이겠냔 말이야."


혈청 복용자 셋. 페기 카터라는 인물의 전투력을 생각했을 때 과하다. 이건 오롯 아이든 헌터를 사로잡기 위해 보낸 것이다.


"쉴드 내의 변절자를 경계해서라도 내 정보는 기록하지 않는게 좋겠어. 차라리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던지, 아니면 디스크에 따로 기록해서 금고에 넣어놓든지."


아이든 헌터가 미간을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늘 개같은지.."








 *



"아이든, 나 이거 읽어줄래?"

"음? 어디 보자.. '과학의 진화(Evolution of physics)'... 너 이런 책 대체 어디서 구해오는 거니..?"


아이든이 허한 눈으로 아인슈타인의 저서를 만지작 거리며 물었다.


"쉴드의 도서관!"

"..거기 어떻게 들어갔니...?"

"짐이 데려다 줬어."


짐 모리타.. 죽여버릴까.. 아이든이 조용히 고뇌하며 책을 집어들었다.


"..로버트, 꼬맹아. 나는 진짜 읽기만 할거야. 설명 못한다..?"

"응! 상관없어!"


로버트 브루스 배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염병... 아이든은 말없이 절망하며 책을 열었다.


로버트와 사라는 최근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하며 부쩍 밝아졌다. 사라는 좀 더 자신의 젊음을 즐기며 새로운 취미를 찾기 시작했고, 로버트는 좀 더 제 나이답게 짖궂어졌다.


물론 아이든에겐 반길 일이었다. 과학책 읽어달라는 것만 빼면 말이지.


하여, 쉴드의 일만 뺀다면 아이든 헌터의 일상은 상당히 평화로웠다. 하지만 부락의 리더에게 완벽한 평화란 존재하지 못했다. 로버트에게 책을 읽어주는 와중에도 아이든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최악의 상황까지 점칠 수 있겠죠?'


자크 데르니에가 말했다. 몽고메리는 침통한 얼굴이었다. 덤덤 듀간이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최소한... 캡틴의 시신을 그들이 보유할 가능성이 있어.'

'..오.. 캡틴...'


게이브는 감정이 격해지는 모양이었다. 그가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할 동안, 아이든 헌터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 모든 가능성을 점쳐봐야지. 덤덤, 안 그런가?'

'....'

'그게 무슨 소리야?'

'최소한은, 그들이 캡틴 아메리카의 피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


아이든이 말했다.


'페기와, 누구냐... 그 하워드 스타크라는 사람이 스티브 로저스의 혈액을 가지고 있었지.. 페기?'

'그래, 설명할게. ..예전에 군대에 있을 당시 스티브의 혈액 샘플이 채취된 적이 있어. 총 다섯개였고, 그 중 네개는 미군에서 실험에 사용했고, 나머지 하나는 하워드가 가지고 있었지. 이후에 내가 다시 가져와서 완전히 없애버렸고..'


아이든이 책상을 두드렸다.


'요는, 사라진 네개 중 하나, 혹은 전부가 저 거지같은 윈터솔저의 모체 조직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이거라면 만들 수 있는 혈청맞은 인간들의 수는 한정 돼.'


아이든이 잠깐 말을 끊었다. 상당히 깊은 분노가 골 사이에 자리잡혀 있었다. 하울링 코만도스의 얼굴이 하나같이 처참하다.


'그리고 최악은, 캡틴 아메리카가 윈터솔저의 모체조직에 생포, 혹은 감금되어 혈청의 모체로써 세뇌 혹은 착취당하고 있을 가능성.'

'그게 무슨 소리야?!'

'진정해, 짐. 흥분하지 마. 설명에 방해돼.'


아이든이 차갑게 일갈하며 손을 휘둘렀다. 짐 모리타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사실, 요한 슈미트.. 그러니까 레드 스컬의 혈액 샘플을 이용했을 방법도 없진 않아. 그는 하이드라의 수장이었고, 캡틴 아메리카를 제외한 유일무이 슈퍼솔저였으니까. 하이드라가 사라질 때 남은 자료들이 유출됬을 가능성이 없진 않지.'


하아, 아이든이 안경을 고쳐썼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아. 애초에 그 놈의 슈퍼솔저 혈청은 불안정했고, 설령 혈액 샘플을 만들었어도 남아있을 확률도 거의 없어. 하지만 그 꼬맹이, 캡틴 아메리카는 다르지.'


애초에 실종이잖아? 아이든이 말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 현실은 언제나 영화보다 좆같으니까.


'..하지만, 캡틴이 실종된지는 벌써 30년이 넘어가. 애초에 캡틴이 살아있을 확률도-'

'시신은 못 찾았잖아? 가능성을 열어둬. 혹시 알아? 죽은 인간이 살아돌아올 수도 있지.'


아이든이 차분히 말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페기.'

'...그래. 말해야지.'


페기 카터가 입을 열었다. 상당히 감정을 추슬렀으나 여전히 분노와 슬픔이 남아있었다.


'나는, 윈터솔저의 모체조직이, ...하이드라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있어.'

'!!!'


자크 데르니에가 벌떡 일어났다. 아이든은 차분하게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앉아. 무거운 카리스마가 방 안을 물들였다. 아이든 헌터의 분노에 미미하게나마 기백이 흘러나온 탓이다. 자크가 아이든을 흘긋 보고 다시 앉았다. 페기가 한숨을 쉬었다.


'스티브가 추락한 지점은 그린란드였어. 그리고 그 근처에... 하이드라의 아지트가 하나 있지. 이미 쉴드가 박살낸 곳이니,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고.'


여기까지 말한 페기가 입술을 깨물었다.


'..합리적인 의심이야.'

'우리가 생포한 윈터솔저, 세 놈 전부 다 세뇌되어 있었다. 틈만 나면 자살시도를 해서 내가 친히 기절시켜주고 온 참이고.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훈련을 시켰다는 건, 인력이 넘쳐난다는 소리야. 슈퍼솔져는 귀하디 귀한 재산이야. 그걸 바로 자살하도록 훈련했다? 이건 이상하지.'


아이든이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윈터솔저의 모체조직은 혈청 제조 방법을 손에 넣었다. 지금으로썬 가장 강력한 가설이야.'


.

.

.




"다녀왔어-. 어머, 아이든!"

"아, 레베카."


아이든이 레베카를 맞으며 책을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로버트가 아이든의 품에서 뛰어내려 제 엄마한테 달려갔다. 엄마! 그래, 우리 아들! 레베카가 로버트를 꼭 안아줄동안, 아이든은 책에 책갈피를 끼워 닫고 로버트의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올려버렸다.


"잘 놀고 있었어? 아이든은 언제 왔구?"

"아까 아까 왔어! 엄마는 잘 놀았어?"

"그러엄~, 엄마는 잘 놀았지. 선생님이랑 대화도 하고, 커피도 먹었어."


레바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든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더 이상 책읽기 싫었다. 어떡하지.


"아이든, 쉴드 일은 잘 끝냈니?"


요즘 부쩍 웃음이 많아진 레베카가 물어왔다. 아이든 헌터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그냥저냥 끝냈어요."


혹시 남아있을 지 모르는 하이드라 잔당 재수색에 협력하고, 각종 검강검진과 미팅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각종 임무 과련 정보들을 확인해야 하고, 곧 거처를 옮겨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뭐. 그냥저냥 끝낸 건 맞았다.


"그래, 거기서 신분을 만들어준다니 다행이야.. 그런데 이거 불법은 아니겠지..?"

"저도 따지고 보면 전쟁영웅이에요. 이 정도는 받아도 되겠죠."


아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며 말했다. 냉장고 문을 열어 우유를 꺼내고, 코코아 가루를 꺼내며 아이든이 물었다.


"코코아 드실래요?"

"음, 난 커피로."

"아뇨, 오늘 이미 두잔 넘게 마셨잖아요."

"..한 잔만 더 마시면 안 될까?"

카페인 중독 되시려구요?"


아이든이 물으며 숟가락으로 코코아 가루를 퍼 컵 안에 넣었다. 안고 있던 로버트를 내려준 레베카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아, 로버트. 우리 주말에 박물관 갈까?"

"박물관?"

"그래, 박물관! 과학관 가보고 싶어 했잖니?"

"갈래!"

"...."


아이든은 코코아를 휘적이며 침음을 삼킨다. 아, 요즘 좀 껄끄러운데..


"아이든도 같이 갈래?"

"..가죠, 뭐."


쓴 표정을 보이지 않게 갈무리한 아이든이 코코아를 건네며 말했다.


"자, 꼬맹이도."

"고마워!"

"오냐."


아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학관이라.. 괜찮을까? 흘금 레베카와 로버트를 바라본다. 저 둘이 휘말리면 어떡하지.



'..상황 봐서 거절할까.'


조용히 생각했다.




지구가 망해도 밥은 먹겠지.

아흐레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