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작가의 생각이 어떤 방식으로든 들어가는 이유는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언젠가는 그것을 포장하고 끝내야만 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왜 시작했는지에 대해 밝히면서 끝난다. 가장 역설적인 엔딩인 수미쌍관 플롯도 그 자체로 작품의 주제가 된다. 작가가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하지만, 많은 이야기들은 이야기가 시작 될 때 작가의 마음 속에 아무런 주제도 없는 경우가 흔하다. 어떤 반짝이는 발상과 착상으로 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전개를 이어가며 작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며 끝내 어떤 결말에 다다르며 작가에게 답을 이끌어내도록 만든다. 창작가에 대한 수 많은 오해 중 하나인 '이 작품에는 작가의 메세지가 무엇일까?'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어떤 작가들은 소설을 끝을 내고도 자신이 무엇을 썼는지 모른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도래한 이후 독자들은 작품을 통해 작가가 가진 의도와 배경 이상의 것을 읽어내고 있으며, 여기에서 작가가 작품에서 의도한 무언가는 사소한 부분에 불과하다. 심지어 이런 종류의 착각을 작가들이 가진 경우도 흔히 보인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독자들이 작가의 의도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게 된 이상,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말할 수 있는 부분 또한 크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작품의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욕구는 그냥 그 작품을 쓰기 위한 일종의 핑계에 불과할 수 있으며, 작가의 교조적 태도가 작품에서 드러날 때 좋은 평가를 내기 힘들다는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이유가 작품이 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시작된 이야기는 끝난다. 끝나는 이야기는 주제를 가진다. 주제가 없는 이야기는 없다.


그러니까 주제 상향식 글쓰기는 주제를 잡고 글을 쓰기 시작하지만 결코 완벽한 그 주제에 도달하지 못하는 배반의 글쓰기일 것이며, 주제 하향식은 아무런 주제를 잡지 않고 시작해 이야기의 개연성(소설의 본질인 그것)으로부터 자연히 비롯되게 되는 주제의식을 찾아떠나는 여정의 글쓰기가 된다.

단편 「미궁에는 괴물이」가 네이버 ‘오늘의 문학’란에 실려 첫 고료를 받았다. 이후 여러 지면에 장르소설 단편을 게재하고 웹소설을 연재했다. 소설집 『백관의 왕이 이르니』, 웹소설 『슬기로운 문명생활』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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