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팬담 31세,

톰을 죽이고 커티 프람에게 피떡이 되도록 처맞았던 그날, 그는 전생을 떠올리고 말았다.

“……내가 시발 엑스트라 악역이라니.”

병원에 누워 제 암울한 미래를 천천히 곱씹어보던 그는 결심했다.

사이퍼 폴을 때려치우고 스팬다인 수발이나 들며 금수저 생활이나 하자고.


퇴사하라, 스팬담!

written By. 시쟌

-30~35-


**

 

띠링-

들려오는 알림 소리에 우울한 얼굴로 밥을 떠먹고 있던 리비아가 무심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확 커졌다.

“리비아?”

샹크스가 그녀를 부르자 그녀가 돌연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식사하던 이들도 생기가 살아난 리비아를 보았다.

 

[System 알림]

[‘심판자 ???’이 채팅을 보냈습니다.]

 

확인 버튼을 누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샹크스, 드디어 답변이 왔어!”

“오…, 그 심판자인지 누군지한테 말인가?”

“맞아.”

채팅 가능 시간도 12시간 정도밖에 없었는데 지금이라도 답변이 온 게 어딘가 싶었다. 거의 감격스러운 낯을 하는 제 연인을 보며 샹크스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립, 나도 공유해줘.”

“나도 보고 싶군.”

“아, 좋아. 시스템 공유, 샹크스, 벤 베크만.”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대답한 리비아가 채팅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채팅]

▶ 심판자: 답이늦어서미안하다,,코인없어서,,아무튼,,미안하지만,,난,,??니가뭔말하는지,,하나도모르겠다,,근데,, (읽음)

 

날아온 채팅을 보며 리비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띄어쓰기도 엉망이고 반점은 왜 자꾸 찍는지 모르겠고 코인이 없다는 건 또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왜왜? 뭐라고 써 있는데? 두목.”

“음……, 우리 립이 한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쓰여있는데. 코인이 없어서 답을 못했다고.”

심판자의 메시지를 본 벤 베크만이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위로 들어 리비아의 메시지까지 확인했다.

“무슨 소리야…? 이 사람.”

리비아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홀로그램 키보드를 꺼내 곧장 글씨를 적었다. 어쨌든 아쉬운 건 그녀였기 때문에 굽히고 들어갈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 정보상인: 답이 늦은 건 괜찮아요! 코인이 없었다니 그건 큰일이네요…. 저는 잡템 사셨길래 코인이 많으신 줄 알았거든요. 근데 정확히 어떤 말이 이해가 안 됐다는 걸까요? (읽음)

 

답을 보내고 곧장 읽기는 했는데 답변이 또 안 왔다. 잠깐 기다리던 리비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왜 답을 안 주지?”

“뭐어…, 일단 조금 기다려 보자고. 립. 식사나 마저 하면서 기다리자고.”

“아, 응. 미안 괜히 조급해져서…….”

“괜찮아. 간신히 연락이 닿았는데 그럴 수도 있지.”

샹크스의 다독거림에 리비아가 식기를 들고 느릿느릿 다시 식사를 시작할 때였다.

 

▶ 심판자: 근데궁금한게하나있다,,내가코인샵,,?에서물건을샀는데돈이나갔는데물건이없다,,혹시아는바가있냐,,,???^^ (읽음)

 

띠링, 들려오는 알림에 시스템 공유를 받은 샹크스와 벤 베크만을 비롯한 리비아의 시선이 동시에 허공을 향했다. 리비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인벤토리에도 없는 거면 오류인 것 같은데.”

“……흐음.”

샹크스가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하고 가만히 내용을 살피던 벤 베크만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상대가 이 ‘시스템’이라는 걸 잘 모르는 게 아닌가 싶은데.”

“엥? 설마. 이건 여기 넘어오기 전에 시스템이 다 알려주는 거고 이런 인터페이스는 내가 있던 세계에는 게임에서 흔한 요소라 웬만하면 다 알 텐데……?”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지.”

벤 베크만의 말에 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부선장은 추측을 함부로 해서 조언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는 건 그럴만한 뭔가를 대화에서 느꼈다는 의미가 됐다.

리비아도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한참 만에 또 알림이 띠링- 울렸다.

 

▶ 심판자: 모르는거,,는,,챗,,ㄱㄴ,,먹금,,딜,,차단,,서폿,,버프,,PK??,,일씹,,???요즘애들은알다가도모르겠따,,시이벌,, (읽음)

 

아, 벤 베크만의 추측이 맞았다.

“역시, 우리 해적단의 두뇌.”

리비아가 엄지를 척 치켜 세웠다. 게임용어를 하나도 모르는 걸 보아하니 아마 게임을 전혀 안 해본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해보지 않았으면 인벤토리 같은 걸 모를 수도 있겠구나.

“나이가 좀 있는 모양이군.”

벤 베크만이 제 접시를 마저 다 비우며 말했다. 납득 가능한 추측에 리비아가 다시 홀로그램 키보드 위에 제 손가락을 올려두고 능숙하게 채팅을 쳤다.

 

▷ 정보상인: 아, 코인샵에서 산 물건은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는데 혹시 인벤토리에도 없을까요? 그리고 그 단어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제가 게임용어나 채팅 용어를 쓴 거라서 앞으론 풀어서 써보겠습니다!

 

보내고 났더니 또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뭔가 이것저것 하는 모양인가 싶어서 리비아는 식사를 다 마치고 럭키 루가 가져다주는 달콤한 셔벗을 입에 넣으며 회신을 기다렸다.

“재밌는 친구네.”

“음, 근데 진짜 어지간히 범생이인가 보네. 보통 게임 정도는 다 해봤을 텐데 인벤토리를 모를 줄이야…….”

‘ㄱㄴ’이나 ‘챗’이나 ‘읽씹’ 같은 단어는 심지어 일상에서도 많이 쓰이는 말이 아니던가. 그리고 짐작하건대 아마 타자 치는 속도도 상당히 느린 듯했다.

“플레이어를 둘이나 죽였다는 게 신기하네.”

“그거야, 뭐~ 운이 좋았을 수도 있지.”

샹크스와 도란도란 얘기를 하고 있자 한 20분이 지날 때쯤 답이 돌아왔다. 띠링- 샹크스도 이제 퍽 기대된다는 눈으로 고개를 들어 내용을 보았다.

 

▶ 심판자: 찾았다,,시이벌,,,고맙다,,돈날린줄알고때려부술뻔했찌뭐냐,,전재산투자한거였다,,,,진짜,,그래서뭐ㅓㄹ부탁하고싶다는거냐,,,??참고로귀찬ㅎ은일은사양이다,,, (읽음)

 

“와, 진짜 채팅 느리시네. 거의 아재 수준인데. 어디 산골 오지에라도 사셨나…….”

리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정보상인 특성으로 채팅권을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채팅권은 상대의 이름을 모르고 친구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아도 채팅할 수 있는 정보 상인을 위한 아이템이었다.

물론, 뜨는 것도 랜덤이고 24시간 안에 구매해야 하는 물건이라 코인 버느라 진 빠졌지만 말이다.

 

▷ 정보상인: 혹시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어디에 계시든 저희가 갈 수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퀘스트에 따르면 ‘플레이어’를 ‘등장인물’로 바꿀 수 있으신 것 같던데 절 여기 사람으로 만들어주실 수 없으실까요? (읽음)

▶ 심판자: 미안하지만할줄모른다,,,그리고알아도해줄마음도없고,,뭐인벤,,어쩌고알려준건고맙다만,,,난조용히평화롭게살고싶은게목표라서말이다,,,괜히엮이고싶지도않고,,,위험을감수하고싶지도않다,,다른놈알아봐,,,^^ (읽음)

 

장황한 거절에 리비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쉽게 오케이 해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마지막 웃음 표시 뭐야,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리비아가 인상을 확 찡그렸다가 다시 키보드를 쳤다.

 

▷ 정보상인: 걱정되시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도 이 세계에 연인이 생겼고 정착하고 싶어졌습니다. (읽음)

 

거기까지 적은 리비아가 답을 망설였다. 퀘스트를 비롯해서 악신에게도 찍혔으니 그가 몸을 사리는 것도 이해가 됐던 탓이다. 리비아가 움직이질 않으니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샹크스가 그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쳤다.

“립, 그게 문제라면 우리가 지켜주겠다고 해봐. 어딘진 밝히지 말고… 평화롭고 싶으면 마을에 깃발을 걸어 지켜줄 수도 있고 개인의 안전이 문제라면 안전이 확보될 때까진 우리 배에 태워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괜찮겠어?”

“뭐어, 저쪽 마음도 이해가 가고 널 위한 일인데 못할 건 또 뭐가 있겠어.”

샹크스의 퍽 가벼운 말에 리비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망설이는 듯 하자 샹크스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제 손을 얹었다.

“괜찮으니까.”

“……고마워.”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키보드를 마저 쳤다.

 

▷ 정보상인: 걱정되시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도 이 세계에 연인이 생겼고 정착하고 싶어졌습니다. 안전이 문제라면… 제 동료들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시는 마을을 지켜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저희 배에 안전해지실 때까지 타도 괜찮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생각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시스템에 대해 잘 모르시면 제가 설명해드릴 수도 있고요. 만나서 얘기해도 괜찮습니다. (읽음)

 

퍽 길게 적은 그녀가 보내기를 누르자 꽤 오랜 시간 답이 없었다. 간식도 다 먹고 옹기종기 모여 카드 게임을 한 네 판쯤 하고 난 뒤에야 답장이 돌아왔다.

 

▶ 심판자: 일단,,아가야,,니사정은이해했다,,,근데,,아가네가있는배가내가보기엔해적같은데맞냐,,,???맞겠지뭐,,미안하지만해적이랑엮이는건곤란해서피하고싶다,,,즉,,??내가도움줄수있는게없는것같다,,,게다가마을을지켜주겠다고할정도면,,,그만한영향력이바다에있거나,,,니가개구라를치고있따는건데,,어느쪽이든존나사양하고싶군,,,아시벌대가리아프네,,연인이랑사랑을하든떡방아를찧든니들맘이긴한데,,난거기끼기싫다,,,그러잖아도이상한일에끼어들어서골머리아파뒈지겠는데,,,그리고내신변노출시키기도싫어,, (읽음)

 

장황한 답변에 리비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기회가 온 건 좋은데, 설득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게다가 채팅 가능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심판자는 플레이어 전체가 노리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처럼 원작 편입을 위해 노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죽이거나 회유하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물리적인 고통이나 괴로움이 동반될 테고.

 

▷ 정보상인: 방법이 전혀 없을까요? 기회조차 주실 수 없으신 건지요. 심판자님도 아시겠지만, 저희는 하루에 한 번 코인을 지불하지 않으면 신체를 하나씩 잃습니다. 저는 한쪽 눈을 잃었어요. 평범하게 살려면 끝없이 코인을 모아야 하니까요. 이쪽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당신을 찾을 거예요. 제가 당신을 찾으면, 그때는 얘기를 들어줄 건가요? (읽음)

▶ 심판자: 이꼬맹이포기를모르네,,,?,,,그건,,네가날찾게되면말해보자고,,무난하고평범한생활한번하기조옺같이힘드냐아,,, (읽음)

▷ 정보상인: 약속했습니다! 얼마 전에 에덴섬 가셨죠? 증거는 하나도 없었지만……. 앞으로 힌트권 사서 당신에 대한 힌트만 모을 겁니다! (읽음)

▶ 심판자: ,,,시벌,,,그건또어떻게알았냐??힌트그건또뭐냐,,,?근데넌나이가어찌되냐,,? (읽음)

▷ 정보상인: 23살이요, 심판자님은요? (읽음)

▶ 심판자: 33,,네애인이란놈은,,? (읽음)

▷ 정보상인: 31살이요. (읽음)

▶ 심판자: 우라질시부럴양심에털난새끼,,,난이결혼반대다양심이있냐고물어라네애인한테미친놈,,,난우리아버지와서간다그만보내라,,너도그애인다시생각해보고,,, (읽음)

 

리비아가 눈을 끔뻑였다. 벤 베크만이 큭큭 낮게 웃더니 옆에서 충격받은 표정을 한 샹크스를 보았다. 그가 손으로 제 머리를 쓸어올리더니 떨리는 시선으로 벤 베크만을 보았다.

“나, 양심 없나? 베크.”

“없는 편이지.”

“……너무하는군.”

벤 베크만의 말에 샹크스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벤 베크만이 느리게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확실히 범위는 좁아졌군. 찾기는 쉽겠어.”

“아아….”

“범위가 좁아졌다고? 어떻게?”

리비아가 샹크스와 벤 베크만을 번갈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샹크스가 과일 하나를 포크로 찍어 리비아의 입에 넣어주며 벤 베크만의 말에 설명을 덧붙였다.

“그 심판자라는 남자는 해군 혹은 사이퍼 폴 둘 중 하나에 속해있을 확률이 높을 것 같다는 말이지.”

턱을 괸 샹크스의 설명에 리비아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에 샹크스가 설핏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 남자는 해적이 무섭다는 것도 아니고 싫다는 것도 아니고 엮이면 곤란하다고 했지. 그 말은 즉, 정말 곤란할 확률이 높아. 그리고 우리랑 엮여서 곤란해지는 신분이란… 세계 정부의 기관 정도지.”

“그리고 뭣보다 그 에덴섬은 얼마 전에 큰 화재가 나서 주민이 전부 죽었다. 시체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큰 불이었다지.”

“뭐라고……?”

벤 베크만의 말에 리비아의 눈이 확 커졌다. 에덴섬의 주민은 해적도 아니고 일반 사람이었을 텐데 전부 죽었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민간인을 죽였다고? 샹크스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가볍게 토닥거렸다.

“그런데도 신문에 보도는 안 됐고 사건은 빠르게 마무리됐다…….”

샹크스가 말을 덧붙였다.

“이런 식으로 증거 인멸해서 일 처리를 하는 곳은 사실 세계 정부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지.”

“아아, 사이퍼 폴. 개중에서도 암약 기관이 있는 이지스 제로와 CP9 정도겠군.”

벤 베크만의 말을 들은 샹크스가 곧장 이야기를 덧붙였다. 리비아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샹크스가 그녀의 벌어진 입술을 가볍게 깨물어 입을 맞추었다. 리비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샹크스!”

“이런, 먹어달라는 줄 알았지.”

“누구 있을 때는 좀…….”

그녀가 손바닥으로 제 눈을 가리며 말했다. 부끄러운 듯 귓불을 발갛게 물들인 제 연인을 보던 리비아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립, 일전에 새로 뽑았던 힌트 카드에 떴던 ‘심판자’의 선택 조건을 떠올려봐.”

“아…….”

리비아가 제 인벤토리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다시 한 번 내용을 읽었다.

 

[‘심판자’는 조건 만족형 직업으로 ‘플레이어’에 의해 죄인이 자신의 저지른 죄를 인정하게 한 뒤 스킬 외의 정당한 방법으로 처벌했을 때 드물게 각성할 수 있다. (이미 직업이 있는 자는 기존 직업과 심판자 중 택할 수 있다.)]

 

리비아가 그걸 책상 위에 놓았다. 샹크스가 검지 끝으로 톡, 카드 위를 두드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립이 알려줬던 심판자가 나타났던 시기와 에덴섬에서 일이 벌어진 시기가 비슷해. 즉, 이 남자가 심판자라는 직업을 그때 얻었다는 말이지.”

“그래, 거기에 ‘죄인’에게 ‘처벌’이라는 단어가 들어갔지. 즉, 범법자를 죽였다는 거다. 그리고 그 뒤 나온 정부 기관도 빠르게 사건을 덮었지. 그런 식의 뒷정리. 사이퍼 폴 외엔 생각할 수 없다.”

샹크스와 벤 베크만의 말에 리비아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다가 샹크스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냉큼 입을 꾹 다물었다.

“진짜 머리 좋구나, 둘 다.”

“뭐, 간단하지.”

샹크스가 리비아의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벤 베크만이 그 눈꼴 신 모습을 보더니 마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있는 33살의 남자…….”

“……어? 사이퍼 폴은 거의, 고아를 데려다가 양성하지 않던가?”

이지스 제로나 CP9은 특히. 덧붙이는 목소리에 미묘함이 느껴졌다. 샹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간을 좁힌 리비아가 한참이나 아무런 말이 없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폐쇄적인 곳에 플레이어가 있다고?”

“그거 말인데, 립. 너처럼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플레이어가 어떻게 다른 세계에서 오지 않을 수가 있어?”

샹크스의 말에 리비아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에 샹크스의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 벤 베크만이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리비아, 그는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거야 뭐, 양아버지도 있을 수 있고… 흰수염 해적단만 해도 다 아버지라고 부르잖아? 그런 특수한 경우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시스템에 뜨는 그의 수식어가 뭐지?”

“수식어? 심판자 땡땡땡?”

샹크스가 하하하, 유쾌하게 웃었다.

“그보다 조금 더 앞이야, 립.”

“그 앞이라면……, 아! 이레귤러?”

“그래, 그는 플레이어라는 단어가 뜨지 않지. 보통 플레이어와 그 뒤에 숫자가 붙었으니까 말이다.”

샹크스의 지적에 리비아가 나직하게 읊조리자 벤 베크만이 설명을 더해줬다. 리비아의 눈이 확 커졌다. 그녀가 당황한 듯 떨리는 눈동자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설마….”

“그래. 즉, 이 ‘심판자’는 너와 같은 ‘플레이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니… 아마도, 확실히 아니겠지. 그러니까 ‘플레이어’를 이 세계 사람으로 바꿀 수 있는 어떠한 능력이 주어졌다고 하면…….”

이야기가 좀 맞아 떨어지지 않겠어? 샹크스는 퍽 가벼운 목소리로 덧붙였지만, 실상 내용 자체가 그리 간단하진 않았다. 리비아가 놀란 듯 입을 벌렸다가 천천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가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즉, 원래 이 세계 사람일 확률이 높다는 거지?”

“뭐어, 그런 거지?”

샹크스가 샐쭉 웃으며 리비아의 등을 토닥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정체에 리비아가 입을 벌렸다. 겨우 이런 것만으로 알아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이 가설에 따르면 낙원에 있다는 말도 아귀가 맞지. 해군 본부도 사이퍼 폴의 본부도 전부 낙원에 있으니까.”

“그런 데다가 재산이 많다는 거고…….”

“거의 다 나왔군. 문제는, 워낙 은밀한 기관이라 정보 얻기가 힘들다는 정도인가?”

“그거라면 문제없어, 내가 누군데.”

리비아가 퍽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샹크스가 그녀를 제 무릎에 앉히며 입을 열었다.

“우리 배 정보상이시지.”

리비아가 시스템을 열고 급히 뭔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

 

라스키는 아주 긴 꿈을 꾸었다.

오랜만에 아이가, 제 딸아이가 태어나 구안하오로 들여보내기 전까지의 꿈을 말이다. 그리고 나선 꽤 오랜 시간 어두운 공간에 덩그러니 있었던 것 같았다. 딱히 지루하다는 생각도 없었고 심심하다는 생각도 없었다.

이따금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와 뭔가 임무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리고 가끔은 그 짜증 나는 장관의 목소리도 들려왔고 아주 가끔 스팬다인 전 장관의 목소리도 들려온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그러한 이유로 인해 그는 새까만 어둠 속에 홀로 덩그러니 있으면서도 지루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오히려 조금 편안하기도 했다.

[이게 근데 효과가 있으려나? 없으면 시스템 시발놈 반드시 죽여야지.]

‘이번엔 장관이군. 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꿈에까지 나올 정도로 그렇게 연이 깊은 사이는 아니었는데 퍽 자주 들려오지 않나. 라스키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차라리 칼리파였으면 반갑기라도 하지, 하필 뭔 생각도 하는지 모를 장관일 건 또 무엇인가.

‘애초에 장관이 그런 쓸데없는 짓만 하지 않았어도…….’

않았어도…?

라스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않았어도 뭘 어쨌단 말인가. 문득 그의 머릿속에 그가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라스키의 눈이 확 커졌다.

‘…그러고 보니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처였지.’

문득 이곳에 있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었으면 죽은 거고 살았으면 산 거지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인가. 라스키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하자 새까맸던 공간에 조금 금이 갔다.

‘저승인가?’

그렇다기엔 꽤 오래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저승에 이렇게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어-이, 라스키. 칼리파가 기다리니까 일어나라. 1년 3개월이면 너무 많이 자는 거 아니냐?]

‘잔다니 무슨…….’

라스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문득 마지막에 자신을 구하러 왔던 스팬다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와 대화를 한 뒤 기억이 끊겼다는 것도.

“…칼리파.”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순간 그 목소리가 파장처럼 퍼져나가더니 이윽고 새까만 공간을 완전히 깨부쉈다. 동시에 그가 쏟아지는 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시발 사긴가…?”

귓가에 꽂히는 소리가 퍽 생경하면서도 익숙했다. 라스키는 눈이 빛에 익숙해졌을 때쯤 천천히 눈을 떴다. 스팬담이 그것을 발견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스키! 너 정신이 드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스팬담이 라스키가 누운 병원 침대에 양손을 짚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소음에 라스키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문득 입술을 달싹이는데 목소리가 잘 나가지 않았다. 스팬담이 그걸 본 듯 물잔에 빨대를 꽂아 그에게 주었다. 썩 익숙지 않은 행동에 잠시 머뭇거리던 라스키가 빨대를 가볍게 물고 물을 마셨다. 그제야 제가 갈증이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스키가 저도 모르게 잔을 다 비우자 스팬담이 한 잔 더 따라 내밀었다. 거기까지 마시고 나서야 어느 정도 갈증이 가셨다.

“드디어 일어났네.”

“……눈을 뜨자마자 보는 게 장관이라니.”

“어이구, 서운한 소리 하네. 뭐 그래도 좋다.”

“…제가 살았습니까?”

그는 멍하니 물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감각들이 굉장히 둔했다. 스팬담이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 라스키의 손을 주물럭거리며 마사지를 해주는 듯하더니 이내 너스콜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어어, 내가 뒈진 게 아니라면 네가 살아난 거다. 다행히 회복력이 좋았단다. 장기 몇 개는 뭐어…, 복구 안 되는 건 기증받긴 했지.”

“기증…?”

“어…, 우리 아버지가 치사하게 돈으로 좀 새치기했다.”

굉장히 가라앉은 라스키의 질문에 스팬담이 살짝 찔린다는 듯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말했다. 스팬담이 씩 웃었다.

“…그 스팬다인이 말입니까?”

“응, 나도 몰랐는데 아버지가 말해주시더라고. 너 배에서도 여러 번 호흡 멎었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했다고 하더라. 너 계속 돌봐준 거 같더라고.”

라스키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스팬다인이 그럴 위인이었던가? 글쎄, 적어도 그와 함께 CP9에 있을 때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정신을 잃기 전까지도 계속 말을 걸어준 것도 같다. 정신을 아슬아슬 잃기 직전, 펜던트를 손에 쥐여준 것까지 떠올랐다. 그가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손은 당연하지만, 비어있었다.

 

<……죽지 마라, 부모가 돼서 애들 울리는 거 아니다.>

 

그것도 이 남자가 만든 변화인가?

문득 떠오른 목소리가 꽤 인상 깊었던 터라 라스키는 눈앞에 있는 스팬담을 보았다.

“그래도 눈 떠서 다행이다. 기다렸어, 라스키.”

드물게도 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남자를 보며 라스키는 느리게 시선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펜던트는 이쪽에 있고 칼리파는 CP9에서 일하는 중. 아버지도 출근이고.”

“……안 물어봤습니다만.”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설핏 미간을 좁힌 라스키가 대답하자 스팬담이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스와 의사가 뛰어왔다. 스팬담을 보고 허리를 숙인 그들이 급히 라스키를 이곳저곳 살피기 시작했다.

“정말 기적입니다, 눈만 뜨시면 되는 상태였는데 워낙 쇼크가 컸을 거라 솔직히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가족분들께서 거의 매일같이 와주신 덕분에 기적이라도 일어난 모양입니다.”

의사의 말에 라스키는 미간을 찌푸렸고 스팬담은 퍽 즐거운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의사와 몇 마디를 더 나누더니 스팬담이 그에게 다가왔다.

병원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그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보고 있다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겨울인지 꽤 두툼한 옷을 입고 다니는 이들이 많이 보였다.

“라스키, 몸 상태는 몇 번 확인했던 대로 거의 정상이라 당장 퇴원해도 문제는 없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며칠 더 있어 보자는데 어쩔래?”

“답답하니 퇴원하겠습니다.”

“아아, 그럴래? 그럼 한동안 우리 집에 있자.”

“제가 왜….”

“막 퇴원했는데 혼자 두기도 좀 그렇고 칼리파도 우리 집에 자주 오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스키의 서슬 퍼런 시선이 스팬담에게 닿았다. 그 무슨 인간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에 스팬담이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손사래까지 치더니 입을 열었다.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니야. 칼리파 말고도 다른 애들도 다 놀러 와. 나 독립한다고 집을 새로 지었는데 방이 열 개야. 무슨 의민지 알겠어?”

“……또 쓸데없는 짓을.”

“그러니까 한동안 우리 집에 있어. 나 어차피 장관 관뒀거든.”

스팬담의 말에 라스키가 눈가를 한 차례 움찔하더니 그를 보곤 “그렇습니까.” 짧게 대답했다. 그제야 왜 굳이 집까지 쳐들어가게 됐는지 이해가 된 탓이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있으니까 너도 덜 심심할 거 아니야.”

“스팬다인은 시끄럽습니다.”

“……그으래? 그렇게 시끄럽진 않으시던데.”

그거야 아들 앞에서 위엄인지 뭔지를 살리겠다고 조용히 하고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에게는 시답잖은 소리를 얼마나 해대는지 몰랐다. 최근에는 대부분이 다 제 아들 자랑이었지. 라스키가 재밌는 대화 상대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말이다, 칼리파가 일주일에 서너 번은 왔어. 나도 한두 번은 오려고 했고 아버지도 한 번씩 오신 것 같더라. 아, 휴고도 몇 번 왔었고….”

뺨을 긁적이던 스팬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스키가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쨌든 퇴원 수속 밟고 올 테니까 옷 갈아입고 있어. 일어날 수 있겠어?”

그가 가볍게 손을 쥐었다가 폈다.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려 몇 번 힘을 줘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니 뭐니 제대로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걷지 못할 정돈 아니었다.

“다녀올게.”

자리에서 일어난 라스키는 다리에 썩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느끼곤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몇 번 다리를 움직였다. 그래도 운동신경이 평균 이상인 터라 대충 몸 상태를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협탁을 보니 펜던트가 있었다. 그것도 전에는 본 적 없는 목걸이 줄까지 달려 있다. 누가 오지랖을 부린 건지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는 철로 된 길쭉한 캐비닛을 열었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더 야윈 탓이다. 그가 낮게 혀를 차곤 한숨을 내쉬었다.

캐비닛 안쪽에 잘 개어져 있던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새하얀 셔츠에 검은색의 바지였다. 그 위로 안에 있던 검은 가죽 재킷까지 걸치자 그나마 좀 마른 몸이 가려졌다. 그가 협탁에 있던 펜던트를 주머니에 넣으려다 멈칫했다. 안을 열어본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옆모습만 있던 사진이 제대로 찍힌 정면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던 탓이다. 도촬을 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말은 칼리파가 허락했다는 의미가 됐다.

그는 주머니에 넣으려던 펜던트를 목에 걸고 옷 안쪽으로 밀어 넣은 뒤 재킷의 지퍼를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밍 좋게 스팬담이 돌아왔다.

“잘 어울리네.”

“장관께서 사두신 겁니까?”

“나 장관 아니라니까. 스팬담이면 돼. 그리고 그건 아버지가.”

그에 라스키의 미간이 또 좁아졌다. 스팬담이 말하며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딱히 가지고 갈 건 없다고 생각했는지 스팬담이 라스키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끌었다.

“가져갈 건 없네. 그거 너 일어나면 입을 사복 좀 사다 달라고 했었는데 사두셨더라고.”

“……그렇습니까.”

스팬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유로운 목소리와 느긋한 발걸음과는 다르게 스팬담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미간을 좁힌 라스키가 스팬담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를 느리게 관찰했다. 그리고 머잖아 그는 스팬담이 반응하는 곳을 찾아냈다.

병실에서 누군가가 울거나, 심장에 달아둔 기계음이 들리거나, 혹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의 어깨가 한 번씩 흠칫 떨렸다.

“배는 안 고프냐?”

그런 주제에 목소리만은 평이했다. 본인도 본인이 떨고 있는 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라스키는 시선을 돌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별로.”

“그렇군.”

스팬담이 짤막하게 대답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스팬담은 꿋꿋하게 같은 걸음으로 병원을 벗어났다. 부지를 아예 벗어나서야 그의 떨림이 살짝 멎었다.

“걷는 건 괜찮냐?”

“네.”

“이제 장관 아니라 말 편하게 해도 되는데.”

“그러지.”

라스키의 빠른 태도 변환에 스팬담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리게 손목을 놓은 그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살짝 떨리는 손끝으로 꾸역꾸역 불까지 붙이더니 그는 라스키의 한 발자국 뒤에서 느리게 걸었다.

“죽다 살아난 기분은 어떠냐, 라스키.”

“글쎄, 딱히 별다른 느낌은 없군.”

“역시 그렇지? 사람 감상이란 게 다 똑같구나.”

느리게 담배를 피우며 스팬담이 말했다.

‘역시?’

라스키가 흘긋 스팬담을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은 혼자서 독립할 집이라고 하기엔 다소 부지가 넓고 큰 단독주택이 있는 곳이었다. 그것도 3층이나 되는 듯했다.

“…독립?”

“……말했잖아, 애들 다 의견 다 반영하느라 이 꼴 됐어.”

스팬담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돌렸다. 안으로 들어간 그가 신발장 위에서 뭔가를 하나 꺼내더니 라스키에게 내밀었다. 작은 열쇠였다.

“이게 뭐지?”

“네 열쇠.”

“내 열쇠?”

“어, 너도 편할 때 와서 쉬어라. 이미 독립 공간으로서의 기능은 포기했으니까 말이다. 네 방도 있어, 가끔 와서 밥해주면 좋고.”

본래 목적을 뒤에 슬쩍 덧붙인 스팬담이 1층에 있는 3개의 방 중에 하나를 안내해줬다. 라스키가 인상을 찡그렸다.

“왜 내 방이 있는 거지?”

“왜긴…, 가끔 칼리파 보러 놀러 와. 밥도 해달라니까? 그리고 아버지도 네가 있으면 좀 덜 심심하실 테고. 말은 안 하시겠지만 네 걱정 꽤 했어.”

꽤 멋대로인 말에 라스키의 미간이 좁아졌다.

집에 돌아오니 기운이 쫙 빠진 스팬담이 눈두덩을 비비며 말했다. 오늘 이른 아침부터 움직였더니 역시나 피곤했다. 그가 작게 하품하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제 방을 가리켰다.

“저기가 내방이고… 네 반대쪽은 아버지 방. 그리고 칼리파 방은 3층에 있어. 혹시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르고…… 나는 좀 졸려서 자야겠다.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 말이 진실인 듯 그의 눈 밑이 퍽 거뭇거뭇했다.

기실 스팬담은 채팅창부터 시작해서 요즘 잠을 잘 시간이 도통 없었다.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일도 많이 있었고 말이다. 아무튼 결론적으론 다 시스템 때문이었다.

“일단 푹 쉬고… 나 잘게. 필요한 일 있으면 불러. 집은 편히 둘러보고.”

거기까지 말한 스팬담은 그대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졸지에 남의 집에 덩그러니 세워진 라스키가 헛웃음을 흘렸다. 스팬담의 말대로 집을 가볍게 둘러본 라스키는 곧 제 것이라고 준 방으로 들어갔다.

 

**

 

“…어이, 카쿠 너 괜찮냐?”

“아아, 괜찮다네.”

“그 미친 새끼가 장관이 되자마자 선을 넘냐, 시발.”

블루노의 에어도어 안을 걸어가며 재브라가 울분을 토하는 목소리에 카쿠가 소매를 밑으로 쭉 끌어내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재브라의 얼굴이 확 굳었다.

“그냥 장관…, 아니. 스팬담한테 말하는 게 낫지 않겠냐?”

“말해서 뭐하는감. 쓸데없이 걱정만 늘리는 게지. 그리고 자네가 내 걱정을 하는 겐가?”

카쿠의 말에 재브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칼리파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관자놀이를 가볍게 문질렀다. 스팬담이 장관을 관둔 지 겨우 일주일. 사이퍼 폴 분위기가 거의 최악이었다.

일전에 쓰던 건 전부 더럽다고 장관실에 있던 물건을 다 내던지고 새로 만든 건 둘째치더라도 사이퍼 폴 내부 군기를 잡겠다고 하루가 멀다고 아랫사람을 불러다가 괜히 트집을 잡고 고치라고 해대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거기에 ‘스팬담’이라는 이름이나 ‘전 장관’이라는 얘기만 나오면 거의 발작하듯 구는 것도 문제였다. 문제는 그 와중에 종종 폭력도 오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사나 보는 눈이 있을 땐 세상 사이 좋은 척을 하며 연기를 해대서 눈치챈 이가 많진 않았다.

“같이 만든 것도 전부 망가졌다는 거다, 챠파파.”

“그러게요. 다음에 다시 같이 만들죠.”

“챠파….”

칼리파가 실망한 후쿠로의 팔을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재브라가 거칠게 머리를 흩뜨렸다.

“아오, 무슨 임무가 이렇게 끝없이 주어지냐고. 간신히 일주일 만에 시간 냈네!”

“집에 가본 적 있는 사람 있나?”

재브라의 짜증에 블루노가 물었다.

“난 한 번 다녀왔다.”

로브 루치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에 재브라가 퍽 못마땅한 낯으로 입술을 툭 내밀곤 입을 열었다.

“아아, 현 장관에게도 총애받는 괭이는 좋겠다.”

“장관이 바뀌면 네놈들이 적응해라.”

“누가 적응 안 한대냐?! 하는 짓이 형편없으니까 문제지! 카쿠랑 후쿠로는 제대로 찍혀서 하루가 멀다고 뭔 짓을 당하는데!”

재브라의 짜증에 로브 루치가 눈을 가늘게 뜨곤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그가 입을 열었다.

“적응하지 못한 쪽이 문제인 거다. 장관이 싫어하는 걸 고치면 그만 아닌가.”

“야, 이 씹…!”

“재브라, 됐네. 루치의 말이 맞다네.”

그 사이 블루노가 걸음을 멈췄다. 그가 문을 열었다. 재브라와 로브 루치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제일 먼저 나간 로브 루치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돌려 열었다.

“어? 뭐야 루치?”

“장관.”

“…이 아니라 스팬담.”

“네, 스팬담 씨.”

찻잔을 기울이고 있던 스팬담이 씩 웃었다. 그 사이 하나둘 집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스팬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가 퍽 반가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존나 하교한 애들 기다린 삼촌이라도 된 기분인데.”

“크핫하하! 뭐랍니까, 또.”

“칼리파도 있어?”

“네, 문제라도?”

스팬담이 고개를 저었다. 라스키를 아직 못 봤을 게 뻔했다. 라스키에게 그녀가 올 때까지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스팬담이 칼리파에게 손짓했다.

“칼리파.”

“네.”

“이리와봐.”

스팬담이 다가온 칼리파의 손목을 잡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스팬담의 눈이 설핏 가늘어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웃는 낯으로 그녀를 붙잡고 움직였다.

“…….”

“뭐야, 오늘은 성희롱이라고 안 하네.”

스팬담의 말에 칼리파가 멈칫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성희롱입니다.”

스팬담이 라스키의 방문을 열고 그대로 칼리파를 밀어넣으며 말했다.

“들어가서 배고프니까 밥 좀 해주세요, 라고 말하고 와. 알았지?”

“……네. 근데 누가 있….”

탁, 칼리파를 안으로 들여보낸 스팬담이 냉큼 문을 닫았다. 귀를 바짝 대고 있으려니 벌컥, 문이 열렸다. 스팬담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악, 갑자기 열면 어떡해! 라스키.”

“라스키…? 너 뭐야 일어났냐?”

재브라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라스키가 그들의 면면을 한 번씩 쓱 보더니 다시 시선을 내려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 스팬담을 내려다보았다.

“다 큰 여자애를 그냥 들여보내면 어쩌자는 거지?”

“딸인데 어때.”

“내가 안에서 뭘 하고 있을 줄 알고.”

“아빤데 어때.”

스팬담이 뭐가 문제냐는 듯 묻자 라스키가 쯧, 혀를 찼다. 요 며칠 본 퉁명스러운 모습에 꽤 익숙해진 터라 스팬담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말이 안 통하는군.”

“언젠 통했나? 그래서 우리 애들 밥 좀 해주세요. 라스키.”

스팬담이 뒤에 있는 애들을 보며 말했다.

“살아났군.”

로브 루치의 말에 라스키가 흘긋 그를 보곤 다시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괜찮아, 두면 곧 나올 거야. 일단 쉬자.”

스팬담이 고개를 말하곤 그들을 거실 소파로 이끌었다.

라스키는 아마도 칼리파와 대화를 짧게 나오고 나눌 거라고 생각한 스팬담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 방 소개해줄까?”

“좋습니다.”

로브 루치가 어느새 계단을 밟으며 말했다. 스팬담이 그를 쫓아가려고 하다가 오늘따라 영 조용한 카쿠를 보며 걸음을 멈췄다.

“카쿠, 오늘 왜 이리 조용하냐.”

스팬담이 카쿠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순간 손끝을 움찔 떨었던 카쿠가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피곤해서 그렇구먼.” 덧붙인 그가 설핏 웃으며 손을 빼더니 로브 루치의 뒤를 따라 앞장서 가버렸다.

“요요이~~ 아니 가시오~?”

“……아아, 가야지.”

쿠마도리의 말에 스팬담이 목덜미를 두어 번 꾹 누르더니 그들을 따라 일단 계단을 올라갔다. 2층은 재브라와 로브 루치, 쿠마도리와 블루노의 방이 있었고 그 위에는 카쿠와 칼리파, 후쿠로가 거주할 꼬맹이들의 방이었다.

“저기 제일 안쪽이 칼리파. 그리고 여기가 후쿠로. 그리고…… 카쿠는 이쪽.”

스팬담이 카쿠의 손을 붙잡아 가볍게 당기며 말했다. 퍽 기분 좋아 보이는 낯의 스팬담을 본 카쿠가 그의 뒤를 따르며 설핏 웃었다.

“뭐가 그리 좋은감?”

“뭐가 좋냐고? 얼마 전에는 라스키가 일어난 게 좋았고 오늘은… 너희가 온 게 좋네. 왜? 이 나이에 철없어 보이냐?”

“아닐세, 물어본 거구먼.”

“일찍 올 줄 알았는데 일이 많았어?”

카쿠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팬담이 방문 하나를 열어 카쿠를 먼저 들여보냈다. 카쿠가 천천히 대답했다.

“뭐…, 조금 많았네.”

“그놈 일하는 건 어때? 괜찮아? 문제 있으면 꼭 말해.”

“자네는 이제 장관도 아닌데 말해서 뭐 하는감.”

방 안으로 들어서며 작게 웃은 카쿠가 돌연 멈추더니 스팬담의 어깨에 툭, 팔을 두르며 말했다. 장난기가 섞인 퍽 건방진 작태였다. 스팬담이 어느새 시선이 맞는 카쿠를 보고 고개를 설핏 기울였다.

“…어쭈, 언제 이렇게 컸냐?”

“더 쑥쑥 클 걸세.”

“당연히 커야지. 그리고 알아서 뭐 하긴, 들어줄 순 있으니까 말해.”

스팬담의 말에 카쿠가 제 방을 한 바퀴 돌아 구경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스팬담이 불을 켜주며 한쪽 벽에 기대어 섰다. 카쿠가 퍽 신기한 낯으로 제 방을 한 바퀴 둘러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임무가 조금 많아진 것 빼곤 문제없다네. 정말 원하는 대로 다 해줬구먼.”

“해주신 건 건축가분이시다. 요구사항 전달만 했지.”

카쿠가 푹신한 침대에 털썩 앉더니 고개를 젖혀 스팬담을 보았다. 스팬담이 물끄러미 카쿠를 바라보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양손으로 카쿠의 뺨을 꾹 누르더니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폈다. 그에 카쿠가 눈을 끔뻑였다.

“뭐 하는 겐가?”

“카쿠가 우울한 이유 찾는 중?”

“딱히 안 우울하네만.”

카쿠가 뺨을 긁적였다. 스팬담이 버릇처럼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손을 들었다. 카쿠가 순간 움찔했다. 본인도 모를 정도로 아주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스팬담이 카쿠의 머리를 쓱쓱 거칠게 쓰다듬었다.

“자네는 왜 우리에게 잘해주는 겐가?”

“음? 갑자기?”

스팬담이 의아한 낯으로 물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카쿠가 제 뺨을 긁적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집에 방 만들어달라는 것도 따지자면 억지가 아니었는감. 자네는 그렇게 싫어하던 일도 그만뒀으니 우리가 이렇게 찾아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민폐일 텐데 말일세.”

“오, 내 새끼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자각은 있었구나?”

스팬담이 어린아이를 대하듯 퍽 짓궂게 말하자 카쿠가 불퉁한 낯을 했다. 그가 큭큭 웃더니 카쿠의 옆에 털썩 앉았다. 침대가 얼마나 푹신 거리는지 꽤 출렁거렸다.

“근데 그런 거 고민할 필요 있냐, 카쿠?”

“뭐가 말인가?”

“너 아까 나한테 뭐라고 그랬어? 내가 너 손 잡고 여기로 데리고 올 때 말이야.”

스팬담의 질문에 카쿠가 인상을 썼다.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뭐가 그리 좋냐고 한 거 말인감?”

“맞아, 나 기분 좋아. 너희가 억지를 부린 것도 민폐라고 생각한 것도 말이다. 상대가 결국 싫지 않았으니까 받아들인 게 아니겠냐.”

“…….”

스팬담이 카쿠의 머리칼을 한 번 더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카쿠.”

“뭔감?”

“이 형님이 생각보다 눈치가 빨라서 말이다. 우리 꼬맹이, 다음부턴 나한테 거짓말하지 마라.”

“거짓말?”

“1시간쯤 뒤에 내려오고. 라스키랑 같이 식사 준비해놓을 테니.”

가볍게 웃은 스팬담이 카쿠의 방을 나섰다.

카쿠의 방을 나서서 이 방 저 방 다 들어가 짤막하게 대화를 나눈 그가 전부 이따 내려오라고 한 뒤에 1층으로 내려가니 스팬다인이 한숨을 내쉬며 식탁에 식기를 놓고 있었다.

“아버지, 뭐하십니까?”

“아들아…!”

막 퇴근했는지 코트를 의자에 걸쳐둔 스팬다인이 걸어와 스팬담을 끌어안았다. 스팬담이 나직하게 웃으며 그를 마주 끌어안자 스팬다인이 퍽 억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라스키가 괘씸한 놈이 이제 사람을 아주 부려 먹는구나.”

“퇴원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사람을 식사 당번으로 쓰는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라스키의 말에 스팬다인이 조용해졌다. 왜냐하면 라스키가 없는 동안 스팬다인은 스팬담의 호쾌한 볶음 요리를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스팬다인이 호쾌하게 요리하려고 했다가 또다시 대차게 말아먹은 뒤에 결정된 일이었던 터라 불만을 토할 수가 없었다.

“……거, 하면 되잖냐. 하면.”

스팬담을 놓고 식탁으로 돌아간 스팬다인이 놓던 식기를 마저 놓으며 말했다. 식기를 다 놓은 스팬다인이 코트를 소파쪽에 던져두고 식탁 의자 하나에 대충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스팬담.”

“네, 아버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오늘 무슨 일 있었느냐?”

스팬다인의 말에 라스키가 흘긋 스팬담을 보았다. 도통 스팬담의 평소 표정과 어디가 다른지 알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에 스팬담이 멋쩍은 듯 뺨을 긁적였다.

“아아……, 티 납니까?”

‘정말이었군.’

라스키는 흘긋 스팬다인을 보고 스팬담을 보았다. 다른 요원들 앞에선 퍽 어른스러운 낯을 하던 스팬담이 스팬다인의 앞에선 조금 풀어진 것이 꽤 어린애처럼 보였다.

“조금, 화나는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잠깐 밖에 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스팬다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팬담이 방으로 들어가 코트와 전보 벌레 하나를 챙겼다. 코트 안에 전보 벌레를 넣은 그가 현관을 나서려다 식탁에 앉아 손에 턱을 괸 스팬다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스팬담이 목덜미를 슬쩍 긁적이더니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조만간 사고 좀 칠지 모르겠습니다.”

“……아가?”

스팬담의 말에 스팬다인이 굳어버렸다. 스팬담이 지금껏 친 사고의 스케일이 도통 가볍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탓이다.

“아……, 딱히 정부를 위협하는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라서.”

“무, 무슨 문제를 치려고 그러는데…?”

“음, 주먹질이요. 쪽팔리니까 다른 놈들에겐 비밀입니다. 라스키도 부탁해.”

스팬다인이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질 정도라면 나쁘진 않았다. 굳이 싸워야 하냐고 하고 싶긴 한데…, 다른 위험한 곳으로 튀는 것보단 나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애들은 한 30분 뒤에 내려올 겁니다. 저도 담배 한 대만 피고 금방 돌아올게요.”

가볍게 덧붙인 스팬담이 곧 현관을 나섰다.

 

**

 

[뭐어…, 대충 그런 겁니다.]

“아아, 그랬군.”

상대의 얘기를 들으며 스팬담이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붉은빛이 점멸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 새끼도 참 여러모로 사람 난감하게 하는 새끼다.

“사이퍼 폴 분위기가 그렇게까지 엉망이 된 줄은 몰랐다. 괜히 미안하네.”

[딱히 장관…, 아니 스팬담 씨가 미안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온갖 일에 트집을 잡아서 스톱을 걸어버리니 될 일도 안 되고 일이 밀려서 지금 이쪽도 난립니다. 저희 첩보부장님 사직서 내려고 준비 중이시더라고요.]

반대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피곤함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야근 중이라고 했었나. 스팬담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뭐…….]

상대방이 뭔가를 말하려다 멈칫하곤 말을 질질 끌었다. 스팬담은 송화기를 든 손을 바꾸며 담배를 왼손가락에 끼우곤 가볍게 연기를 뿜으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편히 말해줘, 내가 어디 가서 네 얘기를 벙긋하진 않을 테니까. 나도 좀 생각할 게 많아서 말이야.”

[으음….]

“신입 시절 같이 보냈으니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의지할 곳이 그나마 대화 좀 나눴던 너밖에 없잖냐, 제리.”

스팬담이 퍽 아쉬운 소리를 하자 상대방이 큼큼,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어디에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덧붙이는 목소리가 퍽 조심스러웠다. 어디 구석 좁은 곳에라도 들어간 건지 제리의 목소리가 다소 울렸다.

그는 스팬담과 입사가 비슷했던 사람이었다. 지금 CP6에서 차장인 그는 아마 현재 첩보부장이 관두면 다음 CP6의 첩보부장이 될 거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 따지자면 CP5의 주임에서 에스컬레이터 타고 지령장관이 된 스팬담보다 승진은 빨랐다고 볼 수 있었다.

‘공수도 섬에서 태어났으면서 왜 권투 챔피언을 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문을 머릿속에 꾹 눌러 담은 스팬담이 고개를 끄덕이며 퍽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아, 약속할게.”

[뭐…, 괜히 트집 잡는 것도 잡는 건데, 당신 얘기만 나오면 그날은 거의 사이퍼 폴 뒤집히는 날입니다.]

“나…?”

[네, 스팬담 씨 혹시 가기 전에 구안하오 개편한 거나 사이퍼 폴 선박 수주 계약이나 그 외 몇몇 부장들이랑 월급 인상해서 재계약한 거나… 무기 납품처랑 식당 요리사들 전부 계약 연장하시고 가셨죠?]

제리의 말에 스팬담이 고개를 기울였다. 계약 임박한 건들이 많아서 한발 빠르게 넘기기 전에 전부 재계약하기는 했다. 재계약한 곳들은 전부 여태 문제가 없었던 곳이고 사고 친 곳은 새로 입찰받아서 계약하기도 했다.

“어, 그랬지. 걔가 손댈 것 같아서 말이다. 근데 내가 보기엔 문제 없는 곳들이고 식당도 애들 얘기 들어보니까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중에 레온 녀석이 바꾸더라도 2년 정도 지켜보고 바꾸라고 연장했지. 걔가 성질 급한 면이 있어서.”

[저도 사실 그건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봤을 때도 문제없었고……, 근데 그걸… 뒷돈 받아 챙겨 먹었다면서, 그… 마지막이라고 한탕 치려고 멋대로 장관 직위 남용해서 계약하고 갔다고….]

스팬담이 헛웃음을 흘리며 꽁초만 남은 담배를 흙바닥에 비벼끄고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계속해보라고 말을 덧붙였다. 치이익, 불붙은 담배 끝을 그가 가볍게 이로 짓씹었다. 바닥에 쌓인 꽁초만 벌써 세 개였다.

[여튼 그래서 그거 서류 처리한 사업팀이랑 재정팀 쪽이 이번에 피해가 좀 많았습니다. 거기 두 곳은 드물게 사이퍼 폴 내에서도 여직원이 많잖습니까.]

“아아….”

[여튼 그 장관이 돈 받아먹고 돈 빼돌린 거 아니냐고 책상 하나 부수면서 난동을 부리는데……. 아무튼 그래서 그거 때문에 거기 팀장들이 매일 같이 시말서 써서 제출하고 있는데 매번 꼬투리 잡혀서 반려 먹나 보더라고요.]

스팬담이 담벼락에 기대어 바닥에 앉으며 담배를 뻑뻑 피웠다. 원래부터 어느 정도 내숭 떠는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건 무슨 까보니까 생각보다 더한 놈이었다.

[근데 뭐…, 가면 근무 시간에 술 따르라느니 하면서 별 모욕을 다 주나 보더라고요.]

“……음. 난리네.”

[그래서 다들 당신 얘기도 안 꺼내요. 한 번은 전 장관님은 이렇게 했었다고 한마디 했었다가 걔가 다음 날 괴한한테 습격당했답디다. 듣자 하니 혀가 잘렸대요.]

스팬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느리게 시선을 굴렸다. 열등감 때문에 화풀이하는 놈들이야 전생에도 있었고 현생에도 있었다. 넘겨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 도를 안 넘었을 때 그냥 귀엽게 넘겨줄 수 있는 일이지.

“CP9 애들은 괜찮은 거 같냐?”

[아…….]

“왜?”

[거기는…, 굳이 따지면 거기가 제일 좀 심하긴 하죠.]

“왜?”

[그게…, 항상 사이퍼 폴 내에서 소란 벌일 때 도를 좀 넘어가면 말리는 게 CP9 분들입니다. 정확히는… 그.]

제리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걸 외부인에게 얘기해도 되는지 아닌지를 망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스팬담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스팬담은 재촉하는 대신 가만히 말을 기다렸다. 계속 재촉해 봐야 좋지 않은 방향으로 생각이 발전할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말리는 순간 화풀이를 CP9에게 하시니까요. 오늘도 시말서 제출하러 간 애들을 또 온갖 모욕을 주면서 거절하니까 칼리파님이 그거 보더니 문제없는 것 같다고 했답니다. 그, 맞았다더라고요. ……얼굴.]

“아아….”

스팬담은 아까 묘하게 조금 부어올라 있었던 칼리파의 오른뺨을 떠올리며 느리게 대꾸했다. 덤덤한 목소리로 그는 담배를 피우며 설핏 웃었다.

적당한 체벌, 있을 수 있지. 사이퍼 폴이라는 게 애초부터 상하관계 뚜렷한… 따지자면 군대 같은 곳이 아니던가.

“혹시 그놈이 우리 애들 좀 많이 때리냐?”

[뭐…, 소문이긴 한데 들고 다니는 채찍이 무슨 해루석 채찍이라고도 하고……. 잘은 모릅니다. CP9은 워낙 동떨어져 있기도 하고 저도 지부에서 나와 본부에 잠깐잠깐 들를 때마다 듣는 소식 정도라서….]

“아아, 그렇군.”

스팬담이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렇게까지 나쁜 놈처럼 보이진 않았고 딱히 스팬담보다 부족한 건 없어 보였는데 왜 그렇게 열등감에 찌든 건지 말이다.

심지어 더 젊고 어리지 않던가. 위쪽 외부 평판을 그렇게 제대로 관리하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거지? 조금만 더 힘주면 위고 아래고 잘 속여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속은 어떻든 겉으로는 문제 없어 보이게 말이다.

“걔는 일을 못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멍청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물론 위에서도 꽤 좋아하는 것 같았고, 팀 성적도 좋아 보였어. 갑자기 왜 그러는 걸까?”

[뭐… 아무래도 지금은 은퇴하긴 했지만 전 장관 후보…, 그러니까 스팬다인 씨와 라이벌 관계였던 레오르도 씨도 좀 비슷했습니다. 열등감이 심해서요. 은퇴한 이유도 스팬다인 씨가 장관이 됐기 때문이니…]

“아…?”

[그래서…, 그겁니다. 스팬담 씨만 아니었으면 자기가 장관이 될 수 있었는데 스팬담 씨한테 뺏겼다고 생각해서요.]

“아하…….”

말문이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아는가. 내가 정확히 지금 그런 기분이었다. 스팬담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송화기를 들지 않은 손으로 미간을 엄지로 꾹꾹 눌렀다.

[그래서 그…, 스팬담 씨가 해두고 간 걸 전부 바꾸려고 했는데… 그것도 전부 처리해두고 가서 막혔죠. 또 스팬담 씨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저희 진행 방식을 존중해주셨잖습니까. 근데 거기에 익숙해져 있던 직원들이 스팬담 씨랑 비교하는 얘기도 들리고 하니……. 게다가 스팬담 씨가 CP9분들과 오죽 사이가 좋았습니까. 근데 자기한텐 안 그러니까 그것도 짜증 났던 모양이더라고요.]

“…….”

[그래도 첫 출근부터 이틀 차까진 좀 괜찮았는데 그 뒤부터는 그냥……, 장관실 집기도 다 가져다 버리고 새로 바꾼 건 예삿일이죠.]

“요는 즉……?”

[스팬담 씨가 자기 장관 자리 훔쳐서 멋대로 행동하고 갔는데 거기에 다른 사람들도 다 도둑질로 장관을 한 스팬담 씨가 좋다는 듯 구니까 화난 겁니다.]

제리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스팬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즉, 아버지한테 장관 자리를 빼앗겨 은퇴한 남자의 아들이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아들인 스팬담에게 장관 자리를 빼앗겼기에 열받는다, 이건가?

“그러니까 결국, 화풀이 중이다?”

[……뭐, 요약하자면 그렇습니다.]

남과 비교하는 열등감이 정신병으로 오면 답도 없다더니 정말 답이 없다. 스팬담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섯 개째 꽁초를 땅에 비벼끄곤 꽁초 더미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오늘 얘기는 비밀로 해주고….”

[그건 제가 부탁드릴 일입니다. 아무튼 전 잔업 하러 가야 해서….]

“아아, 다음에 술 한 잔 살게.”

[그보다 돌아오시게 되면 승진이나 시켜주십쇼.]

그 노골적인 진심에 스팬담이 웃음을 터뜨렸다. 썩 밉지는 않았던 터라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뭐, 콩밥이나 먹게 될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예? 그게 뭡니까?]

“아니, 쉬어라.”

스팬담이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북적북적해진 거실에서 스팬다인이 퍽 피곤한 낯으로 이마를 붙잡고 있었다. 라스키는 반쯤 해탈한 듯 보였고 말이다.

“아들, 왔느냐.”

“네, 아버지.”

“누구랑 통화를 했기에 이리 오래 걸렸느냐?”

“아는 지인이랑 했습니다.”

스팬담이 가볍게 웃으며 식탁의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꽤 진수성찬이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본 스팬담이 라스키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네가 최고다, 라스키.”

라스키가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휙 돌렸다. 스팬다인이 내 아들한테 무슨 버릇이냐며 잔소리를 해댔지만, 라스키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죽다 살아나더니 더 차가워졌어.

“…저도 도와줬습니다.”

“블루노는 더 최고고.”

“저는…….”

로브 루치가 입을 열었다. 뭐야, 얘도 뭘 도와줬나? 새삼스러운 기분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로브 루치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잘 먹습니다.”

“어어…, 그럼. 우리 루치 잘 먹지…… 응.”

근데 그걸 왜 이렇게까지 분위기 잡고 말하는 건데?

차마 거기까진 묻지 못하고 스팬담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북적북적한 식탁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전생에 자신은 끼지 못했던 가족들의 식탁이 떠올랐다.

지랄한다고 투닥거리는 재브라와 루치에 더불어 시끄럽다고 타박하는 칼리파와 블루노까지 더해지자 식탁은 그야말로 왁자지껄해졌다. 거기에 피곤한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제 딸아이 앞에 슬쩍 반찬을 밀어주는 라스키까지 말이다.

스팬담이 돌연 키득키득 웃었다.

“스팬담?”

왼쪽에 앉아 있던 스팬다인이 그를 불렀다. 왜 웃냐고 물어오는 그 질문에 스팬담이 턱을 괴며 느리게 입을 벌렸다.

“이렇게 둘러앉아 있으니 뭔가 가족 같잖습니까.”

“……으음, 외로우면 아비가 선자리라도 알아봐줄까?”

“장관은 애인 있다는 거다, 챠파파-!”

“음? 그랬느냐? 이 아비에게 서운하게 말도 안 하고. 어떤 아가씨니?”

후쿠로의 말에 연이어 스팬다인이 이야기했다. 그에 스팬담이 새하얗게 질려 고개를 들었다. 후쿠로의 옆에 있던 카쿠가 급히 그의 지퍼를 향해 손을 뻗을 때였다.

“아가씨가 아니라 남자라는 거다, 챠파파-! 여장남자였다는 거다!”

“……으응?”

스팬다인이 후쿠로를 보고 스팬담을 한 번 보았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입을 열었다.

“…농담이지, 스팬담.”

“예? 그게…….”

“일주일 전에는 뜨거운 밤도 보냈다고 했다는 거다, 챠파파팟!”

“제발 닥치게, 후쿠로!”

덜컹, 자리에서 일어난 스팬다인이 입을 떡 벌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입술을 뻐끔거리던 그가 뒷목을 붙잡았다. 스팬담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그게 아니라…….”

“아, 아…….”

쿵, 입술을 달싹거리던 아버지가 뒤로 넘어갔다. 스팬담이 당황함이 역력한 낯으로 급히 스팬다인에게 달려가 그 옆에 주저앉았다.

“아버지? 아버지!”

당황한 스팬담이 그의 몸을 흔들었다. 물론 스팬담의 손으론 제대로 흔들리지도 않았다. 라스키가 짧게 한숨을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진 스팬다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한쪽 팔로 어깨에 둘러멨다.

“라, 라스키…?”

시발, 병상에서 일어난 지 일주일 됐는데 왜 저렇게 멀쩡한 거야. 근손실 왔어야 하는 부분 아니냐고. 라스키는 저보다 머리통 두 개는 더 큰 스팬다인을 힘겨운 기색도 없이 안아들곤 그대로 스팬다인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렇게 호리호리한데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거냐.

“방에 던져두고 올 테니 밥이나 먹어라.”

들어가기 직전 스팬다인을 보며 툭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물론 스팬담도 영혼이 반쯤 빠져나가서 그럴 기력이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말이다.

“장관, 식사하십시오.”

“……입맛 없다. 니들끼리 먹어라.”

“장관은 굶으면 쓰러지셔서 안 됩니다.”

“그리고 시발 장관 아니다. 관뒀어, 그거.”

스팬담이 바닥을 기어 소파로 가려고 하자 로브 루치가 스팬담의 뒷덜미 쪽 옷을 잡아챘다. 스팬담은 분명 앞으로 가는데 어쩐지 몸은 점점 뒤로 질질 끌려갔다.

“난 왜 시발 이렇게 좆도 힘이 없는 걸까.”

“약하셔서 그렇습니다.”

“……누구 나 좀 루치한테서 뺏어줄 사람.”

탁, 문을 닫고 나온 라스키가 로브 루치의 손에서 스팬담의 뒷덜미를 대신 낚아채 의자에 다시 앉혔다. 뺏기긴 뺏겼는데 질질 끌려가는 굴욕이 대롱대롱 매달려가는 굴욕으로 바뀐 것밖에 없었다.

“……좆같은 인생.”

스팬담이 식탁에 앉히곤 한숨을 내쉬었다. 맞은편에 앉은 라스키가 팔짱을 끼곤 물끄러미 스팬담을 보았다.

“왜?”

“성격뿐만 아니라 취향도 독특하구나 싶어서.”

“……하하, 그래. 난 성격도 취향도 독특하다.”

이제 포기하자. 아버지한테까지 알려졌으면 이미 끝났어. 호모로 살아본 적은 없는데 아웃팅 당하는 기분만큼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라스키, 아버지는?”

“그냥 기절한 거다. 멀쩡해.”

“그렇군.”

스팬담이 턱을 괸 채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스팬다인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좋아하지만, 가끔은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를 때가 있었다. 사실 자주 그랬다.

띠링-

스팬담이 알림 소리에 눈을 뜨곤 고개를 들었다.

 

[System 알림] [전체공지]

[★플레이어를 위한 페스티벌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4개월에 한 번! 플레이어를 위한 축제가 돌아왔습니다.

다른 플레이어와 정보를 교류하고! 상의하고! 친구를 맺거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상인에게 정보나 물건을 살 수도 있습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72시간, 격리된 하나의 필드에서 게임을 즐겨보세요!

이번 게임의 제물은~~~ 두둥~~~ 3명!

게임 도중 플레이어 3명이 죽으면 게임이 종료됩니다.

혹은 72시간 동안 3명이 죽지 않으면 랜덤 룰렛으로 선택된 플레이어가 죽습니다!

물론, 참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단, 이 경우 페널티를 받아야 합니다! 이번 페널티는~~? 불참비 500만 코인과 코인샵 5일 제한!

지금부터 7일 뒤, 00시에 플레이어들을 초대합니다!

앗, 그리고 3일 전에는 모두를 위한 특별 퀘스트를 보내줄게요!

페스티벌의 상세 내용이 궁금한 신규 참가자들은 여기를 눌러주세요!]

 

“씨발……?”

거기까지 읽으니 돌연 머리가 지끈거렸다. 스팬담이 반사적으로 이마를 짚었다. 스팬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팬담, 스팬담! 장…, 아니. 너 괜찮냐?”

“아, 아….”

어깨를 붙잡은 재브라의 얼굴을 본 스팬담이 급히 눈을 크게 떴다가 차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서 급히 고개를 숙였다. 스팬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릇을 들었다.

“아, 그…. 미안하다, 재브라. 내가 요즘 잠을 좀 못 잤더니 좀 피곤한가 보다. 선잠 잤는데 좀 안 좋은 꿈을 꿨네. 오랜만에 얼굴 보러 와줬는데 미안, 어, 형님이 내일 일찍 일어날게. 내일 보자. 나, 나 좀 자야겠다.”

스팬담이 제게 꽂힌 시선을 보고 애써 웃으며 말했다. 라스키가 미간을 좁힌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스팬담이 설핏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그릇을 가볍게 흔들었다.

“음식 잘 먹는다, 다들 잘 먹고 푹 자.”

스팬담이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갔다.

“……뭐야? 벌벌 떨면서.”

재브라가 붙잡았을 때 떨던 손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면서 목소리는 멀쩡한 게 신기할 정도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일단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허공을 보더니 왜 저래?”

“귀신이라도 보는 거 아니냐는 거다, 챠파파.”

“당신 귀신도 믿나요?”

“장관이라면 믿을 것 같다는 거다, 챠팟.”

“그건 그렇구먼.”

그들의 시선이 방문에 향했다가 이윽고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이 악몽을 꿨다고 하니 더 끼어들 수도 없었다. 라스키가 미간을 좁힌 채 스팬담의 방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느리게 식사를 시작했다.

“넌 뭐 아는 거 없나, 라스키.”

로브 루치가 물었다.

“모른다.”

라스키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

 

[축제까지 앞으로]

[24:08:11]

 

스팬담은 멍하니 시스템 위에 뜬 숫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장 6일 내내 고민했지만, 5백만 코인을 모을 순 없었다. 저건 그냥 다 참가하라는 거잖아. 아니면 5백만 코인을 내고 참가하지 않는 놈이 있기는 한 거야?

 

[페스티벌 안내서!]

[페스티벌은 기본적으로 모두가 참가해야 하는 정기 이벤트입니다! 물론, 페널티를 받는 것을 감안하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페널티는 매번 달라집니다!)

페스티벌 기간엔 모두 게임을 위해서 커스터마이징한 캐릭터가 아니라 원래 세계에 있던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스킬 등의 시스템은 그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캐릭터의 근력 등은 모두 원래 세계에 있는 자신의 것으로 돌아갑니다!

필드가 그렇게 넓지 않아서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해주세요><☆

페스티벌 진행 중에 플레이어를 죽이면 특별한 아이템을 얻을 수 있으며, 몬스터를 죽이면 코인을 벌 수 있습니다! 필드에만 있는 특별한 약초나 제조법, 물약이나 식재료도 있으니 인벤토리를 적극 활용하세요!

또한, 현재 진행 중인 퀘스트도 똑같이 진행 가능합니다!

모두에게 각자 가면이 주어지고 가면을 쓰고 있으면 서로가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상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있으니 그 점은 안심하시길!

앗, 하지만! 퀘스트를 받은 경우 타겟은 100m 내에 타겟이 있을 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 이레귤러 ‘???’을 찾아라! 퀘스트는 예외입니다.)

축제는 매번 제물의 수가 랜덤으로 정해지며 페널티 역시 랜덤으로 정해집니다!

페스티벌은 캐릭터가 가사 상태에서 진행됩니다! 그러니 페스티벌에서 죽으면, 게임 속 캐릭터도 죽으며 끝이 납니다.

우리 모두 두근두근! 페스티벌을 기다려봐요!]

 

웃음도 나오질 않는 내용에 스팬담은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누가 무슨 스킬을 가졌는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사람을 죽이란다. 스팬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젖히기를 반복하다가 안내서 옆을 보았다.

 

[Quest 알림(페스티벌 전용)] [전체 퀘스트]

[친구 등록!

여러분은 서로 삭막한 플레이어들이네요! 친구를 등록해보세요! 친구를 등록하면 친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고 서로에게 메시지를 보내거나 선물을 할 수도 있습니다!

단, 페스티벌 기간 등록한 친구는 7일 동안 삭제할 수 없습니다!]

이런 조건을 걸어두고 누구를 뭘 믿고 등록해야 하는데.

스팬담이 이마를 짚었다. 7일 안에 찾아와서 죽여도 아무런 말을 못 한다는 뜻이 아닌가. 물론 이거 외의 모든 퀘스트가 문제기는 했다.

 

[Quest 알림(페스티벌 전용)] [칭호 퀘스트]

[신의 심판자.

칭호에는 가끔 진화가 가능한 칭호가 있습니다!

신살자(神殺者)는 당신에게 신을 죽일 권한을 주었습니다. 플레이어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신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세계에는 신이 너무 많은 것 같군요. 한 명의 신을 더 죽이세요!

신들은 이 칭호를 얻은 당신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현존하는 신: ‘악신 우르바노’, ‘역병신 로드’, ‘전쟁신 오르가’]

 

[Quest 알림(페스티벌 전용)] [개인 퀘스트]

[‘정보상인 리비아’를 죽이세요!

축제에선 모두에게 한 명씩 타겟이 주어집니다! 심판자인 당신! 정보 상인의 죄목을 샅샅이 밝히고 죽이세요! 커다란 보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어지는 온갖 퀘스트가 다 죽이라는 것뿐이었다.

3일 전 도착한 퀘스트에 그저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하면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 됐다.

‘정보 상인이면… 양심에 털 난 연인이 있는 걔 말하는 거지?’

나쁜 녀석 같지는 않았다. 물론 직접 만나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녀석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해적의 배에 있는 건 분명했으니까.

‘그것도 어디에 있든 지켜줄 수 있다고 자신만만한 걸 봐선….’

운이 나쁘면 사황의 배일 확률이 높았다. 거기까지 생각하면 정보상인을 죽이는 순간 사황이 자신을 죽이러 올 최악의 사태도 염두를 해둬야 한다는 뜻이다.

애초에 나쁜 새끼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뭔 죄를 지었다고 사람을 죽이라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악신 놈은 안전을 죽여야겠지.’

스팬담이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면서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쨌든 목표는 그냥 72시간 동안 잘 숨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가사 상태 사흘…….’

그 말은 즉, 사흘 동안 눈도 안 뜬다는 말이었다. 아버지나 다른 애들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작전 개시일을 오늘로 잡았다. 임펠다운이든 임시 수감소라도 들어가 있으면 일단 사람을 마주칠 일은 없겠지.

‘차라리 임펠다운 레벨 1 같은데 들어가 있는 게 나을지도….’

거기라면 적어도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찾더라도 임펠다운에 어떻게 들어오겠는가.

‘…어, 차라리 이게 낫나?’

장관도 안 할 수 있고 이 개 같은 게임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쫓길 일도 없고 낙인을 찍든 뭘 하든 한냐발이 지키고 있는 임펠다운에 쳐들어올 놈도 없을 것이다.

‘원작 진입하면 주인공이 임펠다운 깨부수니까…….’

도망간다면 그때를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근데 임펠다운이 어땠더라?’

옛날에 체험 겸 아버지를 따라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 지옥이었다. 내가 버티기에는 말이다. 빠르게 마음을 접은 스팬담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정도 사고를 쳤다고 임펠다운에 넣진 않겠지.

‘뭐, 일반 감옥도 있으니까.’

스팬담은 스스로 감방 들어갈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며 침대 위를 데구루루 굴렀다.

‘아니, 일반 감옥은 누구나 침입할 수 있겠군.’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 아니던가? 사이퍼 폴 감옥이면 모를까. 머리가 아팠다. 일단, 오늘 레온을 만나기로 했다. 술이나 한잔 마시면서 대화 좀 나누자고 하니까 의외로 흔쾌히 허락해서 묘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무슨 꿍꿍인지 궁금하긴 했다.

어제, 재브라의 손목에 난 채찍 자국을 우연히 보곤 더 참을 수가 없게 됐다. 애들은 물어도 아무런 일도 없다고 하지 이쪽만 속이 터져나갈 뿐이다.

이런 군대식 문화가 만연한 곳에서 부하들은 상사에게 기본적으로 대들 수가 없다. 특히나 CP9은 직속 명령권자가 지령 장관이 아니던가. 어느 정도 반항은 할 수 있어도 명령 불복은 해선 안 된다. 특히나 CP9은 구안하오라는 작은 곳에 갇혀서 그렇게 배우고 자랐을 것이다.

반항할 수 없는 이들을 때리는 게 학대가 아니고 뭐냔 말인가. 스팬담이 한숨을 내쉬며 나갈 채비를 했다. 애들 다 퇴근하고 밤 9시쯤 만나자고 했으니 슬슬 나갈 때가 됐다.

띠링-!

이제는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은 알림음이 들렸다.

 

[System 알림] [전체공지]

[두근두근! 페스티벌까지 24시간 남았습니다!

고심해봤는데요~ 여러분들의 지난 축제 퀘스트 참여율이 너무 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부터 새로운 룰이 적용됩니다!

페스티벌 전용 퀘스트 중 완료하지 못한 퀘스트의 숫자만큼 현실로 돌아갔을 때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페널티는 랜덤이고 제물로 선택되면 페널티는 없어지니 참고해주세요!]

 

정정한다.

이미 노이로제 걸린 것 같다.

‘그야 제물이 되면 뒈지니까 없어지겠지.’

짓씹듯 생각한 스팬담은 제 책상 위에 있는 각종 알약들을 입에 털어 넣고 한쪽에 챙겨둔 술이 담긴 쇼핑백을 챙겨들었다.

“설계자 어쩌고 새끼 죽인다.”

이번 축제 목표는 그거다.

설계자 죽이기.

스팬담이 방을 나섰다. 이미 퇴근한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스팬담이 쇼핑백을 손목에 걸고 손은 코트 주머니에 쏙 밀어 넣었다.

“오우, 장…. 아니 스팬담. 자다 일어났습니까?”

“조금.”

“근데 어디 가냐는 거다, 챠파파.”

“술 약속이 있어서.”

“아아, 어제 그런 얘기를 했었구먼.”

“앗, 장관 혹시 이거……?”

재브라가 짓궂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려 까딱였다. 스팬다인의 잘게 떨리는 시선이 스팬담에게 닿았다. 바짝 긴장한 스팬담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다른 약속이다.”

“성희롱…….”

“그것도 아니다.”

대답하곤 몸을 돌리려던 설핏 인상을 찌푸린 스팬담이 재브라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가 재브라의 팔뚝을 꾹꾹 눌러 내리며 손목까지 만져보았다.

“뭐, 뭡니까?”

재브라의 의아한 낯에도 스팬담은 꿋꿋하게 등까지 몇 번 꾹꾹 눌러보더니 이번엔 카쿠에게 다가가 똑같이 행동했다.

“뭐 하는 겐가?”

“아아, 뭐… 근육 확인.”

대충 대답한 스팬담이 후쿠로를 비롯해서 칼리파를 제외하고 남은 이들도 똑같이 확인했다. 로브 루치는 위에서 아래로 흘긋 쳐다보곤 말았지만 말이다.

“내가 지금은 약속이 있으니까 너희는 내일 나랑 얘기 좀 하자.”

스팬담이 애들에게 말하고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퍽 걱정스러운 낯의 스팬다인이 스팬담에게 다가와 이마에 손을 올리더니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스팬담이 눈을 끔뻑였다.

“……저 안 아픕니다?”

“열이라도 나는 줄 알았단다.”

“아버지가 아들을 정신병자 취급을 하시다니 소자 마음이 아픕니다.”

“정신병자라니…, 말이 심하구나. 그냥 요즘 힘든 일이 있으면 함께 상담이나 받으러 가보자고 하려던 것뿐이란다.”

스팬담이 이마를 짚었다. 스팬다인이 퍽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고 밤에 자주 거실에 나와 있잖으냐, 한숨도 자주 쉬고……, 영 우울해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다. 무슨 일 있으면 아비에게 얘기해주렴.”

스팬다인의 말에 스팬담이 목덜미를 꾹 눌렀다. 그가 흘긋 스팬다인을 보고 덤덤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허공에 시스템이라는 이상한 홀로그램이 떠요, 근데 저를 죽이러 오는 사람이 존나 많대요. 근데 저도 누굴 죽이래요. 사흘 뒤엔 가사 상태에 빠져서 데스 게임에 참여해야 해요,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대체가 미치지 않고 전할 수 있는 내용이 단 한 톨도 없었단 말이다.

“그런 거 없습니다.”

스팬담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꼭 말씀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십쇼, 아버지 은퇴하실 때까지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을 테니까요.”

“효도는…….”

“아버지, 절 사랑하시잖습니까. 제가 살아서 곁에서 숨쉬고 있는 게 제일 가는 효도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없구먼.”

“그리고 저 애들을 잘 키워서 나중에는 쟤네들한테 효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아버지도 지금부터 잘해두십쇼.”

스팬담이 뻔뻔하게도 CP9을 가리키며 말했다. 스팬다인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고 CP9도 그야말로 어이없는 표정으로 스팬담을 보았다. 그러나 스팬담은 아주 뿌듯한지 혼자서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아, 라스키도 칼리파한테 잘해둬. 늙어서 버림받아서 뒷방 늙은이 되면 슬프다.”

“……신경꺼라. 내 몸 하나는 알아서 건사하니까.”

“에이, 나이 들면 외롭다. 기왕 눌어붙은 거 여기서 아버지랑 오순도순 살아.”

스팬담이 사양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까지 쳐가며 말했다. 라스키는 말문이 막히는 걸 참지 못했다. 제멋대로 말을 끌고 가는 건 여전한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어이가 없어서 라스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대체 왜 나이 들어서까지 저 인간과 얼굴을 마주해야 하지?”

“…어이, 라스키. 누구는 좋댔나? 어이가 없군. 아들아 나도 저런 배은망덕한 싸가지는 사양이다.”

“마찬가집니다.”

“이야, 사이도 좋고 딱이네. 자식들도 여덟이나 있고 다들 외롭진 않겠다.”

스팬다인과 라스키의 표정이 동시에 미묘해졌다.

“여덟?”

“네.”

스팬담이 자신과 CP9 애들을 한 명씩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스팬다인과 라스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스팬담의 말에 더 대꾸할 말을 찾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카쿠가 슬쩍 손을 들었다. 스팬담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쿠가 입을 열었다.

“난 굳이 해야 한다면 자네 아들이 좋네만.”

“찬성, 그럼 카쿠는 내 아들. 할아버지 되신 거 축하합니다, 아버지.”

“……아니, 아들아?”

“네, 아버지.”

“…아비는 아들이 홀아비인 건 좀 싫단다.”

“장성한 암살자 아들도 마음 넓게 받아줄 여자를 찾아보겠습니다. 어차피 아빠 아들 새끼 호모라서 자식은 입양해야 합니다.”

스팬담이 장난스러운 낯을 한 채 카쿠를 보며 말했다. 카쿠가 키득키득 웃었다. 스팬담이 짓궂은 낯으로 마주 웃어주곤 다시 입을 떡 벌린 스팬다인을 보았다. 그가 스팬다인의 턱을 손수 닫아주고 제 아버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한동안 손주랑 자식들 좀 잘 부탁합니다. 아버지, 라스키.”

“…….”

“…….”

이제 말문이 막힌 두 사람은 아무런 얘기도 하지 못했다. 스팬담이 막 현관문을 여는데 뒤늦게 스팬다인이 입을 열었다.

“너무 늦지 말고 조심히 들어오거라.”

멈칫한 스팬담이 설핏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근데 늦을 수도 있으니 먼저 주무십쇼.”

“…근데 한동안?”

스팬다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뒤늦게 스팬담의 여상한 말에서 미묘함을 찾아낸 탓이었다. 그에 로브 루치의 시선이 설핏 가늘어졌다.

이내 라스키가 한숨을 내쉬며 주방으로 들어가고 블루노가 그 뒤를 따랐다. 카쿠와 칼리파가 일어나 식기를 놓고 앉아 있는 이들이 시시덕거리며 대화를 나눴다.

‘…내 아들은 도대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턱을 괸 스팬다인이 일련의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각기 따로 자란, 오로지 누군가를 죽이는 것만이 삶의 목표인, 누군가의 죽음에서나 쾌락을 느끼는 병기들에게 가족이라니 가당키나 한 말이던가.

애초에 그런 단어의 뜻도 모를 녀석들이다. 가족이 뭔지도 사랑이나 애정이 뭔지도 하물며 우정이나 유대감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지. 제 자식을 차갑게 대하던 라스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뭐, 변하긴 했나.’

스팬담이 준 펜던트부터 시작된 변화가 결국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던 라스키를 이 북적거리는 공간에 끌어 앉혔다.

툭, 라스키가 스팬다인의 앞에 그릇을 내려 놓았다.

“드십시오.”

“아, 뭐…. 고맙다.”

스팬다인이 퍽 익숙하지 않게도 감사를 입에 올렸다. 왜냐하면 그동안은 그가 해주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따로 말을 전하지도 않았던 탓이었다. 라스키도 그에 멈칫하며 설핏 미간을 좁혔다. “왜?”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자 라스키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아닙니다.” 짧게 대답하곤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젠장, 맛있어서 문제라니까.”

라스키 자식, 요리를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불만스럽게 읊조리며 스팬다인이 괴었던 턱을 풀며 식탁을 보았다.

그럼에도 뭐, 형태가 어떻든 간에, 이 북적북적한 공간은 가족이라는 말이 조금은 어울리는 모습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물론, 앞에 ‘괴상하고 독특하며 어딘가 어긋난’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

 

로브 루치는 세상이 퍽 지루했다.

강자인 그에게 약자들이 넘실거리는 세상은 그저 심심한 것뿐이었다. 정당한 살인을 위하여 정의라는 이름 아래에 숨은 그림자 속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충동을 다 채우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강해지는 자신이 마음에 들었고 인간이 죽을 때 흩뿌리는 그 냄새를 아주 좋아했다. 피 냄새는 그를 꽤 흥분시키곤 했다.

살육, 강자와의 싸움, 그 외의 것에서 흥분이나 쾌락이나 즐거움을 느낀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만 그는 최근 근 2년 퍽 재밌는 것을 만났다.

스팬담이라는 남자는 첫 만남에서 그를 여상한 낯으로 속여먹고 감히 로브 루치를 떨쳐 놓은 채 혼자서 임무를 완수했고 다시 만났을 땐 그런 일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퍽 반갑게도 그를 맞이했다.

위험한 상황에서 도와주지 않는다고 했을 때도 별로 아쉬운 기색은 없었고 그들이 매일 찾아가 귀찮게 해도 난감하다는 표정은 했을지언정 그들을 적극적으로 떨쳐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매번 장관이 되어달라는 말에는 거절을 내뱉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낯으로 그들을 보며 쓸데없이 머리를 쓰다듬고 용돈을 쥐여주곤 했다. 그리곤 급기야 스팬다인을 다시 장관직으로 떠밀기까지 했고 말이다.

그럼에도 남자는 결국 장관이 되었다.

사고방식은 한없이 괴짜이면서 거친 말투와는 다르게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무르고 심지어는 심심하면 뼈가 부러질 정도로 약하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괴물’이니 ‘병기’니 하며 두려워하며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그들의 앞에서 단 한 번도 두려운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본인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보고하러 오는 놈들도 그들이 장관실에 앉아 있으면 놀라는 것부터 시작했고 임무를 다녀오는 그들을 마중 나오는 놈들도 호들갑을 떨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썼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빌빌거렸다.

약자가 그러는 것은 당연하다. 로브 루치는 단 한 번도 그 사고방식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장관이기에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가?

로브 루치는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이미 장관을 그만둔 그가 내어준 집 열쇠에서부터 도출할 수 있었다.

그는 장관을 관둔 지금도 여전히 그들을 어린애로 취급하며 용돈을 쥐여주고 스스럼없는 칭찬을 하고 함께 장이나 보러 가자고 권유하고 둘러앉아 게임을 해준다. 그가 사이퍼 폴에 출근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일상은 똑같았다.

그러나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가진 힘만은 믿고 있는 게 보였다. 짜증 나서 제 성격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내질렀다가도 아, 이건 안 되겠다 싶으면 스스럼없이 그들의 뒤로 슬쩍 숨는다.

그 솔직함도 로브 루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약한 놈이 강한 척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약한 것을 약한대로 보여주는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그는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감투를 썼다고 했지만, 분에 넘치는 감투를 쓰고 버거워하고 있는 것은 현 장관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로브 루치는 살면서 그리 놀랄 일이 많지 않았고 그에게 감흥을 줄 수 있는 일은 더욱이 없었다. 500명의 인간을 죽일 수 있었던 건 확실히 꽤 즐거운 일이었고 혁명군의 지부장과 싸우던 것도 꽤 재밌던 일이었으며, 스팬담이 장관이 된 것도 꽤 흥미가 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단언컨대 로브 루치는 오늘만큼 전율이 이는 날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강자가 이기는 것만큼이나 약자가 지는 것은 당연하다. 약자는 강자 앞에서 반드시 무릎을 꿇고 그 강함 앞에 원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 명제는 오랜 시간 로브 루치의 안에서 굳건해졌으면 굳건해졌지 무너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 로브 루치는 아주 조금 그 생각을 고쳐먹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사방에서 풍기는 피 냄새와 눈앞에 보이는 피비린내 나는 풍경, 그 사이로 풀풀 풍기는 알코올의 냄새와 쌉싸름한 담배 냄새. 그리고 그사이 피에 절어 퍽 무심한 낯으로 앉아 있는, 한없이 약자의 입장에 있던 남자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야말로 제가 쓴 왕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깔린 듯 처참한 꼴이 된 명백히 강자였을 쓰레기의 모습까지 모든 것이 로브 루치를 자극했으니까.

“…….”

로브 루치는 눈앞의 풍경을 느리게 눈에 담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아주 천천히 숨을 뱉었다. 모든 풍경이 그의 전신을 자극했다.

“오, 루치 왔냐?”

피에 절어 술병을 쥐고 있던 스팬담이 평소와는 달리 실실 웃으며 말했다. 위스키병이 꽤 많은 걸 보아하니 술을 꽤 마신 모양이었다. 담배꽁초도 바닥에 꽤 쌓여있었다.

로브 루치는 조용히 장관실의 문을 꽉 닫고 한쪽 벽에 기대어 바닥에 앉아 있는 스팬담에게 다가가 그를 보았다.

뺨과 얼굴에는 피가 튀었고 옷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손뼈라도 부러졌는지 손등은 온통 까지고 부어서 엉망이었다.

아마도 현 장관일 것으로 보이는 귀에 피어싱을 단 노란 머리카락의 남자는 머리를 시뻘건 색으로 물들이고 눈과 코를 비롯한 얼굴은 반쯤 함몰되어 있었다. 코뼈는 내려앉고 눈알 하나는 보이지도 않았으며 남은 하나는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광대는 한쪽이 움푹 내려가 꼴이 괴상했다. 옆구리와 배에는 식칼에 찔린 자국이 여럿 있었고 팔다리의 힘줄은 끊긴 듯 흐르다가 굳어버린 피가 보였다.

스팬담의 바로 옆에는 이미 오래전에 피가 굳은 식칼과 살점과 피로 흥건해진 본래 황금색이었을 너클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몸싸움이 꽤 있었던 듯 스팬담의 몰골도 말이 아니기는 했다. 그래도 큰 상처는 없다. 그저 뺨이 조금 부풀고 생채기가 나 있었고 손등이 전부 까져서 붉은 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좀 안쓰러운 부분이었다.

어쨌든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것이 최대의 피해로 보일 정도로 현 장관보다야 상황이 훨씬 나아 보였다.

퍽 멋없는 승리로 보였으나 그 처절함이 로브 루치는 마음에 들었다. 이 무르고 약하며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하는 겁 많은 남자가 오로지 그들을 위해서 이렇게 움직였다.

‘아, 여기까지일 줄이야.’

기실 로브 루치는 스팬담이 그들의 이상을 눈치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를 더 자극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눈치 빠른 남자는 그가 대화 중에 조금씩 흘리는 정보를 잘도 삼켜냈다.

로브 루치는 스팬담과 한 발자국 거리를 두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한껏 까져 여린 살이 고스란히 드러나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손을 살짝 잡아들며 말했다.

지금껏 피는 항상 그를 흥분시키곤 했지만, 오늘따라 코끝을 자극하는 혈향이 퍽 달큼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로브 루치의 덤덤한 질문에 스팬담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더니 앉은 자세 그대로 한쪽 다리를 끌어올려 술병을 든 팔을 올리곤 씩 웃었다.

“애새끼 인성이 좆 같아서 좀 때렸다.”

“근데……, 아직 살아있군요.”

로브 루치는 색색거리는 숨을 내뱉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레온도 로브 루치를 발견한 듯 하나 남은 눈을 크게 뜨고 이빨이 다 깨진 입술을 달싹거렸다. 로브 루치는 무심하게 달싹거리는 입술을 내려다보다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 혀도 잘렸군.

감상은 하나뿐이었다. 그는 퍽 순종적인 낯으로 다시 스팬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명백한 무시에 레온의 눈이 확 커졌다.

스팬담이 술병을 내려놓더니 로브 루치가 잡은 손을 빼고 술병을 놓은 왼손을 다시 루치에게 쥐여주곤 오른손으로 바닥에 굴러다니던 식칼을 쥐어 그대로 레온의 심장을 푹 찔렀다. 레온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죽었다.

그 스스럼없는 행동에 로브 루치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걸 억눌러야 했다. 약한 이 남자가 때때로 어딘가 모럴이 어긋난 짓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런.”

한동안 함께 했던 장관의 죽음에 로브 루치는 짧은 감상을 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팬담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어제 이놈이랑 술을 새벽까지 마셨고 새벽쯤 시비가 붙어서 죽어라 팼다. 그리고 네가 출근해서 문을 여는 순간 식칼로 이 새끼 심장을 찌른 걸 본 거다. 네가 목격자인 거고 나는 명백한 살인자인 거지. 알겠냐?”

“……난감해지실 겁니다.”

“이래야 니들한테 불똥 안 튀고 깔끔해. 그리고 너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달려와서 내 팔 한쪽을 탈골 시켜서 날 제압하고 수갑을 가져와 묶어둔 뒤 신고한다.”

스팬담이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로브 루치는 흘긋 그를 보곤 그의 까진 손등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히 충동적으로 입술을 가져다 대고 피를 가볍게 빨아들였다.

몽글몽글 맺히는 피를 쭙 빨아들인 루치가 피 묻은 아랫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그에 스팬담이 눈을 끔뻑였다.

“……음, 루치. 혹시 배고프냐? 표범이라 피 냄새 맡으면 사람도 고기처럼 보인다거나?”

“피를 좋아합니다.”

“혹시 전생에 뱀파이어?”

그 말도 안 되는 말에도 로브 루치는 가볍게 웃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팬담을 뒤로 돌려 엎어뜨렸다. 무릎으로 그의 척추 정 가운데를 가볍게 누르고 오른팔을 붙잡은 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플 겁니다.”

“……그래 보인다, 시발. 잠깐만.”

스팬담이 팔을 뻗어 왼손으로 술병을 가져와 벌컥벌컥 한참을 들이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로브 루치가 그대로 스팬담의 어깨를 힘껏 잡아당겼다. 우드득, 어깨가 탈골되는 소리가 났다.

평소에 엄살도 많은 남자라 비명이라도 내지를 줄 알았는데, 스팬담은 비명은커녕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눈에 실핏줄이 터지도록 부릅뜨고 버티는 그 모습을 보고 로브 루치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입술이 진득하게 호선을 그렸다. 로브 루치는 이 남자가 이 정도로 미친 남자여서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미친 집단을 통솔하는 남자가 그들보다 더 미쳐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약해빠진 주제에 저보다 훨씬 강한 놈을 총도 아니고 오로지 주먹으로 개 패듯 패서 죽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피를 뒤집어쓰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으며, 뺨에 튄 살점을 닦는 대신 퍽 느긋한 낯으로 그 앞에서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스스럼없이 심장을 찌르는 손에는 망설임도 죄책감도 없는 것 역시 마음에 들었다.

아픈 것이 싫다고 그렇게 말했으면서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것까지도 그의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했다.

이 모든 일을, 오로지 그들을 위해서 행했다는 것까지.

이것이 좋다.

누군가 제 머리 위에서 상사 노릇을 하고 명령을 내리고 이용할 것이라면 그게 이것이었으면 했다. 로브 루치는 차오르는 만족감을 애써 내리누르며 언제나와 같은 낯으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죽였습니까? 쓰레기라고 한들 장관의 도력으론 무리였을 텐데.”

로브 루치는 어딘가에서 수갑을 가지고 와서 스팬담을 뒷짐을 지게 한 채 수갑을 채우며 물었다. 스팬담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약한 어른에겐 약한 어른만의 비겁하고 비열한 방법이 다 있어요.”

“어쩌실 겁니까?”

“뭐…, 감방에서 좀 썩다 나오지 않을까? 아버지께 죄송해서 곤란하네. 하나뿐인 아들내미가 맨날 사고 치다 이제 살인자 딱지까지 달게 생겼으니…….”

스팬담이 거무죽죽한 낯으로 말했다. 사람을 죽이고 그 앞에서 태연하게 읊조리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나직한 말이었다.

“장관 자리는 또 공석이군요.”

“이야, 미안하다. 나도 참 한순간의 충동을 못 이겼지 뭐냐.”

거짓말.

로브 루치는 그의 태연하고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에서 거짓을 읽어냈다. 어제, 술을 마시러 나갈 때부터 이미 죽일 생각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로브 루치가 엎어진 그를 바로 앉히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거짓말을 못 하시는군요.”

“그래? 나 정도면 꽤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스팬담이 고개를 젖혔다. 로브 루치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다. 허공을 보는 듯한 시선. 단지 멍하니 허공을 본다기에 그의 눈동자는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뭔가를 읽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셨는데 지금 어떤 기분입니까?”

물끄러미 그를 보던 로브 루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에 허공을 보던 스팬담의 시선이 로브 루치에게 닿았다.

“어떤 기분이냐고…?”

그는 설핏 미간을 좁히며 되레 반문하더니 이윽고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묶인 손을 짤랑거리며 움직였다.

“…그냥 찝찝해서 존나 씻고 싶은데. 눌어붙은 피가 다 굳어서 기분 나빠.”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힌 그가 말했다. 그 천연덕스러운 말에 로브 루치가 낮게 웃었다. 스팬담이 뭐가 그렇게 좋은데 웃냐고 물었다. 로브 루치가 멈칫했다. 뭐가 좋으냐고?

“글쎄요, 장관께서…….”

“……?”

“저희를 꽤 좋아하신다는 걸 알아서 기분이 좋은 모양입니다.”

“……하?”

스팬담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리며 반문했다. 로브 루치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사람을 부르기 위해 나가려는 때였다.

“그걸 이제야 알았냐? 존나 표현했다고 생각했는데……, 시부럴.”

기껏해야 그런 거 아니라는 말이나 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을 웃도는 대답에 로브 루치가 문고리를 붙잡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랬습니까?” 나직하게 덧붙인 그가 밖으로 나가 다른 요원들을 불러세웠다.

전 장관이 현 장관을 살해했다는 희대의 사건에 사이퍼 폴이 발칵 뒤집힌 건 그로부터 30분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

 

[04:11:37]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간을 올려다보며 스팬담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시발 그 지옥 데스 게임에 참여할 시간이 앞으로 4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니 말문이 막혔다.

탈골되었던 어깨에 붕대를 감은 그는 취조실에 앉아 제 전 상사, 그러니까 게르니카를 마주 보았다.

게르니카는 드물게도 분장한 낯 위로 짜증과 황당함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일그러진 낯을 스팬담은 무심히 마주 보다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슬쩍 시선을 내렸다.

다른 건 아니고 뒤에 있는 아버지 시선이 무서웠고 무심한 낯으로 바라보고 있는 라스키의 시선을 어쩐지 마주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니 라스키는 왜 벌써 복귀한 거야?’

스팬담은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대체 왜 그런 거지?”

“글쎄요, 술을 너무 마셔서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술을 너무 마셔서 사람을 몇 시간이나 때려서 죽인단 말인가? 아니, 대체 어떻게 죽였지? 자네한테 질 정도로 약한 자가 아니었을 텐데.”

게르니카의 의문에 스팬담은 또다시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술을 과하게 마셨더니 정말로 골이 울렸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수갑을 찬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누르더니 대답했다.

“기억이 안 납니다.”

“……내가 지금 장난하자는 걸로 보이나?”

“위스키를 몇 병을 마셨는데요. 기억이 안 나는 걸 어쩝니까.”

퍽 껄렁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게르니카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스팬담이라는 남자가 이유 없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을 거라는 건 게르니카도 알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사람을 만나다 보면 됨됨이가 보이는 법이었다. 그는 말이 거칠고 때때로 주먹이 먼저 나가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남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게르니카는 ‘에르니’가 아니었고 눈앞의 남자도 그의 술친구인 ‘아담’이 아니다.

“스팬담.”

나직한 부름에 스팬담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가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예, 아버지.”

“넌 지금 CP9의 지령 장관을 죽였다, 알고 있느냐?”

“그렇습니까?”

스팬담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스팬다인과 시선은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천천히 닫았다.

“어제 술을 마시러 간다는 상대가 레온 장관이었느냐?”

“네.”

“네가 이유 없이 누굴 죽일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안다. 무슨 일이 있었니.”

스팬다인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최대한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기실 그는 정말로 화가 났다. 정말로 장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죽이고 싶었으면 조용히 처리해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대체 이렇게 화려하게 일을 벌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스팬담은 그런 스팬다인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소 건성으로 입을 열었다.

“술 마시면 사람이 개가 될 때가 있는 겁니다. 술 마시다가 재수 없게 굴어서 시비가 붙었습니다. 정신 차리니까 그 상태였고요.”

“스팬담-!!”

흠칫, 드물게도 스팬다인이 높인 언성에 스팬담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곤 고개를 들었다. 스팬담의 눈이 확 커진 채였다. 제 반응에 스스로도 당황한 듯 손을 들어 눈두덩을 한차례 꾹 누르더니 이내 설핏 미간을 좁혔다.

“……예, 아버지.”

“네가 이렇게 나오면 뭘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 문제가 있으면 아비가 항상 얘기하지 않았느냐. 얘기 좀 해달라고.”

“…….”

스팬담이 짧은 숨을 뱉었다. 설핏 시선을 내리 깐 그가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더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듯 옆으로 고개를 툭 떨구며 그가 입을 열었다.

“기억이 안 나는 걸 어떡합니까, 뭐….”

“…….”

스팬담의 대답에 스팬다인이 한참이나 말없이 그를 보다가 몸을 휙 돌려 나갔다. 스팬담이 흘긋 고개를 들어 취조실을 빠져나가는 스팬다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보다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취조실 한쪽에 난 창문을 보았다.

 

[03:37:56]

 

스팬담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스키.”

스팬담의 부름에 말없이 서 있던 라스키가 그를 보았다. 스팬담은 그를 부르고도 한참이나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혹시 며칠 뒤에 내 신변에 문제가 생겨도 아버지 탓 아니니까 말이다. 그땐 좀 잘 부탁한다.”

“……무슨 소리지?”

“뭐…, 아주 만약의 얘기니까 말이다.”

자식 새끼가 갑자기 죽으면 당황할 것 아닌가. 스팬담은 게르니카와 라스키의 의아한 시선을 느끼면서도 어깨를 가볍게 으쓱여 대답했다.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라스키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너는 타인에게 좀 기댈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스팬다인은 어제 새벽까지 널 기다렸다.”

“……음, 일찍 주무시라고 말씀드렸는데 말이지. 근데 라스키 넌 그걸 어떻게 알아?”

“거실 밖에서 그렇게 서성거리고 있으면 알 수밖에 없다.”

라스키의 짜증 섞인 말에 스팬담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결국 걱정했다는 거잖아? 스팬담이 느리게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뭐야, 우리 아버지 걱정했구나? 라스키.”

“…헛소리.”

스팬담의 웃음기 섞인 말에 라스키가 몸을 홱 돌려 취조실을 벗어나려 들었다. 스팬담이 절그럭거리는 수갑을 들어 살살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 잘 좀 달래줘, 라스키.”

“…내가 왜 그놈을.”

라스키가 스팬담을 한 차례 노려봤다가 그대로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말은 저래도 스팬다인에게 갔을 게 뻔했다. 의외로 차갑긴 한데 동료로서 오래 지내서 그런지 서로 잘 챙겨준단 말이지. 하긴, 칼리파도 은근히 챙겨줬지.

“방해꾼들도 사라졌으니 좀 솔직하게 말할 마음은 생겼나?”

“할 말은 똑같습니다. 술을 너무 마셔서 기억이 안납니다.”

스팬담은 전생에 종종 했던 변명을 여유롭게 입에 올렸다. 기억이 안 난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이대로 있으면 징역형일세.”

“사람을 죽였으니 콩밥 먹는 건 뭐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스팬담이 태연하게도 어깨를 으쓱였다. 게르니카는 물끄러미 스팬담을 바라봤다. 저런 눈을 할 때는 물러나지 않는다는 걸 그는 몇 번인가 스팬담과 술을 마시며 깨달았다.

“그럼 한 가지만 솔직히 말해주게. 그 남자의 무엇이 자네를 화나게 했지?”

“…….”

스팬담이 게르니카를 가만히 바라봤다. 스팬담이 설핏 미간을 좁혔다가 주변을 한 번 쓱 보더니 짧은 한숨 끝에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상사님, 난 말입니다. 나를 욕하고 비웃고 깔보는 건 뭐 상관없단 말입니다. 내가 호모라는 소문이 나든, 여장남자인 애인이 있든, 횡령했다고 하든, 낙하산이라고 비웃든 사실 그런 건 얼마든지 웃으며 넘어갈 수 있고요. 그러니까 그딴 건 관계가 없단 말이죠.”

껄렁하게 앉아 있던 스팬담이 돌연 상체를 숙여 수갑을 찬 손을 툭, 책상에 올리며 게르니카와 부쩍 가까워졌다.

“근데 말입니다. 내 주변 우습게 보는 건 못 참겠단 말이지. 내 술친구한테 괜히 시비를 걸던 그 양아치 새끼가 나한테 한대 얻어맞았듯이 말입니다.”

“……!”

나직한 스팬담의 말에 게르니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예상치 못한 말에 게르니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옛날부터 내 거에 손을 댄 새끼는 도통 참아지지 않더란 말입니다. 그것도 이쪽이 심혈을 기울여 돌보고 있는 거에 흠집을 냈는데……, 사람 기분도 모르고 그걸 시시덕거리며 말하고 있으면…, 사람이 순간 회까닥 돌고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양아치라도 된 양 퍽 껄렁하게 말하던 스팬담이 순간 눈꼬리를 휙 휘며 말을 마쳤다. 그 반쯤 풀린 눈을 보며 게르니카가 입을 다물었다. 사고방식이 독특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미쳤을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뭐, 기억은 잘 안 나지면 그랬을 수도 있다~ 이런 겁니다. 뭐, 시간 낭비 그만하시고 가십쇼. 재판 일정 정해지면 말씀해주시고 말입니다.”

“자네 덕분에 장관 자리가 또 공석이군.”

“거……, 그건 미안하게 됐습니다.”

게르니카의 피곤 섞인 타박에 스팬담이 그 점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뺨을 긁적이며 슬쩍 눈치를 살폈다. 게르니카가 헛웃음을 흘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죽일 거면 좀 조용히 죽이지 그랬나.”

“…이편이 다른 놈들 안 끌어들이고 확실하잖습니까.”

“자네 기준은 정말 알 수가 없군.”

스팬담이 어깨를 으쓱였다. 게르니카가 말없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원들이 들어와 그를 다시 사이퍼 폴 지하의 감옥으로 이끌었다.

 

[02:58:31]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쿵쿵 심장이 뛰었다.

스팬담이 복도를 걸어가며 미간을 문질렀다. 머리도 지끈거리고 속은 울렁거렸다. 지하감옥으로 가는 도중, 멀지 않은 곳에서 기대어 있던 이들이 스팬담을 발견한 듯 성큼성큼 걸어왔다. 바짝 긴장한 요원들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급히 경례했다.

“C, CP9분들이 아니십니까. 여, 여긴 어쩐 일로…….”

그들은 두 요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가볍게 옆으로 밀어버리곤 스팬담의 앞에 섰다.

“당신 대체 뭔 짓을 한 겁니까!”

재브라가 스팬담의 코앞에 서자마자 언성을 높였다.

그에 난감한 낯을 한 스팬담이 흘긋 로브 루치를 보았다. 잘 좀 설명해달라니까 도통 잘 설명한 것 같지 않은 반응이었다. 로브 루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말이다…, 술 먹다가 충동적으로 말이지…….”

아하하, 어색하게 웃는 얼굴에선 로브 루치가 처음 봤을 때의 그 미묘한 건조함도 취조실에서 게르니카와 대화를 나눌 때의 서늘함이나 껄렁함도 없었다. 그저 거기엔 어딘가 조금 부족하고 엉성한 남자가 서 있을 뿐이었다.

“뭐어……, 빵에서 좀 썩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죽이고 싶었으면 저희에게 말씀하시지 그랬나요.”

“아냐, 칼리파. 정말 충동적이었던 거라….”

술 마시는데 열받게 하잖냐, 덧붙이는 목소리엔 난감함이 묻어났다. 로브 루치는 아직도 입안에 맴도는 듯한 혈향에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핥았다.

“…다친 데는 없는 겐가?”

“별로? 싸우다 뺨 한 대 맞아서 눈이 핑 돌았던 것 빼면 괜찮지.”

“어깨 붕대는 왜 그러십니까?”

블루노의 물음에 스팬담이 흘긋 제 어깨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태연자약하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술 먹고 어디 굴렀나? 그 새끼랑 싸우다 그랬을 수도 있고.”

“내가 다시 죽이고 오겠다는 거다, 챠파파.”

“요요이!! 찬성이일세~~ 톡 치면 부러질 사람을 때렸다니 이 무슨 잔악무도한 짓인가~~!!”

“아니, 그쪽은 일단 죽었거든.”

일단 덮어놓고 제 편을 들어주는 CP9의 모습에 스팬담이 눈을 두어 번 끔벅이며 말했다. CP9의 등장에 그를 연행하던 요원들이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걸 발견한 스팬담이 웃으며 그들 사이를 가볍게 가르곤 두 요원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렸다.

“너희 이만 돌아가라. 애들 겁먹었잖냐, 난 감옥 가야 해서 말이다.”

요원들이 살았다는 눈으로 스팬담을 보더니 슬쩍 그를 다시 연행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CP9은 느긋한 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자네, 어떻게 되는 겐가?”

“말했잖아, 아마도 감방에서 좀 썩는다고. 설마 사람 하나 죽였다고 사형이 선고되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큰 죄를 저지른 놈들도 임펠다운에 수용되기만 하지 않았는가. 이 세계에서 살인은 그렇게까지 무거운 죄가 아닌 듯했으니 말이다.

스팬담이 가볍게 하품했다.

“스, 스팬담 씨…….”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스팬담이 힐긋 요원들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 대화 끝. 얼른 가라. 애들 울겠다.”

재브라가 짜증스럽게 시선을 내려 요원들을 봤다. 요원들이 히익! 소리를 지르더니 스팬담의 뒤에 도로 숨어버렸다. 그에 카쿠와 칼리파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우리가 뭔 짓 한 것도 아니고 왜 벌벌 떨고 지랄이냐.”

“겁쟁이라는 거다, 챠파파.”

“아무런 짓도 안 할 거야, 괜찮아.”

스팬담이 요원들의 수갑을 찬 손으로 제 뒤에 숨은 요원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러자 로브 루치가 손을 뻗어 두 요원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스, 스팬담 씨!!”

“루치.”

“잠깐 대화만 좀 하겠습니다.”

스팬담의 만류에도 꾸역꾸역 요원들을 조금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간 로브 루치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를 말했다. 그러자 요원들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울상이 되었다. 고개를 저으며 그들이 스팬담을 보려고 하자 블루노가 슬쩍 그 시야를 가려버렸다.

스팬담이 헛웃음을 터뜨리곤 어깨를 으쓱였다. 이윽고 로브 루치가 수갑 열쇠를 받아서 그들에게 다가왔다.

“제대로 일을 수행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서 감옥까지는 저희가 데려다 드리기로 했습니다.”

“협박했지?”

“벌레 따위를 협박해서 뭐 하겠습니까.”

스팬담이 힐긋 뒤를 보았다. 하나는 울고 있고 하나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요원을 보며 스팬담이 한숨을 푹 내쉬곤 요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뭔가를 말하며 두 요원을 도닥거리던 스팬담이 두 사람을 자리에서 일으켜주었다. 스팬담이 버릇처럼 지갑을 찾으려고 했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가보라는 듯 가볍게 손짓했다.

“정말 별것에 다 신경을 써주시는 것 같습니다.”

블루노가 스팬담이 달래준 요원들을 한 차례 바라보며 말했다. 스팬담이 블루노의 팔뚝을 가볍게 두드리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것보단 너희를 무서워하는 게 좀 그렇잖냐. 재브라 말마따나 별짓을 한 것도 아닌데.”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양이 늑대를 무서워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죠. 따지고 보면 장관이 특이한 거긴 합니다.”

재브라의 말에 스팬담이 어깨를 으쓱였다. “장관 아니라니까.” 덧붙이는 목소리가 퍽 부드럽다. 별것 아닌 잡담을 하고 있으려니 감옥에는 금세 도착했다.

“여기 너무 어둡고 음침하고 더러운 거 아닌가요? 불결하네요.”

“으음, 감옥이니까.”

“밥은 제대로 나오냐는 거다, 챠파파.”

“모르지만,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아으으!! 병에 걸릴 것 같소이다만…!!”

“아무래도 감옥이니까.”

“엄살이 많은 자네가 있기엔 너무 척박하지 않은감?”

“음, 일단 죄인이니까.”

스팬담이 들어갈 감옥을 본 이들이 내뱉은 감상평에 그가 한마디씩 덧붙여줬다. 로브 루치가 감옥 문을 열었다. 스팬담이 안으로 들어가기 전 수갑이 풀렸다. 그제야 팔을 가볍게 흔들어본 그가 안으로 들어가 딱딱한 철제 침대에 털썩 앉았다.

“뭘 그렇게 보냐, 사람 민망하게. 얼른 가라.”

철창을 사이에 두고 있으려니 민망해진 스팬담이 뺨을 문지르며 손을 휘휘 저었다.

 

[02:12:44]

 

한 사흘 동안 쥐 죽은 듯 잠만 자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게 여기면 좋겠는데 말이다.

“면회고 뭐고 필요 없으니까 오지 마라.”

“싫습니다.”

“…우리 블루노가 반항기가 왔나.”

충격을 받은 듯한 스팬담의 말에 블루노가 눈살을 찌푸렸다가 마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혼자 두는 편이 더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에이, 사람을 무슨 그렇게 사고뭉치 보듯이.”

“요요이, 맞는 말이도다~~”

“나보다 더 사고뭉치라는 거다, 챠파파팟.”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구먼.”

그들의 말이 한 마디씩 이어질 때마다 심장을 부여잡던 스팬담이 이윽고 철제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심장이 걸레짝이 됐어……. 우리 애드링 단체로 사춘기가 왔나…? 이 아저씨는 슬프다…….” 덧붙이는 목소리에 우울함이 묻어났다.

“대체 왜 그런 건가요?”

“그냥.”

“그냥?”

“응, 그냥. 술 마시는데 재수가 없었어.”

스팬담이 덤덤하게 대답하더니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더 대화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CP9은 서로가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만나러 와줘서 고맙다.”

“……별거라고. 내일도 오겠네.”

“지금부터 잘 거니까 오지 마.”

카쿠의 말에 스팬담이 조금 차갑게 말했다. 그 매정한 말에 재브라가 퉁명스러운 낯으로 입을 열었다.

“거, 자슈. 누가 뭐라 했습니까? 내일까지 잘 것도 아니면서….”

“내일까지 잘 거다.”

“언제는 일어나겠지.”

“영영 안 일어날 수도 있고.”

그 말에 로브 루치를 비롯한 이들의 시선이 스팬담에게 닿았다. 싸해진 분위기에 스팬담이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이다, 꼬맹이들아.”

“아으으!! 자앙과안,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올시다~~”

“그래도 요즘 피곤해서 좀 길게 잘 수 있다는 건 진짜야.”

스팬담이 붕대를 감지 않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로브 루치가 그런 스팬담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블루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문제가 있으면 상의라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난 너희 상사도 아니고 너희는 내 부하도 아닌데 내가 뭐 하러 그러냐. 꼬맹이들아, 어른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렇게 나오면 나도 앞으로 자네에게 아무런 말도 안 할 걸세.”

카쿠의 말에 스팬담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대단히 심기가 상한 것 같은 목소리에 어색하게 웃은 그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건 좀 다른 얘기지. 난 어른이고 너희는…….”

“상사와 부하가 아니면 남과 다름없는데 뭐 하러 말하는감.”

단단히 화가난 목소리에 스팬담이 뺨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알았다, 내가 잘못했다.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할게. 근데 평소에도 잘 의지하고 있는데.”

스팬담이 꼬리를 말곤 슬쩍 말을 덧붙였다. 동시에 그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하지 않는다는 표정이 적나라했다.

“퍽이나.”

그리고 재브라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눈 그들이 이윽고 감옥을 나갔다. 스팬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00:59:57]

 

적막 속에서 쿵쿵 뛰는 심장 소리만 요란해졌다.

‘이런 병신 같은 게임 속에서 죽으면 인생의 수치다.’

스팬담이 숨을 길게 내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참을 뒤척거리던 스팬담은 머지않아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었다.

 

[00:00:00]

 

이윽고 타이머가 0초를 가리켰다.

 

**

 

빰빠바밤-!

폭죽이 터지고 시끄러운 트럼펫 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스팬담은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주변을 보았다. 온통 새하얀 공간에 덩그러니 그의 몸만 있었다. 심지어 옷 하나 입지 않은 알몸이다.

실환가, 시발.

“수치사 하라고 고사를 지내네, 게임 새끼가.”

내뱉은 목소리가 울리기는커녕 멀리멀리 퍼져나가 기괴한 느낌을 자아냈다.

“페스티벌에 참가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플레이어님!”

허공에서 5-6살의 외향을 한 흰 머리카락의 어린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등에는 무슨 반투명한 요정의 날개 같은 걸 단 채 날아다닐 때마다 금가루인지 뭔지 모를 반짝이를 뿌려대면서 말이다. 한 손에는 별모양이 달린 지팡이도 들고 있었다.

“뭐냐, 이 팅커벨 같은 건.”

스팬담의 퉁명스러운 말에 밀가루 반죽처럼 새하얀 뺨을 가진 소년이 뺨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저는 팅커벨이 아니라고요! NPC이자 안내자 귀염둥이 펠이에요!”

“그러냐. 근데 NPC가 뭔데.”

“NPC에 대해 궁금하시군요! NPC는 논 플레이어 캐릭터! 즉, 플레이어가 아닌 게임 속 안내자를 뜻하는 거예요!”

스팬담이 머리를 긁적이며 펠의 설명을 들었다.

기계가 질문을 듣고 답을 하는 것처럼 목소리는 인간 같은데 묘하게 인간미는 없다. 게다가 귀염둥이고 안 귀염둥이고 스팬담은 이 상황을 얼른 끝내고 싶었다.

“앗, 지금 보니 플레이어님이 그 유명한 이레귤러였군요!”

유명하기는 개뿔이.

스팬담은 기계적으로 과장된 낯으로 활짝 웃으며 말하는 소년을 흘겨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온통 새하얗고 끝도 없이 넓어서 속이 울렁거렸다.

“이레귤러님께선 축제 참가를 위한 캐릭터를 결정하실 수 있어요! 단, 한번 결정하시면 매번 그 캐릭터로 축제를 참가하게 되십니다!”

“……난 이딴 축제 참여하기 싫은데.”

“페널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시면 언제든 참여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지불하시겠습니까?”

돈이 없는데 뭘 지불해야 하는데. 500만 코인은커녕 100코인도 없다. 스팬담이 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시군요….” 아이의 형태를 한 NPC는 축 늘어진 실망스러운 목소리를 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활짝 웃었다.

“캐릭터 외형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팬담]과 [조두혁] 중에 선택할 수 있으십니다!”

스팬담이 그 익숙한 이름에 멈칫했다.

그는 살짝 굳은 낯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 방긋방긋 웃으며 고개를 설핏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차가운 낯을 한 스팬담이 입을 열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이 세계에서 제가 모르는 건 없습니다! 저는 당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당신만을 위한 NPC이니까요!”

서늘한 목소리에도 펠은 정해진 답이 있는 것처럼 방긋거리며 대답했다. 스팬담이 물끄러미 아이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캐릭터를 더 추궁해서 뭐 하나 싶었던 탓이다,

‘스팬담으로 하면 약하기도 하고….’

뭣보다 혹시나 가면이 벗겨졌을 때 정체가 드러날 위험이 있었다. 스팬담의 몸으로 참가하는 건 여러모로 페널티가 컸다. 결정은 빨랐다. 스팬담이 곧 입을 열었다.

“조두혁.”

“네! 조두혁 캐릭터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생의 죽기 전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펠이 해맑게 말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마구마구 흔들었다. 별처럼 생긴 가루가 쏟아져 스팬담을 휘감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온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에 스팬담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몸이 바뀐 듯 시야가 조금 낮아졌다. 그러나 평소와는 다르게 제법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숙이자 양복을 입고 있는 전생의 몸뚱어리가 보였다. 주먹을 꽉 쥐었다 펴자 원하는 만큼 근육에 힘이 확 들어갔다가 풀렸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들거리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니 흰 피부 아래로 오른쪽 뺨에 칼에 긁힌 흉터가 있는 사내가 보였다.

다소 선이 굵은 사내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목덜미를 가볍게 움켜쥐어 고개를 이리저리 꺾어보더니 이윽고 씩 웃었다. 나른하게 풀어져 있던 눈매가 순간 퍽 사납게 구겨졌다.

적당한 근육에 잘 빠진 몸매와 포마드로 갈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상처투성이의 손으로 쓸어올렸다. 손에는 여러 차례 칼을 붙잡거나 찔린 터라 꽤 험한 자상이 많이 있었다. 왼손에는 낡은 싸구려 철제 반지가 몇 개 껴 있는 것이 그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오랜만이군.”

“룰은 간단합니다! 안내문을 받으신 대로예요! 3일간 교류하시고 살아남으시고 퀘스트를 진행하시면 됩니다!”

펠이 하늘을 포르르 날아다니며 말했다. 소년은 곧 지팡이를 휘둘러 별 가루를 사방에 뿌리더니 이윽고 주변에 뭔가 이것저것 생겨났다.

“이쪽에서 가면을 고르시고 이쪽에서 초보자용 무기를 고르시면 됩니다. 무기는 총 2개까지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초보자용 무기가 뭔진 모르겠지만, 뭔 나무 지팡이부터 시작해서 검이니 뭐니 별게 많았다. 스팬담은 물끄러미 무기를 살피다가 피스톨 하나와 단검을 쥐고 홀스터를 양복 자켓 안쪽에 착용한 뒤 총을 홀스터에 넣고 단검은 홀스터 옆에 있는 작은 끈에 묶어 달았다. 마지막으로 호랑이 가면을 쥐고 얼굴에 쓰자 펠이 또다시 지팡이를 휘둘렀다.

“여기가 이번 필드입니다! 숲과 나무 그리고 산이 있고 그 사이에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어요! 첫 시작점은 랜덤입니다! 운이 나쁘면 다른 플레이어와 시작부터 만날 수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아아.”

“그리고 혹시나 제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제 이름을 부르시면 나타나서 도움을 드립니다! 저는 다른 플레이어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펠의 말에 스팬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펠은 포르르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웃었다. 스팬담은 흘긋 요정 날개를 단 꼬마를 보곤 가볍게 몸을 풀었다.

“다른 플레이어의 준비가 다 끝나면 동시에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근데 플레이어님께선 퀘스트 완료 아이템을 하나도 받지 않으셨는데 이유가 있으신가요?”

“퀘스트 완료 아이템이 뭔데?”

“퀘스트창을 열면 받을 수 있는 아이템들이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오?”

펠이 눈을 끔뻑거리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발끝을 기준점으로 뱅글뱅글 돌았다는 게 아니라 정말 몸체가 계속 뱅글뱅글 돌았다는 얘기다. 머리가 오른쪽에 있다가 왼쪽으로 갔다가 아주 난리였다.

“아! 이레귤러님은 시스템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군요.”

“갑자기 끌어들여졌는데 알겠냐?”

“하긴, 이레귤러님은 최근에 각성하신 신규 참가자니까요. 이레귤러님이 참가 중인 게임은 흔히 RPG게임의 인터페이스를 가져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구할 수 있다면 장비도 착용할 수 있고 소생약만 있다면 죽어도 부활할 수 있죠!”

스팬담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 게임이라는 거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스팬담이 팔짱을 낀 채 퍽 내키지 않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펠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퀘스트창! 이라고 말해보세요.”

“퀘스트창.”

동시에 스팬담의 앞에 현재 진행 중인 퀘스트의 상세 설명이 적힌 페이지가 나타났다. 스팬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보고 계신 건 현재 진행목록! 퀘스트 진척 사항이나 때때로 어떤 이유로 갱신되는 경우 그 상세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쪽 탭 옆에 보면 [완료 목록]이라고 써 있죠? 그걸 이렇게 누르시면…!”

펠이 스팬담을 대신해 홀로그램으로 뜬 퀘스트 창의 탭 하나를 클릭했다. 그러자 화면이 바뀌었다. 본 적도 없는 퀘스트 내용이 적힌 화면이었다.

“미처 보지 못하고 놓쳐버린 퀘스트 보상이나 숨겨진 퀘스트 완료 보상이 여기에 뜹니다. 주기적으로 들어가면 좋아요!”

“아…….”

또 뭐가 생겼다. 스팬담은 슬슬 가물거리기 시작한 기억에 미간을 찌푸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과부하가 걸린 머릿속에서 이미 스팬담은 갈 길을 잃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완료된 퀘스트 내용을 물끄러미 보았다.

 

[퀘스트 완료 목록]

<전직: 심판자!>

▷ 당신은 극악의 확률을 뚫고 심판자로 전직하였습니다. 당신은 무분별한 살상이 아닌, 죄인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정하게 하고 죄인이 뉘우침의 마음을 가진 뒤 정당한 방법으로 처벌하였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정의입니다!

보상: 10,000코인, 50% 회복약, 은신 물약, 멸악(滅惡)의 망토.

<칭호: 이레귤러>

▷ 당신은 이 세계에도 저 세계에도 온전히 속하지도 못한 그야말로 어떤 규율과 규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당신만이 유일하게 규칙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습니다.

보상: ‘이레귤러 칭호’, ‘퀘스트: 세계의 구원자.’

<칭호: 신살자(神殺者)>

▷ ‘신’이 아닌 플레이어는 특수 스킬이 없는 한 신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의 영역을 ‘필멸자’인 당신은 이룩했습니다! 신을 죽인 당신에게 경외의 의미로 이 칭호를 수여합니다.

보상: ‘신살자 칭호’, 스킬 뽑기 1회권, 100,000코인, 신절도(神絶刀) 흑(黑).

<정의의 심판자!>

▷ ‘심판’을 이용하여 다수의 ‘악’을 한 번에 뿌리 뽑았습니다. 당신의 정의가 세상을 지킵니다!

보상: 심판의 염주, 1,000코인

<플레이어 킬의 첫걸음!>

▷ 플레이어를 죽인 당신! 드디어 이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군요. ‘플레이어 학살자’, ‘플레이어의 공포’까지 더 많은 플레이어를 죽여 칭호를 노리고 그들의 아이템과 코인을 강탈하세요!

보상: 럭키 아이템 박스, 10,000코인.

<스킬: 간섭 첫 사용!>

▷ ‘스킬: 간섭’의 사용으로 인해 ‘설계자 페르토’가 당신을 확실히 인식합니다. 이레귤러인 당신은 설계자 페르토의 유일한 대적자입니다.

보상: 1,000코인, 비루스의 단검

 

내용을 다 읽은 스팬담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고개를 젖혔다.

‘그냥 집에 가고 싶다.’

특히 마지막 내용을 보니 제가 그때 멍청한 짓을 한 것도 같고. 아니지, 악신에게 죽느냐 설계자에게 찍히느냐 둘 중의 하나였던 걸까?

“……내가 왜 이 페스티벌에 초대된 거지? 난 플레이어가 아니라 이레귤러잖아.”

“관리자 ‘플레이어 0’의 희망이었습니다! 그후, 시스템이 당신을 인식하고 축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딴 개발 하지 말라고.

사나운 인상의 남자가 험악한 낯으로 얼굴을 구기곤 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남들은 퍽 오금이 저릴 법한 낯을 한 남자 앞에서도 펠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설계자 페르토는… 이 게임을 만들었으니까 내가 어디에 있는지 뭘하고 있는지 처음부터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었나?”

“앗, 아닙니다! 플레이어 0도 여러분들과 같은 조건에서 게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퀘스트도 페널티도 모두 똑같이 적용되죠!”

“그럼 시스템이 퀘스트를 만드는 건가?”

“퀘스트는 기본적으로 시스템이 설계자의 의지를 기반으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플레이어 0도 간섭 불가능합니다! 다만, 어떠한 퀘스트의 경우에는 플레이어 0이 가진 스킬에 의해 제작되고 있습니다!”

그럼 그게 그 말 아니냐고.

본인한테 불리한 퀘스트 같은 걸 제작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스팬담의 표정이 미묘해지자 허공을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펠이 마저 입을 열었다.

“플레이어 0은 분명히 시스템의 관리자이긴 하지만, 관리자의 권한을 이용해 특정 캐릭터의 정보를 보거나 특정 캐릭터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룰 위반입니다! 또한 불참 페널티 역시 랜덤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설계자는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이레귤러님!”

그러고 보니 플레이어를 초대할 때도 그놈도 ‘스킬’이라는 능력을 썼었지.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게임을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게임을 끝내는 방법은?”

“퀘스트 1번을 완료하세요!”

펠이 많이 듣는 질문인 것처럼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설계자인지 뭔지를 죽이라는 그 퀘스트였다. 스팬담은 다시 한 번 멍하니 고개를 젖혔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분명히 퇴사를 하고 싶었는데 이제 집에 가고 싶다. 차라리 사이퍼 폴에 10년 근무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자, 모든 참가자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참가자 명단은 아래와 같습니다. 총 14인의 참가자 중에 12인의 참가자가 참여했습니다!”

“잠깐, 나머지 둘은…….”

“두 명의 플레이어는 페널티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시발, 오백만 코인을 지불한 놈들이 있다는 건가? 스팬담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만한 돈을 벌었다는 건 사람을 그만큼 죽였다는 건가? 아니면 또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는 건가.

“참가자 명단을 공개합니다!”

 

[참가자 명단]

[정보상인 리비아

악신 우르바노

수호천사 라파엘

용사 나르바

역병신 로드

전쟁신 오르가

심판자 ???

설계자 페르토

히트맨 데스

테이머 미노스

소설가 로토비나

요리사 대호]

 

[불참자 명단]

행상인 카멜

도박꾼 캐스트

 

이름과 직업들을 가만히 보던 스팬담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앞으로도 이 게임에 계속 참가할 거라고 생각하니 우울함이 배가됐다. 그다지 우울한 성격이 아닌데도 말이다.

 

[System 알림]

[퀘스트 완료 목록 보상을 전부 받으시겠습니까?]

 

스팬담이 확인을 누르고 시스템을 다 껐다.

어쨌든 3일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말이 아니던가. 다른 놈들에게 무슨 스킬이 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스팬담은 맷집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자, 모두 앞으로 72시간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이레귤러님!”

스팬담은 주먹을 꼭 쥐는 어린아이를 보곤 몇 번째일지 모르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빛이 번지며 시야가 반전되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넓은 들판과 교복을 입은 웬 여자 꼬맹이였다. 얼굴에는 여우 가면을 쓰고 있다.

“……꺄, 꺄아아악!!”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벌벌 떨면서 스팬담에게 총을 겨눴다. 덜덜 떨리는 손을 물끄러미 보던 스팬담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가야, 그거 집어넣어라.”

싸울 기분도 아니었고 여자애한테 손을 쓰고 싶지도 않았던 스팬담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에 교복을 입은 여자애가 벌벌 몸을 떨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그대로 뛰어서 도망갔다. 내리쬐는 태양이 퍽 더웠던 터라 스팬담이 양복 재킷을 벗고 와이셔츠 단추를 위쪽에서부터 두 개쯤 풀어헤치곤 소매를 걷어 올렸다.

 

[71:58:34]

 

시간이 길게도 남았다. 여기선 잠도 못 자겠지.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든 방금 도망간 여자애가 타겟 중 하나가 아니라는 건 알겠다. 뭔가 표시가 있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스팬담은 가만히 앉아 인벤토리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122,096코인이 있었다. 그나마 조금 뿌듯해진 기분에 스팬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금 통장 잊고 있다가 찾은 기분인데.’

공짜로 돈 생긴 기분이라는 거다.

걸터 앉아 있던 바위 아래로 내려가 아예 바위에 몸을 기댄 스팬담이 길게 하품을 했다. 게임 속인지 뭔진 몰라도 따뜻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퍽 마음에 들었다. 사방이 뚫린 들판이니 차라리 어디서 누가 오는지 감지하긴 편할 것 같았다.

아예 깍지를 껴서 뒤통수에 댄 그가 그대로 바위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시간도 잘 가지 않으니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다 아새끼들이라는 게 맘에 안 드네.’

누굴 죽여도 잠자리가 영 찝찝할 것 같았다. 그래서 스팬담은 먼저 건들지 않는 한 손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래봐야 세상은 그의 마음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말이다.

잠을 잔지 얼마나 됐을까?

코앞에서 느껴지는 어설픈 살기에 스팬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상대의 손목을 낚아챘다. 정확히 목을 향해 내리꽂히던 단검이 스팬담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그가 손에 힘을 줘 붙잡은 손목을 비틀자 상대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을 듣고서야 스팬담은 느리게 눈을 떴다. 옅은 회색 눈동자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느리게 굴러갔다.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기척에 그가 하품을 하며 붙잡은 적의 손목을 가볍게 비틀어 꺾더니 그대로 제압하듯 등 뒤로 돌려 꾹 눌러버렸다.

“아아악!!”

“뭐냐, 너.”

“젠장, 스킬! 폭쇄 수리검!”

“어이고.”

사방에서 생성된 수리검이 스팬담을 향해 날아왔다. 스팬담이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꺼내 가볍게 휘둘러 뱅글뱅글 돌면서 날아오는 검을 빠르게 쳐냈다. 다만 시간이 부족해 미처 막지 못한 하나는 손으로 붙잡았다.

콰앙-!

콰득, 손에 꽂힘과 동시에 수리검들이 동시에 폭발했다.

“으메, 시벌 무서워라.”

뒤늦게 놓기는 했지만, 손가락 두 개가 날아가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게임이니까 나중에 복구되나?’

아픈 것도 똑같이 아팠다. 설마 진짜 몸에도 손가락 두 개가 떨어진 건 아니겠지?

미간을 찌푸린 스팬담이 제 왼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곤 홀스터에서 총을 꺼내 상대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아가, 날 죽이려고 했던 건 네가 죽을 것도 각오한 거 맞지?”

“이거 놔! 스킬, 죽음의…… 욱…!”

스팬담이 여우 가면을 쓴 남자의 가면을 강제로 벗겨내곤 그 입에 총구를 쑤셔 박았다. 이제야 20대 초반이나 되었을 청년이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앳된 청년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그대로 멈췄다.

가면이 벗겨진 청년의 머리 위로 <히트맨 데스>라는 글자가 떴다.

‘아하….’

이렇게 뜨는 거군.

‘그나저나 뭐가 이렇게 허접이냐…….’

어설픔에 그저 말문이 턱 막혔다.

“야, 가면 다 벗어봐라. 이 새끼 쏘기 전에.”

스팬담의 말을 들은 이들이 겁에 질린 듯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그가 주변에 있는 이들을 느리게 훑었다. 끽해야 10대 중후반에서 많아야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용사 나르바>, <테이머 미노스>, <정보상인 리비아>까지였다.

‘정보상인?’

면면을 하나씩 훑은 그는 턱에 난 상처를 피가 줄줄 흐르는 약지와 소지가 사라진 손의 검지로 가볍게 긁적이더니 낮게 혀를 찼다. 그가 고개를 까딱이며 다시 써도 된다고 하자 그들이 후다닥 제 가면을 다시 썼다.

‘한 놈 빼고 나머지는 타겟이…….’

아닌 것 같은데.

스팬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그 애를 놔, 놔주세요! 그 애가 누군지 알아요?!”

“알게 뭐니, 나는 날 공격한 놈을 잡은 것뿐인데.”

“그러게 왜 여기에 있는 건가요!”

테이머 미노스. 20대 초중반쯤 되어 보였던 토끼 가면의 여자애의 말에 스팬담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손에 나무로 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하나같이 실제로 싸움이라곤 해보지 않은 낯짝들이었다.

“날이 좋아서 낮잠 자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표적이 되는 거죠…! 우리는 이 게임을 빨리 끝내야 한다고요.”

“아하…, 얘들아. 적진 한복판에서 내가 왜 여기에 가만히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끄헉…….”

스팬담이 손에 쥐고 있던 총을 아이의 목구멍으로 조금 더 쑤셔 넣었다. 그에게 잡힌 것은 데스라는 이름의 아이가 벌벌 떨며 바르작거렸다.

“너희 같은 아새끼들이 한 트럭 와도 쨉도 안되니까 이러고 있는 거 아니겠냐.”

“당신 혹시 누구예요? 서, 설마 악신……?”

이번엔 붉은 털의 늑대 가면을 쓰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정보상인 리비아. 교복을 입은 아이의 머리 위로 붉은색 표시가 점멸하고 있었다. 게임을 잘 모르는 스팬담이라도 알 수 있을 법한 확실한 표식이었다. 타겟이다.

“…악신이면 도망가는 게 낫지 않아? 못 죽이잖아.”

“……하지만, 그러면 데스는 어떡하고.”

“내가 할게.”

테이머 미노스의 뒤에 있던 강아지 가면을 쓴 20대 중반의 소년이 검을 뽑고 앞을 가로막았다. 스팬담이 고개를 기울였다. 귀찮은데 그냥 다 한방씩 다리를 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할까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다.

“스킬, 용사의 일격!”

“와…….”

시발, 내가 다 부끄럽다.

‘집에 가고 싶어.’

몇 번째일지 모를 생각이 또다시 스팬담의 머릿속을 차지했다.

말문이 막혀 어이가 없었던 스팬담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때였다. 소년의 검 끝에서 나온 빛이 스팬담에게 콰앙-! 직격했다. 소리는 요란한데 아프진 않다. 스팬담이 설핏 미간을 좁혔다.

“……뭔데?”

조그마한 타격도 없었다.

그가 이리저리 제 몸을 살펴보다가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잘못 맞았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내 용사의 일격이…….”

“시발, 부탁인데 얘들아. 이 아저씨를 좀 배려해서 그 오그라들 것 같은 대사 좀 속으로 하면 안 되냐?”

대리로 수치사 할 것 같았다. 스팬담이 미간을 찌푸렸다. 스팬담이 뭐라고 씨부렁거리든 말든 그들은 저들끼리 모여서 뭔가를 속닥거리고 있었다.

“내 공격은 상대가 ‘악’ 속성이라면 반드시 효과가 있을 텐데….”

물론 말이 속닥거렸다는 거지 스팬담의 귀에 다 들렸다. 스팬담이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려 목구멍에 총구가 박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겁에 질린 청년을 보았다.

‘히트맨이면… 그거지? 돈 받고 사람 죽이는…….’

그럼 사람 오지게 죽였겠네. 그냥 죽일까. 스팬담이 잠시 고민했다. 어쩐다. 놔줘서 또 우르르 몰려오면 귀찮을 것 같고. 그런다고 싸울 줄도 모르는 아새끼들을 죽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아가, 나 또 귀찮게 할 거냐?”

스팬담의 말에 청년이 좌우로 고개를 내저었다. 대답을 들은 스팬담이 멱살을 붙잡아 일으키곤 다른 놈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스를 내던졌다.

“꺼져라.”

스팬담이 물끄러미 타겟인 붉은 늑대 가면을 바라봤다.

‘정보상인…….’

저 모습을 보니 애인 새끼가 얼마나 더 양심이 없는지 알 것 같았다. 스팬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옷자락을 대충 찢어 손을 둘둘 감곤 양복 재킷을 들고 몸을 돌렸다.

“저, 저기!”

정보상인 리비아가 불쑥 다가와 겁도 없이 스팬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에 스팬담이 인상을 찡그렸다.

“저, 저희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야, 리비아 미쳤어?!”

“하지만… 엄청나게 강하신 분이잖아. 네 기술이 안 통했다는 건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고…….”

“꺼져.”

스팬담이 낮게 혀를 차며 사납게 읊조리곤 아이를 스쳐 지났다. 결코 착하게 생긴 얼굴이 아닌데도 리비아는 스팬담의 옆을 졸졸졸 쫓아왔다.

‘아, 가면 썼지.’

다른 아이들은 따라오지 않기로 마음먹었는지 멀찍이 서 있을 뿐이다.

“가라니까?”

“저기, 혹시 말이야. 당신 심판자 맞지?”

“아니니까 가라, 아가야.”

“봐, 그 아재 말투!”

걸어가던 스팬담이 삐끗했다. 아재……, 물론 그런 소리 들을 나이가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스팬담이 황당한 얼굴로 리비아를 보았다.

이건 자신이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건지. 시뻘건 타겟 마크를 달고서 졸졸 쫓아오다니 지금 호랑이 입에 머리 들이밀고 있는 꼴이라는 걸 알고는 있을까?

“아저씨, 나 좀 도와주면 안 돼요?”

“…너 나한테 죽고 싶냐? 얼쩡대지 말고 가라.”

“저 이런 게임에 참여하기도 싫고 플레이어로 살기도 싫어요. 코인 벌려고 사람 죽이는 것도 이제……. 제발, 절 등장인물로 만들어주세요.”

들러붙는 아이에게도 스팬담은 대답하지 않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들판을 넘어서자 이번에는 숲이었다. 숲은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어두워졌는데, 리비아의 말은 끝나질 않았다.

 

[61:57:50]

 

한 시간 정도 실랑이한 걸 빼도 오지게 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밤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 말은 이 세계에 아예 밤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아저씨.”

“가라고 했다.”

“제발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내 타겟이 너라고 말해줘야 갈 거냐.”

스팬담의 말에 아이의 걸음이 뚝 멈췄다. 스팬담이 흘긋 리비아를 봤다가 마저 걸음을 옮기며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악신이나 설계자 새끼는 어디 없나.’

퀘스트 페널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페널티 수를 줄일 필요는 있었다. 친구 등록은 할 마음이 없다. 결국 지금 할 수 있는 건 설계자를 죽이거나 신을 죽이는 거다. 정보 상인은…, 죽였다간 아무래도 현실 세계의 자신이 꽤 위험해질 것 같고.

“거, 거짓말이죠? 저 놀리려고 하시는…….”

“진짜다. 한 번 더 얼쩡거리면 죽일 거다.”

스팬담의 서슬퍼런 말에 리비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에도 물러날 수 없는 이유는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드디어 삶의 이유를 찾았다. 살고 싶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플레이어는 소생약만 있으면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가질 수는 없다.

살아가기 위해서 코인을 벌어 코인을 내야 하고 간헐적으로 열리는 이벤트에 참여해야 하고 어떤 퀘스트를 진행해야만 했다. 진행하지 않아도 되는 퀘스트가 있는가 하면 때때로 타임어택이 걸린 강제 퀘스트도 있었다.

시스템에 의해 삶이 좌지우지되었다. 지금도 밖에선 자신이 제대로 깨어나길 기다리는 샹크스와 이제는 제 가족이나 다름없는 동료가 있었다.

 

[System 알림] [전체공지]

[‘수호천사 라파엘’이 ‘악신 우르바노’에게 사망하였습니다!]

 

스팬담과 리비아의 걸음이 동시에 뚝 멈췄다. 허공에 뜬 알림을 보아하니 이미 피의 축제를 시작한 놈이 있는 모양이었다.

“미친놈일세.”

스팬담이 혀를 끌끌 찼다. 애들이 천지인 이 게임에도 싸움질할 줄 아는 놈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멈췄던 걸음을 재개했다. 숲 안으로 계속 들어가는데 어딘가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흐, 흐아아앙!!”

“…어린애?”

히끅히끅, 아주 숨넘어가기 직전이다. 스팬담이 짧은 숨을 뱉었다. 여기에 왜 어린애가 있는 거지? 머리를 긁적인 그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저씨, 거긴 안 가는 게 좋아요. 아마 역병신일 거예요.”

“……역병, 뭐?”

“역병신이요. 말 그대로 역병을 뿌리고 다니는 신이에요. 근데…, 이 애가 능력 조절을 못 해요. 매번 뭐가 무서운지 그냥 울기만 하는데… 매번 살아남아요. 아무도 다가가질 못하거든요.”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식물이 다 죽어버린 곳이 있었다. 숲은 숲인데 다 죽은 식물이 가득한 숲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병에 걸린 듯 누렇게 떠서 고개를 숙인 식물들 한가운데 이제 6-7살쯤 되었을까 싶은 어린 남자아이가 주저앉은 채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얼마나 서러운지 엄마와 아빠를 찾아대는 목소리가 반쯤 쉬어 있었다.

 

[System 알림]

[이곳은 플레이어 9 ‘역병신 로드’의 영역입니다. 들어가시는 순간 ‘역병’에 걸리며 ‘역병’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해독제’를 마시거나 ‘역병신의 축복’ 혹은 ‘의선(醫仙)의 가호’가 필요합니다.]

 

스팬담이 알림을 물끄러미 보았다. 리비아가 스팬담의 옷자락을 조심히 잡아당겼다.

“이 애는 관여하지 않는 게 좋아요, 다른 곳으로 가요. 아저씨.”

“너나 가라, 좀. 귀찮게 하지 말고.”

“대화 좀 하고 싶어서 그래요.”

스팬담이 한숨을 내쉬며 리비아를 흘긋 보았다. 서럽게 울고 있는 아이의 주변에는 살아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동식물은 물론이거니와 플레이어도 피해 가는 주변에 있는 것이란 누렇게 죽은 식물뿐이었다.

‘저긴 좀 조용하겠네.’

가볍게 생각한 스팬담이 성큼성큼 영역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코를 톡 쏘는 썩은내가 진동했다. 잘 손질된 구두에 밟히는 식물에선 끈적한 진액이 흘러나와 뭉개졌다.

“아저씨!”

놀란 리비아가 급히 입을 열었다.

“스킬, 홀리 가드! 스킬, 축복, 스킬, 정화!”

어디에서 났는지 지팡이를 뻗은 리비아가 스팬담에게 급히 스킬을 걸었다. 금빛의 빛무리가 스팬담의 주변을 휘감았다. 순간 호흡이 편해지는 듯했으나 몇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니 그 빛무리도 와장창 깨졌다.

“마, 말도 안 돼. 아저씨 위험하다니까요!”

“그래, 위험하니까 돌아가라.”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스팬담이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은 뒤 퍽 여유로운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자 아이도 스팬담을 인지한 듯 눈을 크게 뜨더니 더 크게 울어 젖히기 시작했다. “흐아아앙!! 엄마아아아!! 아빠아아아!!” 독기인지 역병인지 뭔지가 더 짙어졌다. 스팬담은 제 손끝부터 시퍼렇게 변해가기 시작하는 것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새끼들이 시발 왜 이리 많냐.’

심지어 이번 아이는 정말로 애였다.

시스템이고 설계자고 마음에 들질 않았다. 기어코 바위 앞에 기대어 있는 아이의 앞까지 도착한 스팬담은 그 옆에 털썩 주저 앉으며 바위 위에 제 양복 재킷을 던져두곤 천으로 얼기설기 묶어둔 손가락 두 개 날아간 왼손을 아이의 머리에 툭 얹었다.

“여, 꼬맹아. 목 안 아프냐?”

“흐읍, 흑…… 허어엉……. 엄마아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아이는 적이 바로 옆에 왔음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신을 지켰다. 그저 울고 또 울었다. 스팬담은 말없이 아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바깥이 시끄러워서 그런데 아저씨가 여기 좀 있어도 되냐?”

“히끅, 히끅…….”

“별 건 안 할 거고 낮잠이나 자려고 한다.”

“흐읍, 흑…, 히끅.”

“덩치는 산만 한 어른이란 놈들이 너처럼 작은 애새끼 하나 두려워서 달래주지도 않고 내버려 두는 게 네가 봐도 꼴사납지 않냐?”

스팬담의 말에 아이가 눈을 끔뻑였다. 히끅, 훌쩍, 퉁퉁 부은 흐린 눈으로 아이는 스팬담을 봤다. 스팬담이 가면 너머로 아이와 시선을 마주치자 아이가 히끅, 히끅!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오냐, 너 보니까 나도 울고 싶다. 울어라, 울어. 어른이 되면 울고 싶어도 못 울 때가 더 많으니까 말이다.”

거기까지 말하고 툭 머리를 쓰다듬은 스팬담이 정말로 두 손을 깍지 끼고 뒷머리에 댄 채 툭 바위에 드러누워 버리자 아이의 울음이 또 뚝 멈췄다. 아이가 눈을 끔뻑였다. 바닥을 나뒹구는 고양이 가면을 주워 손에 쥔 아이가 훌쩍였다.

 

[System 알림]

[‘역병신 로드’의 영역에 들어서 ‘역병’에 감염되었습니다. 당신이 가는 곳은 모두 썩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닿은 사람은 역병에 걸릴 것입니다. 당신은 역병 그 자체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24시간 안에 죽습니다.]

[23:58:37]

 

[Quest 알림] [칭호:신살자(神殺者) 전용 퀘스트]

[‘역병신 로드’를 죽여라!

당신은 역병신의 저주에 걸려 ‘역병’에 걸렸습니다.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해독제’를 마시거나 ‘역병신의 축복’을 받거나 ‘의선의 가호’가 필요합니다. 혹은 ‘역병신 로드’를 죽여서 ‘역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스팬담은 허공에 뜬 알림을 다 꺼버리고 하품하곤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윽고 펑펑 울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멎었다. 스팬담이 정말로 옆에 드러누워 미동도 없었던 탓이다.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리던 아이가 슬그머니 스팬담을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훌쩍.”

살짝 흔들어도 스팬담은 반응하지 않았다. 기실 정말로 잠이 왔던 건 아니다. 옆에서 떠들어대는 리비아가 시끄러웠던 것은 맞지만 말이다.

히끅거리던 아이가 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스팬담의 옆으로 조금 다가왔다. 꼼지락거리는 손으로 스팬담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던 아이는 그럼에도 스팬담이 공격하거나 때리거나 그를 아프게 하지 않자 아예 스팬담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그 온기를 탐했다.

스팬담은 제게 들러붙는 아이를 느끼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옆에 따끈따끈한 것이 하나 끼어있으니 잠이 솔솔 오기는 했다.

‘이거 그냥 뒈져가는 건가?’

모르겠다. 어쨌든 24시간 안에는 일어나겠지 싶었다. 일어나서 해독제를 사든 뭘 하든 생각해보자. 이윽고 스팬담이 색색 숨을 내뱉으며 잠이 들자 스팬담의 옆구리에 파고든 아이도 몸을 둥글게 말곤 곧 잠에 빠져들었다.

 

**

 

삐이- 삐이- 삐이-

규칙적으로 울려대는 기계음에 스팬다인의 눈이 무겁게 침잠했다. 24시간째 눈을 뜨지 않는 아이는 아무리 외부에서 어떤 자극을 주어도 움직이질 않았다.

“……대체.”

스팬다인이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데 아이는 매번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고 별일 없었다고만 한다. 이번에도 분명히 다시 눈을 떠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겠지.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스팬다인이 꾹 누르고 있던 손을 천천히 얼굴에서 뗐다. 그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뭐냐, 라스키.”

“슬슬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됐으니 너나 돌아가서 쉬어라. 나는 여기 있다가 내일 바로 사이퍼 폴로 가지.”

스팬다인이 짤막하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온 라스키가 스팬다인의 뒷덜미를 잡아채 일으켜 세웠다. 스팬다인이 헛웃음을 흘리며 거칠게 라스키의 팔을 쳐냈다.

“뭐하냐, 라스키.”

“내일 임무에 방해됩니다.”

“알아서 할 테니 돌아가라. 명령이다.”

“당신은 이제 장관이 아니니 제게 명령할 권한이 없습니다만.”

라스키의 말에 스팬다인이 멈칫했다. 그가 짜증스럽게 라스키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더 상대하는 것도 피곤했다. 그러잖아도 스팬다인은 이미 머리가 아팠다.

“나 지금 너 상대할 기분 아니다.”

“그렇게 앉아 있는다고 해서 당신 아들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습니다만.”

라스키의 다소 차갑다고 해도 이상할 거 없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커멓게 물든 스팬다인의 주먹이 라스키에게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갔다. 라스키가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한 낯으로 그걸 보더니 한 손을 들어 가볍게 스팬다인의 주먹을 잡아챘다. 쿠웅-! 묵직한 소리가 흐르며 1인실 안에 작게 훅, 바람이 생겼다가 금세 사라졌다. 스팬다인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젠장, 무식한 괴물 새끼.

“네놈 같은 병기야 내가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지!”

스팬다인이 짜증스러움에 말을 내뱉어놓고도 순간 멈칫했다. “젠장….” 낮게 중얼거린 그가 붙잡힌 손을 빼내고 휙 몸을 돌렸다. 순간 이성을 잃었다는 것도 짜증스러웠지만, 내뱉은 말에 괜히 마음이 불편해진 것도 불쾌했다. 이것도 스팬담이 매번 이상한 말을 해댄 탓이다.

“제가 있을 테니 들어가 보십시오.”

“……뭐?”

“제가 있겠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피곤해지면 임무 중에 짜증이 많아져서 귀찮고 짐만 되니 오늘은 가서 쉬십시오.”

“…너 말이 점점 심해진다?”

스팬다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예 스팬다인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는 라스키를 내려다보며 스팬다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꼴이 그렇게 별로냐?”

“당신 꼴은 괜찮았던 적이 드뭅니다.”

“……재수 없는 놈.”

스팬다인이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팔짱을 끼고 선 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가 미간을 엄지로 가볍게 문지르곤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야, 내가 그렇게 아버지로서 못 미덥냐?”

“모릅니다. 일단 인간적으론 그렇습니다만.”

“…진짜 짜증 나는 놈이네, 이거. 너 누가 살려줬는지 잊진 않았겠지?”

라스키가 스팬다인을 흘긋 보곤 말없이 다시 고른 숨을 뱉는 스팬담을 바라봤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아까는 갑자기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호흡이 가빠져서 의원들이 모여서 난리가 났었다. 문제는 원인을 전혀 모르겠다고 고개만 저어대는 의원들이었지만.

“당신보다 더 괴짜라고는 생각합니다.”

“……그거 반박할 수 없는 게 화나는 부분이네.”

스팬다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고방식도 생각하는 것도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아랫사람을 이용하는 게 퍽 익숙해 보였다가도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처세술은 좋은데, 그게 본인 기분이 나쁘면 사라진다는 게 문제였다.

“뭐라도 좀 말해주면 좋을 텐데.”

“일어나면 심문이라도 해보겠습니다.”

“……아니, 하지 마라. 네가 하면 무서워. 우리 애 경기 일으킨다.”

“과보호입니다.”

라스키의 냉정한 말에 스팬다인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어이가 없었던 탓에 스팬다인이 입을 열었다.

“스팬담은 원래부터 과보호로 키웠다.”

“과연, 멋대로 굴고 고집을 부리는 부분은 확실히 당신 어릴 때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너 자꾸 아까부터 사람 욕하는 것 같은데 혼나고 싶냐?”

“당신 실력으론 무리입니다.”

“내가 총감 직위만 오르면 제일 먼저 네놈을 폐기 처분할 거다.”

스팬다인이 으르렁거렸다. 라스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마음대로 하십시오.”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그 반응에 퍽 재미가 없어진 스팬다인이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영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라스키 녀석도 머리가 있으니 지켜보는 거 정도야 할 줄 알겠지만…….

“스팬담한테 문제가 생기면 너스콜 눌러야 한다. 알지?”

“…….”

“지켜보라고 하는 게 정말 보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어이, 라스키. 듣고 있냐?”

“죽고 싶습니까? 알고 있으니 당장 꺼지십시오.”

라스키의 서슬 퍼런 얼굴 위로 살기가 넘실거렸다. 순간 겁을 먹은 스팬다인이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크흠, 헛기침을 하곤 다시 발을 슬쩍 제자리로 돌려두었다.

“간다, 가. 다른 애들은?”

“그쪽도 당신과 다를 게 없습니다. 알아서 잘 설득해서 들여보내십시오.”

“……귀찮구만.”

스팬다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렸다. 병실을 나가려는데 라스키가 스팬담을 물끄러미 보며 입을 열었다.

“심문은 진심입니다.”

“하아?”

“아마 당신 아들은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스팬다인의 반문에 라스키는 잠시 고민했다. 그날 취조실에서 들었던 대화에 대해서 말을 할까 말까에 대해서였다.

그러나 결론은 금세 났다. 깊게 고민할 것은 없었다. 라스키는 애초에 스팬다인에게 대부분의 일을 보고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딱히 거리낄 일이 없었던 탓이다. 스팬담이 딱히 입막음을 했던 것도 아니고 말이다.

 

“라스키.”

“혹시 며칠 뒤에 내 신변에 문제가 생겨도 아버지 탓 아니니까 말이다. 그땐 좀 잘 부탁한다.”

“……무슨 소리지?”

“뭐…, 아주 만약의 얘기니까 말이다.”

 

짤막했던 대화를 떠올린 라스키가 스팬다인이 다시 재촉하려는 찰나 입을 열었다.

“그날 취조실에서 며칠 뒤에 제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겨도 당신 탓이 아니니 잘 좀 부탁한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뭐라고?”

스팬다인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에 인상을 찡그렸다. 라스키가 흘긋 뒤를 돌아보며 마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 정말 알고 싶으면 강제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은 자식에게 너무 무릅니다.”

“너한테 듣고 싶지 않다, 이놈아.”

라스키가 칼리파와 최근 꽤 교류를 많이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스팬다인이 말했다. 식사를 만들어도 칼리파의 음식에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는지도 말이다. 임무를 끝내고 종종 선물을 사 가는 것만 봐도 저 남자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거, 해봐라.”

스팬다인이 라스키를 검지로 가리키며 퍽 오만하게 말했다.

“뭘 말입니까.”

“심문인지 뭔지 허락해줄 테니까 해보라고. 대신 내 아들한테 상처 내면 가만히 안 둘 거니까 말이다! 그리고 내일 새벽에 뭐라도 사서 병원으로 올 테니 그렇게 알아라.”

“필요 없….”

쾅, 문이 닫혔다. 라스키는 피곤한 낯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정말 부자가 쌍으로 귀찮기 짝이 없었다. 라스키는 팔짱을 낀 채 느리게 눈을 감았다.

슬슬 덤벙대는 부자의 뒤치다꺼리는 졸업하고 싶은 라스키였다.

 

**

 

[47:28:55]

[10:42:37]

 

스팬담이 하품을 하며 눈두덩을 비볐다. 제 허리춤을 꼭 끌어안고 자는 아이를 흘긋 내려다본 그가 목덜미를 문지르려 손을 들었다가 팔뚝까지 시퍼렇게 변하다 못해 시커멓게 죽어버린 것을 보곤 낮게 신음했다.

“해독제가 얼마더라.”

슬슬 정신이 들기 시작한 스팬담이 코인샵을 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리비아인지 뭔지가 역병의 영역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무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쟤도 징하냐…….”

눈을 가늘게 뜨고 해독제를 찾아 열심히 페이지를 넘기던 스팬담이 12번째 페이지쯤 가서야 간신히 찾던 물건을 찾았다. 한숨을 푹 내쉰 그가 가격을 보곤 멈칫했다.

 

[코인샵 판매 목록]

<해독제> – 150,000코인

→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독이든, 역병이든 전부 완벽하게 치료합니다!

<만병통치약> – 2,500,000코인

→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병이든 반드시 고칩니다. 불치병이라도 관계없습니다. 소생약으로 살려도 병이 있다면 다시 죽지만, 이 만병통치약은 그 가능성까지 없애줍니다. (단, 죽은 사람에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스팬담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곤 고개를 들어 제 인벤토리에 있는 금액을 보았다.

“음, 좆됐네.”

뺨을 긁적인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병신의 축복인지 뭔지나 의선의 가호가 필요한데 의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놈은 없었고…, 그럼 남은 건 이 꼬맹이한테 축복인지 뭔지를 받는 거네.

“으음…….”

스팬담을 끌어안고 있던 아이가 파르르 눈꺼풀을 떴다. 퉁퉁 부은 붕어 같은 눈에 스팬담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너 뭐냐. 앞이 보이긴 하냐?”

바위를 퍽퍽 내리치며 웃음을 터뜨린 스팬담의 모습에 아이가 고개를 기울였다가 뭔지도 모르고 스팬담을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스팬담이 끅끅 웃으며 아이를 보고 입을 열었다.

“뭐가 좋다고 웃냐. 내가 뭐 때문에 웃는진 알고?”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배시시 웃는 얼굴은 울 때보다야 훨씬 나았다. 스팬담이 어깨를 으쓱이곤 주머니에 있던 손을 지혈할 때 쓰고 남은 천 조각으로 아이의 얼굴을 퍽 거칠게 문질러 닦아주었다.

아이는 우우, 이상한 신음을 흘리더니 발갛게 물든 뺨으로 스팬담을 올려다보았다.

“웃으니까 보기 좋네. 이름이 뭐냐?”

“로드!”

“원래 이름. 이 세계에서 준 이름 말고 원래 이름 있을 거 아니냐.”

스팬담의 말을 들은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아이가 이윽고 답을 찾은 듯 활짝 웃었다.

“쓰레기!”

“……음?”

“기생충, 식충이, 멍청이?”

여기에 정답이 있냐는 듯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떠오르는 것을 계속 입에 올렸다.

“오케이, 로드. 너는 로드다.”

스팬담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더 듣고 있다간 애 앞에서 화를 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 무릎에 팔꿈치를 올린 스팬담이 손바닥에 제 턱을 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네 팔자도 참 기괴하다. 어쩌다 이런 데 엮였는지.”

스팬담의 말에도 아이는 방긋 웃었다. 미묘하게 말이 어눌했다. 제대로 된 말을 배우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스팬담은 아직 10시간 남은 제 시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가, 혹시 역병신의 축복이라는 스킬인지 뭔지 쓸 수 있냐? 아저씨가 여기서 숨쉬기가 좀 힘드네.”

아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눈을 끔뻑이는 얼굴에는 의아함만이 가득했다. 뭐가 뭔지 모르는 애라는 건 알겠다. 스팬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면 말고.”

역시 돈을 버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신 새끼 하나 죽이니까 10만 코인 줬었나?’

한 마리 더 죽이면 그만큼 안 주려나? 스팬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몸에 역병이 깃들어 있으니 손만 대도 역병이 옮을 테고 더 좋은 거 아니려나. 스팬담이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아이가 스팬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으음?”

“어디……?”

“아아, 돈 벌러 가. 코인이 없어서 해독제를 못 사니까. 아저씨 돈 벌어 오마.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스팬담이 아이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었다. 아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짤막한 손가락을 펼쳐 자기를 가리키는 모습에 스팬담이 뺨을 긁적였다. 데리고 다니면 광역 피해를 입힐 것 같았다.

‘현실에서도 이렇게 제어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스팬담이 미묘한 낯을 하며 뺨을 긁적이곤 슬쩍 ‘판별의 눈’ 스킬을 사용했다. 아이가 저지른 죄목이 한가득 떠올랐다. 선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스킬을 이용한 사망자 목록이다. 이런 아이가 악의를 가지고 했을까? 아니, 아마도 실제로도 이렇게 제어가 안 되는 상태인 것이 분명했다.

“…….”

심판을 사용하면 백 퍼센트 즉사할 것이다.

“……아가, 넌 누구랑 살고 있냐? 이 게임에서 말고, 그러니까, 밖에서 말이다.”

“밖?”

“그래, 여기 말고 밖.”

“로드!”

스팬담이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비쩍 마른 푸른 눈의 아이는 그게 또 좋은지 배시시 웃으며 스팬담의 손가락을 꼭 잡았다.

“그래, 로드랑?”

“로드랑……? 코코!”

“코코? 누구야, 그게?”

“곰돌이 인형!”

“……아저씨랑 친구 등록할까?”

친구 등록 퀘스트도 퀘스트지만, 바깥에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더 문제가 커지면 정부에서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스팬담이 아이의 마른 뺨을 엄지로 가볍게 문질렀다.

“친구!”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템창을 켜더니 뭔가를 하던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스팬담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System 알림]

[‘역병신 로드’가 친구 신청을 하였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확인 버튼을 눌렀다. 아이의 시스템에도 뭔가가 떴는지 아이가 활짝 웃었다.

 

[System 알림]

[친구 등록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확인을 누른 스팬담이 아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곤 한숨을 내쉬었다. 이 게임이라는 걸 알면 알수록 그냥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는 스킬창을 켜서 이레귤러 특수 스킬을 확인했다.

 

[스킬 목록]

<이레귤러 고유 스킬>

- 간섭

▶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으며, 시스템으로 결정된 사안을 번복할 수 있습니다. 단, 간섭한 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대가는 항상 랜덤이며 간섭의 크기가 클수록 더 무거운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 캐스팅

▶ 페널티를 대가로 ‘플레이어’를 당신의 세계에 캐스팅할 수 있습니다. 캐스팅 페널티는 ‘플레이어의 심연 세계’입니다. (단, 해당 스킬은 간섭과 동시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는 물끄러미 내용을 보다가 다시 스킬창을 껐다. 페널티니 뭐니만 없어도 개나 소나 다 캐스팅인지 뭔지 써줬겠지. 하지만, 스팬담은 겨우 스킬 몇 개 취소했다고 한 달 넘게 열병을 앓았다. 그나마 그게 약한 대가라고 쳤을 때 사람 하나를 게임 속에서 끄집어내는 대가가 무엇일지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팬담!”

“오냐, 꼬맹아.”

스팬담이 아이의 머리를 꾹 눌렀다.

-때로는 모른 척하기 힘든 것들이 있었다. 제 아픈 구석을 꾸역꾸역 건드려대는 어떠한 것들은 말이다.

“아아, 나는 돈 좀 벌러 가야겠다.”

간섭이 뭘 대가로 요구할지도 무섭고 캐스팅이 요구하는 대가도 무엇인지 두려웠다. 어쨌든 코인은 많이 있어야 좋은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아가.”

스팬담의 말에 아이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 밖으로 나가면 아저씨가 곧 데리러 가마. 그러니까 나랑 같이 사는 건 어떠냐?”

“……같이?”

“그래, 같이. 한집에서…. 뭐, 집에 사람이 많아서 좀 북적거리긴 한다만……, 너 괜찮다면 말이다. 아니면 다른 좋은 부모님을 얻어줄 수도 있고…….”

아이는 눈을 끔뻑였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대감에 젖었던 눈은 순식간에 거무죽죽하게 죽더니 곧 목을 바싹 움츠렸다.

“나, 다 죽여…….”

“그건 내가 고쳐줄 테니까. 그러면 같이 살 마음 있냐?”

“파파?”

아이의 말에 스팬담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설핏 웃음을 터뜨리곤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정말 결혼도 안 하고 애부터 생기게 생겼지만 말이다. 그놈들이 동생(?)의 존재를 잘 받아들이려는 진 모르겠지만…….

“누나랑 형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지.”

아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나 안 버려?”

“안 버려.”

“안 때려?”

“음, 날 무슨 쓰레기로 보는진 모르겠지만 안 때린다.”

스팬담이 질린 낯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아이가 활짝 웃었다. 피골이 상접 할 정도로 빼빼 마른 몸은 아이의 죽음이 썩 즐거운 죽음이 아니었음을 의미했다.

“파파, 같이, 좋아……!”

거기까지 말을 마치자 활짝 웃은 아이가 달려들어 스팬담을 품에 끌어안았다.

 

[System 알림]

[‘역병신 로드’가 당신에게 ‘역병신의 축복’을 내립니다. ‘역병신의 축복’은 ‘역병신 로드’의 호감도가 90%를 넘었을 때 내려집니다. 모든 ‘역병’에 면역이 생깁니다.]

[상태 이상 ‘역병’이 제거됩니다.]

 

아하, 이게 무슨 눌러서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아니었군. 스팬담이 턱을 문질렀다. 호흡도 편해지고 시커멓게 변했던 손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스팬담이 가볍게 몸을 풀었다.

 

[45:11:20]

 

슬슬 퀘스트를 해야 할 때였다. 정보 상인은 못 죽여도 신 하나는 죽여야지. 감당할 페널티가 너무 많아도 난감했다.

“아가, 네 퀘스트는 뭐가 남았니?”

“퀘스트?”

아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없다는 건지 찾지 못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없어?” 그렇게 묻자 아이, 로드가 고개를 주억였다.

“없다고?”

“응.”

“……퀘스트가 없다고?”

“응!”

스팬담이 썩 미묘한 낯으로 아이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말이 다소 어눌할 뿐 시스템을 만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친구등록도 먼저 해줬고 대화도 다 알아듣고 있었다.

“그러냐.”

스팬담은 딱히 아이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페널티 때문에라도 로드의 퀘스트를 먼저 처리해줄까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으니 잘됐지.

“가자.”

스팬담이 아이를 품에 안았다. 다행히 아이가 울지 않으니 역병이 번지진 않는 모양이었다. 정보상인 리비아도 눈을 떴는지 슬쩍 눈치를 보더니 흠칫거리며 금빛 가루를 온몸에 두른 채 슬쩍 다가왔다.

“아저씨 괜찮아요…?”

“어, 꼬맹이가 역병신의 축복인지 뭔지를 내려줘서 말이다.”

“…축복을 내려줬다고요? 세상에, 그게 어떻게 가능…….”

“우윽…….”

리비아가 목소리를 높이자 흠칫 놀란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눈물이 망울망울 맺히기 시작했다. 스팬담이 아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좀 가라. 내 퀘스트 창 보여줘야 갈 거냐?”

“아, 안 죽일 거잖아요. 제발 부탁드려요.”

“너, 사황의 배에 있지?”

“……어, 그게….”

리비아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눈은 보였던 터라 스팬담은 그 망설임에서 정답을 읽어냈다.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디냐? 흰수염? 빅맘? 붉은 머리? 카이……, 붉은 머리군.”

음, 절대로 죽이면 안 되겠다.

황당하고 어이없음에 스팬담이 헛웃음을 흘렸다. 붉은 머리와 흰수염은 제 동료에게 손을 댄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스팬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양심 좆도 없는 새끼는 누구냐?”

“……샹크스요.”

아, 하필이면 선장의 애인. 절대로 들키지 말자.

스팬담은 생각하며 아이를 안은 채 느긋하게 숲을 벗어났다.

 

**

 

“허억, 허억……. 말도, 말도 안돼. 어떻게 나보다 셀 수가 있지? 난 전쟁신이라고!”

“……그러니까 고등학교 양아치 수준의 싸움을 하면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붉은 도깨비 가면이 부서진 앳된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사방이 움푹 파여 있었다. 온갖 공격 스킬을 써대기는 했는데 결국 그것도 안 맞으면 그만인 것인 데다가 제가 한번 굴러 다치자 로드가 울음을 터뜨려서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같은 ‘신’이라는 입장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전쟁신이라도 역병에는 걸리는 모양이었다.

‘스킬을 제외하면 완전…….’

스팬담은 달려드는 남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죽여도 되는지를 고민하게 될 정도로 허접이었다. 그나마도 스킬은 다 가져다 썼는지 아까부터 아무런 스킬도 쓰지 않고 있었고.

“……하아.”

진짜 사람 찝찝하게 만드네.

‘게임은 빨리 끝내야겠고.’

3일을 전부 채울 순 없었다. 벌써 36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길을 가고 있는데 저놈이 멋대로 시비를 걸어온 터라 싸우고는 있는데, 싸울수록 말문이 막혔다.

스팬담은 달려드는 전쟁 신 어쩌고의 팔을 붙잡아 그대로 몸을 돌려 바닥에 엎어 친 다음 가슴을 콰득, 발로 밟았다.

“끄아아악!!”

스팬담이 미간을 좁혔다.

뭔 신이라는 놈들이 이렇게 다 허접이냐? 스팬담이 다른 발로 가면을 툭 쳤다. 도깨비 가면이 벗겨지더니 웬 빼빼 마른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쟁신 오르가>

머리 위에 떠오른 이름에 그저 말문이 막혔다. 스팬담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거 소환할 때 최소한 20대 중반 이상으로 설정해주면 안 되는 거야?

스팬담이 판결의 천칭을 쓰며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으로 한없이 기울어 시뻘겋게 물든 천칭이 머리 위에 자리했다. 스팬담이 발을 떼곤 한 걸음 물러났다.

“어차피 날 죽이진 못할 거야! 난 신이니까!”

“너 신 아니다.”

“신이야! 나는……, 신이라고! 스킬, 대난투!”

그의 그림자가 쭉 뻗어가더니 바닥에서부터 쿠구구구-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땅에서 흙이 불룩불룩 솟아나더니 이윽고 그것들이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이 바닥을 창끝으로 쿵쿵 내리쳤다.

“저 새끼를 죽여버려!!”

거뭇하게 내려앉은 다크서클 아래에 광기가 엿보였다. 아까 스킬 광기인지 뭔지를 쓰더니 저렇게 되어버렸다. 미쳐서 날뛰더라. 스팬담이 제게 달려드는 수많은 군세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스킬, 심…….”

“스킬, 사신의 난무.”

스팬담이 스킬명을 채 읊조리기도 전에 어딘가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스킬을 읊조렸다. 동시에 검은색 망토를 뒤집어쓰고 붉은 눈을 번뜩이는 유령 같은 것이 새카만 낫을 들고 그대로 전쟁신인지 뭔지의 목을 잘라버렸다. 동시에 달려들던 군세가 스르륵 무너지더니 흙더미로 변해버렸다.

 

[System 알림] [전체공지]

[‘전쟁신 오르가’가 ‘악신 우르바노’에게 사망하였습니다.]

 

머리 위로 떠오른 알림에 스팬담이 멈칫했다.

“어쭈?”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스팬담이 제 얼굴에 쓴 호랑이 가면을 가볍게 꾹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양복을 입은 웬 남자 하나가 느긋하게 숲 안쪽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에 쓴 가면은 새하얀 해골 가면이었다.

“어떤 애새끼가 썅 남의 먹잇감을 가로채냐. 존나 상도가 없네, 시발.”

“나름대로 위험해 보여서 구해준 거였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하지만, 멍청하게 빼앗긴 쪽이 나쁜 거잖나? 이런 건.”

나른하게 들려오는 웃음기 섞인 오만한 목소리에 스팬담이 멈칫했다. 설핏 미간을 좁힌 그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짓씹었다가 놓았다.

‘착각인가?’

묘하게 목소리가 익숙한 것 같은데.

스팬담이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우르바노’ 같은 괴상한 이름을 쓰니까 괜히 착각한 게 분명했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

이미 저쪽에서 가로채서 죽여버린 걸 뭐 어쩌겠나. 이제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스팬담은 대답을 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이곤 그냥 몸을 돌렸다.

“다친 덴 없냐, 꼬맹이.”

“전 없어요.”

정보상인 리비아가 퍽 명랑하게 대답했다. 스팬담이 설핏 미간을 좁히곤 입을 열었다.

“너한텐 안 물었다, 아가야.”

“없어! 파파는?”

“없다.”

아이의 명랑한 대답까지 듣고서야 스팬담이 짤막하게 대답하고 로드를 품에 안아 들었다.

“뭐야, 그러고 가는 건가? 먹잇감을 가로채인 것치곤 꼬리를 마는 게 빠른 거 아닌가?”

“뭐, 이미 상도 없는 새끼 하나가 가로채서 뒈져버린 걸 어쩌라고. 저쪽이 시비 걸어서 싸운 것뿐이다.”

“……아하, 이렇게 만난 것도 우연인데 대화나 좀 나누는 건 어때? 애새끼들밖에 없어서 꽤 심심하단 말이지. 기왕이면 내가 오다 주운 놈들도 소개해주고 싶은데.”

그 말에 스팬담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설핏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가면을 다 벗고 얼굴을 드러낸 플레이어들 세 명이 있었다.

“데스, 미노스! 로토비나도…….”

리비아가 놀란 눈으로 입을 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나는 개처럼 네 발로 무릎을 꿇고 있었고 나머지 둘은 남자의 곁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명백히 겁에 질린 낯이었다. 그중 둘은 심지어 눈에 익었다.

<히트맨 데스> <테이머 미노스> <소설가 로토비나>

끽해야 다 20대 초중반의 청년들이었다. 데스라는 놈은 무슨 개라도 된 것처럼 멍한 낯으로 그의 옆에 있었고 나머지 두 여자애는 주먹을 꽉 쥔 채 겁에 질린 낯으로 그 곁에 서 있었다.

“이거 인성이 개 쓰레기인 새끼가 있었네.”

“하하, 그래 보인다니 안타까운데. 나는 이놈들이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고 하기에 친절하게 신도로 받아준 것밖에 없는데 말이야. 이건 세간의 기준으론 착한 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사방천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들만 있는 게임에서 진지해서 좋겠어. 부디 1등 하라고.”

스팬담이 몸을 돌릴 때였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퍽 청량하고 유쾌하게 들리지만, 명백히 심기가 상한 것 같았다.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스팬담은 생각했다.

“이봐, 2번.”

“…네. 스킬, 창작노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각사각 무언가를 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숲은 사방이 빽빽한 나무로 막혀서 아무도 나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허공에 글씨가 쓰이는 것과 동시에 지형이 변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숲 가운데의 공터였던 곳을 중심으로 사방에 나무가 생겨나더니 출구가 사라졌다. 공터를 중시믕로 둥글게 나무가 자라나 모든 길을 막아버렸다.

“쿨럭쿨럭.”

동시에 창백한 인상의 여자가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골 가면의 남자는 “보고.” 짧게 입을 열 뿐이다.

“각혈 3…시간입니다.”

해골 가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스팬담을 보았다. 스팬담이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호랑이 가면 안으로 미간을 좁혔다.

“내가 사실 심판자를 찾고 있거든, 혹시 아는 정보 있나?”

“글쎄.”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오는 질문에 스팬담이 어깨를 으쓱이곤 무심하게 대꾸했다. 서로 표정이 안 보이니 짐작할 수 있는 건 목소리뿐이었다.

“얼굴 보고 있기 좆 같으니까 이거 좀 치우지?”

“왜 자꾸 꼬리를 말지? 신기하네…, 보통 죽이려고 하잖아?”

“얼굴 보기 좆같고 말 섞기 싫다는 말 안 들리냐? 귀 좀 파고 살아라. 쯧.”

“거기 있는 거 중에 하나를 죽이면 좀 대화할 수 있으려나?”

스팬담이 가면 아래로 인상을 찡그렸다. 대화 방식도 말투도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서 대단히 불쾌했다.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건 진심이었다. 스팬담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지, 천박한 말투라 기분이 더러워야 하는데…….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단 말이지. 내가 꽤 아꼈던 우리집 고양이를 떠올리게 해서 그런가?”

해골 가면의 남자는 근처에 있는 바위에 퍽 호쾌하게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가 느리게 네 발로 개처럼 서 있는 히트맨인지 뭔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놈도 겁에 질리거나 긴장하면 더 목소리가 커지고 천박해졌지…. 고양이가 털을 부풀려 상대를 위협하듯 말이야. 결국…….”

그가 히트맨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강제로 고개를 젖히게 했다.

“내 밑에서 낑낑댈 걸 말이야.”

히트맨인지 뭔지가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정말로 본인이 개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 불쾌한 작태에 스팬담의 입가가 설핏 비틀렸다. 해골 가면의 남자가 머리채를 툭 놓더니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바닥에 내던지곤 주머니에서 새 장갑을 꺼내 끼었다. 그는 곧 손을 가볍게 털고는 다시 스팬담을 보았다.

“그래서, 가면 좀 벗어주겠어? 셋 다.”

“미친놈한테 얼굴을 드러내라니 미쳤냐?”

“아아, 이렇게 부탁할게. 안 될까?”

해골 가면의 남자가 애교를 부리듯 두 손을 가볍게 모으며 말했다. 스팬담의 등줄기를 타고 선득한 감각이 스쳐 지났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다. 스팬담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귀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침을 꿀꺽 삼킨 스팬담이 아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스팬담이 긴장을 애써 삼키곤 천천히 숨을 들이켠 채 느리게 입을 벌렸다.

“……난 개새끼가 왈왈 외에 말하는 건 처음 봤는데. 별 시발 좆같은 새끼가 시비를 터네, 지랄 말고 이거나 열어라. 변태 새끼야. 애새끼들 발밑에 깔고 네가 진짜 신이라도 된 거 같냐?”

스팬담의 퍽 사나운 말에 해골 가면의 사내가 고개를 툭 기울였다. 그가 앉은 바위와 스팬담이 길을 가로막은 나무 사이에는 꽤 간격이 있었으나 사방이 가로막힌 탓인지 목소리는 잘도 울렸다.

“…이 친구 진짜 볼수록 우리 집 고양이 새끼 같네.”

“아저씨, 괜찮아요?”

“…오냐.”

흘긋 리비아를 내려다본 스팬담이 대답했다. 리비아가 살짝 눈치를 살피더니 조금 더 스팬담에게로 붙었다. 까치발을 떼는 것을 보고 살짝 몸을 숙여주자 아이가 귓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싸울 거예요? 근데…, 미노스는 소환도 할 수 있고 데스는 아까 아저씨가 이겼으니 문제없겠지만… 로토비나는 조금…….”

“스킬 다 아냐?”

“그게…, 미노스는 흰수염 해적단의…….”

와, 진짜 플레이어라는 게 사방이 지뢰밭이네. 스팬담이 버릇처럼 미간을 문지르려다 들었던 손을 내려놨다. 해골 가면의 사내가 과장된 목소리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나랑 계속 이러고 있으려고? 우리 서로 협조 좀 하고 갈 길 가자. 응? 심판자 아니라는 것만 확인되면 너희는 특별히 그냥 보내줄게. 어때?”

“그, 주, 주인님…….”

테이머인 미노스라는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응?” 해골 가면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저, 아… 아이는 역병신이고, 여자애는……, 저, 정보 상인이에요.”

“아하….”

해골가면이 말없이 팔짱을 꼈다.

“수호천사와 전쟁신은 죽였고… 용사는 도망갔지. 너희 셋까지 전부 제외하면……, 남은 건 심판자와 설계자, 그리고 요리사인가.”

“요, 요리사는 쿨럭, 아, 아닐 거예요. 보, 본적이 쿨럭…….”

“아아….”

스팬담이 미간을 찌푸렸다. 소거법으로 하면 남는 게 설계자와 심판자뿐이다. 스팬담과 같은 결론을 냈는지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이번에는 퍽 즐거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하하하!” 터져 나오는 유쾌한 목소리에 스팬담이 인상을 찡그렸다.

“로드, 이거 썩게 해서 어떻게 못 하냐?”

스팬담이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해요!” 해맑게 대답한 아이가 손바닥을 올렸다. 아이가 뭔가를 보며 중얼거리는 동안 스팬담은 고개를 돌리며 아이를 내려놨다. 저쪽의 남자가 일어난 탓이다.

“설계자라기보단……, 네가 심판자라는 쪽이 더 신빙성이 높아 보이는데 우리 고양이 생각은 어때?”

“별 지랄 맞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존나 쪽팔리지도 않냐, 스킬명 외치는 것부터 시발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고만. 상대할 맘 없으니 꺼져라. 죽여버리기 전에.”

“오, 죽일 수 있어? 궁금하다, 해볼래? 나도 마침 실험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

상대가 두 팔을 벌려 보이며 여유롭게 말했다. 스팬담이 주먹을 꽉 쥐었다. 뭔가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응? 해봐.” 퍽 다감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팬담이 목덜미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저 가식적인 착한 척, 아무리 봐도 너무 익숙했다.

“해봐, 야옹아.”

“…….”

하란다고 하려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여기서 저놈을 죽이고 끝내면 퀘스트도 끝나고 게임도 끝난다. 35시간 남았다. 하루 반이면 많이도 잤다. 더 일어나지 않으면 변명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스킬, 판결의 천칭.’

악신이니 악행 목록을 떠나서 그는 이미 ‘악’으로 규정이었다. 해골 가면의 남자는 꽤 신기한 듯 제 머리 위의 천칭을 가만히 구경했다. 왼쪽으로 기운 천칭은 시뻘겋게 물들었다. 지금껏 본 어떤 것보다 검붉었다.

‘스킬, 심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만들어진 번개가 남자에게 정확히 직격했다. 콰아앙-!! 시커멓게 물든 하늘 아래로 거대한 번개의 비가 쏟아져 오로지 해골 가면의 남자에게 직격했다.

이윽고 남자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가면이 산산이 조각났다. 남자의 몸이 번개에 튕겨 바닥을 한 차례 나뒹굴더니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동시에 띠링-! 알림이 떴다. 그리고 스팬담의 얼굴이 굳었다.

 

[System 알림] [전체공지]

[‘테이머 미노스’가 ‘심판자 ???’에게 사망하였습니다.]

[총 3명의 제물이 바쳐졌습니다! 제물 조건을 충족하여 60초 뒤 페스티벌이 끝납니다! 지금까지와 다른 열렬한 참여 감사합니다! 깨지 못한 퀘스트에 대한 페널티에 대한 정산은 게임 캐릭터로 돌아간 뒤 진행될 예정입니다!]

 

스팬담의 눈이 커졌다.

“…뭐야, 왜 테이머가.”

스팬담이 떨리는 시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테이머 미노스의 몸이 천천히 소멸하고 있었다. 여자가 제 머리를 붙잡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싫어, 싫어!! 싫어어어!!”

“허어…, 이거 아프네.”

해골 가면을 쓰고 있던 남자가 뻐근한 목을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그 얼굴을 본 스팬담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말이다.

“……아, 제대로 됐군.”

“다,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야!! 미노스가 누군지나 알아?!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냐고!!”

정보상인 리비아가 새하얗게 질려 언성을 높였다. 스팬담은 여전히 굳은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흐음? 스킬을 썼을 뿐이야. 난 동의 받았다고? 직접 사인했잖아, 그렇지? 미노스.”

남자가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다리부터 사라지고 있는 여자의 뺨을 엄지로 가볍게 문질렀다.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주는 행위가 퍽 다정하게 보였다.

“그건, 그건…….”

“그러게…, 사인할 땐 제대로 계약서를 확인하라고 부모님한테 안 배웠나? 하긴, 부모 없는 고아 년이 그런 걸 배웠을 리가 없나?”

남자는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노스라는 여자의 떨리는 시선이 남자에게 닿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마찬가지로 검은색 눈동자의 남자는 퍽 단아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새하얀 옷을 차려입어 단아한 인상처럼도 보였고 견실한 사업가처럼 보이기도 했고 모범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앞머리를 내린 탓인지 어려 보이는 낯은 언뜻 순하게도 보여서, 남자가 내뱉은 단어와 남자가 무척 어울리지 않게만 느껴졌다.

눈에 생기가 없는 것만 제외하면 남자는 아주 멀쩡하고 이상할 것 없는 남자로 보였다는 얘기였다.

“스킬, 악신의 신도. 그러니까… 한 마디로 대역이지. 나 대신 죽고 나 대신 다치고 날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신도. 아, 참고로 신도 계약은 현실 세계로 나가도 통용된다고 하더라.”

“마, 말도 안 돼…….”

“뭐야, 아가. 왜 실망스러운 표정이야.”

<악신 우르바노> 머리 위에 그렇게 적힌 글씨를 단 남자가 살짝 쪼그려 앉아 작게 중얼거리는 <소설가 로토바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나저나 심판자는 곤란하게 됐네, 흰수염 해적단의 ‘딸’을 죽여버렸으니까 말이야. 듣자 하니 그 해적단이 동료 사랑이 엄청나다던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미묘하게 말끝을 흐리는 얼굴은 가식적인 걱정과 미소가 섞여 있었다. 쿵,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에 스팬담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막혀 있어야 할 공간이 다행히 뚫려 있었다.

“파파…?”

“아…, 어. 그,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네! 기다려요!”

“……그래, 늦지 않도록 갈 테니까 울지 말고 기다리렴.”

스팬담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막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아저씨 조심해요!”

들려오는 소리에 그가 급히 몸을 훅 뒤로 물렸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흰 양복의 남자가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스팬담이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이런…, 아쉽네. 얼굴 좀 보고 싶었는데.”

남자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입술을 슬쩍 늘어뜨렸다. 어딘가 천진해 보이는 그 낯에 스팬담이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거리다가 가면이 씌워진 것을 보곤 아이를 조금 더 품에 끌어안았다.

“시간 초과네, 다음에 보자. 야옹아.”

남자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의 풍경이 후두둑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저씨! 다음엔 꼭 실제로 봐요!”

“……찾아오면 이야기는 들어준다고 했잖냐.”

“약속했어요!!”

“파파….”

“아아…, 아가는 곧 보자. 곧 찾아가마.”

스팬담이 떨리는 손을 애써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며 정신이 뚝 끊겼다. 등부터 바닥으로 훅 꺼지는 느낌에 스팬담이 눈을 크게 뜨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억, 헉….”

삐익- 삐익- 삐익- 규칙적으로 들리는 기계음에 파드득 몸을 떤 스팬담이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병원이었다. 그가 급히 발을 아래로 내리려는 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스팬담의 몸이 크게 튀었다.

“…일어났군.”

“라, 라스키 너였냐.”

스팬담이 다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오며 거칠게 링거를 뽑았다. 라스키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이, 뭐 하는 거냐.”

“아버지는?”

“곧 교대 시간이라 올 거다. 잠깐 앉아 있으면….”

“아, 나 퇴원할게.”

건성으로 대답한 스팬담이 라스키를 지나쳤다. 혈관에서 뽑아낸 링거로 인해 손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옷은 환자복 그대로였다. 라스키가 인상을 찡그리며 그 뒤를 바로 쫓아 스팬담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봐, 퇴원할 때는 하더라도 옷은…….”

라스키가 미간을 좁혔다.

‘…떨고 있군.’

눈도 겁에 질려 있었다. 뭐지? 스팬담이 “아니, 괜찮으니까.” 대충 말하곤 그의 손아귀를 떼어내곤 다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전혀 이성적이지 못했다. 라스키가 한숨을 내쉬고 스팬담에게 다시 걸어갔다.

“스팬담.”

“어.”

“지금 미친놈 같으니 일단 병실로 돌아가지.”

“아니, 나 멀쩡해. 안 미쳤어. 그냥 병원에 있기 싫어서 그런 거고… 아버지 오시게 하는 것도 죄송하니까 그냥 집에 가는 게 나은 거 같아서 그런 것뿐이니까.”

그야말로 말도 되는대로 내뱉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강제해야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반대쪽에서 익숙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네놈들은 왜 따라오냐는 거다.”

“거, 병문안 같은 건 한 번 올 수도 있잖습니까?”

“……어이가 없…, 스팬담?”

CP9을 떨쳐내는 데 실패했는지 투닥거리며 오고 있던 스팬다인이 피를 철철 흘리며 환자복을 입고 병원 복도를 맨발로 걷는 스팬담을 발견한 듯 멈칫했다.

“장관?”

“챠파파?”

스팬다인이 당황한 낯으로 라스키를 보고 다시 스팬담을 보았다. 다른 CP9도 스팬담을 발견한 듯 놀란 눈으로 걸음을 멈췄다.

“스팬담, 너 대체 뭐 하는 거냐.”

스팬담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간 스팬다인이 스팬담을 단번에 안아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 아버지. 오셨습니까. 퇴원하고 싶은데 라스키가 안 시켜줘서……, 근데 저 일단 좀 나가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적어도 옷은 갈아입고 퇴원 수속은 밟아야지. 아가, 왜 그러니?”

“그게, 그냥 가면 안 됩니까? 저 그냥 집에 가고 싶습니다. 바쁘시면 혼자 갈 수도 있는데 놔주시면…….”

스팬담이 버둥거렸다. 흔히 패닉에 빠진 사람이 보이는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았고 떨림도 심했으며 호흡도 빠르다. 블루노가 근처에서 붕대를 받아와 일단 스팬담의 손등을 지혈했다.

“알았다, 알았으니까 진정 좀 하거라. 집에 가자. 라스키.”

“…곧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스팬다인의 짧은 말에 그가 원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읽어낸 라스키가 퍽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칼리파가 라스키에게 다가갔다. 그에 라스키가 의아한 낯을 했다. 칼리파가 입을 열었다.

“도와드릴게요.”

“…아아, 그래.”

제 딸이 다가가자마자 퍽 부드러워진 라스키의 분위기에 스팬다인이 코웃음을 치곤 블루노가 열어주는 문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도착한 스팬담이 그제야 조금 안정된 기색으로 숨을 내쉬었다.

“아가, 괜찮으냐?”

“……아아, 네. 악몽을 조금 꿔서.”

“……그러냐?”

“네.”

스팬다인이 스팬담을 소파에 내려주었다. 스팬담이 현기증이라도 이는지 그대로 소파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형님.’

그 얼굴, 그 말투, 목소리까지 전부 형님이었다.

‘대체 왜 여기에…….’

왜 살아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거지? 그것도 ‘플레이어’로 참여해서 말이다. 소파에 있는 쿠션에 얼굴을 묻은 스팬담의 몸이 잘게 떨렸다.

때때로 그런 것들이 있다. 뼛속까지 각인된 공포 같은 것들. 결코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존재. 토끼가 호랑이를 이길 수 없듯, 그러한 종류의 결코 닿을 수 없는 무언가가 말이다.

족쇄에 묶여서 자란 어린 코끼리가 자라서도 제 발로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는 인간에게 결코 반항할 수 없듯, 때때로 누군가에겐 그런 공포가 존재했다.

스팬담에게.

아니, 전생의 조두혁에게 조유혁이라는 남자란, ‘형님’이란 그런 존재였다. 분명히 제 힘과 능력으로 밟아 죽일 수 있지만, 상대가 죽으라고 목을 조르면 그저 목을 내어주어야 하는 존재 말이다.

스팬담이 잘게 떨리는 손을 숨기려 주먹을 꽉 쥐었다.

“장관, 괜찮습니까?”

로브 루치의 목소리에 스팬담은 멀쩡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쿠션에 묻은 입술을 달싹였다가 결국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닫았다.

“두려워하고 계시는군요.”

“…….”

“뭐가 두렵습니까? 장관.”

로브 루치가 꽉 쥔 스팬담의 주먹 위에 제 손을 올리며 물었다. 스팬담이 손을 피하려고 하자 도리어 그가 스팬담의 손을 꽉 쥐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으스러지지 않을까 싶어질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저희가 있는데… 감히 제 앞에서 저희 이외에 뭘 두려워하는 겁니까.”

로브 루치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명백한 불쾌감에 스팬담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앳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조금 정신이 드는 것도 같았다.

“그냥 악몽 꿨다고 했잖냐. 꼬맹아.”

“무슨 악몽을?”

“……몰라, 기억도 안 난다.”

스팬담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말했다. 그가 붙잡힌 손을 가볍게 털어냈다. 다행히 손은 가볍게 흔드는 것만으로도 금세 떨어졌다.

“악몽 좀 꿨다고 우리 애들이 나 존나 눈치 주네…….”

스팬담이 울적하다는 듯 읊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쿠션을 끌어안은 그가 퍽 과장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억울하다, 억울해. 아주. 사람이 악몽에서 막 깨면 정신이 좀 없을 수도 있는 거지.”

“거…, 웃지 마쇼. 존나 못생겼으니까.”

“……존나 상처네.”

“아니, 거… 그런 뜻이 아니라.”

재브라가 머리를 긁적이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후쿠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후쿠로가 지퍼를 슬쩍 열더니 입을 열었다.

“이상한 표정이라는 거다.”

“요요이!! 마앗없는 걸 먹고 맛있다고 말하는 표정이라는 것이외다~~”

“자네, 정말로 별일 없었던 겐가?”

“잠만 잤는데 뭔 일이 있었겠냐. 악몽이 너무 길어서 그렇지.”

카쿠의 말에 스팬담이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 시스템 창이 아주 난리가 났다. 나중에 확인하자 싶어서 느리게 읽어내리다가 시선을 다시 내리자 팔짱을 낀 스팬다인이 물끄러미 스팬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팬담.”

“예, 아버지.”

“무슨 문제가 있으면 말하거라. 너 혼자 가슴에 담아두고 끙끙 앓는 것보단 같이 대화를 나누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스팬다인의 말에 스팬담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윽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어느새 잔잔해진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그냥 악몽을 꾼 것뿐입니다.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제가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아버지. 그나저나 재판은 어쩌고 제가 여기에 나와있습니까? 감옥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지…….”

“네가 얼마나 잤는지 아느냐?”

“으음.”

하루하고 반나절 좀 넘게 잤겠지. 대략 이틀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스팬담이 허허 웃으며 멋쩍은 낯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많이 피곤했는데 하루 꼬박 잤습니까?”

“……이틀 가까이 됐다. 정말 잠을 잔 거냐?”

“그거야 아버지가 보셨으니까 아실 것 아닙니까.”

스팬담의 말에 스팬다인이 찌푸려진 미간을 엄지로 꾹꾹 눌렀다. 이윽고 라스키와 칼리파가 돌아왔다. 스팬다인이 마침 잘됐다는 표정으로 라스키를 보았다.

“라스키.”

“뭡니까.”

“내 아드님께선 죽어도 잠만 잤다는군.”

스팬다인이 딱, 손가락을 튕겼다. 때마침 라스키가 어디선가 밧줄을 가져와 스팬담을 의자에 꽁꽁 묶어 거실 가운데에 두었다.

그러고는 스팬담의 앞에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겠는 원형 티테이블을 놓아두곤 불을 다 껐다. 라스키는 곧 테이블 가운데 스탠드 조명을 가져다 두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곤 조금 껄렁한 자세로 그 맞은편에 앉았다.

“……아버지? 라스키?”

“심문을 시작해라.”

아니, 이게 대체 뭔데.

스팬담이 헛웃음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콰앙-!

스팬다인의 말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라스키가 주먹으로 테이블 위를 내리쳤다. 순간 그 소리와 압박감에 놀란 스팬담이 숨을 훅 들이켰다.

스팬담의 뺨을 타고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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