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뚱이 이모네 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우영과 채준은 커피숍에서 남은 시간을 개기기로 했어.


일단 태오를 만나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할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영은 명치가 계속 갑갑했어.



‘니는, 유령이랑 사귀나. 차라리 유령이 낫겠네.’ 



태오의 마지막 말이 계속 맴돌았거든. 아마 홧김에 지른 말은 아닐 거야. 내내 섭섭했던 부분이 곪아 터진 거겠지.


그렇다고 태오가 우영의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곤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 우영은 더 미안했어.


새천년이 열리고 세상은 매일매일 진화해 삐삐는 64화음 컬러폰이 되었고, 워크맨은 MP3가 되었지만, 동성애에 관한 불편한 시선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거든.


부지런히 변해가는 세상도, 깊은 뿌리를 내린 듯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편견은 어쩔 수가 없나봐.


세상이 바뀌길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평생 안고 가야 할 숙제일지도 모르겠어.


 

“니는...”


 

얼음이 녹아서 싱거워진 딸기 스무디를 빨던 우영은, 빨대 끝을 자근거리며 채준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입을 떼었어. 그러나 머뭇거리는 말은 우영의 입술 안쪽에 갇혀, 쉽사리 나오지 않았지.


채준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눈을 들어 우영을 쳐다봤어.(*실내 흡연 가능하던 때) 우물쭈물하고 있는 꼴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지.


우영이 무슨 말을 할지 대강 감이 왔어. 피하고 싶은 질문이기도 했고, 털어놓고 싶은 고민이기도 한, 이중적인 마음을 갖게 하는 ‘그것’에 대한 걸 물으려는 것이겠지.


이번에도 피해버릴까, 싶었다가 채준은 담배를 깊게 빨아 당겼다 연기를 길게 뱉어내며, 눈으로 우영의 다음 말을 재촉했어.


원래 옆에서 지켜보는 남의사랑은 그 길이 훤히 보여 훈수를 둘 수 있지만, 내 사랑은 깜깜하고 어둡기만 해서 길이 보이지 않게 되는 거야. 그래서 쉽게 패를 까지도 못하고 망설이게만 되지.


낙장불입은, 사랑에도 적용되는 것만 같거든. 한 마디로 그냥, 겁쟁이가 되어버린다는 뜻이야. 걸음도 못 떼면서, 온갖 비극적 결말부터 상상하게 돼.


그럴 바엔 차라리 시작을 하지 말자, 뒷걸음질을 쳐버리는 주제에 욕심은 버리지 못해.


혼자 날아올랐다가 혼자 땅에 처박히며, 그렇게 계속 가슴에 못질을 하는 것을 사람들은, 짝사랑이라고 부르더라고.


단어가 참 아련하기도 하지. 실상은 그저 용기 없는 겁쟁이의 병신 짓일 뿐인데 말이야.


이러니저러니 구구절절 늘어놔도, 결국은 까이는 것이 무서운 것 아니겠어? 눈빛이 달라지고, 태도가 바뀌고, 그러다 멀어지는 것이 두려운 것뿐이잖아.



“고백 안 할 끼가?”


 

역시는 역시였지. 우영은 채준을 배려하며 눈치를 보고 조심스레 말을 뱉고 있었어. 어떤 식으로 물어도, 채준에겐 별 차이가 없었을 거야. 그렇다고 우영의 배려가 고맙지 않다는 건 아니야. 무신경한 것보단 괜찮으니까.


채준은 피식- 웃었어. 고백이라...그 단어가 이토록 낯선 것이었나. 이젠 오래되어서, 그 단어를 생각했던 때가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어.



“낯짝 근지릅게, 고백은 무슨...”

“내가 잘못 짚은 거믄 미안한데...니 한겸이...좋아하제?”

“싫은 놈이랑 몇 년씩 붙어 다닐 리가 있겠나?”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닌 거 안다 아이가.”


 

우영이 이제 와 왜 파고드는 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어.


내 편이 하나도 없는 전장에서, 전우라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라도 들었던 건지. 아니면, 태오와 지지고 볶아도 저만 잘 지내는 것 같아 채준이 마음에 걸린 건가.


예전이라면 우영의 마음이 고깝게 느껴졌겠지만, 이젠 그렇지 않았어. 우영이 진심으로 저를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어쩌면 우영은 제 사랑이 아니니, 훤히 보이는 걸 수도 있지.


 

“고백한다고 달라질게 있겠나. 괜히 어색해지기만 하지. 글고 뭐 할 짓, 못할 짓 다 하고 있으니 딱히 사귀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을 것 같고.”



우영은 흐물흐물 녹아 물처럼 변한 딸기 스무디를 빨아 당기다가, 하마터면 뿜어낼 뻔 했어. 뿜어내지 않으려 참다가 대신 사레에 걸려 켁켁 거려야 했지.


기침이 잦아질 때쯤, 우영은 놀란 눈을 들어 채준을 바라보았어. 채준은 재밌는 이야기라도 하듯 웃으며, 담배를 빨아 당겼어.


 

“그게 무슨...니...한겸이랑 벌써 그렇고 그런 사이가?”

“음...이를 테면, 섹파? 아이다. 아직 끝까지 간 적은 없으니, 딸파가 맞겠네.”



전에 태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지. 채준이랑 한겸이 야동 보다가 서로 딸 잡아 줬다는. 그럼 그 뒤로 계속 그런 관계가 이어져 왔던 건가.


두 사람만의 어떤 사정이 있었겠지만, 채준의 표정에 체념이 가득해 보여서 우영은 가슴이 욱신거렸지. 그렇다고 주제넘게 관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어.


한껏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영을 보며, 채준이 피시실 웃었어.


몸이 거부감이 없다고, 마음까지 거부감이 없는 건 아닐 거야. 한겸은 그저, 저나 채준이 서로 ‘그런 때’가 맞으면 입술도, 성기도 맞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 이상은 없겠지.


우영은 태오와 풀어야 할 문제에, 채준의 일까지 얹어져 마음이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듯 무거웠어. 그래도 괜히 물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 어딘가 모르게 채준의 표정이 조금 가벼워보였거든.


꼬깃꼬깃 접어서 터지지 않게 누르고만 있던 속 얘기를, 아주 조금쯤은 털어낸 것 같을 지도 모르지.


채준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뒤, 자리에서 일어났어. 인제 가자, 라고 말했기에 우영도 가방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지.


여름이 이르게 오려는지,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후덥지근했어. 여름방학 때, 태오와 가까운 곳에 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우영은 다시금 명치가 갑갑해져 왔지.


태오가 오냐오냐 버릇을 나쁘게 들여놓은 탓에, 화난 태오를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막막했거든.


술자리도 줄이고, 그 복학생 선배 근처도 가지 않겠다고 하면, 조금쯤은 풀어지려나. 그 선배 새낀, 왜 남의 볼따구를 함부로 쭈물딱 대서는 이 사달을 만드는 기고!


그때 술 취한 척, 그 선배의 손모가지라도 꺾어버렸어야 했다는 후회를 해봤자 이미 늦었지.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채준이 검지를 뻗어 우영의 미간을 툭툭 쳤어.


 

“인상 피라. 태오가 화 안 풀까봐 걱정돼나? 그 새낀 단순하니까, 니가 뽀뽀만 한 번 해줘도 바로 헤실 거릴 걸. 어쩌면 지금 한겸이 새끼 붙들고, 질질 짜고 있을 지도 모르고.”



우영은 피식, 작게 웃었어. 그렇게 어영부영, 대충 덮고 넘어가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채준 나름대로 우영을 위로하는 것 같아서였지.



**


 

뚱이네 이모집으로 들어서니, 잘 구워진 삼겹살 냄새가 훅 풍겨왔어. 둘러 볼 것도 없는 작은 규모의 가게 구석에 이미 한겸과 태오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어.


한겸은 삼겹살을 뒤집다가, 채준과 우영을 발견하곤 집게를 쥔 손을 들어 흔들었지. 담배를 물고 있던 태오도 고개를 스윽 돌리다가, 우영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어. 우영이 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나봐.


우영이 머뭇거리고 있자, 채준이 우영이 팔을 잡더니 끌고 자리고 가까이 갔지. 태오의 옆에 우영을 밀어 앉힌 뒤, 채준은 한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


태오는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어.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건지, 아니면 그러고 나서 연락도 없다가 바로 우영을 맞닥뜨려선지, 태오는 말이 없었지.


우영은 목이 바짝 타는 것 같아서 물을 빠르게 들이켰어.


 

“석현이는 안 오나?”

“그 새끼, 요즘 연애한다고 꽃밭에서 뒹구는 중이라 우리는 안중에도 없다 아이가.”


 

우영의 질문에 한겸이 답하며, 익은 삼겹살을 가위로 듬성듬성 잘라냈어. 그때 채준이 바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더니, 한 개비 남은 담배를 물며 말을 뱉었어.


 

“내 담배 없다. 우영아, 내 담배 한 갑만 사다 도.”



태오가 기본 찬으로 나온 분홍소시지를 먹진 않고 젓가락으로 쿡쿡 찌르고 있다가, 눈을 들어 채준을 노려봤어. 채준은 그런 태오의 반응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이었지.


 

“니가 사 온나.”

“누가 니보고 사오라캤나?”


 

우영은 채준이 왜 그러는지 감이 왔어. 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


 

“내가 사다 주께. 디스로 사오면 되제?”


 

우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오가 제 담뱃갑을 집어 들더니 채준에게로 집어던졌어.


 

“이거 피라, 씹새끼야.”


 

채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태오의 담뱃갑을 다시 태오에게로 휙 집어 던졌지. 우영은 걸음을 틀어 가게를 빠져나갔어.


태오는 한숨을 짧게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채준을 노려보고는, 우영을 쫓아 가게를 빠져나갔지.


한겸은 잘 익은 삼겹살 한 점을 집게로 제 입에 구겨 넣으며, 키들 거리고 있는 채준을 요상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어.


 

“우영이한테 담배 심부름을 와 시키노?”

“저 새끼들 나가서, 좀 치고받고 싸우라고.”

“할튼 니는 성격 진짜 못 돼 처뭇따. 안 그래도 태오 새끼, 우영이랑 싸웠다고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껴 있드만, 니는 불 난 집구석에 기름을 처 붓고 지랄이고.”

“불구경만 하고 있는 거 보단 낫다 아이가.”



한겸은 역시 집게로 잘 익은 삼겹살 한 점을 후후- 불어 뜨거운 김을 식힌 뒤, 채준의 입으로 구겨 넣어줬어.



“삼겹살이나 처무라. 남의 부부 쌈에 껴들지 말고.”


 

-



태오는 앞서 걸어가고 있는 우영의 뒷모습을 쫓아 가, 손을 뻗어 우영의 손목을 쥐었지. 우영이 뒤를 돌아보았어.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는 태오는, 화가 잔뜩 나 보였지. 그 전의 일 때문이 아니라, 채준의 담배 심부름을 순순히 하고 있는 것에 대해 화가 났을 거야.


우영이 돌아보자, 태오가 쥐고 있던 우영의 손목을 풀어주었지. 우영이 태오를 와락 껴안았어.


 

“뭐 하노?”

“사과.”

“사람들 쳐다본다. 떨어지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 태오는 우영을 밀어내지 않았지.


 

“보라캐라.”


 

누군가 돌을 던지면, 넌 날 가로 막고 서서 그 돌을 혼자 다 맞으려 하겠지. 그래서 그랬어. 모든 것을 다 너 혼자 감당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방어막을 쳤던 거였는데, 그게 널 불안하게 하고 아프게 하고 있었을 줄이야.


 

“사과를 사과, 이라믄 땡이가?”

“미안하다...태오야...진짜..미안..”


 

태오가 우영을 감아 안으며, 우영의 뒷머리를 쓸어내렸어.


 

“와 쉽게 받아주는데?”


 

우영이 태오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어.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졌기 때문이었지.


 

“누가 받아줬다카대?”

“그믄 아직도 화난기가.”

“어. 그 씨발 새끼 손 닿았던 볼따구 500번은 빨아 무야지 좀 풀릴 것 같은데.”


 

우영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지. 태오는 양손으로 우영의 얼굴을 쥐고 제 품에서 슬쩍 떼어냈어.


 

“지금 함 빨아 무까?”


 

그때 우영이 뒤꿈치를 살짝 들어 올렸지. 태오의 입술에 짧게 쪽, 입을 맞췄어. 태오는 놀랐는지 눈이 동그랗게 커졌지.


 

“길 한복판인 거 까 뭇나?”

“길 한복판에서 뽈따구는 묵어도 되고, 입술은 무면 안 되나?”

“박채준이랑 술 먹고 왔나?”

“지금 당장은...니가 내 애인이라고 내 주위 모든 사람들한테 다 말하고 댕길 순 없지만, 니는 내한테 유령 같은 거 아이다. 그니까...그런 생각 이제 다시는 하지마라..”



홧김에 뱉어내긴 했지만, 태오는 그 말을 했던 걸 내내 후회하고 있었어.


앞으로 또 크고 작은 일로 싸울 때, 후회할 못난 말을 뱉어낼지도 몰라.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반복하게 되겠지.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알게 될 거야. 싸우는 순간에도, 밉고 못난 말을 뱉어내는 그 순간에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몽상가 夢想家 꿈을 꾸는 낭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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