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는 모처럼 동기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우빈은 얼마 전에 소개팅한 여자와 잘 못 된 듯 쓴 술을 삼키며 눈물을 훔쳤다. 그런 우빈을 유하는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으이구. 그렇게 소개팅을 많이 하면서 어떻게 아직도 여자를 못 사귀는 거냐. 쯧쯧.

유하는 안쓰러움에 혀를 끌끌 찼다. 동훈 역시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갑자기 술집 문이 벌컥 열리고 우빈이 눈을 반짝이며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여기!”

문 앞에는 있는 사람을 본 유하의 눈이 놀라서 휘둥그레졌다. 안주를 집은 젓가락을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탁!”

엇…. 내가 잘 못 본 건가.

유하는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어느새 그는 술자리에 합석해서 우빈 옆자리에 앉았다.

헛것을 본 것 마냥 유하는 눈을 비볐다. 침을 꿀떡 삼켰다.

다시 봐도 그가 맞았다.

서태준….

유하는 태준의 진한 갈색 눈을 보며 멍했다. 태준은 조각에 재능이 뛰어나서 1학년 때 유럽에서 열린 대회에서 상을 받고 그 부상으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이제 다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진한 갈색 머리카락에 윤기가 흘렀다. 무표정한 얼굴과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도 여전했다.

유하와 눈이 마주치자 태준이 입을 달싹거렸다.

“오랜만….”

“어.”

유하는 너무 놀라서 대충 얼버무리듯이 대답했다.

침착 침착해야 해.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지.

두근 두근.

유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켜려 차가운 물을 한 잔 벌컥 마셨다.

동훈이 걱정스러운 듯 술잔을 기울이며 유하를 힐긋 쳐다보며 눈짓으로 괜찮냐고 물었다.

유하는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당시 태준은 유학 갈 때 미대 동기인 여자 친구 유라와 함께 간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유라와도 친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어딘가 싸한 느낌이 드는 게 태준 혼자서 귀국한 것 같았다. 희미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힘을 꽉 주었다.

아니야. 남의 불행을 즐기면 안 돼. 하…. 몇 개월 이나 안 봤는데.

이제 아무렇지도 않겠지.

두근 두근.

유하는 술에 취해서 혹시나 실수라도 할까봐 술을 마시지 않았다. 동훈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태준은 무심하게 혼자서 술을 마셨다. 우빈은 실연당한 이야기를 마구 떠들어대고 있었다. 사람이 실연당한 이야기를 듣고 웃으면 안 되는데 하도 실연을 많이 당하다 보니 이제 다들 만성이 되어 그려러니 하며 피식거리며 웃었다.

우빈은 자신의 슬픈 연애사를 비웃지 말라며 술에 취해서 징징거리며 울었다.

저러니…. 여자들이 싫어하지. 소개팅을 한 달에도 몇 번씩 하고 이 여자 저 여자 만만하면 다 찝쩍대니 좋아하는 여자가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태준은 우빈의 이야기를 들으며 술만 마셨다. 원래 말이 별로 없는 편이라서 태준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았다.

유하는 1학년 초에 태준과 동훈 셋이서 잘 어울렸다. 그런데…. 유하가 잘 지내다가 어느 날부터 태준을 피했다. 싸운 것은 아니지만 자신과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핑계를 댔다. 오랜 친구인 동훈은 이유를 눈치채고 유하가 하는 데로 가만히 두었다.

그렇게 서로 자연스레 멀어졌다. 태준은 그 이후로 우빈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간간히 눈에 띄었다.

유하는 오늘 태준을 만날 줄 꿈에도 생각 못 했기에 자꾸만 손이 덜덜 떨렸다. 적당한 때에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동기들의 눈치만 살폈다.

우빈이 다 울고 정신이 들었는지 심심해 보이는 태준에게 물었다.

“태준아, 너 잠깐 귀국한 거야?”

“아니. 유학 생활이 나에게 맞지 않아서 다 정리하고 2학기부터 복학할 거야.”

“어? 그 좋은 기회를 버리고?”놀란 우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준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한 잔 마셨다.

유하는 더 놀랐다.

뭐?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고!

절로 군침을 삼켰다. 아까부터 혼자서 빠르게 뛰던 심장이 더 빨리 뛰고 있었다.

하아…. 미치겠네. 그나마 안 보는 게 훨씬 나았는데.

유하는 속이 타서 차가운 물을 쭉 들이켰다.

태준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하를 쳐다보았다. 유하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피했다.

“나…. 유라랑 헤어졌어.”

태준이 한숨과 함께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투명한 유리잔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우빈이 그 마음 이해한다면서 태준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유라는 동기 중에서 가장 예쁘고 집도 잘 살고 미술에 재능도 뛰어났다. 태준 역시 그런 유라의 연인으로 뭐 하나 딸리는 게 없었다. 두 사람은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완벽한 커플이었다.

유…유라가 얼마나 예쁜데…. 그런 애랑 헤어지다니. 정말 마음 아프겠다. 유학 갈 때 다들 결혼할 가능성이 높다고 얼마나 많이 수근거렸는데….

유하는 태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나… 나랑 전혀 상관없잖아. 내가 좋아하고 말 일이 아니잖아.

유하는 회비를 낸 뽕은 뽑아야겠다 싶어서 접시에 가득 담긴 치킨을 맛있게 먹었다.

“여전히 치킨 좋아하네. 풉.”

태준이 치킨 먹는 유하를 보며 웃었다.

“어.”

유하는 태준과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씨발. 보지 말라고. 남 먹는 걸 왜 봐. 먹방 아니거든.

태준은 날카로운 눈빛이 심장에 푹푹 꽂히는 것 같았다. 유하의 얼굴이 빨개졌다.

치킨 더 먹고 싶은데…. 오늘은 마음이 너무 심란해서 도저히 더 못 있겠어.

이렇게…. 짝사랑 상대를 만날 줄은 몰랐으니깐.

유하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어째서인지 잔뜩 심통 난 한결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아. 왜 쓸데없이 한결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난 아무런 죄도 안 지었는데. 이상하네.

유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동훈에게 먼저 간다고 말하고 몰래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어휴.”

유하는 술집 문을 나서서 밤거리를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거리를 비추었다.

터덜터덜 버스 정류장으로 걷고 있었다.

“야! 같이 가자.”

태준이 언제 쫓아 나왔는지 어느새 유하의 뒤에 서 있었다.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거렸다.

어? 뭐야? 일부러 몰래 나왔는데…. 태준이 왜 따라 나온거야.

유하는 얼른 태준과 일부러 거리를 띄웠다. 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눈을 빠르게 떴다가 감았다.

“너도 버스 타러 가?”

“어.”

태준이 짧게 답했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다.

유하는 원래 말이 없는 태준을 대신해서 뭐라도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싶어서 머리를 굴렸다.

뭐… 뭐라고 해야 하지. 나는 지금 머릿속이 엉망진창인데. 후웁.

“유학 갔던 나라가 어디라고 했었지?”

“영국이야. 멋진 곳이지만 나랑은 안 맞더라고.”

“여…영국.”

유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에 할 말을 생각했다.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태준은 말없이 물끄러미 유하를 쳐다보았다. 유하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런 태준의 은근한 시선조차 못 느끼고 고장 난 상태였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어색하네. 우리 예전에는 친했는데….”

태준이 겸연쩍어하면서 말했다.

유하가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마침 유하의 버스가 왔다.

“나… 그만 갈게. 안녕. 복학하면 보자.”

유하가 한숨을 돌리며 냉큼 버스에 올라탔다.

태준은 아쉬운 듯 유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네.”

태준이 섭섭한 듯 멀리 사라져가는 유하가 탄 버스를 쳐다보았다.

 

*

 

한결은 거실에 나와서 손목을 연신 주물렀다. 매일 매일 짬을 내서 격투 게임 연습을 하느라 손목이 아팠다. 이제 거의 고수가 가르쳐준 시크릿 필살기 기술을 다 익혀가고 있었다. 유하가 게임에 져서 분해하며 부들부들 떨 모습을 상상하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았다.

유하 선배 기다려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울 날이.

입 꼬리가 귀에 걸려서 바보처럼 웃었다.

철컥.

유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 동기들과 함께 술을 마신다고 해서 진작부터 기다린 한결이었지만 생각보다 일찍 들어와서 기분이 좋았다.

유하의 얼굴에 붉은 기가 없이 하얀 것을 보니 술을 거의 안 마신 것 같아서 한결은 실망했다. 눈알을 또르륵 굴렸다.

에잇. 오늘은 왜 저렇게 술을 안 마신 거야. 스킨십 진도 좀 나가려고 했는데. 글렀네. 눈도 말똥말똥한 게 너무 제 정신이라서 그냥 접어야겠다. 에휴.

한결이 아쉬워하며 유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선배, 오늘 술자리라면서 술 안 마셨어요?”

“응. 과제 할 게 많아서 안주만 먹었어. 안주로 치킨 시켰는데 맛있었어. 거의 본전은 뽑은 것 같아.”

유하가 볼록한 배를 만지며 툭툭 두들겼다.

한결은 유하의 볼록한 배를 보며 만져보고 싶었다. 저 귀엽게 나온 아기배를 만지면 무척 말랑거릴 것 같았다.

“흐음. 그랬구나. 선배 우리 격투 게임 내기 하기로 한 거 기억하죠?”

“어. 월세 까주기로 한 거.”

유하가 잘 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기술 다 완성 다 되어 가니깐 조금만 기다려요. 선배가 제 앞에서 무릎 꿇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알았어. 기다릴게. 난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어.”

유하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한결은 능글맞게 웃으며 그 시선을 받았다.

선배…. 저 지금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지문이 없어지려고 하거든요. 반드시 이길 거예요. 그리고… 소원은…. 좀 센 걸로 준비해 봤어요.

한결은 소원을 상상하며 얼굴을 붉혔다. 최근 들어 유하와의 관계가 많이 좋아졌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두 사람 사이에도 제법 신뢰가 쌓였다. 유하의 붉은 입술을 보며 한결이 입맛을 다셨다.

선배…. 각오해요. 후훗.

유하는 한결이 자신의 입술을 보자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저 아무 소원이나 다 되는 거죠?”

한결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하를 보며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소원? 그래. 근데 소원을 정하는 건 자유인데 그 소원을 내가 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왜요? 사나이 약속했으면 지켜야죠!”

한결이 인상을 팍 쓰며 대꾸했다.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왜냐면 말이야. 넌 백날 연습해도 나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지. 크큭.”

유하가 한결의 얼굴 앞으로 검지 손가락을 흔들었다.

“월세 까면 그 돈으로 뭐 할까나~~.”

유하는 벌써 이긴 듯 콧노래를 불렀다.

한결은 기분이 상해서 뺨이 덜덜 떨렸다. 눈빛이 번뜩였다.

두고 봐요. 반드시 이길 거니깐.

한결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하는 그런 한결을 한심하다는 듯이 보았다. 고개를 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한결은 요즘 유하에 대한 마음을 많이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유하와의 관계가 더 좋아졌다. 오늘처럼 술자리가 있는 날이면 예전에는 전화와 문자를 계속했지만 오늘은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간섭도 거의 하지 않았다. 자유로워진 유하는 마음이 편해진 듯 한결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훨씬 편안하게 여기는 듯했다.

한결은 그런 유하를 보며 행복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유하 선배가 나를 보는 눈빛이 너무 다정해서 녹을 것 같아.

곧 있으면 넘어 올 것 같아.

한결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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