完 찾았어, 내 피냐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속에 뭐가 들었든 상관없으니까, 겉으로는 사랑한다고 해. 그럼 네가 찢어지고 터지기 전까지 난, 그냥 네가 날 사랑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나는 권세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다, 서로 진짜 닮았네. 부서지기 위해 살잖아. 부서지기 전까지는,


"사랑인 척하자는 거지?"








집에 돌아와서, 한참 생각했다. 어디부터 꼬였는지. 아마 우리 넷 모두 그 생각뿐이었을 거다. 하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다. 저주를 타고난 순간부터, 저주를 사랑해버린 순간부터, 우리는 틀려먹었다는 것. 부서진다고 해도 틀렸고, 이대로 꾸역꾸역 살아남는다 해도 우린 틀렸다. 우리는 계속 사랑인 척 사랑을 할 거고, 그래서 우린 계속 이상할 테니까.






며칠이 흘렀을까. 하나 둘 하복을 꺼내 입던 환절기를 지나 어느새 완연한 여름, 우리 모두가 흰색 하복 셔츠를 입는 계절이 되었다.


"얘들아 좋은 아침."


차하나는, 반장은 여전히 착한 아이였다. 다만 착함에 조금 이골이 난. 나는 차하나의 견고한 껍데기에 생긴 균열이 퍽 마음에 들었다. 나와 권세모에게 있는 그 균열 같아서. 이상한 안도감마저 들었다.


"오공이도 안녕."


내게 미소짓는 차하나. 나는 대충 웃어준 뒤 고개를 돌린다. 차하나는 나를 빤히 보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살살 웃는다.


"맞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그때 권세모랑 무슨 얘기 했어?"


차하나의 말에 나는 책을 꺼내려던 손을 멈춘다.


"봤어. 그날. 너랑 만나고 나서... 집에 가는 길에."


"..."


"뭐, 됐어. 나도 차두리랑 꽤 오래 얘기했거든."


혼도 좀 내고. 너도 그랬으려나? 그래도 너무 몰아세우지는 마. 권세모는 이제 나도 사랑하니까. 차하나는 여유넘치는 얼굴로 웃어보였다.


"왜 그런 표정이야?"


"...그냥. 웃겨서."


나는 입꼬리를 쓱 올린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권세모가 교실에 들어오고, 차하나는 아무렇지 않게 사물함 쪽으로 간다. 차하나, 조급해하고 있구나. 나는 자꾸만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렸다.






점심시간. 점심을 거르고 교실에 남은 건 우리 셋뿐이었다. 사각사각 연필 소리와 책 넘기는 소리, 바람에 커튼이 살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터트려버릴까."


가만히 책을 보던 차하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권세모가 차하나를 힐끔 쳐다보자 차하나는 푸스스 웃는다.


"얘기 좀 할래?"


그래. 얘기 좀 하자. 권세모가 의자를 밀고 일어난다. 나는 가만히 차하나를 응시한다. 그 얘기를 하려는 거겠지. 증명은 그 정도면 됐으니까. 권세모는 분명히 차하나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권세모는 차하나를 온전히 사랑한다. 두려워하는 차두리나, 이상한 동질감을 느끼는 나와 달리 진짜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진 건 권세모 뿐이었으니까. 나는 알 수 없는 씁쓸함을 느꼈다. 텅 빈 교실이 괜히 짜증났다.






"이게 뭐야?"


이튿날, 차하나는 우리에게 편지 하나씩을 주었다. 붉은색 실링 왁스가 붙은 편지 봉투는 이상한 공포감을 자아냈다. 편지 봉투를 열자 심플한 흰색의 카드 하나가 나온다.


'이번주 토요일 오후 1시. 제일 더울 때. 파티에 와.'


간결하게 딱 한 줄.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정갈한 글씨체로 쓰인 그 문장은 누군가의 결말일지도 모른다.


"생일파티 초대장."


우리가 편지를 읽고도 아무 말이 없자 가볍게 웃어 보이는 차하나. 편지지를 쥔 차두리의 손에 땀이 올라온다.


"생일... 아니잖아."


차두리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놓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언가 두려운 듯 편지지를 꼭 쥐었다. 하나야, 우리···. 차두리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다 입을 다문다. 차하나와의 완전한 분리. 생일이란 끈 하나를 툭, 놓으면··· 안될 것 같아서. 차두리의 손 안에서 편지지 끄트머리가 구겨진다. 차하나는 차두리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다. 나도 알아. 그치만··· 찾았으니까 파티를 해야지. 파티는 역시 생일파티잖아? 왜 그래 두리야···. 싫어? 차두리는 홀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냐. 안 싫어···.


"그럼 오는 거다?"


차하나가 눈웃음을 짓는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차두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왠지 시선을 피한다. 차두리는··· 진짜 나쁘다.






"진짜 갈거야?"


학교가 끝난 시간, 차두리는 나를 분리수거장 쪽으로 불러냈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차두리. 와, 얘는 진짜···. 나는 얕은 미소를 대충 짓는다.


"응."


"오공아, 차하나는 지금..."


"너, 왜 그래?"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차두리는 말을 멈춘 채 가만히 나를 본다. 


"초조해 보여. 너, 차하나가 싫어?"


"..."


"뭘 하려는지 모르는 거 같진 않아서. 너..."


"나는 너 좋아해."


가만히 나를 보던 차두리는 불쑥 나를 좋아한다며 폭 안겨왔다. 이래서 쌍둥이는 쌍둥이구나. 그런데도 난 차두리를 밀어내지 않았다. 


"근데, 차하나의 피냐타를 터트리는 것도, 나였으면 했어. 나는, 난 그냥..."


차두리는 마지막 문장 끝을 흐렸다. 사탕을 얼마나 먹인 건지 단 향이 짙게 났다. 아, 사탕이 아니라, 이게 진짜 차두리일 수도 있고. 나는 내게 안긴 차두리의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차하나를 향한 차두리의 이상하게 비틀린 집착. 차두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 나는 알 수 없는 안타까움과 희열이 느껴졌다.


"그럼 확실히 했어야지. 차하나를 묶던가, 권세모를 잡아두던가, 나한테 기대던가..."


처음부터 그랬으면 달랐을까? 그랬으면 넌 날 첫 번째로 봐줬을 거야? 차두리가 씨익 웃었다. 


"그랬어도 난 차하나한테서 못 벗어나."


"내가 좋아한 애들은 다, 차하나한테 묶여있네."


"너도 묶여있어. 너도 같은 나뭇가지에 묶어 둔 거라고 차하나가 그랬어."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아스팔트 바닥을 지글지글 달궜다.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사랑한다고 하면 안 돼?"


차두리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럼 지금이라도 사랑한다고 너한테, 말하면 안 돼? 난 권세모도 차하나도 너도, 그냥 좋아. 그러니까,


"그냥, 뭐 하자는 게 아니라 그냥. 좋아한다고."


그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애초에 이렇게 단순한 문제였다. 사귀자 연애하자 결혼하자 어차피 우리끼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린 그냥, 사랑하는 거다. 부정하고 뒤돌아서고 귀를 막아도 관계의 정의는 사랑이었다고. 그 형태가 아무리 비틀렸더라도 우리는 그냥 사랑이었다고. 나는 차두리를 향해 살풋 웃으며 입을 맞췄다.


"나도 좋아해."


차두리는 행복하다는 듯이 웃었다.






계절은 한여름이었지만 우리는 아직 벚꽃이 죽던 봄날에서 하나도 자라지 않았다. 초록색 빛을 내다 못해 파란 물결을 그려내는 나무들. 그 가지에 하얀 실을 돌돌 묶는 차하나에게서는 콧노래 소리가 났다. 갈색 머리칼이 한여름 후덥지근한 바람에 살랑.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주는 그 얼굴은 여름이었다. 장마 없이 쩍쩍 갈라질 듯 타오르기만 하는 여름. 나는 그 미소에 옅은 헛웃음으로 대꾸하곤 차하나에게 다가선다. 나무 그늘이 머리 위에 올라타는 거리.


"고마워, 오공아."


"권세모가 이걸 터트려줄 거라고, 믿는 거야?"


차하나가 눈을 살짝 감은 채 고개를 젓는다. 같이 해야지. 너도, 차두리도, 걔도, 그리고 나도. 드디어 나도 혼나는 거야. 처음으로···. 내 속을 다, 쏟아내고···.


"나 착하지?"


눈을 깜박이며 나를 보는 차하나. 바람이 휘이 지나가자 나무에 묶인 피냐타가 살짝 흔들린다. 나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나쁜 건 아닌데, 착하지도 않고, 그냥 좀 미친 거 같애. 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러자 차하나는 뒤꿈치를 살짝 들어 내게 입을 맞췄다. 






"너네 뭐해?"


파삭, 하고 깨진 정적. 그 사이를 권세모와 차두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권세모는 작고 빨간 상자 하나를 차하나에게 내밀었다. 본 적 있는 상자···. 차하나는 상자를 열고는 잠시 멈춰 있다 씨익 웃었다.


"고마워."


"너 닮았어."


"그러네."


차하나가 상자를 살짝 기울여들자 상자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그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없었다. 빈 상자였다. 포장만 강렬하고 속은 텅텅 빈. 나는 픽 헛웃음을 토해냈다. 참, 어울린다, 어울려···.






붉은 체리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가 테이블 위에 올라있다. 저 생크림도 그렇게 만들어졌을까, 저 체리도 언젠가는 사탕이 될까. 언젠가는 누군가의 껍데기가 되고, 그 껍데기를 벗겨내서 맨살이 된 누군가를 혼내주고, 그리고 다시 어떤 껍데기가 되고···. 우리의 저주도 결국은 끝나지 않겠지. 폭탄을 돌리듯 떠넘기고 케이크에서 사탕으로 사탕에서 체리로 모습을 바꿔도 본질은 변하지 않듯이.


가만히 케이크를 보던 차하나는 우리를 한번 휙 둘러본 후 케이크를 들어 땅에 처박아버렸다. 나무 그늘의 영향이 간당간당하게 닿지 않는 곳에서 머리 위에 햇살을 가득 얹은 차하나가 말했다. 중요한 건 그런 달달하고 귀여운 게 아냐. 우리가 그런 거 챙길 사이도 아니잖아? 아하하···. 차하나가 웃자 차두리가 어정쩡하게 따라 웃는다.


"두리야, 우리 진짜 닮았다."


옅게 미소짓는 차하나. 차두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얘들아, 우리 진짜 닮았다. 응?"


차하나의 말에 권세모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비웃는 듯하나 동감의 표시다. 정말 맞는 말이다. 우리는 소름 끼치도록 닮았다. 나쁘다거나 착하다거나 하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속이 텅텅 비어있다. 다른 사람의 속을 너무 들어서, 너무 봐서, 그런 저주에 걸렸는지. 그런 저주에 걸려서 속을 보고 듣게 된 건지는 몰라도 우리는 우리 속을 채울 새도 없이 다른 이의 어그러진 마음을 가득 욱여넣었다. 그 어그러진 마음들과 텅 빈 우리는 얼마나 다른지. 차하나가 혼내준다던 그 괴리와 우리의 속은 얼마나 다른 재질인지. 그저 같은 마음인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차하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여름의 바람이 수없이 피냐타를 흔들고 지나가는 동안, 우리는 말없이 바닥과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며 서있었다. 







바스락, 바스락.


정적을 깬 건 또다시 차하나였다. 수백수천, 수억 번을 들었어도 여전히 역겨운 사탕 껍데기 소리. 


"우리 이거, 나눠먹자."


차하나는 여름날 바다처럼 청명하게 웃었다. 그래서 우리는 별말 없이 사탕을 나누어 먹었다. 입안에서 이상한 단맛이 굴러다녔다. 사탕이 아주 조그마해졌을 때 쯤, 차하나는 막대 네 개와 천 네 개를 가져왔다.


"피냐타는, 눈을 가리고 터트리는 거래. 꼭 우리 같지. 눈을 가리고 살아야만 그 속을 볼 수 있나 봐. 피냐타도, 우리처럼 저주에 걸렸어."


그 말에 권세모는 씨익 웃었다. 차두리는 천을 가져가 제 눈을 가렸다.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채로 막대를 들고 비틀비틀 섰다.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에 피식피식하는 소리를 냈다. 뭐가 웃긴지 권세모나 차두리도 다를 바 없이 웃고 있었다. 크크크 웃기다, 그치 얘들아. 얘들아···.


탁, 탁.


막대기가 피냐타를 때린다. 우리는 피냐타 주위에 몰려들어 피냐타를 때리기 시작했다. 아하하, 크크, 아 웃기다, 하하하, 푸하하, 하하하···. 이상한 웃음 소리가 여름 허공을 가득 메웠다. 시원한 바람이 쏴아아 불어왔다. 피냐타는 곧 퍽, 하는 소리를 내며 터졌다. 눈을 가린 천을 살짝 내리자 부서진 피냐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여름의 찬란한 생일파티. 네 타격 한 번에 사탕 내장을 쏟아내며 죽어가는 피냐타처럼, 나는 너에게 그런 존재였을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아무리 겉을 예쁘게 포장한 채 살아가도 저 피냐타처럼 속에 예쁜 사탕을 담을 수는 없었을까. 나는 문득 어쩔 수 없는 짜증과 분노를 느낀다. 부서지기 위해 만들어진 저 피냐타처럼, 우리의 목적지도 결국은 여기였을까.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채 속에 든 것만을 동경하며 햇살에 반짝이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


겉을 싼 포장지와 안을 채운 사탕이 모두 예쁘고 단 피냐타. 우리는 그걸 동경하며 바라왔는데. 우리에게 걸린 저주는 모든 사람의 속이 예쁘지 않음을, 사람의 모든 속이 달지 않음을 상기시켜줄 뿐이었지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을 부정해왔는데. 이게 이 이야기의 시작이자 결말이고, 전제이자 결론이다. 겉과 속이 예쁜 것은 결국 나도 너도 우리 모두도 아니고 그냥 이 피냐타뿐이라는 것.


사탕을 주르륵 쏟아내며 예쁘게 죽어가는 알록달록한 피냐타처럼, 우리들의 사랑은 존재부터가 틀려먹었다. 그래서 우리는···.


차하나는 막대를 땅에 던지듯 내려놓고 천을 휙 풀어냈다. 눈이 마주친 우리는 또 큭큭 웃어댔다. 날것의 우리들은 정말 웃기는 애들이었다.


"찾았어, 내 피냐타."









_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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