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경기였다. 모든 경기에 진심이기 때문에 힘들지 않은 경기는 없지만 오늘따라 이 천재를 견제하는 블로킹 때문에 녹초가 된 것 같았다. 이따 저녁에 호열이한테 양꼬치 먹으러 가자고 할까. 이런저런 잡생각으로 샤워를 마치고 샤워실에서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말리는 사이 같은 팀 매니저가 대뜸 불러 세운다. 


"오늘 애인 없는 사람들끼리 저녁 먹으러 가려는데 갈래?" 

"저요?" 


아직 뭐라 대답할 말을 고르지도 않았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다가와선 어깨를 잡는다. 일찍 벤치로 가는 바람에 오늘따라 힘이 남아도는 대만군. 같은 팀 선수가 됐지만 아직도 난 이 남자에 대한 호칭을 정리하지 못했고 주변에선 선배로 부르지 않는 것을 신기해하고 있다. 정작 대만군은 내 호칭에 적응해 버린 것 같은데 말이지. 


"백호 오늘 양호열하고 저녁약속 있을걸." 

"없는데?" 

"왜? 걔 바쁘데?" 

"몰라." 

"그런데 이런 날 저녁약속이 없어? 둘이 안 좋냐? 그렇게 서로 좋아 죽더라니. 몇 년 지나니까 좀 식나 보네." 

"뭔 소리야." 


머리를 털던 수건을 목에 두르고 내려다보는데 뭐가 맘에 들지 않는 건지 짝눈을 뜬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한마디를 더한다. 그러니까 지금까진 생각도 안 해 본 그런 말을.


"애인이랑 약속 있을 거 아냐. 이런 날." 

"애인?" 

"양호열 말이야." 

"뭐어??? 내가 호열이랑?" 

"아니었어?" 

"내가 왜! 우린 친구야!!" 

".... 그러냐?" 

"그럼! 몇 년을 이어 온 우정이라고!!" 

"그래?" 

"아무렴! 우리의 우정을 의심하다니! 한참 잘못짚었수!" 

"흠... 아닌데." 

"뭐가." 

"너는 모르겠고, 확실히 양호열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니까 뭐가!" 

"걔가 너 좋아한다고 말 안 해?"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어깨 위에 올려져 있던 손으로 내 등을 가볍게 치고 자신의 락커로 향한다. 


"너는 친구 경기 거의 다 예매해서 보러 가고, 전부 다 후기 남겨주고, 밤에 잘 자라고 이불 덮어주고 해 주냐? 으~ 징그러우니까 나한텐 하지 마라." 

"내가 대만군한테 그걸 왜 해!" 

"양호열이 너한텐 하잖아?" 

"우린 베프니까! 하! 대만군 소울 메이트가 없어서 모르는 모양인데, 우린 피를 나눈 형제거든!" 

"그러냐? 난 애인 하고만 하는데."


친구니까 경기를 보는 것도, 후기를 들려주는 것도 당연한 거 아니야? 같이 사니까 밤에 잘 때 이불 덮어주고 잘 자라고 할 수 있는 거잖아. 나는 이불을 잘 차고 자니까. 그러다 배앓이하면 안 된다고 호열이가 그랬는데. 춥게 자면 건강에 안 좋은 건 사실이잖아. 호열이는 그냥 나를 걱정하는 거야. 당연하잖아. 우린 친군데. 

우리 우정을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란 말이야. 


"야, 솔직히 말해. 너네가 보기에도 호열이가 나한테 이상하게 구는 거냐?"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 묻지 마.] 


팬들이 쥐어준 사탕 선물들을 한아름 안고 오랜 친구들에게 단체전화를 걸었다. 남들이 호열이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게 싫으니까. 너희가 증인이 되어달라는 의미로. 


"내가 농구를 하면서 손 힘이 더 세졌거든?" 

[그게 뭐.] 

"이걸로 맞으면 진짜 한방이라는 거야. 똑바로 얘기해라." 

[이상하게 구는 게 아니라...] 

[솔직하게 구는 거지.] 

"어떤 점이!!!" 

[이거 호열이가 말하지 말랬어.] 

[응. 이거 말하면 우리 호열이한테 죽어.] 

"말 안 하면 나한테 죽어!!" 

[아 미친놈.] 


분명 호열이의 결백함(?)을 입증하기 위한 시간이었는데 친구 놈들은 전혀 뜻밖의 소리를 했다.


[걔 너 좋아하잖아.] 

[좀 됐지. 언제더라.] 

[중3인가? 고1인가.] 

[야 이거 우리가 말했다고 하면 큰일 나. 우리 진짜 죽어. 알지?] 

[너도 그냥 못 들은 척 해. 걔 너랑 잘해볼 생각 같은 거 전혀 없어.] 

[아무렴. 너랑 소연이 이어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양호열. 정말이야? 

너, 그런데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백을 했는데. 너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고백하는데 그게 아무런 상관이 없어? 어째서?



… ❋ …



재킷을 벗어 옷장에 걸어두는 동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 집에 저렇게 아무런 신호도 없이 문을 따고 들어올 사람은 하나뿐이라 방문 밖으로 고개를 살짝 비추고 인사말을 전했다. 


"백호야, 왔어?" 

"응." 


양손으로 받쳐 든 선물로 가슴팍이 다 가려져 있는 것을 보고 그것들은 다 뭐냐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 정체가 너무 뻔해 물어볼 생각을 못했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놓치고 나서는 그 사탕들의 정체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탕 너무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 좋아." 


집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지도 않고 멀리 말을 던지고 있으니 식탁 위에 사탕더미를 내려놓고 나에게 뚜벅뚜벅 걸어와 생각지 못한 말을 뱉는다. 


"너는 왜 안 줘?" 


대뜸 뱉어낸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어 눈을 꿈뻑이며 바라보고 있으니 더플백 앞주머니를 열고 자기 손바닥으로 다 가려질만한 무엇인가를 꺼내 눈앞에 내밀었다. 츄파츕스. 하얀 막대기 위의 빨간 비닐포장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백호 특유의 뚱한 얼굴을 마주하고 다시 방긋 웃어 보였다.


"고마워." 

"그게 다 야?" 

"뭐가?"

"내 사탕은 없어?"

"아... 사탕 살 생각을 못했어." 


괜시리 머리를 긁적였다. 사탕 살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인데. 

집에 오는 길 편의점에라도 다녀온 걸까. 다행이다. 요란한 선물이 아니어서. 이 정도면 그냥 편의점에 물 사러 들어갔다가 계산대 앞에 사탕이 있으니 집어왔다는 느낌으로 주기에 좋지. 나도 그렇게 할걸. 왜 요란한 날에 요란한 선물이 아니면 의미 없다고 생각했을까. 그냥 너에게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나 봐. 운전할 때 먹는 목캔디라도 사 올걸 그랬지, 하하. 

손끝으로 츄파츕스 막대기를 빙글빙글 돌렸다. 빨간색. 딸기맛이겠지. 어쩌다 너는 사탕도 꼭 너 같은 걸 사 오냐. 


"별로냐?" 

"아니. 좋아. 고마워. 저녁은 먹었어?" 

"....." 

"... 왜?" 


꾹 다물린 입술이 삐쭉 튀어나온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한 번에 뱉지 못할 때 백호는 저런 표정을 지었다. 그럴 땐 언제나처럼 앞에 서서 손을 잡아당겨 가까운 의자에 앉혀두고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렇게 내 맞은편에 앉은 백호는 커다란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피길 반복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으며, 삐쭉 나온 입술을 몇 번이나 우물거렸고, 제대로 마르지 않은 젖은 머리를 두어 번 털어댔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다 들어줄 수 있으니 그냥 하면 되는데.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해도 난 들어줄 수 있는데. 그 사람에게 고백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해도 난 해줄 수 있어. 말해도 돼. 나한테 무엇이든 말해도 돼 백호야.


"사탕 안 좋아하냐?" 

"나?" 

"응." 

"... 아니, 안 좋아하진 않는데. 아, 저녁부터 먹자고 해서 그래? 사탕 먹으면 입 달아지잖아. 너도 선물 받은 거 먹어봐야 하니까 먼저 밥부터 먹으려고 했지." 

"호열아." 

"응. 말해." 


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정말 심각한 고민이 있는 것처럼. 네가 이러면 난 가끔 무서워. 


"내가 지금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하면 너 어떨 것 같아?" 


이런 말을 하고 난 다음의 너는 언제나 반짝였으니까.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누구? 요즘 그런 얘기 통 안 하더니. 예쁘냐?" 

"너 어떨 것 같냐고. 너." 

"내가 뭘 어때? 내가 도와줘야 하는 거야? 아, 설마. 너 혹시 어렸을 때처럼 학교 뒤로 불러내서 고백한다던가 하는 수법을 쓸 생각인 건 아니지? 일단 천천히 다가가는 게 중요해. 그 사람은 뭐 좋아해?" 

"내가 물어보는 건 대답 안 해주네." 


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며 시선을 피하고 언제나처럼 웃어 보였다.


"그게 뭐가 중요해. 네가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는데. 이야, 이게 얼마만이냐. 몇 년 만인 것 같은데?" 

"안 예뻐." 

".... 어?" 

"별로 안 예뻐 내 눈엔." 

"어... 그렇지. 얼굴 보고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아무래도 사람이 됨됨이가 중요한 법이야. 그 사람도 농구 좋아해?" 

"아니. 별로." 

"어... 아, 맞다. 너 귀여운 스타일 좋아했던 것 같은데. 어지간히 귀여운가 보네." 

"별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네가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아서 마음이 더 아팠다. 무엇을 사랑하는 너는 언제나 반짝였는데.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행복해했는데. 프로농구 선수로써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인 걸까. 농구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어떻게 알게 됐길래 이렇게 마음 아파하며 좋아하는 걸까. 내가 너에게 힘이 되면 좋겠다. 그 사람이 너를 좋아하면... 얼마나 좋을까. 너는 얼마나 반짝이며 나로부터 더 멀어질까. 


"그 사람이 날 오랫동안 좋아했대." 

"그래? 얼마나? 이번팀 들어갔을 때? 아니다, 농구 안 좋아한댔지. 그러면... 언제지? 대학교 때 우연히 봤나?" 


바닥으로 떨어져 있던 백호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나를 바로 마주한다. 


"근데 그 사람이 나랑 잘해볼 생각이 없어서 전혀 마음을 드러내질 않았대." 

"왜? 자신이 없었나? 너라면 웬만하면 받아줬을 것 같은데."

"그래?"

"응. 넌 좋아하는 감정에 항상 진심이잖아. 그러니까 누군가 좋아한다고 말하면 진심으로 대답해 줬을 것 같아." 

"내가 뭐라고 했을 것 같은데?" 

"글쎄..." 


얼마나 많이 떠올렸는지 모른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는 너를. 


"잘 모르던 사람이면 난 당신에 대해 잘 모르니 먼저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제안해 줄 것 같고, 잘 알던 사람이면...." 

"....." 

".... 좋아해 준 건 고맙지만, 미안하다고 했을 것 같아." 

"왜?" 

"말했잖아. 넌 언제나 무엇인가를 좋아하는데 진심이라고. 그래서, 아마 그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었으면 굳이 고백을 듣기 전에 먼저 좋아한다고 했을 거야. 근데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은 건 그 사람은 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내 결론은 그거였다. 나는 네 눈에 차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말 안 했냐?" 

"뭘?" 

"내가 너한테 좋아해 준 건 고맙지만, 미안하다고 할까 봐 말 안 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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