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사고 쳤다…!'

 

유영이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절규했다.

 

띵하게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리며 미적미적 일어나 보니 속옷 바람으로 승진과 뒤엉켜있었다. 팬티 하나를 제외라고는 온통 맨살이라 당황스러웠다. 승진과 오랜 시간을 함께했어도 승진의 맨살을 보는 건 아주아주 드문 일이기에 유영은 왜 제가 승진과 거의 나체로 엉켜있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끔뻑이며 생각해도 어젯밤 뭘 어쨌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몰라도 진승진은 왜 옷을 벗고 있어?’

 

당황한 유영이 사방팔방으로 뻗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새카만 기억 속을 헤매었다.

 

‘제발…. 아니지? 내가 승진이랑…?’

 

그러나 유영의 기대를 처참하게 깨부수려는 듯 흐릿하게 떠오른 음성이 유영의 손에 더욱 힘을 주게 했다.

 

‘유영아, 그만!’

‘아, 안돼, 제발!’

‘흐읏….’

 

승진의 표정이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흔들리는 시야와 야릇하고 다급한 음성이 어둠을 뚫고 떠올랐다.

 

이게 진짜 사고였다.

 

전에 한 뽀뽀니 뭐니는 사고 축에도 못 꼈다. 술에 취해 승진과 잔 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말이 없었다.


‘와, 씨발. 좆됐다. 어떡해? 나 어떡하지?’

 

유영 홀로 혼란의 파도 속을 헤엄치고 있으니 그 기척을 느꼈는지 승진이 일어났다.

 

“이, 일어났어?”

 

승진은 기억하고 있을 어젯밤에 대해 뭐라,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유영은 저와 마찬가지로 잠이 덜 깨어 흐느적거리는 승진을 바라보았다. 승진은 유영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유영은 승진에게 온 신경이 몰려있어 승진의 손을 따라 저도 시선을 옮겼고, 그 바람에 승진의 목덜미에 확실하게 남은 어떤 자국을 발견하고 말았다.

 

“내가, 내가 책임질게!”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말부터 튀어 나갔다.

 

“뭘 책임져?”

 

승진이 되묻자 유영이 팬티 바람으로 주섬주섬 무릎을 꿇었다.

 

“어제…. 그런 거…. 내가 책임질게!”

 

제 입으로 주절대면서 제 입에서 무슨 말을 내뱉어내고 있는지 몰랐다.

 

“사, 사귀자!”

“뭐?”

“내가…. 내가 네… 그…. 처, 첫 경험 상대니까….”

 

기억나지 않아도 같이 하룻밤을 보낸 사이인데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빠이빠이 할 수 없었다. 유영의 쓸데없는 책임감이 발목을 잡았다.

 

“아아…. 그래?”

 

어젯밤 일을 떠올린 듯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유영은 한층 더 입이 말랐다. 술에 취해 무슨 짓을 해도 변함없던 승진이라 유영의 속이 조금 더 바삭하게 타들어 갔다.

 

“내가 잘할게!”

 

매번 차이기만 했던 유영은 뭘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잘한다며 자신 있게 큰소리를 쳤다. 아직도 빙글빙글 도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내뱉고 나니 마음이 한결 진정됐다.

 

그런데 승진과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

 

“또…! 또, 차였어! 흐어엉!”

말을 마친 유영의 퉁퉁 부은 붉은 눈에서 연신 닭똥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졌다.

 

“이번엔… 이번엔…. 바, 바람났어…. 흐윽!”

 

진유영 25세, 연애 운 제로에 수렴하는 남자.

 

첫눈에 반하면 고백하기까지 정확히 한 달, 그리고 차이기까지 빠르면 일주일, 아주 길면 한 달. 그리고 이별 후 진승진에게 징징거리고 회복하기까지 한 달,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반복.

 

유영이 성인이 되고 나서 사귄 6번째 여자친구는 3주를 채우고 이별을 고했다. 사유마저 가지가지였지만 이번에는 전보다 눈물 뺄만한 내용이었다. 여자친구가 바람이 나서 헤어졌단다.

 

그것도 여자친구의 오랜 여자친구랑.

 

“승진아 내가…. 내가 이번엔 뭘 잘못한 걸까…?”

 

부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유영이 앞에 앉은 승진에게 하소연했다.

 

“친구랑 만난다길래 알았다고 했는데…. 그 친구랑 바람이 날 줄은 어떻게 알겠냐고!”

 

확실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유였다.

 

“유영이 네가 잘못한 건 없지.”

“그럼 지금 은영이가 잘못했다는 거야?”

 

유영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전 여자친구를 두둔했다. 바람나서 차였으면서.

 

“아, 아니…!”

 

유영에게 약한 승진이 재빨리 부정했고, 그제야 마음이 좀 누그러들었는지 씩씩대던 유영이 테이블에 뺨을 대고 엎어졌다.

 

“난 왜 이러냐 매번….”

 

한탄하는 유영의 뺨에 또 눈물이 한 방울 주룩 흘러내렸다.

 

승진은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이럴 땐 그냥 눈물을 닦아주며 조용히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걸 보는 건 여러 번을 봐도 괴로웠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울며 하소연하는 건 또 싫어 매번 진상을 받아줬더니 이제는 온전히 승진의 차지가 되었다.

 

“그래도…. 시험 끝나고 헤어지자고 해서, 흐윽… 다행이다….”

 

와중에 또 성적은 걱정이 됐었나 보다.

 

“이렇게 나 배려해 준 걸 보면 은영이가 나쁜 애는 아냐, 그치…?”

 

속없는 유영이 또 두둔하고 앉아있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제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시원하게 원샷.

 

“은영이가 행복하면 된 거지 뭐…. 크으!”

 

헤어진 그의 행복을 빌어주며 두 잔.

 

“근데….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다는데 우정이 사랑으로 변하는 게 가능한 거야?”

 

그 이야기의 장본인을 앞에 두고 다른 사람을 예로 들고 있었다.

 

승진은 처음부터 사랑이었지만.

 

“그것도… 동성인데….”

 

유영이 목소리를 죽이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 꼭 동성이라고 불가능하진 않지.”

 

승진은 저도 모르게 두둔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저도 모르게 감정이 이입되었는지 오히려 은영이라는 얼굴 모를 사람이 부럽기까지 했다.

 

“그래. 하긴, 요즘 세상에 성별 좀 같으면 뭐 어때. 그래도 앞으로 힘들까 봐 걱정된다.”

 

천상 헤테로인 진유영은 당장 코앞의 짝사랑 상대도 못 알아보면서 허허실실 바람나 헤어진 사람 걱정이나 했다.

 

눈물이 그칠까 싶으면 다시 헤어진 상대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술 한 잔, 그치면 헤어진 사람의 앞날을 걱정하며 한 잔, 한 잔 두 잔 마신 술이 한 병, 두 병으로 늘어나고 늘어난 술이 유영의 몸에 쌓여 유영은 눈이 돌아버렸다.

 

“승지나… 승지나…. 이짜너어….”

“똑바로 걸을 수 있어?”

“아니, 나 걸어…. 야, 승지나.”

“후우….”

 

승진은 한숨을 쉬며 익숙하게 유영을 부축했다.

 

“승지나… 이짜나아…. 나 궁금한 거 있어.”

“뭐, 뭐가 궁금한데.”

 

앞으로 고꾸라지는 유영의 몸을 받아 일으키며 승진이 대꾸했다.

 

“근데 나 너랑 뽀뽀 함… 해봐도 되냐?”

“뭐?”

 

뜬금없는 소리에 유영을 부축하고도 잘 걷던 승진이 우뚝 멈춰 섰다.

 

“아이…. 그, 생가케보니까아. 좀, 궁금하더라고…?”

“뭐가… 궁금한데.”

 

입맛을 다시며 눈을 반짝이는 유영에 승진의 심장이 쿵쾅쿵쾅 거세게 온몸을 울렸다.

 

“내가, 남자자너? 근데 너도, 남자! 가튼 남자끼리 뽀뽀해본 적이… 업쓰니까아….”

“그래서.”

“함… 해볼래?”

“뭐? 뭐, 뭐를….”

 

승진은 갑자기 뽀뽀를 요구하는 유영이 당황스러웠다. 애지중지 부축하던 어깨마저 놓치고 더듬더듬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유영은 비틀거리면서도 정확하게 승진을 향해 다가왔다.

 

“왜? 응? 안돼…?”

 

어느새 코앞까지 벌게진 얼굴을 들이밀며 유영이 물었다.

 

“하…. 너, 정말….”

 

승진은 순수하고 말간 눈으로 올려다보는 유영을 난처하게 내려다봤다.

 

술에 취한 유영은 종종 이렇게 엉뚱한 것에 꽂힐 때가 많았다. 이번엔 그 대상이 동성과의 뽀뽀였다. 승진은 뽀뽀하고 싶다는 유영의 제안을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주정이 분명하기에 이걸 어쩌나 고민하는 사이, 어이없게도 유영은 승진에게 다가와 어깨에 이마를 박으며 “안 되냐?”를 연신 중얼거리다가 힘이 풀린 그대로 승진의 품에 쓰러졌다.

 

승진은 제게 기대어 잠든 유영을 보며 왜인지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모른 척 한번 한다고 할 걸 그랬나. 유영은 승진의 마음을 모르기에 호기심에 조른다지만 승진은 다른 음흉한 속마음이 섞여 있어 쉽게 허락하지 못했다. 남자와 남자라는 이유는 제쳐두고 상대가 유영이기에 쉽게 “그래.”라고 할 수 없었다.

 

승진은 눈을 감을 유영을 보며 한숨을 푹 쉬다가 촉촉하고 빨간 입술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유영이는 모를 텐데.’

 

안 해본 것도 아니면서. 승진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유영을 들어 안았다.

 

그러나 번뇌에 빠졌던 승진이 무색하게 유영의 뽀뽀 타령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되었다.

 

문제는 꼭 술만 마시면 승진을 붙들고 뽀뽀 타령을 한다는 거였다. 승진은 술 취한 유영의 뽀뽀를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한가지 다행인 건 꼭 잠들기 직전에 뽀뽀 타령을 시작해 유영을 막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승진의 심장은 매일 터질 듯이 날뛰며 왕성한 활동을 자랑했다.

 

 

*

 

 

어느덧 유영이 차인 지 삼 주차에 접어들었고 실연의 상처와 함께 유영의 지갑이 가벼워지며 이별의 아픔을 거의 극복했을 즈음이었다.

 

승진과 유영 둘만 남게 된 술자리에서 고주망태가 된 유영의 진상을 받아주던 숱한 날 중 하루, 여전히 다른 날과 다름없이 뽀뽀 타령이 시작되어 ‘이제 잠들 시간이구나.’ 하고 안심하고 있을 때였다.

 

열두 시 십 분 전이니 시간도 그다지 늦지 않았고, 유영의 자취방도 코앞이라 유영을 눕혀 놓은 뒤 귀가할 생각으로 유영의 진상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야. 진승지인! 너 이거또 안 해 주면…. 너, 넌 부랄… 부랄 친구도 아이다아!”

“뭐, 뭐가 또.”

“친구도 아니야. 너는…. 아니라고오….”

 

연신 아니라고 중얼거리며 스르르 눈이 감기는 걸 보니 드디어 잠들겠구나 하고 안심이 되었다. 승진은 매번 하는 뒤치다꺼리가 점점 힘겨워졌다. 유영이 자꾸 승진에게 안겨 오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진해지는 스킨십이 때문이었다.

 

승진은 익숙하게 유영의 자취방 문을 열고, 중얼거리는 유영을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혔다. 중얼거리는 소리도 멎고 미동도 없는 게 완전히 잠이 든 것 같았다.

 

잠든 모습은 꼭 천사나 다름없는데 승진의 마음도 모르고 괴롭히는 건 악마가 따로 없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든 유영을 바라보는 건 승진의 낙이기도 했고 유영의 진상을 받아 준 보답이기도 했다.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잠든 유영의 몸을 살짝 들어 두꺼운 외투를 벗겼다. 옷까지 갈아입혀 주는 건 아무래도 좀 너무 간 것 같아 다시 눕혀주려는데, 승진의 손길에 잠이 깬 유영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승진을 지그시 보다가 씨익 웃었다.

 

“진승진.”

 

능글맞고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이었다. 승진은 영문도 모르고 유영이 웃으니 마주 웃어주었다. 유영은 제대로 뜨지 못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팔을 들어 승진의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승진의 입술로 돌격했다.

 

“읍!”

 

예고 없이 맞부딪친 입술은 로맨틱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힘 조절을 하지 못하고 너무 세게 박은 탓에 이게 뽀뽀인지 박치기인지 모를 아찔한 충격부터 느껴졌다. 승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부터 감았다.

 

얼얼한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눈을 뜨고 유영의 입술이 터진 건 아닌지 살피는데, 유영은 자기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다시 씩 웃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이게, 이게 뭐지? 닿긴 닿았는데.’

 




크리스마스가 되면 생각나는 크엑! 

아주 예전에 썼던 작품인데요.

새로 다듬어 1화만 공개합니다.

재연재는 아마도... 내년 크리스마스쯤이 아닐까요?

이 글을 읽으신 독자님들께서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승진이와 유영이를 한번 떠올려주시길 바랍니다. 😄


BL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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