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침, 럭셔리 호텔, 쾌적한 객실, 따뜻한 커피. “이 기사 봤어요?” 그리고 아름다운 파트너. 정정하자면 그녀는 솔로만의 파트너는 아니었다. 모처럼 찾아온 훌륭한 휴일을 혼자서 보낼 수 없다니 끔찍했다. 고급 찻잔에 담긴 커피향이 그나마 위로가 되어 주었다. “무슨 기사?” 어김없이 미학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차림새로—그는 너무 스파이 같았다— 부루퉁하게 앉아 있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는 평소에는 무뚝뚝해도 개비가 말할 때면 귀를 기울였다. 어떤 여자가—브루클린에 사는 여자래요— 27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지병 때문이라네요. 부모님께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이 있었대요.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가 성인이 되고 얼마 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군요. 결혼을 약속한 사람도 없었다는 모양이에요. 얼마 전에 연인과 헤어졌고요. 유산 때문에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이 많았나 봐요. 유언장이 공개되었는데 자기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개한테 모든 것을 남겼다고 해요. 설탕이 좀더 필요할 것 같았다. 솔로는 티스푼을 휘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감동적이군.” 예쁘게 다듬은 개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녀가 들고 있던 신문들은 곧 소파 위에 흩어졌다. “누가 그 개를 데려갈진 모르겠지만 백만장자가 될 거예요. 까다로운 조건들을 붙였다고 하는데, 그것까지 나와 있진 않네요.” 솔로는 당도를 확인하기 위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고, 실내에서도 모자를 쓰고 있는 칙칙한 사내는 이 화제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당신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봐요.” 개비의 말에 그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꼭 그런 건 아니야.” 솔로는 이 만담이 얼마나 지속될지 가늠해 보았다. 커피는 솔로의 혀가 기뻐할 만큼 적당히 달았다.


“그럼 좋아하나요? 어떤 개가 좋아요?”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키워 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겠군요?”

“그렇지 않아. 키운 적은 있었지. 아주 어렸을 때.”


의외의 발언이었다. 그녀가 솔로를 돌아보았고, 무언의 공감이 오갔다. 그는 미묘해진 분위기를 눈치채고 황급히 변명했다. “이젠 잘 기억나지도 않아.” 저 친구 아직 미스 텔러의 집요함을 모르는 모양인데. 솔로는 웃음을 삼키고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이름도 기억 안 나요? 이름이 있었을 텐데.” 그가 눈빛으로 솔로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체념한 듯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나디아. 내가 붙인 이름은 아니야.” 이런. 솔로는 그가 정말로 이 화제를 피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하게 커피 한 잔을 더 타서 개비에게 내밀자 그녀는 기꺼이 솔로의 작은 친절을 받아주었다. 오후가 되면 다시 눈이 올 것 같은 날씨였다. 개비는 호텔 레스토랑에 신물이 났다는 이유로 외식을 결정했다. 오지랖 넓은 러시아인이 동행하려 했지만 그녀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밤새 내린 눈 덕분에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경관조차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들은 사소한 임무 때문에 엿새 전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운 좋게도 솔로의 심미적 취향에 딱 들어맞는 장소였다. 상사가 보고를 위해 이틀째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으니 좋게 말하자면 무기한 대기 상태, 대놓고 말하자면 할 일이 없는 상태였다.


아버지가 붙인 이름이겠군. 그가 솔로를 돌아보았다. 내심 갈증이 일었던지 커피포트에 막 손을 대려는 찰나였다. 그깟 커피 한 잔쯤 솔로가 타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솔로는, 그에 한해서만큼은, 부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자네 개 말이야. 자네가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그는 말없이 서 있었다. 뭘 하기 위해 커피포트 앞에 다가갔는지 망각한 사람 같았다. “아니, 어머니였다.” 솔로는 그의 눈을 가리고 있는 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가지 않겠냐고 묻자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는 정말로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 * *



솔로와 그는 가벼운 산책을 핑계로 비적비적 걸었다. 구두 아래 숨겨진 발이 착실히 얼어가고 있었다. 두툼한 코트는 그의 체격을 좀더 부풀려 놓았다. 이른 아침이 아닌데도 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계절 탓인지도 모르고 원래 인적이 드문 장소여서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말이 없었다. 솔로도 마찬가지였다.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지만 너무 구차한 것이라 무시하고 싶었다. 솔로는 결국 작은 다리 위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 걸음 앞서던 그가 덩달아 멈추고 솔로를 돌아보았다. “먼저 들어가게.” 솔로는 굳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 얼굴 근육을 당겨 미소지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솔로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잠깐 들를 데가 있네. 혼자 가고 싶군.”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계속 걷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조금 생각하다가 개비를 찾으러 가겠다고 했다. 어차피 그들은 모두 저녁에 호텔에서 다시 만나게 될 터였다. 솔로는 자신을 등지고 걷는 그가 저만치 사라질 때까지 다리 위에 있었다.


그는 소금으로 만들어진 기둥 같은 남자다. 덩어리진 채로는 단단하지만 쉽게 부서지고, 한번 핥아 보면 짠맛이 난다. 온몸에 눈물을 응고해 놓고선 두 눈으로 녹여 흘리는 법이 없다. 추운 나라에서 오래도록 살아서인지 세상을 대하는 방식 역시 차갑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안착한 사상은 점멸하는 태양처럼 붉었다. 정작 살면서 붉은 태양을 본 적은 몇 번 없을 것이라고 솔로는 짐작했다. 그 자신이 단단한 지반 속에 억지로 용암을 가둬 둔 휴화산처럼 뜨거운 남자라, 다른 발화체가 필요할 리 없었다. 사상은 그를 무너뜨렸고 다시 기워냈지만 결코 그의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조물주가 그를 투박한 억양과 잔인한 검열 사이에 내던져 버렸기 때문에 그는 억지로 스스로를 식혀야 했다. 솔로의 발밑에 얼어붙은 강물처럼 불투명하고 균열투성이였지만 어쨌든 그는 성공했다. 적응에 실패하고 도태되기 딱 좋은 조건이었는데도 그는 살아남았다. 노력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애매한 사투와 몸부림, 개인적인 비극, 선천적 신체 능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그의 정신까지 매만져 주지는 못했다. 그는 종종 미처 다 식히지 못한 열을 마구잡이로 분출했고, 현대의학이 그 행위에 분노 조절 장애라는 손쉬운 학명을 붙여 주었다. 솔로는 그 지병의 말로가 결국 파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직업 선택은 결코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그는 스파이보다 유도에 재능이 있었고, 스파이보다 모터보트 선수가 더 잘 어울렸고, 스파이치고 체스를 지나치게 잘 뒀다. 그의 인생에 조금만 더 숨쉴 틈이 있었다면 그래서 조금만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솔로는 그를 영영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KGB의 최고 요원이었다. 이 사실은 가끔씩 솔로를 놀라게 했다. 그의 허술한 면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 수식어 말고도 다른 많은 기술구를 만족시키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 때마다 그랬다. 그는 로맨틱한 연인, 자상한 남편, 빛나는 스타가 될 수도 있었다. 솔로가 가져 보지는 못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가질 일이 없을 그런 가능성이었다. 그에게는 아주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그가 주입받은 사상이, 그가 태어난 끝없는 눈과 얼음의 땅이 그를 난도질하고 붙잡았기에 지금의 위치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그 궤도에서 잠깐 벗어나 솔로의 곁에 머무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잠깐. 일시적으로. 솔로는 억지로 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 좋은 암스테르담의 풍경을 뒤로 하고 멍청한 남자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기껏 혼자가 되었는데 이래서야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솔로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대신, 오늘 하루종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눈동자를 기억하는 대신 다른 것들에 집중하려 애썼다. 다행히 문을 연 서점이 나타났다. 솔로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듯했다. 하지만 솔로가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난롯가에 앉은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솔로는 몇 시간 전 개비가 꺼냈던 화제를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키우던 개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그 개를 좋아했을까? 한때는 좋아했지만 머리가 크고 나서는 개에게 정을 주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을까? 정말로 기억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그의 삶을 잠깐 스쳐간 그 개처럼 솔로 역시 언젠가는 그에게 추억거리조차 되지 않는 날이 올까? 솔로는 비참하게도 마지막 질문을 긍정했다. 과거는 퇴색되기 마련이었고, 까마득한 세월이 지나면 명예와 영광만이 남았다. 그는 자신이 KGB의 최고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한 영국인이 억지스럽게 만든 오합지졸 스파이 연합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너무도 하찮아서, 어쩌면 숨기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서점의 개는 순진한 표정으로 솔로의 주변을 알짱거렸다. 솔로는 개의 머리를 두어 차례 쓰다듬어 주고 아담한 서재를 둘러보았다.



* * *



그는 방에서 혼자 체스를 두고 있었다.

솔로는 한기를 머금은 코트를 벗어 행거에 걸어 두었다. 실내에 들어서자 그래도 몸이 좀 녹는 것 같았다. 발끝이 얼어 약간 아릴 지경이었는데,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늦었군.” 그가 솔로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검은 말이 움직였다. “그렇게 됐네. 좋은 하루 보냈나?” 솔로가 넥타이에 이어 베스트 단추까지 풀려던 찰나, 그의 의자가 끌리는 소음이 났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음걸이는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았다. “페릴?” 솔로는 가능한 한 상냥하게 그를 불러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이제 모자를 쓰고 있지 않았다. 솔로가 사랑하는 두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일리야.” 그는 솔로의 눈앞에 어색한 자세로 서 있었고, 솔로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차가울 법도 한데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그제야 그의 크고 따뜻한 손이 솔로의 손등 위로 올라왔다. 그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솔로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의 눈은 솔로를 질책하고 있었다. “네겐 이런 게—— 쉬운 일이겠지.” 겨우 토해낸 그의 한 마디는 솔로가 이해할 수 없는 푸념이었다. 쉽다니. 적어도 그에게 관련된 일이라면 한 번도 쉬웠던 적이 없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그는 여전히 솔로의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날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어.” 근거 없는 비난이었다. 솔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오해가 있었나 본데, 일리야. 난…….”

“명확하게 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난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

“어떻게 하고 싶냐니, 변하는 건 없어. 우린 당분간 으르렁댈 필요 없이 좋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네.”

“동료로서 하는 말인가?”

“맞네. 하지만 아니기도 해. 자네는 어떨지 모르겠네만, 난 보통 동료와 잠자리를 함께 하진 않네.”

“…….”

“자네가 신경쓰고 있었다는 건 유감이네. 딱 한 번이었으니까, 일리야. 그냥 실수라고 생각해도 좋아. 내 말은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책임을 떠맡기지 않아도 좋다는 말일세.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 우리가 대화를 하지 못했다는 건 인정하겠네. 그 일이 있은 후로 우린 바빴고, 이런저런 임무들에 시달려야 했으니까.”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군. 난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었다, 카우보이.”

“난 지금까지처럼 자네와 잘 지내고 싶네. 그것뿐이야.”

“어째서지?”

“그게 가장 타당한 결론일 테니까. 말했잖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자네는 소련으로 돌아갈 테고 나는 미국으로 돌아갈 테지. 그러니 우리도 변하지 말아야 하네.”


그가 입을 다물었다. 솔로는 어쩐지 착잡해지고 말았다. 그는 천천히 체스판 앞으로 되돌아갔다. 이마를 짚고 앉은 그의 뒷모습이 솔로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사실은 이런 감정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그가 지나치게 감상적일 뿐인데도, 솔로는 자꾸만 침잠하고 있었다. 베스트를 벗고 목 끝까지 채운 셔츠 단추도 풀어냈지만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해야 할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 난 걸까? 솔로가 샤워가운을 가지러 방에 들어갈 때까지 그는 내내 침묵했다.



* * *



술도 약도 없었다. 환각이나 알코올 핑계를 댈 수 있었다면 상황이 좀더 나아졌을 것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만취해 있었다면, 약에 절어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면, 솔로는 이 역할에 적합한 인물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무튼 그는 주정뱅이나 약쟁이가 될 타입은 아니었다. 이스탄불은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솔로가 사랑하는 수많은 장소들이 그랬다. 뉴욕이든 파리든 런던이든, 언제나 도시였다. 군중 속에 손쉽게 숨어들 수 있고 다른 이름 다른 신분으로 당당히 걸어다닐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좋았다. 솔로와 같은 부류들은 부자와 빈자 그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고 멋대로 경계를 휘젓고 다녔다. 약삭빠르고 머리가 좋은, 그조차 아니면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들만이 이 특권을 쥘 수 있었다. 하지만 권리에는 항상 의무가 따라붙는 법이다. 환희에 너무 도취되지도 말아야 했고, 비참함에 너무 익숙해지지도 말아야 하며, 코카인과 사랑의 본질이 환상임을 알고 있어야 했다. 적당한 거리.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도피처. 모든 관계에는 이런 섬세한 계산이 선행했다. 이스탄불에 도착하기 전 솔로는 새 동료와 우정 비스무리한 것을 쌓아 가고 있었다. 이 낭만적인 단어에는 그림자처럼 신뢰가 달라붙었다. 모든 믿음을 무시할 필요는 없었다. 샌더스를 믿지 않았더라면 솔로는 여전히 더러운 감옥 바닥을 핥고 있었을 것이다. 동업자로서, 동료로서, 일정한 수준의 신뢰는 항상 필요했다. 물론 CIA는 날이 갈수록 신경질적인 조직이 되고 있었다. 솔로의 주변에 맴돌던 몇몇 최고 요원들이 두더지라는 누명을 썼고, 개중 몇몇은 정말로 축출되었다. 감히 누구도 그 판단이 틀렸을 거라는 지적을 하지 못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면 이 난잡한 조직은 도대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믿어선 안 된다고 말하면서 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것일까? 솔로의 작은 탈선은 이런 모순에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고작 몇 년을 몸담고 있었다고, 이 조직에 신물이 나고 말았다. 샌더스가 약속을 지킨다는 가정 하에 빚진 날들을 다 채우고 나면 솔로는 영영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릴 작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잠깐 샌더스의 잔소리에서 벗어나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홀가분했다. 알렉산더 웨이벌리는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남자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소수의 인원으로 나름 자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세계 여기저기를 쏘다닐 수 있다는-물론 누군가를 죽이거나, 구하거나, 자잘한 업무를 겸해야 했지만- 조건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정신병에 시달리는 KGB요원 하나가 있다는 사실은,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게다가 로마에서 빚을 진 이후 솔로는 그가 제법 괜찮은 남자라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고문실의 작은 창문 너머로 보인 그가 솔로의 예상보다 훨씬 반가웠기 때문이었다.


그 빌어먹을 고문실. 빌어먹을 빈치구에라.

솔로는 아름다운 것들에 한없이 관대했다. 하지만 미는 때로 사람들을 눈멀게 했고 또 병들게 했다. 아름답다고 모든 것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그녀와 보낸 밤은, 굳이 따지자면 아주 훌륭한 편에 속했지만, 최후의 만찬이 되고 말았다. 이스탄불에서 솔로는 함께 잠들었던 파트너를 거의 죽일 뻔했다. 끔찍한 악몽 탓이었다고 변명하기에는 사태가 심각했다. 그녀는 경찰을 부르려 했고, 이 일이 기적적으로 잘 풀리지 않았다면 임무에 지장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그 이후로 솔로는 자신의 침대에 타인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꿈 속에 빅토리아 빈치구에라가 나타나 솔로의 목을 졸랐다. 솔로와 솔로의 가족을 모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겠다던 협박은 그녀의 죽음과 함께 영영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 된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착실히 제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그녀가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솔로 하나뿐이라 다행이었다. 그녀와 마지막 통신을 할 때는 시간이 촉박한 나머지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솔로는 가족이 없었다. 이 직업군에서 일하기에는 괜찮은 조건이었다.


문제는 호텔을 옮긴 다음에 찾아들었다. 타겟의 거처 근처에 있는 호텔이었고 빈말로라도 그다지 깨끗하지는 않았다. 여러 사정들을 종합한 끝에 솔로는 그와 한 방을 써야만 했다. 최적의 위치였다. 타겟이 머무르고 있는 집 창문이 내다보였고, 그가 건물에서 나와 이동할 때도 경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밤을 지새며 감시하고, 보고하고, 결국 타겟을 붙잡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30시간 정도 수면을 취하지 못했지만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상사의 대기 명령이 떨어진 후 그는 개비와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갔고 솔로는 먼저 방으로 돌아왔다. 처음에야 형편없다고 불평했던 침대였지만 수마 앞에서는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온몸에 피로가 쌓였기 때문에 분명 꿈을 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때처럼 묶여 있는 것 같았다. 팔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시야를 교란시키는 전등이 눈앞에서 일렁였다. 끔찍한 감각이었지만 한두 번으로는 결코 죽지 않을 강도였다. 루디는 솔로를 섬세한 박제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의 작업—고문—은 결과만큼이나 과정이 중요했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겠지. 어차피 들어 줄 생각도 없으면서 악취미도 그런 악취미가 없었다. 다음 순간에는 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솔로를 한계치로 몰고 갔다. 솔로는 어떻게든 호흡하기 위해 애썼다. 조금이라도 움직이기 위해서, 어쩌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자 정말로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의자가 부서질 정도로 세게, 이 정도면 쓰러져 버리겠는데, 루디가 당황하고 있군———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장면. 조용히 하라고 입가에 손을 올리고 있는 창문 너머의 저 남자.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거짓말처럼 시야가 명확해졌다. 솔로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카우보이.” 그때는 거리가 이렇게 가깝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는 솔로의 눈앞에 있었다. 모자도 없었고 자켓도 없었다. 솔로는 숨을 몰아쉬며 그의 팔을 잡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이스탄불의 야경이 보였다. 그는 당황한 것 같았다.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솔로는 여전히 약간 떨고 있었다. “이봐, 괜찮…….” 더 들어 줄 여유가 없었다. 솔로는 여전히 잡고 있는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침대 위로 쓰러진 거구 탓에 낡은 매트가 삐걱거렸다. 그는 몇 번이나 솔로를 말리려 했고, 몇 번이나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솔로는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엉망일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체온은 추운 나라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 * *



우습게도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았다. 그보다 더 복잡한 문제가 솔로의 무의식을 채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새벽에 호텔 내선으로 상사의 호출이 날아들었고, 그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짐을 꾸려야 했다. 솔로가 아주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는 이미 방에 없었다. 아마 그도 솔로의 얼굴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른 아침에 상사가 말한 장소에서 다시 마주쳤고, 솔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웃었다. 바쁜 일정이 이어졌다. 엉클은 런던과 부다페스트를 거쳐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그가 혼자 두던 체스는 흰 말이 승리한 것 같았다. 그는 아까와 다름없는 차림으로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 감기에 걸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솔로는 스카치 한 잔을 들고 발코니로 향했다. 기껏 따뜻하게 몸을 녹인 직후라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으나 장시간 욕조에 있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제만큼은 아니어도 약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한 잔 하겠나?” 그는 잠깐 솔로와 잔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그는 긍정이라는 말을 모르는 남자 같았다. 어떤 도시든 밤이 되면 진짜 가치가 드러나곤 했다. 솔로는 멍하니 가느다란 불빛들을 살폈다. “나디아.” 한참 후에 그가 침묵을 깨고 나지막히 속삭였다. “애초에 건강에 문제가 있던 떠돌이 개였다. 그래서 의사도 오래 살지 못할 거라 했지. 어머니는 그래도 녀석이 건강하게 오랫동안 함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이름을 주었다. 하지만 결국 금방 죽었어.” 시시한 이야기였다. 솔로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한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어.”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잔 위로 흰 결정이 떨어졌다. 그는 말없이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슬슬 몸이 차가워지고 있었지만, 솔로는 멋대로 뛰는 심장이 진정될 때까지 발코니에 머물러야 했다.







주제가 ‘1’이었는데 저는 단순한 사람이라 하나.... 혼자..... 나홀로..... 이런 식의 발상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고(개비), 혼자 있고 싶지는 않은데 혼자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혼자가 될 때도 있고(솔로), 혼자 있고 싶지 않은데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혼자 남겨질 때도 있다는(일리야) 걸 표현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된 것 같네요ㅋ ㅋ ㅋㅋㅋ.... 다시 읽어 보니 그냥 별 내용 없는 삽질이네요. 일리야나 솔로나 함께 있고 싶은데 솔로는 이게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될 것 같으니까 마음을 접으려 하고, 일리야는 솔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알고는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었겠지요.... 맞는 말이니까..... 함께 있겠다는 의지가 쌍방향이어야 하는데 이미 솔로가 포기해 버렸으니 일리야 혼자서 뭘 해 봐야 소용이 없을 거고요. 나디아라는 이름이 러시아어로 희망을 뜻한다고 예전에 어디서 주워들은 것 같은데 검색해 보니까 나디야라는 말도 있고.... 거기서 거기려니 그냥 나디아라고 썼습니다. 아무튼 얘네 관계에 아주 약간의 희망은 보이면 좋겠다는 제 사심을 담았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드리고 주최해 주신 떡님께 제 사랑을 전합니다. ㅠㅠ S2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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