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st, dust, dust!! (上) - http://posty.pe/16qfc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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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는 크기에 따라서 초미세먼지와 미세먼지로 구분한다. 초미세먼지는 그 크기가 2.5㎛ 이하로 이를 PM2.5라 지칭하며, 미세먼지는 그 크기가 10㎛보다 작은 것으로 PM10이라 지칭한다. 둘 모두 미세먼지를 칭하는 말이지만, 전자가 인체에 더 유해하다. 사람에게 흡입된 미세먼지 중 상대적으로 입자의 크기가 작은 PM2.5는 기관지를 통하여 폐에 도달한 뒤, 인접한 혈관으로 침투하여 전신으로 퍼지기 때문이다.

질투나 원망 같이 커다랗고 불편한 감정들은 오히려 알기 쉽다. 처음엔 인식하지 못했더라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나 유독 따가운 목 상태를 기준으로 오늘의 감정에 낀 미세먼지의 농도를 가늠할 수 있다. 마스크를 써서 표정을 가린다. 억지로 걸러내는 것으로 흘러들어오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잘라낸다. 비록 그것이 착각이나 방치에 불과하더라도, 따라가는 시선을 따라오는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본다.

그러나 자기혐오는? 자책과 죄악감은? 천성적으로 온갖 것에 신경쓰는 예민한 사람만이 겪는 일이 아니다. 평생을 무감각하고 행동 위주로만 살아온 이들마저도 때때로 멈춰서서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게 된다. 언뜻 멀쩡하다. 그러나 의식하지도 못하는 새에 삼키고 삼키고 또 삼켜서 속에서부터 썩어버린 무언가. 혈관으로 침투하여 전신에 퍼지는, 모래알같이 까슬거리는 감정들. 목구멍이 턱 막히고 심장이 불길하게 두근거리고 아픔이 뇌에 파고들고서야 알아차린다.

집을 나서기 전 그는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주말 동안 꼬박 앓았고 꼬박 고민한 끝에 결론이 났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지긋지긋하게 이어져온 모순의 관계도, 자기도 모르게 들이켜온 미세한 괴로움과 미련도. 전부 놓아버릴 때였다. 이 감정에 질식하기 전에 전부 놓아버릴 때였다.




Dust, dust, dust!!

下: 바람이 부는 한 세계는 침묵하지 않고


w. Serinos




가벼운 침묵. 원래였다면 별다른 대화 없이도 편안해야 했을 가벼운 침묵이 그날따라 낯설었다. 가볍게 바람이 흩날려 무언가 중요한 것이 사라질 것 같은, 무엇인가가 크게 잘못될 거라는 예고를 그 가벼움에 실어 호흡에 섞어놓는 듯한,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등교하는 내내 그렇게 아무 말도 없다가, 문득, 무영이 입을 열었다. 가볍게, 아주 가볍게. 주말 내내 아랫입술을 짓씹어가며 스스로를 다독인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말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수월하게 혀끝을 돌고 입술을 타넘었다.

“야, 밥버러지. 나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묵언수행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10분만에 꺼낸 첫 마디가 부탁이냐. 너 오늘 나한테 인사도 안 한 거 아냐?”

“우리가 언제부터 살갑게 웃어가며 인사하는 사이였다고.”

“매정한 자식.”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대화가 술술 이어지자 은율의 얼굴에 은근하게 화색이 돌았다. 괜히 싫은소리를 해가며 투덜거리는 것도 평상시의 대화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께가 갑갑해지는 지난주 금요일의, 엉망진창으로 끝났던 대화를 감안하면 이 정도의 무난함은 반길 만했다.

"그보다 부탁 들어줄 거야, 말 거야?"

"맨입으로 부탁하는 놈이 뭐가 이쁘다고."

"치킨 사줄게."

"콜."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너무 빨리 튀어나간 대답에 무영은 물론이고 은율 본인마저도 피식 웃음이 터진다. 분위기가 조금 더 가벼워진 것 같아 안심한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간다. 텁텁한 공기를 들이키는 바람에 웃느라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이 먼지에 콜록거린다. 오늘의 미세먼지 수치는 몇이었더라. 간신히 기침을 끝마치고 고개를 들었다가 움찔한다. 투명한 도홍색 눈동자가 어째서 울음을 참는 듯 일렁였는지, 빛을 반사하며 흔들렸는지 예상이 가지 않는다. 마스크 너머의 표정은 여전히 가늠되지 않는다. 웃음기가 싹 가신 눈은 차분하고 고요하고 슬퍼 보인다. 무영이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묻는다.

"저번주에 얘기했던 거 기억 나?"

기억나지 않을 리가 있나. 주말 내내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는데. 폐가 터질 때까지 목검을 휘둘러도, 부 선배인 가문비에게 오버로드라고 잔소리를 들을 때까지 운동장을 뛰어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억울하기까지 했는데. 정좌를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도 그 순간뿐이지 눈을 뜨자마자 자주색 철쭉의 꽃잎이, 군청색 밤하늘이 성큼 다가왔다. 드문 눈웃음이며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생각이라던 목소리가 그렇게 귓가를 어지럽히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정신이 혼미해지진 않았을 텐데.

"나, 고백할 거야."

"........."

"도와줄 거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속으로 몇 번이고 욕설을 씹어삼켰다. 굳어진 은율의 표정을 무영은 안개 낀 낯으로 바라본다. 나는 고백도 못할 줄 알았어? 좋아해줘서 고마운데 더 이상 다가오진 말라고, 마음을 꺼내볼 엄두도 내지 말라고 그렇게 열심히 선을 그었던 거였어? 아, 웃기지 마시고요. 헛웃음을 흘린다. 그 웃음이 어떻게 해석되든 신경쓰지 않는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지긋지긋하게 이어져온 모순의 관계도, 자기도 모르게 들이켜온 미세한 괴로움과 미련도. 전부 놓아버릴 때였다.

이 감정에 질식하기 전에 전부 놓아버릴 때였다.

"근데 왜 나한테 도와달래? 난 고백 같은 거 해본 적도 없어. 차라리 호나 초이 녀석한테 부탁하는 편이 낫잖아."

"그 녀석들이라고 고백 해봤겠냐? 아, 초이는 해봤을 수도 있으려나. 그래도 이번엔 너만 도와주면 돼."

"왜 하필 난데?"

"모르겠어? 하.....상관 없어. 어쨌든 약속했으니까 얌전히 도와주기나 해."

오해도 엇갈림도 결단도 충격도 선전포고도 수신오류도 엉망진창으로 엇갈린 등굣길이지만, 두 사람 다 학생 신분이니 머릿속이 어떻든 학교까지 멈추지 않고 걸어갈 능력은 있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교실에 도착해 있는 상황은 흔했다. 은율은 그들이 어느새 무영의 교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깨닫고 흠칫한다. 무영은 씩씩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 칼 같이 미닫이문을 닫아버린다. 그렇게 문 세게 닫다가 누구 손가락이라도 끼면 대형사고라는 급우 몇몇의 우려 섞인 목소리는 무시된다. 은율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면전에서 닫힌 문을 5초 가량 바라만 본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문에 손을 대자마자 거짓말 같이 조례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황갈색 문 위에서 새하얗고 길쭉한 손가락이 그대로 정지한다. 타이밍이 뭐 이래. 혀를 내둘렀다. 동작 금지를 외치는 휘슬이라도 울린 것 같다. 타종 후의 침묵은 깊이 내리깔리고 그는 어쩐지 문을 열 수 없었다.

"학생. 우리 반에 볼일 있어?"

".......아뇨."

신무영 반의 담임을 맡고 있는, 나이 지긋한 수학 교사의 말에 은율은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 자리를 피한다. 담임은 앞문을 열면서 그 물음을 뱉었고 은율의 목소리는 필연적으로 반 안까지 들려왔다. 여자 아이 몇몇이 창문 위로 삐죽 튀어나온 하얀 정수리를 손가락질하며 미소를 짓거나 얼굴을 붉혔다. 그 꼴이 보기 싫어서 무영은 괜히 책상 위에 엎드렸다. 거기, 허리 똑바로 펴라. 네에. 마스크를 벗으며 짧은 숨을 내뱉었다. 숨결에서 환각처럼 모래맛이 난다.



                   





"야, 신무영!"

"좋은 오후. 율아. 무영이라면 방금 보건실 갔어."

"아프대??"

"글쎄. 아프다기보단 피곤해 보였는데..."

오전 내내 무기력한 얼굴로 책을 들여다보다가 옆드리기를 반복하던 무영을 떠올리며 초이가 말끝을 흐렸다. 핸드폰이 울려도 아주 남의 물건 보듯이 반응을 안 하는 통에 은율이 결국 초이의 핸드폰에 대고 신무영 뭐하냐고 물어왔을 정도였으니. 노기 띤 눈으로 반에 쳐들어온 것치곤 보건실이란 말에 즉각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친우를, 초이는 따사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봄이구나-"

"뭐? 뭔 개소리야. 그보다 신무영 반에 들어오면 나한테 문자 좀 해줘. 꼭이야. 알았지?"

그러나 걱정 반, 짜증 반으로 찾은 보건실에는 무영 대신 익숙한 누군가만 보건실 침대에 드러누워 있을 뿐이었다. 교실 두 개를 합쳐 만든 보건실에는 하얀 침대가 세 개 있고 각 침대에는 하얀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자윤은 가운데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었다. 땡땡이인가 싶어 보니 다리 한쪽에 감은 붕대가 눈에 들어온다.

"넌 또 어쩌다 다쳐서 왔냐, 자윤?"

"고타야 교과서 빌리고 돌려주는 걸 까먹어서. 과학 선생님 교과거 검사 깐깐하잖아. 나 때문에 수행 깎였다고 교과서로 엄청 때리면서 쫓아오는 거 있지. 도망치다가 계단에서 굴렀어. 우와, 그때 고타야 표정을 네가 봤어야 했는데."

"너는 인마........"

뭘 잘했다고 화사하게 웃는 친구를 보며 은율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회복 좀 빠르다고 몸 안 아끼지. 그렇게 구르다가 진짜 뼈 하나 나가면 아주 훅 가는 거야, 새끼야. 짧은 잔소리를 던진 은율이 슬그머니 눈으로만 보건실 안을 꼼꼼히 살폈다.

"근데 율이는 보건실 왜 왔어? 어디 다쳤어?"

"아니, 그냥. 누구 좀 찾으려고. 근데 없네."

아프면 보건실에 얌전히 짱박혀 있을 것이지. 멍청이가. 그놈의 고백이 뭐라고. 들어올 때와 똑같이 걱정 반, 짜증 반으로 퇴장하는 하얀 뒷모습을 향해 자윤이 해맑게 손을 흔든다. 조심히 돌아가아-! 오냐. 태평해서 부러운 녀석. 힘 빠진 손을 대충 들어 인사를 대신한 은율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다.

".....갔어?"

"응."

자윤의 옆 침대에 드리워져 있던 흰 커튼이 확 걷힌다. 민망한 얼굴로 숨겨놨던 실내화를 꺼내 신는 무영을 자윤은 흥미롭게 지켜본다.

"율이랑 싸웠어?"

"싸웠으면 내가 그 자식을 피하겠냐. 멱살부터 잡았지. 그냥 얼굴 보기 껄끄러운 일이 있었어."

"껄끄러운 일? 형 혹시-"

자윤이 말을 꺼내기 전에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무영은 거짓말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만 남긴 채 쌩하니 보건실을 나가 버린다. 자윤은 미처 묻지 못한 물음을 사탕처럼 입 안에서만 굴려보다 꿀꺽 삼킨다. 형 혹시 율이한테 고백했어? 아님 고백 받았어? 슬슬 둘 중 한 명이 고백할 때가 됐는데. 무슨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새콤달콤 껍데기를 만지작거리던 무영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자윤은 은율도 무영도 몇 년간 알아왔다. 둘을 가까이서 봐왔으니 쌍방의 호감을 알아차리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였다. 그리고 또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연애도 해본 놈이 잘 안다고. 연화와의 알콩달콩한 연애를 몇 달째 이어가고 있는 자윤으로서는 무영이 은율에게, 그리고 은율이 무영에게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도 가벼운 흥미도 아니다. 약간의 선망, 은밀한 열정, 사랑, 그래 사랑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 당사자들은 절찬리 삽질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꼬일 대로 꼬인 상황도 모르고 자윤은 친구와 친한 형의 연애 사업에 응원을 보냈다. 둘 다 파이팅!

"네가 홍길동이냐? 어? 뭐 전우치야?"

물론 이쪽은 신나게 파이팅을 외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방과후가 다 되어서야 겨우 무영과 만난 은율은 종잇장처럼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아침에 애매하게 헤어지고 이제껏 못 만났다. 부탁을 거절하는 건 둘째치고 온종일 얼굴도 못 봤다는 게 타격이 컸다. 야 내가 무슨 낙으로 학교에 나오는데. 니가 뭔데 내 하루의 행복 하나를 줄이냐. 누가 들으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도 남을 불합리한 헛소리였기에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얼굴에 금칠을 한 것도 아니고. 얼굴 보기 드럽게 힘드네."

얼굴에 금칠한 건 네놈이지. 와, 오랜만에 보니까 아주 빛이 나네. 오랜만은 아니지만 뭐. 학교에서 내내 못 봤으니까. 젠장. 자존심 상하게. 얼굴 보니까 살겠네. 매일 매 시간 보던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갑자기 못 보게 되었으니, 무영도 썩 상황이 좋진 않았다. 미리 감수하고 피한 것이니 졸지에 내외를 당한 은율보다는 나았지만.

"만나면 네가 부탁 무른다고 할 것 같아서."

"알면서 피했냐? 이거 아주 영악한 놈이네."

"이미 약속 다 해놓고 무르려는 너는 어떻고, 망할 밥버러지. 뭐 거창한 거 부탁한다고 이러는 거 아니니까 그만 빼."

"......고백 도와달라며. 나 그딴 거 모른다니까. 완전 무리야."

"질문 몇 개에만 답해주면 돼. 그러니까, 참고용으로."

이야, 이거 혈압 오르네....... 은율이 어금니를 꽉 사려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남한테 고백하는 걸 도와주는 꼴이라니 마음에 안 들면 일단 뒤집어 엎는다고 망나니 소리나 듣던 천하의 은율 성격 다 뒤졌다. 뒤졌어. 아 그 새끼 미국 갔어, 없어! 주머니에 쑤셔넣은 마스크며 새콤달콤 껍데기들을 만지작대며 신무영도 대충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 맨정신으로 할 게 아니구나. 차일 게 뻔한 고백 준비라니 이게 망할 게 뻔한 프로젝트 준비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아니 더 나쁘지. 온 마음을 모아서 구렁텅이에 처넣는 거잖아. 프로젝트에는 마음이라도 안 넣지. 나이에 안 맞게 냉정하다던 신회장 어디 갔냐. 내 뒷담 깔 때 그렇게 많이 언급되던데 그 새끼 어디 갔어. 뒤졌냐?

"무슨 질문인데?"

"1번. 고백 받는다면 어느 장소가 좋을 것 같아?"

"........학교. 학교 옥상."

칼로 베어낸 듯 깔끔하게 떨어지는 대답이었다. 목검이나 죽도를 앞에 두고 정좌한 채 고요히 명상하던 때를 떠올리며 은율이 평정심의 멱살을 낚아챘다. 잡념이 쌈빡하며 두 동강 나고 차가워진 머리는 쌈빡한 결론을 내놓았다. 이렇게 된 거 훼방이나 놓자. 아주 제대로.

"2번. 시간은?"

"내일 모레 방과후. 수요일은 일찍 끝나잖아."

"그렇네.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라 괜찮겠다."

무영이 납득하고 핸드폰에 무언가를 분주히 메모하는 동안 은율은 한결 관대해진 마음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수요일엔 검도 훈련이 없다. 방과후 학교 옥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작정하고 방해할 수 있단 소리였다.

"3번. 고백 방법은?"

"편지. 간단한 카드도 괜찮고."

무영이 고백할 상대를 떠올리며 밤새 정성을 담은 사랑 편지를 쓰는 상상은 끔찍했지만 은율은 주먹을 꽉 쥐며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한 걸 참았다. 한편 무영은 은율을 떠올리며 밤새 받아들여지지 않을 사랑 편지를 쓰는 상상을 하며 이를 앙다물었다. 입술이 조금 찢겨 피맛이 났다. 모래먼지가 기관지를 꽉꽉 찌르는 기분이다.

미세먼지 180. 끔찍하리만치 싫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목이 까슬거린다. 억지로 우겨담아 묵혀둔 감정이 미세먼지처럼 올라와 파란 하늘을 가린다. 아름답고 선명한 것들을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다.

"......4번. 편지만 전할까, 아니면 읽을 때까지 기다릴까?"

"기다리는 편이 좋지 않겠어? 대답을 바로 들을 수 있잖아."

그래 참 좋겠다. 너는 바로 차고 나는 바로 차일 수 있고. 무영이 씁쓸하게 핸드폰에 메모를 이어갔다. 자윤이랑 짜고 상대방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난입할까? 은율이 진지하게 고민하며 손으로 팔꿈치를 톡톡 두드렸다. 아니다, 편지 말고 그냥 말로 하는 편이 낫겠어. 그래. 편지는 좀 그렇다.

"알았어. 다음은 5번. 꽃 같은 건 어때?"

"뭐 그런 것까지 준비하고 그러냐."

"6번. 옷은 교복?"

"그럼 고백한다고 정장이라도 입으시게요? 적당히 해라."

"7번......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이제껏 무슨 서브웨이 주문하듯 (빵은 파마산 오레가노, 너라면 치즈 뭘로 넣을 것 같냐? 추가 토핑은 없는 게 나아? 소스는 어떤 게 좋지?) 틱틱 태평한 문답을 이어왔던 주제에 갑자기 뜸을 들인다. 망설임 끝에 무영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답지 않게 자신 없는 어투였다.

"차인 다음엔 어떻게 돼?"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무영이 황급히 부연한다. 차일 수도 있잖아.

"......차인 다음엔 어떻게 하는 게 맞아?"

은율은 속으로만 생각한다. 네가 차이면 난 동서남북을 돌면서 한번씩 절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에게 감사 인사를 할 건데. 그리고 괘씸하게 너를 찬 놈하고는-아 물론 뭔가 잘 안 맞으면 고백을 찰 수도 있지만-앞으로 다시는 상종하지 마라.

"그냥 적당히 친구로 남아."

무영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까 상처가 났던 곳에서 다시 피맛이 진하게 베어난다. 미약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흐른다. 얕은 숨을 내쉰다. 숨결에서 환각처럼 모래맛이 난다.








D-day. 시험도 아니고 시합도 아닌 날에 이런 말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제발 오지 않기를 바랐겄만 이틀이 얼마나 짧은지 결국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주일 정도 후에 고백하라고 할걸. 그러나 단김에 쇠뿔 빼듯 하는 성격이 어딜 가겠는가. 여기서 더 미뤘으면 제 정신상태에 더 해로웠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은율은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벌써 방과후다. 아인슈타인 양반이 시간의 상대성 어쩌구 했다던데. 다른 건 모르겠지만 시간의 상대성이라는 단어 하나는 찰떡 같이 가져다 썼네. 지금 내가 그 상대성 완전 실감 나게 체험하고 있거든. 오늘 시간 진짜 빠르네. 아인슈타인이 알면 무덤에서 스릴러 영화 좀비처럼 기어나올 단어 활용을 서슴지 않으며 은율이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수요일은 4시에 일과가 끝났다. 그럼 이제 곧 고백할 시간이니 자윤을 불러서 깽판을....... 기습적으로 울리는 벨소리에 핸드폰을 떨어뜨렸다가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낚아챈 은율이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터치했다.

"왜."

"학교 옥상. 지금 올라와."

"내가 왜....."

"끊는다."

"뭐? 야! 신무영!!"

젠장, 또 뭘 도와달라는 건데. 이 정도로 하고서도 부족했냐? 이를 빠득빠득 갈며 계단을 오르는 은율의 표정이 험악하다. 개새끼. 내가 진짜, 진짜 좋아하니까 이번만 봐준다. 꼭 차여라. 반드시 차여라.

그러나 그런 생각도 옥상에 올라가고 나니 강풍으로 틀어둔 선풍기 앞의 먼지처럼 부질없이 날아갔다. 맥아리 없이 흩어졌다. 일몰까지는 아직 서너 시간 정도 남았지만 해는 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기 시작했고 그림자는 사선 방향으로 덩어리졌다. 봄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미세먼지로 하늘은 흐리지만 푸른빛을 전부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구름 몇 점으로도 하늘은 하늘 구실을 하고 있다. 극적으로 아름다운 구석도 시선을 끄는 인상적인 요인도 없는 그저 그런 도심지의 풍경이다.

그런데 그 풍경 안에 네가 있다. 하늘이 맑게 개어도, 마음을 혼란하게 만드는 티끌이 전부 사라져도, 온 세상이 파랗게 물든 가운데서 그만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것만 같다. 여덟 시와 아홉 시 사이의, 별을 걷어내고 남은 밤하늘을 퍼낸 듯한 머리카락과, 철쭉 꽃잎을 모아 만든 눈동자와, 작게 피식거리며 웃는 것부터 곰살갑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 것까지 모든 미소 띤 얼굴이, 언제나와 같은 형상으로.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린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다. 숨이 멎는다. 역시 사랑에 빠졌다고, 어쩔 수 없이 사랑이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고 모든 발걸음이 속삭인다. 어쩌지. 신무영. 난 정말로 너를.

"좋아해. 은율."

"........어?"

"처음 만났던 날, 네가 기억할진 모르겠는데 나는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해. 입학식 날, 운동장 끄트머리에서. 내가 지갑을 떨어뜨렸는데 네가 주워서 찾아줬잖아. 그때 이후로 네가 계속 신경 쓰여서 지켜보게 됐어."

"......"

"그렇게 지켜보고, 어쩌다 같이 어울려 지내다보니 네 좋은 점이 계속 눈에 들어오고, 얼마 안 있어 네 전부가 다 좋았어. 진지하게 검도를 하는 모습도,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모습도, 그러다 피곤해서 수업 시간 내내 조는 모습도, 이것저것 잘 먹는 모습도, 퉁명스럽지만 꼼꼼하게 친구들을 챙기는 모습도, 게임하느라 늦잠 잤다고 부스스하게 나오는 모습도, 시합을 앞두고 집중하는 모습도, 그냥 전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어.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

"......"

"좋아해. 정말로."

세상이 반 바퀴 돌았다. 그리고 다시 또 돌았다. 하늘이 땅이 되었다가 다시 땅이 하늘이 되었다. 은율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번에는 은율도 그것을 잡아채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 액정이 부서진 듯한 소리가 났다. 핸드폰 주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영은 고개를 푹 숙였고, 은율은 완전히 벙찐 채 신화 속 조각상처럼 굳어 있었다. 역시 사랑에 빠졌다고, 어쩔 수 없이 사랑이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고 모든 스쳐지나가는 산들바람이 속삭인다.

"......차."

"어?"

"이제 마음 편히 차라고, 개새끼야!!!"

"어, 어???"

속삭이는 산들바람은 분노가 임계치에 다다른 태풍에 휩쓸려 돌연사한다. 잠깐만, 뭔데. 뭐야. 상황 파악은 고사하고 무영의 고백조차 뇌에 정확히 입력되지 않은 은율이 말을 더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영은 귀까지 빨개진 채 도끼눈을 뜨고 있었는데, 얼굴이 붉은 게 분노 때문인지 쪽팔림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제 속이 시원하냐? 어? 그냥 적당히 친구로 남자고, 그래. 이제 고백도 했고 미련도 없고!! 미련은 많지만 더 이상 티도 안 낼 거고!! 나 혼자 이 감정에 질식하는 건 끝이야. 그러니까 죄책감 가질 것도 없고, 고마워할 것도 미안해할 것도 없으니까 너도 그냥 차고 끝내."

"잠깐만, 내가 뭐?"

"너. 다 알고 있었잖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내가 너 그렇게 쳐다보는 거. 좋아해줘서 고맙다며. 아니, 그거 때문이 아니더라도. 너 계속 나 피했잖아. 이상하게 대했잖아. 평소처럼 대하려고 하면서도 거리 뒀잖아. 신경 썼잖아."

"아니, 그건 그게.....!! 잠깐만. 미치겠네, 너 성질 급한 건 알겠는데 그건 진짜 오해야. 몰랐어. 나는 그냥, 아니, 아무튼 오해라고! 너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진짜 미치겠네!"

은율이 머리를 감싸안고 악 소리를 냈다. 미치겠네!! 세 번째로 미치겠다는 소리가 나오고서야 무영도 조금 진정한 듯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고, 은율은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려가며 오류를 해석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무영이 그를 쳐다본다는 사실을, 은율도 알긴 했다. 하지만 왜인지는 몰랐다. 좋아서 바라보는 거면 좋을 텐데. 내가 그러는 것처럼. 실없는 생각이나 하며 힘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겠지. 이때만큼은 평소의 자존감을 유감없이 발휘했어도 좋았을 텐데!

새콤달콤을 넘겨주며 고맙다고 했었지. 타이밍이, 아, 최악이었구나. 맞다. 은율은 기가 막히게 엇갈리는 자신들의 과거에 혀를 내둘렀다. 피하긴 했다. 평소와 다르게 이상하게 대했다. 거리를 뒀다. 신경 썼다. 왜냐하면 그 즈음에 알았으니까. 좋아한다는 걸. 역시 사랑에 빠졌다는 걸, 어쩔 수 없이 사랑이라는 걸, 부정할 수도 없다는 걸 그 즈음에 깨달았으니까.

"왜 오해했는진 알겠는데, 진짜 오해야. 내가 이런 일로 거짓말 할 사람 아닌 거 알잖아. 난 몰랐어."

"몰랐다고? 진짜로? 알면서 나 엿 먹인 게 아니라?"

"뭔 말을 해도 그렇게.......아무튼 아니야. 진짜로."

"하........."

옥상 바닥이 꺼져라 깊은 한숨은 질량은 무겁고 온도는 차다. 어쩐지 모든 것을 끝낼 것만 같은 한숨이다. 비참한 끝을 각오하고 왔는데 이건 상상 이상으로 비참하네. 그래도 고백했으니까 됐다. 이제 상관없다. 전부 끝이다. 자기혐오도, 자책도, 죄악감도 오늘 하루 스스로에게 비수처럼 꽂아넣고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그렇게 지내도 언뜻 멀쩡하다. 의식하지도 못하는 새에 삼키고 삼키고 또 삼켜서 속에서부터 썩어버린 사랑은 오늘로 마지막이다. 혈관으로 침투하여 전신에 퍼지는, 모래알같이 까슬거리는 감정들. 목구멍이 턱 막히고 심장이 불길하게 두근거리고 아픔도 마지막이다. 무영은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옥상에서 내려가기 위해 금속으로 된 문 손잡이를 꾹 잡았다. 햇볕에 미지근하게 데워진 금속의 먼지 쌓인 감촉조차 사랑의 마지막을 알리는 거대한 상징처럼 느껴졌다.

미세먼지 300, 숨이 막힌다. 기관지를 긁어내리는 해묵은 감정의 찌꺼기들, 공기 중에서 산란되는 빛, 눈에 보이지도 않는 먼지 속에서 장님이 된 것처럼 길을 잃는다.








멈추어선 건 오로지 그 표정 때문이었다. 옥상에서 벗어나려던 무영의 팔을 붙잡은 은율이 지은 표정이 드물게 심각해서, 하얗고 파란 기적처럼 정신을 뒤흔들어서, 움찔 멈추어설 수밖에 없었다. 네 할 말만 하고 가버리면 어떡해. 은율이 입을 연다.

"나도 좋아해."

잠시 침묵. 마지막의 마지막 세계에나 어울릴 법한 침묵이 옥상을 맴돈다.

"....누가? 누구를?"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뭐?"

상황이 반전된다. 무영은 은율이 갑자기 독일어로 말하기 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낯설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완전히 멍해져서 말을 더듬는 건 신무영 쪽이었다. 은율은 짧은 심호흡 후 천천히 제 속에 담아왔던 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무영처럼 준비해온 고백은 아니었지만 그 나름대로는 당장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을 씨줄과 날줄 삼아 짠 담백하지만 진실한 고백이었다.

"좋아한 건 작년 여름방학부터였는데, 확실히 자각한 건 최근이야. 봄 대회 결승전 때 네가 학원 두 개 째고 응원왔잖아. 그때 그냥, 감독님이 너 응원왔다고 하니까 갑자기 엄청 기쁜 거 있지. 가만히 있는데도 너무 좋고 벌써 1등한 것 같고 막 그러길래 알았어. 갑자기 자각하니까 나도 당황스럽고 이 정도로 너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서, 그래서 너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 거야. 그게 오해를 부를 줄은 몰랐어."

"........"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하루도 네가 있으면 매 순간이 사랑스러워. 좋아해." 

침묵. 방금 전처럼 깊고 두껍진 않아도 길이만큼은 터무니없이 긴 침묵이 하염없이 흐른다. 은율도 무영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마주 선 체스말처럼 부동을 지킨다. 다시 산들바람이 불고, 머리카락이 가볍게 휘날린다. 모래먼지만 한바탕 일으키는 요즘 바람 같지 않게 퍽 산뜻한 바람이었다. 호흡을 마시고, 호흡을 내쉬고, 무영은 침을 꼴깍 삼키고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입을 연다. 은율은 답한다. 미세먼지도 모래황사도 없이 그냥, 그냥 투명한 사랑을 전부 끌어모아.

"짧게, 알았으니까 짧게 하자. 나는 널 좋아해."

"어, 응. 나도. 좋아해."

"그러면."

"....사귈래?"

"언제는 연애할 생각 없다더니."

"너는 예외로 칠게."

"그래, 사귀자."


미세먼지 0, 오늘의 하늘은 맑다. 끝나기 전의 세상보다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야, 근데 네가 그랬잖아. 입학식 때 처음 만난 이후로 내가 계속 신경 쓰여서 지켜봤다고."

"그게 왜?"

"내가 좀 잘생기긴 했다만 네가 외모 때문에 사람 쳐다보는 타입은 아니고. 내 뭐가 그렇게 신경 쓰였던 거야? 너 어디서 나 본 적 있어?"

"......비밀이야."

하얗고 파란 기억. 어느날부터인가 반복되던 꿈.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하얀 시체를 감싸안고 있는 남자. 시체의 머리카락도, 피부도, 옷도, 붉게 피로 물들기 전에는 지나치게 새하얀 색이었다. 신랑의 와이셔츠처럼 신부의 베일처럼 새하얗고 새하얀 색깔. 무영은 이름조차 모르는 그의 죽음에 지독한 슬픔과 상실감을 맛보곤 했다. 구할 수 없었다. 여름이 싫었다. 또 구하지 못했다. 뼈가 저릿하도록 싸늘한 그리움이 목을 옥죄었다.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앞서 가는 새하얀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음을 곱씹는다. 처음 은율과 만난 것은 고등학교 입학식 때였으나, 사실상 그는 그 이전부터 은율을 알고 있었다. 하얗고 파란 기억. 미세먼지가 끼어들 틈도 없이 절박하고 직선적이던 꿈. 이름조차 모르는 누군가를 향한 연정.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무영이 피식 웃음을 흘린다.

아마 전생부터 지금까지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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