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달이 떴다. 그날은 기이하게도 산속에서 울부짖는 고라니의 울음소리도 해마다 태어나는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 쥐죽은 듯이, 서늘한 바람이 부는 길가엔 오로지 핏빛의 거리만 비춰질 뿐이었다. 



까마득한 어언 옛날로부터 내려온 김씨 왕조를 시작으로 조선은 이례없는 부국강병을 맞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더욱이 강권을 원하게 된 치들은 더 강한 유전자를 원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왕조는 사내아이를 원하게 되었고, 그에 따른 희생으로 많은 여인들이 죽어 나갔다. 사내아이보다 덧없이 많았던 계집아이들은 쓸모를 증명하지 못해 죽었고, 속된 차별로 굶어 죽었다. 먹지 못해 약해진 면역은 그 많았던 계집들을 보호하지 못해 병에 시들어 죽게 만들었고, 그 개수는 점점 줄어들어 종국엔 그들이 바라던 시대가 찾아왔다. 


사내아이 백 명 꼴로 태어나는 계집아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유가(家) 여주. 귀하디 귀한 사내아이 속에서 태어난 계집은 강권을 원하던 초기완 달리 축복 속에서 태어났다. 개국공신 유가(家)에서의 무남독녀로 귀히 자라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않고 자랐다. 그 당시의 계집이라 하믄 전부 전염병에 걸려 죽고, 사고로 죽고, 태어나기도 전에 죽기 일수였다. 마치 뭐에 홀린 듯이. 그를 막기 위해 귀한 자손인 여주를 유가(家)의 사람들은 보호하고 또 보호했다. 자제들이 전부 결혼을 하거나 사내뿐인 양반가에서 여주의 존재는 명확했다. 


세자의 비(妃)









"너무 뛰놀지 말거라, 주야."

"예, 어머니! 그럼 다녀오겠사옵니다. "




붉은 색의 댕기가 휘날린다. 뜨거운 햇살 아래로 눈부시게 빛나는 송화색의 저고리 속의 가슴은 아직 어린 아이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위로 들뜸을 나타내는 볼에 홍조가 깃들었다. 동그랗게 뜬 눈이 깜빡이며 제 손에 들린 약과주머니를 코에 가져다 대었다. 아직 따뜻했다. 


어린 계집아이는 달리고 달려 모란이 피어난 돌 담벼락을 지나 둥근 언덕에 도착했다. 언덕을 태양의 잔해들이 둥글게 감싸 안은 모양이었다. 눈을 찡그리며 숨을 고르던 아이가 이내 푸른 벚나무 아래의 두 사내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오라버니!!"

"여주 왔어?"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두 개의 얼굴이 동시에 여주를 쳐다보았다. 다정함을 담은 눈빛이 선연하게 내리앉았다. 봉긋 솟아오른 여주의 볼 위로 땀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를 조심스레 훔친 민형이 웃음을 지었다. 급하게 올 필요 없어, 우리도 방금 도착했거든. 그에 정우가 나무 아래로 털썩 앉으며 아청색의 소매 안에서 수정과가 담긴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신난 여주가 정우를 따라 털썩 주저 앉으며 자신이 손에 꼭 쥐어온 약과를 풀기 시작했다. 민형은 여주의 산만한 행동에 주의를 주려다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그들의 곁에 꼬옥 붙어 앉았다.





"달다, 달아. 이걸 도대체 왜 좋아하는 거야?"

"오라버니는 뭘 모르네! 약과는 달아서 좋은 거라구."

"여주야 내 것도 먹어, 이런. 입 주변에도 묻었잖아."




정우의 불평을 맞받아친 여주가 배시시 웃었다. 몇 해가 지나도 순수함을 잃지 않은 미소는 사내아이 두 명의 가슴을 선덕이게 만들었다. 민형이 그를 보며 다정하게 입가에 묻은 약과조각을 떼주었다. 늘 그렇듯 미시(오후 1시~3시)에 모인 그들은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크게 떠들며 하루를 보내곤 했었다. 여주와 함께 사는 민형과 달리 정우는 아주 먼 곳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항상 민형이 마중을 나가곤 했다. 먼저나간 오라버니들 뒤로 여주는 어머니에게 옷차림과 자수에 대해 배우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물론 호위들을 대동해야 했지만, 여주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즐겁게 해줄 두 오라비와의 만남이 그 작은 생의 삶의 낙이었으니까.






"다음에 있는 초복에 열리는 장터! 꼭 가는 거다. 잊어버리면 안돼!!"

"알겠다니까, 몇 번을 말하는 거야~ 그렇게 기대가 돼?"

"응! 그럼 오라빈 기대가 안돼?"

"나야 뭐... 많이... 읍! 이민형 뭐 하는 거야!"

"하하, 나도 기대 돼 여주야. 그날은 일찍부터 장이 서니까, 이르게 일어나야하는데. 할 수 있어?"

"당연하지! 내가 못할 줄 알아?"





실컷 떠들다 해가 노릇노릇 지고서야 언덕을 내려오는 그들은 초복에 설 장에 대해 이야기 했다. 십년의 인생 처음으로 사람이 많은 거리에 나가 노는 것이 처음이었던 여주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와 달리 이미 한 해, 두 해를 거쳐 바깥 경험을 쌓은 두 사내아이는 심드렁함을 표했다. 정확히는 정우만. 열 한살의 해를 지난 민형과 열 두 해를 거친 정우가 여주의 발 폭에 맞추어 걸었다. 포롱거리는 새와 같이 둘을 앞장선 여주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말야, 내가 그날 입을 저고리를..."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챙그랑하고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순식간에 반응한 호위 둘이 여주의 앞을 가로막으며 아이를 보호했다. 조심스레 소리의 근원지로 걸어가는 호위의 뒤를 호기심많은 여주가 따랐다. 그에 위험할 거라며 막는 민형이 여주에게 손대지 못하고 결국 따라서 근원지를 향해 걸어갔다. 좀 더 가까이 가니 둔탁한 소리는 세가 가해졌다. 





"거기 누구냐."





한 명의 호위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소리쳤다. 그러자 화들짝 놀라는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주의 눈동자로 두 개의 인영이 비추어졌다. 피를 흘리고 있는 어린 소녀와 엉덩방아를 찐 주정뱅이가.





"얘, 너 괜찮니?"

"아가씨!"




괜찮아. 담담한 미소를 띄며 피를 흘리는 소녀를 일으킨 여주가 호위를 물렸다. 그 앞의 인사불성의 남자가 무서울 만도 한데 아랑곳하지 않는 여주의 모습에 민형과 정우가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여주는 소녀의 더러워지고 낡은 치마를 툭툭 털어주며 소녀의 얼굴을 살폈다. 남자에게 맞은 것인지 군데군데 멍이 들어있고 피딱지가 맺혀있었다. 여주는 소매 안에서 모란이 그려진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소녀의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 사이 도망치는 남자를 좇으러 간 호위가 그를 포졸에게 넘겼다. 





"... 정말 감읍할 따름입니다! 아가씨..."

"어머."




소녀가 냅죽 엎드리며 여주의 발아래에 머리를 박았다. 털어준 치마가 도로 흙으로 더럽혀진걸 본 여주가 미소를 지으며 소녀의 시선과 마주했다. 쪼그려 앉은 여주에 당황하던 소녀가 여주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소녀의 귓가에 여주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괜찮아, 얘 너. 이거 갖고 가서 다친데를 좀 닦으렴."

"...예?"

"어서, 아! 이참에 남은 약과도 좀 가져가고."





그리곤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몸을 일으키는 여주에 소녀가 멍하게 쳐다보았다. 고급스러운 치마와 저고리, 그리고 곱게 땋은 댕기머리가 여주의 신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틀림없는 귀족 집안의 자제, 그리고 제 또래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 자신을 도와준 여주가 바로 왕세자빈으로 내제되어 있다는 그 아가씨가 분명했다. 살벌한 소문과는 달리 매우 친절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다. 소녀가 생각했다.





"아가씨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래, 너무 어두워졌네."

"여주야 손 잡아."




여즉 엎드려있는 소녀를 뒤로하고 돌아선 여주의 뒤로 호위가 붙는다. 정우와 민형이 동시에 손을 내밀며 여주의 양손을 붙들었다. 하늘 아래 높으신 분들이 소녀를 떠나가고 있었다. 감사 인사를 충분히 전하지 못한 것 같아 소녀가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배회했다. 




"가, 감사합니다! 아가씨!!"





소녀의 부름에 여주가 살짝 돌아서며 미소를 띄었다. 여주의 위로 노란 달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소녀에게 여주는 하늘이 내려주신 선녀와 다름 없다고 생각했다. 













여주가 잠에 든 것을 확인한 민형이 조심스레 여주의 얼굴 위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곤 선분홍빛의 입술을 발그레한 볼에 조심히 맞추었다. 따스한 온기가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살며시 민형의 눈이 떠지고 어두운 적막 속에 색색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순간이 영원하면 좋을 텐데. 민형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마님을 뵈러가야할 시간이다.





"그 아이는 어땠지."

"여느 때와 다름 없었습니다."

"그래... 눈치껏 그 아이와 여주를 떼어놓는 게 너의 의무다."

"... 알고 있습니다."




하, 언제까지 이 짓을 할 모양인지.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이 집의 여주인인 여 희순의 목소리가 방안을 매웠다. 희순은 간교하게 선한 척 앉아있는 민형을 내려보다 미간을 찌푸리며 나가라며 손짓했다. 언제봐도 기분 나쁠 정도로 똑같이 생긴 얼굴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닮아가는 그 외모는 희순을 진절머리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민형의 존재는 희순에게 그녀를 갉아먹는 진득이 그 자체였다. 희순이 노력하고 노력한 것을 단숨에 빼앗아간 그 여자처럼. 


자신을 외면하고 사랑해 마지않던 그 여자의 아이를 데려온 여주의 아비처럼.










안채의 문을 닫고 나온 민형이 다시 한번 여주가 잠든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덧없이 사랑스러운 아이. 그의 어미가 사랑한 유한성처럼 저 자신도 여주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나 보다. 너는 점점 자라 성숙해지며 아름다워져서 나처럼 못난 사내가 아닌 높으신 분에게 시집을 가겠지. 그때까지만이라도, 욕심 안 부리고 정말 그때까지만이라도 너의 곁에 있고 싶다. 


시린 밤의 달이 민형을 탓하듯 그렇게, 저물었다.










*모든 설정은 픽션입니다

*작중 몰입도를 위해 '-니다' 체를 사용하였으니 양해 바랍니다.



아늑한 쓰레기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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