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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든 공작이 방금 황실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친절히 안내해.”

 


리의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난 병사가 집무실을 나섰다. 책상 위에 올려진 무수히 많은 종이를 대충 눈으로 훑으며 넘기던 리가 손에 쥐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았다. 제국의 수많은 이들이 보내온 상소문들. 그 중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내용에 리의 손 위에서 종이가 볼품없이 구겨졌다.

 

오필리아 황녀의 얼굴을 보고 싶단 쓸데없는 내용이었다. 뭐 그런 민중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보통 황제의 후손이라면 성년이 되기 전 공식 행사를 거쳐 얼굴을 알리는 것이 물론이거니와, 황실의 신뢰와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민중에게 용모를 드러낸다. 하지만 오필리아 황녀는 그러지 않았다. 온전히 현 황제의 결정이었으나, 그 이유에 대한 건 자신도 그리고 첫째인 민석과 오필리아 황녀 본인인 여주도 알고 있었다.

 


“전하, 이든 공작은 응접실에서 대기 중입니다.”

 


그 아이의 범상치 않은 능력 때문이겠지. 하지만 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하나의 이유만으로 오필리아 황녀를 꼭꼭 숨긴 것은.

 


“가도록 하지.”

 


그깟 계집애가 대체 뭐라고.

 

응접실의 큰 문이 열리고, 리의 발소리가 들려오자 등지고 앉아있던 민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았다. 제게 걸어오는 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치로 가득한 모습. 그 어떤 사치품이라 해도 빛을 잃은 듯 반짝이지 않았다. 그저 과하다 느껴지는 치장 정도.

 


“날 불렀다고 해서.”

“응. 내가 형을 불렀지.”

 


잔뜩 거만해진 말투가 툭 민석의 머리 위로 내려앉고, 민석은 그제야 리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다. 자신의 팔을 잃게 한 배은망덕한 동생이라 하지만 또 다른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안 본 사이. 아니, 그가 황제 대리인 자리에 앉은 사이 묘하게 달라진 눈빛, 몸짓.

 


“그냥 잘 지내고 있나 해서 말이야.”

“나, 아버지를 뵈러 꽤 자주 왔지 않나?”

“그랬나? 매번 형이 황실에 왔다가 그냥 갔다는 소리만 전해 들어서 몰랐네.”

 


민석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씩 올라가는 입꼬리. 분명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몸져누워있는 황제를 보러왔던 것도, 매번 못 들어가게 막는 친위대와 씨름을 했던 것도. 민석 또한 다시 자리에 앉자 리가 다리를 척 꼬며 입을 연다.

 


“그나저나 형.”

“…”

“우리 막내가 궁에서 사라진 거 알고 있었어?”

“…”

“알고 있었나 보네?”

“…”

“하긴 벌써 한 달 전에 종적을 감췄는데… 내가 너무 늦게 찾았지?”


“알면서 물어보는 이유는?”

 


사람을 떠보듯 물어보는 것도 분명히 무언갈 알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여주가 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알아차렸을 텐데, 지금에서야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아마 여주와 자신이 없는 동안 황실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겠지. 황제가 숨이 붙어있는 한, 제국은 여전히 현 황제의 관할이다. 아무리 대리인 자격을 가졌다 해도 국정을 손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을 터. 하지만 현 황제가 다시 왕좌에 돌아온다 하더라도 이전처럼 정치할 순 없을 테지. 그 점을 이용해서 그 한 달이란 사이에 황실의 모든 것들을 제 쪽으로 유리하게 만들어 놨을 가능성이 크다.

 


“나도 같은 동생인데, 여주랑 둘이서 만의 비밀을 만들다니… 조금 섭섭하네.”

“…본론부터 말해.”

 


민석은 더 이상 리가 제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포용하지 않기로 했다. 여주의 말마따나 누군가에게 착하다 따위의 소리를 들으려고 리의 모든 악행을 넘어간 것이 아니다. 황제가 의식을 잃고, 여주가 황실을 떠난 이 시점에서 민석은 자신 또한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리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든, 순순히 자신의 것을 내어주지 않을 계획이다.

 


“김여주. 어디 있어?”

“여주가 황실에 없어서 편한 거 아니었나? 니 손으로 내보내려 했잖아.”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여주는 잘 지내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걱정? 낮게 읊조린 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 그래, 걱정이지. 매일 같이 눈엣가시처럼 알짱거려서 아주 밟아버리고 싶던 참이었는데… 다른 누군가에게 밟혀 죽은 건 아닐까 하는 조금의 아쉬움이 섞인 걱정.

 


“그래? 말도 없이 그렇게 나가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

“그럼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어. 여주는 아-주 잘 지내니까.”

 


빠득-. 잔뜩 불만인 리의 심정을 나타내는 소리에 민석이 그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래도 순순히 여주가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을 듯한 민석의 태도를 알아차린 듯했다.

 

분명 자신이 묻는 것이 여주가 잘 지내는가가 아닌 것을 알 것인데, 철저히 둘러 말하는 민석이 맘에 들지 않았다.

 


“공작위를 달더니 견제라도 하는 건가? 손해 볼 장사는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내 대답을 정치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유감이지만, 난 공작으로서가 아닌 여주의 오빠로서 전하는 말일 뿐이야.”

“이든 공작.”

“…”

“그럼 다시 질문하도록 하지. 황제의 대리인인 황태자로서 묻는다. 오필리아 황녀는 어디에 있지?”

 


완고한 민석의 태도에 결국 리는 전략을 바꾸었다. 좋게 말해서는 더이상 얻어낼 것이 없으니, 자신이 가진 권력을 휘두를 수밖에.

 


“전하께서 오필리아 황녀를 지극히 걱정하시고 황녀의 근황을 궁금해하신 마음은 이해하나, 저 또한 황녀에게 간간이 듣는 소식을 제외하곤 알고 있는 것이 적습니다. 제게 더 물어보셔도 원하는 대답은 듣지 못하실 겁니다.”

“내 친히 황녀를 찾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겠군.”

“…”

“오른팔을 잃은 이든 공에게 맡기려 하니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말이야.”

“저를 그렇게 마음 써서 걱정해주시다니. 황송하네요.”

 


결국,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건 민석이었다. 더 이상 할 말도 없을뿐더러, 자리를 지키고 있어 봐야 득보다는 실이 더 큰 상황이었다. 황제의 방에 들일 마음은 추호도 없어 보이니 이쯤하고 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전하께서도 이래저래 바쁘실 텐데, 제가 너무 많은 시간을 뺏은 건 아닐지.”

“먼저 일어나는 걸 보니, 오히려 내가 공의 시간을 뺏은 것 같은데.”

“아뇨. 다음부터는 저도 전하께 예우를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너무 갑작스럽게 방문하여 빈손이네요.”

“…”

“제너럴의 빛인 황태자 전하께 신의 가호가 깃들길.”

 


민석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후, 뒤돌아 응접실을 나섰다. 홀로 응접실에 남은 리가 낮게 웃음을 터트리곤, 종국엔 배를 감싸 쥐곤 크게 웃었다. 그래, 지금처럼만 굴어줘. 그렇게 김여주를 한껏 감싸고, 되지도 않는 자존심 따위 마구 내세워 봐. 그럴수록 마지막이 더 고통스러울 테니까.

 












 

“편하게 앉으렴.”

“…감사합니다.”

“앉길 뭘 앉아. 금방 갈 거야.”

“이놈아, 앉으라면 좀 앉아. 얼마 만에 얼굴 비추곤 그렇게 금방 가려고?”

“할배 지금 나보다 얘한테 더 관심 있는 거 아니야?”

“그렇게 보인다니, 부정은 않으마.”

 


결국 장로의 필사적인 설득에 현까지 자리에 앉았다. 등을 푹 기댄 채, 팔짱을 낀 모습이 이 상황이 불편함을 어필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현의 모습에 장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여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현의 옆에 앉아 잔뜩 긴장한 듯 무릎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린 모습에 낮게 웃음을 흘렸다.

 


“얘야, 긴장하지 말렴. 너한테 해코지하려는 생각은 없으니.”

“아… 그런 게 아니라…”

“그래, 제너럴에서 왔다고?”

“네.”

 


현의 2배는 되어 보이는 몸집에, 장로라 하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음을 뜻하는데… 나이를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외모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맨정신으로도 버티기 힘들 만큼의 무게가 있었다. 그 위력에 여주는 도저히 장로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위축되고, 목소리가 점점 먹혀들어 가 작아졌다. 그런 여주를 잘 알기에 장로는 조금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다.

 

 

“백현이가 제너럴을 데려왔다는 소문에 의아하긴 했다만, 직접 보니 안심이 되긴 하구나.”

“…네?”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 늙은이 눈에는 보이거든. 생명의 빛이.”

“아…”

“은은하게 비치는 푸른 빛이 그 어느 날 누군가와 많이 닮았구나.”

 


생명의 빛이니 뭐니, 누굴 닮은 건지 그런 건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장로의 시선이 집요하게 파고들자 여주는 시선이 절로 내려갔다. 처음 장로의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을 때의 그 숨 막히던 느낌이 다시금 등줄기를 타고 번졌다. 누군가 몸을 콱 틀어쥔 듯 조여오는 압박을 잊을 수 있을 리가…

 


“백현이를 잘 부탁하마.”

“네…? 아… 네…”

“네는 무슨, 쓸데없는 말 할 거면 우리 가. 그냥 할배 잘 지내고 있나 해서 보러 온 거야.”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이 아이를 소개해주려고 온 줄 내가 모를 줄 알아? 하여간 누굴 닮았는지 성깔하곤. 쯧쯧.”

“…됐어. 김여주, 이제 가.”

“이름이 여주인가 보구나. 저 버르장머리 없는 것 말은 듣지 말고, 이 늙은이랑 조금 더 놀다 가려무나.”

“어…”

 


장로가 웃으며 여주의 손을 감싸오자, 여주는 당황하여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현을 올려다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현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곤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래, 마을은 좀 둘러봤니?”

“네…”

“마을에 오는 것은 좋지만, 항상 백현이 옆에 있어야 한다. 알겠지? 너도 알겠지만, 이터널에는 제너럴에 대한 반발심을 가진 자들이 많아. 혼자 다니면 먹잇감이 되고 말 거다.”

“이미 먹잇감 될 뻔했어.”

“…저런, 마루와 하루냐.”

“걔네들 아니면 누가 건드려.”

“고놈들 장난이 여간 고약한 게 아니지.”

 


장난? 장나안? 제 목숨을 잃을 뻔했던 그 경험이, 겨우 그들에겐 장난이었다? 아주 쉽게 말하는 장로에 자신이 겪은 그때의 일과 심정을 모두 털어버리고 싶은 것을 참아낸 여주가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올렸다.

 


“장난이… 조금 심하더라구요.”

“죽을 뻔 해놓고, 그런 소리를 잘도 하는군.”

“…”

“그게 무슨 소리냐.”

“…”

 


조금 낮게 가라앉은 듯한 장로의 목소리에 여주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긁어 부스럼 만들어 좋을 게 없는데, 현은 무슨 생각인지. 현은 진즉 모든 사실을 말하려 했던 것처럼 여주에게 있었던 일들을 불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장로의 얼굴은 덤이며, 여주는 좌불안석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만 꾹 다물고 묵묵히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길 기도할 뿐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불과 3일 전이야.”

“…”

“…”

“여주야 백현이 녀석 말이 모두 사실인 게냐.”

“… 어… 아마… 그렇…겠죠…?”

“이런.”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은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없이 고개가 올라가고, 한참을 눈을 감고 서 있던 장로가 여주의 목이 아파질 때쯤 눈을 천천히 뜨곤, 입을 열었다.

 


“그래. 살아남은 게 기적이구나. 아무래도… 다른 모양이지.”

“…”

“백현아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냐.”

“할배는 몰라도 돼.”

“마을에 난 소문들을 내가 못 들었을 것 같으냐.”

“알아서 해.”

 


현의 말에 장로는 한숨을 내쉬고는 뒤돌아 벽난로 위로 놓인 한 액자 앞에 서서히 다다른다. 그의 움직임을 좇던 현의 시선이 장로의 팔뚝 너머로 보이는 액자로 향한다.

 


“내가 이렇게 되기까지 어땠는지 알고 있지 않니.”

“…난 할배처럼 안 될 거야.”

“그래, 아무렴 그래야지.”

“내가 시작한 일. 내가 끝내.”

 


그 말을 끝으로 현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이 일어나자 여주 옆에 엎드려 있던 카이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장로와 현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던 여주의 팔을 끌어올리는 현에 결국 여주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아니, 사람 앉혀놓고 못 알아듣는 말만 골라서 해. 이게 무슨 상황인데, 대체. 아까까지 나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였는데… 뭐냐고!

 


“가자.”

“어??”

“할배. 걱정 좀 그만해. 아직도 내가 무슨 애야?”

 


5살이면 한참 애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흘겨보는 여주에 현은 여주를 한 번 노려보고는 장로의 뒷모습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냥 쉬라고. 이제 쉬어, 좀.”

“…”

“나 간다.”

 


현은 그대로 여주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어어! 얼빠진 소리를 내며 현을 따라 집을 나온 여주는 집 밖으로 나와 우뚝 멈춰서는 현에 따라 멈춰섰다. 현이 뒷모습 너머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화가 난 듯 보였다.

 


“이렇게 그냥 나와도 되는 거야?”

“…”

“현.”

“어, 돼.”

“하여튼 성질머리, 진짜. 나한테 말 좀 곱게 하라더니- 너도 뭐 피차일반이구만.”

“닮아 가나 보지.”

“뭐? 장난해?”

 


현은 잘도 대꾸하더니 이제는 대답도 않는다. 안 그래도 화나 보였는데, 괜히 심기 건드렸나? 여주는 괜히 눈동자를 굴리며, 은근하게 현의 눈치를 살폈다. 뒤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결국 현은 여주를 향해 뒤돌았다. 현의 표정을 살피려 힐긋대던 여주가 움찔거리며 현의 눈을 마주했다.

 


“왜… 뭐…”

“이제 만족해?”

“그니까 뭐가…”

“그렇게 오고 싶다던 마을에 왔잖아.”

“그거야 뭐… 당연히 밖에 나오니까 좋지. 사람 구경도 하고.”

 


따지고 보면 사람은 아니지만, 쨌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났다는 게 중요했다. 그것도 이터널에서 여주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누군가를 만난 것. 단순한 호의일지라도, 모든 것이 대비되어 보이듯 깊게 와닿았다. 비록 그 비율이 손톱 떼 만큼이었지만 말이다.

 


“그래. 이제 집에 가자.”

“벌써? 좀 더 놀다가 가면 안 돼?”

“여기에 놀 게 뭐가 있어. 놀잇감이나 되겠지.”

“뭐… 시장이나 그런 곳에 가볼 수도 있는 거잖아?”

 


시장이라는 말에 여주 옆에 있던 카이가 발을 땅에 구르며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현의 옆으로 가 머리를 부비는 것을 보아하니 카이도 시장에 가고 싶은 모양이다. 현은 그런 카이를 잠시 내려다보곤 한숨을 푹 쉬었다.

 

“하... 집에 먹을 거 없으니까 가서 뭐라도 사자.”

“아싸!”

 


현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카이가 왕왕 크게 짖었다. 여주는 의외로 쉽게 승낙하는 현에 마음이 들뜨는 듯했다. 여주가 카이에게 얼른 안내하라 손짓하자 카이가 킁킁거리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카이 뒤를 신난 발걸음으로 뒤따르는 여주에 결국 현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 뒤를 따랐다.

 










 

시장은 마을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터널의 모든 이들이 모이는 곳이니. 그런 곳에 가는 와중에 잔뜩 신이 난 여주를 보며 현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왜 저런 여자를 괜찮다 믿고 이터널까지 데려왔을까. 지금에선 아무 소용 없는 지난날의 자신을 책망했다. 그래, 지금 하는 모든 생각이 소용없었다. 애초의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라면 모든 게 불가피한 것들뿐이니. 그리고 장로가 봤다던 그 생명의 빛이 현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 빛이.

 


“근데 현, 넌 맨날 밖에서 밥을 먹고 들어오잖아. 대체 어디서 먹고 오는 거야?”

“그게 왜 궁금해?”

“같이 사는 입장에서 궁금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별걸 다 짚고 넘어가려 그래.”

“이제야 나한테 관심 좀 가져주나 싶어서.”

“내 관심이 그렇게 고파? 관심 타령 진짜-”

 


시장으로 향하는 길. 오른쪽엔 카이가, 왼쪽엔 현이 여주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걸어갔다. 분명 자신이 현의 호위인데, 뭔가 구도가 이상했다. 하긴 현은 이해하려 들면 안 되는 인물이지. 그냥 그러려니 넘어간다. 분명 이터널에게 노려질 자신을 위한 것일 테니.

 


“사냥해서 먹고 들어가는 거지.”

“사냥??”

“그래. 이터널엔 절반 이상이 숲이야. 우리한테는 뷔페나 다름없는 곳이고.”

 


이터널의 개체 수는 제너럴보다 눈에 띄게 적으니 당연히 마을의 크기 또한 작았다. 그러니 제너럴과 비슷한 땅덩어리에는 숲이 더 많을 수밖에. 넓은 숲만큼이나 많은 생명체가 존재하고, 모든 숲이 이터널의 사냥터인 것이다. 물론 번식기에는 특정 숲에 대한 사냥을 금지하여 생명체의 멸종을 막는다.

 

현이 아주 느긋하고, 여유만만해 보이는 행동만 보여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사냥의 귀재라고 불린다. 이터널에서 현의 다리를 따라잡을 이는 아무도 없을 거라는 소문이 진실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후계자인 현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현은 진즉 후계자 자리를 탈환 당하고도 남았을 테니.

 


“넌 주로 뭘 먹어?”

“그런 것까지 굳이 설명해 줘야 해?”

“궁금하잖아.”

“솔직하게 말해줄까?”

“여기서 거짓말해서 뭐 하는데. 나 참 이해가 안 가네.”

“동족 빼고 다 사냥해. 나는.”

 


그렇다고 다 잡아먹는 건 아니지만. 이라며 뒷말을 덧붙인 현에 여주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아마 식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사냥이라면… 거슬리면 사냥한다… 뭐 이런 건가? 아씨. 개같네. 여주는 속으로 이미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도 남았다. 아무래도 현의 심기를 가장 많이 건드린 건 자신일 테고… 지금이야 필요에 의해 옆에 둔다지만, 나중에는…

 


“또 또 쓸데없는 생각 하고 있지, 김여주.”

“니가 어떻게 알아! 이게 쓸데없는 생각인지 아닌지!”

“눈에 보여. 여주, 니가 하는 생각.”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여주는 말을 내뱉고는 다급하게 다른 말로 화제 전환을 했다. 아까부터 자신을 쳐다보는 이들의 시선이 어쩌고저쩌고… 혹여나 현이 자신에 대해 깊게 알려고 들까 봐. 집요함의 끝을 보여주는 현이 김여주가 아닌 오필리아의 존재를 알려고 들까 봐. 그게 두려워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현은 다행히 여주의 그런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여주의 이어지는 말에 불친절해도, 꼬박꼬박 대답해주었다.

 


“와아- 되게 크구나.”

“큰 건가? 제너럴은 여기보다 더 넓을 텐데.”

“그런가?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야.”

“먹고 싶은 거나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왜? 니가 다 사주게?”

“응.”

 


오호- 그렇단 말이지? 아주 그 말을 후회하게 해주마. 여주는 현에게 당했던 수치를 아주 제대로 물질적으로 갚아주겠다 생각하며 눈에 불을 켰다. 그렇게 시장을 다니며 이것저것 살 것들을 샀다. 먹을 건 적당히, 여주가 입을 옷도 직접 대보고 사기도 했다. 물론 뒤따르는 시선들은 부담스럽다 말하지 못할 정도로 부담스러웠지만.

 


“살 건 다 산 거 같은데. 이제 그만 가는 게 어때?”

“음…”

“카이도 지쳤어.”

-끼이이잉…

 


카이가 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낑낑거렸다. 그 모습에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액세서리를 파는 곳에 잠깐 발이 묶여 손에 쥐고 있던 펜던트를 내려놓았다. 현은 펜던트를 내려놓는 여주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갖고 싶은 건 아닌지 여주의 손에서 미련 없이 떠나는 펜던트에 현도 곧 시선을 거두었다.

 

현은 집에 간다는 생각에 화색이 도는 듯했다. 딱 필요한 것들만을 샀지만, 이 모든 과정이 사냥보다 더 힘들었다. 혼자 왔더라면 바로바로 갈 곳만 가고, 살 것만 사서 나오니 이렇게 오랫동안 시장에 머물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현에게 말을 붙여오는 이들과 여주에 대한 궁금증을 피워내는 이들까지 신경 쓰며 상대하다 보니 체력소모가 심했다.

 

시장을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조금 뒤면 어둠이 내려앉을 듯, 해가 까무룩 지고 있었다. 여주 또한 오늘 마을 마실이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 피곤함보다 만족감이 더 크기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입가가 희미하게 말려 올라가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덩달아 웃음을 흘린 건 현이었다. 저렇게도 좋을까. 언젠가 여주에 제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저 방랑자일 뿐이라는 말이. 그래 방랑자였던 이가 꽉 막힌 곳에 틀어박혀 있으니 답답했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여주라면 더더욱.

 


“현.”

“응.”

“나는 이때까지 이터널이라면 제너럴을 다 싫어할 거라 생각했어. 그 생각을 가장 먼저 깨트린 게 너지만….”

“...”

“근데 오늘 반이라는 자와 장로님을 만나면서 신기했다? 너야 내가 필요해서 나를 이터널에 데려온 거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잖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들도 아니니까.”

“...”

“이터널은 왜 전쟁이 끝나고, 평화협정을 맺고도 제너럴을 싫어할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되려 왜 저들은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더라.”

 


여주는 제 옷이 든 천 가방을 붕붕 흔들며, 제 생각을 가감 없이 말했다. 그 모습을 차분히 보던 현은 왠지 속이 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필요’ 그래, 여주에게 필요하다며 함께하자고 말한 건 현, 자신이 맞다. 하지만 매번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는 것 마냥 ‘필요’를 강조하며 가라앉는 여주의 모습이 거슬렸다. 더 웃긴 건, 그 모습이 대체 왜 거슬리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반은 제너럴과 이터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야.”

“...뭐?”

“생각보다 그런 이들은 이터널에도, 제너럴에도 많이 있지.”

“...”

“평화협정 이전에는 지금처럼 제너럴과 이터널을 잇는 통로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어.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군대의 눈을 피해 경계를 넘어 다닐 수 있었지. 게다가 이터널은 너도 봤다시피 이터널의 모습을 숨길 수 있어. 꼬리를 숨기면 제너럴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모습이니까. 충분히 제너럴과 섞여 살아가는 데에 문제가 없지.”

“전혀 몰랐어….”

“하지만 제너럴에서 이터널로 넘어오는 자들의 삶은 그만큼 간단하지 못해. 평범한 인간보다 모든 감각이 예민한 우리는 동족이 아닌 존재를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챌 수 있어. 숨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거지. 와중에 증오하던 제너럴이 이터널에 오는 걸 누가 반가워할까. 그때만 해도 대중의 제너럴 혐오가 만연했으니.”

“그럼 반의 부모님은….”

 


반이 이터널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반의 부모 중 제너럴인 자가 이터널로 넘어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의 말처럼 평화협정 이전에는 이터널의 제너럴 혐오는 당연시 여겨지는 것이었다. 물론 제너럴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도, 제너럴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불법이고, 반역인 것처럼 여겨져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었다. 그런 자들이 자연스레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이터널의 제너럴 혐오가 획일화된 것이다.

 


“반의 아버지가 제너럴이었지. 그때는 제너럴과 이터널 사이에 평화협정에 대한 회담이 오가던 중이었어. 이미 반의 어머니는 반을 뱃속에 품고 있는 상태였고, 평화협정을 믿고 반의 아버지는 이터널로 넘어왔지. 때가 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믿고.”

“...”

“하지만 짐승의 경계에 있는 우리에게 그런 건 없어. 본능에 충실하고, 이성보단 감정이 앞선다. 그래서 그 끝은 비극이었어. 다행인 건...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내온 반이 엇나가지 않았다는 거지. 그랬기에 이터널에 계속 남아있을 수도 있는 거고.”

 


여주는 현의 말에 무언의 말을 덧붙일 수가 없었다. 제너럴과 이터널 사이의 감정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사라지지 않는 흉터와도 같은 것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 현실을 직면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너도 엇나가지 마.”

“…뭐?”

“제발 내 말 좀 들으라고, 여주야.”

 


현은 자신을 의아하게 올려다보는 여주를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여주의 머리 위에 톡 하고 내려앉았다. 천천히 움직이며 쓰다듬는 행동에 여주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그래야 이터널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

“얼른 가자. 더 어두워지기 전에.”

 


여전히 현에게 묻고 싶은 게 많은 여주이지만, 현은 늘 그렇듯 타이밍 좋게 빠져나간다. 현의 손길이 다시 멀어지고, 미련 없이 뒤돌아 걷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주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다시금 피어나는 원초적 의문.

 

백현이 김여주를 왜 필요로 하는가.

 











“현! 나 들어가도 돼?”

 


현의 방문 앞에 기웃거리던 여주가 기어코 문을 똑똑 두드렸다. 여주가 제 방문 앞에서 서성이는 걸 진즉 알고 있던 현이지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방에 찾아온 목적은 뻔했다.

 


“그냥 들어올 거면서 물어보긴 왜 물어보는 거지?”

“음… 예의상? 너는 그냥 불쑥불쑥 문 열잖아.”

“나랑 너는 다르지.”

“어쨌든, 할 말 있어!”

“안 돼.”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노크는 노크대로 했지만, 현의 들어오라는 대답도 듣지 않고 여주는 문을 열어젖혔다. 현의 방에 한 번 들어와 본 이후로 현이 방에 있을 때는 업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안 여주지만 무료함에 견딜 수 없었다. 골때린다는 듯이 이마를 짚은 현이 펜을 내려놓았다. 여주가 방에 들어온 이상 업무는 물 건너간 거나 다름없었다.

 


“보나 마나 뻔하지.”

“뭐가.”

“멀리 나가자, 아니면 마을에 가자. 이거 아니야?”

“…”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 짓지 마. 맨날 니가 하는 말이니까.”

 


현의 단호한 대응에 입을 한번 비죽이곤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툭 내린다. 마을에 다녀오고 또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는 것도 없는데 막상 지나고 보면 뭔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이후에도 현은 여주를 집에 두고 성에 가곤 했다. 그때마다 엉겨 붙는 여주를 떼어내느라 항상 30분은 더 일찍 출발해야 했다. 안 된다고 말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속 터지는 건 현뿐이었다.

 


“지는 맨날 나가면서.”

“나는 일 때문에 가는 거고.”

“나 지금 이해 안 되거든? 나 데려다 놓고, 대체 하는 게 뭔데! 그냥 종일 집에서 뒹굴뒹굴하다가 하루 끝난다고.”

“최고 아니야? 종일 집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일도 안 해, 밥도 나와.”

“차라리 일을 시켜. 지겨워서 죽는 꼴 보기 싫으면.”

 


여주를 마을에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아주 많았다. 당연하게도 여주를 지켜보는 시선, 마을에 가면 불가피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마루와 하루, 그리고 마을 전체에는 이제 기정사실화된 소문들.

 


“왜? 내가 마을에 가면 못 볼 거라도 봐? 저번에도 갔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못 볼 건 아니고, 못 들을 걸 듣겠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궁금해?”

“안 궁금할 리가 없잖아?”

 


여주가 팔짱을 끼고 집요하게 자신을 쳐다보자 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픽 웃음을 흘렸다. 알게 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무슨 말을 할까. 현은 창문 너머로 펼쳐진 수평선 끝을 멍하게 바라보면서도 여주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왜 자꾸만 기대를 거는 걸까. 그것도 한낱 제너럴 여자에게.

 


“그럼 내일 마을에 갈 때 같이 가도록 해,”

“진짜?! 진짜 나 데리고 가는 거야??”

“응.”

“아니지! 그건 그거고, 아까 물은 거에나 대답해!”

“그건,”

 


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에 은은하게 비치는 현의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 보려는데, 그 순간 현이 다시 뒤돌았다. 뒤돌아 여주 앞에 당도한 현이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여주의 머리에 손을 툭 얹었다. 톡톡. 쓰다듬는 것도 아닌 그 손짓에 여주는 몸을 뒤로 뺐다.

 


“직접 가서 들어 봐.”

“지금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

“응. 덧나.”

“한 마디를 안 지지?!”

“나만 그런 거 같아?”

 


허공에 머물던 현이 손을 거두곤 여주를 지나쳐 방문을 열었다. 여주의 시선이 현을 따라가자 현은 문틀에 기대어 방 밖으로 고갯짓을 한다. 잔뜩 불만 가득한 얼굴이지만 방 밖으로 걸음을 옮긴 여주가 자신의 방문 앞에서 다시 멈추더니 돌연 뒤를 돌았다. 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현은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왜?”

“...”

 


여주는 그 뒤에도 한참 현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에 현의 입가에 맴돌던 미소도 서서히 지워졌다. 현이 다시 입을 떼려는 찰나에 여주는 고개를 돌리며 제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짜증 나서 째려본 거야.”

“허….”

“내일 같이 가는 거 약속한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여주는 방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와서는 언제나 그랬듯 침대에 몸을 던졌다. 부드러운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쿵쿵 뛰는 심장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왜, 대체 왜 자꾸만 웃고, 왜 자꾸만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굴어? 그리고 지가 먼저 말 꺼내놓고 그게 뭔지 가르쳐 주지도 않고...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미친 거라 생각하자. 너무 갇혀있어서 몸이 망가진 거라고. 김여주의 주체할 수 없는 활동성이 날뛰는 거라고.

 



















 

“반이랑 같이 있어. 나는 카이랑 같이 성에 가봐야 하니까.”

“나 혼자?”

“반, 부탁할게.”

“후계자님 얼른 다녀오셔요. 걱정하지 말고.”

“너보단 이쪽이 걱정돼서 말이지.”

 


현은 반 옆에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주를 눈짓했다. 그에 반은 아! 하고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털끝 하나 못 건드리게 할 테니까. 다녀와. 무슨 일 있으면 사람 보낼 테니까.”

“...그럼 갈게. 여주, 말썽 피우지 말고 반이랑 놀고 있어.”

“내가 애냐고. 말썽을 왜 피워 내가.”

“그러게. 애도 아닌데, 그치?”

 


현의 말에 잔뜩 자극받은 여주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자리를 피하듯 뒤돌아 나가버렸다. 현은 성에 업무를 보기 위해 여주를 반에게 부탁했다. 여주는 사전에 알지 못했던 전개라 조금 당황했지만, 금세 미소를 지었다. 현이 없다. 카이도 없고. 그렇다는 건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름이 여주씨라고 했죠?”

“아, 네네.”

“여기 편하게 앉아요. 커피 마셔요?”

“...아뇨. 저 커피는 안 마셔요.”

“취향 확고해서 좋네. 그럼 핫초코는 먹겠죠?”

“네.”

“잠시 기다려요. 가져다줄게요. 제가 핫초코는 또 기가 막히게 만들거든요.”

 


반의 쉴새 없이 쏟아지는 말에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은 신이 난 듯 꼬리를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며 구석에 자리한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지내는 건가? 분명 누군가 지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듯한데… 막사와 같이 천으로 덮인 이곳은 내부가 사무실 같기도 하고.

 


“금방 왔죠? 여기요.”

“아...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저번에는 백현이가 얼마나 급하게 굴던지... 제대로 통성명도 못 했네요. 제 이름은 반이에요. 대화하면서 대충 들으셨죠?”

“네. 저는 김여주입니다.”

“앞으로 자주 볼 텐데. 잘 부탁드려요.”

“저두요. 그런데 여기는 뭐 하는 곳이에요?”

“아 백현이가 말 안 해줬어요?”

“저한테 그런 거 전혀 말 안 해줘요.”

 


여주의 투정 섞인 말투에 반이 푸핫하고 웃어 보였다. 종국엔 손으로 입까지 가려가며 끅끅 웃는 반에 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안 웃긴데.

 


“왜 그렇게 웃어요?”

“아, 아뇨.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그냥 그 녀석답다 싶어서요. 큼큼. 여긴 인력소예요.”

“인력소요?”

“네. 뭐 특정 인력소는 아니고... 일자리가 없거나, 취미 활동처럼 주민들이 이용하는 곳이에요. 저기 보면 의뢰 게시판이 있어서 다들 각자 값을 지급하고 일손 구하는 거죠.”

“아아- 반씨가 운영하는 거예요?”

“흠... 제가 운영하는 건 맞지만, 저한테 이 자리를 준 건 백현이죠.”

 


현이 만든 인력소? 의외라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은 거 딱 안 할 거 같은 성격일 거 같은데. 나름 이것저것 많이 하는구나. 반이 만들어준 핫초코를 한 모금 들이킨 여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 그런데 현이 이터널 후계자라는 거... 진짜예요?”

“왜요, 아닌 거 같아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하긴 그 녀석 하는 행동 보면 의심하는 거 이해 가요. 백현이는 이터널 후계자가 맞아요. 백현이 아버지가 지금 이터널의 수장이시죠.”

“아….”

“사실 혈족으로 이어지는 수장 자리는 아니지만, 그 피가 어디 가겠어요?”

 


이전에 현이 말한 적이 있다. 이터널에서는 힘이 곧 권력이라고. 그러니 아무리 혈족이라고 해도 힘이 약하다면 후계자의 자리에 설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대로 수장 자리를 맡아온 혈족이라면 그 힘도 대대로 이어져 와 다른 이들이 맞설 수가 없는 거지.

 


“백현이가 여주씨한테 정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나 보네요.”

“...그렇죠. 언제는 동료니 뭐니... 그러더니.”

“동료요?”

“...말하기에는 너무 복잡한데... 그렇게 됐어요. 어쩌다 보니….”

“하긴, 처음에 백현이가 여주씨를 자신의 호위라고 소개했으니….”

 


반은 여주의 말이 무슨 말인지 대충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은 오늘 성에 간다고 했는데…. 혹시 언제 오는지 알아요?”

“음…. 아마 적어도 2시간 뒤나 오지 않을까요? 오늘은 간부들끼리 모여서 회의를 한다고 들었는데.”

“아 그렇구나~ 그럼 반씨 저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부탁이요?”

 








 





“여주씨 엄청 소박하네요.”

“반씨가 일주일 내내 나오지도 못하고 갇혀 지내보면 제 심정을 백번 천번 이해할 거예요.”

“백현이가 지독하게 구는 면이 없지 않아 있긴 하죠?”

“어우, 말도 마요! 어찌나 깐깐하게 구는지.”

 


여주의 부탁은 반에게 아주 단순하고도 간단한 부탁이었다. 마을 구경을 시켜달라는 것. 물론 전에 마을에 왔을 때도 마을을 둘러보긴 했지만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었기에 여유롭게 둘러보지는 못했던 것이 내심 아쉬웠던 여주였다. 현이 오기 전까지 반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반의 흔쾌한 승낙에 여주는 주먹을 꽉 쥐어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역시 현이 과하게 굴었던 거였어.

 


“하지만 백현이가 그렇게 굴었던 것도 아예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네요.”

“어째서요?”

“음…. 아무래도 여주씨는 제너럴이니까…? 위험하죠. 마을을 돌아다니기에는.”

“하지만 현이 처음에 절 데리고 왔을 때, 단순히 호위하라는 조건이었어요. 그런 제가 위험에 처하는 상황은 어쩌면 당연하게 맞이할 상황 아닌가요?”

“여주씨와 백현이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자라면 누구든 위험한 상황을 피하려 노력할 거예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이렇게 좋아하는 걸 못 하게 하는 건 백현이가 너무 했네요. 그쵸?”

 


현의 편을 들자 시무룩해 하는 여주에 반은 미소를 걸치며 여주의 심정을 공감해주었다. 반의 말에 여주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그에 반은 여주가 조금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차마 건네지 못한 질문을 삼켜내며 여주에게 길을 안내했다.

 


“여긴 학교예요.”

“아- 이터널의 학교에서는 뭘 배워요?”

“학교가 다 똑같죠, 뭐. 말하는 거 배우고…. 아마 제너럴이랑 교육이랑 비슷할 거예요. 다만,”

“다만?”

“수인으로서 지켜야 할, 그리고 어기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해 배우는 거죠. 쉽게 말하면 도덕 수업?”

“역시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네요.”

“그렇죠?”

 


여주는 학교를 둘러싼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공을 차면서도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제너럴 교육이랑 비슷할 거라는 반의 말. 사실 공감할 수 없었다. 여주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으니까. 제너럴에 학교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황족은 오로지 황실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며, 그 외에도 국정에 관한 것들 또한 공부하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제너럴의 오필리아 황녀는 외부에 얼굴을 보이면 안 됐으니….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머나먼 얘기였다. 소속감 같은 건.

 


“반씨도 그럼 여기 학교에 다녔겠네요?”

“그렇죠? 이터널에는 학교가 이곳 하나뿐이니.”

“학교란 곳은 어떤가요?”

“...”

“조금 부끄럽지만, 저는 학교를 안 다녔거든요.”

“학교는…. 음…. 솔직하게 말하면 그저 귀찮은 곳이었어요.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더 가까웠나?”

“어째서요?”

“...”

 


반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여주는 빤히 그런 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씁쓸한 듯 슬픈 얼굴을 하고 고민하는 듯한 반의 표정에 여주는 아차 싶었다. 반은 제너럴과 이터널의 혼혈아. 그의 학교생활이 순탄치 않았음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상당히 실례되는 질문을 한 것 같아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여주는 화제 전환을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려 웃으며, 다른 질문을 건넸다.

 


“아, 그러고 보니까 현이 자기 나이가 5살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럼 반씨도 5살인 거예요?”

“...그렇죠?”

“...거짓말이죠? 아니면 제너럴이랑 나이 계산이 다른 건가? 5년을 살았는데 어떻게 그 모습을….”

 


나이의 진상에 대한 물음에 반이 긍정을 보이자 여주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사실 현이 5살이라고 했을 때, 순간 믿을 뻔했지만, 후에는 장난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까지 맞다고 하니 상당히 머리가 어지러울 수밖에. 여주의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에 반이 또다시 크게 웃었다.

 


“백현이는 참 고약한 취미가 있나 봐요. 그게 아니면 여주씨를 놀리는 게 재밌는 건가?”

“...거짓말 맞죠?”

“거짓말은 아니에요. 제너럴이랑 나이 계산 방법이 다르니까요. 이터널은 태어난 지 20년째부터 나이를 세요. 제너럴 식으로 따지자면…. 24살이겠네요.”

“하….”

 

여주는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사실 현이 5살이든 24살이든 알 바가 아니긴 했지만, 항상 현에게 이처럼 농락당하는 여주인데, 그 상대가 밥을 먹어도 한참을 덜 먹고, 인생 경험이라곤 없을 법한 5살이라는 건 상당히 자존심 상했을 부분이었다.

 


“저는 현이 정말 싫어요.”

“싫은데 어떻게 같이 살아요.”

“그,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죠. 전 거기 아니면 갈 곳이 없는걸요.”

“그래요. 그러니까 항상 백현이 옆에 붙어있어요.”

 


달래는 듯한 반의 말에 여주는 남모르게 이를 바득 갈았다. 감히 나를 또 속여? 반이 자신을 멍청이로 볼 게 뻔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다스리는 와중에 여주는 번뜩 든 생각에 고개를 팍 들었다.

 


“아아!”

“어어! 왜, 왜?!”

“뭘 그렇게 놀라요.”

“아니, 뭐... 어디 아픈 건가 해서요. 여주씨 아프면 제가 곤란해지거든요.”

“...그건 또 무슨... 아니, 그나저나 반씨 나 물어보고 싶은 게 또 있는데….”

“언제는 물어보고 질문했어요? 그냥 물어봐요.”

 


그래, 분명 오늘 현이 여주를 마을까지 데리고 온 것은 단순히 여주의 지겨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마을에 오면 못 들을 말을 들을 거라고 했지. 그리고 그걸 직접 들으라고 했지. 이제껏 밖에 나왔다는 해방감에 취해서는 목적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현이 나한테 마을에 오면 내가 못 들을 걸 듣는다고 했거든요? 근데 본인 입으로는 절대로 말 안 하더라구요. 직접 확인해보라면서.”

“아-”

“그게 뭔지 반씨는 아는 거죠? 그러니까 오늘 나를 반씨한테 맡기고 갔을 거 아니야.”

“백현이한테 사전에 들은 내용은 없지만, 충분히 말해줄 수 있죠.”

 


제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반에 여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궁금증에 갈증이 이는 듯,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상당히 뜸을 들이는 반에 여주가 반의 팔목을 붙잡고 흔들며 재촉했다.

 


“사람 피 말리게 하지 말고, 얼른 말해봐요!”

“나도 좀 많이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초면에 물어보기엔 실례일 거 같아서 못 물어봤는데... 여주씨가 먼저 물어보니까, 뭐….”

“...”

“사실 나는 백현이가 당연히 마루랑 후에 반려를 맺을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들은 여주의 머릿속이 또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마루? 반려? 여주가 아무것도 모르는 게 당연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묘한 느낌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현과 마루가 원래는 결혼할 예정이었다는 건가? 하지만... 다시 목적을 잊은 여주가 입을 달싹였다. 지금 여주의 심정은 그랬다. 자신이 알아야 할 일도, 현이 자신에게 말해야 할 일도 아니지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현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제대로 정의 내릴 수가 없어 미칠 노릇이었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는데, 그 이유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여주의 표정을 찬찬히 살핀 반이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도 사실 들은 거라 여주씨한테 물어볼게요.”

“네?”

“여주씨가 백현이 약혼자라는 거, 사실이에요?”

 


심장의 쿵쾅거림이 한계치를 훌쩍 넘었다.

하지만 여전히, 여전히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첨삭은 빠른 시일 내에 모두 마치겠습니다잇-)


다덜 많이 기다리셨쥬...?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업로드! 그 동안의 비축분을 쏟아부어 연재텀이 조금 길 수 있어여...

도망간 건 절대 아님 절대 절대 아님 ~.,~


곧 크리스마스네용 벌써 시간이... 

이젠 크리스마스 오면은 나이 한살 더 먹을 생각부터 하게 돼서 넘 슬픔여 :(


하지만 연말 분위기 너무 좋고~ ^^

독자님들도 즐거운 연말 보내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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