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를 두고 나온 고운은 동네 초입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달렸다. 더위에 달궈진 얼굴이 화끈거렸는데, 고운은 이것이 달려서 그렇다고 여기기로 했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머리카락처럼 지금 고운을 휘감은 부끄러움 따 따위 외면하기로 했다.

 

 평소 ‘좋아한다’라는 마음을 잠들기 전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했다. 마치 작은 상자에 담아둔 보물 같은 마음이었다. 자꾸 꺼내어 보고 싶고, 계속 생각이 났다. 게다가 너무 자주 만지면 닳을까 조심스럽기도 했다. 그런 귀한 마음을 덥석 꺼내어 보여달라니…. 물론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거라 막연히 예상했지만, 그래서 오늘도 보라를 두고 말을 했지만…. 이토록 금방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보라의 입을 빌려 꺼내어 본 마음은 생각보다 더욱 거대하고 가림이 없었다. 처음으로 감춰두고 싶었다. 외면하고 잠시만 숨을 돌리고 싶었다. 부푼 가슴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려 했으나…. 눈치 없는 보라 때문에 실패했다. 

 

 고운은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헉헉거리며 뱉었다. 끈적해진 침에 자꾸만 목이 타서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눈앞의 편의점으로 들어가 생수를 집어 든 고운이 계산대 앞의 껌에 시선을 고정한 것은 다른 이유가 없었다. 자꾸 목구멍에서 피 맛이 나는 것 같아 이를 지우고 싶었다. 비닐을 벗기고, 종이 포장지를 치우고, 은박지를 열어 드러난 껌을 입에 넣고 씹는 동안. 고운은 입안에 퍼지는 화한 기분에 지끈거리는 머리가 진정되어감을 느꼈다. 이 사이에서 달라붙는 껌을 분주히 씹어내자 침이 고였고, 입 안에 고인 달콤한 침을 목으로 넘겼다. 분식집으로 가는 내내 껌을 씹은 고운이 주문을 앞두고는 주머니에 넣어둔 종이를 꺼내 껌을 뱉었다. 

 

 “사장님, 저…. 떡볶이 이 인분이랑…. 모둠 튀김이요…. 어….”

 

 오가는 길 자리한 곳이지만, 고운이 올 일은 없던 곳. 이전에 보라가 주문하던 것을 복기하듯 천천히 입을 움직이던 고운을 보며, 인상 좋은 사장은 방긋 웃었다.

 

 “오뎅은?”

 “아…. 오뎅이요?”

 “응. 두 사람 먹을 거면…. 세 개 천 원이니까 해요. 국물도 넉넉히 담아줄게.”

 

 고운은 사장이 담아주는 대로 받아서 들었고, 한 손에 들린 묵직한 비닐봉지를 손으로 연신 들어 보이며 무게를 가늠했다. 이 중 대부분은 보라의 뱃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보라가 떡볶이를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흡족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것이고, 보라에게 ‘좋아한다.’라고 말하기 위해 속으로 연습하느라 먹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보라가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니, 그걸로도 충분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길. 고운은 뜨거운 열기를 품은 것에 손이 데는 기분이었지만, 콧노래마저 흥얼거렸다. 

 

 맛있게 먹고, 함께 방을 구경하고,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집 앞의 가로등이 불을 밝힐 것이다. 어둠이 스미는 시간, 낮인지 밤인지 경계가 모호해지는 그때. 고운은 한결 명확해진 마음을 이야기할 예정이었다. 하늘의 별이 내려앉을 듯 반짝거리는 도시를 품에 안고, 보라와 함께 그 안온을 즐기고 싶었다. 고백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라 생각했다. 보라를 보내고 찾아온 밤. 고운은 보물처럼 간직한 마음을 다시금 확인하기 딱 좋은 시간.

 

 고운은 기쁜 마음으로 보라가 기다리는 집으로 달려갔다. 누군가 기다리는 곳이 있다는 것은, 귀가를 서두르게 만든다. 늘 비어있던 집이 오늘은 다르게 느껴진다. 보라가 보이지 않지만, 보라가 있을 거로 생각하니 집이 가득 찬 느낌마저 들었다. 대문을 열고 현관문을 열기까지 일 분도 걸리지 않았고, 더위를 안은 채 집에 뛰어 들어온 고운이 확인한 것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거실에 나와 있는 보라였다. 

 

 “뭐 봐?”

 

 뛰어온 것을 들킬까 숨을 천천히 고른 고운이 묻자. 복도 벽에 줄지어 걸린 사진을 살피던 보라가 바로 서서 고운에게 다가왔다. 

 

 “밖에 많이 덥지?”

 

 그리고 고운이 쓰는 샴푸 향기를 묻힌 손으로 고운의 잔머리를 정돈해주었다. 

 

 “와…. 식지도 않았어! 밖에 얼마나 더운 거야?”

 

 여전히 뜨끈뜨끈한 비닐봉지를 받아 든 보라가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고운은 그런 보라의 턱 끝을 응시하다 시선을 돌렸다. 

 

 “식탁에서 먹으면 돼?”

 

 보라는 비닐봉지 속에 든 것을 능숙하게 꺼내어두었고, 고운은 재빠르게 찬장을 열어 접시를 꺼냈다. 비싼 접시라고 했다. 기본적인 것부터 돈값 하는 것을 써야 한다고 강조하던 아버지가 주방 살림에 투자했고, 정작 자주 쓰지는 못하던 접시였다. 기껏 사두고 모셔두는 접시를 과감하게 꺼낸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보라에게 자신이 내어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할 수만 있다면 고운은 떡볶이에 금칠이라도 하고 싶었다. 순간 드는 생각에 아버지를 떠올린 고운이 피식 웃었고, 접시를 받아 들던 보라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웃어?”

 “웃긴 생각 나서.”

 “뭔데?”

 

 손을 분주히 놀려 식탁 위에 호화스러운 저녁을 차린 보라가 웃으며 앉았고, 고운은 보라의 등 뒤로 보이는 정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아지.”

 “강아지? 강아지가 왜 웃기지?”

 “너 닮아서?”

 “내가? 나 개 같아?”

 

 욕인지 모를 말이라 중얼거리며 보라가 제 뺨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고, 고운은 그런 보라의 뺨마저 아까운 기분에 손을 뻗었다. 

 

 “고개를 이렇게, 이렇게 움직이는 거…. 꼭 강아지들 같아서.”

 “아….”

 

 얼떨결에 꼭 잡힌 손. 보라는 손을 슬그머니 내렸고, 고운은 못다 한 말을 이었다. 

 

 “귀여워.”

 

 보라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뺨을 한 대 더 쳐보려 손을 움직였고, 고운은 그런 보라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주며 말했다. 

 

 “너 떡볶이 좋아하잖아. 오뎅도 샀고, 튀김도 사 왔어.”

 “오? 이제 주문 좀 하네?”

 

 너스레를 떨며 붉은 양념이 묻은 떡을 하나 집어 든 보라가 찰진 떡을 입안에서 뭉개며 미소 지었고, 고운은 그런 보라를 보며 따라 하듯 음식을 입에 넣었다. 조용한 식사였다. 음식을 씹고, 삼키는 작은 소음들만 들어찬 식탁에서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부지런히 입을 놀린 보라는 젓가락을 내려둔 채 물을 마셨고, 고운은 이제 식사를 마친 건가, 보라의 눈치를 살폈다. 

 

 “은근히 눈치 본단 말이지?”

 

 속을 들킨 기분에 사레들린 고운이 콜록거리자. 보라는 고운에게 물잔을 밀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등을 느리게 쓸어내려 주며, 고운이 딸꾹질하게 되는 말을 꺼냈다. 

 

 “그래서 좋아한다는 말은 언제 할 거야?”

 

 장난스레 물었지만, 진지했다. 그런 보라의 태도에 고운은 딸꾹거렸고, 보라는 고운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얼른 딸꾹질이 멎기를 바라는데, 횡격막의 떨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덩달아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기분에 자리에서 일어난 고운은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에 몸이 굳었다. 

 

 이 시간에 집에 올 사람이 있던가?


 고운은 현관 쪽에 시선을 고정했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상당히 거친 발소리가 이어졌다. 구두 굽이 바닥의 타일에 부딪히는 소리. 고운의 아버지였다. 고운은 바로 뒤에 선 보라의 손목을 끌어 제 뒤에 감추듯 세웠다. 코를 벌름거리며 들어온 아버지가 식탁 위에 비싼 접시가 꺼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위에 어지러이 놓인 먹다 만 음식에 인상을 찌푸렸다.

 

 “뭘 먹은 거야?”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감히 귀한 딸의 입에 길거리 음식이 들어갔다는 사실에 치를 떤 것이다. 보라는 엉거주춤 인사를 했고, 고운의 아버지는 딸과 어울리지 않는 상황들이 벌어진 데는 저 아이가 한몫했겠다고 판단했다. 

 

 “고운이 친구니?”

 “네…. 저는 고운이 학교 친구. 연보라입니다. 안녕하세요?”

 

 고운에게 잡힌 손목을 풀어내고, 어릴 적 바른 생활로 배운 예절에 따라 인사를 한 보라가 마주한 얼굴은…. 고운과 닮았지만, 묘하게 매서운 인상의 중년이었다. 

 

 “같은 반이야?”

 “아…. 아니요. 고운이는 이과고, 저는 문과….”

 “일 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

 “아…. 저희는 연극부….”

 

 보라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잘라내듯 묻는 말들이 모두 잘 벼른 가위 같았다. 뚝뚝 끊기고 마는 대화가 답답해진 고운은 보라를 다시 뒤에 숨기며 말했다. 

 

 “먹은 거 치울 거예요.”

 

 애초에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다. 

 

 “하…. 다른 사람 집에 식사 때까지 자리하는 거 결례다.”

 

 가르치는 말투에 고운은 눈에 힘을 주었고, 보라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연신 죄송하다 사과했다. 고운은 아버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제 방으로 보라를 끌고 들어왔다. 보라는 쾅 닫히는 방문에 놀라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땀이 채 마르지 않은 옷을 주섬주섬 주워들었다. 

 

 “아… 미안. 나 때문에 혼나는 거지? 내가 눈치가 없었어.”

 “보라야.”

 “옷은…. 이거 갈아입고 갈게.”

 

 고운은 아버지에게 대들지 못했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화를 삭이고 있는데…. 하필이면 보라가 있었을 뿐이다.

 

 “야, 거기서 묻는 대로 답을 하냐?”

 “어? 그러면…. 어른이 물어보시는데….”

 “우리 아빠가 연극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미안.”

 

 괜히 화를 낸 것이 미안하면서도, 그 상황에서 보라를 감싸주지 못한 자신이 미워졌다. 고운은 다시금 온 집안의 벽이 자신에게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잔뜩 위축되어 옷을 갈아입을 공간을 찾느라 눈알만 굴리는 보라도 꼴 보기 싫었다. 

 

 “야. 그냥 벗어!”

 

 답답한 마음에 손길이 거칠었고, 보라가 입은 반소매 티셔츠를 벗겨내려던 고운의 손톱이 보라의 살갗을 긁었다. 

 

 “아파….”

 “그냥 입고 가던가.”

 

 미안하다는 말이 왜 나오지 못하는 걸까? 고운은 미안한 일투성이인 지금을 ‘미안해’라는 한마디로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무례한 아버지와, 이를 방관한 자신. 그러고는 화도 제대로 다스릴 줄 몰라 보라에게 풀어버리는 자신의 옹졸한 마음마저 모두 미안했다. 하필 대접한다고 사 온 음식이 탐탁지 못한 음식이었던 것도, 보라가 제 옷을 벗으며 입는 땀에 젖은 옷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라는 입을 꾹 다문 채 입술만 내밀며 옷을 벗었고, 발목까지 오는 바지를 벗는 순간 고운은 보라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냥 입고 가라고.”

 

 그러고는 일 분도 안 되어 이를 자책했다. 

 

 “어…. 그러면 빨아서 줄게.”

 

 어색하게 웃은 보라는 고운이 내어준 티셔츠와 자신이 입고 온 바지를 품에 안았고, 이런 모습마저 눈에 거슬렸기에 고운은 한쪽에 화장품이 담긴 채 있던 종이가방을 끌고 왔다. 속에 든 것을 침대 위에 쏟아붓고는 보라의 품에 안긴 옷을 그 안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었다. 종이가방을 품에 안은 보라를 고운은 방 밖으로 몰았다.

 

 “음…. 상은 못 치우고 가서 미안.”

 

 방에서 나와 비어있는 거실과 식탁이 놓인 주방을 둘러보던 보라가 말했고, 고운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답답했다. 이곳을 겹겹이 둘러싼 벽 너머 안방이나 서재에 있을 아버지 존재가 그 공간을 부수고 나와 거실을 압도하는 기분이었다. 

 

 “아버지께 인사드리고….”

 

 그래서 나가지 않고 머뭇거리는 보라의 등을 떠밀었다. 

 

 “그냥 가.”

 “이건 또 예의가 아니지.”

 

 지금, 애써 웃으며 말하는 보라가 못마땅했다. 

 

 “가.”

 

 싸늘하게 말하며 현관까지 보라를 밀어낸 고운은 현관문을 닫자마자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화장품이 어지러이 올려진 이불 위에 엎어지며, 몸에 걸친 옷을 벗어 던지고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흥건하게 흘렸던 땀도, 끈덕지게 달라붙는 더러운 기분만큼 불쾌하지 않았다. 멎은 줄 알았던 딸꾹질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고운은 통화 대신 메시지를 택했는데…. 미안하다는 말을 누르다 말고, 휴대전화를 베개 위쪽으로 던져두고 눈을 감았다. 

 

 사과나 고백은 조금만 미루기로 했다.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숨 막히게 답답했기에 어디로든 피하고 싶었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고, 늦여름의 태양은 이제 안녕을 고하듯 더욱 붉게 타고 있었다. 

 





GL 차곡차곡 담는 중 / e-Book: ‘밤과 밤’, ‘친구 사이에’, ‘첫사랑’, ‘사랑이 스미는 중’, ‘옆에 누워요’, ‘물 만난 언니’ / 포스타입 오리지널: ‘옆집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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