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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거지 같은 섬에 두 번씩이나 버려지다니




얼탱이 없다는 듯 잠시 숨을 고른 신은 열심히 몸을 풀고 있는 내게 자꾸만 말을 걸었다.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딨냐고. 이마크를 좋아하는 거 아니였냐고. 기껏 좋은 기회가 찾아왔는데, 이걸 이렇게 발로 뻥 차버릴 거냐고. 나는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신의 목소리에도 엿이나 까 잡수라는 듯한 표정으로 귀나 후비적거렸다. 존나 대한민국 입시 두 번이나 겪게 한 천하의 망할 놈이 어디서 관대한 척이냐. 마음 같아선 신 불러내서 뒤통수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어차피 형체도 없는 놈 백날 천날 불러 봤자 안 나올 게 뻔하니. 아까부터 찡찡대는 신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책상에 앉았다.




" 와, 김여주 미친놈. "




존나 이런 취향이었냐. 책상에 늘어져 있는 깜찍한 필기 도구와 더불어 핑크색으로 도배된 공책들을 바라보며 질색 팔색을 했다. 내가 아무리 관종이었다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니냐고. 키티 공책과 미키마우스 볼펜을 들어 올리며 창백하게 질린 낯을 해 보였다. 나 왜 (keep your head down) 이딴 거 모으고 다녔지? 실제로 나는 핑크나 빨강처럼 사람들 눈에 확 띄는 색들을 별로 안 좋아했다. 오죽하면 같은 직장에 다니던 동료들이 너는 무슨 무채색 인간이냐며 고개를 저었겠는가.


하루는 내 옆자리에 알록달록한 니트를 입은 동료가 앉아 있었는데, 나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와 그 동료를 보자마자 그런 농담을 했었다. 세상에, 민지 씨가 여주 씨 색을 전부 다 가져가버렸네. 여주 씨 색을 민지 씨가 다 가져갔네. 나는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들으며 억지로 하하 웃어 보였다. 존나 그런 식으로 사람 꼽 주지 말라고요.




" 내가 이걸 왜 가지고 있었더라… "




핑크 공주♡가 왔다 간 것만 같은 책상 꼬라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취향이 성인이 되자마자 급격하게 바뀐 건 아닐 테니, 뭔가 계기가 있어서 이런 걸 샀을 텐데. 한껏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빠졌다. 알록달록한 공책, 한눈에 봐도 관종이라는 게 티 나는 것만 같은 필기도구들, 거기다 다른 색들과는 달리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핑크색까지. 그렇게 죄 없는 핑크색 물건들을 노려보며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을까. 나는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마크의 모습을 떠올리며 두 눈을 크게 떠 보였다.




" 아! "




이거 이마크 때문에 산 거였지!


존나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과학자의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학기 도중에 이마크랑 얘기를 할 때 이마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고등학교 1학년 초반. 나는 마크가 우리 반으로 전학 온 것이 너무나도 기뻤던 나머지, 존나 브레이크 고장난 8톤 트럭마냥 이마크에게 질문 공세를 퍼 부었었다. 키는 몇이냐, 좋아하는 옷 스타일은 뭐냐, 어디서 왔냐, 이상형이 뭐냐 등등. 이마크는 그때 나 말고도 다른 아이들에게도 둘러 쌓여 있었던지라 정신이 꽤나 없어 보였는데, 이마크는 그 와중에도 내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줬었다.




" 나는 좀 밝은 색 좋아해. 한눈에 들어오는 색. "

" 헐, 진짜? 예를 들어? "

" 어… 핑크색 아니면 빨간색? "




그때 이마크의 대답을 들은 나는 뭐에 홀린 사람마냥 아트박스로 달려가 온갖 핑크색 물건들을 사제꼈었다. 핑크색 필통부터 시작해서 아기자기한 키링이 달려 있는 볼펜, 요란스럽기 그지없는 공책까지. 이제 와서 보면 돈 주고 사기도 아까운 디자인의 물건들이었다. 이마크 처돌이였던 그때도 사면서 고민 좀 했었는데, 정신 나이가 24살인 지금은…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지. 이딴 거 공짜로 준다고 해도 안 쓴다. 몰려오는 헛구역질을 참으며 책꽂이에 빽빽하게 꽂아져 있던 핑크색 공책들을 모조리 빼냈다. 갖다 버리는 김에 필통이랑 필기 도구들도 다 갖다 버리고.




- 그걸 왜 다 버려? 이마크가 좋아하던 것들이잖아.

" 남 취향에 맞추느라 내 취향 묵살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하거든요. 난 지금 이거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으니까, 쓸데없는 참견 할 거면 가서 잠이나 주무세요. "

- 참나. 그거 다 버리면 학교는 어떻게 가게?

" 내가 무슨 거지도 아니고. 싹 다 새로 살 돈 쯤은 있거든요? 내가 통장에 모아 뒀던 돈은 그대로 두셨죠? 그것까지 과거로 돌려 보낸 거면 진짜 죽여 버린다. "

- 양심에 찔려서 그건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것까지 없애 버릴 걸 그랬다.

" 너 신 같은 거 아니라 그냥 사탄 새끼지? "




직장인의 피 땀 눈물이 담긴 돈을 한순간에 없애 버릴 생각을 하다니. 공포에 질린 얼굴로 허공을 바라봤다. 대한민국 입시 한 번 더 겪는 것보다 모아뒀던 돈 없어지는 게 더 무서워. 그렇게 신과 의미 없는 티키타카를 주고받으며 책상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빼내고 있었을까. 조심스럽게 내 방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 주말이라 놀러왔어, 여주야. 지금 뭐 하고 있어? "

" 아, 오빠. 잘 왔다. 나 이거 갖다 버릴 건데, 같이 좀 들어 줘요. 혼자 들기엔 너무 무거워서. "

" 응? 그거 여주가 아끼는 것들 아니었어? 갑자기 왜? "

" 그냥. 취향이 좀 바뀌어서. "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재현 오빠를 향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재현 오빠. 우리 옆집에 살고 있는 사촌 오빠였다. 옛날엔 재현 오빠랑 곧잘 놀았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이마크한테 빠져서 사느라 재현 오빠를 신경 못 써줬었지. 맨날 서운하다고 문자 오고, 친구들이랑 노느라 자기 못 놀아주는 거면 친구들끼리라도 재밌게 놀라며 치킨 기프티콘까지 보내 주던 오빠였는데…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서 그런가, 괜스레 재현 오빠한테 미안해졌다. 내가 성인이 된 이후로는 군대 갔다오랴 회사 일에 매진하랴 나한테 연락 한 번 못 할 만큼 바빠진 오빠였는데.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신경 좀 써줄걸. 두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오빠를 바라봤다. 재현 오빠는 여전히 나를 애정 넘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여주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평소 같았으면 나랑 안 논다고 빨리 집으로 보냈을 텐데. "

" 그냥, 정신 좀 차린 거지. 내가 우리 오빠 안 챙기면 누굴 챙겨? "

" 세상에. 나 감동 받아도 되는 거야? "




재현 오빠는 잔뜩 신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이런 별볼 일 없는 말에도 저렇게나 해맑게 웃는 오빠인데. 과거의 김여주… 죽어라, 죽어! 들뜬 얼굴의 재현 오빠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오빠, 나랑 이거 버리고 난 다음에 어디 카페라도 들어 가서 얘기하자. 아니면 오빠 좋아하는 피시방 가도 되고. 재현 오빠는 내 데이트 신청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주가 나가고 싶다면 나가야지! 재현 오빠는 내 밑에 늘어져 있던 봉투를 들어 보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해, 여주랑 오랜만에 나가서 노는 건데. 옷을 너무 대충 입고 왔네. 나는 별것도 아닌 일에 심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재현 오빠를 향해 사탕 발린 말을 잔뜩 내뱉었다.




" 옷이 뭐가 문제야. 오빠는 얼굴이 잘생겨서 다 괜찮아. 쌀포대 옷도 오빠가 입으면 간지 그 자체일 듯. "

" 정말? 하긴, 옷은 안 갈아 입는 게 더 낫겠다. 여주랑 커플 티 같고. "




자신의 옷과 내 옷을 번갈아서 쳐다보고 있는 재현 오빠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 오빠가 입고 있는 검은색 후드티는 나와 같은 브랜드의 후드티였다. 게다가 밑에 입고 있는 트레이닝 바지도 똑같은 아디다스 바지였으니. 나는 재현 오빠라면 뭔들 안 좋겠어~ 하는 말을 추가로 얹으며 재현 오빠의 팔에 내 팔을 끼워 넣었다. 


잔뜩 신난 얼굴의 재현 오빠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뭔가 첫 시작부터 느낌이 좋은데. 이렇게 하나 둘 바꿔 나가면 되는 건가. 재현 오빠와 함께 나온 밖은 눈부신 햇살로 가득 차 있었다. 날씨를 보니 한 4월 말이나 5월 쯤 되어 보이네. 이 정도면 완벽하지.




" 오빠. 나랑 오늘 저녁까지 같이 있다 들어갈까? 엄마 오면 우리 집 와서 밥도 먹어. "

" 나야 좋지. 엄청 좋지. 여주가 하고 싶은 거 다 해! "




해맑게 웃어 보인 재현 오빠가 손에 든 봉지를 가차없이 던져 버리며 나를 이끌었다. 봉투 안에 든 괴상망측한 핑크색 물건들이 바닥에 널부러졌다. 옛날 추억이 담겨 있는 물건이라 좀 아깝긴 했어도, 이마크와 엮이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상 이마크를 연상 시킬 수 있는 물건들은 모조리 버리는 편이 더 나았다. 저거 사느라 일주일 용돈 전부 다 탕진했던 기억이 나네. 쓸데없이 비싼 걸로만 골라가지고. 바닥에 처참하게 버려져 있는 물건들을 바라보다, 이내 후련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미련 따위 남겨 봤자 사치지.


재현 오빠와 함께 나온 시내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나와본 시내라서 그런지 자꾸만 마음이 들떴다. 성인 되고 나서는 맨날 술집만 드나드느라 이런 곳에 와 볼 시간도 없었는데. 옛날 학창 시절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 여주야, 이거 한 번만 써 주면 안 돼? "

" 오빠… 설마 그런 취향이야? "

"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여주 이거 쓴 모습이 너무 보고 싶어서… "




재현 오빠가 토끼 모자를 든 채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재현 오빠가 집어든 토끼 모자는 한창 SNS에서 유행하던 모자였다. 그 왜, 그거 있잖아. 버튼 누르면 토끼 귀 움직이는 거. 나는 풀이 죽은 재현 오빠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모자를 뒤집어 썼다. 재현 오빠는 내가 모자를 쓰자마자 잔뜩 신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오빠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또 안 쓸 수는 없지. 나는 1초에 사진 100장 씩 찍어대며 연사 갈기고 있는 재현 오빠를 향해 토끼 귀를 쫑긋 세워 보였다. 허억…! 잠시 숨을 멈춘 재현 오빠는 귀엽다는 말을 남발하며 계속해서 사진을 찍어댔다. 소리를 들어 보면 동영상까지 찍은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팬서비스 차원으로 재현 오빠를 향해 손 하트까지 해 보였다. 뒤로 넘어갈 정도로 좋아하는 재현 오빠를 보고 있자니, 정신 연령 24살 처먹고도 온갖 애교스러운 행동들이 곧잘 나왔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시내 한복판에서 재현 오빠와 함께 커플 분위기를 뽐내며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을 때. 재현 오빠를 향해 손 하트를 남발하며 깜찍 발랄한 토끼 모자 재주를 부리고 있었을 때.




" … "


" … 저게 뭔… "




시내에 나와 있던 이마크와 이동혁이, 나와 재현 오빠를 바라보고 있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재현 오빠와 신명나게 데이트를 갈기고 집에 돌아온 날. 하루 종일 웃는 얼굴로 돌아다니던 재현 오빠는 우리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돌아갔다. 내 옆자리에 떡하니 붙어선 내 앞으로 반찬을 들이미는 재현 오빠의 행동에, 우리 엄마는 기가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사촌 지간이면 뭐 해. 여주만 자기 사촌이고, 나는 자기 사촌도 아니라 이거지? 엄마는 재현 오빠에게 삐쳤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재현 오빠는 잔뜩 삐친 듯 보이는 우리 엄마의 반응 따위 가볍게 스루했다. 아무리 봐도 재현 오빠는 오랜만에 받아본 내 관심에 반쯤 미쳐있는 듯싶었다. 엄마, 미안. 재현 오빠가 내 빠순이라서. 나는 툴툴대는 엄마에게 속으로나마 미안한 마음을 표했다.


저녁밥을 먹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우며 세상 행복한 얼굴로 실실 웃어댔다. 신 최고. 직장인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준 신 최고. 오늘 날씨를 보아하니 4월 말이나 5월쯤인 것 같고. 핑크색 물건이 존나게 많은 걸 보니, 이마크가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시점 같았다. 세상에 이런 기가 막힌 타이밍이 다 있나. 나는 이제 이마크한테 관심 싹 다 떼어 내고, 내 할 일이나 하면서 이마크랑 엮일 거리들을 최대한 안 만들면 된다.


그렇게 헤실헤실 웃는 낯짝으로 교복 정리를 하고 있었을까. 나는 내 눈에 띈 노란색 명찰을 바라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 …? 이게 뭔…? "




그렇다. 나는 아주 좆 된 것이다.


내 손에 잡힌 노란색 명찰을 바라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노란색 명찰은 2학년 애들이 차고 다니는 명찰이었다. 1학년은 파란색, 2학년은 노란색, 3학년은 주황색.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내 명찰을 내려다봤다. 김여주 세 글자가 정갈하게 박혀 있는 내 명찰은 명백한 노란 색을 띄고 있었다. 두 눈을 10분 간 비벼 봐도 내 눈에 보이는 건 노란색 명찰이 맞았다. 아니 뭐 이딴 개 씨발 같은 경우가… 내가 한참 동안이나 내 명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 어디서 자빠져 자다가 온 건지 이제서야 목소리를 드러낸 신이 꼬시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 내가 너 그렇게 행복 회로 돌리고 있을 때부터 알아 봤다. 나 같으면 교복에 달린 명찰 먼저 확인해 봤을 텐데.

" 아니 진심 미친놈인가? 과거로 돌려 보내줄 거면 흑역사 생성하기 전인 1학년으로 돌려보내 주던가! 2학년이 말이 돼?! 내가 1년 동안 이마크한테 스토커짓 한 건 어떡할 건데! "

-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그냥 이쯤으로 되돌려 놔야 재밌을 것 같았거든.

" 이딴 시점에 떨어뜨려 놓고 이마크랑 잘 되길 바란다니. 이 새끼 진짜 사탄 맞나 봐… "




충격 먹었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신은 아연질색한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웃느라 바빴다. 웃다가 죽은 신은 없나… 이 새끼가 최초면 좋겠는데. 노란색 명찰을 손에 쥔 채 침대로 다이빙했다. 지긋지긋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이마크와, 진절머리 난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볼 이동혁, 박지성이 벌써부터 상상됐다. 차라리 죽을래… 고등학교 2학년으로 돌아갈 바엔 그냥 직장인 하겠다고… 회색 베개에 머리를 박으며 속으로 엉엉 울었다.


하지만 이 망할 놈의 신은 나를 다시 직장인으로 되돌려 줄 생각도 없어 보였고, 그냥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즐겨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즐기자… 씨팔 뭐 어떻게든 되겠지…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이불을 뒤집어 썼다. 시간은 여전히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





와… 존나 즐거운 등교 시간이다…


10년 늙은 듯한 얼굴로 주섬주섬 교복을 껴입었다. 오랜만에 입어 보는 교복에 설렘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이마크와 이동혁, 박지성의 모습을 떠올리며 좆같다는 얼굴로 두 눈만 질끈 감았다. 이 모든 세상이… 저만 두고 몰래 카메라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침 밥이라도 먹고 가라며 걱정 어린 말을 내뱉는 엄마를 향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 오늘 아침밥 먹으면 학교 가자마자 체할 것 같아서… (어차피 후배들한테 눈칫밥 먹느라 배부를 듯…) 뒷말을 삼키며 엄마에게 대충 손을 흔들었다. 집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랜만에 걸어 보는 등굣길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했다. 물론 여전히 좆같다는 뜻. 직장인 때는 차 타고 출근하는 게 제일 싫었는데… 고딩이 돼도 달라지는 건 없구나… 걸어서 학교 가는 게 왜 이렇게 싫지. 환멸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발을 직직 끌었다. 누가 보면 도축장으로 끌려 가는 돼지와도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 … "




학교에 가서는 그 마음이 더 배가 되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내 쪽을 바라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이마크의 행동에, 나는 아침부터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엔 이마크가 내 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이마크는 그냥 나 온 게 짜증 나서 내 쪽을 본 거였구나… 아니 씨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 지금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렇게 싫어할 이유는 뭐냐고요. 나는 얼탱이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이마크 쪽을 바라보다가도, 이내 속으로 생각했다.


마크가 전화 번호 안 줬다고 친구한테 졸라서 마크 전화 번호 멋대로 얻어가고. 마크 얼굴 박힌 학교 홍보물들 전부 다 강탈해서 나 혼자만 갖고 있고. 마크 따라 동아리 들어가서 동아리 분위기 개판 만들어 놓고. 이마크 따라 학습 심화반 된 주제에 이마크 존나 귀찮게 해서 마크 성적 떨어뜨리고. 마크 있는 곳마다 따라가서 마크 불편하게 만들고.


음…




" 존나 좆같겠다… "




아무것도 안 해도 싫어하는 거 인정. 뭐라 할 말이 없네.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내 스토커와도 같은 짓을 1년 동안이나 겪었을 이마크는 지금 내게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살갑게 반응해 줬으면 나야말로 이마크를 미쳤냐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겠지. 그런 짓을 당하고도 나한테 살갑게 대해 주고 싶니, 하면서. 마크와 가깝게 붙어 있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곳은 내 자리가 맞았다. 제비뽑기로 자리 배치를 정한 날, 이마크와 가깝게 붙어 있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친구와 뽑기 종이를 바꿔치기 했었으니까. 과거의 김여주… 진짜 개똘추가 아닐 수 없다… 몰려오는 창피함에 고개를 숙였다.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마크랑 엮일 거리를 최대한 안 만드는 거니까… 일단 동아리를 나오고, 학습 심화반도 나와야겠다. 어차피 동아리는 공부 핑계 대면서 나오면 될 테고… 학습 심화반은 자기 의지로 들어갔다 나오는 곳이었으니 나간다고 해도 딱히 붙잡을 것 같진 않았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생각했다. 일단 그 동아리부터 나오자. 민폐 끼친 게 미안해서라도… 존나 빛의 속도로 나와야겠다.




" 야, 여주야. 점심 안 먹냐? "

" 나 오늘 동아리실 좀 들러야 해서. 그리고 오늘 배 안 고픔. "

" 웬일이냐? 급식실 가면 잘생긴 애들 많다고 눈 뒤집어 까고 달려가던 놈이. "

" 미친놈아. 흑역사니까 그 얘기 꺼내지 마. "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내 쪽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을 돌려보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이들은 급식실에서 그 난리 친 게 흑역사라고 말하는 나를 바라보며 이 새끼 뭐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학교에 퍼진 내 이미지가 도대체 어떻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냐. 이제 와서라도 흑역사 세탁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 급식실로 향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이마크 없고, 이마크 친구들도 없고. 오케이, 이마크 급식 먹으러 갔나 보네. 나는 이마크가 없다는 걸 눈치 채자마자 재빠르게 동아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아리실은 밥도 안 먹고 춤 추는 애들이 있는 모양인지 벌써부터 불이 켜져 있었다. 어차피 이마크가 없는 이상 이동혁, 박지성도 없을 테니. 나는 한층 편안해진 얼굴로 동아리실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들어가자마자 동아리 나간다고 하는 거야, 여주야. 민폐 끼쳐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그렇게 굳은 결심을 하며 동아리실 문을 잡아챘을까.




" 가지가지 한다. 어차피 춤도 안 출 거면서 이 시간에 동아리실은 왜 왔대? "




등 뒤에서 서늘한 인기척과 더불어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얼굴로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동혁이 보였다. 본인의 영역을 침범 당한 사람처럼 불쾌한 기색을 내비친 이동혁은 짝다리를 짚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옛날엔 이마크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동혁이랑 박지성한테도 빌빌 기었었는데. 쿨한 선배인 척하고 싶어서 반말도 막 하라고 했었고. 이제 와서 보니, 이동혁한테 반말 하라고 했었던 과거의 김여주를 존나 패고 싶었다. 뭐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다 있어. 나는 이동혁의 살벌한 눈빛에 잔뜩 쫄아 있다가도,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6년 전의 김여주였다면, 이동혁한테 뭣도 모르고 사과부터 했겠지만…




" 미… 미… "

" … "

" 미친놈이 얻다 대고 반말이야! "




안타깝게도 정신 연령 24살의 김여주는 직장인 특유의 꼰대 문화를 장착한 뒤였다. 내 말을 들은 이동혁이 얼척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거 뭔가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것 같기도 하고. 벌벌 떨려오는 두 손을 꼭 쥐어잡으며 이동혁을 노려봤다. 시티고 자강두천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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