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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뱀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게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알아. 그런데 나는 네가 변하는 것보다, 매 순간 너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게 더 무서워. 네가 날 잊을 수도 있어도, 그 순간에도 너와 같이 있고 싶어. 그리고 같이 있으므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보고 싶어. 우리 처음 몰래 빠져나갔던 날 기억나?”

인아는 어느새 내 품에 안겨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녀석을 바짝 끌어안으며 정수리에 간질거리는 입맞춤을 해주었다.

“우리 또 하자. 이번엔 몰래 나가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보자고. 뭐, 아직 수능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것만 지나면 시간은 아주 많을 테니까.”

우리는 한참을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가 서서히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내 손안에 담긴 얼굴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먹는 것도 예전만큼 필요 없어졌으니까.”

내 생각을 읽었는지 인아는 야위어진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그런가 보다 했다. 몸이 변해갈수록 인간이었을 때 했던 것들이 조금씩 필요 없어지는 듯했다.

“우리 같이 가자. 네가 뱀이 되어 나를 잊어도 같이 있던 일은 추억처럼 기억에 새겨질 테니까.”

나는 울컥해질 것 같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되면 정말 슬프겠지. 그러나 현재만 생각하기로 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렁그렁한 눈이 나를 오롯이 바라보았다. 그게 벅차서 나는 인아의 입에 내 입술을 조심스럽게 갖다 댔다. 살짝 꾹 누른 말랑한 발간 입술이 슬쩍 비죽 앞으로 나오며 더 해달라 졸랐다. 나는 입술을 맞댄 채 기쁘게 숨결이 섞인 소리를 지어주었다.

봄바람에 꽃잎들이 머리 위에 나풀거리듯 가벼운 입맞춤을 이어갔다. 나는 아쉬운 듯 입술을 떼고 녀석을 한번 꽉 끌어안아 주었다.

으으으 거리며 앓는 소리가 사랑스러웠다. 내 등에 팔을 두른 차가운 감촉이 되려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는 간단히 짐을 챙기고 유유히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까지 우리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우왓! 정말이네?!”

인아의 말에 옷을 살짝 들추고 등허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으, 추워.”

인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 따뜻한 전기장판이 깔린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 모습이 다람쥐 같아서 나는 설핏 웃었다.

인아가 우리 집에 온 지 벌써 두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수능은 2주 전에 끝났고 나는 인아와 함께 자유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엄마한테는 집 공사가 아직 덜 돼서 조금만 더 신세를 져야 할 것 같다고 둘러댔다. 어차피 일하러 나가시는 시간도 길고, 만나는 아저씨와의 일도 잘 진행되는 중이라 엄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셨다.

오히려 내가 혼자 있는 것보다 친구랑 같이 있으니 더 낫다고 생각하셨다. 아마도 인아의 외모가 큰 역할을 한 듯했다. 누가 봐도 착하고 얌전하고 말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할 것 거처럼 생긴, 그러나 몸이 좀 약해 보이는 하얗고 작은 아이를 누가 이상하게 보겠는가. 물론 인아는 이상하지 않다. 남들보다 특별할 뿐이지.

어쨌든 수능이 끝난 고삐 풀린 고3은 이렇게 거의 날마다 인아와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다. 간혹 진영이가 저도 소개해 달라며 재촉하는 것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로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인아는 착실하게 변해갔다. 나는 짐짓 모른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인아와 시간을 보냈지만, 눈에 보이는 변화는 분명 있었다. 지금처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뚜렷이 보이지 않았던 등위에 돋아난 푸른 점들이 어느새 등 전체를 덮어 뱀의 피부처럼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었다.

큰 뱀의 말로는 변화되는 과정이기에 지금은 겉으로 표가 나지만, 스스로 조절이 가능하면 일상에서는 잘 표가 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뭐, 이것도 어디까지나 가정이긴 했지만.

수능이 끝난 11월 이라고 해도 요즘은 한낮에는 그렇게 춥지 않았으나 인아는 꼭 전기장판을 켜주어야 했다. 원래는 지금쯤 동면 준비에 들어가야 하지만, 녀석의 의지와 고집으로 버티는 중이다.

“예쁘네.”

나는 이불 속에 손을 넣어 아까 보았던 푸른 등을 쓰다듬었다. 이불 속에서 스르륵 움직이는 감촉이 간지러웠는지 인아가 몸을 뒤척였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당연한 소리를.”

아, 사랑도 익숙해지면 당연해진다더니. 내가 하도 예쁘네, 귀엽네, 사랑스럽네 해줬더니 이젠 아무렇지 않게 제 입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눈을 마주치지는 못한다. 나는 녀석이 그럴수록 그 작은 품 안에 파고들며 서늘한 몸을 꼭 끌어안았다.

나는 인아의 몸 구석구석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지 으흐흐 하고 웃는 살가운 소리가 예뻤다. 옷을 살짝 들춰 배 위에도 드러난 푸른 물결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소름 돋을 만큼 차가운 기운이 연한 피부를 타고 흘러들어왔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내 애무에 인아도 작은 손을 바삐 움직여 내 몸을 어루만졌다. 우리는 딱 여기까지 서로를 탐했다. 그래도 지킬 건 지키자는 주의였지만, 사실 나는 매번 끈기와 인내로 버티는 중이긴 했다.

간혹 제가 풀어주겠다고 내 바지춤을 잡고 내리려고 할 때면 기겁하고 혼자 화장실로 줄행랑을 치곤 했지만. 인아는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저의 서늘한 손이 불타오르는 내 중심을 잡는다면 그건 풀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욕정만 사납게 불을 지피는 꼴이라는 걸.

어쩌겠는가. 나도 아는 게 없지만, 내가 참아야지. 아무튼, 나는 약간 벼르고 벼른다는 마음으로 내년을 기약했다. 지금처럼 약간 애들 소꿉장난 같은 애무라도 사랑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

 


진영이의 형이 드디어 유럽 배낭여행에 몸을 실었다.

[모든 것이 준비됐다. 그냥 와라. 형 없는 동안 내가 쓰겠다고 함.]

대학 합격 통지서를 이미 받아놓은 진영은 막 나가는 마지막 고3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잠깐. 네가 그럼 인아랑 지낸다고?]

나는 정색하며 되물었다. 아니, 원래 인아 혼자 지내는 거 아니었나? 그래서 내가 같이 있기로 한 거고.

[그럼 어떡하냐, 친구라도 생판 모르는 남한테 준다고 하면 우리 집에선 방값이라도 내라고 할걸? 그냥 내가 혼자 생활해 보고 싶다고 하고, 형 없는 동안 관리해 준다는 명목으로 허락받은 것임. 너도 언제까지 너희 집에 걔를 둘 순 없잖아.]

[거기 방 몇 개야?]

나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뭐, 어차피 한 달 정도 진영이랑 논다 그러고 왔다 갔다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세 개. 근데 하나는 창고 같은 방이라 너 못 쓸 텐데?]

[두 개로도 충분해.]

그러자 잠시 대화가 없던 진영이 얼굴을 붉히는 이모티콘을 마구잡이로 보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쯔쯔. 암튼, 이따 보자.]

킬킬거리며 대화를 마친 진영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나는 무심히 달력을 바라보았다. 12월 하고도 15일이 지났다. 인아는 요즘 들어 부쩍 잠이 많이 늘었다. 지금도 맥없이 축 늘어진 채 뜨끈한 방바닥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새근새근 내쉬는 숨소리가 아직은 인간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인아 몰래 이미 큰 뱀을 만나고 왔다. 그녀는 예의 파리하고 덤덤한 얼굴로 풀숲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달이 마지막이 될 겁니다. 해가 바뀌기 전에 다시 데려가야 해요.-


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아로서도 최대한 버티고 있다는 걸 나도 알았다. 녀석이 버티는 대로 가만히 두고 보고 있긴 하지만, 한편으론 내 욕심을 버리고 그냥 보내 줄 걸 그랬나 싶었다.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사락 넘겨주며 잠든 하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그 사람은. 어휴, 말이 통하지 않더군요. 아, 그렇다고 죽인 건 아니에요. 저도 살생은 좋아하지 않아서. 하도 야차 같은 모습으로 대들길래, 그냥 물어버렸습니다.”

나는 큰 뱀을 경악에 찬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설마 물었다는 게 그 '물었다'는 건가.

“그래요. '그거' 맞습니다. 아주 야무지게 물어주었지요.”

뱀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내 물음에 다시 답했다. 그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까지 으쓱거렸다.

“뭐, 이제 그자도 찍소리 못하고 뱀이 되겠죠. 그런 인간은 차라리 뱀이 되는 게 나아요. 제가 물었으니 결국 제가 데리고 가야겠지만.”

나는 다시 한번 놀라서 되물었다.

“데리고 가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인간이었을 적의 기억을 잃고 뱀이 될 겁니다. 저만 물은 게 아니라 다른 뱀들도 같이 물어버릴 거거든요. 다행히 동면이 얼마 남지 않아서 금방 해치울 수 있을 거 같아요.”

그 말을 하는 얼굴에 진짜 뱀 같은 표독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어, 원래 뱀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만큼 어울렸다는 소리다.

“이 일이 끝나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저 대신 제 동생이 그 아이를 보살펴 줄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

 

나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말하는 보살핌은 인아를 위한 먹이였다. 실제 일반 뱀들과는 다르게 인아는 별로 먹는 게 없었다. 밥도 그렇다고 뱀이 먹을 만한 음식도 잘 먹지 않았다.

다만, 전에 가 보았던 세계에서 나오는 열매만은 먹을 수 있었다. 생긴 건 석류 같은데 맛은 달콤 쌉싸름하다고 했다. 완전한 인간인 나는 먹을 수 없었고, 특이하게 인아만 먹을 수 있는 거라고 했었다.

지금은 그것마저도 잘 먹지 않았지만, 어쨌든 뱀들은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으응.”

녀석이 뒤척이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잠든 아기를 보듯 바라보다 뒤척이느라 드러난 허연 이마에 촉 하고 입을 맞췄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나래=사도화 쓰고 싶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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