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허구적 상상에서 비롯된 이야기입니다.

*서양 동양, 뭐할 것 없이 제가 아는 모든 지식을 때려 넣은 이야기입니다.

*억지스러운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애수(哀愁) 가슴에 스며드는 슬픈 근심

 

 

 







 




‘헉헉헉……….’

 

 

애처로운 뜀박질 소리가 궁 안에 울려 퍼졌다. 지독한 어둠이 시리도록 내려앉았다. 모든 생명이 잠든 순간, 누구보다 절박하게 뛰어온 이는 강명전 앞에 멈춰섰다. 손을 부르르 떠는 것이 여간 긴장한 모양이었다.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 세상의 빛깔이라곤 온통 검은색뿐이었다. 그가 주변을 둘러봤다.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이윽고 오직 세상에 하나뿐인 빛이 드러났다. 제한적인 시야 속에 한 인영이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새벽 특유의 스산하고 축축한 공기가 피부에 스며들었다. 산인지 하늘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고,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이 중간인지 모서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느릿한 음성이 살금살금 그에게 다가왔다.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전하는, 주상 전하는 괜찮으신 겁니까?”

“왜 그런 걸 묻는 것이지요?”
“괜찮다면 왜 황관님이 여기 계십니까?”

“무엇을 보신 겝니까?”



율의 다그침에 지민이 주저앉았다. 찬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떠는 이유는 비단 추워서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두려움에 좀먹힌 상태였다. 율이 잔뜩 화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엇을 봤냐고 묻지 않습니까.”

 


지민이 원망 섞인 얼굴로 율을 바라봤다.

 

 

“그럼, 무엇이……. 변합니까?”

 

 

새벽의 여명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양력 121년경, 수국의 제 6대 왕 전정렬이 서거하나니 수국의 모든 백성이 땅에 고개를 묻고 비통함에 빠졌으며, 하늘이 노하여 3일간 비가 내린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밤에는 비가 그쳐 새하얀 달빛이 수국을 비췄으니, 달의 총애를 받는다는 소문이 항간에 돌 정도였다. 이후 모든 국사(國事)가 중지되고 7일간 혼의 넋을 기리니, 수국의 제 7대 왕 전정국의 즉위였다. 

- 민상욱의 「수지설화기(水地說話記)」 中

 

 

 

 

고귀한 생명이 땅의 품으로 돌아갔다. 훌륭했던 성군이 *타계(他界)하매 온 나라가 절망에 빠져들었다. 무엇보다도 항상 건강한 모습으로 자애로운 미소를 베풀고 다니던 선왕이었기에 궁 안의 시종들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거짓부렁일지 진심으로 나온 충성심일지 모르나, 관료들은 고개를 조아리고 하늘을 향해 좌절감을 표출했다.

 

지민은 그날의 정국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차갑게 식어버린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눈물조차 나오지 않아 소리만 질러댔다. 귀를 찢듯 나오는 그의 괴성에, 모두가 비참함에 통곡했다. 관 속에 뉘여 편히 눈을 감은 선대왕을 보며 정국은 관의 뚜껑을 닫지 못했다. 이제 관을 닫아야 한다는 어의의 말에, 정국은 그를 핏발이 서도록 노려봤다. 안다. 알고 있다. 알면서도 할 수 없는 행동이 당연히 있는 법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악역을 자처해야 했다.

 

두연정이 관을 닫을 때까지도, 정국은 아버지의 안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못했다는 표현에 가까울 정도로 그는 깊이 낙담한 상태였다. 아버지의 혼을 기리기 위해 정국은 한연(翰蓮)으로 갈 행차를 준비했다. 평소 아버지가 가장 사랑했던 장소였다. 정국이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을 꼽으라면 한연에서의 꽃놀이가 전부일 정도로.

 

왕궁의 주인이 모두 떠나고 삭막해진 수원궁은 금방이라도 기울어질 듯 위태로웠다.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고, 비라도 내릴 듯 비린내가 흉흉하게 풍겨왔다.

 

 

“언젠지는 몰랐던 겁니까?”

 

 

율은 말은 하고 있었으나 절대 지민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광활하고 높디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물음인지, 추궁인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지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릅니다. 제가 본 게 미래인지도 과거인지도 현재였는 지도 모릅니다.”

“시기만 알았어도, 시기라도 알았다면…….”


 

지민이 입술을 세게 물었다. 핏방울이라도 맺힐 기세였다. 고통보다도 분노가 앞서 감각기관이 알아차리질 못했다. 며칠간 고뇌로 인해 버석하게 마른 입술 사이에서 피가 동그랗게 맺혔다.

 

 

“황관님은 처음부터 모든 걸 잘하셨나 봅니다.”

“……….”

“처음 본 미래를 어떻게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일 수 있사옵니까?”

 

 

지민이 등을 돌렸다.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쇠약해진 몸뚱이와, 나약한 마음은 심히 흔들리고 있었다. 월령궁에서 한동안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첫째는 율이 미워서였고, 둘째는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었다. 정국은 7일은 지나야 돌아올 것이다.

 

정국과 지민이 행복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굳이 새어보자면, 열 손가락이 조금 넘을까 싶었다.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본 것이 머나먼 미래라 생각했다. 정국이 슬픈 얼굴을 하는 게 보기 싫었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았다. 만약 말을 했다면 정국이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곁에 더 있을 수 있었을까? 저렇게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그 짧은 시간 동안 자꾸만 강명전으로 향하는 지민을, 정국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자꾸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냐면서 툴툴대기에 바빴다. 사실을 말할 수 없던 지민은, 그저 웃으며 정국을 강명전으로 데리고 갔다. 정렬은 마치 모든 걸 알기라도 하는 듯 지민의 손을 잡으며 정국을 부탁한다는 소리를 하곤 했다. 그때 주상 전하의 마음을 더 헤아려야 했을까.

 

그때마다 선왕은, 꼭 제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아스라이 흩어지는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담으며 지민은 침상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선연한 달빛이, 월령궁 안으로 눈부시게 침범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것들은 자유로운 몸짓을 표했다. 지민을 농락하듯 그들의 발자취를 흩뿌려 놓고 사라지는 것도 잠시, 다시 나타나 지민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움직이는 그들의 행위에 지민이 넋을 놓고 바라봤다.

 

달빛이라 칭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자신을 서서히 점령하려는 이 굼뜬 움직임에 지민의 몸이 잔뜩 굳었다. 환한 빛이 제 몸을 집어삼켰다.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암흑이었다.

 

 

 

 

 






*








 

 

 

“마마! 일어나셨습니까!”

 

 

눈을 뜨니 온통 얼굴이 눈물범벅, 콧물 범벅인 나인의 모습이 보였다. 왜 제 앞에서 이리도 구슬프게 우는 것인지 지민은 도통 이해할 수 없어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 얼굴에 수척해지고 눈 밑에 검은 그림자를 달고 있었다. 며칠 동안 혹사당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마마, 이틀이 지나도록 일어나질 않으셨습니다….”

“……내가?”

“예……. 의원을 불러도 알 수 없다는 대답밖에 없고,…….”

 

 

궁에서 가장 오래 일했고, 매번 침착하기 그지없는 한상궁마저 우는 소리를 냈다. 지민이 몹시 당황하며 제 얼굴을 연신 쓸어내렸다.

 

 

“난, 난 괜찮네…. 고생들 많이 했지? 가서 쉬도록 하게.”

 

아니옵니다. 마마-. 제 주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인 나인들을 달래주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모른다. 그저 달빛을 보다가 잠이 든 것뿐인데, 아 정신을 잃었던 것도 같긴 하다. 어찌 됐든 연유를 알 수 없는 지난 이틀간의 행적에 지민은 나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달빛을 보고 기절했다고 말하면 정신병자 취급밖에 더 될까. 겨우겨우 그들을 진정시킨 지민은,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꿈을 현실이라고 믿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지민은 주인이 비어있는 호정전으로 걸어갔다. 이유는 없었다. 월령궁을 벗어나고 싶었고, 다른 이들은 보고 싶지 않았다. 지민이 궁에서 유일하게 기대어 쉴 수 있는 건 오직 정국뿐이었다. 익숙하고도 낯선 호정전엔 정국의 향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지민이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율의 목소리였다. 그가 호정전에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 했다. 지민은 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날렵했던 턱선이 스치면 베일 듯 날카로웠다. 살이 많이 빠졌다.

 

“괜찮습니다.”

“송구합니다. 저번엔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제가 이기적이었습니다.”

“………. 이해는 합니다.”

 

 

지민과 율이 호정전의 마루에 걸터앉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대화가 이뤄지지 않아도, 빗소리가 공백을 메꿔주고 있어 본인들도 딱히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지민은 사색에 잠겼다. 그날 본, 달의 흔적들을 율에게 말하면 과연 율이 믿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지금 말할 상대라곤 율 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율은 총명한 사람이니 제 말을 믿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에게 상한 감정이 풀리는 것과는 별개였다.

 


“제가 쓰러지기 전”

“예?”

“달빛을 보았습니다.”

“……달빛이요?”

“예, 아주 밝은 달빛이었는데….”
“지민 님이 쓰러지신 건 이틀 전 아닙니까?”
“예 헌데 왜….”

“그날은 달이 뜨지 않았습니다.”

 

 

대답이 없었다.

 

 

지민의 온몸이 목석같이 굳었다.

 

 

“제가 본 게 헛것이란 말입니까?”

“하오나, 헛것을 보실 분은 아니란 걸 소인이 알기에….”

“………분명히 달빛이었습니다. 그 달빛이 저를 집어삼키려 하기에…!”

 

 

율이 지민의 옷을 세게 잡아당겼다. 지민이 당황해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막무가내인 그의 행동에 맥없이 끌려갔다. 율은 지민의 옷고름을 풀었다.

 

 

“………하하하…….”

 


지민이 물끄러미 제 쇄골을 바라봤다. 낙인처럼 함께 했던 월아의 표식이 사라지고 없었다. 헛웃음이 입사이로 삐져나왔다. 요 며칠간 벌어지는 기이한 일에 놀랄 힘도 없었다.

 


이게 어찌…….

“무슨 의미일까요.”

“……저라고 알겠습니까.”

 

 

지민이 옷을 여며 입었다. 율이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율은 아직 힘이 없는 지민을 월령궁으로 데려다주고 *서천관(書千關)으로 향했다. 이틀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고대 서적만 뒤졌다. 어떠한 책을 펼쳐도, 어떠한 서적을 보아도, 심지어 고대문자로 적힌 글을 보아도 어디에도 월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달의 아이에 대한 것은 고작 신탁이 다였다. 힘이 빠졌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모욕감이 차올랐다.

 

힘이 빠진 발걸음으로 월령궁을 향해 걸어갔다. 흙바닥을 긁는 소리가 보기 좋게 울렸다. 초승달이 하늘에 떠 있었다. 율은 지금만큼 달의 자태가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이기적일지 몰라도, 수국의 번영을 위해 지민은 반드시 이용해야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은 그 값어치를 매길 수 없다. 지민은 고작 원석이었다. 세공도 할 수 없는, 건들 수도 없는 오히려 건드렸다간 화를 맞게 되는 아주 까다로운 존재였다.

 

 

“고된 노동을 하셨나 봅니다.”

 

 

율이 깜짝 놀라 앞을 바라봤다. 기다란 평상에 지민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항상 맑기만 했던 눈동자에, 왠지 모를 살기가 서려있어 율이 몸을 움찔 떨었다. 꼭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날이 매우 찹니다. 들어가서…….”

“아무것도 못 찾을 겁니다.”

“예……?”

“선인에 대한 기록은 수국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무슨 말을….”

“세자 저하께서 예상보다 일찍 오실 겁니다.”

“………….”

“아마 황혼(黃昏)쯤에 오실 겁니다. 우리가 미리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어찌……”

 


지민이 싱긋 웃었다. 황홀하고 낭만적인 그의 분위기에 율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저 요사스러운 자태는 사람을 홀리기에 적격이었다. 평소 이성적이고 냉철한 성격이 아니었다면 빠르게 뛰는 심장을 분명히 사랑이라고 착각할 일이었다. 사뿐사뿐한 그의 움직임은 마치 기지개를 켜는 야묘(夜貓) 같았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 또한 저의 모습입니다.”

“……….”

“혹여 제 안에 누군가 빙의 했다는 그런 추측은 접어주십시오.”

“………아, 아닙니다.”

 

 

정곡을 찔린 율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다만 땅은 음기가 부족하여…….”

 

 

지민의 눈이 서서히 감기더니 율의 품으로 쓰러졌다. 지민을 가볍게 받은 율은, 그를 평상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난 지민은 두 눈을 끔뻑거리며 율의 눈치를 봤다. 율이 집요하게 지민을 바라봤다. 무언가 해명을 바라는 눈치였지만, 지민에게 해명할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일 황혼 무렵에 *화현문(化現門)에서 만나도록 하지요, 하하하하.”

 

 

어색하기 그지없는 지민의 웃음소리에 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

 

 

 

 

 

 

 

해가 서서히 산 뒤로 모습을 감췄다. 붉은 하늘의 세상을 덧칠했다. 황혼의 색은, 매번 다른 색깔이고 그 경관이 몹시도 고와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칭할만했다. 율과 지민은 화현문 앞에 서서 황혼을 정면으로 보고 있었지만, 왜인지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땅거미가 지고, 밤의 냉기가 바닥을 감쌀 무렵, 말발굽 소리가 수원궁을 가득 메웠다.

 

 

“아하하하.”

 

 

율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닭살이 돋고 한기가 몸에 서리는 것 같았다. 이 사실을 정확히 예측한 지민은 오히려 덤덤하게 정국을 맞이했다. 지민이 먼저 고개를 숙여 정국을 향해 절했다. 율은 튀어나가려던 정신 줄을 겨우 붙잡고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들라.”

 

 

생각외로 빨리 온 것은 정국의 일행이었기 때문에 궁은 이들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오직 지민과 율만이 수원궁의 입구에 서 있었을 뿐이니, 도리어 다른 군사들이 무엇을 알고 둘이 서 있던 건지 의문을 품을 정도였다. 예를 갖추고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일어난 지민에게 정국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정국이 무너지듯 지민에게 안겼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율은 물론, 다른 신하들도 고개를 돌렸다. 공개적인 장소에 왕이 애정을 보이는 행위는 마땅히 눈을 감아주는 것이 예의였다. 지민도 당황해 정국을 밀어내려 했으나, 밀어낼수록 더욱 단단히 감아오는 팔에 저항을 멈추고 정국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사월(娑月)……. 내 정인, 내 하나뿐이 벗…. 나의 가족….”

 

 

정국의 중얼거림에 지민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율이 다른 신하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15살인 소년에게, 왕관의 무게를 벌써부터 짊어지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내관만이 정국의 뒤에 그림자처럼 자리하고 발걸음을 분주히 옮겨 자리에서 사라졌다.

 

 

“형은 어디가면 안돼.”

“나 어디 안 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애정어린 집착에 지민이 팔을 뻗어 정국의 목을 힘껏 껴안았다. 정국의 눈시울이 붉었다. 지난 7일간, 어떻게 해도 아버지의 부재를 실감치 못했던 정국은, 지민의 얼굴을 보자마자 서러움이 가득 몰려온 건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지민이 정국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췄다.

 

 

“이 순간만큼은, 저를 정인으로 봐주십시오.”

 


정국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안 나길래.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훌쩍거림이 커졌다. 목소리가 막혀 밖으로 부드럽게 새어나가지 않았다. 눈을 벅벅 닦는 거친 손길에 행여나 얼굴이 다칠까 걱정돼 지민이 정국의 손을 붙잡고 제 소매로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근데, 근데. 궁에 오니까……. 형이 있으니까 갑자기 긴장도 풀리고….”

“고생했어. 정국아…….”

“……아버지가, 아버지가 이제 없어…….”

 

 

정국이 지민을 더 세게 껴안았다. 정국은 지민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온몸을 결박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몸 이곳저곳이 아려왔지만, 지민은 정국과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젠 실수하지 않을게. 내가 보는 모든 것을 너에게 말할게.

 

비가 그친 것은, 정국이 돌아오고 한 시진이 지난 뒤였다.

 

 

 

 

 

 

 

*

 

 

 

 

 




궁이 모처럼 새로운 분위기에 잔뜩 들떴다. 새로운 왕의 즉위식을 위해, 다들 분주히 움직였다. 수라간에선 고기를 굽는 내가 진동을 하고, 인정전은 초록빛, 남색빛, 자홍빛, 푸른빛의 천들과 장식물들이 너울거리며 한껏 수원궁을 꾸미고 있었다. 둥둥둥- 북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종소리에 새들의 무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태양이 하늘의 정중앙에 떠올랐다. 이윽고 무녀가 여러 가지 장단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하늘에 가까워지는 시간을 앞당기기 위함이라 하였다. 

 

 

“세자 저하 납시오--!!!!!!!!”

 

 

우렁찬 목소리가 수원궁을 뒤흔들었다. 관료들이 고개를 땅바닥에 파묻었다. 여자든, 남자든, 관직이 높든 낮든, 지금 어디에 있든, 모두가 새로운 왕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했다. 호정전에서 걸어나온 정국이,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화포단(華捕壇)을 향해 걸어갔다. 늠름한 그의 신체는, 그 어디에도 기죽지 않겠다는 결심이 새겨져 있었다. 

 

 

“고개를 들라!!”

 


화포단(華捕壇)에 오른 정국이 크게 소리쳤다. 용의 움직임을 형상화한 곤룡포를 입은 정국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어엿한 그의 모습에 지민은 눈물이 찔끔 흐를 정도였다. 미친 듯이 방울을 흔들던 무녀가 움직임을 멈췄다. 

 

정국이 횃불을 들어 하늘을 위한 만찬에 불을 붙였다. 붉게 타오르는 재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뿌연 연기가 하늘을 향해 드높게 올라갔다. 정국이 하늘을 향해 절을 세 번, 백성을 향해 절을 세 번, 관료들을 향해 절을 세 번 했다. 마지막으로 4개의 방향에 술을 흩뿌린 정국이, 마지막 술잔을 들이마셨다. 독하고도 오랫동안 숙성된 술에 정국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숨 막히는 정적에 정국이 밑을 빙 둘러봤다. 수만개의 시선이 그를 향해 있었다. 이제 그는 어리광을 부릴 수 없었다. 정국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오, 신하는 왕의 얼굴이로다. 지금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릴지니, 모두가 예의를 갖추고 나를 따르라!”

“만세 만세 만만세. 주상전하를 뵈옵니다--”

 


지민이 방긋 웃으며 정국을 바라봤다. 모두가 우러러봄에 부끄럼이 없었다. 태양빛이 그를 향해 무수히 쏟아져내렸다. 필시 하늘의 축복이었다. 먹구름이 완전히 물러났다. 언제 비라도 내렸냐는 듯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푸르렀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정국의 곤룡포를 부드럽게 스쳤다. 지민과 눈이 마주친 정국은 티나지 않게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마음껏 먹고 즐기도록 하여라!"



우렁찬 환호소리가 온 수국에 울려퍼졌다. 

 

 

 




 


*서천관(書千關) : 기록을 남기는 사설관(史說關)과 서책을 모아두는 사천관(史天關)을 통칭한다. 사설관은 경비가 삼엄하여 역사를 기록하는 서관 외에는 출입할 수 없으며, 사천관은 유생의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타계(他界) : 인간계를 떠나서 다른 세계로 간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 특히 귀인(貴人)의 죽음을 이르는 말.

*화현문(化現門) : 수원궁의 정문



 

 


닻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